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은 의외로 굉장히 철학적인 논의에서부터 시작됨, 포이에르바하가 "신의 부재"자체를 논증적으로 입증한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음,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건 신이 있든 없든 그 존재에 대한 흠송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니...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종교적 사변적 우주 발생론은 동어반복적이다. 우주발생론에서 인간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을 선언하거나 실현한다. 그는 단지 자신이 이미 말한 것을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세계가 기계라면 세계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었다는 것, 즉 기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종교의식은 기계론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는데, 종교의식에서는 세계도 의지 -즉 신의 의지- 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순간적으로, 창조의 순간에만 동의하며. 그 순간 조화는 멈춘다. 기계론자에게는 세상의 創造者*로서의 신만이 필요한 것이다. 일단 창조된 세상은 조물주에게서 등을 돌리고 신 없는 자존을 기뻐한다. 그러나 종교는 세상이 무(無)이며 신에게 의존한다는 영원한 의식 속에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세상을 창조한다. 기계론자에게 있어서 창조는 그를 종교와 묶어주는 마지막 가는 실이다.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현대 진리인 종교 -그 종교에게는 모든 능력과 활동이 신의 능력과 활동이기 때문이다- 는 그에게는 단지 젊음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창조1자에서 조1자가 금지어임?


(중략) 


그러므로 그(종교인과 신자)는 자신의 자연적 원인과 그에 따른 이해력을 더 넓고 자유롭게 활용하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권리를 가능한 한 신에게로 제한한다.


- 기독교의 본질 中 제2장 19절,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 - (구글에 한글 판본이 하나도 없길래 영역본을 손번역했기 때문에 어감이 이상할 수도 있으니 이해바람)


책 이름은 "기독교의 본질"인데 종교들의 본질적인 비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가져왔음, 공산주의자들의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발상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과 무신론적 입장 내지는 반신론적 입장은 이 "인간 자아의 소외와 제한"에서 나온다고 함축해서 설명할 수 있겠음, 그리고 이걸 보통 "자기소외"라는 단어로서 지칭함.


...정말로 부정적인 것은 유신론, 즉 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자연과 세계와 인류를 부정한다. 신 앞에서는 세계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에도 존재했다. 신은 그것들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는 세계와 인간의 무(無)이다. 적어도 엄격한 정통신앙에 의하면, 신은 언제든지 세상을 무(無)로 만들 수 있다. 


(중략)


 신을 믿는 자는 자신의 신을 장식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온 세상 -즉 모든 감각적인 것-은 경멸을 받아야 합니다." 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라틴어로 쓰인 편지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시거나 전혀 친구가 아니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다른 편지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학적 덕목이라 불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신론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 즉 실제 인간의 무(無) 위에 믿음을 세운다.


-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 中 제 30강,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 - (이것도 구글에 한글 판본이 하나도 없길래 영역본을 손번역했기 때문에 어감이 이상할 수도 있으니 이해바람)


그리고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함 - 덕(德)과 공(功)을 신에게 돌림으로서 유신론자들은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돌아가야 할 공도 다른 곳으로 바치고 있음.


근데 이제 모두를 까지 않으면 못참는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를 일부 비판하기 시작함.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이렇듯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서지 못한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 1. 역사의 진행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Gemuet)을 그 자체로서(fur sich) 고정시키며, 따라서 하나의 추상적인―'고립된'―인간 개체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단지 ‘유(Gattung)’로서만,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 6번 테제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 7번 테제


-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마르크스, 역자 불명, Marxists.org에서 가져온 한역본


위의 두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의 근본적인 이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음을 알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포이에르바하가 너무 "개인 단위의 신앙심"에만 집중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다수에게 퍼졌을 때에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였음. 


 현대에는 이러한 특성이 현대에 와서는 어느정도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포이에르바하가 지적하였던 종교의 자기소외적인 개념은 종교가 신에 대한 무비판성과 무조건적인 흠송을 지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문제라고 보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아직도 종교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지 아니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임, 마르크스도 포이에르바하의 논리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사회에서의 종교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크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고, 애초에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강력한 호감을 여과없이 내비치기도 했으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이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영감을 받아서 말한 것임, 종교는 신을 흠송하고 영광을 신에게 돌림으로서 개인의 행복과 신에게 헌신했다는 고취감을 주지만, 반대로 결국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인 자산을 신에게 바치려 하는 그러한 행동이 순간의 고통의 중지 -당시에는 아편이 마약보다는 진통제로서의 성격이 강했기에 좀 수정주의적인 해석을 인용했음, 뭐 마약이라도 엄청나게 다른 해석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는 어차피 아편의 중독성을 매우 싫어했기에.- 를 위해서 사용되는 아편과도 굉장히 유사하게 비쳤기에 마르크스가 그렇게 제창했던거.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를 비판하는 가장 본질적인 사유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닌, 신을 중심에 놓는 "자기소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임, 지배 이데올로기화는 거기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