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방에 들어있는 열 남짓한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한다. 놀랐다기보다는 당혹감이었으며, 더 정확히는 경외감에 가까웠다. 그래서, 방 안의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게 뭡니까?"


우리 연구실의 막내가 조용히 두어 번 뇌었다. 우리는 역시 침묵했다.


그야 당연하게도, 우리 중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목: 임시 저장 2023/12/05>



# 이곳에 텍스트 입력.

첨부파일: autosave1.jpg 외 67장










S,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분명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여태껏 벌려놓은 판이 워낙 크다 보니 다들 나를 찾아 나섰겠지요.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S, 당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처음으로 하늘을 꿈꾸었던 곳에 이 편지를 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라면 잘 찾아내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불어 S, 내가 이곳을 마지막 역으로 삼은 것은, 또한, 내 마음을 이곳에 묻고자 함입니다. 나는 이제는 그날의 꿈을 이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찾는 것을 멈추고 이 글을 읽어주십시오.


당신은 나와 같은 결말에 다다르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S, 당신은 영원을 믿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바라고 선망하는 것은 아주 예전부터 이어져 온 자연스러운 욕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미숙하기에 더더욱 그러한 가치들에 탐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숭고한ㅡ동시에 미숙한 욕구들의 발자취는 수많은 문명에서 피어나고 시들었으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말에서 말로, 어떨 때에는 노래에서 노래로 전달되었지만, 그 과정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릿속을 거치고 나올 때마다 한 사람의 소망, 관념, 무의식을 휘휘 두르고선 관념은 다시 사회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반복되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부정형의 개념들은 수천 명이 살아간 수만 년의 세월을 거쳐 그 속을 가득히 채운 생각의 퇴적물을 껍질 삼아 우리의 마음 안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입니다.


영원을 향한 욕망, 영원을 대하는 태도가 그로부터의 산물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육체를 부여하듯, 우리도 우리 안에서 나온 것들에게 몸을 주어야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원에게 형체를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우로보로스입니다.




<제목: 임시 저장 2023/12/05>




# 이곳에 텍스트 입력.

첨부파일: ouroboros.jpg 외 124장




S, 나는 영원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선택한 물리학자로서, 별에 약속한 천문학자로서, 영원 같은 허울뿐인 관념에 내 몸을 뉘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성보다는 이성에, 추측보다는 논증에 목을 매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S, 지금부터라도 좋으니 나를 믿어주겠습니까?



10월 중순ㅡ그러니까 밤바람이 여린 가슴에 닿을 듯한 무렵, 나는 야간 관측을 마치고 천문대로 돌아와 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내 집보다 편안했고 무엇보다 내킬 때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곳은 당신이 있었던 그날처럼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덕분에 나는 그 넓은 공간을 내 차지로 하여 먹고 자고 내 마음대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날은 집을 비운 지 정확히 닷새째였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확인해보니 내 주소로 한 통의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예약해놓은 촬영이 끝나 곧 자료들을 넘겨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기대에 가득 찼습니다. 비록 이 글에 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여 써내릴 수는 없겠다만, 이 우주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측을 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학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까지 기대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이 방법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몇 차례고 벗겨 내겠다는 오만함마저 품었습니다.



몇 분 뒤, 자료가 도착했습니다. 단 스무 장도 안 되는 적은 양이었지만, 파일의 크기는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이메일을 합쳐도 비견조차 안 될 정도로 매우 거대했습니다.


총 21 테라바이트. 한 장에 1 테라바이트짜리 픽셀 더미가 얹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크기는 내가 관측 영역을 넓힐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을 알았기에 나는 하늘의 매우 작은 영역만 촬영하였습니다.


허블 딥 필드가 그러했듯, 비록 아주 좁은 영역일지라도 나는 그 사진에서 다양한 보물들이 발견되길 바라며 이미지 파일을 더블 클릭했습니다.




<제목: 임시 저장 2023/12/05>



# 이곳에 텍스트 입력.

첨부파일: X0051238459321D42... 외 5031장




내가 그것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했을까요. 나를 반긴 것은 아주 작은, 누런 사각형이었습니다. 더욱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나머지 열아홉 장마저 그와 같이 밝게 질려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한 변이 100 픽셀도 안 되는 주황색 정사각형을 얻기 위해 내 소중한 시간과 이미 미어터질 듯한 하드디스크의 여유공간을 내어준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류가 분명했습니다. 분명, 망원경에 먼지가 앉았다던가 초기 설정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내 선택이 충동적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마구잡이로 새로운 조건에서의 촬영을 예약했습니다. 비록 서버 증설을 위해 드라이브 몇 덩이를 구매하고 몇몇 일정들을 연기하긴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이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두어 시간을 모니터 앞에만 앉아있었습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 들어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에 찍힌 주황색은 내가 목표로 설정한 파장의 상대적 세기를 의미했습니다. 내가 본 사진처럼 선명한 주황색을 얻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포착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망원경이 촬영한 하늘의 면적과 사진에서 검출된 에너지의 양을 이용하여, 센서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그 영역에 어떤 천체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찍은 곳은 기껏해야 몇 억 광년 멀리에 있는 어두운 별들이 가득한, 소위 말하는 빈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빈 공간으로 알려진 곳에서 사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다 말한다면, 그 말을 누가 쉬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 계산 결과는 터무니없었습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그 스무 장의 사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때까지도 나는 혼자였습니다. 이 놀라움에 취해, 나는 내 동료에게 이번 촬영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엄청난 발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나도 학자라, 명예욕에 굴복한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나를 용서하세요, S. 나는 인제 와서는 이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습니다.


일주일 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통의 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사진의 총 용량이 너무 커진 탓에 파일을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파일들을 일일이 다운로드하고선, 끝내 복호화하였습니다.






<제목: 임시 저장 2023/12/05>


첨부파일: X419753145658D11... 외 30255장








아, 무언가 찍혀있었습니다. 성공입니다.









첨부파일: X7524189354189D84... 외 98107456장








네, 성공이었습니다. 센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내 계산은 완벽했습니다.









첨부파일: X19384486352111D75... 외 1511358469943장








그런데도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첨부파일: X2814890436840D12... 외 999999999999999+장









그것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지구를 향해 쏘아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백, 수만 년 동안이나 그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S,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이나 용의 형태를 한 상징물입니다. 그것은 영원과 순환을 의미한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그 명칭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지었다지만, 우로보로스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형태가 사람 공통의 무의식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한 상징이 정말로 우리로부터 고안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 거대한 이 우리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목: 임시 저장 2023/12/05>


# 이곳에 텍스트 입력.

첨부파일: big_ring_FQ.raw 외 999999999999999+장







S, 나는 그 조사로부터 한 가지를 알아내었습니다. 그것의 구조와 구성성분, 주변의 환경 등을 고려하여 나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것은 성장합니다. 평균적으로 일 년에 4 나노미터씩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고리의 직경은 13억 광년에 육박합니다. 지구로부터 90억 광년 씩이나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보름달 15개를 늘어놓은 길이에 달합니다.


그 거대한 고리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S,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압도적인 크기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세상이 개벽하고 다시 황혼에 저물고, 다음 세상이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겁(劫)이라는 단위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단위가 큰 탓에 그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유를 거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초기에 정지해 있던 물체가 한 해에 4 나노미터씩 빨라져 종국에는 초당 수천 킬로미터를 갈 정도로 빨라졌다면, 그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에 대해서는 대체 어떤 비유를 들어야 우리가 감히 실감할 수 있을까요?


그 세월은 우주의 나이인 137억 년을 가뿐히 넘습니다.


나는 그 세월과, 90억 광년 멀리에 있는 '영원'이 두려운 것입니다.




친애하는 S, 나는 영원을 믿지 않습니다. 믿도록 강요당한 것이지요. 당신은 영원을 믿습니까?


나는 이제 순수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교차검증조차 하지 않은 나의 가설들을 비웃어도 좋습니다. 내가 이 사실을 홀로 알고 있기로 한 것은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위에 적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고, 저 우주에는 영원을 살아온 거대한 뱀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입증받기라도 한다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바라보던 밤하늘의 끝에 뱀의 눈깔이 있었다는 걸 알 바에야, 나는 차라리 눈먼 자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ㅡ 아아,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내가 느낀 모든 것을 알려주겠습니다.



S, 당신은 나와 같은 결말에 다다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를 찾지 마십시오.










메세지 송신중...


...


< 정상적으로 송신하였습니다. >


수신자: 서한율([email protected]) 외 101 인









S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의 친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학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녔던 그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S는 신년 파티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한 달 가까이 그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그를 만나면 엉덩이를 한 대 걷어차 주리라, S는 생각했다.


띠링ㅡ


그 와중에 S의 전화기로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그의 동기였다.




<제목: 급합니다.>


# 노트북에서 한 장 더 발견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연락 주세요.


첨부파일: giant_arc_FQ.raw






S는 실소했다.



나머지 한 마리가, 아직 몸을 말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의 푸른 원은 'Big Ring'이며 붉은 곡선은 'Giant Arc'입니다.)




2024년 1월 11일,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 제243차 미국 천문학회가 열렸습니다.


알렉시아 로페즈(Alexia Lopez) 박사는 해당 학회에서 'Big Ring'을 발표했으며, 지난 제238차 학회에서는 'Giant Arc'를 발표하였습니다.


본문은 위의 두 구조물을 소재로 작성되었으며, 본문의 내용은 임의로 각색되었음을 밝힙니다.



'Big ring'과 'Giant Arc'는 각각 직경 13억 광년, 길이 33억 광년인 우주 거대 구조입니다.


현재의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구조물은 이론적으로 직경 12억 광년인 것에 반해, 두 구조물 모두 이보다 크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두 구조물은 현재의 우주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우주 모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료 및 사진 출처:

https://www.space.com/giant-arc-in-space

https://phys.org/news/2024-01-discovery-ultra-large-distant-space.html


https://www.uclan.ac.uk/news/big-ring-in-the-sky

https://www.uclan.ac.uk/news/discovery-of-a-giant-arc-in-distant-space-adds-to-challenges-to-basic-assumptions-about-the-unive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