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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찌개가 끓고 있사옵니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약속했었지요. 다시 만나는 날 당신이 그리던 맛을 진상해드리기로.

 저는 나날이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혀로 느끼는 그 어떤 쾌락도 제공할 수 있는 게 저 소완이옵니다. 당신은 언제든지 상에 앉아 수저만 드시면 됩니다. 원하는 맛이 무엇이든 한 방울도 빠짐없이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늦는단 말입니까.

 약조한 날이 한참을 지났습니다.

 알고 있었사옵니다. 무능한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거짓말이었지요.

 돌아오겠다는 약조도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그 뻔한 거짓말이 뭐라고 이리도 매달리고 있는지, 제가 참으로 한심하옵니다.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김치찌개를 버렸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음식을 낭비하는 것은 주방에 서는 자의 미덕이 아니옵니다만, 아무 소용없이 썩어가는 식자재를 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그저 그래서 계속 찌개를 끓여봅니다. 당신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도.

 

 지금 제 눈앞에 잔망스럽게 부글거리는 김치찌개를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좋겠사옵니다.

 

 여태껏 제 손 위를 거쳐 간 재료가 얼마나 되는지, 이 칼끝에 탄생한 요리가 얼마나 되는지 셀 수 없사옵니다. 그림처럼 수놓은 요리를 상 위에 올릴 때마다 감탄이 쏟아지고 젓가락이 요란스레 오갔사옵니다. 비록 소첩의 미천한 실력이 주인을 질리시게 하여 칭찬을 듣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이오나,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소완이옵니다. 인간의 말 한마디면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채워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 어떤 식감, 그 어떤 풍미, 그 어떤 요리든 저의 손에 불가능은 없사옵니다.

 

 그런 저에게 김치찌개를 요구하다니요? 어찌 이리도 별난 분이 계신단 말입니까. 은하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은 맛을 선보였사옵니다만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신 것이옵니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저를 많이 칭찬해줬지요. 그 누구보다도 저의 음식을 즐기고, 그 누구보다도 많이 웃어줬사옵니다. 어쩌면 주인과 다른 귀빈분들께서 기뻐하시던 모습을 전부 더해도 당신에게는 못 미칠지도 모르옵니다. 그렇게 저의 가치를 선명하게 인식하여주신 분이 어찌하여 끝내 이런 작은 음식을 약속하였는지, 저는 의아하기만 할 뿐이옵니다.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약속이라 대충 말한 것이옵니까

 

 방금 불을 끄고 또 하나의 김치찌개를 완성했사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이곳에 있지 않사옵니다.

 저는 기다리다, 또 기다리다, 끝내 이 찌개를 버릴 것이옵니다.

 부디 이 작고 낡은 주방에 한때라도 매콤한 향이 감돌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옵소서.

 당신이 잊어버린 약속을 매 순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옵소서.

 

 주인과 다른 귀빈분들이 이승을 떠나시고 이제는 당신마저 자리에 없으니 제 칼은 그저 차가운 쇳조각일 뿐이옵니다. 저는 또 한 번 먹어줄 이 없는 처량한 요리사가 되었사옵니다. 저택의 주방에 홀로 남겨졌을 때처럼,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금도 그렇사옵니다.

 

 물론 그런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고 하여, 그런 저에게 요리를 구했다고 하여, 제가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결코 아니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첩은 언제까지나 주인의 것이옵니다. 이것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사옵니다.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새겨진 이름은 지울 수 없는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그것이 바이오로이드인 저와 인간인 당신의 차이일 것이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법도가 바뀐다고 한들, 저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사옵니다.

 

 몇 번이고 말할 것이옵니다.

 저는 결코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결코 당신의 죄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괜찮다고 하겠지요.

 괜찮다라......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당신의 그 염치없이 웃는 얼굴이 떠오르니 이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평소처럼 음흉하게 실실 웃어대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그리옵니다. 저와는 정반대이옵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곁에 두고도 어찌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사옵니다.

 저라면 비웃었을 것입니다. 조롱하고 경멸하였을 것이옵니다. 최고의 바이오로이드라 자부하면서도 주인의 따스한 손길 한 번 얻지 못하고, 그 얻지 못한 것을 탐하다 추하게 추락했지요. 그렇게 밑바닥에 엎드린 채 두 눈 뜨고 주인을 잃었사옵니다.

 하지만 당신은 늘 괜찮다고 했사옵니다.

 한 번도 괜찮은 적은 없었사옵니다. 제 마음 한켠에는 아직도 당신을 향한 증오가 남아있사옵니다. 차라리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괴롭지도 않았을 것을.

 그래도 당신은 괜찮다고 했사옵니다. 미안한 게 아니라 괜찮다니요?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 신기한 분이옵니다.

 

 인정하옵니다.

 당신과 보낸 시간은 주인의 저택에서 지낼 때와는 전혀 달랐사옵니다.

 이 허름한 집에서 보냈던 나날들.......

 모든 것이 신비로웠사옵니다.

 모든 것이 짜고, 모든 것이 맵고, 모든 것이 달았습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기적처럼 새로운 맛을 보여줬사옵니다.

 

 그 짧은 시간들이, 지금 저에게 너무도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사옵니다.

 

 

 밖이 요란하옵니다.

 나날이 벽이 무너지고 창문이 깨집니다. 세상을 뒤덮은 벌레무리가 우리의 보잘것없는 쉼터조차 폐허로 만들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올 곳은 언제나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불타오르더라도 이 누추한 집 안에는 언제나 조그만 식탁과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 소완이 그리 만들 것이옵니다.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갈 것이옵니다.

 

 그러니 만일 당신에게 바늘 끝만큼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래서 저와 한 약속을 기억한다면

 

 부디 약속대로 돌아오소서.

 제가 준비한 김치찌개를 드시옵소서.

 늘 밉살스럽게 웃는 그 얼굴로 이 보잘것없는 음식을 고집한 연유를 알려주소서.

 서두르다 다치지 말고, 집이 어디인지 잊지 마소서.

 부디 배고픈 몸으로 저에게 돌아와 주소서.

 

 

 아직도 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하옵니다.

 감히 주방에 다가오는 벌레를 구제하고 와야 하니 이만 줄이겠사옵니다.

 

 만약 제가 나간 사이 돌아왔다면 기다리지 말고 수저를 드십쇼.

 

 

 

 <폐허 속, 부패한 김치찌개 옆에 놓여있던 낡은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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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