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선물

어윈 아크라이트


정말이지 한가로운 하늘이었다.


 건물 위의 미사일 포드들도 바쁘게 적을 쫓지 않고, 더이상 주변에서 정비공들의 다급한 외침이나 전차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윈 아크라이트는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있었다.


 그레이스 타워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테네브리스와의 결전은 끝났고, 일단은 당장의 위협을 제거했지만 아직 그 뒷마무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네브리스가 6구역에 남긴 힘을 흡수한 소울정크들은 좀 더 기괴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되어 갔다. 하지만 그건 그가 신경 쓸 소관이 아니었다.


 지금은 쉬는 게 일이다.


 곧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눈을 부시게 만드는 햇살을 잠시 가리면 반짝이는 금발의 아린과 눈이 마주친다.


 “아주 그냥 넋이 빠지도록 쉬고 있네요, 어윈?“

 “지금처럼 여유로울 때 누워줘야지! 안 그래?”

 “뭐…그건 그렇죠.”


금방 동의할 만큼 세상에는 별일이 없었다. 오랜만의 긴 휴식이었다. 바쁘도록 전략물자와 소울워커들을 각지로 보내던 아린마저도 어윈이 누워있는 풀밭에 앉게 만들 정도로.


 “저쪽에 벤치도 있는데, 굳이 내 옆에 앉으려고?”

 “싫은가요?”

 “아니, 그럴 리가! 너무 좋아서 문제인걸.”


 만날 급히 수송기에 뛰어들기만 해서인지, 그녀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사실 나눌 만한 이야깃거리도 없긴 했다.


 그래서, 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가 의문이었다. 물론 어윈은 그걸 먼저 캐묻지는 않았다. 여자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저 기다려주는 게 최선이다.


 “…음료수 한 캔 마실래요?”

 “음료수?”

“요 앞에 굿마트에서 사 왔거든요. 제가 여기 살면서 제일 신기했던 게 뭔지 알아요, 어윈? 고작 한 블록 거리 안에 굿마트가 하나 더 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게?”


 차가운 오렌지주스였다. 호불호가 별로 갈리지 않은 음료. 그녀의 손에는 블랙커피가 쥐어져 있었다. 서로의 취향도 모른다는 게, 얼마나 데면데면하게 지내왔는지를 증명한다.


 “하여튼, 주스 고마워. 잘 마실게! 뭐…뇌물은 아닌 거지?”

 “그런 농담 하나도 안 재밌거든요?”

 “거짓말. 저 아저씨의 고루한 농담에 시달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농담을 재미있어했다고!”

 “그건…부정할 수 없겠네요.”


 누워서는 마실 수 없어서, 어윈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 뒤의 분수대에 기대면, 솟구친 물이 머리와 어깨에 시원한 물보라로 내려앉는다. 두 개의 캔은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열렸다.


칙. 탁.


 경쾌한 소리가 뻗어 나간다. 아린과 어윈은 마치 맥주라도 나누는 친구처럼 우스꽝스럽게 캔을 부딪쳤다. 쓸데없이 단숨에 음료를 들이켜고는, 어색하게 눈동자가 맞는다.


 “…할 말이 있는 거지?”


 하는 수 없이 어윈이 먼저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린은 그 질문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맞아요.”


 “얼른 말해. 뜸 들이지 말고. 확 가버린다?”


 미소를 곁들인 장난스런 협박에 아린이 입을 삐죽인다. 하지만 눈꼬리 끝은 웃고 있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질릴 만큼 많이 들었겠지만요.”

 “암, 암. 질릴 정도로 많이 들었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라고?”


허풍은 아니었지만, 마치 허풍이라도 부리고 있는 것 같은 몸짓. 아린은 그의 의도대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밝은 미소를 바라보며 어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직 저는 못 했던 거 같아서요.”

 “그래서, 그 이야기 하려고 음료수까지 사서 들고 온 거야?”

 “세상을 구한 영웅한테 빈손으로 가기엔 좀 그렇잖아요?”


 세상을 구한 영웅.


 어윈은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풀밭을 내려다보았다. 쓰다듬어줬던 그 여자애의 머리칼처럼 잔디가 바람을 타고 흔들린다.


 “아직 세상을 구하진 못했지. 머리 위에 저 크고 새까만 게 여전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잖아.”


 어윈의 진지한 모습은, 아린으로서는 생소한 장면이었다.


 “…지켜주지 못한 사람이라도 생각하고 있나요, 어윈?”


“나라고 해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야. 소울워커 아홉 명이 모여도 마찬가지겠지. 누군가는 잃을 거야.”


 위로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어윈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어윈이 말을 끊기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그게 나를 맹세하게 만들었어.”


 아린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야수는 상처입음으로서 사냥 솜씨를 다진다. 아린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캔은 손안에서 찌그러져 쓰레기통 안으로 처박힌다. 어윈은 아린을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안에는 커다란 슬픔이 박혀 있었다. 


 “어쨌든 계속해서 지켜나가려고. 약속했거든, 이미 죽은 그 녀석하고. 죽었으니 못 물리잖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떠나보낸 이들은 남은 이의 마음속에 가시가 된다. 그럼에도 소중하게 가시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들은 누구보다도 진정한 구원자에 가까웠다.


 “그럼요. 믿고 있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어딘가에 보내주는 게 전부겠지만, 아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최소한 믿어줄 수는 있으니까. 설령 누군가를 지키지 못할지라도.


 “…그래.”


 대답에는 슬픔 대신 망자와의 서글픈 약속이 깃들어 있었다.


 상실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