일본 에도시대의 인구는 극히 안정적이었습니다.


막부가 조사를 시작한 1721년에 2600만명, 가장 적을 때에는 2489만명(1792년)였지만 가장 많을 때에도 2720만명(1828년) 정도로 약  2600만명 정도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습니다.


같은시기 조선의 인구가 1300만에서 1800만정도, 아니면 1600만에서 1800만 정도로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 비하면(이마저도 추정치라 정확히는 모름), 전쟁의 혼란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된 에도시대라면 아무리 전근대 국가라도 인구가 펑펑 증가하는게 맞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일본의 인구가 정체되는 원인중 하나로 뽑히는게 바로 마비키(間引), 즉 '솎아내기' 라는 풍습입니다.


코카에시(子返し)라고도 불리는 이 풍습은 한 마디로 일정 수 이상으로 낳은 아이는 인위적으로 살해하여 인구 수를 일정 수로 맞추는 도호쿠나 간토 지방에 주로 있었던 풍습입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데와국(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에서는 매년 1만 6~7천명, 가즈사국(현 치바현 중남부)에서는 매년 3~4만명 정도에 갓난아이가 솎아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큐슈에서는 아이가 다섯이면 둘을 죽이거나 도사에서는 장남과 장녀만을 남기눈 풍습이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7세 이하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신의 아이로 생각되어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게 아니라 그저 신에게 돌려보내는 것, 즉 자신의 아이로 하지 않는다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합리화 했다고도 합니다.


물론 세계 각지 곳곳에서 기근이 벌어지면 영아를 살해하는 풍습은 곳곳에서 있었으며 조선때만 해도 경신대기근 당시 아이를 버리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런 일이 평시에도 일어난 것은 독특한 경우입니다.


이런 풍습이 발생한 이유로는 에도 막부는 사회가 발전하면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고 어느 정도까지 농지 개척이 진행되면 농촌의 인구는 고정되는 것이 가장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사상이 민간에도 점점 퍼져서 이런 풍습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것에서는 당시 일본의 살인적인 세율(수확량의 50% 이상, 당시 조선은 높아도 2-30% 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수마다 매겨지는 인두세 등등을 못이기고 농민들이 입을 줄이기 위해 그런 풍습을 행했다고도 하네요.


어찌 되었든 이러한 풍습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인구는 국력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금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모든 집에 1남 1녀만 있는 마을이 있었다거나 1930년대까지도 홋카이도에서도 일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마비키 풍습이 중지된 이후 2700만명 선이던 일본 인구는 1945년까지 3배 증가하여 7200만명이 됩니다. 물론 근대화로 인한 영아 사망률의 감소등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백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인구가 폭증한 것을 보면 분명 이 풍습 역시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전근대 일본에서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펼친 독특한 풍습인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