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유해발굴과 기묘한 이야기

2편 유해발굴과 G 지역에서의 준 카니발리즘적 행위


지난번에 유해발굴과 관련하여 글 썼던 사람임. 이번에는 집단 가위눌림 사건에 대해서 짧게 풀어볼까함.


유해발굴에 관한 간단한 개요나 지난 이야기는 상단에 첨부했으니, 혹여 궁금하다면 읽어보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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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더운 여름날, 우리 팀은 경상도 모처에 있는 매장지를 발굴하러 갔음. 사실 무덤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지.


높은 습도와 뜨거운 햇살, 한낮에는 40도를 넘는 기온, 한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깊은 묘광(墓壙, 무덤 구덩) 등등.


다른 발굴지와 달리 산을 타지 않았을 뿐, 모든 상황은 최악이었음. 인근 지역부대는 혹서로 일과나 훈련이 취소될 정도였으니.


하지만 여기는 군대 아닌가. X대가리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야하는 상황 속에서 일개 병사는 그저 묵묵히 발굴할 수밖에 없었음.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게 주 내용이 아니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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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결국 기일 내에 일을 끝내고 서울 현충원에 있는 단 본부로 복귀했음.


그런데 당시 모종의 이유로 원래 생활관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다른 분대 생활관에 며칠 얹혀살아야 했음.


그 생활관은 다른 생활관이 그렇듯 2층 침대가 있었고, 그 분과는 사람이 적은 탓에 원래 거주하던 이들은 모두 1층에 있었음.


그래서 얹혀사는 우리 팀은 어쩔 수 없이 모두 2층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평범한 나날이 흘러가는 듯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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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 분대장을 통해 전해듣기로는 1층에서 있던 이들이 우리 팀이 복귀한 날 6, 7명이 한번에 집단으로 가위에 눌렸다는 거였음.


놀랍게도 2층에 있던 우리 팀원들은 아무런 이상없이 꿀잠을 잤고.


전해들은 사실인지라 개개인이 어떤 가위에 눌렸는지는 알지 못해 김이 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심각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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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가위눌림이 과학적인 현상이 아니니만큼 그 원인을 찾는 건 소용없다고 생각함.


가위눌린 친구들 역시 양적으로는 유해발굴병들보다 유해를 더 많이 접하는 분과인지라 심리적이나 영적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울 듯함.


사실 바로 옆에 유해만 수천 구가 보관되어 있고, 현충원 안장자 수가 7만 명을 넘어가니 만약 가위에 눌렸으면 진작 눌려야 했음.


그저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이 발굴이 무연고 전사자, 무명 전사자 가족을 찾는 작업이었던지라 유전자 감식을 위해 유해 중 일부를 잘라낸 후에 다시 매장하는 형태로 진행됐다는 점.


물론 이 작업이 긴 뼈가 남아있는 유해에는 모두 진행되긴 함. 


하지만 파묘는 아닐지라도, 일단 조성된 무덤에서 유해를 꺼내고 어떤 의도더라도 일단 훼손했다는 점에서 망자의 안식을 방해한 게 아닐까 싶긴 함. 거의 70년 세월이 흘렀고, 땅이 습해 뼈조차 흙으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상황인지라.


물론 하나의 가설일뿐 신빙성은 없음. 왜 우리 팀은 가위에 안 눌리고, 원래 생활관 거주자는 눌렸다는 것도 설명해주지 못하고.


그저 누군가의 군생활 속에서 하나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 정도로 생각해주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