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의 말이 계속된다.
『사건 직후, 처음에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며칠 지난 뒤에는 어떤 죄과를 받을지 몰랐다. 극형을 받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감옥까지 갈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4만여 명의 고려인(韓日동포)이 살고 있어 소련 정부는 이들이 무슨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았다.
사건 발생 이후 우리 가족은 「낯선 사람에게 대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등하교시 경호원이 배속됐다. 사할린을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것도 하루 전 기습통보를 받았다. 겨우 하루 만에 짐을 챙겨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서 불이 났거나 난리를 당한 사람처럼 쫓겨났다. 옷가지 등 필요한 짐은 컨테이너에 던져 두고, 가구는 다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졸업한 학교가 있었는데 교수들 역시 「졸업생인 나에 대해 훌륭한 선배로 재학생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런 말도 아예 못 하게 했고, 나 자신이 어느 곳에서라도 떳떳하게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도 금지됐다. 그리고 나는 언론과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한동안 내 자신이 영웅인지, 살인범인지, 정부가 나를 어떻게 대우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