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을 맞이하여, 쏟아지는 비를 보며 떠오르는 감성을 풀어낸 글입니다.



아뇨. 사실 비 맞으면서 일하다가 빡친 기억을 아름답게 왜곡시킨 글 입니다.




배경은 브로큰 세이비어 이후에 (시즌 2를 부정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설정이에요.

대학생이 된 어윈과 고등학생인 하루의 비 맞는 이야기.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해서 시점이 어윈 <-> 하루 이런식으로 반복합니다.




과거 회상 식으로 브로큰 세이비어를 조금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니까 안보신 분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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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투둑…’


빛 한줄기 없었던 흐린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유리창에 조금씩 규칙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일기예보에서 말한 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굵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예정대로 나는 자체휴강을 건다.

전부터 비는 좋아하지 않았다. 습해지고 끈끈한 기운이 감돌고, 아무리 재주껏 우산으로 가려도 한 두 방울씩 튀어서 옷이 적셔져 애써 말려야 하는 그 귀찮음과 찝찝함은 쉽게 견딜수 있는게 아니었다.

어디의 누군가는 저 비를 보고 감성이 폭발하여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나한텐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러 커피 한잔을 내린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을 들고 창가에 가서 기대고 밖을 바라본다. 

자취방의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바깥의 세상은 비를 피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우산을 펴고 그 인파를 뚫고 가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저 사람들은 일기예보조차 보지 않는걸까, 그저 한심할 뿐이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내가 어제 자기 전에 빼놓은 철사 반지가 보였다. 

조잡하지만 정말 애써서 깎은 흔적이 보이는 작은 철사 덩어리. 그것은, 오래전의 이야기다.

 

 

 

“죽여…줘요…”

“부탁이네… 제발… 우리 아이를 그만 쉬게 해주게…”

“제기랄…. 제기라아아아알!!!!”

 

한때 캐서린이었던, 기생 생명체 ‘아마릴리스’는 절망을 토해내며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수줍게 고백했던 그녀가 역설적이게도, 죽여달라고 외치며 나의 목숨을 위협했다. 

눈물을 머금고, 간신히 형상화시킨 저격총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저지하던 그날, 수송기에는 비탄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때 부터였을까. 나는 비 오는 날이 싫어졌다.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고,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꽉 막힌 속을 풀고자, 커피를 한모금 기울인다. 

분명히 방금 내린 커피인데도 오래된 기름에서 나는 고린내가 피어올랐다.

젠장. 생각해보니 커피 머신의 원두 캡슐을 교체하지 않은게 떠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컵의 내용물을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냉장고에 넣어놓은 생수병을 꺼내 입가심을 한다. 

이래서 내가 비오는 날을 더 싫어한다.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꾸 헛짓을 하게 된다.

찝찝한 기분에 발에 채이는 옷가지를 걷어 찬다. 옷가지, 이게 왜 바닥에 있는거지?

 

 

 

“데브타운 실종사건 수색작전, 개시합니다!”

“레피드 놈들,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어버렸지. 사람을 터트려서 소울에너지를 모은다고?”

“우오오오!!! 나는 소울에너지를 손에 넣고, 너희를 뛰어 넘겠다! 너희를 이기기 위해 자존심까지 버린 나를, 만족시켜다오!!!”

“자존심? 그딴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그 날의 데브 타운은 황량했다. 주인을 잃은 옷가지들은 바닥에 널려 있었고, 육신과 에너지를 잃어버린 영혼들은 빽빽한 장대비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무고한 주민들의 삶은, 설욕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는 스카에게 돌아가 무의미하게 소모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런 끔찍한 장면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학살의 동기 조차도 한심하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데자이어 에너지와 주입된 소울에너지가 융합하지 못하고 요동치면서 괴로워하는 스카가 점점 무력화되어 감에도, 나는 소울런처를 꺼내들고 그를 난자했다.


그 이후로, 비는 더더욱 싫어졌다. 덤으로 옷을 절대로 바닥에 늘어놓지 않는 버릇도 생겼다.

그렇기에 지금 발에 채이는 이 옷가지는 더욱 짜증날 뿐이었다. 

대체 난 무슨 생각으로 이걸 정리하지 않은거지? 

신경질적으로 옷을 집어 올려 빨래통에 던지자 옷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주워서 찬찬히 보니 붕대다. 피가 약간 베어있는.

 

며칠전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소울정크와 싸우다가 살짝 베였던게 기억이 났다. 

상처에서 피가 베어 나오자 같이 싸우던 하루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품에서 붕대를 꺼내 지혈해줬었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있는건가, 싶었다. 이걸 안 뺄 정도로 내가 게을렀다고? 

그 붕대를 보자, 또 머리 속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버텨보세요. 당신의 자격을 시험하겠습니다.”

“소울워커, 어째서입니까. 당신들은 이 정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켄트… 내놔… 힘을 더 내놔!!!”

“하루, 지금이다!!”

“하아아아아!!!!”

 

제 8구역. 별숲/네드 연합군과 우리들의 맹공격에 주춤거리던 테네브리스는 마침내 하루의 최후의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저 추악한 괴물의 심장을 뚫는데까지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흘렀다. 

데자이어 에너지로 구성된 전신 갑주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한때 영웅이라고 불렸던 그가 모든 날개를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땅으로 무력하게 추락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전장에 가득 끼어 있던 구름에서 모든 것을 씻어 내리듯 소나기가 쏟아지자, 나는 온 몸의 힘이 그대로 풀려버렸다.

또 다시 비라니. 나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게 느껴졌다.

간신히 몸을 추스려 저 앞에서 쓰러져 있는 하루에게 다가가고 있을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테네브리스가 허공으로 손을 뻗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리엄… 왜 이제서야 온거야…”

 

이 전장에 미리엄 누님은 없었다. 환각을 볼 정도로 생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의 말에는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도 그녀석에게 이용당한 건가… 미안하다… 미리엄… 모두들…”

 

마지막 후회를 남기며, 그는 부들부들 떨던 손을 떨구고 말았다. 

점점 거세어지는 빗줄기는 그의 죽음을 비웃는 켄트가 내리는 것 같았다.


비록 이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아직도 우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죽어버린 사람들과 희생되어진 영웅들, 그 무엇도 구원하지 못했다.

모두가 간신히 쟁취한 승리에 기뻐할 때, 나는 마음 깊은곳에서 분노를 느꼈다.

단순 이 빗줄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켄트를 잡기 전까진…

 

켄트의 육신이 없어져 버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크게 변한건 없었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져버렸으니, 아마 한동안은 계속 응어리 진 채로 남아있겠지.

이것이 내가 자체휴강을 낸 이유였다. 이렇게 비가 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화면엔 ‘하루룽’이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하루야?”

“어, 어윈씨… 혹시 바쁘세요…?”

“아니, 잠깐 쉬고 있어. 무슨 일이니?”

“그… 괜찮으시다면… 우산 한 개만 가져다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해요…”

 

그녀도 일기예보를 보지 못한 걸까? 아직도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는 가기 싫다는 말을 목구멍까지 올라오게 만들었지만, 애써 참고 나는 대답했다.

 

“알았어. 좀 기다려줘.”

“가, 감사해요 어윈씨… 저 별숲고 1층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날에 굳이 나가서 그녀를 보는게 맞는 걸까. 

뭔가 말 실수나 그녀를 화나게 만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시계를 보기 위해 화면을 킨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쳐다보자 싹 사라졌다.

그래. 하루를 위해서라면. 

배경화면에 비친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바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오늘 분명히 우산을 챙겨갔는데, 어째선지 가져온 우산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방과 사물함, 모든 곳에서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아무래도 우산이 없던 한 친구가 먼저 실례를 한 모양이다.

그래도 하교시간이 다가오면 돌려주겠지, 했던 나의 예상은 정확하게 빗겨나갔다. 

우산은 돌아오지 않았고, 교문엔 우산을 쓰고 하교하는 학생들과 부모님이 데리러 온 학생들로 인해 북적북적거렸다. 


다들 시간과 약속을 맞추었는지 바로바로 떠나고, 결국 나 혼자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엔… 어윈씨… 어윈 씨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오직 이 일념 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분명 강의가 많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의외로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 그가 올 동안 교실에 가서 앉아있으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교실은 어느새 문이 잠겨져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경비 아저씨가 왔다 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현관으로 돌아와 그나마 젖지 않은 난간을 찾아 걸터 앉았다. 

나의 등 뒤로 쏟아지는 빗방울들은 정원수의 이파리에 맞아 자그마한 물싸라기를 날리거나, 줄기를 따라 흙으로 스며 들어갔다.

반복적이지만, 차분함이 흐르는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옛 추억이 떠오른다.

 

 

 

“우산이 없으면 엄마한테 전화를 하지 그랬어?”

“아하하… 그래도 엄마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몸도 안 좋으신데…”

“너 우산 정도는 충분히 가져다줄 수 있어 이 기집애야!”

“다음엔 꼭 부를게요. 고마워요 엄마!”

“맨날 입으로만… 자, 같이 돌아가자.”

 

갑작스런 소나기가 퍼붓는 날이면, 늘 엄마는 날 데리러 학교까지 오곤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제발 오지 마시라고 해도 늘 찾아오셨고, 우산을 건네주셨다.

친구가 우산을 씌워준다고 해도, 엄마는 늘 한결같았다.

언제 어디서든, 엄마와 나는 늘 함께였다.

 

“우산을 미리 챙겨가는 것도 좋겠지만, 설령 놓고 가더라도 언제나 너를 위해 챙겨줄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렴.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요청하고.”

“알겠어요… 에헤헤…”

 

나란히 우산을 쓰고 엄마와 걸어가며 그 따스한 사랑을 느끼던 그 순간을 지금도 떠올리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할 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한 마음이 나를 의대로 이끌었다. 그러한 결심이 소울워커인,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지금도 이렇게 내리는 비를 보면, 그 때를 떠올리며 속으로 다짐한다.

모두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아, 시발… 날씨 실화냐…”

 

원룸 현관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마치 나오지 말라는 듯 빗줄기가 거세진다. 내가 쓸 커다란 장대 우산과 그녀에게 건내줄 노란색의 오리 우산을 챙겨 들고 애써 밖으로 나왔지만, 이대로 돌아갈까 하며 수십 번을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었다.

옷이 젖는 것도 싫지만, 몸이 젖는건 더 싫은 나로써는, 소나기가 쏟아지는 이 거리를 거닐 옷차림으로, 바람막이 한 장과 긴 청바지, 검은색 가죽 부츠를 걸쳤다. 이렇게 입어도 비가 내리는 덕분인지 덥진 않았다.

 

“아나… 젠장…”

 

첫번째 발걸음부터 고인 웅덩이에 신발을 적시자, 짜증이 급격히 올라온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도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었다.

웅덩이를 피해 바닥을 보며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는다. 우산을 두들기는 빗방울은 당장이라도 그 얇은 천을 찢어버릴 기세였다.

이 정도면 그냥 택시를 불러서 집에 가는게 더 낫지 않나, 하고 그녀를 원망해본다.

그래도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었다.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고뇌를 하며 별숲고를 향해 걸어간다.

 

 

 

“저, 저게 뭐야!?”

“소, 소울정크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주변이 시끄러웠다. 소울정크? 얼마 전에 하수도에서 소울정크들을 싸그리 갈아 엎었던게 떠올랐다. 비가 오니까 또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다.

하수구에서 슬라임처럼 비정형의 젤리 같은 괴생명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소울정크의 유체, 즉 성장이 덜된 어린 개체들이었다. 이런건 며칠 지나야 비로소 위협적인 상태로 변화하는 놈이다. 

저항할 능력이 없는 시민들이야 당연히 저렇게 두려움에 떨 법 하지만, 나는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오히려 저런건 잡기도 어렵고, 설령 잡더라도 재흡수 되거나 분열해버린다.


근처의 시민들은 나를 조금 알아보는건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 없다. 손사래를 치고는 그대로 고개 한번 안 돌리고 걸어간다.

뒤에서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했지만, 무시한다.

별숲리그는 저런거 안 막고 뭐하는거야? 이정도 소울 정크도 못막아 낼 정도라면 정말 진지하게 별숲리그의 능력을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 은퇴하면 어쩔건데?

 

“모, 모두 도망쳐! 점점 커진다!”

“이쪽으로 오고있어!”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선을 확실하게 긋고 저런 잡무는 하지 않는게…

 

“조심해요!!!”

 

아까부터 왜이렇게 시끄러운거야?

 

“대체 ㅇ… 뭐, 뭐야 이건!?”

 

어느새 내 등 뒤에는 내 키만한 소울정크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나의 머리를 짓누르려고 했다. 들고 있던 장대 우산을 꽉 잡고 뾰족한 부분으로 육중하게 떨어지는 덩어리를 찔러 받아낸다. 덩어리가 갈라지면서 우산에 가해지는 충격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우산살은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그 상태로 우산을 접고 소울정크를 후려치자, 우산이 완벽하게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무래도, 그냥 넘길수는 없는 모양이다. 거센 빗줄기가 나의 몸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소울에너지를 모아 두 자루의 권총을 형상화시킨다. 그 소울정크도 나의 전의를 감지했는지, 커다란 덩어리를 분리하고는 실낱 같은 줄로 이어 빙빙 돌리며 위협했다.

 

“그래 이 자식아, 한판 붙어보자!”

 

 

 

 


 

“어윈씨…”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가득 메우는 장대비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괜히 어윈 씨를 부른 걸까?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할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집에 갈 방법이 없어진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자고 해놓고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고생길에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몸이 젖더라도 비를 맞고 갈까?

 

“으아앗…”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며 내 등을 적셔버린다. 정말 잠깐 닿은 수준인데도, 물 한 바가지를 맞은 것처럼 완전히 젖어버렸다.

나는 비를 맞는걸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고 해야 할까?

서서히 젖어드는 그 느낌과 함께 차오르는 감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했다.

마치… 그날처럼…

 

 

 

“거대한 정의 앞에 찢겨 나가라!”

 

서부 클라우드림의 운명을 건 그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테네브리스는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남아있는 데자이어 에너지를 한껏 끌어모아 우리를 한번에 쓸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검을 쥐었다. 이미 수백합을 맞서며 부딪혀온 검은 언제 부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나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진 씨는 언제나 앞장서서 공격을 막아내었다. 테네브리스의 융합된 힘을 몇 번이고 직접 막아내며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테네브리스의 검을 막아내는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그 옆으로 이리스 씨가 해머를 맞대어 거든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는 매우 침착하게 진 씨와 호흡을 맞추었다. 

그가 막아내면 뒤에서 거대화한 드릴로 테네브리스의 자세를 무너뜨리거나, 반대로 그녀가 막아내어 공격할 시간을 벌기도 했다.


공격이 막혀 빈틈이 생기자, 그 사이로 치이와 릴리 씨, 에프넬 씨, 스텔라의 영감님이 테네브리스의 양 다리와 등을 찔러 움직임을 봉한다. 

나와 함께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어 테네브리스를 상대했던 친구들이다. 

근접 제압에 특화되어 있던 테네브리스에게 있어, 우리의 공격은 많은 유효타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 진가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며 테네브리스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해버리는 소울 에너지 탄환. 

지속적인 방해에 원거리 대응을 포기한 테네브리스에게 나비씨의 모든 소울 에너지를 담은 공격이 적중하자, 그는 거의 검을 놓칠 뻔했다. 

그 틈을 타서 어윈 씨는 양 손에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소울런처를 꺼내 들어 마구 난사했다.


우리들의 맹공에 금강불괴 같던 테네브리스는 점점 휘청이기 시작했다. 

이제 마무리를 짓는 일만 남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하루~! 힘내!! Go~ Go!!!”

 

경쾌한 기타소리와 함께, 따스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스텔라는 내게 미소 지으며 응원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 되지. 안에서부터 강인한 의지가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하루! 지금이다!!!”

 

들고 있던 소울런처의 마지막 잔탄까지 끌어모아 집중 포격을 가하는 어윈 씨의 외침을 듣자, 나는 검을 고쳐쥐고 테네브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모두의 염원을 담은, 모두의 희망을 담은 나의 이 칼날로… 무방비로 나를 바라만 보는 테네브리스를 향해, 대검을 최대한 뒤로 당겼다가 그대로 찍어 내렸다.

 

“하아아아아!!!!”

 

쇳덩어리가 깨지는 꺼림칙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최후는 보지 못했다. 다만 때아닌 소낙비가 내리고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 그가 죽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오히려 이대로 나도 같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너무 많이 소모해버린 소울에너지의 공허함을 몸이 견뎌낼수 있을지, 나도 의문이었다.

 

“괜찮아?”

 

갑자기 갈색의 코트가 나의 하늘을 가렸다. 내 얼굴을 때리던 빗줄기가 사라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윈씨…”

“정말 고생 했어. 잘 했어…”

 

따스한 말을 건네는 것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착잡했다.

이번 작전의 입안자였고, 성공까지 시킨 사람이 가질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고마워요 어윈씨… 정말 모든 게요…”

“아냐. 나야 말로 고맙지.”

“우리 모두 살아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었잖아요?”

 

마구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는 싱긋 웃었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웃어줘. 세상이 어떻게 되든, 너의 미소만 있으면 되지…”

“아하하…”

 

그는 내 어깨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비로 차게 식고 있던 나의 몸은 그의 품 안에서 따스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엄마의 품 이후로 이렇게 따스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었다.

 

그 이후로, 비가 오면 그때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했다. 어떤 이불로도 느낄 수 없었던 그 따스함. 이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늘은 조금씩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조금 사그라 들었지만, 여전히 맞으면서 가기엔 많은 양이었다. 

어윈 씨에게 몇 번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아서라도 가야 될 모양이었다.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갈아 신고, 스타킹을 벗어 가방 속에 넣는다. 

빗 속으로 발을 내딛자, 벌써 차가워진 빗방울이 내 발가락과 발등을 두들긴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이다.


찰박, 하고 물웅덩이도 밟아버린다. 고인 빗물이 슬리퍼에 흘러 들어와 발바닥을 적시자, 더욱 추워 지는게 느껴진다. 

그렇게 교문을 나와 쓸쓸히 학교를 떠난다. 바닥의 물웅덩이엔 침울해 보이는 나의 얼굴과 함께, 노란색 우산이 보였다.

 

“괜찮아?”

 

우산? 고개를 돌리자, 물에 흠뻑 젖은 듯한 어윈 씨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어, 어윈씨…?”

“미안해.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서… 이제 도착했어. 이거라도 쓰고 가.”

 

그의 옷은 군데 군데가 찢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흠뻑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제가 어윈 씨를 불러서…”

“괜찮아. 우산도 없이 하교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건 없으니까. 나는 괜찮으니 쓰고 가.”

 

어윈 씨는 나에게 우산을 강제로 쥐어다 주다시피 하고는 몸을 휙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건네준 우산을 꼭 쥔 채, 나는 그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걸어 가는 걸 말 없이 쳐다보았다.

 

 

 

 


 

“하… 시발…”

 

예상 외로 격한 싸움이었다. 옷도 이렇게 찢어져 버릴 정도로. 단순 비정형 괴수라고 내가 방심한 것도 한몫 했다. 

내가 쓰고 온 우산은 진작에 박살 나버렸고, 그나마 하루를 위해 준비한 우산이라도 지켜내려고 좀 무리한 결과가 이랬다.

 

“내일 그냥 감기라도 걸리면 다행이겠네. 이 빌어먹을 하늘아.”

 

안에 쌓인 스트레스가 마구 끓어오른다. 하지만 분출할 곳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할 뿐. 

이를 조절하지 못해 오히려 방금 하루에게 또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건 아닐까, 하고 반성도 해본다. 

빨리 집으로 가서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다.

 

“어윈씨!”

 

뒤에서 찰박 거리며 물소리가 들리더니 내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진다.

 

“집에 안 가?”

“같이 가요. 어떻게 어윈 씨를 혼자 보내겠어요? 거기에 다치신 거 같은데 제가 집에서 치료해드릴 게요!”

“갑자기 왜 그래… 나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냥 집 가서 쉰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안 돼요. 절대 그냥은 안 보내드릴거에요.”

 

이젠 강제로 팔짱까지 껴버린다. 옛날부터 느끼던 거지만, 그녀의 고집과 근성은 정말 수준급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힌 이상, 아마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지.

그 순간, 나의 몸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거봐요. 추우신 거잖아요?”

“아, 아니 이건…”

“자, 이리 오세요. 제가 그래도 덜 젖었으니까 좀 더 따뜻할거에요.”

“무, 무슨…?”

 

하루는 문 닫은 가게의 천막 아래로 나를 끌고 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확실히 그녀 말대로 덜 젖은 교복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게 가슴 부위 인 건, 곤란하면서도 감사했다.

 

“어때요?”

“……. 그, 그게…”

“엄마 품 같지 않아요?”

“좋아. 계속해줘.”

“저는 언제나 이런 걸 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요.”

 

이래저래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진심일 것이다. 정말이지, 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건 다행이다.

 

“어윈 씨는 비 오는 날을 안 좋아하시죠? 항상 비만 오면 얼굴을 찌뿌리시잖아요.”

“찝찝하잖아. 안 좋은 일만 가득하고.”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저와 함께할 수 있잖아요?"

"뭐... 그, 그건 그렇지..."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아요. 몸이 젖기는 하지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를 품에 안는다. 

그래. 그녀 말대로,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건 아닐테지. 

적어도 그녀와 함께하는 이 시간만큼은, 행복하게 생각하자.


세상을 구원하던 그날처럼.

 

 

 

 


 

“얼레리? 쟤네 뭐한데?”

 

에프넬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누군가에게서 훔친 우산을 피고 골목길을 걷던 도중, 한 커플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일단 사진부터 찍고~ 뭐, 예전부터 둘이 사이 좋은건 알고 있었지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셔터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그들은 그저 요지부동인 채로 서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우산 훔쳐서 미안하긴 한데, 덕분에 둘이 잘 됐잖아? 메데타시~ 메데타시~”

 

그녀는 방향을 틀어 다시 걸어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는 웃으며 골목길을 달려간다.

 

“어디 그러면, 별숲그램에 올려볼까?”

 

하늘의 구름은 서서히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보름달이 흠뻑 젖은 세상 속의 행복을 밝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