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충을 지휘하던 정신체가 파괴되었다. 이로써 지구 각지의 철충은 통제를 벗어났다.




통제는커녕 수리와 보급도 받지 못하는 철충은 한낱 짐승과 같이 움직이는 쇳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승리의 댓가는 비쌌다. 미끼 작전으로 내걸린 무적의 용과 라비아타같은 저항군의 투톱 바이오로이드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아마 둘 다 죽었으리라 여겨졌다. 철충 본대의 시선을 끌고 자폭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령관의 지휘라면, 오합지졸인 철충 잔당을 물리치기란 앞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덕분에 그 투톱 바이오로이드 없이도 저항군은 존속할 수 있으리라 보였다.




"참 슬픈 일이지 않습니까?"




철충 잔당 소탕을 위해 수색작전 중이던 T-2 브라우니가 바닐라 A1을 향해 말을 걸었다.




"뭐가 말이죠?" 바닐라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두 바이오로이드는 블랙 리버와 삼안 산업으로 제조기업이 달랐지만, 철충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인간 사령관 아래서 뭉쳐 있었다.




"의심하지 않던 상대한테 뒤통수를 맞으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바닐라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보려는 찰나, 뒤따르던 브라우니 셋이 바닐라의 등판을 주저없이 쏘아 갈겼기 때문이었다.




수십발의 총탄을 맞은 바닐라의 등에서 피와 살점이 터져 나갔다.




바닐라는 순식간에 앞으로 넘어졌다.




"나 참, 브라우니. 점사하라니까 그러네요. 바이오로이드는 철충이 아니잖아요? 탄약 아깝게."




"헤헷. 그래도 확실히 죽여야지 않겠습니까."




T-3 레프리콘이 브라우니를 탓하며 바닐라에게 다가왔다.




몸을 들썩이던 바닐라가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지만, 레프리콘은 망설이지 않고 바닐라의 목 뒤에다가 기관총을 점사했다.




곧 총성이 들리고 바닐라의 의식이 사라졌다.




"갑시다. 보고해야죠."




이와 같이, 블랙 리버 바이오로이드가 다른 회사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사살하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포병과 기갑병들은 여지껏 저항군 동료들이 쉬고 있던 막사와 숙소를 주저 없이 파괴하고 불태웠다. 부서진 기지에서 화염과 비명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 뜬 공군 부대는 민첩한 사냥꾼이 되었다. 그들은 도망치는 바이오로이드 여럿을 주저없이 살점과 피가 날리는 파편으로 만들었다.




언제나 비디오 게임을 하고 놀던 스파이 바이오로이드는 작은 친구의 머리에 기관단총을 갈겼다.




가정용 바이오로이드 마리아와 포티아는 식사 대접 중에 총알 세례를 받고 절명했다.




삼안 산업제와 덴세츠제 바이오로이드 개개인은 블랙 리버제보다 능력은 뛰어났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워낙 불의의 기습을 당한지라 쉽게 죽어나갔다.




하물며 노동에 특화된 PECS제 대원들에 이르면 저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 모양으로 많은 바이오로이드가 무방비로 벌집이 되었다.




오르카호에서, 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사령관을 보호하는 CS페로도 에너지 빔에 팔다리 힘줄이 꿰뚫렸다.




"독하군. 수인 주제에."




신음을 참는 페로를 향해 불굴의 마리가 중얼거렸다. 페로는 엎어진 채로 고개를 들어 쏘아보기만 했다.




함장실에서 사령관인 체하고 있다가 시간을 끄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임무는 충분히 달성했다.




마리는, 원구형 드론의 포구를 페로의 미간에 조준하며 다시 말했다.




"제대로 대답하면 일격에 날려주지. 블랙 리리스와 사령관 각하는 어딨나?"




마리의 최우선 목표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인 사령관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를 확보하기 위해 경호대장 리리스를 먼저 사살할 생각이었는데, 용케도 두 사람은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 있었다.




"그딴 걸 알려드릴 것 같습니까. 어차피 주인님과 언니의 위치는 당신이 알아봐야 소용없습니다."




페로는 떨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그녀는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의 뇌파를 감지할 수 있단 사실을 잊은 듯했다.




"흥. 각하의 뇌파가 아직 오르카호에서 느껴진다. 시간 끌어봐야 소용없어…… 고문은 싫어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리가 손을 들었다. 드론들이 죽지 않을 만큼만 전류를 흘려 페로를 지져 댔다. 페로의 눈이 돌아가고 침이 흘렀다.






* * *






수십년 전, 철충이 인간을 살육하기 시작했을 때, 블랙 리버는 다른 인류 조직들과 동맹을 맺었다.




인류 멸망의 위기 앞에서는 역시 세계정복의 야망도 소용이 없었다. 최소한 철충들이 사라질 때까지는.




그렇기에, 한편으로 블랙 리버 휘하의 바이오로이드에겐 한 가지 기밀 모듈이 설치되었다.




- 인류의 적이 사라지면, 블랙 리버의 패권을 재확립할 것.




이 정신제어 모듈은 마리를 포함한 당대 모든 블랙 리버산 바이오로이드 신경계에 심어졌고, 이후 자체 생산된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장착되었다.




겉으로는 메인터넌스를 이유로 삼은 것이었다. 리오보로스 가문 극소수만 알고 있는 워낙 은밀한 프로젝트라 저항군에서도 이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류가 멸망한 지도 약 백여년이 지났다.




저항군의 작전으로 철충의 본대가 패배 직전에 놓였을 때, 아직도 우주 궤도를 돌고 있던 블랙 리버의 무인 인공위성이 기밀 모듈을 활성화시켰다.




이에 따라 마리를 포함한 모든 블랙 리버 저항군은 지금까지 동료였던 다른 기업제 바이오로이드의 배후를 주저 없이 찌른 것이다.




그들은 바이오로이드인 이상, 모듈의 정신 지배 하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다.






* * *






"독할 뿐이지 결국 다 실토할 것을."




고통을 이기다 못한 페로는 마침내 사령관이 숨은 장소를 털어놓았다.




마리는 사령관이 숨은 위치를 알아내자 주저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총검을 페로의 몸 구석구석에 찔러넣어 숨통을 끊었다.




블랙 리버 전투 부대의 지휘관들은 마리와 함께 사령관이 숨은 선실 앞까지 도착했다.




반란자들에게 행운인 건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없다는 점이었다. 강력한 그녀가 살아있다면 사령관을 확보하기 지극히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블랙 리버 중, 유이하게 기밀 모듈에서 자유로운 무적의 용은 이미 앞선 전투에서 행방불명이었다. 나머지 하나인 닥터도 부재중 입장 표명을 하진 않았지만 대세가 기울면 분명 투항해 올 터였다.




바이오로이드의 천적인 AGS로봇들 또한 지난날부터 크게 수가 줄어들었으며, 남은 로봇 역시 해킹을 당해 통제권이 블랙 리버 위성으로 넘어간 채였다.




이제는 완전히 그들의 세상이었다. 여기서 사령관만 자신들 것으로 만들면 블랙 리버의 천하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가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오르카호는 이미 블랙 리버에게 점거되었다. 사령관의 뇌파 또한 그가 숨었다는 선실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확인되었다.




마리는 선실 내부로 통하는 도어 스피커를 켜고 말했다.




"사령관 각하.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각하께 피해를 끼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 …….




"블랙 리버 소속이 아닌 바이오로이드만 곁에서 치울 뿐입니다. 반역 따위가 아닙니다."




사령관은 전혀 대답이 없었다.




하기야 가족처럼 여기던 바이오로이드들이 사살당하고 있으니 충격을 받을 법도 했다. 그것도 부하인 블랙 리버 부대들에 의해서.




지휘관 중에 메이와 레오나도 거들었다.




"사령관. 너무 아쉬워 하지 마. 그깟 가정용 바이오로이드야 또 생산하면 되잖아? 우리같은 지휘관보다 하잘것 없는 것들이라고."




"AGS 격납고는 물론 태아 배양실도 우리가 점거했어. 협박하려는 건 아니야. 근데, 이대로 버텨 봤자 소용없어."




그러자 스피커로부터 사령관의 말소리가 들렸다.




- 나 한명 확보하려고, 어제까지 동료였던 아이들을 전부 죽인 거야?




"일이 이렇게 된 건 안타깝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 사령관, 이제까지와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로열 아스널은 사령관을 설득하려고 했다.




- 동료의 뒤통수도 치면서 나까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 리오보로스 가문의 새 가주가 되시면 그만입니다."




마리도 사령관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저희 블랙 리버의 새로운 총수로서 취임해 주십시오. 위성도 이미 각하를 총수로 추대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녀로서는 블랙 리버가 아닌 바이오로이드를 배제하는 일만이 목표였다. 사령관에게는 적의는커녕 오히려 애정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지휘관들 모두는 기밀 모듈이 내린 명령도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다른 꿍꿍이를 품었다.




전쟁이 끝났으면 토끼 사냥에 쓰인 동료들을 삶아야 하는 법이었다.




이 기회에 방해되는 타 기업제 바이오로이드를 쳐내고 자신들과 사령관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마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사령관의 살아 있는 뇌를 확보할 수도 없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뇌가 내리는 명령이 아닌 한은 인간을 다시 재생산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사령관을 얻지 못하면 이 반역도 블랙 리버의 부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휘관들은 이내 사령관을 생포하기로 결정한 다음 T-60 불가사리를 시켜 선실 문을 뚫게 했다.




"각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육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각하께서, 삼안 산업제 바이오로이드보다 저희를 더 사랑해 주셨다면 저희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는 뒷말을 삼키며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문을 부숴라!"




이윽고 불가사리의 파일 벙커가 선실 문을 날려버렸다.




지휘관들은 즉시 선실 안에 쳐들어갔다. 사령관을 산채로 잡아야 하므로, 그가 자살하도록 놔둘 순 없었다.




굳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세뇌라도 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전혀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뇌파 발생기와 더불어 스피커만이 놓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지휘관들을 향해 스피커에서 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역시 너흰 블랙 리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끝까지.




"각하?"




"사령관?!"




"설마……."




지휘관들이 황망한 눈으로 선실 안을 훑어 보았다.




사령관은 어디선가 스피커로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 건 실상 뇌파 발생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 너희들에겐 고마웠다. 하지만 먼저 날 배신하기로 한 이상, 그리고 동료들을 죽인 이상…… 나도 당해줄 순 없어. 끝까지 아니길 바랬는데.




마리는 그제야 사령관의 의도를 읽고 안색이 변했다.




"모두 나갓!"




그러나 마리가 말을 끝마치는 순간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 오르카호를 뒤흔들었다.




이어서 오르카호의 핵반응로가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자리에 모여 있던 지휘관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 반응로는 카운트다운을 세는 법도 없이 즉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어?"




지휘관들이 마지막으로 느낀 건 하얀 빛과 뜨거운 열기 뿐이었다. 하필이면 이 선실은 오르카 전체 반응로의 바로 지근거리였다.






* * *






멀리 떨어진 등대에서, 사령관은 바다 위로 치솟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목격했다.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오르카호가 자폭하며 침몰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곁에는 실종된 걸로 알려진 라비아타, 무적의 용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만이 서 있었다.




이 등대는 사령관이 처음에 오르카호를 출항시킨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




"끝났구나."




사령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철충 본대와 전투 직전, 닥터와 용이 주저하다가 전해온 진실을 통해 사령관은 이 같은 작전을 세웠다.




싸움을 앞두고 선제적으로 블랙 리버만을 처리할 수도 없었고, 모두의 기밀 모듈을 하나하나 제거하기도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이제껏 목숨을 바치며 싸워 온 부하들을 모두 죽이는 데엔 거리낌이 있었다.




오르카호의 침몰도 그 블랙 리버 지휘관들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여서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한동안 실종을 가장했던 용이 말을 받았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야 하는 법이오. 그 사냥개가 악의로 미쳤다면 더더욱."




냉정하게 말하는 용의 얼굴 또한 어두웠다. 그래도 자신의 직속 부하들이었다. 사령관을 위해 부하를 함정에 빠뜨리는 작전을 세우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저희 아이들도 많이 죽었어요. 조금은 그녀들에 대한 속죄라고 해도 되지 않을지."




라비아타의 슬픈 말을 듣고, 뒤에 있던 알렉산드라와 리리스 등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들의 친구나 동생, 부하도 이번 반역으로 대부분 죽었던 것이다.




팔짱을 끼고 버섯구름이 흩어지는 걸 바라보던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서로 싸우는 쓸데없는 짓 하지 않길 바래."




"물론이오. 내게는 인간의 야망 따윈 아무 관심이 없으니."




"저희 삼안 메이드도 언제까지나 주인님을 모실 거예요."




"나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빠를 도울게. 다시 만들 것들이 많으니까."




무적의 용과 라비아타를 시작으로, 뒤에 서 있던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무릎을 꿇고 사령관에게 재차 충성을 맹세했다.




돌아선 사령관은 목이 메어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자, 오르카호가 자폭한 수역도 차츰 파도가 잦아들고 다시 잠잠해져 갔다.




모든 것이 바다 속에서 잠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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