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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그 여자의 사정 -5-

 분란의 징조

 

 

 

 

 

 

 

 

 

플레마를 포함한 래피드 플레임 전원이 켄트의 수하로 들어간 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공백은 켄트가 말했던 것처럼 예의 그 몸집을 더더욱 크게 불려 우주로 뻗어나갔고결국 스테어 오로보로이의 옆에 있던 또 다른 행성을 잡아먹었다.

 침략한 행성의 이름은 세컨드 스테어라고 했다하지만 침략의 그 역사적 순간에 순간이동을 한다던가 하는 영화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베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한 낯선 사람들이 보였고 이들은 베시와 조우하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정체를 묻는 이들이 있나하면잔뜩 경계하며 공격을 해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곧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최대한 친분을 유지하며 정보를 얻어내어 생존하려는 자들도 있었고 그것은 다른 베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축장 또는 아수라장.

 

 태어나 처음 보는 낯선 세계와 문화는 그들의 호기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두 세계의 존재들이 대립과 공존을 통해 멸망 또는 융화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점점 달라졌다.

 

 스걱!

 

 끄아악!”

 

 날붙이로 살점을 베어내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단말마를 지르며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졌다.

 복장으로 보아 남자는 군인으로 보였고등에 큰 상처를 입은 그는 끄륵거리며 얼마간 피를 토해내더니 이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걸로 124.”

 

 창백한 피부에 안대를 쓴 여성 베시가 지금까지 자신이 죽인 인간들의 숫자를 세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부대원들이 거의 학살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기세로 인간들과의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녀는 자신의 상관이자부대장인 포이즌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포이즌 부대장이쪽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습니다이번 전투는 인간들 중에서도 제법 강력한 부대가 몰려온 것 같군요.”

 

 그녀의 대답에 포이즌은 육감적인 몸매와 함께 예의 그 거대한 낫을 목 뒤에 걸친 상태로 대답했다.

 

 ⋯⋯재미없어.”

 재미 없⋯⋯?”

 재미없다고단 하나도.”

 

 뜬금없는 포이즌의 대답에 여성 베시정확히는 그녀의 부관인 베닌은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그게저기⋯⋯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대답해주신다면 제가 부하들에게 조금 더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라고 지시하겠⋯⋯.”

 흐응~? 아니아니야그런 게 아니야.”

 

 포이즌이 눈을 샐쭉하게 뜨며 대답하자베닌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이 같은 여성이 봐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환기했지만어쩐지 그녀의 뺨은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크흠그럼 전투 방식을 조금 바꿔볼까요?”

 아니이건 너희들에게 요구한다고 바뀔 게 아니야.”

 그렇다는 것은⋯⋯?”

 대장에게 가야지직접.”

 ⋯⋯.”

 

 포이즌의 입에서 플레마가 언급되자 베닌은 다소 씁쓸해졌다확실히 그녀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켄트의 휘하에 들어가기 전의 래피드 플레임 내부 분위기와 현재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일각에서는 전투 도중 은근슬쩍 부대를 이탈하는 단원들도 생기고 있는 상황그러니 포이즌의 재미없다는 대답이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인지 절실하게 체감되는 그녀였다.

 

 대장의 저의를 의심한 적은 없지만그때 그 선택은 과연 잘한 것일까요?”

 

 베닌의 씁쓸한 어조와 함께 빠져나온 대답은 포이즌에게 또 다른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확실히 그날켄트가 보여준 저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전투가 벌어진 후 다른 단원들은 대장이 약해졌다는 둥 여러 의문을 표했지만 적어도 포이즌 그녀만큼은 확실히 알아보았다.

 

 켄트는 결코 전력을 다하지도 않은 반면플레마는 전력을 다했음에도 반격은커녕방어조차 힘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켄트는 자신이 100이면 100,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과정에서도 일부러 플레마의 위신까지 챙겨주며 상황 자체를 갖고 놀았다.

 그러니까 더 괘씸하다고 느껴졌다차라리 철저하게 짓밟아 눌렀으면 대장 또한 모욕감을 덜 느꼈을 텐데어째서 그는 그렇게 행동했으며대장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말이다.

 

 역시 대장에게 가서 직접 물어봐야겠어베닌?”

 포이즌 님.”

 애들보고 적당히 놀다가 정리하라고 전해난 대장에게 간다.”

 걱정마십시오!”

 

 베닌의 대답과 동시에 포이즌은 초록 돌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