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투씬

갑자기 퀄리티가 확 올라갔는데, 일단 애초에 원래 역사에서부터 대규모 전투가 아니고(기껏해야 수천 vs 수천인데, 작중 묘사 정도면 이해해줄 만한 수준임), 공성전은 흥화진 전투 뱅크신 좀 갖다 썼나봄. 서경성 전투도 개경 진입로 공방전도 나름대로 괜찮게 뽑았음


연출도 썩 괜찮은데 일단 지채문의 철퇴가 점점 낡아가는 묘사라던지, 거마작을 세우면서 묶는 묘사 같은 것들은 한국 사극에서 거의 묘사하지 않던 거고, 공성전을 묘사할 때 서구권 명품 사극들도 많이 간과하는 점 중 하나인 컨트롤타워의 묘사도 제대로 나왔음


무엇보다 호화로운 전투보다는 유격전 중심으로 묘사하는데도 고증적으로 실제 있던 전투에 전략적 중요성을 재해석해 가미해서 묘사하면서 고증을 최대한 지키고 전략적으로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게 전개하는 것 등은 상당히 섬세함


다만 통주 전투에서 무너진 "호화로움"은 아직까지 재건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다음편의 곽주성 전투를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음



2. 고증

가장 할 말이 많아진 고증 면에서는 일단 이번 화에서는 각색(솔직히 좋게 말해 준 거고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역사왜곡")이 강력하게 들어갔는데, 일단 이 양반 좀 봅시다.


이상홍 배우님이 분한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耶律盆奴)인데, 실제로는 본작에서 묘사된 것처럼 어리석고 공명심에 눈이 먼 장수가 아니었고, 철저한 야전사령관 타입으로 점령지에서 타초곡을 혹독하게 행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맹장이었고 전술적 식견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임.


지난 삼수채 전투에서는 그래도 역사적으로 있던 사실관계를 잘 조합해서 전개해 나갔기 때문에 "이 정도면 뭐 괜찮은 각색이지" 정도로 넘어왔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좀 장문으로 씀. 고거전에서는 이 사람을 무슨 원균처럼 묘사하고 있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사람은 선봉도통(先鋒都統)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사람이 역사적으로 역임했던 위치는 단순히 선봉(先鋒)이고 당시 작전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도 아니었음.


실제 역사적으로 이 사람은 "궁궐에 불을 놓았다", "쳐들어가서 사로잡았다" 등의 묘사로 보아, 이 사람의 캐릭터성은 조자룡이나 여포처럼 맨 앞에서 뚫고 나가는 돌격장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본작에서는 갑자기 도통이 붙으면서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멍청한 놈으로 만들어 놨음. 개인적으로 고거전이 저지른 최대의 역사 왜곡은 이 야율분노라고 생각함.


곽주성의 탈환 시기 역시 실제 역사와 다른데 거란군이 평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진격하게 되는 계기는 곽주의 탈환임. 이 당시 거란군은 무조건 한 달 안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작중에서는 촬영 시간 때문에 묘사가 부족한 부분인데, 시간적으로 곽주의 함락은 음력 12월 16일임) 왜냐하면 양력으로 2월을 넘기면 압록강 얼음이 녹기 시작해서 철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임.


때문에 거란군은 장기주둔을 각오하고 곽주를 후방기지로 만든 건데, 이게 양규의 손에 떨어지며 거란군의 남진이 갑자기 가속이 붙음. 당장 고려왕을 잡고 식량을 뜯어내고 항복을 받아내야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임.


근데 본작에서는 개경으로의 진격이 곽주 탈환 이전으로 각색되었음. 물론 서경성 공격이 요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오래 걸리긴 했는데(얘들은 원래 교범부터가 성을 공격할 때 7일 이상 공격 안하고, 7일 넘기면 그냥 버리고 넘어감) 그래도 어쨌든 역사적 사실관계를 완전히 잘못 전달한 부분임.


거란군이 병신도 아니고 곽주가 건재한데 왜 평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감? 아, 위에서 멀쩡한 사람 병신 만들었지.


이전까지 최고로 생각되던 고증이 이렇게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 승부수를 걸 만한 부분은 연기력밖에 안 보임. 개인적으로 징비록 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들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