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본질

치이 아루엘




“잔디이불에는 어쩐 일이셨나요?”


 아진이 물었다. 물론 충분히 가까웠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헬기의 엔진음이 그녀의 목소리를 파묻어버렸을 것이다.


 “아, 테네브리스 만나고 왔어.”

 “…테네브리스를요?”


 그리 곱게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잔디이불에서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사람들 사이에는 아직 그가 일으켰던 해일과도 같은 위협의 여진이 남아있었다. 깊은 고통으로, 안타까운 상실로, 혹은 짙은 증오로.


 한낱 헬기 안내병이라고 해도 다를 바는 없었다. 물론, 그녀는 부모나 혈육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인은 동료를 잃게 된다. 전쟁은 모두에게 끔찍한 상처만을 안겨줄 뿐이다.

그것이 설령 승리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아, 그…말하기는 어려운데. 저 안에 테네브리스의 공백 시절 영혼이 있어. 걔는 착해.”

 “원래 착한 사람이 악독해졌을 때가 가장 무섭죠.”

 “…그건 맞는 말인 거 같아.”


 반박할 수 없었다. 경광봉을 옆구리에 끼고, 아진은 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길게 늘어뜨린 연한 분홍색의 머리칼. 한쪽 팔로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한 작은 체구. 고개 숙인 소녀는 영웅의 풍채라기에는 가냘퍼 보였다.


 아진은 동료의 죽음마저도 저 여린 어깨 위의 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누군들 아끼던 이를 왜 살리지 못 했냐고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매몰차지는 않았다.


테네브리스와의 결전, 그 초반. 6구역에서 그가 날뛸 때 아진은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뒤틀린 정의가 악신의 은총을 받아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아진.”

 “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눈을 깜빡였다.


 늘 헬기만 타고 가버리던 영웅들. 부커스와 함께 자신을 놀렸던 적도 있었지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나, 잘 한 거겠지?”


 아진은 주먹을 쥐었다. 그 ‘다른’ 테네브리스라는 작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들어갈 때와 다름없이 죽상이었다. 악당의 분신이라는 작자는 제대로 된 위로를 해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 들었어요.”

 “응?”


곱게 묶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흔들린다. 깜빡이는 눈동자 안에 의문과 동시에 희망이 서린다. 아진은 마냥, 이 ‘영웅 소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자신을 고양이라고 생각한다면서요?”


 귓가에 속삭이는, 장난 같은 말. 치이는 입술을 깨물곤 눈을 흘겼다.


 “정말 고양이라니까?”

 “그럼 알겠네요. 고양이가 어쩌다 인간의 친구가 된 건지.”

 “그건….”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의 고양이었던 시절을 되짚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어쩌다가 아루엘의 친구가 되었더라. 떠오르는 최초의 기억은 자신에게 뻗던 작은 손. 그다음은 품의 따스함. 마지막으로는 처절하고 슬프던 친절.


 치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모르…겠어.”

 “고양이라면서, 그것도 몰라요?”

 “…말하는 고양이 정도에서 충분히 신기하다고 치고 넘어가 주면 안 될까? 거기까지 알고 있는 고양이가 더 드물거야….”


 슬픈 반박이었지만 화나 보이진 않았다. 도리어 간절히 답을 듣고 싶은 게 분명했다. 이미 정답을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고양이는 가축화의 흔적이 전혀 없대요.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은 다 인간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손을 댄 결과물이거든요. 그런데 고양이는 아니에요. 수천 년 전 원래 종의 모습이 거의 다 남아있다고 하더라고요.”

 “보통은 막 바뀌어…?”

 “보통은 그래요. 보통은.”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게 분명했다. 츄르를 앞둔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걸 보면.


“그런데 고양이는, 그냥 단순히 인간 주거지에서 함께 있는 게 좋아서 다가왔대요. 쥐를 잡아먹으려고 온 거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중요한 건 ‘자발적으로’ 인간과 함께하려고 했다는 거죠. 인간도 기꺼이 그 귀엽고 작은 생명체를 곁에 두어줬고요.”


 헬기의 유리창 너머로 얼른 출발해야 하지 않느냐는 세르반테스 중사의 손짓이 보인다. 하지만 아진은 치이의 등 뒤로 조금만 기다리라 손짓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해심 많은 어른이었다.


 “귀엽고 작은….”

 “그러니까, 치이. 무슨 일로 테네브리스를 만나러 갔고, 무슨 답을 들은 거예요? 고양이와 인간은 친구니까, 말해 줄 거죠?”


 잠시 망설이는 표정. 살짝 깨무는 아랫입술. 아스팔트 깔린 거리를 힘없이 내려다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다.


“…힘든데.”

 “뭐, 그래도 괜찮아요. 차차 친해지죠, 뭐! 그래도 하나는 잊지 말아요, 치이.”

 “응?”

 “고양이는, 인간 곁에 계속 부비적거리면서 오기 때문에 친해진 거예요. 치이도 만날 그러잖아요?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유지하는 한, 치이는 우리 모두의 고양이이자 친구예요.”


 더 이상은 헬기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한 대화가 된 모양이다. 조그마한 영웅은 헬기 안내병을 냅다 끌어안았고, 어른은 품 속의 아이를 달래준다.


 이제는 보내줄 때였다.


 “그러니까,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