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차..."


나는 가져온 이삿짐들을 대충이나마 방 안에 쌓아두고

그중 그나마 깨끗하고 커다란 박스 위에 걸터앉았다...

가 뒤로 넘어졌다.


아마도 침구류가 들어있던 박스였는지 

내가 앉자마자 엉덩이쪽이 푹 꺼졌고

뒤에 쌓아뒀던 박스탑을 하나 부수며

우스꽝스럽게 한바퀴 구른 나는


다시 일어나기도 힘들어서

땀범벅에 먼지까지 뒤집어 쓴 모양새로

햇빛이 들어오다가 마는 방 안에 대자로 누워

뿌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첫 자취방이었다.


내 본가는 청주였으나

무릇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라는 말도 있듯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서울의 회사로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원했던 직장을 한방에 들어간건 아니지만

면접보고, 공부하고, 

면접보고, 포트폴리오 만들고, 면접보고 

이 생활을 1년정도 반복하다보니

신입임에도 꽤나 그럴싸하게 면접을 볼수 있었고


몇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나는 서울 중심...은 아니지만 서울 변두리의

꽤나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요즘같은 취업난에 이게 어디냐'

하며 좋아하긴 했지만

당장에 지낼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첫 출근까지는 남은 날이 별로 없었기에

바로 방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본가에서 회사까지 

2시간도 더 걸려서 출퇴근 하는짓은 

한두번 해보니 사람이 할짓이 아니었다.


워라밸중 라이프가 박살이 나버린 내 얼굴은

마치 먹을 비벼바른듯 다크서클이 번져있었고

잠깐 앉아서 의자에 등을 기대면 

짧은 꿈까지 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인 사무실이 있는 어지간한 사장급이면 모를까

신입사원에게 이런 행각이 용인될리 없으니

슬슬 지적을 받기 시작했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주말마다 회사 근처로 

방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여러군데를 돌아다녔음에도

썩 괜찮은 방을 찾지 못하던 찰나

부동산 사장님과 조금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내 눈에 

반지하의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는 회사에 거의 붙어있을테니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부동산 사장님께 반지하로는 

괜찮은 방이 없냐 하며 물었더니


뚜껍게 칠한 화장 위로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조심스레 닦아가며 앞에서 올라가던 부동산 사장님은 

멈춰서서 잠시 심란한 얼굴로 고민을 하시더니

이내 뭔가 생각난듯 나를 한 반지하 방으로 이끌었다.


건물 자체는 크게 오래되지 않아보였다.


외관에는 페인트를 몇번쯤 덧칠한 자국이 있었으나 

그런대로 봐줄만 했고

그런 건물의 반지하 역시

창문 밖에 어떤놈이 토를 했던건지 

오물 자국이 조금 남아있긴 했어도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반지하이긴 했어도 위치에 비해

가격이 조금 수상할정도로 싸긴 했다.


하지만 이미 피로에 절어 

혼이 육신을 떠나기 직전이었던 나는 

물이 잘 나오는지...

문은 잘 닫히는지...등

간단한 사항들만 확인하고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혹시나 해서 사람이 죽은 방은 아닌지...


넌지시 물어봤으나

부동산 사장님은 손사래를 치며

그런 방은 아니라고 재차 확인시켜주셨고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마침 비어있는 방이었기에

나는 바로 본가의 짐을 싸서

자취방으로 출발했다.


도와준다는 부모님을 떼어놓고 오느라

진땀을 빼긴 했지만

혼자서 그 많은 짐들을 넣느라

진땀을 빼고 나니

나란 불효자는 부모님을 두고 혼자온 것이 

내심 후회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첫 자취생활과

첫 회사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몇주간은

그래도 혼자 사는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하며 갖가지 야채와 식재료들을 사서

인터넷으로만 보았던 요리들을

화려하게 해먹었다.


그와 동시에 주방도

화려하게 해먹었다.


기름은 온 사방에 튀고

어설프게 웍질을 하다가

벽지를 태워먹을뻔하기도 했다.


자취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요리는 점점 간소화됐고

들어가는 재료도 적어졌다.

한달쯤 지나니 그마저도 귀찮아졌고

설거지는 식사 직전에 하는 사전작업이 되어버렸다.


두달쯤 지나자

배달기사님과는 슬슬 상견례를 해도 될것 같았다.

회사와 집이 가까워지며 얼굴은 다시

밝은 색을 되찾았지만

혈색과는 반대로

내 뱃살은 점점 불어올라서

슬슬 발가락을 가리는 수준까지 가고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다가 한번 여자친구를 만나는게 아니라면

주말에는 어디 나가지도 않고 게임

평일에도 퇴근하면 어디 나가지도 않고 게임


마치 나 자신을 내가 사육하듯 살았다.


요식업 상권 근처에 위치한 내 자취방은

배달비도 비싸지 않았고

방구석에서 불어오른 배를 긁으며

시킬수 있는 음식 종류는 국경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평소처럼 퇴근하자마자 먹으려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마라탕을 주문하고

후식으로 먹을 디저트를 함께 시켰던 날


약간의 피로와 조금 후 먹을 마라탕 생각에 젖어 

기분좋게 앉아있던 내게

갑자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주문한 음식이 배달지에서 

수령인에 의해 취소되었다는 메시지였다.


?


무슨소리지

지금 우리집에는 아무도 없을텐데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에 

앱에 나와있는 배달기사에게 전화를 해봤다.


얼마간의 신호음이 간 후 

앳된 목소리의 남자 배달부가 전화를 받았고


그가 말한 내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음식을 시키지 않았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잘못 배달된건가 싶어서 주소를 확인해보았고

이상한게 없어 재차 문을 두드려보았으나

이후로는 답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처음 이 말을 듣곤 부모님이나 여자친구가 

방에 와 있나 싶어 연락을 돌려봤다.


그러나 연락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집 번호를 누구한테 알려준적이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 생각을 증명하듯 연락을 받은 누구도 

내 집에 드나든적이 없다고 하며 

자신들의 알리바리를 입증했다.


그렇다면 옆집에 사는 사람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으나

내 방은 복도의 끝방이었고

그 옆방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만이 살고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일단 집에 도착하여 현관의 구두주걱을 챙긴 뒤

집 안에 사람이 들어갈만한곳은 모두 뒤져보았다.


장농...씽크대...찬장...세탁기...신발장...

오래되어 경첩이 삐그덕거리는 문들을 다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침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들도 내가 나가기 전 위치와 동일했다.


심지어 아침에 급하게 마시다가 흘리고 간 커피의 자국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그대로 말라있었다.


너무도 수상하고 불쾌한 경험에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될지도 막막했다.


'어차피 사라진건 없으니 그냥 넘어갈까...'


집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안일한 생각이 고개를 디밀었고

긴장이 풀리며 두려움보다는 못먹은 저녁때문에

허기가 더 커지고있었다.


그냥 배달기사놈이 뭔가 수를 쓴거겠거니...하며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왔고

그날은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찝찝함이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기 때문에

출퇴근 전후로 다소 예민하게 

집 안 물건들의 위치를 확인했고

마치 진공포장하듯 집을 꽉 여미고 출근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창문 틈도 꽉 막은 뒤 열지 않게 되었다.


허나 그쯤부터 이상한 일들이 점점 잦아졌다.

집에 있다보면 멍해지는 시간이 늘어났고

정신을 차릴때마다 밥을 먹으려다가 티비를 보고있고

커피를 마시려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등

의식의 흐름이 중간중간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퇴근하기 전에 커피를 마시고 씽크대에 두고갔음에도

설거지가 된 컵이 다시 책상 위에 놓여있고

꺼낸적 없는 책들이 뜬금없이 침대 위에 있기도 했다.


무서웠다.


주변에 연고도 없던 나에게 달리 갈데가 있는것도 아니었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호신용 몽둥이만을 꼭 쥔채 

퇴근후 긴장하며 도어락을 여는것 말고는

내가 딱히 할수있는 것도 없었다.


가끔씩이나마 여자친구가 와서 자고갈때면

그런 불쾌한 느낌이 잠시 가시는 느낌이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동거를 하는게 아닌 이상 

여자친구가 본인 직장과도 먼 이곳에서

며칠 내내 지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친구가 사라지면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듯한 

소름돋는 느낌에 이제는 자다가 가위를 눌리는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렇게 신경이 예민해진채로 몇달을 보내자

불어오른 배때지와는 별개로

마치 처음 입사했을때처럼 눈이 퀭해지기 시작했다.


'더이상 여기서 이렇게 살수는 없다.'


'방을 구하는게 번거롭기는 해도

분명 찾으려면 더 좋은 방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낙관적이긴 해도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내일은 부동산을 가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


낯선 천장이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자 여자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카라가 잔뜩 번진 여자친구가

몸은 좀 괜찮냐며 날 보며 울고있었다.


"이게 무슨..."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갑자기 

두통이 머리를 꿰뚫듯 스치고 지나갔다.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침대에 기대어 눕자

이내 여자친구가 부른 간호사가 와서 

뭔가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곧이어 온 의사의 설명을 듣자 

그제야 그동안의 일들이 대충 이해가 갔다.

정신이 유난히 없던것도

물건들의 위치를 바꾸고 기억을 못하던것도

집에만 오면 머리가 조금씩 아프던것도...


예민해진 내가 방문과 창문을 필요 이상으로 틀어막자

가뜩이나 반지하여서 환기가 잘 되지 않던 차에

더더욱 공기가 빠지지 않아 이런 사단이 난것이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잠시 의자에 기대었던 나는 

그대로 기절을 해버렸고

연락이 되지 않는것을 이상하게 여긴 여자친구가 

급하게 달려와 119를 불러서

나를 병원에 데려온것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어쩜 이런 헌신적인 여자가 있을까...

생각하며 피로감에 잠시 다시 눈을 감았다.


퇴원을 하고서는 바로 다른 방을 계약했다.

문제의 원인이 밝혀지긴 했어도

그 방에서 더 오래 있고싶진 않았다.

건강을 살뜰히 챙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사람이 진공팩 안에서 살수는 없는것 아닌가.


사용하던 매트리스를 힘겹게 말아서 포장하고 

찬장과 서랍 여기저기에 넣어둔 짐들을 

부랴부랴 박스에 담았다.

좋은 기억도 없는 방에서 내 짐들을 거칠게 다시 챙기다보니

조미료와 프라이팬을 꺼내다가 그만 

씽크대 아래 공간을 막는 판자가 부서지며 앞으로 쓰러졌다.


'아이씨 이거 집주인이 뭐라고 안하겠지'


쓰러진 판자를 다시 주워서 

최대한 원래대로 다시 세워서 끼웠다.

기껏해야 손바닥 반뼘정도밖에 되지 않는 높이의 판자였기에

이리 저리 각도를 바꿔서 봐도 별로 티는 나지 않았다. 


남은 짐들을 모두 정리한뒤 그 방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침대 프레임은 이미 치워버렸고

매트리스도 이미 싸매버렸다.


어차피 한번뿐이려니 하고 수건을 대충 말아 베게처럼 만든 뒤 

방 바닥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는 시원하게 열어둔 창밖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소리가 때때로 들려왔고

그럴때면 그들의 다리 보폭에 맞춰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의 빛이 줄무늬로 수놓아졌다.


그런 발소리들을 자장가 삼아 어느샌가 나는 잠에 들었고

문득 눈이 떠졌다.

그새 뒤척였는지 몸은 옆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내 시선은 씽크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어라?


분명 아까 세워뒀을 터인 판자가 다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


사람인가?


그럴리가 없다.


씽크대 아래 틈은 기껏해야 10센치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간다는건 상식적으로 말도 되지 않아.


그럼 저건 대체 뭐지?


원래도 어두운 저 씽크대 아래에서도


유난히 더 어두운...


마치 사람과도 같은 저 검은 형태에서


두개의...너무나도 하얀 안광만이 보인다.


마치 나를 쳐다보는듯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꼬리뼈부터 목까지 훑는듯한


소름끼치는 기분이 등을 타고 올라온다.


가위에 눌린듯 몸을 움직일수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가위를 풀려고 했다.


그리고 그걸 이미 안다는듯


그 형체는 그 시릴만큼 하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


천천히 그 아래에서 미끄러지듯 내게 다가온다.


...이건 가위가 아니잖아.


내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것 말고는 눈도 감지 못한채


그저 다가오는 그 형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