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창작물검색용 채널

“일어나셨습니까?”

 

“으........음? 뭐야......... 여긴 또 다른 막사네. 흠, 레프리콘이 간병도 해주나?”

 

“아뇨. 저는 지휘관님의 호위입니다. 일어나실 때까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렇게 병력이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텐데.”

 

“지휘관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호위는 필요합니다.”

 

“이미 휩노스 때문에 오늘내일하는데 뭘. 내가 안 일어났으면 아주 시체가 될 때까지 계속 지키고 있었겠어.”

 

“그랬겠죠. 몸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좋아.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생각보다 죽을 정도는 아니야. 거기 거울 좀 건네줄래?”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어이쿠,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려니까 뻣뻣하네. 어디 보자. 하, 이거 곧 죽겠구만. 몰골이 이미 시체인데.”

 

“실제로도 지휘관님의 생체신호는 위험한 수준입니다. 영양분과 수분은 꾸준히 보충해드렸으니 지금 바로 죽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래도 안정을 취하시고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셔야 합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다음번에는 저세상에서 깰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마리는 어디 있어?”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와 확인하러 갔습니다. 지휘실에 있을 거예요. 나간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래? 너는? 내 곁을 지킨 지 얼마나 됐어?”

 

“일주일입니다.”

 

“너도 어지간히 심심했겠네. 미안한걸. 거기 내 면도기 있어? 좀 줄래?”

 

“여기 있습니다. 제가 해드릴게요. 팔 움직이기 힘드시잖아요.”

 

“됐어. 내가 할게. 지난번에 브라우니한테 맡겼다가 죽을 뻔했거든.”

 

“.........”

 

“.........면도칼 좀 줄래?”

 

“예. 여기요.”

 

“고마워. 이상한 레프리콘이네. 보통 브라우니랑 비교하지 말라고 말할 텐데.”

 

“그렇죠.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요.”

 

“그래?”

 

“전황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별로.”

 

“궁금하지 않으시다고요?”

 

“무책임하다고 생각해? 나 원래 이런 사람인 거 알잖아. 네들 어찌나 소문이 빠른지 내 커리어까지 줄줄이 꿰차고 있던데.”

 

“그런 일은 없어요. 아무도 지휘관님을 욕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하,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요즘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거짓말도 잘하나 봐.”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그렇다 치자. 어디 보자. 전황이라고 했나? 대충 내가 잠든 지 일주일 넘게 흘렀으니 무레스버그는 진작 넘어갔을 거고, 내가 아직 막사에 있는 걸 보면 케이프타운까지 간 건 아닐 테니, 여기는 맘스베리쯤인가? 남아있는 병력은 3분의 1도 안 되겠네.”

 

“저희가 계속 패배했다고 가정하시네요.”

 

“내가 이 바닥에서 쬐끔 굴러다닌 덕에 딱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 이기기 힘든 싸움이랑 이길 수 없는 싸움. 그런데 이 전선의 형세를 보니까 딱 이길 수 없는 싸움이더라고. 어때? 내 예상이 얼마나 틀렸어? 가능한 한 많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대부분 맞아요.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남은 병력이 10분의 1정도라는 겁니다.”

 

“이런. 안 좋은데. 임펫이랑 피닉스는 얼마나 남았어?”

 

“피닉스는 9기, 임펫은 전원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원 전사라고? 이프리트랑 노움은?”

 

“이프리트는 3기가 남았고, 노움은 전멸입니다.”

 

“노움까지 전멸이면 안 되지. 미치겠구만. 보나마나 포병팀이랑 아머드메이든도 잃었겠네.”

 

“그렇습니다.”

 

“심각한데. 음. 자, 어떤 것 같아? 괜찮아?”

 

“턱에 수염이 없어졌네요.”

 

“대답이 어째 브라우니만도 못하다 야.”

 

“그런가요. 죄송하네요.”

 

“이상한 레프리콘이네. 보통 레프리콘들은 좀 더 감정적으로 막, 응? 막 더 풍부하게 반응하지 않나.”

 

“그런 걸 원하시나요?”

 

“아니, 그건 아냐. 너는 너 편할 대로 해. 여기 면도칼 좀 넣어주고.”

 

“주세요.”

 

“그나저나 배고파 죽을 거 같은데, 하얀 쌀밥에 김치찌개를 바란다면 사치겠지?”

 

“네, 사치입니다. 지금 전투식량을 조리해 드릴게요.”

 

“고마워. 일단은 그거라도 먹어야지.”

 

“지금 드실 수 있으신 건 죽밖에 없겠네요.”

 

“일어난 뒤로 들은 소리 중에 제일 끔찍한 소리네.”

 

“...........”

 

“...........”

 

“...........됐습니다. 데우는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혹시 다른 명령이 있으신가요?”

 

“명령? 내가 아직 명령을 할 수 있나? 어디 보자.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줘.”

 

“네?”

 

“꿈속에서 영 더러운 것만 보다 간신히 눈을 떴잖아.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가 싶어서. 왜? 그냥 가만히 죽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심심하잖아. 숨이 붙어있는 동안이라도 떠들다 가야지.”

 

“지금 얼마나 전선의 상황이 안 좋은지 알고 계신 겁니까?”

 

“알지. 이렇게 될 걸 알고 날 남긴 거고, 이렇게 될 걸 알고 내가 남은 거니까.”

 

“그래도 여유로우시네요.”

 

“급한 거지. 엄청. 몸이 이 모양이라 언제 휙 갈지 모르거든. 그러니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줘 봐.”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전 몰라요.”

 

“그럼 그냥 아가씨 이야기나 해줘. 원래 이야기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아가씨? 저 말인가요?”

 

“그럼 내가 아가씨겠어?”

 

“저는 특별한 이야기 같은 거 없어요.”

 

“그래? 브라우니보다 재미없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하지 뭐.”

 

“그냥 쉬시는 게 몸 상태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집어치워. 어차피 잠들면 꼴딱 넘어갈 몸뚱인데 뭘. 어디,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흠...... 나한테 궁금한 점 있어?”

 

“없어요.”

 

“그래? 내 이야기는 얼마나 알고 있어?”

 

“모릅니다.”

 

“뭘 몰라. 브라우니도 다 알고 있던데. 내 경력 들어봤을 거 아냐. 아는 대로 읊어 봐.”

 

“명령이십니까?”

 

“아니 되게 딱딱하게 구네 이 아가씨. 명령이라면 할래?”

 

“해야죠.”

 

“그래 명령이라 치자. 해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입대, 7년간 군생활을 하다 삼안산업과의 군수비리건으로 불명예퇴역, 직후 삼안의 사설보안업체에 근무하다 보안규정위반으로 해고된 뒤 블랙리버계열 PMC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뛰어난 전적으로 블랙리버사의 포상까지 받았으나 3년 뒤 산업스파이 혐의를 받고 잠적. 이후 이 근방의 한 재력가의 개인경호책임자로 고용되어 쿠데타에 적지 않은 활약을 하고 국가정부를 전복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오........”

 

“틀린 부분이 있나요?”

 

“아니,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 줄은 몰랐지. 좀 놀랐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어서 퍼뜨리는 거야?”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으니까요. 얼마 남지 않은 인류 중 하나인데다 저희를 지휘할 자라면 더욱 관심이 가죠.”

 

“열렬한 관심 고맙네. 그래서 어때?”

 

“뭐가요?”

 

“여전히 애들이 내 뒷담을 안 깠다고 말할 수 있어?”

 

“네, 그렇습니다.”

 

“와, 이, 완전 철면피네 이 아가씨. 완전 재미있어.”

 

“지휘관님이야말로 특이한 인간이시네요.”

 

“그런 말 자주 듣지. 좋아. 그럼 네가 모르는 부분을 이야기해줄게. 그 커리어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부분이야. 내가 그 어마어마한 재벌새끼 밑에서 일할 때.”

 

“전적이 더 있습니까? 놀랍네요.”

 

“그러엄. 내 생에 가장 큰 건이었지. 얼마 안 된 일이야. 하늘에서 철충이 우수수 떨어지고 몇 주일 뒤였나? 나라의 깡통로봇들이 죄다 감염되어서 쳐들어오는데 막을 방도가 없더라고. 내 고용주는 나라 먹을 때 쓴 로봇에 그대로 나라를 잃었지. AGS로 흥한 자 AGS로 망한다 이거야. 내가 그 꼴을 보고 이거 방법 없으니 어서 도망가야 한다고 설득을 했는데, 그 미친놈이 지 저택에 널린 값비싼 바이오로이드들만 믿고 버티더라고. 돈만 많지 어지간히도 또라이 새끼였지.”

 

“그래서 그 고용주도 배신하셨군요.”

 

“당연하지. 뭐 별수 있나? 지가 죽겠다는 걸 어떻게 막아?”

 

“고급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면 방어에 성공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래. 아, 혹시 블랙리리스 알아?”

 

“삼안의 최고급 바이오로이드죠.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성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말이 필요 없지. 끝내줘. 싸우는 거 보면 무슨 덴세츠 영화 보는 거 같다니까. 단순히 전투능력만 보면 너희 일개 소대보다 셀걸. 장담해. 블랙리리스 뿐이냐. 알렉산드라에 페로, 콘스탄챠팀까지, 말이 가정부들이지 실상은 최고급 전투부대란 말이야. 내 고용주가 그것들을 믿고 틀어박혔다고. 믿을만 했지. 콘스탄챠들은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리의 철충을 맞히고 페로는 상처하나 없이 칙들을 동강 내. 알렉산드라와 블랙리리스는 아예 그냥 일인군대야. 혼자서들 다 박살낸다니까. 성능만 우월하겠어? 다들 주인을 지키겠다 난리니 사기가 하늘을 찔렀지.”

 

“그런데 왜 배신하셨나요.”

 

“질 게 뻔하니까. 첫 주는 어찌저찌 잘 막았는데, 스나이퍼칙이 몰려드니 콘스탄챠들도 하나둘씩 머리가 날아가더라고. 페로랑 바닐라들도 죽고. 알렉산드라는 터졌고. 블랙리리스는 팔뚝 하나로 나대다 픽 가버렸고.”

 

“그걸 보고 있었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경호책임자니까 내가 지휘했는걸. 나름 잘했어.”

 

“잘했는데 진 건가요?”

 

“아까도 말했잖아. 질 싸움이니까.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 아니었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대가를 치르느냐가 다른 거지, 결국은 질 싸움이었어. 내가 한 일은 그 패배를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는 거였고. 나름 받은 돈값은 했어. 그 멍청한 놈이 내 말 따라 진작 도망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면 지휘관님은 배신한 게 아니잖아요.”

 

“아니, 배신은 배신대로 했지. 이미 주력이 전멸하고 저택이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고용주놈 괜히 질질 끌고 다니면 나도 죽겠다 싶어서 냅다 튀었지. 놈은 지 바이오로이드들이 버텨준 게 무색할 정도로 빨리 뒈지더라고.”

 

“단순히 지휘관님의 능력과 충성심이 부족해서 그런 상황이 온 것은 아닙니까?”

 

“오, 상당히 날카롭게 말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맘에 들어. 좋은 지적이야. 나도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거든. 그런데 국가에 주둔하던 AGS 5천기가 벌레 먹은 살인기계가 되어 사방에서 덤벼드는데, 외부지원도 없이 일개 개인경호부대만으로 2주일을 버틴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 그 살인기계들이 고용주를 죽이고 미친 듯이 쫓아오는데 살아서 탈출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그래서 내가 네들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나 봐.”

 

“........... 그게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인가요.”

 

“아니, 이제 본론이지. 그 망할 저택에서 탈출하면서 고용주 거 바이오로이드 하나를 업어왔거든.”

 

“절도입니까.”

 

“소유주도 죽고, 소유권 주장할 친인척도, 국가도 사라졌는데, 이게 왜 절도야? 그냥 공짜로 바이오로이드 주운 거뿐이잖아. 다만 그 바이오로이드가 여태껏 돈냄새만 따라다니던 내가 평생 모은 돈으로도 못 살 녀석이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무슨 모델이죠?”

 

“소완이라고, 요리사 바이오로이드야. 요리 잘해 아주.”

 

“그런가요. 아쉽네요. 세상이 망해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돈으로 바꾸지도 못할 테니까요.”

 

“걔를 뭐 하러 돈으로 바꿔? 아, 죽 다 됐으면 줄래? 배고파서 속이 다 아프네.”

 

“여기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알아. 뭘 그런 걸 걱정해. 후- 후- 아뜨뜨뜨 썅!”

 

“물 여기 있습니다.”

 

“아아아악 고마워!”

 

“.......... 팔 게 아니라면 왜 그런 위험한 상황에 바이오로이드를 챙겼죠? 충성심 강한 바이오로이드는 타인의 명령에 잘 따르지도 않을 텐데요.”

 

“쩝쩝, 그 뭐냐. 쩝, 내가 작전 마치고 돌아오면 그 고용주 돼지놈은 꼭 밥이나 처먹고 있더라고.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 어찌나 고급스레 먹는지 상다리가 쪼개지겠더라. 근데 나도 사람인지라 배는 고프단 말이야. 맨날 화약냄새 맡으며 전투식량이나 축내고 있는데 어느 날 주방을 지나가다 보니 하도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고. 갔더니 한 입 먹고 남긴 고급요리가 널려있더라. 어쩌겠어 맛있어 보이는 걸. 게다가 남는 음식이잖아? 아까워서 쪼끔 집어 먹었지.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게 없더라. 주인놈이 도대체 얼마나 배가 불러서 그런 음식을 남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죽 진짜 맛없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드세요.”

 

“아, 내 말 제대로 듣고는 있구나? 좋아. 하여튼 그게 버릇이 돼서 철충이랑 싸우고 돌아오면 가끔씩 주방에 가서 남는 음식을 주워 먹었지. 그러다 거기 주방장이던 소완한테 들킨 거야. 주방장이라기엔 애초에 소완 한 명 밖에 없는 주방이었지만, 어쨌든 걔가 날 거지 보듯이 경멸하더라고. 그 날카로운 눈매로 째려보면서 흙먼지 묻은 더러운 꼴로 주방에 들어오지 말라나. 나는 먹던 것도 내려놓고 쫓겨났지. 세상에 그래도 내가 그 집 지키고 있는 인간인데 그럴 수가 있어? 나도 그런 취급을 받고 얌전히 있을 수는 없었지. 그래서 다음에는 깨끗하게 씻고 잘 차려입은 다음 주방에 가서 남는 음식을 주워 먹었다 이거야.”

 

“짜증 날 만하네요.”

 

“그치. 그때 소완 말에 꽤 충격받았거든.”

 

“아뇨. 지휘관님 말고 소완 모델이 짜증 났겠다는 거예요.”

 

“응? 그래? 내 딴에는 배려해준 건데. 뭐, 계속 그렇게 가니까 요리사로서 남은 음식을 줄 수는 없다나 먹던 것도 뺏어가더라고. 그럼 새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니 주인님 식자재를 허락 없이 쓸 수 없다면서 안 해주더라.”

 

“그래서 복수하려고 데리고 온 겁니까? 강제로 밤시중이라도 시키려고요?”

 

“음~ 그것도 확실히 대중적인 바이오로이드 대우법이지만, 그땐 별로 관심 없었어. 단순히 배가 고팠으니까. 그냥 내 냉장고에 있는 통조림이랑 김치 따위를 가져다 요리해달라고 했지. 내 재료니까 요리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그러니까 진짜 해주더라고. 심지어 맛있어. 그 재료로 상상할 수 없는 요리가 나온다니까?”

 

“참 좋으셨겠어요.”

 

“너 소완이 만든 김치비스킷치즈말이 먹어봤어?”

 

“아뇨.”

 

“안 먹어봤으니까 그렇게 대충 답하지. 먹어보면 분명 눈 뒤집어진다 너.”

 

“죽이나 어서 드시죠.”

 

“쩝쩝, 그렇게 계속 소완 찾아갔지. 냉장고가 빌 때까지 이것저것 싸 들고 가서 요리 좀 해달라 했어. 하는 김에 되도 앉는 미식가 흉내도 내면서 감상도 말해주고. 걔는 콧방귀 뀌면서 무시하는데 다음 요리에 반영해주긴 하더라. 꽤 재미있는 날들이었지. 좋았어.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방어선이 무너지고, 내 부대는 전멸에 고용주는 사망. 와 이거 가망이 없다, 그러고 냅다 탈출하려던 그 순간에 주인이 죽었다는 말 듣고 멍때리고 있는 소완이 보인 거지. 음, 지금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멍청한 선택을 했어. 내 한목숨 챙기기도 어려운 마당에 말 안 듣는 바이오로이드까지 업어 들었다니까. 내가 미쳤었지. 하지만 삶이란 게 그래. 모든 게 계획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

 

“소완을 훔친 게 아니라 구해낸 거라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 구해낸 거라........ 여차저차 위기에서 벗어난 우리는 호프필드에 있는 내 세이프하우스에 머물렀어. 가장 가까웠고, 그나마 안전했거든. 거기서 두 달 정도 함께 지냈지.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건 거기 보관해둔 김장김치가 많았단 거였어. 난 고향의 맛을 사랑하니까. 그런데 소완은 주인이 죽은 뒤로 요리를 안 하더라고. 아무리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아.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있다 갑자기 살벌하게 부엌칼을 갈더니, 다시 멍하게 앉아있어. 하는 수 없었지. 어쩌겠어 걔나 나나 밥은 먹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내가 요리를 해서 줬지. 보글보글 끝내주는 김치찌개를 끓였단 말이야. 걔도 배는 고팠는지 식탁 위에 두니 먹긴 먹더라고. 그런데 한 입 먹자마자 표정을 팍 찡그리는 게 아주 귀신 꼴이었어.”

 

“어지간히 맛이 없었나 보네요.”

 

“내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걔 입맛이 너무 높은 거야. 걔는 이런 간단한 음식 하나 못 하냐고 화를 내면서 훈수를 거침없이 쏟아내는데, 너무 많아서 반은 듣고 흘려야겠더라. 나도 듣다듣다 짜증이 나서 그럼 네가 직접 끓이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입을 딱 다물어. 요리는 못 하겠데. 기가 막힐 노릇이지 나는. 포티아 하나 없이 그 많은 요리를 만들던 애가 요리를 못 하겠다니?”

 

“명령하시지 그랬습니까.”

 

“내가 천성이 겁쟁이라 남한테 명령 같은 걸 잘 못 해. 이렇게 계급장 뒤에 숨어 있어야 뭘 시킬 수가 있지. 기껏해야 부탁하는 게 한계야.”

 

“그런 분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술가로 살아오신 건가요.”

 

“그러게. 세상 참 신기하지.”

 

“다 드셨으면 주십쇼. 치우겠습니다.”

 

“아, 고마워. 되게 맛없다 이거.”

 

“깨끗하게 잘만 드셨네요.”

 

“배고프니까. 먹는 건 중요하지. 먹으려고 사는 생물인데.”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요?”

 

“살다보면 바뀌어. 너도 오래 살아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던 이야기 마저 하시죠.”

 

“아가씨 진짜 특이한 레프리콘이네. 뭐 그래. 남은 이야기는 별거 없어. 나는 소완한테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옆에서 가르쳐주기라도 하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아주 그냥 살판나서, 걔는 내가 앞치마 두르는 거부터 시작해서 냉장고 손잡이 잡는 것까지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더라. 지금도 신기해. 어떻게 그 잔소리 속에서 두 달을 먹고 살았나 싶다니까.”

 

“표정은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재미는 있었으니까. 집안일도 나눠서 하고, 심심하니 먼지 쌓인 보드게임도 꺼내서 해보고, 가끔은 꼭 필요한 물건 가지러 목숨 걸고 외출도 하고, 같이 이것저것 많이 했어. 티격태격하긴 해도 그렇게 나쁜 파트너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것도 끝날 때가 왔지. 이 땅에 요새가 들어선답시고 스틸라인이 상륙해 전선을 만드는데, 하필 호프필드 근처에 만들었더라고. 정찰 나온 바이오로이드들한테 들켜서 상부에 연락이 닿았는데, 이게 또 신기한 일이지. 지금 총사령관이 나 삼안이랑 장사할 때 면식이 튼 사람이더라. 그 사람도 이제 부릴 인재가 부족한지 나한테 도와달래. 현장지휘 한 번 해서 피난 끝날 때까지 시간 벌어주기만 하면 요새에 자리 하나 마련해준다나. 소완 자리도 준다고 하고. 금방 끝날 일인 데다 보상도 괜찮잖아. 오케이 했지. 그리고 그날 저녁에 밥 먹으며 소완한테 그대로 말했어. 일이 생겨서 며칠 나갔다 올 거라고. 금방 돌아올 거고, 돌아오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다고. 그랬더니 걔가 갑자기 화를 내더라.”

 

“화를요?”

 

“그래. 나보고 자매들과 주인님을 죽인 무능한 인간이라 하더라. 그런 주제에 어딜 지휘하러 나서냐고. 분명 다 죽을 거라고. 나도, 죽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더라. 그런데 말이야. 그 곱상한 얼굴이 화내고 있는 게 그날따라 너무 귀엽잖아.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 되게 가기 싫은 데 가야만 하는 기분, 그런 거 있잖아. 마음으로는 남아있고 싶은데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가야만 했던 거지. 원래 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긴 했었는데, 더 갈 수밖에 없어졌어.”

 

“그래서요?”

 

“가야 한다고 했지. 언제까지고 거기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기어코 가겠다고 하니 걔도 결국 입을 다물더라. 그렇게 서로 한참 말없이 밥만 먹다 그릇 치울 때가 되니 걔가 말했어. 돌아오면 원하는 요리 하나 해주겠데. 나는 웬 떡이야 싶어 신나게 고민했지.”

 

“뭐로 정하셨습니까?”

 

“그건 비밀이야. 다 말해주면 재미없지. 확실한 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는 거야. 걔가 만든 건, 뭐든지 일단 맛있거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더욱더 맛있을 거고. 분명 최고의 보상이었겠지. 먹을 수만 있었다면.”

 

“?”

 

“그렇게 걔 집에 놔두고 전선에 섰다가 며칠 지나니 내 몸뚱이가 픽 쓰러지더라. 눈 뜨니 삼일이 지났어. 휩노스란다. 요새 꿈자리가 안 좋다 했더니 그 뒤숭숭한 돌림병이었던 거지. 내가 꿈나라 간 사이에 별의별 일이 다 있더라고. 갑자기 지휘체계에 공백이 생긴 탓에 그 많던 병력이 반 토막 나고 전선이 한참 뒤로 밀렸어. 그건 뭐 네가 현장에서 구른 당사자니 나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잖아.”

 

“그럴 겁니다.”

 

“그렇지. 그런데 그것 말고도 뭐냐, 전선이 밀리면서 호프필드가 쑥대밭이 됐다면서? 아주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박살 났다더라? 내 세이프하우스고 뭐고 다 없어졌고. 응? 살아 움직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 그렇습니다.”

 

“음, 아까도 말했듯이 삶이란 게 그런 거지. 모든 게 계획되어 있지는 않아. 예상치도 못 한 일로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생겨. 이게 후회할 일도 아니고 후회해봐야 소용도 없는데, 후회를 안 할 수가 없더라고. 만약에 내가, 만약에 내가, 계속 이렇게 들먹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쓸데없는 상상만 해.”

 

“제 생각에 지휘관님의 잘못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그다음에는 지휘관으로서 잘못 행동하긴 했지. 이미 철충들이 바글거리는 호프필드로 가야 한다고 악을 쓰고, 허가 안 해주는 상부와 부딪히고, 전선 상황은 개판으로 놓아두고, 애초에 상부는 내가 휩노스에 걸렸다고 지휘권 회수하고 냉동시키려고 하더라.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날 냉동시키려 해? 그렇게 답 없이 굴러갈 때 참모진에서 솔깃한 제안을 하더라고. 휩노스에 걸린 나도 할 수 있고, 철충에게 복수할 겸 인류 나부랭이들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더라. 들어보니까 영 마음에는 안 들어도 그럴싸해.”

 

“무슨 방법이죠 그게?”

 

“아직 몰라? 어........ 마리가 아직 말 안 한 이유가 있겠지.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별로 알고 싶어 할 내용은 아니지만 말야. 하여튼 난 그 새끼들 방법을 받아들였어. 그래서 이 전선에 남아 이 꼬라지까지 왔지. 그리고 오늘 특이한 레프리콘과 만나게 된 거고. 이게 끝이야. 내 이야기는 다 했어. 네가 아는 내 커리어에 이어붙이면 빈 공간이 딱 차지?”

 

“그렇네요.”

 

“이거 원 감상이 없네 감상이. 감정 모듈 뺐어? 침이 마르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뭐 소감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감상 말씀이시죠. 신기해요.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신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허 참 딱딱하네. 하여튼 내 순서는 끝났고. 이제 아가씨 차례야. 어서 뭔가 이야기 좀 해줘 봐. 마리가 돌아오기 전에.”

 

“저한테는 특별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빼. 특별하다는 게 뭔데? 나도 평범한 인간 중에 하나일 뿐이잖아. 그런데 할 말이 이렇게 많아. 너도 마찬가지야.”

 

“곧 마리대장님이 올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명령하시는 겁니까?”

 

“아니, 명령은 마리가 할 거고, 굳이 내가 명령까지 안 해도 되잖아. 정중한 부탁으로는 안 될까?”

 

“이상한 인간이네요 지휘관님은.”

 

“너야말로 이상한 레프리콘이야. 알고 말하는 거야?”

 

“.........”

 

“오죽 말하기 싫은가 보네.”

 

“질문이 있습니다 지휘관님.”

 

“넌 네 이야기 안 하는데 난 대답해줘야 해? 양심이 있냐.”

 

“지휘관님, 이 전선의 그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돈을 위해 수도 없이 배신을 거듭했으니까요. 심지어 정당한 국가정부를 전복시키기도 했습니다. 그저 돈을 위해서, 나라를 팔고 회사를 팔고 동료를 팔고, 자기자신까지 팔았어요. 저희는 당신이 인류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따르고 지키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당신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군인입니다. 인간은 아니지만 군인이에요. 저희는 서로를 믿고 이 자리에 버티고 서있는 겁니다. 당신만 제외하고요. 그러니 이 전선의 그 누구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당신을 위해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당신의 방패가 되고 싶지 않아요.”

 

“어........ 그게 질문인가?”

 

“그런데 왜 이 전선에 남아계신 건가요?”

 

“아까 말했잖아. 철충들 엿먹일 방법이 있다고.”

 

“소완의 복수를 위해서요? 지휘관님은 지휘관님 스스로가 누군가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 소완 이야기도 사실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런가? 나름 그럴싸하게 말한 거 같은데 말이야.”

 

“이제 목숨이 얼마 안 남으셨습니다. 돈을 벌어도 못 쓸 테고, 구할 것도 찾아낼 것도 더는 없죠. 기다리는 건 확실하게 예정된 죽음뿐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 전선에 남아계신 건가요?”

 

“아가씨 나 되게 싫어한다. 그렇게 내가 없었으면 좋겠어?”

 

“지휘관님은 필요합니다. 인간의 명령이 있으면 바이오로이드가 더 잘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지휘관님이 아무 이유 없이 여기 남아있는 거라면 아무 이유 없이 떠날 수도 있겠죠. 전투 중에 인간이 사라지면 자매들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여기 남아있는 명확한 이유를 말해달란 거잖아. 허, 좀 어려운데. 음....... 그러니까 예전에는 말이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만 생각했어. 못 해본 일들, 못 먹어본 음식들, 못 안아본 여자들, 이런 생각으로 가득했단 말이지. 네 말대로 이런 되는 일 없는 전쟁통에서 벗어나 화려한 휴가를 즐기고 싶었지. 그런데 막상 죽음이 코앞에 나타나니 다른 걸 생각하게 되더라고. 죽기 전에 뭘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까가 생각나. 내 마지막 장면 말이야. 그게 계속 고민되는 거 있지.”

 

“그게 이유인가요?”

 

“그게 이유지. 너희들이, 요새의 인간들이, 상부의 높으신 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욕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 지옥에 들러붙어 있는 유일한 이유야.”

 

“마지막에 착한 일 하나 해보려고 여기 있는 거라고요?”

 

“아니, 이제 더이상 돈 벌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한다는 거지. 적당히 여기서 끝맺으면 좋을 거 같아. 그런 기분이 들어. 그게 착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 원래 그런 거 신경도 안 썼고. 어때? 이제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겨?”

 

“아뇨.”

 

“그렇겠지. 그래도 이렇게 성실히 대답해줬으니 돌아오는 게 있어야지?”

 

“...........”

 

“너는 확실히 이상해. 보통 레프리콘은 인간에게 너처럼 말 못 하거든. 이상한 데에는 이상한 이유가 있겠지.”

 

“........... 레프리콘 모델은 보통 브라우니 셋과 분대를 이루어 움직입니다. 전력에 여유가 있다면 노움과 이프리트 병장의 지원도 받을 수 있죠.”

 

“그렇지. 그런데 넌 왜 혼자 내 호위로 붙어있을까.”

 

“무레스버그로 후퇴하며 브라우니 둘을 잃었습니다.”

 

“안타깝네.”

 

“살아남은 브라우니 하나에게 죽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그 다음 전투에서 돌격명령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더군요. 겁을 먹은 것 같았습니다.”

 

“브라우니가?”

 

“......... 브라우니는 명령불복종으로 불려갔습니다.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고요.”

 

“어....... 보통 명령불복종 문제로 소환된 브라우니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압니다.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게 저희들의 임무니까요.”

 

“그게 맘에 걸리나?”

 

“제 어리석은 말실수에 브라우니가 한 번 머뭇거렸다고 바로 폐기처분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신경이 쓰이죠. 이해는 합니다. 납득도 하고요. 그냥 신경만 쓰일 뿐입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그다음은 무슨 일이 있었어?”

 

“없습니다. 그 이후로 지휘관님의 경호를 맡았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와, 어떡해 아가씨. 브라우니보다 말을 못 하네. 이렇게 말재주가 없나.”

 

“아쉽게도 그러네요.”

 

“재미없다 야.”

 

“...........”

 

“그 브라우니를 네가 죽인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렇게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네가 죽인 거 맞지. 네 말 때문에 명령불복종한 거면 완전 네 탓이잖아.”

 

“지휘관님께 말한 게 후회되네요.”

 

“중요한 건 네가 그걸 맘에 두고 있다는 거야. 누가 알겠어? 네가 계속 노력하다 보면 기적이 ‘짠’ 하고 일어나서 그 브라우니랑 재회할지도 모르지.”

 

“이 전선에서는 한 번도 기적이 일어난 적 없어요.”

 

“그래도 희망을 가져. 삶이란 그런 거잖아? 앞일은 아무도 몰라. 불행하기만 하라는 법은 없어.”

 

“그래서 그렇게 누워 죽을 것만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오, 말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 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먼저 신경 긁었는데 뭐. 그리고 나는, 난 나대로 결정을 내리고 노력했어. 결과는 망했고 후회도 계속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지.”

 

“그런데도 남한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시는 건가요.”

 

“그럼. 안 그래도 팍팍한 세상인데 그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

 

“..........도대체......... 지금 이 상황에 뭐가 희망입니까? 뭘 희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야 모르지. 뭐 희망이라는 게 별처럼 하늘에 딱 박혀있어서 빛을 내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내 생각에는 그게 우리 등 뒤에 꼭꼭 숨어 있을 때도 있는 거 같아.”

 

“등 뒤에요?”

 

“그래. 등 뒤에서, 막 등을 밀어줘. 어디 뒈져봐라 이 새끼야 하면서 계속 희망고문을 하는 거야. 우리는 눈앞이 깜깜해서 무엇 하나 붙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뭐가 계속 등을 미니까 나아가기는 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도 모르는데 계속 나아가는 거야. 더 나아가기 싫어도 꾸역꾸역, 불쌍하게 꾸역꾸역, 계속 나아가는 거지.”

 

“나아간다고 뭔가 해결이 되나요.”

 

“모르지. 그러니까 나아갈 수 있는 거고.”

 

“정말 쓸데없네요. 그 희망이라는 건.”

 

“그래도 그 쓸데없는 것 덕분에 여기까지 왔잖아. 꾸역꾸역.”

 

 

 

<아침, 그가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https://arca.live/b/lastorigin/20619009?mode=best&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