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 실




내가 신림동에 있는 S고시원에 들어간 것은 7월 말이었다. 사시 2차 불합격 결과가 나오고 몇 달을 

방황하다가 -너무나 흔한 말이지만-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택한 고시원 행이었다. 

낙방하고 난 뒤 몇 달을 위로주랍시고 술에 절어 지냈더니 돈이 모자라서 애지중지하던 깁슨 레스폴 커스텀 기타까지 팔아야했다. H대학 보컬그룹에서 기타를 칠 때 5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산 보물 1호였다. 그것을 낙원상가의 중고매장에 헐값으로 넘기며 생각했다. 반드시 올해 합격해서 첫 검사월급을 룸살롱 호스티스 가슴골이 아니라 이놈을 다시 사는데 써야겠다고. 





신림동에 널리고 널린 고시원 중에서 특별히 S고시원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주간 '고시소식'에 매년 너덧명의 고시합격자를 배출해 내는 이른바 '명당'으로 소개된 곳 이었던 것이다. 너덧명이라고 하면 잘 실감이 나지 않지만 전체 수용인원이 50명이 고작인 작은 고시원에서 너덧명이면 거의 10%에 육박하는 놀라운 합격률이었다. 보통 고시원 쪽방이 한쪽 면에 10개씩 늘어서 있으니까 매년 그 중 한 방에는 '축 합격' 플랭카드가 붙는다는 뜻이다. 10연발 권총에(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랜덤으로 총알을 한발 넣어보자. 그걸 머리에 대고 쏘면 1억을 준다고 해도 진심으로 선뜻 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0%라는 수치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방이 다 찼는데요. 방학시즌인데다 '고시소식'에 나오면서 진짜 순식간에 꽉 찼다니까요. 지금 예약하셔도 두 달은 기다리셔야 해요" 


눈이 반쯤 감긴 총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앞 이빨이 툭 튀어나온 마른 남자였는데 벌써부터 훌떡 벗겨진 이마에는 벌건 반점이 일장기처럼 찍혀있었다. 아마 뼈 밖에 없는 팔뚝에도 같은 문양이 찍혀있을 것이다. 두툼한 헌법책은 책상 뒤쪽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있었으니 용도를 알만 했다. 고시원 총무를 몇 년쯤 하다보면 누워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기나 보다. 


"어제 전화 드렸을 땐 방 하나가 남았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따지듯이 묻자 총무는 아아..그거요 하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가 잠이 덜 깨서..잘못 말씀 드렸어요. 원래 그 방은 비어있는 방인데.." 


"원래 비어있는 방이요?" 


어이가 없었다. 비워두기 위해서 있는 방이라니. 


"그게 사정이 좀 있어요. 실생들 불만이 유난히 자주 들어오는 방이라서 작년 가을 이후로 가끔 청소 할 때 빼놓곤 잠가두고 있거든요." 


총무가 이제 잠이 깨는지 발음이 좀 또렷해졌다. 튀어나온 앞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잘도 지껄여댄다. 


"불만..이라니요..?" 


"별건 아니에요. 자꾸 옆방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하고 문 앞에 사람이 자주 왔다 갔다 해서 집중이 안 된다고도 하구요. 원래 고시원이라는 데가 그렇잖아요. 방음도 잘 안되고 사람도 많고.." 


"유독 그 방만 그런가요?" 


"위치상 문제될 건 없어요. 세면실이나 휴게실하고도 떨어져 있구요. 아, 창가 쪽이라서 외부소음이 좀 있긴 해요. 창문이 상가 주차장이랑 면해있거든요. 그래도 심각할 정도는 아닌데...아무래도 방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유독 그 방에 들어오신 분들이 신경이 좀 예민하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자꾸 불만이 들어오면 고시원 이미지도 있고 해서 아예 그 방은 접수를 받지 않고 있어요" 


"혹시 방 번호가 666호실 인가요? 1028호실이라던지" 


"246호실인데요" 


총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거라면 별로 겁나지 않는 번호였다. 


"일단 보여주세요" 


"말씀드렸다시피 그 방은.." 


"보기만 할게요" 


총무는 만화에나 나올 듯한 표정으로 잠시 잉-하고 미간을 찡그리더니 열쇠꾸러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오세요" 


총무가 앉아있던 책상에는 법전 대신 성경책이 놓여있었다. 





"여기에요" 


문을 열자 환한 햇살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방안이 어두침침했다. 


"창가 방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햇빛이 드는 쪽이라 낮에는 커튼을 쳐놔요." 


총무가 창가에 다가가서 검은 커튼을 좌우로 열어젖히자 비로소 방 안이 환해졌다. 그것은 차마 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의 크기였다. 차라리 넓은 '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다. 내 키가 180을 넘지 않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아마 그랬다면 정수리와 발바닥을 양쪽 벽에 딱 붙이고 잠을 자야할 판이었다. 1평 남짓한 공간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발을 책상 밑 공간으로 넣어야 하는 침대 하나가 부피를 점유하고 있는 물체의 전부였다. 새로 도배했는지 벽지는 깨끗했다. 


"고시원생 중에는 낮밤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커튼은 모두 검은색이에요. 뭐 처음엔 어둡네 음침하네들 하셔도 나중엔 적응하시더라구요" 


"검은 커튼이라..특이하군요." 


정말 먹물처럼 검은 커튼이었다. 검지와 엄지로 살짝 비벼보니 비단결같이 결이 촘촘하고 매끈한 질감이 느껴졌다. 이정도 밀도로 직조되어 있으면 대낮에도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과 천장사이에 폭 10cm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커튼의 끝은 그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망가지거나 하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교체하는 걸까. 


"이 방으로 하고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꼭 이 고시원에 들어오고 싶었고 남는 방은 이 방 하나뿐이었다. 


"허어 이거 참" 


총무가 또다시 앞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원장님께 말해보구요" 


총무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잠시 후 나에게 '246'이라는 숫자가 적힌 작은 열쇠 하나를 주었다. '쓰셔도 된데요'라니. 싱거울 정도로 간단했다. 





S고시원은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의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에는 찜질방이 있었고 1층에는 종합상가, 2층에는 고시원 및 병원이 있었다. 그 위로는 15층짜리 아파트단지가 수직으로 올라갔다. 특히 상가에 해당하는 1,2층의 면적이 넓어서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시루떡 위에 전병을 포개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고시원 뒤쪽에는 건물주차장이 있었다. 한쪽에 청소도구나 삽, 쓰레기수거 포대 등을 모아두는 컨테이너 창고가 있었고 담장을 따라 폭 1.5m정도의 작은 텃밭이 빙 둘러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누가 돌보고 있는지 상추나 호박 따위의 야채류가 자라고 있었다. 


창문은 모두 건물 뒤쪽의 주차장을 면해 있는데 일렬로 쭉 늘어선 십여개의 창문에 모두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 방 창문이 어디쯤일까 속으로 위치를 계산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커튼 사이로 둥글고 흰 물체가 불쑥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관리인 몰래 창문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시생들의 얼굴이었다. 건물 내에서는 금연이었던 것이다. 


주차장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막 2층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거무틔틔한 물체 2개가 내 발 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둑고양이 한 쌍이었다. 둘 다 살이 뒤룩뒤룩 쪄서 거의 개만한 크기였다. 한 마리는 온몸이 새까맿고 다른 한 마리는 회색 바탕에 갈색 얼룩반점이 있었다. 놈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사람 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쉿하고 발을 구르자 햐악-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주차해 놓은 트럭 밑으로 느릿느릿 사라졌다. 





고시원 내부는 目자 구조로 되어있었다. 획 하나 하나가 방이 있는 공간이고 획과 획 사이가 통로에 해당되었다. 방의 갯수는 가로 맨 윗변에 창가가 있는 방이 10개, 그것과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방이 10개, 두번째 통로의 위쪽에 방 10개, 역시 통로를 마주보는 방 10개 그리고 맨 아랫쪽 통로의 위쪽에 방10개 이렇게 총 50개였다. 맨 마지막 변은 건물복도와 고시원을 경계 짓고 있는 벽이어서 방이 없었다. 내가 있는 246호는 맨 윗변 창가자리의 왼쪽에서부터 3번째 방에 해당되었다. 입구나 세면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생활소음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위치였다. 


소음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고시원 전체를 매케하게 뒤덮고 있는 독특한 향 냄새였다. 어쩌면 50명에 육박하는 남자들이 일제히 뿜어내는 노총각 특유의 냄새인지도 몰랐다. 쑥이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제사 향 같기도 한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성인 남자가 혼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은 생각보다 많았다. 잠만 자고 밥은 밖에서 사먹으면 되니까 그저 이부자리나 들여놓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당장 아침에 일어나서 씻으려면 샴푸, 비누, 치약, 칫솔이 필요했다. 갈아입을 위아래 옷도 필요했고 옷이 있으면 그것을 담을 수납상자도 필요했다. 옷은 입으면 빨아야 한다. 세제는 개인부담이니 그것도 사야했다. 뿐만 아니라 세탁한 빨래를 넣고 다닐 빨래바구니와 건조대에 걸을 옷걸이도 필요했다. 벽에 수건이나 바지 따위를 걸 수 있는 간이고리도 샀다(뒷면을 라이터로 지져서 붙이는 방식이었는데 꽤 튼튼했다. 차마 고시원에서 망치를 휘두를 용기는 없었다) 옷 수납상자와 빨래 바구니 등은 둘 공간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조립식 선반에 두었다. 그밖에 공부에 필요한 온갖 문구류 따위를 사고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를 듀오백으로 바꾸고 나니 어느새 깁슨 기타를 판 돈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토록 아끼던 기타의 부속을 하나하나 뜯어서 치약이나 빨래바구니 따위와 바꾸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인터넷 쇼핑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가격비교를 쉽게 할 수 있어서 손품만 팔면 시중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요즘은 주문하고 다음날이면 배송이 되니 양손을 비닐봉지를 서너개씩 들고 시장을 돌아다닐 일도 없었다. 게다가 오프라인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기발하고 재미있는 물건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프로젝션 알람시계'였다. 일반 자명종 시계와 달리 레이져 빔 같은 것을 벽에 쏴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었는데 불을 끄면 붉은 빛으로 된 시간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원하는 곳은 천장이고 벽이고 상관없이 시간을 표시할 수 있어서 자다가 핸드폰을 열지 않고도 바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입구 쪽 선반 위에 놓아서 커튼에 투사되도록 해두었다. 그러니까 책상에서 내가 공부하다가 고개를 들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 위치였다. 침대에서 머리를 그 반대쪽으로 놓고 자니까 그렇게 해야 누운 상태에서도 한눈에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날 대전에 있는 집에서 택배로 부쳐준 짐을 대충 정리하고나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어있었다. 하루 종일 쇼핑을 다니고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책은 한자도 들여다보지 못했다. 30분이라도 공부를 하려고 막 책상에 앉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이 시간에 누굴까.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보니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의 키 큰 청년이 플라스틱 쟁반에 커피 2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긴 갈색머리에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직 안 주무셨네요. 235호에 사는 이창민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새로운 분이 오셨다길래 인사드리러 왔어요. 우리 고시원의 최대장점이 바로 가족적인 분위기이거든요.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창민이라는 청년은 불쑥 커피잔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신경을 긁는 부자연스런 하이톤이었다. 남자가 억지로 여자 목소리를 흉내는 듯한.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지는 않았지만 손수 타온 커피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하고 그가 내민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일단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싱크대에 쏟아버릴 생각이었다. 


“이게 바로 우리고시원 특유의 ‘총무실커피’입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후루룩.. 


“맛있네요” 


혀를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덜척지근한 설탕기운이 느껴졌다. 끝맛은 약간 씁쓸했다. 


“후훗 제 별명이 고시원 미쓰리예요. 커피나 컵은 총무실에 항상 있으니까 언제든 타서 드시면 되요. 아님 말씀하시면 제가 타드릴게요.” 


창민은 여자같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말로만 듣던 게이인가?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 사람이 언제까지 여기서 비적대고 있을 생각인지 궁금해졌다. 새벽 1시다. 다른 방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아까부터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어떤 시험 준비하세요?” 


창민이 물었다. 


“사법고시준비하고 있어요.” 


“와 어려운 거 하시네요. 저도 재작년까지 사시 준비하다가 도저히 가망이 안보여서 7급 공무원으로 바꿨어요. 저번 달에 서울시 일반행정직 시험을 봤는데, 정말 걱정이예요. 붙기만 한다면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내 방문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고시와 정치와의 관계, 경제, 사회문제까지 끊임없이 지껄여댔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그가 연거푸 시험에서 미끄러지는 이유에 그의 탓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사회 탓이라는 Looser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남의 방문 앞에 버티고 서서 수다를 떠는 것을 보면 예절에도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냥 듣고 있기만 하기도 멋쩍어서 간간히 맞장구를 쳐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포장마차에서 고생하신다는 어머니의 감동적인 인생역정까지 말한 후에야 그의 수다는 끝이 났다. 그때쯤 커피와 함께 나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첫날부터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안 그래도 짐 정리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사실 그 말은 30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아뇨,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인사드릴게요. 그럼 이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보험 설계사같이 끈덕지게 달라붙던 그를 돌려보내고 나자 갑자기 피로감이 확 밀려왔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정신이 몽롱했다. 하긴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속설은 ‘커피를 마셨으니 잠이 안 올 것이다’라는 자기최면 때문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나는 책상위에 엎드려 문제집에 얼굴을 쳐 박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핸드폰 알람소리에 깨어나 보니 아침 8시 반이었다. 장작더미 위에서 자고 일어난 것처럼 허리랑 어깨가 쑤셨다. 오랜 시간 동안 무리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뇌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은 주로 시각적인 아미지가 아니라 청각적인 이미지와 후각적인 이미지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다. 쿵쿵거리며 벽을 두드리는 소리, 도살장 짐승의 단말마 같은 사람의 비명소리. 수많은 사람들의 부산한 발자국소리. 알 수 없는 중얼거림. 그리고 말린 쑥 같은 이상한 향냄새와 비릿한 피냄새. 첫날이라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정신 사나운 꿈이었다. 


기지개를 켜니 뭐가 손끝에 걸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받아 챘다. 어제 마시다 만 커피잔이었다. 흑갈색 커피찌꺼기가 바닥 가장자리의 오목한 모서리를 따라 젤리처럼 말라붙어있었다. 창민이라는 사람이 급하게 가느라고 가져가는 것도 잊어버렸던 것이다. 정말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총무실에서 가져온 거라고 했겠다? 나는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꿈속의 불쾌한 소리들이 군화를 신은 채 온 집안을 헤집은 군인들처럼 나의 뇌 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총무는 침상에서 성경책을 배게 삼아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밤에는 무엇을 하길래 낮에 이렇게 자는 것인지 궁금했다. 몇 번 본적은 없지만 볼 때마다 졸린 표정 아니면 엎드려 자는 모습이었다. 데스크에선 총무 대신 운동선수같이 어깨가 딱 벌어진 땅딸막한 남자가 대신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커피잔을 돌려드리려고 왔는데요.” 


“아, 새로 오신 236호 최준영씨죠? 컵은 이리 주세요.” 


사내는 컵을 받더니 티슈를 정수기 온수에 적혀 익숙한 솜씨로 즉석 설거지를 했다. 이런 위생 상태로 관리되는 컵인 줄 알았으면 보약이라고 해도 아마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217호 강동윤이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총무가 시원찮아서 가끔 대신 일을 봐주고 있죠. 준영씨랑은 같은 통로에 있으니까 아마 자주 마주칠 겁니다.” 


남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엉겁결에 마주 쥔 사내의 손은 나무 등걸처럼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바이스로 조이는 듯한 묵직한 악력이 느껴졌다. 


“와 운동하시나 봐요?” 


자세히 보니 동윤이라는 남자의 체격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건장함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키가 다소 작아서 그렇지 두툼한 가슴 근육 때문에 티셔츠가 터질듯이 긴장되어 있었고 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뚝은 거의 내 허벅지랑 비슷할 정도로 우람했다. 


“뭐, 공부하다보면 스트레스를 풀 곳이 운동밖에 없으까요. 어차피 경찰시험 보려면 실기시험도 대비해야 하구요.” 


“그 정도면 충분하신데요.” 


“아직 멀었어요, 옆 건물에 T헬스장이라고 있는데 여기 고시원생이라고 하면 회비도 만원이나 할인 되요. 혹시 운동 좋아하시면 같이 하실래요?” 


“아..아뇨 전 운동이라면 질색이라서요.” 


이런 고릴라같은 놈과 같이 운동을 하다간 걸어 나오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잠을 깬 총무가 본격적으로 대화에 가담할 기미가 보이길래 나는 소변이 급하다는 핑계로 황급히 총무실을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너무 가족적이어서 피곤한 사람들이었다. 총무실 옆의 현관에서 슬리퍼를 꿰차며 보니 흙 묻은 운동화 몇 켤레가 보였다. 아직 물기도 마르지 않은 갈색 진흙이 밑창에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축구를 했는지 농구를 했는지 모르지만 저런 정도면 밖에서 털고 들어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젠가 정신이 말짱한 상태의 총무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요의가 밀려왔던 것이다. 





화장실은 충무실에서 나와 오른쪽 복도를 따라 쭉 올라가면 그 끝부분에 있었다. 나는 가운데 소변기 앞으로 가서 지퍼를 내렸다. 삑. 나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물을 한차례 흘려보낸다. 낡은 건물에 비해 화장실은 비교적 시설이 좋았다. 변기도 좌변기였고 소변기와 세면기에도 모두 센서가 달려있었다. 오줌이 방광을 거처 요도를 흐르는 느낌이 짜릿하다. 오줌 눌 때면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소변기 정면에는 ‘금연’이라고 써붙인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짓궂은 누군가가 그것을 라이터불로 이리 저리 지져놓아서 거무스름하게 탄 자국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을린 자국 하나 하나에 흡사 사람의 얼굴 처럼 눈,코,입에 해당하는 부위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검게 타 있었다. 물론 완전한 형상도 아니고 이리 저리 일그러진 모습이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사람얼굴로도 보였다. 내 눈에는 그것이 왠지 지옥 불길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밤새 내 몸 속에 축적된 1리터에 가까운 더운 액체를 한꺼번에 덜어내고 나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충 소변의 물기를 털고 지퍼를 올리려는 순간, 바로 옆에 있는 소변기에서 삑. 소리가 나며 물이 흘렀다. 마치 그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것 처럼. 또다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2-3도는 내려간 것 처럼 서늘해졌다. 팔뚝이 솜털이 소소소소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오작동이겠지. 관리인에게 말해야겠어.’ 


가끔 센서가 고장나는 소변기가 있었다. 그런 소변기는 하루종일 물을 흘려보내 화장실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곤 했다. 내 옆에 있는 소변기의 센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지퍼를 올리고 세면기 쪽으로 몸을 돌리자 등 뒤쪽에서 다시 쉬이-하고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나란히 있는 두 소변기에서 동시에 내려가는 소리였다.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무언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 오전 9시다. 화장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로 환했다. 귀를 기울여보면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게시하는 도시의 부산한 소리가 들려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라니. 어린아이같은 생각이 파고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울렁거리는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나는 세면기로 달려갔다. 센서가 달린 수도꼭지가 내 손을 감지하고 차가운 물을 내보낸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손을 벅벅 씻었다. 정신차리자. 아직 잠이 덜 깼으니 그렇지. 나는 양손을 모두어서 차가운 물을 한웅큼 받아 세수를 하기시작했다. 푸아- 푸아- 잡스러운 생각을 떨쳐낼 듯이 일부러 입으로 큰 소리를 내며 얼굴을 닦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얼굴을 닦는데 어느샌가 얼굴에 와 닿는 물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뭘 닦고 있는 거지? 물기를 담은 양 손으로 가만히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얼굴이 없다! 대신 차가운, 누군가의 손이 느껴진다. 마디가 없는, 가늘고 길죽한 손이었다. 번쩍.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정면의 거울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내 얼굴이 보인다. 두려움에 휩싸인 두 눈을 바보처럼 부릅뜨고 있다. 뭐였지. 방금 느껴진 누군가의 손은. 단순한 착각이었나. 잠깐. 뭔가 이상하다. 내 머리의 정수리 한가운데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단순히 머리가 떠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머리위에 누군가의 머리를 포개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보았다. 정수리부분의 검은 부분이 점점 늘어난다! 마치 내 뒤에 나와 겹쳐서 서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듯! 조금 상체를 숙이자 마침내 내 뒤쪽에 있는 ‘그것’의 창백한 이마가 드러났다. 조금 더 고개를 숙인다. 그 밑으로 보이는 붉게 충혈된 눈!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없다. 아무도 없다. 밝은 화장실엔 나 뿐이다. 역시 신경과민이었다. 그 때, 아무도 없는 내 뒤쪽에서 삑. 하고 세면기의 센서가 작동하더니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듯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복도에 있는 사람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고시원이 있는 2층에는 미술학원도 있었다. 복도에는 미술학원 꼬마들이 그린 그림들이 쭉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솜씨자랑 겸 새로운 수강생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리라. 그림들의 소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와 손잡고 놀이공원에 간 그림(공작새가 거의 공룡크기 만하게 과장되어 있었다) 박터트리기를 하고 있는 학교 운동회, 소풍등이 크레파스로 천진난만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그림답게 사람의 비율도 제각각 이었고 원근법도 엉망이었다. 아빠의 키가 거의 2미터도 넘게 그려져 있기도 있고 위치상 멀리 있는 사람이 더 커보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심리적인 크기를 도화지에 옮겨놓았을 것이다. 아빠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거인처럼 보일테니 그렇게 그렸을 테고 아이들에겐 원근법보다도 중요한 사람 순으로 크게 그리는 것 같았다. 색감도 독특했다. 사람의 얼굴을 분홍빛으로 칠한다든지, 태양을 파랗게 색칠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그림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고시원이 있는 상가건물 전체를 묘사한 풍경화였는데 하늘에서 위로 내려다본 구도였다. 헬기라도 동원하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직접 관찰하고는 그릴 수 없는 각도였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정도면 탁월한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건물 뒤쪽의 큰 가로수 옆에는 그림을 그린 본인으로 보이는 아이가 숨어있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가로수 보다도 더 크게 그려서 있었다. 얼굴은 거의 모여라 꿈동산 수준, 저래서야 아이 뒤에 가로수가 숨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아이의 얼굴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멜빵 청바지에 원색적인 빨간 운동화가 눈에 확 띄었다. 어쨌든 아이는 화초만한 가로수 뒤에 숨어서 무언가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것은 고시원건물 전체를 칭칭 휘감고 있는 듯한 거대한 뱀이었다. 뱀이라기 보다는 용에 가까운 크기였는데 건물을 두세번 휘감고 있는 몸통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특이한 것은 뱀의 얼굴이었다. 뱀의 대가리 대신 사람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눈을 하얗게 치켜뜨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는데 얼굴이 하늘빛에 가까운 푸른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입에서는 두갈래로 갈라진 검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는데 서툴게 그려진 그림인데도 묘하게 두려움을 자극했다. 





혼자 생활하는데 있어 세탁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다음날 팬티바람으로 학원에 가고 싶지 않으면 밀린 빨랫감부터 해결해야했다. 고시원에 들어온 지 겨우 이틀째인데 내 방문 바로 위쪽에 있는 쇠로 된 옷걸이에는 벌써 3분의 1정도 빨랫감이 널려있었다. 약 2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방을 가로지르는 튼튼한 쇠봉이었다. 


"빨래는 밖에 있는 건조대에 거셔도 되구요, 수건이나 속옷 같은 건 방에 있는 쇠봉에 거세요. 특히 여름이라 수건이 모자라서 다른 사람이 막 가져다 쓰기도 하거든요" 


첫날 총무가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쳐주며 한 말이었다. 


"혹시 자다가 쇠봉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떡하죠?" 


"그거 꽤 튼튼한 거에요. 고시원 자체가 옛날 건물이라 벽이 요즘 고시원같이 합판이나 석고보드가 아니라 벽돌로 되어있거든요. 쇠봉도 건물 지을 때부터 벽속에 묻혀 있던 거라 사람이 매달려도 끄떡없구요. 어떤 사람은 아침마다 턱걸이를 하기도 하더라구요. 시끄럽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그만두기는 했지만요" 


나는 그 튼튼하다는 쇠봉을 올려다보며 빨래바구니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세탁실로 가려면 내 방문을 나와 양쪽으로 마주 본 문이 쭉 늘어서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야 했다. 귀신이 밤마다 방문을 하나하나 두드리고 다닌다는 괴담이 딱 어울릴만한 그런 구조였다. 여름에는 대개 반쯤 문을 열고 생활해서인지 방마다 발이나 천이 쳐져 있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방 번호를 외우기 힘드니까 편의상 천에 그려진 그림으로 호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태극기방’ ‘비치타월방’ 이런 식이었다. 내 방은 일명 ‘스파이더맨 방’이었다. 문가리개로 쓰는 대형비치타월에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그려져있었던 것이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옆방을 슬쩍 보았다. 문은 닫혀있었지만 문 위쪽 좁은 창을 통해 불이 켜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했다. 바로 옆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세탁실에 들어서자 눅눅한 증기가 확 얼굴을 덥친다. 샤워실과 공용이라 누군가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샤워기 쪽에 쳐진 간이 커튼 밑으로 남자의 두 발이 보였다. 그 밑에서 붉은 피가 물에 섞여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며 타일 골을 헤치고 흘러내렸다. '어디 다쳤나?' 커튼 뒤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서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비쳐보였다. 낮은 톤으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걱정되긴 했지만 뭐라 말을 붙이기도 어색했다. 나는 샤워실 구석진 곳에 있는 세탁기를 열고 그동안 쌓인 세탁물을 쏟아부었다. 세탁기는 자동으로 설정되어있어서 세제를 뿌리고 '작동' 버튼만 누르면 끝이었다. 버튼을 꾹꾹 누르고 손을 털자 세탁기는 주책맞은 아줌마처럼 몸을 실룩거리며 빨래를 돌렸다. 


세탁기에 표시된 남은 시간38분이었다. 스터디 자료나 정리하고 오면 딱 맞을 시간이었다. 막 세탁실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어서 나가!’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났다. 아니, 차라리 느낌이랄까? 귀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상상할 때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퍼뜩 놀라서 다시 들어가 보았다. 내가 거칠게 문을 연 반동 때문이었는지 샤워커튼이 약간 펄럭였다, 그런데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맨발로 샤워실로 뛰어 들어가 커튼을 젖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럴수가, 아까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벌써나갔나?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발에 뭔가 뜨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희미한 핏줄기가 내 새.끼발가락을 휘어 감고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오물로 막힌 배수구에는 아직 붉은 기운이 엷은 띠를 이루며 불길한 구름처럼 맴돌고 있었다.

2) 소 리




"준영아 이사는 잘 했니?" 


학교 식당에서 만난 형민이 식판을 들고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형민은 함께 민법스터디를 하는 법대동기였는데 음악적 취향이 비슷해서 신입생 때 함께 보컬그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형민이 군대를 가기 전이었던 2년 전, '위스퍼‘라는 낯 뜨거운 이름의 밴드에서 나는 기타를, 형민은 드럼을 맡았었다. 형민은 식판을 내려놓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를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한때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팀을 하기도 했지만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형민에 비해 신앙에 대한 열정이 미지근한 편이었다. 형민이 기도를 하는 사이 나는 그의 식판에서 소세지부침 하나를 집어 내 입에 날름 집어넣었다. 


“미안하다야. 내가 좀 도와줬어야 하는건데..” 


형민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웃으며 계란국을 떠먹었다. 소세지가 없어진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쥐구멍만한데 들어가는데 도와줄 것 까지 있냐. 등산용 배낭으로 두 번 나르니까 끝이더라. 집에서 가져올 건 가져오고 살 건 사고 이제 거의 다 정리됐어." 


"피곤해 보이는데?" 


"말도 마. 어저께 침대가 삐걱거려서 3시까지 잠도 못 잤다. 이건 뭐 야전침대도 아니고. 옆방에선 조용히 하라고 계속 벽을 쳐대지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새벽엔 또 웬 모기가 그렇게 극성이던지." 


잠을 못 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골이 띵했다. 팔 다리도 밤새 긁어서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나저나 기타도 팔았다며? 이제 음악 안 하려구?" 


"일단 생활비가 없으니까 할 수 없지." 


"에이 같이 합격해서 판검사밴드 만들기로 했잖아." 


"걱정 마 임마, 올해 합격만 하면 훨씬 좋은 걸로 다시 살테니까" 


나는 말하는 틈틈히 밥과 반찬을 볼이 미어져라 입에 쑤셔 넣었다. 돈을 아끼느라 밥 다운 밥을 먹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고시원이야?" 


"S고시원." 


"다행이다. 혹시 그쪽에 H고시원이라고 들어봤어?" 


"H고시원? 처음 듣는데?" 


"에? 이 바닥에 떠도는 신림동 H고시원 사건 몰라? 유명한 건데..." 


형민은 아예 자기 식판도 옆으로 밀쳐놓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뭐야 그건" 


"9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H고시원이라는 곳에 한 여자 고시생이 살았데. 한 5순가 6순가 했던 장수생이었나봐" 


"90년대면 거의 15년 전 아니야? 무슨 전설의 고향이냐?" 


"좀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왜 지방에서 상경해서 친구도 없이 공부만 하는 얘들 있잖아? 밥도 혼자 먹고 공부도 혼자 하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하고 사는 얘들. 그 여자도 그런 유형이었나 봐. 그래도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꿀었으니 짬밥이 있는지 실력은 왠만한 학원강사 뺨쳤다는군. 학원에서 누가 물어봐도 척척이었대." 


"으음, 한마디로 요즘의 나와 같은 상태였군. 실력은 딴판이지만." 


"암튼 몸매도 날씬하고 얼굴도 예뻐서 꽤 눈에 띄는 여자였나봐. 하긴 당시엔 고시 공부를 하는 여자 자체가 희소성이 있는 시대였으니 오죽했겠어. 근데 이상하게도 그 여자한테 찝적대는 남자는 없었데." 


“성격이 안 좋았나?” 


“아니, 그 여자의 특이한 모습 때문이었어. 일종의 징크스였던 거지.” 


“어떤?” 


“특이하게도 그 여자는 스스로 맹세하기를 시험이 끝날 때까지...” 


"야 형민이! 준영이! 오랜만이다." 


그때였다. 또 다른 스터디 멤버인 동현이가 나타난 것은. 그 뒤로 대화의 주제가 어찌어찌 고시 쪽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나는 형민의 뒷이야기를 못 듣고 말았다. 당시에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형민은 물론 나조차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당분간은 말이다. 





나는 스터디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총무실부터 들렀다. 택배가 올 것이 있었다. 왠만한 우편물은 총무실에서 받아두었기 때문에 낮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어 편리했다. 


“혹시 246호실로 택배 온 것 있나요?” 


문을 열자 총무실에는 왠 낯선 여자가 와 있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기품 있어 보이는 단아한 정장차림에 자연스런 갈색 퍼머머리가 나이에 맞지 않게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아, 준영씨 우리 원장님 처음 뵙죠? 최경란 원장님이세요.” 


“아..안녕하세요.” 


얼결에 인사를 하자 여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미용실 원장 같았다. 


“우리 원장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이곳 건물주이신데다 현직 변호사이시거든요, 당시에 여자가 사시에 합격했으니 정말 대단했죠.” 


“대단하긴 뭘, 누구나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걸. 박군도 열심히 하면 올해 꼭 합격할 수 있을거야.” 


원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 양 볼에 보조개가 옴폭 들어가서 나이를 무색케 하는 섹시함 마저 풍기고 있었다. 


“최준영씨라고 했죠?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총무실 통해서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이곳을 인수한 이유도 후배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서이니까요. 열심히 하셔서 꼭 합격하시구요” 


원장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나이가 들어서 주름이 있었지만 여전히 희고 긴 손가락이었다. 약지 손가락에는 십자가모양 반지가 있었다. 십자가의 4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변형된 십자가였다. 


“참, 잊을 뻔 했네. 준영씨 앞으로 택배 온 게 있어요.” 


그제야 총무가 나에게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내 방에 들어와서 상자를 열자 신문지에 돌돌 싸인 조그만 화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이었다. 요즘 들어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낮에 환기를 위해 잠깐 창문을 열어놓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틈에 잠입하는 것 같았다.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고 잠을 청하다보면 윙윙 거리는 소리도 없이 허벅지나 팔뚝이 따끔거렸다. 불을 켜고 찾아봐도 이 영악한 놈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F킬라나 전자모기향을 사자니 특유의 냄새 때문에 꺼려졌다. 그 때 생각난 것이 바로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는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이었다. 이를테면 무당벌레를 키워서 벼멸구를 잡는 식의 천적요법이었다. 그러나 화분을 꺼내 본 순간 나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택배기사의 부주의로 화분의 흙이 쏟아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식물의 크기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았던 것이다. 신문이나 인터넷뉴스의 클로즈업 사진으로 봤을 때는 숟가락만한 덫으로 철컥 철컥 파리나 모기를 잡아대는가 보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귀후비개만한 여린 입사귀가 자그마한 본체에 안쓰럽게 붙어있었다. 이래서야 모기는커녕 진드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 할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죽은 모기를 덫에 놓아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그것을 책상위에 관상용으로 놔두기로 했다. 





고시원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 목표한 분량의 공부를 끝내고 파김치가 되어 침대에 드러누웠다. 등이 침대매트에 닿자마자 뚜두둑 소리가 나며 침대가 한쪽으로 씰구러 졌다. 그 바람에 나는 침대에서 떨어져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월 26만원짜리 고시원에서 고급침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눕는다. 안락한 쿠션감은 고사하고 뒤척일 때마다 녹슨 스프링에서 작은 동물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옆방에 들릴까봐 신경 쓰여서 잠도 오지 않았다. 옆방 사람은 지나치게 민감했다. 아니 거꾸로 옆방이야 말로 소음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벽을 두드려대는 통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한동안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니 또다시 침대가 비명을 질러댔다. 쿵쿵. 옆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나는 내일 당장 침대를 들어내고 대신 요를 깔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뒷굼치를 들고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벽을 두드려대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내 방, 즉 246호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 특이했다. 시도 때도 없이 벽을 두드려대는 옆방 사람도 그랬지만 내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이상했던 점은 거울의 배치였다. 거울이 벽이 아니라 책상정면의 책꽂이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완전한 정면이 아니라 좌우로 약간씩 비껴서 두개의 거울이 붙어있었다. '이건 마치..'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바로 내 등 뒤를 살필 수 있는 그런 거울. ‘자동차의 백밀러 같잖아?’ 아마 나보다 먼저 이 방을 썼던 사람이 부착한 거울일 것이다. 도대체 이 좁은 방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귀찮아서 그랬을까? 아니면..차마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기 조차 꺼려지는 것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하긴 나부터도 밤중에 혼자 공부하다보면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가만히 서서 내 등을 쏘아보는 것 같은 느낌. 괜히 목덜미를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등골이 스멀스멀하고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드는 그런 느낌. 사람이란 자신의 시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 망상을 점점 구체적으로 키워간다.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본능적 감정에 어둠이라는 촉매가 융합하여 발생한 무색무취의 유독가스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거울을 백밀러처럼 부착한 것은 도가 지나치다 못해 좀 유아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떼어서 왼쪽 벽에 있는 큰 거울 밑에 나란히 붙였다. 두개의 작은 거울을 나란히 걸어놓으니 큰 거울의 폭과 거의 비슷해서 세 개로 분할된 전신거울처럼 되었다. 위쪽의 큰 거울이 내 얼굴부터 가슴부근까지 비추었고 밑의 작은 거울 두개가 몸통과 양쪽 팔을 비추었다. 나는 웃통을 벗고 보디빌더처럼 폼을 잡으며 마른 근육을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더니 체중이 4킬로나 빠졌다. 그나마 팔굽혀펴기로 만들어 놓았던 약간의 가슴근육도 다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은 여자들이 보기에 매력을 느낄만한 군살 없는 몸매다. 복근, 팔 근육, 어깨근육..몸을 움직일 때마다 세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몸의 각 부위가 미묘한 시차를 두고 따로 노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악!” 


그때 내 잎에서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오른손을 비추던 작은 거울 속에, 내 손 대신 창백한 여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시체처럼 푸르스름하고 야윈 손에 몇 년 동안 깍지 않은 듯한 손톱이 이리저리 비틀리며 길게 자라나 있었다. 놀라서 다시 거울을 확인해 보니 빈약한 근육의 내 팔이 비칠 뿐이었다. 요새 갑자기 공부 양을 늘려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까. 어쨌든 기분이 나쁘다. 불길하다. 나는 그 거울을 고시원 밖의 쓰레기통 옆에 가져다 버렸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주변에 자신의 온갖 흔적을 남긴다. 한 사람이 살다 간 공간은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남는다. 물질적은 것은 물론이고 어떤 사념까지도 말이다. 흉가나 폐가에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유령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요사이 만화나 드라마의 심령 미스터리 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이코메트리‘라는 초능력도 알고 보면 3자리수 곱셈을 순식간에 해내는 것과 같이 조금 특이한 능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이러한 수많은 흔적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게 감지해 내고 순간적인 통찰력으로 조합해서 과거의 일을 파악해내는 능력일 것이다. 


그런 특수한 능력이 없는 보통사람이라도 조금 시간을 가지고 머리를 굴려보면 흔적들을 조합해서 의외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하루에 한 번씩 방 청소를 하면 전 주인의 온갖 흔적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바닥을 닦을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나왔는데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책상에는 ‘적당히 원하면 핑계가 생기고 간절히 원하면 방법이 생긴다’ 따위의 명언이나 ‘어서 이 곳을 떠나고 싶다’와 같은 신세한탄이 칼이나 볼펜으로 낙서되어 있었고 책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서는 종이박스를 뜯어서 접어놓은 것과 레코드판이 발견되었다. 이 모든 흔적들이 주는 정보를 종합해 보았을 때 전 방주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음악을 좋아하는 고시 준비중인 여자-혹은 긴 머리의 남자-’라는 것이었다. 남성 전용고시원이니 여자일리는 없고 머리가 긴 남자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런 생각에 약간의 비약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이 70-80년대 하드록이라면 이런 생각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올드록 팬 중에는 록커처럼 머리를 기르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레코드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나는 책상과 벽의 틈새에서 레코드판을 발견하는 순간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흥분했다. 아쉽게도 커버가 없어서 어느 앨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레코드판의 표면을 쓸어 먼지를 닦아내니 검은 광택이 살아났다. 참빗으로 빚은 머릿결같이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표면에 음의 흔적을 담은 동심원들이 육상경주트랙처럼 겹겹이 늘어서 있다. 우리 뇌의 주름에 정보가 저장되듯이 이 골에 음의 진동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바늘은 그 골 사이를 다니면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해 내고 앰프는 그 떨림을 증폭시켜 스피커를 통해 장엄한 소리를 뿜어낸다. 


어렸을 적 에디슨 전기를 읽다가 축음기의 발명원리를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턴테이블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축음기와 똑같다. 축음기의 원통에는 얇은 주석으로 된 가느다란 골이 파여져 있고 그 사이를 바늘이 지나다닌다. 바늘은 음성을 감지하는 떨림판과 연결되어있다. 바늘을 골에 넣고 원통을 돌리면서 말을 하면 음성의 진동은 떨림판을 통해 바늘로 전달되고 바늘의 떨림은 그대로 원통 표면의 골에 기록이 된다. 즉 바늘은 ‘자신의 흔적’을 측음기의 골에 새겨서 남기는 것이다. 재생은 그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진동이 기록된 골에 바늘을 넣고 원통을 회전시키면 바늘이 골을 다니면서 떨림을 감지해 내고 그 진동을 떨림판에 전달해 소리를 재생시킨다. 물론 현대의 음향기술에 비해 턱없이 작고 질이 떨어지는 소리였겠지만 놀라운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아이디어였다. 소리의 흔적을 저장해 두었다가 거꾸로 그 흔적을 통해 소리를 부활시킨다는 역발상에 나는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CD마저 MP3파일에 밀려 사멸해가는 요즘 시대에도 틈틈이 골동품가게에서 레코드수집에 열중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어떤 가수의 흔적이 담긴 레코드를 얻는 것은 그 가수의 신체일부를 소유한 듯한 묘한 만족감을 준다. 이제 이 흔적을 재생시키면 어떤 존재가 생명을 부여받고 부활할 것인가. 비틀스가 튀어나올지 아바가 튀어나올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틀어보고 싶었지만 내 오디오는 대전에 있는 집에 있어서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나는 형민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스터디 모임 때 턴테이블을 들고 오라고 했다. 조금 무겁긴 하겠지만 밥은 이럴 때 사라고 있는 것이다. 





형민에게서 빌려온 턴테이블은 데논 dp-300f모델이었다. 고가모델은 아니었어도 가격대비 성능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포노앰프 내장식이라 공간을 적게 차지한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헤드폰을 썼다. 맙소사. 낡은 레코드판에서 부활한 것은 다름 아닌 레드제플린이었다. 그것도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히는 4집앨범이었다. 록의 황제라고 불리우는 레드제플린답게 4집 앨범은 모든 곡이 명곡이었다. 그 중에서도 4번째 트랙에 있는 ‘Stairway to Heaven’은 나로 하여금 전공서적을 던져버리고 기타를 잡게 만든 바로 그 곡이었다. 막 바늘이 ‘Stairway to Heaven’을 지나 5번째 곡인 ‘Misty Mountain Hop'으로’ 이동할 때였다. 아주 미세한 잡음이 헤드폰에서 속삭이듯 들렸다. ‘뭐지?’ 신경을 긁는 미세한 쇳소리. 볼륨을 살짝 키워보았다. 잡음도 함께 커진다. 하지만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미세한 소리였다. 커버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레코드판이다 보니 표면에 잔 스크래치가 있어서 일까. 하지만 이 소리는 스크래치로 인한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아주 약하게, 여자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끊어질듯이 이어지며 들려왔다. 볼륨을 최대로 키워 보았다. 흐느끼는 소리도 나를 향해 달려들듯이 점점 커졌다.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플레이를 중단시키고 턴테이블에서 레코드판을 꺼내었다. 이것에 담겨있는 것은 레드제플린의 음악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함께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으로의 재생을 꿈꾸는 그 어떤 흔적이. 





어떤 사람의 원한이나 바램이 너무나 강하면 그것이 사진기나 테이프레코더에 남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심령사진이나 가수의 앨범에 귀신소리가 녹음되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연예인은 그것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해 먹기도 한다. 하지만 어지간한 레드제플린 광팬인 나조차도 4집에 이런 소리가 녹음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대량 생산품이다. 어느 하나에만 이런 소리가 삽입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문득 나의 뇌리에 ‘백워드 마스킹(Backward Mask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백워드 마스킹이란 한때 악마주의 밴드 사이에서 유행했던 수법으로 곡에 단어 철자를 거꾸로 삽입해서 자신들의 은밀한 메시지를 레코드판 뒷면에 기록하는 수법이었다. 메시지는 주로 악마를 찬양하거나 마약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레드제플린의 4집 앨범은 유난히 백워드 마스킹 논란이 많았던 앨범이다. 어쩌면 이것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백워드 마스킹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나는 판을 뒤집어서 아까의 위치에 바늘을 얹어놓았다. 내 생각은 맞았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묘한 블협화음 속에 여자의 속삭이는 듯한 한마디가 선명하게, 반복적으로 들려왔던 것이다. 

















어두워.. 








답답해.. 








날 어서 이곳에서 꺼내어 줘... 























후텁지근했다. 벌써 젖은 티셔츠 몇 개를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는지 모른다.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밀폐된 고시원 안은 밤이 되어서도 찜통이었다. 조그만 선풍기 한 대가 내 등에 점막처럼 들러붙는 땀을 간신히 말려주고 있었지만 찜통더위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문제의 레코드판이 생각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레코드 뒷면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날 나는 그것을 턴테이블과 함께 형민에게 들고 갔다. 형민은 판을 뒤집어서 몇 번 들어보더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했다. 형민의 귀는 유난히 감각이 뛰어났다. 절대 음감에 가까워서 함께 밴드활동을 할 당시 멤버 중 누군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귀신같이 잡아내곤 했다. 그런 형민의 말이었기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들어봐도 레드제플린의 신나는 곡만 들릴 뿐 어디서도 잡음은 들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다. 저번에 거울 사건도 그렇고 모든 게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사람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보면 확각이나 환청이 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요즘 나의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정도가 고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레코드판은 안 쓰는 앨범 재킷에 넣어서 옷 수납상자 바닥에 보관해 두었다. 자꾸 시선이 닿으면 그 소리가 되살아나서 내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만 같았다. 


레코드판에 대한 생각을 접고 다시 문제지로 의식을 돌려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웠다. 얼린 컵에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모의고사 1회 분량을 풀고 편의점에라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벌써 고친건가? 내일 중에나 수리가 될 거라고 했는데...’ 누군가 드라이아이스를 입에 물고 입김을 불어주는 듯이 서늘한 바람이었다. 등줄기에서 살얼음이 부서지는 듯한 냉기가 느껴지며 축축한 땀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비오는 날 삽으로 땅을 파헤칠 때 피어오르는 듯한 비릿한 흙냄새였다. 끼익...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쇠기둥에 천 같은 것이 마찰을 일으키며 나는 소리 같았다. 잘못 들었나? 또다시 끼이익..펜을 놓고 신경을 곤두세워보니 내 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내 뒤쪽에서, 그 것도 상당히 위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나쁜 마찰음에서 묵직한 질량감이 실려 있었다. 선뜻 뒤돌아보기가 왠지 겁이 났다. 끼익.......끼이익.......빌어먹을, 거울을 치우지 말았어야 했는데..고개를 들어 커튼에 투사되는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1시25분. 그러나 곧이어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커튼에 투사된 시간은 검게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끼익..끼익하는 소리에 맞추어서 규칙적으로. 내 등 뒤에서 흔들거리는 무엇인가가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하며 프로젝션시계에서 투사되는 빛을 가로 막고 있었다. 저번에 총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거 꽤 튼튼한 거에요. 쇠봉도 건물 지을 때부터 벽속에 묻혀 있던 거라 사람이 매달려도 끄떡없어요. 


사람이 매달려도 끄덕없다라..그렇다면...? 누군가가 주사액을 척수에 찔러넣는 것처럼 등골이 싸해졌다. 그 순간에도 끼익 거리는 소음에 맞춰 흔들리는 그것은 시계의 빛을 규칙적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나보다 먼저 이방에 살았던 누군가도 그런 이유로 거울을 달았을지도. 끼익..끼익..소리가 점 점 더 커진다. 그 때마다 내 심장은 나사처럼 바짝바짝 죄어들었다. 모의고사 문제지를 무심코 구겨 쥐었다. 문제지가 땀에 젖어 찢어진다. 정신적인 압박을 견디다 못한 내가 막 소리를 지르며 돌아보려는 순간. 툭.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아서 튕겨오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뭘 그리 놀라세요? 내가 더 놀라겠네." 


창민은 화들짝 놀라서 내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직 안주무시면 출출하실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요 뒤족 주차장 화단에 제가 심은 건데요. 벌써 먹을 만큼 여물었지 뭡니까." 


창민이 큰 유리그릇에 든 삶은 옥수수 두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놀란 표정을 간신히 추스리며 그릇을 받았다. 


"혹시 아까부터 제 뒤에 서 계셨어요?" 


"네? 아니요, 방금 들어왔어요.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혼자 먹기도 뭐해서..실은 좋은 소식도 있어서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어떤..?” 


“저번에 7급 시험 봤다고 했잖아요. 합격했어요. 오늘 발표가 났습니다. 이게 다 주님의 은혜예요.” 


창민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두어 잡았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신자인 듯 했다. 합격률이 희박한 시험에 응시하는 절박한 심정이면 누구나 종교를 믿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창민의 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 나도 ‘다시 교회에나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창민이 다녀가간 후 다시 평상시대로의 일상이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나를 주술처럼 휘어 감았던 공포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1시 28분이었다. 고작 3분이 지났을 뿐인데 30분 동안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다시 공기가 후텁지근해진다. 등에서 구슬처럼 솟아나는 끈적한 땀이 티셔츠를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7월이 순식간에 지나고 8월달이 되었다. 그동안 나의 일상은 극기의 반복이었다. 학원 독서실 남아 공부를 하다가 고시원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시험은 하루하루 피스톤처럼 무자비하게 공기를 밀어붙이며 다가왔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이 숨 막히는 생활에서 탈출할 구멍이 없었다. 나 뿐 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번 여름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기점이라는 각오로 목석처럼 앉아 공부에 몰두했다. 그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인내해 내야 비로소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이 걸려있다는 위기감을 생각하면 그동안 고시원에서 경험했던 몇 번의 이상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그만큼 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는 증거였다. 


“후우..” 


지친 몸으로 학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책상이 엉망진창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며칠째 정리를 하지 못했다. 창가에 내놓은 파리지옥도 물을 주지 않아 누렇게 말라죽어있었다. 식충식물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무색하게 초라하게 죽은 녀석을 보니 왠지 안쓰러웠다. 잠깐, 뭔가가 달라져 있다. 항상 쩍 벌리고 있던 덫 한 개가 조개처럼 오무라들어 있었다. 덫의 양쪽 끝으로 기다란 털이 살짝 삐져나와있다. 조심스럽게 덫을 열고 그것을 꺼내어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방 청소를 할 때마다 나오는 의문의 머리카락. 이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청소할 때 바람에 날렸다가 우연히 파리지옥의 잎사귀 위로 올라갔을까. 머리카락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다. 파리지옥은 그것을 모기 대신 영양공급원으로 삼았을 것이다. 나는 파리지옥을 뿌리째 뽑아서 비닐봉지에 쌌다. 아무래도 전자모기향을 사야 할 것 같았다. 제길..또다시 팔뚝이 따끔거렸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팔뚝을 북 북 긁었다. 


‘이건 뭐지?’ 


팔뚝을 긁은 내 손톱에 머리카락이 한 올 걸려있었다. 긁은 자리를 자세히 보니 긴 털이 한가닥 자라고 있었다. 15cm정도 되는 긴 털이었다. 다리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얇은 가닥이었기에 내가 그동안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몸에서 자란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내 땀구멍을 향해 찔러 들어온다는 표현이 맞았다. 매일 밤 나를 물던 모기들의 정체는 이것이었을까? 도대체 이 머리카락들은 어디서 온 것들일까? 그 동안 얼마큼이나 내 몸 속에 들어왔을까? 이런 것들이 정충처럼 편모를 꿈틀거리며 내 몸 속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혐오감이 밀려왔다. 톡, 털을 뽑자 뜨끔하는 통증과 함께 그 자리에 피가 한 방울 맷힌다. 끊어지고 남은 가닥이 유리파편처럼 내 몸 속에 박혀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이물질이 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심장이나 뇌에 박혀 기생하는 장면이 나도 모르게 상상되었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어디에서건 나를 따라다녔다. 고시원에 온 이튿날 한바탕 바닥걸레질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긴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나왔다. 그 후로도 청소를 할 때마다 몇 올씩 긴 머리카락이 발견되곤 했다. 파리지옥의 덫에 걸려있던 머리카락. 내 몸을 모기처럼 따끔따끔하게 찔어오던 바로 그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들의 평균길이는 50cm에서 70cm였는데 어떤 것은 1미터 가까이 되는 것도 있었다. 머리카락의 주인이 여자라고 쳐도 비정상적으로 긴 머리카락이었다. 내 머리카락일리는 없으니 밖에서부터 유입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범인의 지문을 찾으려는 형사처럼 방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한 평도 안 되는 폐쇄공간에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었다. 그때 우우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 전체가 약동하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실내 기온이 올라가자 중앙냉방장치가 가동했던 것이다. 차가운 공기가 낮은 소리로 그르릉 거리며 내 방 천장의 환기구로 샤워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때 환풍구에서 가느다랗게 흩날리는 몇 올의 머리카락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보니 서너가닥의 머리카락이 환풍구에서 삐져나와 해초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머리카락들은 중앙냉방장치에서부터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온 듯 싶었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그 중 가장 긴 가닥을 잡아서 살살 당겨보았다. 머리카락의 근원은 내 예상보다 훨씬 먼 쪽에 있는 듯 했다. 몇 가닥을 꼬아서 잡아 당겨 봐도 끄떡없었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툭하고 끊어졌다. 그 순간 끼아아아-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비명소리가 쨍 하고 나의 뇌 속을 파고들었다. 그 소리에 놀란 나는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넘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나의 눈에 남은 머리카락들이 환풍구 속으로 살아있는 촉수들처럼 기민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총무실에 들어갔을 때 총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넓은 입사귀가 갈퀴처럼 갈라지고 줄기에는 선인장처럼 가시가 나있는 기분 나쁜 모습의 식물이었다. 총무실에는 고시원 특유의 향냄새가 짙게 깔려있었다. 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죠? 이 냄새는. 그 식물은 또 뭡니까.”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말했다. 


“아, 이건 ‘아키실론’이라고 아프리카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향이 참 독특하죠?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신집중이 잘 된데요. 진액에는 마취효과가 있어서 2차대전 때는 모르핀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속이 울렁거리는 약효는 없나요?” 


내가 비꼬듯이 묻자 총무가 대답했다. 


“하하 저도 처음엔 그랬죠. 생김새도 괴상하게 생긴 녀석이 냄새까지 고약하니까요. 솔직히 향기라고 하기는 좀 힘들잖습니까? 그래도 일단 익숙해지니까 오히려 향기가 없으면 안절부절해지고 집중이 안 되더군요. 준영씨도 처음엔 괴롭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그것은 금단현상이다. 저 식물은 혹시 마약류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설마 도심한복판의 고시원에서 마약을 재배할 리가 있겠나하는 상식에 가려져 금방 의식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향기요법’바람을 타고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과대광고로 팔리는 특이식물일 것이다. 


“냄새도 냄새지만 제 방에 머리카락 좀 어떻게 해주세요.” 


“머리카락이라뇨?” 


“에어컨 환풍구로 끊임없이 들어와요. 길이는 한 50cm에서 긴 것은 1m까지? 아무튼 신경이 쓰이네요.” 


“제가 한번 봐드리죠.” 


총무가 드라이버를 들고 총무실을 나섰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드라이버로 환풍구를 뜯어낸 총무가 환기통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머리카락같은 것 안보여요?” 


나는 밑에서 의자가 돌아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없어요. 아무것도. 먼지 밖에는요.” 


총무가 의자 아래로 내려와서 검정으로 시커멓게 변한 마스크와 장갑을 벗었다.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아직 의구심이 풀리지 않았지만 일단 형식적인 사과를 했다. 


“혹시라도 또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공부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셔서 헛것이 보인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한결 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혹시..” 


“네?” 


“아..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 


나는 옆방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다가 꾸욱 참았다. 





머리카락과 더불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옆방 247호실의 소음이었다. 특정한 시간대-새벽 1시 전후-만 되면 어김없이 벽을 두드려댔다. 처음에는 내가 시끄럽게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어도 난데없이 벽을 때려 부술 듯이 두드려대는 것이었다. 가끔 ‘싫어...어서 여기를...너희들은...죽여....’ 따위의 알 수 없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일종의 잠꼬대 같았다. 가뜩이나 공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같은 소음이 매일 반복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제야 왜 총무가 처음에 이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참다못해서 나는 포스트잇에 메모를 했다. 


-매일 밤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공부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서로 조금만 더 배려해서 힘든 수험생활을 잘 이겨 냅시다- 


그것도 내용을 겉에 떡하니 써놓으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다 읽어볼 테니 메모지의 뒷장에 쓰고 겉으로 보이는 면에는 ‘뒷면을 봐 주세요’하고 작은 화살표를 그려 넣었다. 나로서는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한 셈이었다. 이 정도까지 예의를 갖춘 요구를 못 본 체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눈에 띄기 좋게 옆방 손잡이 바로 위에 붙여놓고 밖으로 나갔다. 형민과 점심약속이 있었다. 요즘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맛있는 식사와 적당한 수다도 수험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검은 구름이 낮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나올까 망설이다가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그대로 뛰어갔다. 





“김치가 맛있네” 


형민이 연신 김치를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내가 요새 발굴한 맛집이야. 이곳에서만 벌써 30년째 하신데.” 


‘할매 감자탕’이라고 TV음식기행 프로에도 소개된 맛집이었다. 리포터가 맛의 비밀을 묻자 시어머니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았다는 주인아주머니는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땅에 묻는 방식으로 김치를 발효시키는 것이 비결이라고 대답했었다. 예전에는 고시원 뒤쪽의 텃밭에 묻었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이제는 서울 근교의 농가 마당에 묻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공수해 온다고.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뭐 어떻다고?” 


“응 매일 바닥을 닦아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나와. 아무래도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려오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어떻게 그쪽으로 유입되었는지 모르겠단 말야.” 


“저번에 그 여자목소리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쪽은 터가 안 좋은 거 같아.” 


“또 그 소리냐? 그 고시원에 무슨 귀신이라도 산다는거야? 독실한 크리스찬답지 않은데? 


“성경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있어. 신약 4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돼지무리들에게 넣은 기록도 있고, 또 광야에서 40일동안..” 


“아이쿠 알았다 알았어, 사도 형민께서 오죽 하시려구.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더 이상 듣다가는 먹다 체할 것 같아 내가 먼저 항복사인을 보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나도 실은 요새 시험 들고 있다구.” 


“무슨 시험? 사법고시? 외무고시?” 


“농담하지 마. 나 심각하니까. 일년전에 울 아버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 알지? 안 그래도 그 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이번엔 어머니마저 간암으로 입원하셨어. 의사가 그러는데 상태가 심각하시데. 어머니 연세도 있으셔서 수술을 하긴 하겠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아. 내 뒷바라지하신다고 병원비도 아끼시더니 결국..휴우 어머니까지 어떻게 되시면 난 어떡하니? 이래서야 공부나 끝까지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형민이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여지껏 한번도 나에게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는 강인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요즘 형민의 주위를 둘러 싼 상황은 극악으로 치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같이 착하고 신앙도 좋은 녀석이 왜 이런 일들만 생기는지 모르겠다. 아버님도 참 좋은 분이셨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나도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긴 하지만, 남에게 큰 해는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주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의심스러워져” 


“힘내 임마. 우리 인간은 당구공이고 하나님은 허슬러라고도 하잖아. 맛세이 몰라? 지금은 ‘어 이 방향이 아닌데’해도 결국에 씨네루에 쿠션 먹고 제일 곤란한 공에 딱 하고 맞는다니까. 왜 성경에도 의인인 욥의 고난이 나오잖아. 처음에야 재산도 잃고 자식도 죽지만 나중엔 더 큰 재산과 더 낳은 자식을 받잖아? 너도 결국 좋은 쪽으로 될거야. “ 


나는 어쭙지않게 옛날 설교시간에 주워들었던 일을 떠벌이며 형민을 위로했다. 


“하지만 사랑했던 자식들을 다 잃고 나서 새로 얻은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지? 양적으로 보상받으면 그 끔찍한 슬픔이 다 잊혀진다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아무리 훌륭한 부모님을 새로 주신다고 해도 지금 우리 부모님하고 바꾸진 않을거야. 자식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형우의 반론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우린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 장님 격이군.”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이제 한계야. 동생 2명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 올해도 합격이 안 되면 막일이라도 해야 돼. 절박하다구. 아..요즘엔 신입생때 너랑 같이 음악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후훗. 재미있던 시절이었지.” 


“그때 함께 음악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우리의 모토 말야” 


“물론.” 


우리는 둘 다 입을 모아 동시에 말했다. 


“합주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 


“너도.” 


식사를 끝내고 문을 나서니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식당 텔레비전에서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3) 털 뱀




태풍이 북상하면서 장마철 아닌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는 형민과 헤어지고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을 책가방으로 막으며 정신없이 고시원으로 뛰어왔다. 아침에 환기시킨다고 창문을 열어놨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자칫하다간 책상이며 책꽂이의 책들이 몽땅 젖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동안 학원수업을 필기했던 내용이 잉크가 번져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옆방에서 내 메모를 봤는지도 궁금했다. 실망스럽게도 내 기대와는 달리 옆 방의 메모지는 그대로 붙어있었다. 정말로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여봐란 듯이 다시 붙여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 위쪽 창을 보니 방에 불이 꺼진 것으로 보아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쩌면 어저께부터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일은 정말로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내 방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 책상이나 책들은 젖지 않았다. 두꺼운 커튼이 제대로 우산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막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식 깊숙한 것에서 본능적인 무엇이 ‘움직이지 마’하고 경고를 하고 있었다. 무의식만이 알아채는 위험에 대한 빨간 신호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을려구. 다시 멈추었던 손을 뻗자 ‘햐악-’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너머 주차장 쪽에서 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고시원에 처음 온 날 보았던 한 쌍의 고양이가 생각났다. 놈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일까. 잠깐. 커튼의 한 가운데가 공 모양으로 살짝 부풀어 있다. 아니, 그냥 표면이 매끈한 공이 아니었다. 가운데 돌출부를 기준으로 양쪽에 움푹하게 꺼져있다. 호흡과 같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커튼은 반구의 포면에 달라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마치 사람의 얼굴에 천을 씌워놓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의 상상이 멋대로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내가 있는 고시원창문은 2층에 있었다. 사다리라도 타지 않는 이상 이정도 높이에 있는 창문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커튼을 젖히면 누군가가 그곳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 저 뒤에는 아무것도 없을거야. 단 1초면 돼. 어서’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내 숨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막 내 손이 커튼에 닿으려는 순간, 꽈광-! 하는 굉음과 함께 커튼이 바람에 펄럭였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그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하얀 여자의 얼굴이 잠깐 커튼 뒤에 나타났다 커튼 뒤로 사라지는 것을. 여자의 눈은 하얀 점막에 뒤덮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샤악...샤아악...천 같은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복도 쪽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이느라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걷는 소리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몸은 상당한 중량이 나간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그냥 기다란 천을 질질 끌고 가는 것처럼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마찰음뿐이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방문을 열어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유독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선가 젖은 흙 비린내가 피어오른다. 오싹한 냉기가 전류처럼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탁. 나는 형광펜을 법전 위에 내려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막 내 방 앞쪽을 지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몸을 낮추었다. 


방문에는 두 개의 환풍구가 있었다. 방충망이 쳐진 위쪽 미닫이 창문과 얇은 나무판자가 가로로 줄지어 쳐져 있는 아래쪽 환풍구였다. 중앙냉방이 중지되는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 복도에서 별도로 가동되는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를 방 안으로 전달해 주는 구멍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바닥에 업드려 아래쪽 환풍구의 나무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샤악..샤악..좁고 가로로 퍼진 시야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의 발끝이 나타났다. 퍼런 기운이 감돌정도로 창백한 하얀 발이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발에는 맹금류의 발톱같은 누렇고 긴 발톱이 자라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깍지 않았을까. 튀틀리고 꼬인 발톱의 끝부분에는 빛바랜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있었다. ‘말도 안돼, 이럴 순 없어..’ 아무리 발레리나라고 해도 서 있으려면 발가락 끝이라도 바닥에 닿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발은 발톱 끝만으로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공중에 살짝 떠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샤악..다시 천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의 발이 앞으로 전진했다. 내딛는 걸음이 아닌 미끄러지는 듯한 수평이동이었다. 스스슥..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여자의 발을 뒤따라가며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낸다. 천이 끌리는 듯한 소리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꿀꺽..목구멍으로 침을 삼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어쩌면 저 발의 주인이 나의 시선을 눈치 채고 갑자기 방향을 틀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위의 공기가 젤리처럼 굳어지며 나를 압박하는 느낌. 그저 숨조차도 아껴 쉬며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도할 뿐이었다. 흡. 나는 숨을 삼켰다. 내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이 몸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얀 발은 마치 수소풍선이 위로 올라가듯이, 천천히..위로 올라갔다. 말도 안돼..나도 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마음 속으로 쫒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위로.,.조금 더 위로..나의 시선은 하얀 페인트를 칠한 방문의 나뭇결을 더듬고 위쪽의 환풍구로 향했다. 마침내 나의 시선이 환풍구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보라색 혀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이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다시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빗소리가 커졌다. 바람에 커튼이 펄럭인다.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으로 고정시키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검은 커튼이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고양이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주차장 한 가운데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고양이의 코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콘크리트 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고양이가 있던 자리에는 검붉은 핏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사체는 상가 관리인이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고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 아침 7시인데도 부지런히 뜬 태양이 몸을 달구고 있었다. 도대체 고양이를 죽인 것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바닥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몇가닥의 길다란 머리카락 뿐이었다. 제기랄, 안이건 밖이건 머리카락투성이군. 


“아저씨, 뭐 잃어버리셨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7-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곁에서 말을 붙였다. 청재질로 된 멜빵바지에 빨간 운동화를 신은 귀여운 꼬마였다. 나는 꼬마의 운동화를 보는 순간 전에 복도에서 보았던 기묘한 그림 속의 아이를 떠올렸다. 


“으응, 아니다. 너 혹시 여기에 죽어 있던 고양이 못 봤니?” 


“검둥이요? 걘 어젯밤에 털뱀한테 잡아먹혔어요.” 


“털뱀?” 


털뱀이라니. 물뱀은 들어봤어도 털뱀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다. ‘털’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듯한 어감 때문일까? 무섭다기 보다 왠지 정감이 갔다. 


“네 털뱀이요. 온몸에 길다란 털이 숭숭 나있는 커다란 뱀이에요. 진짜 어마어마하게 커요.” 


꼬마는 양손을 가능한 한 크게 벌리며 뱀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꼬마의 말에 따르면 털뱀은 최소한 직경 70cm, 길이 30미터 이상의 몸을 가진 괴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뱀이라는 아마존의 비단구렁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런 괴물이 숨어있을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킹콩이 63빌딩에 숨어산다면 믿을까. 


“그래, 넌 그 털뱀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니?” 


“그럼요. 친구들이랑 벌써 몇 번이나 봤는걸요. 그 뱀은 낮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는 안 나와요. 새벽에 돌아다닌다구요.” 


꼬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밤중에 털뱀을 구경한다는 것은 꼬마들 사이에서 일종의 담력시험인 것 같았다. 원래 꼬마 때는 꿈과 환상을 잘 구분 못하는 법이다. 자신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그대로 믿어버린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기꺼이 꼬마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럼 그 커다란 뱀이 낮에는 어디 숨어있지? 아저씨가 보기에 이 근처엔 숨을 만한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저쪽에요.” 


꼬마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은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주차장 텃밭이었다. 


“저쪽에 가면 털뱀이 남긴 털들이 많이 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꼬마가 앞장서서 뛰어갔다. 통 통 튀는 듯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빨간 운동화에서 삑 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요.” 


꼬마는 한 웅큼의 털을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건..”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난처했다. 사탕가게의 위그든씨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옥수수털이잖니.” 


꼬마가 내민 것은 옥수수껍데기에 붙어있는 털들이었다. 그 텃밭에 있는 옥수수들은 유난히 털이 길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사람의 머리통이 달린 것처럼 털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아니에요. 그건 털뱀이 밤마다 묻히고 가는 거에요. 여기 털뱀의 굴이 있어요. 밤만 되면 커다란 구멍이 슈우욱 하고 열린다니까요.” 


또다시 꼬마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꼬마에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하는 허탈감에 어깨가 늘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뱀이 즐겨먹는 풀이에요.” 


꼬마가 넓은 입사귀가 갈고리처럼 갈라진 식물을 가르키며 말했다. 언젠가 총무실에서 보았던 ‘아키실론’이라는 식물이었다. 


“그럼 이풀은 이름이 뭐지? 혹시 알고 있니?” 


나는 꼬마가 그것의 이름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건..” 


꼬마가 내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말 못할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너도 모르니? 이거 아저씨는 실망인데.” 


내가 약을 올리자 꼬마가 발끈했다. 


“알아요! 우리들은 이걸 ‘노예풀’이라고 불러요. 입사귀를 태워서 냄새를 맡으면 말 안 듣던 얘들도 노예처럼 고분고분해져요. 막 이상한 것들도 보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는 얘들도 있어요. 이거 어른들이 알면 안 되는데..” 


꼬마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전형적인 환각효과다. 나는 식물의 줄기를 꺽어 진액을 코에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시원에 감도는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물씬 풍겨졌다. 








9월이 되었다. 한 여름 내내 그토록 사람들 삶아 대던 열기도 잠시 주춤했고 아침 저녁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내년 2월이 시험이라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늘어지려는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 


“야 나 먼저 좀 갈게.” 


나는 점심만 먹고 가방을 쌌다. 


“어딜 가? 오후 수업 안 들을거야?” 


같은 학원에 다니는 동현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몸이 좀 안 좋아.” 


“하긴 오늘따라 안색이 좀 안 좋네. 어디가 아프냐?” 


“허리. 저번 달도 그러더니 요새 이상하게 자꾸 허리가 아파.” 


나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콩팥 있는 부위가 돌이 얹혀있는 것처럼 묵직하다. 전에는 전혀 이상이 없던 곳이었다. 


“야, 너 생리 하냐?” 


동현이 내 등 뒤에서 질 낮은 농담을 하고 킥킥거렸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진통제를 샀다. 요즘 들어 뭔가 이상하다. 매달 같은 시기에 느껴지는 요통. 내가 여자라면 이 통증의 원인은 자명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었다. 요즘 내 주위에는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벽지만 해도 그렇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낡은 가구들과 묘한 위화감을 이루던 새 벽지.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처음 보는 낙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어서 ‘시간표나 붙어놓을까’했던 자리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답답해‘ ’어서 날 꺼내줘‘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어‘등등..내 글씨체는 아니었다. 꼭꼭 눌러쓴 여자의 글씨체였다. 내가 낮에 방을 비우는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오는가 싶어 문틈에 살짝 종이 조각을 끼우고 나갔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것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벽에는 또다시 새로운 낙서가 되어있었다. 새로운 내용도 없었다. 답답하다, 자기를 꺼내어달라, 누군가를 죽여버리고싶다는 지극히 단순한 메시지가 주문처럼 반복되어 빼곡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밤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잠귀가 밝은 내가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창문으로? 2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도 그리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방에 있는 누군가가 한 짓이다. 그 누군가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단 한사람 밖에 없다. 바로 나. 


그날 밤 나는 자기 전에 내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히고 잤다. 만일 나에게 몽유병이 있어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낙서를 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다음날 아침 내 필기구 중 하나에서도 같은 잉크가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귀신의 소행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이부자리에 잉크가 묻을 까봐 손을 밖에 내놓은 채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음날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뜬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굵고 큰 낙서였다. ‘답답해’ ‘죽여버릴거야’ ‘꺼내줘 꺼내줘’하는 낙서가 온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마구 휘갈겨 쓴 글씨는 그 자체가 절규를 하는 것 같이 광기가 서려 있었다. 물론 내 손과 옷도 잉크 투성이였다. 이건 도대체...나는 검은 피로 범벅이 된 것 같은 벽지를 살짝 뜯어보았다.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벽지 속에 있는 예전 벽지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있었던 것이다. 찌이이익..벽지를 더 뜯어보았다. 사람의 피부같이 질긴 벽지가 비명을 지르며 뜯겨진다. 그 속에는 작고 빽빽한 글씨가 옷감패턴같이 기계적이고 균일한 크기로 온 벽과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방 전체가 똑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찌이이익..찌이이익..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정신없이 벽지를 찢어발겼다. 피처럼 붉은 글씨로 씌여진 똑같은 메시지가 나타난다. 그 속에 있는 벽지에도, 또 그 속에 있는 벽지에도... 





약국에서 신경안정제를 사고 나와서 막 식당가 골목을 꺽는 순간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연극무대 위에서 갑자기 조명이 바뀐 듯한 느낌.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매일 오가던 길이지만 느낌이 달랐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거닐던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가? 공부하기 힘들지? 우리 잠깐 떡복이 먹으러 갈래? 


갑자기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밝은 표정의 20대 초반의 여자가 나를 향해 말을 거는 장면이 나의 뇌를 점령한다. 주위의 풍경은 동일하지만 뭔가 촌스럽고 빛바랜 듯한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옛날 영화의 필름을 핀셋으로 집어서 나의 뇌 속에 삽입한 것 같았다. 


-저기, 우리 친구하지 않을래? 나도 시험 준비하고 있어. 우리 같이 열심히 해보자 


젊은 여자가 희고 길죽한 손을 짝 펴고 내민다. 환하게 웃는 미소. 양 볼의 보조개가 귀엽게 들어간다. 누구지? 복장은 촌스러웠지만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얼굴이다. 


-와 너 머릿결 되게 좋다. 시험 합격해도 자르지 마. 알았지? 


밀려오는 행복감. 뭐지..뭐냐 이 느낌은.. 


“학생 괜찮아?” 


마침 길 가던 아주머니 한분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부축해 주었다. 간질병 환자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일어나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발이 납덩이 처럼 무거웠다. 요즘 살이 찌지 않았는데도 항상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다. 누군가 자라나고 있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나의 몸과 의식을 점차 점령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시원 입구에 들어오면서 나는 습관처럼 좁은 창문을 통해 총무실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총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책상위에 여전히 놓여있는 검은 가죽표지의 성경책만이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듯이 검고 두툼한 책의 옆면에 금분이 발라져 있다고 모두 성경책이라고 할 수 는 없다. 그것은 선입견에 따른 인지적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수납창구를 통해서 얼핏 보니 검은 표지 위에는 ‘The Book of Raguel'이라는 영문이 금박으로 박혀있었다. 


‘라구엘의 서? 이건 뭐지? 성경의 외전인가?’. 


한때 판타지 소설에 빠지면서 미카엘이니 우리엘이니 하는 천사의 족보를 달달 외우고 다닌적도 있다.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상위천사 중에서도 라구엘은 천사이면서 악마에 가까운 특이한 존재였다. 왠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푯말이 걸린 총무실로 들어갔다. 





내 예상대로 그것은 성경책이 아니었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십자가 문양이 나타났다. 그러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십자가의 네 끝이 갈고리처럼 옆으로 꺽여 있어서 마치 세로로 길게 잡아늘린 불교의 ‘卍’자나 나치의 문양이 연상되는 독특한 형상이었다. 갈고리의 끝은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왔다. 그러고 보니 전에 원장의 손가락에서도 같은 문양을 본 적이 있다. 좀 더 책장을 넘겨보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라틴어인가? 아니면 그리스어? 상형 문자 같은 꼬불꼬불한 글자와 태양, 달, 목성 등의 그림이 섞여있는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문자였다. 


“거기서 뭐하세요?” 


무뚝뚝한 총무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총무가 문가에 서서 표정 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 여쭤볼게 있었는데 그냥 아무도 안 계시길래..” 


나는 입에서 나오는 데로 둘러댔다. 제길, 딱 걸렸구나. 


“여긴 출입금지입니다. 푯말 안보이세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총무실을 나오는데 뒷통수에 총무의 따가운 눈총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참, 준영씨!” 


“네?” 


심장이 벌렁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수도 공사 때문에 오늘저녁부터 낼 아침까지 이 일대가 정전이랍니다. 알아두세요.” 


“아..네 알았습니다.” 


나는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총무의 몸에서는 역겨운 아키실론냄새가 났다. 





“잘 지냈어?” 


형민을 만난 곳은 예전의 그 감자탕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민은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뭐 좋은 일 있냐?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나는 구나.” 


“응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지. 어머니가 어제 퇴원하셨어.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데.” 


“뭐? 정말? 말기암이라서 힘들다고 하시지 않았어?” 


“응, 의사도 불가사의하데. 이런 게 바로 기적이라고.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밝아진 형민의 얼굴을 보자 나도 안심이 되었다. 식사가 나오자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머리카락..고시원을 감도는 이상한 향 냄새..창문에 보이던 여자의 얼굴..내 방을 가득 메우 낙서들, 라구엘의 서..등등 내가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일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온갖 기이한 일들을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식사가 다 식어있었다. 


“자꾸 너한테 나타난다는 그 귀신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에 말한 그 여자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김치를 한 조각 집어먹으며 형민이 말했다. 저번에 맛본 이후로 어지간히 김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늘상 하던 식사기도도 빼먹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건 25년 전 이야기잖아? 더구나 고시원도 다르고.”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몰라. 일단 이야기를 다 들어봐. 저번에 내가 말한 그 여자 고시생 있지? 이름도 기억났어. ‘이수미’라는 여잔데 당시 27살이었데. 그때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그 여자한텐 좀 특이한 징크스가 있었어. 머리를 자르지 않고 계속 길렀던 거야. 합격할 때까지 자르지 않겠다고 스스로 한 맹세였다나봐. 어쨌든 매년 낙방이 계속 되면서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서 거의 종아리부근까지 내려올 정도가 되었지. 아마 그런 모습으로 흰 옷이라도 입고 밤 중에 돌아다니면 아무리 담 센 사람이라도 기겁을 했을걸? 아마 예쁜 얼굴을 하고도 친구가 없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본 여자의 머리카락은 그 정도가 아니었어. 바닥에 질질 끌리고도 남을 정도였다구.” 


“나도 백프로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야. 아무튼 시험날짜가 코앞에 다가오고 그 여자도 이번에는 붙을 자신이 있었나 봐. 노트에 각 과목에 대한 요점 정리도 완벽하게 했고. 그런데 같은 고시원에 있던 다른 여자가 그녀의 노트에 눈독을 들였던거야.” 


식사를 하는 동안 형민의 말은 장황하게 계속 이어졌다. 간단하게 간추리면 이렇다. 이웃 방 여자는 수미가 없는 사이 그녀의의 노트를 몰래 훔치려다 마침 돌아온 수미에게 들키게 된다. 둘은 노트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이웃 여자가 수미를 목 졸라 죽였다. 그것도 손이 아니라 길게 자라난 수미의 머리카락으로. 여자는 죽은 수미를 천장에 매달아서 ■■로 위장했다. 노트 덕분이었는지 그 해 시험에서 여자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한을 품고 죽은 수미는 고시원 주변을 맴도는 커다란 뱀이 되어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다니는 고시생들을 잡아먹고 산다고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후련함 보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저 학원가에 떠도는 흔하디 흔한 괴담 중 하나였다. 더구나 원혼이 뱀이 되었다니. 요즘 세상에는 세살박이 아이도 믿지 못할 만큼 유치했다. 가만, 뱀? 뱀이라..저번에 주차장텃밭에서 만난 꼬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도 같은 말을 했었다. 고시원 주위를 맴돌며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거대한 털뱀. 이것은 우연일까? 그 후로도 몇 번 꼬마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요새는 통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고시원에선 하루 빨리 나와. 당장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당분간 있어도 괜찮구..” 


“고시원 비는 어떡하구? 할인혜택 때문에 반년치를 한꺼번에 냈는데 아직도 많이 남았단 말야.” 


“참 내, 지금 그깟 돈이 문제냐? 나 같으면 짐도 내버려두고 도망갈 판인데.”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게. 어쨌든 니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일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해. 친구 좋다는게 뭐냐” 


“알았다. 임마.” 


나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아줌마한테 김치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예 김치를 한 봉지 싸주었다.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서 먹어요. 반찬가게에서 사먹는 거 보단 훨씬 나을테니. 예전에 요 옆에 고시원이 H고시원이었을 땐 여학생들이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가져다 먹었다우.” 


“네?” 


“학생, 몰랐어? 15년 전엔 거기가 여자고시원이었던 거. 그 후로 뭔 일이 있었는지 잠깐 문을 닫았다가 남자전용으로 바뀌었지 뭐야.” 


그 다음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형민이 부르는 소리도 뒤로 하고 고시원으로 뛰어갔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요?” 


총무가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요. 매일 밤마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를 찾아와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내 방에선 나온 머리카락들, 이상한 소리가 담긴 레코드판, 옆방에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벽을 두드려대지 않나, 정말 미치겠단 말입니다! 더 이상은 필요없어요. 어서 남은 금액이라도 돌려주세요.” 


나는 흥분해서 횡설수설했다. 이곳이 15년전 H고시원이었다면 그동안 거듭되었던 이상한 현상들도 이제 설명이 되었다. 이곳에는 억울하게 죽은 수미의 원혼이 깃들어있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긴 머리카락의 여자. 내 방을 가득 메운 기괴한 낙서들. 더 이상 나는 속편하게 이성을 찾고 있을 수 없었다. 


“고시원 규정상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건 환불불가에요. 제가 주인이 아니니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도 아니구요. 그러기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첨부터 그 방엔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게 지금 제 잘못이라는 겁니까? 그럼 15년전에 죽은 여자 귀신이 나오는 방에 계속 살라구요?” 


나는 필요하다면 멱살잡이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귀신은 무슨 귀신이에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준영씨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요. 고시생 중엔 종종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혹시 고시원이 맘에 안 들어서 옮기시려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씀하세요” 


이건 순전히 내가 환불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는 투였다. 


“그딴 소린 하지 말아요! 제가 분명히 봤다구요, 커튼 뒤 나타난 그 여자를요!” 


“그래요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요, 준영씨 말에서 한 가지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말이 안 되다니요?” 


“옆방에서 자꾸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그러셨죠?” 


“네! 그것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구요. 믿기지 않으시면 하루라도 방을 바꿔서 써 보시던가요.”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 방엔 사람이 살지 않거든요.” 


“..네?” 


어안이 벙벙했다. 단어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어도 전체적으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으신 내용 그대로예요. 247호실에 사시던 분은 근 한 달 간 행방불명상태에요. 그러니까...정확히 준영씨가 입실하시던 날부터네요. 연관성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준영씨가 의심스러운데요?” 


총무가 출석카드를 뒤적이며 나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졌다. 형민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한을 품고 죽은 여자의 영혼은 뱀이 되었다. 그리고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고시생을... 


“그런..그건,,말도 안 돼요. 그럼 내가 매일 밤 듣는 그 소리는 뭐죠? 사람 목소리도 들린다구요!” 


“신경정신과병원에 가셔서 상담을 하시거나 종교를 통해서 마음의 안식을 얻으시는 편이 좋겠어요. 너무 그렇게 공부에 스트레스 받으실 것 없어요. 커피나 한잔 하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요." 


총무가 일어서서 더러운 컵을 집어 들었다. 


“됐어요, 환불해 주지 않으면 그냥이라도 나갈 테니까 내버려 두세요” 


화가 난 내가 방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총무가 다급하게 따라 나오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내일 원장님께서 오시니까 한번 원장님하고 말씀해 보세요.” 





그날 밤이 그 고시원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원장의 허락이 있든 없든 이미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총무를 비롯해서 고시원에 사는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서 짜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과 짐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누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천장의 불이 꺼졌다. 정전인가. 낮에 총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서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새로운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옆방의 남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가 본 여자는 나만의 환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여진 총무의 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묘한 모양의 갈고리 십자가 목걸이는? 지금 이수미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였을까 등등. 한참을 뒤척이며 생각했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주차장 쪽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갖난 아기의 피 먹은 울음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저번에 커튼 틈으로 보았던 끔찍한 여자가 생각났다. 순식간의 주의의 공기가 식어간다. 또다시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 흙냄새.. 


‘웃기지 마 이것은 환각일 뿐이야. 그래, 나가자. 한번만 더 두려움에 직면해 보자.’ 


모든 것은 내 상상이 빚어낸 환상이다. 수험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시 인지능력이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이 두려움에 정면으로 도전해 이겨내야 한다.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 낸 괴물조차 직면하지 못하는 녀석이 무슨 놈의 시험이냐. 설혹 시험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위험을 피해가며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 뻔하다. 평생 비겁자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라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밖은 어두웠다. 낮부터 낮게 드리운 구름이 달빛과 별빛을 모두 막고 있었다. 때마침 정전으로 몇몇 건물에서 촛불이 보일뿐 먹종이를 뚫고 나아가는 듯한 어둠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암흑이 있었던가. 나는 라이터를 켜고 그 불빛에 의지해 주차장 뒤쪽으로 향했다. 그 미약한 불빛이라도 없으면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룩무늬 고양이는 주차장 한복판에 서서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울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고양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은 옥수수가 심어진 주차장 텃밭이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경련을 일으킬 것처럼 광기에 가까운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때였다. 옥수수밭 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아스팔트를 잡아먹고 피어났다. 그림자는 타원형으로 변하더니 곧 길죽하게 늘어졌다. 뱀처럼 변한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고양이를 향해 접근했다. ‘말도 안돼!’ 나는 재빨리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차장내에 그림자를 만들어 낼만한 길죽한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봇대조차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림자는 점 점 고양이를 향해 다가왔다. 고양이는 뱀의 마력에 거린 개구리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고 발악을 하다가 마침내 그림자가 앞발에 닿자 총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튕겨 올라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잠시 멈칫하던 그림자는 고양이의 몸을 휘어 감고 그대로 고시원 쪽을 향해 나아갔다. 


‘도대체 저건 뭐지?’ 


주차장을 가로질러 고시원 건물까지 도달한 길죽한 그림자는 괴물이 수면에서 고개를 쳐 들 듯 천천히 바닥에서 입체적으로 튀어 올랐다. 반구형으로 변한 검은 그림자 밑으로 살짝 드러나는 하얀 부분. 그것을 따라 검고 가는 가닥들이 같이 딸려 올라간다. 


‘설마..’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마에 이어 콧날과 얼굴 전체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거짓말처럼 솟아나왔다. 목 아래부분은 절단되서 없었다. 흡사 코브라가 고개를 세우듯 죽은 여자의 얼굴이 길디 긴 머리카락을 이끌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은 바닥에 닿고도 텃밭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여자의 얼굴은 소리도 없이 천천히 2층 고시원의 검은 커튼으로 향했다. 


-온몸에 길다란 털이 숭숭 나있는 커다란 뱀이에요. 진짜 어마어마하게 커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라이터가 견딜 수 없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나는 잠깐 불을 껐다가 식기를 기다려 다시 켰다. 괴물은 여자의 얼굴을 머리로 하고 검고 긴 머리카락을 몸통으로 하는 거대한 뱀의 모습이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뜨겁다. 또 다시 라이터가 달아오른다. 들고 있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고시원 창문에 도달한 여자의 얼굴은 창문을 천천히 점검하였다. 마치 냄새를 맡 듯 유리창에 코가 닿을 듯이 접근하며 신중하게 방 하나 하나를 살폈다. 마침내 내 방 위치에 도달한 괴물은 잠시 창문 이곳 저곳을 살피며 코를 벌름 거리더니 입에서 가늘고 검은 것을 주욱 늘어뜨렸다. 검은 혀였다. 혀는 여자의 턱 부근까지 길게 늘어졌다. 혀는 살아있는 환형통물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을 위아래로 핥았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듯 아주 천천히. 


떨그렁!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내가 라이터을 떨어뜨렸다. 휙! 그 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내쪽을 돌아보았다. 여자의 부패된 하얀 눈과 마주친다. 나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다. 찰칵..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불이 켜지지 않는다. 찰칵..찰칵..마침내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시 불을 켰을 때, 슈아아악-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훅-라이터 불꽃이 꺼졌다. 




4) 퇴 실 




“으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커튼에 투사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꿈...? 이마의 땀을 닦으려고 하는 데 손에 잡힌 뭔가가 이마를 간지럽혔다. 불을 켜보니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손가락에 얽혀있었다. 


저를 어서 이곳에서 꺼내주세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수미라는 여자는 끊임없이 나에게 뭔가를 알리려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꿈속에서 여자의 그림자가 시작된 곳은 옥수수밭 쪽이었다. 예전에 창민이 가져다 주었던 옥수수가 생각났다. 사람의 머리털같이 긴 털을 가진 옥수수. 씹으면 비릿한 피 맛이 났었다. 


-왜 고시원뒤쪽 주차장있지? 그쪽이 30년 전엔 다 텃밭이었어. 당시만 해도 그쪽에 김장독을 묻어서 맛이 더 좋았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요샌 할 수 없이 교외로 나가서 묻어. 


감자탕집 아주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쪽에 무언가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풍향계처럼 일제히 그 곳을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만 이 악몽같은 밤을 이겨내자. 그리고 내일부턴 누가 뭐래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거다’ 


나는 다시 한번 악몽을 꾸기로 결심했다. 방안은 꿈 속과 마찬가지로 정전. 창 밖을 내다보니 구름 사이로 한쪽 짜리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내 방문앞에서 서서 잠시 생각했다. 그 이상한 성경이나 아키실론이라는 괴상한 풀도 그렇고 이 고시원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수상하다. 내가 비밀을 파헤치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나는 내 방문에 걸려있는 스파이더맨이 그려진 타월을 잡았다. 





헉..헉.. 


땅을 파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차장 옆에 있는 컨테이너 창고에서 가져온 삽으로 벌써 30분이 넘게 옥수수밭을 헤쳤지만 아직 발견되는 것이 없었다. 꿈속에서 본 위치를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막상 와보니 첫 삽을 어디로 넣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주위가 너무 깜깜하다. 정전으로 주위는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아까의 악몽을 다시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 속에 갇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달빛에 의지해서 30-40cm깊이로 이곳 저곳을 파헤치기 시작한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삽 끝에 뭔가 길쭉한 끈이 걸렸다. 주위를 더 파보니 조그만 신발 한 켤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며칠 전 텃밭에서 만났던 꼬마가 신었던 그 빨간 운동화였다. 정신없이 그 주위를 더 팠다. 잠시 후 삽 끝에서 쨍 하는 금속성 소리 짜릿한 반동이 전해졌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력한 반응이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흙을 더 파내자 검고 반질반질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김장용 항아리였다. 수미의 몸이 묻힌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수미의 원혼이 그 안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 두려움을 넘어 어서 이 일을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조차 들고 있었다. 스르릉..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드러내자 뚜껑이 항아리 몸체에 긁히면서 유난히 큰 소리가 났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멍에서 역겨운 흙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꿈속에서, 혹은 환각 속에서 몇 번이나 맡았던 그 냄새였다. 바닥이 없는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나에게 입김을 내뿜는다. 어서 너도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없이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둠의 속삭임에 이끌려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 깊은 어둠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툭. 손 끝에 뭔가가 걸린다. 차갑고 단단한 표면. 더듬어서 그것을 만져보았다. 반질반질한 구면을 따라 오뚝 솟은 무엇과 그것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움푹 꺼진 굴곡이 느껴졌다. 그 아랫부분을 더듬으니 살짝 윗입술이 들리며 그 속에 있는 단단한 이가 느껴졌다. 죽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여자의 머리통은 몸통과 분리되어있었고 항아리속의 남은 공간은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고 항아리에서 꺼내었다. 검은 구멍에서 푸르스름하게 경직된 여자의 얼굴이 달빛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꿈 속의 모습과는 달리 여자의 두 눈은 감겨있었다. 하얀 피부는 15년 전의 시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곱게 보존되어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 15년이나 갇혀있던 여자의 영혼. 몇 년 동안이나 최선을 다해 공부했으면서도 시험을 눈 앞에 두고 죽어야 했던 여자의 원한. 어쩌면 이수미의 영혼은 이 좁은 곳에 갇혀 매일 매일 시험을 보는 꿈을 반복해서 꾸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군가 이 좁은 곳에 갇힌 자신의 영혼을 꺼내주길 바라면서 매일 밤 고시원 창문을 기웃거린 것은 아닐까. 


항아리 속에는 목이 절된된 수미의 몸통이 있었다.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것처럼 손톱이 구불구불 자란 손이 달빛에 언뜻 보였다. 수미의 긴 머리카락은 항아리 속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서 주의의 흙속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두 손으로 잡아당겨보았지만 땅 속에 박힌 머리카락은 칡뿌리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고시원 건물을 향해 거대한 식물의 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게 자랄 수 가 있을까.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죽은 후에도 자란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뒤 피부가 수분을 일으면서 수축해서 나타나는 과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아니 죽은 사람의 머리가 계속 자란다고 치면 수미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죽은 뒤 15년동안이나 계속해서 자라났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 머리카락은 주차장 지하를 가로질러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일까. 일부는 옥수수의 줄기로 파고들어가 그 열매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일부는 건물 내벽까지 파고들어 혈관처럼 얽히고 설켜 건물 곳곳에 그 촉수를 드리웠을 것이다. 내 방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던 머리카락은 아마도 중앙냉방장치를 통해서 들어온 수미의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누군가 자기가 이곳에 묻혀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15년동안 끊임없이 보낸 그녀에 구조신호였던 것이다. 


‘오늘 하루만 더 이 좁은 곳에서 참아주세요. 내일은 반드시 밝은 곳으로 꺼내드릴게요.’ 


나는 마음속으로 사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수미의 얼굴을 다시 항아리 속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당장이라도 어둠 속에서 수미가 두 눈을 부릅뜰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선 경찰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김장독을 묻을 때 항상 그렇듯이 파낸 흙을 메워 넣을 때는 흙이 약간 모자랐다. 흙을 보충하려고 옆의 땅에 삽을 찔러 넣었었을 때 삽 끝에 또다시 작은 울림이 있었다. 





“이제 모든 걸 알겠어. 이 미.친 새.끼들!”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패한 남자의 잘린 머리였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삽질을 할 수록 항아리가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 속에서는 몸통과 목이 분리된 부패한 시체들이 한 구씩 드러났다. 고대 중국의 인간젓갈같은 모습이었다. 얼굴들은 손에 기묘한 십자가 목걸이를 들고 있었다. 


‘어서 경찰에 알려야해’ 


이렇게 되면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어서 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당장 챙겨야 할 것은 핸드폰과 지갑이었다. 하지만 고시원에 올라갔을 때 내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강동윤이었다. 놈들은 내가 텃밭을 파헤친 사실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핸드폰과 지갑은 포기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서 공중전화를 걸던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리던지 하자. 그러나 그 계획도 곧 무산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총무와 창민이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란이었다. 일단 몸을 숨겼다가 기회를 타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두 번째 통로를 경유해서 돌아가려고 벽에 몸을 잔뜩 붙인 채 까치발로 이동했다. 우당탕.. 발에 뭔가가 걸려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누군가 그곳에 세워두었던 쓰레기통과 빗자루가 쓰러졌던 것이다. 그 소리에 동윤과 총무가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나는 재빨리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는 두 번째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노란 후레쉬 불빛이 천천히 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통로 쪽에서 숨죽인 발자국소리와 톤을 낮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숨긴 곳은 입구에서부터 5번째 방이었다 .내 옆에는 낯선 고시생 한명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침대 속으로 뛰어들어도 세상 모르고 자는 것을 보니 분명 약을 먹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위에는 총무실에 있던 커피잔이 있었다. 삐걱..첫번째 방 쪽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방을 하나 하나 열고 조사할 생각인가. 삐걱..두번째 방. 숨이 막히고 식은 땀이 났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는 대번에 들키고 만다. 문 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청각을 자극했다. 귀신이 방문을 하나씩 두드리고 다닌다는 괴담보다 훨씬 무서웠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들키면 나도 텃밭에 묻힌 그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삐이걱..세번째 방문. 소리가 원근감을 가지고 성큼 성큼 다가왔다. 이제 내가 있는 곳 까지는 불과 두 방 밖에 남지 않았다. 자꾸만 오줌이 마렵다. 이를 하도 꽉 깨물어서 어금니뿌리가 시큰거렸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도 바로 지금! 끼이이이..4번째 방문을 여는 소리! 수군거리는 소리 중간 중간 욕설이 섞여있다. 어떡하지..방문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공격을 하고 도망갈까. 무리다. 상대는 3명이다. 더구나 한명은 힘이 센 동윤이다. 1대 1이라고 하더라도 맨손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기. 뭔가 무기가 될 만한 날카롭고 뽀족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방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이라곤 두툼한 하드커버의 법전과 문구용 가위밖에 없었다. 법전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위를 집어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저벅..저벅..저벅..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바닥..벽..책상 위..천장..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려 이 극한의 상황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끼이이이..마침내 내가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검은 그림자가 스윽 들어오더니 불빛으로 방안 이곳저곳을 비추었다. 문 뒤, 책상 위, 침대. 상대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불빛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빌어먹을, 제발 그냥 가라, 움켜쥔 손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림자는 저벅 저벅 걸어 들어와서 이불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냥 가라니까! 화악- 남자는 거침없이 이불을 젖힌다. 그러나 남자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베게뿐이었다. 남자가 잠시 투덜거리더니 방 안을 몇 번 더 훑어보고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옆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점 점 더 멀어졌음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나무늘보처럼 매달렸던 쇠봉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총무의 말은 사실이었다. 쇠봉은 튼튼해서 사람의 체중에도 끄떡 없었다. 아슬아슬 했다. 남자가 조금만 더 머물렀어도 손의 땀 때문에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나는 열려진 문틈 사이로 동정을 살피다가 놈들이 9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입구 쪽으로 이동한다. 어쨌든 이 밀페된 곳에서 벗어나 입구까지만 도달하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다. 여차하면 뛸 생각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들은 아직 9번방을 수색 중이었다. 지금이라면 내가 유리하다. 막 입구를 향해 돌진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동윤이 내 바로 앞에서 후레쉬 불빛을 들고 웃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졌다. 


콱. 동윤이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으드득..어깨가 뽑힐 것 만 같다. 발 뒤꿈치로 동윤의 앞발을 찍었지만 꿈쩍하지도 않았다. 아악! 다음 순간 동윤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윤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가 뒷주머니에 숨겨두었던 가위로 그의 손등을 찍어 버렸던 것이다. 뒤에서 총무와 창민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등에 꽂힌 가위를 뽑으려는 동윤을 어깨로 밀쳐내고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 뒤에서 고함소리와 거친 발자국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거리에선 내가 한발 빠르다. 놈들과 상당한 거리차를 두고 입구 손잡이를 잡는 순간 해냈다!는 희열이 밀려왔다. 





덜컹..덜컹..아뿔싸! 입구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놈들이 양손잡이를 쇠사슬로 얽어매어 자물쇠로 잠궈 버렸던 것이다. 완전히 갇혔구나. 입에서 저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눈앞의 위기에만 집착해서 긴장을 놓아버린 나의 불찰이었다. 놈들은 내 바로 등 뒤까지 순식간에 추격해 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내 방을 향해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내 방문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어서 이 문 열어! 부숴버리기전에!” 


동윤이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시간이 얼마 없다. 나는 일단 형민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야 나야 준영이, 여기 지금 고시원이거든? 어서 와줘, 빨리!” 


“야 지금 몇 신 줄 아냐? 나도 잠 좀 자자.”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 일이라구. 내 목숨이 걸려있어! 가능한 한 빨리! 믿는다!” 


나는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친구의 부탁을 못들은 척 할 리는 없는 녀석이다. 조금 있으면 내가 아는 누군가가 온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든든해 졌다. 게다가 녀석은 이 사건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경찰이 나를 미.친 놈 취급해도 어느 정도 나를 변호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쾅 쾅 쾅 쾅..방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욕설은 계속 되었다. 세명이 달라붙어서 번갈아가며 미.친 듯이 문에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우지직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문이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와들 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112를 눌렀다. 제발 받아라..제발..뚜우 뚜우..통화중이다. 개새.끼들! 세금은 받아서 어디다 쓰는거야! 나는 핸드폰을 닫았다가 열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옆 방에서 동윤과 총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부순 방은 비어있는 옆방이었다. 사람은 선입견에 따라 행동한다. 나는 아까 방을 나서기 전 내 방에 있던 스파이더맨 타월을 떼어서 옆방에 걸어두었다. 내가 방을 비운 사이 놈들이 내 방을 함부로 뒤질까봐 그랬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방 번호보다는 문 가리개로 방을 구분하는 습관을 가진 녀석들을 멋지게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잠시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했다. 


“개수작부리지 말고 빨리 문 열어!” 


얕은 수에 속은 게 분해서 인지 놈들은 더욱 거칠어딘 발길질로 내 방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거듭 112를 눌렀다. 신호음..드디어 사람이 받았다! 


“네 신림2동 경찰서입니다..말씀하...” 


여자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막 도움을 청하려는 순간 팟! 하고 핸드폰의 배터리가 나가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다. 아침에 분명히 충전을 해 두었는데. 필사적으로 전원버튼을 눌러봤지만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문 밖에서 발길질이 멈추고 낮게 읖조리는 주문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주문 소리 때문에? 시간이 없다. 곧 총무가 여벌의 열쇠를 찾아서 올 것이다. 아니 그전에 방문이 먼저 부서질 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곳은 어딜까. 나는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2층 높이. 과연 내 발목이 견뎌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듯이 들썩거렸다. 잠시 움직임이 멎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우투투투- 천이 뜯기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창민이 위쪽 창문의 방충망을 뜯어내고 그쪽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동윤이 밑에서 무등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창민의 얼굴은 화장이 뭉개져서 귀신과 같은 형상이었다. 입가의 붉은 립스틱이 뺨으로 번지면서 마치 피를 묻히고 있는 것 같았다. 


“시발..진작에 네가 문을 열어주면 서로 좋잖아, 응?” 


여자같은 목소리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체가 창턱에 접히자 창민의 얼굴에 피가 쏠려 붉어졌다. 벌써 창민의 상체가 반이나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위로 올라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창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짙은 보라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으로 내 얼굴과 팔뚝을 마구 할퀴어 대었다. 흉기에 베인 것 같이 팔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이 뚫리면 끝장이다! 피가 눈에 스며들어 사방이 온통 붉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창민의 턱과 어깨를 밀어냈다. 다음 순간 나는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창민이 하얀 이빨로 내 손등을 물어뜯었다. 내가 왼손으로 창민의 관자놀이를 후려치자 창민이 떨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나의 손등에서 살점도 한조각 떨어져나갔다. 섬뜩한 통증이 엄습했다. 창민은 내 방 안쪽으로 떨어져 신음소리를 냈다. 창민은 비틀거리고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놈들이 방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채비를 했다. 막 창틀에 올라가 양 손으로 커튼을 잡고 뛰어내리려고 하는 찰나, 나는 커튼의 감촉이 낯익음을 깨달았다. 아아..왜 지금껏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매일 수도 없이 보고 손으로 만졌으면서도 어째서 몰랐을까. 이 고시원에 감도는 요기가 나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까. 모든 것이 눈 앞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방의 검은 커튼은 






바로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벌컷! 마침내 내 방문이 열렸다. 동윤과 총무가 내방에 몰려들어온 순간, 나는 두 손으로 커튼을, 아니 머리카락을 감아쥐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당. 


빌어먹을.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착지할 때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손바닥도 마찰열로 화상을 입어서 시큰거렸다. 우당탕탕..계단을 내려오는 거친 발자국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조여드는 것 같아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바람 새는 듯한 쉰 목소리가 고작이었다. 핸드폰을 작동하지 않게 한 이상한 힘으로 놈들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어쨌든 큰 길 쪽으로만 나가면 된다.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아직 행인 한 두명 쯤은 있을 것이다. 직접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최소한 경찰에 연락만이라도 해준다면..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막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경찰보다 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혀..형민아!” 


“준영아! 어서 타!” 


스쿠터를 타고 온 형민이 엄지손가락으로 뒷자리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어서! 시간이 없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어떻게 든 해 줄 것이다. 안도감으로 힘이 다 빠진 나는 스쿠터에 타자마자 기절하듯 형민의 등에 쓰러졌다. 다음 순간. 나는 뒤통수에 불이 번쩍 하는 충격을 느꼈다. 왜..? 그런...?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을 돌린 형민이 바이크 헬맷으로 내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도대체 네가..왜..천천히 정신을 잃어가면서 나는 형민의 목에 걸린 갈고리 십자가 펜던트를 보았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주문소리..말린 쑥을 태우는 듯한 역겨운 아키실론 냄새..간신히 눈을 떠보니 주위는 어둠속에서 몇 개의 촛불이 나를 둘러싸고 타오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며 손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비닐이 깔린 고시원 침대 위에 끈으로 손발이 꽁꽁 묶여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진 알몸에는 검은 물감으로 온갖 기괴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소매가 긴 검은 색 옷을 입은 늙은 여자가 두 손을 위로 올리며 하늘을 우러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해서 잠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늙은 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원장이었다. 원장 외에도 총무와 창민, 동윤, 형민이 촛불을 들고 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원장은 그릇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 내 얼굴에 뿌리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짜다. 소금이다. 지금 무슨 의식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겠지. 내가 처음 이곳에 온 그날처럼 고시원 사람들은 모두 수면제가 든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잃고 있을 것이다. 현관에 있던 흙 묻은 운동화들. 아마도 내 옆방 남자도 내가 잠든 사이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옥수수밭에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승을 떠나지 못한 억울한 영혼이 벽을 두드리며 밤마다 도움을 요청한 것이리라. 그제서야 왜 총무가 처음에 나를 고시원에 들이기를 꺼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옆방에서 자신들의 의식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미..미.친 새.끼들..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몇 사람을 죽여왔어..” 


나는 눈알을 최대가동범위로 움직여서 방안을 살폈다. 비닐이 쳐진 곳은 침대뿐이 아니었다. 벽과 천장까지 빈틈없이 덮은 번들거리는 비닐이 촛불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그것의 용도를 깨달았다. 피가 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이 자식들은 정말로 나를 악마의 제물로 바칠 셈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온 몸이 떨려왔다. 침대 다리가 덜컹거리며 떨린다. 오줌보를 제어할 능력이 사라지며 하체에 뜨듯하고 아늑한 느낌이 왔다. 살고싶다. 살고 싶다..이성이 증발하고 오직 그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장님 이것을..” 


창민이 커다란 은대접을 들고 왔다. 원장은 대접에 손을 넣고 피로 범벅이 된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것은 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꼬마의 잘린 머리통이었다. 반쯤 뜬 눈에서 눈동자가 위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르륵..꼬마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피로 원장은 내 알몸 주위에 육망성을 그렸다. 비릿한 핏줄기가 내 가슴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야 했다. 


“쿨럭..쿨럭..이 미.친 녀석들..꼬마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나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발악을 했다.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신의 존재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을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일정해. 누군가가 복을 받으려면 그 댓가로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거야” 


원장이 말했다. 이 곳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합격률 뒤엔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키실론의 향은 마취효과가 탁월하지. 아프지는 않을거야.” 


원장이 커다란 칼을 내 명치에 가져다 대었다. 갈고리 모양의 은색 칼이었다. 차가운 금속의 저온이 피부를 뚫고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스윽..칼 끝의 갈고리가 나의 가슴을 지나가자 나의 피부는 너무도 맥없이 좌우로 벌어지며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앗다. 


“아..하느님..” 


원래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15년 전 수미를 죽일 때도 그 년도 똑같은 신을 찾더군. 하지만 내가 그 년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라서 죽였을 때 그 년이 찾던 신은 어디에도 없었어. 그 년의 목을 잘라서 피를 마시고 그것을 항아리 속에 넣어 묻을 때조차도! 너희들의 신은 영원한 방관자야. 너희들이 어떤 고통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아. 잘했다고 상을 주는 일도, 못했다고 벌을 주는 일도 없지. 하지만 우리의 신 사탄은 달라. 자신의 종들에게 현세에서의 복과 부귀와 영광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야!” 


“만왕의 왕, 주중의 주 사탄이여! 영원하소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두 손을 들고 소리쳤다. 15년전 이수미를 살해한 이후 이 녀석들은 이런 식으로 매년 몇 명의 고시생들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피의 의식에 참여한 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댓가로 매년 시험에서의 합격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나의 신의와 주의 생령은 이 피에 깃드소서. 그리고 그것을 어둠의 힘에 바칩니다.” 


원장이 성배에 담긴 아이의 피를 꿀꺽 꿀꺽 들이마셨다. 나머지 사람들도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마셨다. 


“제물로 바치는 뜨거운 피를 흠향하소서” 


원장이 갈고리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얀 이빨사이로 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원장이 막 내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도님. 그 일은 주의 은총을 입은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형민이었다. 


“세상의 헛된 정보다 사탄님을 택한 그대에게 우선으로 첫 번째 칼의 영광을 주겠노라. 주께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그대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리라.” 


원장이 형민에게 칼을 건네어 주었다.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쥔 형민은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광기로 희번뜩이고 있었다. 


“혀..형민아..너까지 도대체 왜그래? 정신차려 임마! 나야, 니 친구 준영이라고!” 


나는 발버둥치며 형민의 정신을 돌리려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누군지는 너무도 잘 알아. 나는 지금 제정신이야. 너와 같이 공부하고 밥을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정상이야.” 


“네가 어째서 이런 악마들의 모임에 있는 거야? 넌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잖아!” 


“닥쳐! 기독교의 신이 나에게 해준 일이 뭐가 있지? 나도 학창시절부터 온몸을 바쳐 그를 믿고 섬겼어. 하지만 나에게 남은 게 뭐야? 시험에는 매년 떨어지고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그토록 선량하신 분이었는데! 후후..기도하라고? 구하고자 하는 자는 문을 두드리라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뱀을 주겠느냐고? 내가 그를 섬긴 댓가는 바로 절망이었어!” 


형민이 칼을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나는 그 병원복도에서 사도님을 만났지. 그후로 몇 달에 걸쳐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는 세상에서 어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탄이야 말로 내가 찾던 참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허울뿐인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도 않아. 무지한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한 위선자들이 지어낸 것에 불과해. 정작 그 치들은 그런걸 믿지도 않지. 알겠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실 뿐이야.나의 새 주인이신 사탄님은 나에게 현실에서의 진정한 복을 약속하셨어. 어머니의 병이 기적적으로 완치된 것도 모두 그분의 힘 덕분이야. 그리고 이제 너만 제물로 바치면 나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어!” 


“그 따위 시험 때문에 친구까지 죽일 셈이야? 정신 차려 이 자식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애원의 눈물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절망의 눈물임과 동시에 잘못된 광신에 빠져든 형민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나도 친구인 너를 죽이긴 싫었어. 네가 없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제물로 선택되었겠지. 그래서 그토록 이 곳에서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던거야. 누구의 탓도 하지 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형민아! 형민아 살려줘 제발!” 


나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민이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동작에 맞추어 남자들이 기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아 이 모든 게 연극이었으면. 지금이라도 형민이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며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갑자기 찌잉- 주문소리를 듣고 있자 머리 한 구석이 아파오며 숨이 막혔다. 언젠가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몽환적인 주술소리. 숨을 헐떡거리며 내 목을 조이는 욕심과 광신으로 추하게 일그러진 젊은 여자의 얼굴. 내 목을 조여드는 나 자신의 긴 머리카락. 천장의 형광등. 온갖 기억들이 두서없이 나의 머릿속에서 플래쉬 불빛처럼 터졌다. 숨을 쉴 수가 업어..살려줘..살려줘 제발..닥쳐..너희들의 신을 불러봐..지금이라도 구해달라고 불러보란 말야..역겨운 향료냄새.. 아아 밉다...자신을 위해 남을 짓밟는 이 사람들이 밉다..죽어서도 복수하고 싶다...그 짧은 순간 죽은 수미의 기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수미와 일체가 되어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기억들이 나에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수미의 15년전 기억들이 어떻게 내 체내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머리카락. 매일 나의 몸을 조금씩 파고들던 머리카락들. 그 속에 수미의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수미는 자신의 원한을 담은 머리카락들을 날마다 조금 씩 내 몸속에 찔러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몸속에 남은 머리카락의 뿌리들은 나의 몸속의 핏줄 속을 돌고 돌아 마침내 나의 뇌에 박혀 신경과 동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남긴 흔적들로부터 지금 부활하고 있었다! 


“사탄이여 만세!” 


막 형민이 내 가슴의 문양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그때였다. 내 몸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내 머리의 모공 하나하나에서 검은 것이 사방으로 일제히 분출되어 나갔다. 


“으악 이게 뭐야!”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남자들이 얼굴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났다. 형민도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몸부림쳤다. 그의 손은 나의 머리에서 뻗어나간 검은 머리카락으로 칭칭 감겨있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들이 형민과 원장, 그리고 남자들을 옭아매었다. 


“이..이 괴물..” 


형민은 나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휘릭. 머리카락 한 다발이 내 의지에 따라 내 손발을 묶고있던 끈을 간단히 잘라내었다. 나는 형민을 노려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억난다. 모든 것이 서서히... 


“괴물들은 바로 너희들이야! 나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15년 동안이나 그 좁은 곳에 가둬두었지. 나는 죽어서도 하루도 쉴 수 없었어. 매일 목이 졸리는 고통에 혀를 늘어뜨리며 나를 구해줄 사람을 찾아 이곳을 떠돌아야했어.” 


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여자의 톤으로 변해있었다.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 두피가 뜯어질 것처럼 긴장되었다. 손가락 끝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손톱이 피부를 찢으며 꾸불꾸불 자라났다. 나는 준영으로서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한 채 수미의 의식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이미 준영이라고도 수미라고도 할 수 없는 복합 인격체가 되었던 것이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되살아났다. 





15년 전. 이수미라는 이름의 여자였던 나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 속에 기억을 담는 능력이었다. 그전부터 어떤 사물에 손을 대면 그 사물에 대한 인상이 머리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아주 구체적인 정보나 장면까지는 아니어도 불길한 사연이 깃든 물건이면 어김없이 음울하고 슬픈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물건에 깃든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은 그 대상이 내 몸의 일부분일 때 더욱 구체적으로 향상되었다. 옛날부터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다는 말이 있다. 신체의 일부분인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는 내가 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정보에 노출되어있고 어떤 형태로든 그 흔적을 간직하게 마련이다. 모의고사를 보다가 잘 기억이 안 나던 문제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풀면 이상하게도 답이 잘 떠오르곤 했다. 공부를 할 때의 정보가 머리카락 속에 입력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책을 펴놓고 보듯이 아주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답 두개를 놓고 망설일 때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음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기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조금 기억력이 좋은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다. 


같이 공부를 하면서 만나게 된 단짝 친구 경란은 유난히도 내 머리카락을 부러워했다. 시험에 합격을 하더라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몇 년째 긴 머리를 자르지 않아 지저분하다며 누구나 손가락질하던 나에게 그런 경란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나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모든 자료를 공유했다. 심지어 수년간 정리한 노트까지도.성격이 활달한 경란과는 공부파트너로서도 잘 맞았지만 무엇보다 음악적인 취향이 같았다. 당시 나의 유일한 취미는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내 방에서 헤드폰으로 레드제플린의 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맞대곤 했다. 그랬던 경란이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마녀로 변한 것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경란이 나의 머리채로 나의 목을 휘어감고 조를 때 나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나의 모든 기억, 영혼, 그리고 원한을 내 머리카락 속에 집결시켰다. 언젠가 나의 원혼이 머리카락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그의 몸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아아아아! 죽어버렷!” 


다음순간 내 상상속에서의 경란은 순식간에 늙은 마녀의 얼굴로 일그러졌다. 틈을 탄 원장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나에게 돌진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땡그렁..바닥에 떨어진 칼에는 그녀의 두 손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원장의 두 손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바닥과 벽의 비닐위에 마구 뿌려졌다. 채찍처럼 휘두른 나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이 손이나 발처럼 내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손목이 잘린 원장은 짐승같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목을 휘어감아 공중으로 들어올리자 원장의 두 발이 공중에 떴다. 원장은 숨을 헐떡이며 손목만 남은 두 팔을 버둥거리며 내 머리카락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항상 혼자뿐이던 나에게 넌 친구를 하자며 접근했지. 난 그때 뭣도 모르고 행복했어.” 


스스스스-뻗어나간 머리카락은 그녀의 목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얼굴 전체가 머리카락으로 시커멓게 뒤덮힌 원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내가 머리카락을 조이자 처절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난 나만이 꿈꾸던 빛나는 세계가 있었어. 모두의 비웃음을 이기고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어. 그 모든 것을 너는 너의 욕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망쳐버렸던 거야.” 


“우..웃기지 마. 누가..너같은 것한테 관심을 가졌을 줄 알아? 넌..그 분의 제물에 불과했을 뿐이야..” 


머리카락 뭉치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너의 친절한 겉모습에 속고 말았지. 하지만 너에게 살해당하고 영혼만 남은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하지만 이제야 이 남자의 몸을 빌어 나는 살아났어. 이제 네가 당할 차례야” 


머리카락을 더욱 세게 조였다. 비명소리도 찢어질 듯이 날카로와졌다. 


“죽어.” 


한번 더 머리카락에 힘을 주자 으적..으적..두개골이 아스러지는 소리가 나며 뇌수와 섞인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와작..그나마 구체를 유지하던 형상이 완전히 으스러져지며 좌아악..핏물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을 풀자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구겨진 고깃덩어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살과 턱뼈, 이빨이 한데 뒤섞여 피 떡이 되어있었다. 시뻘건 고깃덩이의 어디서도 그 아름다웠던 보조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으아아아...용서해줘..난 아무 죄도 없어..저 여자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갑자기 총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머리카락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총무는 바닥에 닫기도 전에 머리카락에 얽혀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악 사탄님! 이방인들로부터 저희를 구원해주소서.” 


총무가 공중에 뜬 채 울부짖었다. 


“그래, 너희들의 신이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아..안돼..이..이러지마..” 


머리카락에 두 손을 꽁꽁 묶인 형민이 나의 의지에 따라 바닥에 칼을 집어 들었다. 팔에 힘을 주며 저항했지만 수미와 일체가 된 나에게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칼을 집어든 형민은 남자들을 향해 칼을 들어올렸다. 첫 번째 대상은 창민이었다. 쉭- 칼이 공기를 가르자 벽에 한줄기 피를 흩뿌리며 창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창민은 몇 번 쿨럭거리며 피섞인 기침을 토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형제여 이러지 마시오!” 


동윤과 총무가 애원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동윤의 다부진 몸도 이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쉬익-형민의 칼이 다시 한번 위 아래로 움직이자 암녹색 창자가 동윤의 배에서 뭉클거리며 쏟아져나왔다. 나의 머리카락들은 촉수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의 창자를 휘감고 마구 뽑아내었다. 못 쓰게 된 카세트테이프처럼 마구 뽑혀져 나온 창자가 터지면서 벽과 바닥에 피와 더러운 오물이 쏟아냈다. 


“끄아아아아악” 


자신의 내장이 뜯겨나갈 때마다 동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폐가 터져나가는 것 같은 처절한 비명이었다. 마침내 위장과 혀까지 배를 통해 뽑혀 나온 후에야 동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나의 머리카락이 형민의 두 팔을 조종해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총무는 잠시 후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직감했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안쓰럽게 떨고 있었다. 


“준영아..이..이러지마..우..우린 친구잖아? 그렇지?” 


형민이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보며 애원했다. 역겹게도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나도 조금 전까진 그런 줄로 착각했었지.” 


“용..용서해줘..나도 사실은 그들의 조종을 받고 있었어..내 의지가 아니었다구 흐흐흑..”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정말이야. 내 말을 믿어줘. 내가 뭣 때문에 친구인 너한테 그렇게 까지 했겠니?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어머니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 말야..주..준영아..제발 이..이러지마..” 


형민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맹렬한 분노에 억눌렸던 측은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되살아났다. 준영으로서 형민과 함께 했던 학창시절과 추억들이 생각났다. 함께 밴드를 하며 울고 웃었던 기억, 엠티에 가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여자와 헤어져 낙담한 형민의 등을 두덕여 주었던 기억 등등. 생각해 보면 나는 형민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형민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손목에 감은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스스슥..머리카락들이 수축되며 다시 나의 모공 속으로 들어왔다. 방안을 뒤덮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일제히 철수하자 시체와 피로 범벅된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그 남자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나는 형민과 총무를 남겨두고 뒤돌아서서 손 문손잡이를 돌렸다. 손톱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목소리도 어느덧 원래의 남자 톤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형민의 손으로 총무를 처리하고 형민만 입을 다물면 된다. 이것이 목숨을 살려주는 댓가로 형민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바로 그 때, 


“사탄님 만세!” 


형민이 고함을 지르며 내 등 뒤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그를 향해 순간적으로 뻗어나간 검은 기둥은 형민의 몸을 휘감고 공중에 들어 올려 그대로 총무를 향해 내던져버렸다. 


퍽. 


두개의 두개골이 맞부딪혀 박살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는 다시 피의 폭죽이 터졌다. 





그로 부터 일 년이 지났다. 그 기묘한 사건은 신흥 사이비종교집단의 집단 ■■극으로 언론에 알려졌다. 나는 야만적인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쳐진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형사와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주차장 옥수수밭에서는 사람의 두개골과 절단된 신체부위등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유가족들은 집단 위령제를 지냈다. 특히 수미가 이 사건의 최초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장터에서는 무당까지 불러 수미의 혼을 달래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화장터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마치 검은 뱀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한편 사탄을 섬기는 흑마술 단체의 교주가 원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매년 고시합격자를 배출했던 S고시원도 문을 닫고 말았다. 사건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총무실에서 발견되었던 ’라구엘의 서‘는 사탄과 그의 72악마들을 불러내는 의식이 기록된 일종의 흑마술서였다고 한다. 또한 텃밭에서 발견된 ’아키실론‘이라는 식물은 사탄교의 인신공희에 사용되는 아프리카산 식물이었는데 그 성분이 대마초보다 중독성과 환각성보다 훨씬 강력해서 제물은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그때 고시원에서 보고 들었던 이상한 것들은 ’아키실론‘의 향에 의한 단순한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수미의 간절한 의지에 의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확신을 할 수 없다. 


끔찍했던 그날 밤 이후 내 몸에 들어왔던 수미의 영혼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 형민을 향해 뻗어나간 검은 머리카락뭉치가 내 몸에 남겨진 수미의 마지막 흔적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뿜어져 나간 이후 나는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응급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장에서는 기묘한 문자들이 몸에 그려진 채 알몸으로 기절해 있는 나와 5구의 처참한 시체, 엄청난 양의 피와 피에 엉겨붙은 기괴한 머리카락 뭉치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상했던 것은 고시원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검은 커튼이 단 하루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수미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아마 내 방 벽에 있었던 기괴한 낙서들도 수미가 내 몸을 빌어 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한바탕 못된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지나고 그날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무렵, 나는 옷 수납상자의 바닥에 숨겨두었던 레코드판을 다시 꺼내었다. 음악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깡그리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앨범 자켓을 열었을 때 그 곳에서는 레코드판 대신 동심원 모양으로 말려있는 한 타래의 머리카락이 나왔을 뿐이었다. 검은 커튼과 마찬가지로 레코드판 역시 한줄기의 긴 머리카락이 동심원으로 골을 이루며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꺼번에 지난 15년의 세월이 지나간 듯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수미는 자신이 좋아했던 레드제플린의 음악과 함께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나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이제 목적을 달성한 그것은 검은 커튼과 마찬가지로 한줌의 머리카락으로 흩어져 있었다. 15년동안 그 좁은 곳에서 나오고 싶었던 수미의 한이 풀리면서 머리카락을 고체로 응축시켰던 불가사의한 힘도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으리라. 


그날 밤 이후 고시공부는 접었다. 끝없이 누군가를 이기고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생활에 진저리가 났다고나 할까. 사회는 이런 나를 위해 ‘낙오자’라는 말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 안정적인 직장과 고정된 수입을 포기한 대신 다시 깁슨 기타를 둘러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와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기타를 칠 수 있는 즐거움을 얻었다. 요즘 나는 작은 클럽에서 동료들과 연주를 하며 받는 적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어쩔 땐 돈 대신 맥주를 받는다. 소녀들 3-4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팬클럽도 생겼다. 풍족하진 않지만 마음 깊숙이 삶의 충만감이 느껴진다. 언젠가 나의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싶어질 때, 나는 검은 커튼이 쳐진 그 고시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인생을 나눌 때 비로소 나의 삶도 완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것이다. 합주가 혼자 힘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말이다.



출처: 오늘의유머 공포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