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유선 전화기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이런 전화기를 집에서 쓰는 일은 거의 없겠지. 그러니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건 이 시대 마지막 남은 가정용 유선 전화기 아닐까? 골동품을 좋아하는 아빠의 취미로 내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물건이지만 아직 멀쩡한 새것 같았다. 물론 전화를 거는 것도 가능. 어제 어디다 놨는지 잊어버린 폰도 전화기로 찾아냈으니까.


그 폰은 지금 내 주머니에서 격하게 알람을 울리며, 학교에 가라고 아우성이다. 오늘은 왜 월요일일까... 콱 그냥 멸망했으면 좋겠네. 하지만 세상이 그리 쉽게 망할 리 없으니 학교에 갈 수 밖에 없다.


"야, 김지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우리집 제일가는 근육 덩치, 형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볼 때마다 왜 운동부가 아니라 독서부같은 곳으로 들어갔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네. 형 말로는 적당히 조용해서 수능 공부하기 좋다고는 하지만, 역시 짝사랑이 아닐까?


어쨌든 형과 같이 학교로 가며 쓸데없는 얘기를 떠드는 중, 골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자 우리 둘은 골목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봤고, 안에선 남자애에게 맞고 있는 한 여자애가 보였다. 날 말리는 형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팔을 붙잡자, 남자애는 형과 날 번갈아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여자애의 명찰은 교복과 비슷할 정도로 낡고 이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들이 터져 있었지만 간신히 1학년인걸 알 수 있었다.


엄청 헝클어진 머리, 진한 다크서클에 충혈된 눈. 거기다 소심한 성격까지... 지금이 아니라면 평소 대화할 일은 없었겠지. 안부를 물어도 여자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대로를 향해 빠르게 뛰어가자. 뒤늦게 골목으로 들어온 형이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댔다.


"왜 그래?"

"됐으니까 쟤랑 말 섞지 마라."

"왜, 뭔 일 있어?"

"독서부 애인데, 쟤 좀 미친년 같아."


사람에게 대놓고 욕을 박는 형의 모습은 처음 봤지만, 왜 형이 그렇게 느끼는지 알 것 같았기에 난 순순히 알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은 학교 생활이었지만, 딱 한 가지 다른 점은 계속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에게 말하자 돌아오는 말은 그저 무시하란 한 마디와 온갖 조롱 뿐, 별 도움이 되는 말은 없었다.


그 후, 별 시덥잖은 얘기나 하며 의식을 다른데로 돌렸고, 방과후까지 신경쓰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형에게 얘기를 하려 했지만, 형은 뭐가 그리 바쁜지 말도 걸기 힘들었고, 결국 난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시선이 느껴졌고, 무서워져 집을 향해 달리자, 뒤에서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짧은 '윽!'소리가 들려왔고, 전에 본 여자애가 앞으로 쓰러져 있었다.


여자애를 보자마자 난 형의 말과 함께 학교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에 봤던 걔, 맞지?"

"미, 미영이에요... 김미영... 제대로 감사하다고 하고 싶어서..."


뭐야, 생긴거랑은 달리 착한 애잖아? 뭐 때문에 미친거 같다고 한 거지?


"괜찮아. 또 괴롭힘 당하면 말해."

"네...? 네! 감사합니다!"


그냥 허세일 뿐이지만 그렇게 좋았던걸까? 이렇게 좋아하니 좀 뻘쭘해진다. 전에도 형 등빨보고 도망친 것 같던데...


그래도 오늘 느꼈던 위화감이 과도한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던 후배가 보낸 것이라 보냈던 시선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내일 형이랑 애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생겼으니까.


미영이는 고맙다며 쿠키 한 봉지를 내게 선물로 준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수제 쿠키인 모양인지 약간 비릿한 짠 맛도 같이 느껴졌다. 맛있진 않지만, 정성을 봐서라도 먹는게 예의겠지?


다음 날, 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자랑하듯 형과 친구들에게 떠벌렸다. 친구들은 드디어 나에게 여친이 생기는거냐고 온갖 난리를 피워댔지만 형에게 자랑하자 바로 표정을 찌푸리더니 "나라면 싫을 듯." 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할 것이지 괜히 그러네.


체육 시간 중 자유 시간이 되자, 난 서랍 안에 넣어놓은 축구공이 생각났다. 다행히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교실로 올라오니 내 자리에 화면이 켜져있는 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거...? 분명 가방에 넣어놓고 나왔던 거 같은데 왜 책상 위에 있는거지? 건망증인가... 그래, 어차피 들어올 사람도 없을테니 그냥 내가 깜빡한 거겠지.


집으로 돌아온 뒤, 흘린 땀을 씻기 위해 옷을 벗어던지고 속옷만 덜렁 입은 그 때, 갑자기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빠인가 보네. 무슨 일 있나?


"여보세요. 아빠? 나 방금 막 돌아왔어. 왜?"

"..."

"아빠?"

"후우... 후우..."


알 수 없는 여자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거친 숨소리. 곧바로 전화기를 내려놓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곧바로 전화기가 다시 울려댔다. 어떡하지...? 그래, 잘못 건 전화일 수도 있잖아. 이번엔 아빠일거야...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어 귀에 가져다 댔으나 이번엔 다행히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와 간단한 대화를 끝마치자, 처음 걸려왔던 전화가 신경쓰였다. '그래, 잘못 걸린거야.'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날 이후로, 우연이라고 믿고 싶지만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거기다 없어진 물건들이 지우개, 연필 같은 각 잡고 찾기엔 사소한 물건들이어서 범인을 찾기가 애매했다.


처음엔 그저 내 부주의라고 생각했으나 노트에 대놓고 그려진 하트 낙서로 인해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놓고 놀리듯이 하트를 그려넣은 것에 화가 났지만, 그렇대도 뭐 어쩌겠어... 누군지 알 수도 없는데.


한 친구는 전에 도와준... 영미라고 했던가? 걔를 의심했다. 그냥 해본 소리니까 신경쓰지 말라 했지만, 솔직히...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 그냥 심증만 있고 걔가 도둑질 할 이유도 없으니까 생각을 그만둔 거지만.


수업이 끝나고 교과서를 책상서랍에 집어넣는 도중 물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응? 물렁? 그 물체의 정체는 엉성하게 만들어진 인형 하나였다. 언제 이런게 들어있었지...? 도둑이 놓고 간 인형인거 아냐?


집에 돌아와 인형을 살펴보니 작은 틈이 보였다. 뭐지? 안이 뭔가 거뭇거뭇한데? 자세히 보기 위해 틈을 벌리자,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들어있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인형을 던져버리자 안에 있던 머리카락이 팍!하고 터져나왔고, 얼마가지 않아 전화기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화를 받으려 손을 뻗었으나, 예전에 걸려온 이상한 전화가 생각나자 전화기로 가려던 손은 자연스럽게 멈췄다. 받을까...? 받아야 하나...? 제발 그 미친여자만 아니길... 제발 그 미친 여자만 아니길...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댔고, 바람과는 달리 다시 그 미친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꾸덕꾸덕거리는 소리가 골통을 울려대며 난 뱃속을 게워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발... 안그래도 좆같은 일만 벌어지는데 왜 이 미친년까지 끼어들고 지랄이야!


욕지기를 내뱉으며 소리치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점 켜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온 몸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감각에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고, 계속 중저음의 소리를 내며 울려대는 전화기 때문에 제정신이 차리지 못하던 나는 결국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씨발...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건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좀 냅두란 말이야...


최근 일 때문인지, 얼마 안 가 나는 몸살에 걸려 학교를 쉬게 되었다. 다들 걱정말고 푹 쉬라고 했지만 언제 다시 그 년이 지랄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거잖아? 전혀 위로가 되질 않는다. 그 좆같은 년.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릴거야...


'띵동!'


갑작스럽게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인터폰에 비친 모습에 난 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이전에 구해준 그 여자애...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그래, 없는 척 하자. 계속 답이 없으면 갈 거야.


'쿵쿵쿵.'

"오빠. 저 미영이에요."

'쿵쿵쿵.'

"걱정되서 와봤어요. 몸살이라면서요?"

'쿵쿵쿵.'

"오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막아도 들려온다... 쿵쿵쿵... 쿵쿵쿵... 


"제가 질렸어요?"

'쿵쿵쿵.'

"대답 좀 해줘요."


씨발... 제발 가라고!


'쿵쿵쿵.'

"왜 전화 꺼놨어요?"

'쿵쿵쿵.'

"인형은 맘에 들었어요?"

'쿵쿵쿵.'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 여태까지 나를 괴롭힌게 모두 저 년이었다고?


곧바로 문을 열고 그 년의 뺨을 갈겨버렸다. 예상외로 아무런 반항없이 풀썩 쓰러졌지만 이 미친년은 아픈걸 모르는지 계속 실실 쪼개고 있다. 온갖 욕을 내뱉으며 소리치자 돌아온 한 마디는 뜬금없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요. 저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너무나 태연하게 개소리를 내뱉는 저 입을 당장이라도 꼬매버리고 싶다. 내가 언제 너랑 사귄다고 했는데?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고서 뭐? 사귀는 사이?


내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자 타다다닥 소리가 들려오면서 배쪽에서부터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의식속에서 마지막 한 마디가 들려왔다.


"제가 잘 보살필게요. 오빠..."


*



*



*


지석이가 사라진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엔 몸살로 쉬는 줄 알았지만 급작스럽게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 모두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애들의 시덥잖은 추측이 이어졌지만 처음 며칠만 화제거리가 되다 얼마 가지 않아 쏙 들어가버렸고 이후로는 그에 대한 얘기는 안타깝다는 말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교문 앞에서 실종자 전단지를 나눠주는 지석이의 형이 보였다. 하루종일 서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형의 모습은 초췌하고 정신이 나간 살아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도대체 그 날, 지석이는 어디로 사라진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