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무게

릴리 블룸메르헨 | 이리스 유마


그 죄인을 모두가 이해해주지는 않았다.


 아론은 고개를 떨궜다. 비록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사형수는 아닐지라도, 서부의 지휘관이었던 그는 토오루의 속내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간파하고 있었다. 분명 동부와의 갈등이 빚어질 것이다. 어떤 식으로 터지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동부의 헌병장교는 내일 도착한다.


 본래라면 영창 근처를 걸어 다녀야 할 영창 근무병이 지금은 책상에 앉은 채로 그를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쇠창살 안에 갇혀는 있지만 그가 입고 있는 군복의 휘장과 계급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론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죄지은 이들이 오는 곳. 길어야 2주의 반성밖에 쌓이지 않는 공간이지만 아론은 다시금 병사들의 입장을 되새겼다. 아무리 별숲 리그가 공백 이전의 군대와는 다르다고 해도, 군의 지휘체계를 차용한 이상 닮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겠지.”


 토오루는 지금껏 보유하고 있는 소울워커의 최소 절반을 보내 달라는 로드즈의 지시를 묵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서부의 상황에 대한 지휘관들의 보고서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주 좋은 정보원이 된 셈이다.


 “젠장!”


 주름진 주먹으로 영창의 벽을 두드리자 지키고 있던 병사가 움찔거렸다.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도 발톱의 날카로움은 남아있다. 아론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발톱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동부의 로드즈, 그 중 첫 번째 별인 장예섭은 세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장 이나비의 케이스만 보아도 그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이미 오랜 삶과 시련으로 다져진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 그 늙은 여자의 혀놀림만으로는 그 상처를 메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세뇌에 저항하는 것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빠짐으로써 서부는 중대한 정보 유출의 걱정을 품게 되었고, 당장 전선지휘관 한 자리가 공석이 되어 남은 지휘관들의 업무가 막중해졌다. 동부가 헌병장교를 아주 일찍 파견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껏 그가 떠맡고 있던 모든 일들을 인수인계하기에는 턱없이 작은 시간이다.


 디플루스에 주둔하던 시절의 수송 작전에 대한 건은 오히려 로드즈가 인가해 준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꼬리 자르기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부여된 혐의는 다를지 몰라도, 결국 테네브리스 결전 이후의 뒷마무리를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을 압송해가겠다는 건 서부의 정보를 빼내고 싶다는 동부의 노골적인 메시지였다.


 유일한 정보원.


 그 보잘것없는 지위를 이용해서 최대한의 혼선을 주리라.


 이빨 빠진 호랑이는 창살 속에서 조용히 발톱을 갈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죽어간 이들에게 부족하게나마 속죄가 될 테니.


감은 눈꺼풀 속의 얕은 어둠 저 너머에서 자신이 배신자라 이름 붙였던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아론은 귀를 막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귀를 틀어막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갈 때였다.


 “아론 중령님. 면회객입니다.”


 영창 근무병이 쇠창살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를 깨운다. 예외적인 대우였다. 영창 안의 군인에게는 부모와 변호사를 제외한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다. 아론이 미간을 찌푸리자, 병사가 뒷말을 잽싸게 붙였다.


 “…블룸메르헨 씨와 유마 씨입니다. 토오루 소령님의 특별한 허가가 있었습니다.”


 의외였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배웅의 인사를 남긴다면…하루나 치이, 스텔라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론은 잠시 고민하다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블룸메르헨 씨와 유마 씨입니다. 토오루 소령님의 특별한 허가가 있었습니다.”


 의외였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배웅의 인사를 남긴다면…하루나 치이, 스텔라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론은 잠시 고민하다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괜한 짓을….”


  맞물렸던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 쇠와 쇠가 둔탁하게 맞부딪히는 몇 번의 소음 끝에 문이 열린다. 아론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창살에서 천천히 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수감자는 창살 쪽에 붙어서 이동해야 한다. 이동할 때는 근무병의 관리감독이 있어야 한다. 당연한 규정이지만 모두가 캐서린의 사망 이전 아론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예우였다.


 “부탁하네.”


 면회실까지는 멀지도 않았다. 애당초 면회실이라고 해 봐야 헌병장교의 사무실 뒤편에 연결된 조그마한 방에 불과했다. 열 몇 걸음으로 그 거리를 지나자, 눈에 익은 두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스는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릴리는 앉은 채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여전한 녀석들이었다.





“면회 시간은 삼십 분입니다.”


 근무병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날파리가 조명 갓 아래에서 싯누런 빛을 내는 전구에 달라붙었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닫힌 문 앞에서 아론은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 차가운 철제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고는 자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이것도 토오루의 ‘특별한’ 지시사항인가?”

 “근무병이 자리를 피해 주는 걸 두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럼요. 그래도 군사기밀을 양손에 한가득 쥔 지휘관이신데. 게다가 그 군사기밀의 주요 항목을 차지하는 우리와의 대화 아니겠어요?”


 릴리 블룸메르헨의 말투가 유난히도 매몰찼다. 귀족적인 느긋함이나 상대를 아래로 보는 그 깔봄이 의외로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조금 조급해 보였다.



“이리스 유마, 자네가 같이 가자고 부추겼군.”

 “아하하…들켜버렸네요. 눈치가 좀 빠른걸요, 아저씨?”

 “그래서, 무슨 일이지?”


 아론은 자신에게 부여된 이 많은 특전들이 주는 불편함을 마음 한켠으로 밀어두고 턱을 괴었다.


 “…아저씨가 내일 동부로 끌려간다길래요.”


 그 뒤에 하고 싶은 말이 더 숨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릴리는 도리어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는 이리스를 비웃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기 서 있는 이리스 유마 양이 아주 천재적이고도 악독한 발상을 해내서 말이죠. 그걸 제안하러 왔어요. 참고로 이건 제 생각은 아니니까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천재적이고도 악독한 발상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릴리….”

 “그래서 본인도 차마 말 못하고 있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말이 많네요. 이대로 그냥 쭉 제가 말할까요? 아니면 그래도 쥐똥만큼 남은 솔직함을 끌어모아서 직접 말씀하시겠어요?”


 이리스는 잠시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고민하다가, 결국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너무 나쁘게 봐주시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리스의 힘없는 변명에 아론이 고개를 내저었다.


 “설령 내게 폭탄을 매달아 보내겠다는 제안이라도 괜찮다. 나는 너희들을 나쁘게 보지 않아. 도리어 너희들에게 너무나도 큰…마음의 짐을 지게 만든 사람이 나 아니겠나.”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 왠지 제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았으면 한다.”


 잠시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한 릴리가 이리스를 재촉한다.


“정말 말 안 할 건가요?”

 “아, 해! 한다고! 그래서 말인데요, 아론 아저씨. 제가 ‘굳이’, ‘이제서야’ 동부 별숲에서 아저씨를 압송해가겠다는 이유를 한참 고민해 봤거든요. 사실 처벌과 투옥이라면 서부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 지금만 해도 내가 영창에 갇혀 있지 않나.”

 “이거, 딱 봐도 정보 빼내려는 거예요. 아론 아저씨 뇌를 지지든 구워삶든 해서 정보를 싹 빼낼 거라고요!”


 동부는 수없이 많은 L.X.T를 보유하고 있으니 아예 과장된 추측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아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네?”

 “녀석들은 최대한 나를 죽이지 않으려고 할 거다. 여차하면 인질의 가치 또한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토오루에게 나를 특별하게 대우하지 말라 부탁한 것도 있었는데….”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긴, 당신은 하이푸 다음으로 계급이 높았죠. 아마 디플루스 호라이즌 당시의 일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서부의 실질적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겠네요. 뭐, 아직 여론이 당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이 든 군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하는 것이다, 릴리. 아무도 나를 비난할 수 없지. 나를 비난할 만한 병사 대다수는…내가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나. 그 섬에서 말이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군요. 그럼 이 덜떨어진 소울워커가 제시하는 모자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지도 잘 알 거고요.”

 “…그게 무슨 뜻이지?”


 이리스는 정말로, 정말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누가 들을까 몸을 바싹 당겨서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우리가 아저씨를 확 숨겨버리는 거예요. 동부에는 도망쳤다고 하고요.”


 아론은 잠시 말문이 막혀서는, 이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천재적이고도 악독한 생각이라고 불러 줄 만했다. 그가 도망쳤다고 동부에 알린다면 정보의 누출을 차단할 수 있고, 그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토오루 소령이라면 기꺼이 암묵적 합의로 도와줄 테니까.


 “그건 안 되겠네.”


하지만 아론은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리스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릴리는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그 조급함과 짜증이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다운 선택이군요, 아론 중령.”


 이제서야 그녀의 표정에서 귀족다운 오만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손을 짚는다. 밀려 나간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면회실 안을 울렸다.


 “죽음은 각오하고 하는 말씀이시겠지요?”


 광기. 한껏 눌려 오만함으로 그 모습을 바꾼 광기야말로 호박색 눈동자에 깃든 릴리 블룸메르헨의 본모습이다. 이에 맞서는 아론의 갈색 눈동자 또한 완고했다.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 둘의 면회를 암묵적으로 허가해 준 걸 보면 토오루 아저씨도 사실은…!”


 아론은 이리스의 말을 끊고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오히려 동부가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지금이 잘됐다고 생각한다. 이 이후의 정보는 내게 당연히 없을 테고, 이 이전의 정보는…내가 마음먹는다면 거짓으로 진술할 수도 있겠지. 토오루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만, 내가 동부의 정보에 최대한의 혼선을 줄 것이다.”

 “아저씨, 그런 짓 하다가 잘못하면 정말 죽어요!”

 “…이래야 내가 눈멀어 죽인 이들에게 가서 무릎 꿇을 자격이라도 생기지 않겠나, 이리스 유마.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가서 무릎 꿇을 자격이라도 생긴다면 그로 족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 하세요, 이리스. 이미 이 사람은 결심을 굳힌 것 같으니.”


 삼십 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구하러 갈 거예요, 아저씨. 딱 기다려요.”


 이리스 유마는 이를 악물었다. 손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쥔 채로. 아론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멀지 말거라, 이리스. 무언가에 눈멀면 다른 무언가를 놓치게 되기 마련이다. 나처럼 말이다.”

 “알아요. 안다고요! 그렇지만….”


 초침이 점점 정각에 다다른다. 릴리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 두 고집불통 사이에서 자신이 중재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두 사람의 눈빛이 릴리를 향한다.


 “당신을 구하고자 누군가를 희생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구해내면 군말 없이 따라오는 겁니다. 죗값을 더 치러야 하니 마니 그러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나요?”


 이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결실을 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리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