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을 위한 백업임


주워진 탄피

이나비



 홀로 고민해 내놓은 정의는 악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나비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할 가치관마저도 정립되어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1세대들은 이나비에게 더 큰 생각의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명확한 사명과 목표, 그리고 가치관을 가진 1세대들과 달리 자신은 그저 명령과 의무에 따라 그들을 도운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테네브리스와의 결전을 스스로 결정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장예섭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세뇌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을 헤매고 다닌다.



 명령을 받고 좋아하는 변태 하나쯤은 이 세상에 있을 만하지 않나?



 이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치의 증명은 그저 명령의 이행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그들은 이나비에게 ‘가치의 증명’에 목매달지 않기를 원했다. 가치관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스스로의 내면에서 비롯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탄창 안에 7.62mm 공용탄을 가득 채워 넣으면서도 심란한 속은 진정되지 않는다. 열 발 짜리 탄창. 한 발씩 밀어 넣을 때마다 옛 기억을 뒤적여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이었던 바버르, 이상하리만치 영웅심리에 도취되어있었던 히어로아머,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윗선의 판단에 불만을 토로했던 버나드까지.



 비록 이용당할 뿐인 삶이었지만, 채워졌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지금…자신은 그저 쏘고 남은 빈 탄피에 불과하다.



 빈 탄피에 어떤 쓸모가 남아있을까. 이나비는 서부의 아홉 발 총알 중 자신만이 빈 탄피라고 생각했다.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사격을 연습하고 있지만, 빈 탄피처럼 되려 고민만 더 늘어난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다.



 이나비는 방금 재어놓은 탄창을 라이플에 꽂고는 앞으로 엎드렸다. 어깨에 개머리판을 단단히 대어 놓고는 한쪽 눈을 감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방아쇠를 당긴다. 손끝을 누르는 압력이 사라짐과 함께 총이 거세게 어깨를 밀어냈다.



 격발의 소음은 익숙했다.



 총 옆으로 탄피가 달아오른 채 굴러다니고, 총열은 미지근하게 달궈져 있었다. 몇 발 더 쏘면 손도 대지 못할 것이다. 당겨온 표적지는 아주 약간 빗나가 있었다. 한가운데는 아니다.



 “아직도 총 잘 쏘는 게 본인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



 짧은 금발에 제식 군복. 이나비는 일어나서 경례를 올려붙였다. 말을 건 이가 세니아였기 때문이었다.



 “작전장교님, 오셨습니까?”

 “아직도 여기서 폐관수련이나 하고 있다고 들어서.”

 “…닫힌 공간이 아니니 폐관수련은 아닙니다.”



 이나비의 아무말에 세니아의 눈이 가늘어진다. 경례를 받아주긴 하지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못 알아들은 거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손에는 평소 같은 작전 지도나 서류가방이 아닌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소풍용 바구니다.



 “그건….”

 “어허. 아직 들추면 안 되지?”

 “실례했습니다….”



 딱 봐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자명했다. 아마도 샌드위치와 과일일 것이다. 클래식한 소풍 음식. 어쩌면 김밥이 가득할지도 몰랐다. 사실 뭐든 좋았다. 이나비는 늘 배가 고팠고, 언제나 에너지를 채워야 했으니까.



 이나비는 점점 먹을 것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고, 세니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표정을 좀 더 풀었다. 역시 총과 피 보다는 먹을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게 더 어울리는, 고작 열아홉의 소녀다.



 “그래서, 고민은 좀 해 봤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에 세니아는 웃고야 말았다. 하기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금의 그녀만 해도…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내라고 하면 할 말을 잃을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어차피 본인의 사명이나 살아가는 이유 같은 건 모르고 산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 뿐이지. 고귀한 이상이나 대단한 갈망에 목매는 사람들은 보통 끝이 좋지 않았다.



 “너무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이나비.”



 세니아는 털썩 그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잔디 위에 멈춰있는, 아직 식지 않은 탄피를 들고는 입으로 불면서.



 “뜨겁지 않습니까?”

 “데일 만큼 뜨겁진 않아.”

 “그래도 쉽게 식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까닭에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장약을 모두 태워 탄두를 쏘아 보내고 비어버린 저 탄피가 자신의 처지와 같아서일까. 쉽게 식지 않는다는 말이, 제 입에서 나오긴 했지만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맞아. 그리고 쉽게 버려지지도 않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직 따뜻할 때 주워진 탄피 말이야. 우리가 훈련탄 탄피를 죄다 수거해서 어디다 쓰겠어?”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재활용한다는 뜻이야.”



 명령에 따라 발급 받은 탄을 소모하기만 했던 삶. 이나비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고, 탄피가 어떻게 재사용되는지 궁금해할 이유도 없었다.



 정작 자신은 탄피 같은 삶을 살았으면서.



 “안에 새 화약과 새 탄두, 새 뇌관을 넣어서 다시 쓰는 거지.”



 세니아는 이나비의 엷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품에 커다란 소풍 바구니를 안겨준다. 뚜껑을 열자, 갓 만든 샌드위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다시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줄게. 그러니까 빈 탄피로만 남지는 말아줘. 알았지?”



 필요한 것은 성급함이 아닌 고민. 이나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