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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기>

 

 

 #1

 

 

 A-1 블러디팬서

 

 사령관이 처음 그녀를 찾았을 때 손수 한 달을 지휘했다고 한다.

 

 자매들은 말했다. 자매들의 자율수색이 아니라 사령관의 직접 지휘로 찾아낸 바이오로이드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그 말에는 수많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블러디팬서 본인은 이해를 못 했다.

 자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사령관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사령관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하는 흐리멍텅한 안도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오르카에 빨리 적응했다.

 역할이 생기고 동료가 생기고 애정이 생겼다.

 사령관은 그녀를 많은 전장에 보냈고, 그녀는 늘 최전방의 보호기로서 자신의 임무를 해냈다.

 

 철충의 공격을 버텨내며 그녀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남았고

 그 상처보다 훨씬 많은 수의 목숨을, 그녀는 구해냈다.

 

 칭찬하기를 좋아하던 사령관은 여러 번 그녀를 칭찬했다.

 늘 씩씩하던 그녀가 그의 칭찬 앞에서는 어린애마냥 수줍어했다.

 사령관은 더욱 그녀의 능력을 원했다.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더 많은 것을 부탁했으며

 그러는 동안 더욱 더 많은 잡담을 나눴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틀어 어떻게든 사령관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상상 이상으로 사령관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사령관에게 받는 기대와 관심이 점점 무거워졌음에도 그녀는 그저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드물게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간만에 출동 없이 쉬고 있던 블러디팬서를

 사령관은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령관의 관심이 상관이 부하에게 주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싫어하지는 않았다.

 두근거리고 설렜다.

 하나의 인격체라서 그런 것인지, 바이오로이드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저 두근거리고 설렌다고 했다.

 

 칼리스타, 이오, 스프리건까지

 평소에 티격태격하던 부하들이 정성껏 도와줬다.

 나름 예쁜 옷으로 그녀를 꾸며주고 그럴싸한 대사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이내 때가 오고

 블러디팬서는 수많은 망상과 각오를 삼킨 채 사령관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며 환영하는 사령관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에

 그도 그녀도 묘한 고양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풍선처럼 둥실거리고

 긴장감은 위아래로 격하게 파도쳤다.

 그러다 문득 불같은 침묵이 서로의 입을 막았을 때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름다운 옷을 걷어냈다.

 

 그녀,

 블러디팬서는,

 도저히 잊지 못 한다.

 

 그녀의 알몸을 보고 경악하는 사령관의 표정을.

 

 그녀가 훈장처럼 여겨왔던 수많은 상처가,

 사령관의 신뢰와 자매들의 목숨을 짊어져 왔다는 증명이,

 한낱 흉한 몸뚱이로 전락하던 순간을

 그녀는 잊지 못 한다.

 

 설레던 공기는 갈가리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얗게 질린 사령관은 어색하게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는 바보처럼 말 한마디 못 하고 그의 방에서 나왔다.

 

 이후

 사령관이 다시 방으로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전장에 나서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잡담을 하는 게 전투보다 어려워졌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전투보다 무서워졌다.

 

 이윽고 그녀에게 떨어지는 출격명령이 없어졌다.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출격하지 않았다.

 

 

 #2

 

 

 이른 아침

 아머드메이든 격납고

 

 블러디팬서는 가벼운 차림새로 방호벽을 닦고 있었다.

 여러 개의 두꺼운 철판으로 이루어진 가변형 방벽모듈.

 철벽을 두르고 완전무장한 그녀는 걸어다니는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집중포화 속에 갇혀있던 자매들은 총탄을 튕겨내며 자신을 구하러 온 블러디팬서를 구세주처럼 올려다보고는 했다.

 

 방벽모듈은 그녀의 자랑이자 목숨이었다.

 

 그녀는 늘 방벽모듈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했다.

 언제 어디로든 출격할 수 있도록, 광이 날 정도로 완벽하게 정비해뒀다.

 쓰지 않은지 한참 되었지만

 먼지가 쌓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대장? 일찍 일어났네."

 

 속옷차림의 칼리스타가 하품을 하며 격납고로 들어왔다. 블러디팬서는 방벽을 닦던 천을 어깨에 걸치며 씩씩하게 웃었다.

 

 "오, 아침부터 출격이냐. 요새 좀 뜬다?"

 "지난번에 클립탄창으로 개조 받은 게 효과가 그럴싸하더라고. 대포 두 발씩 먹여주면 철충들이 좋아 죽더라."

 "보호기는 누가 가는데?"

 "이그니스랑 가는데, 나 보호 안 받는 거 알잖아."

 

 주섬주섬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칼리스타가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는 그녀를 보던 블러디팬서는 다시 방벽을 닦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심해. 철충놈들 중에는 보호기도 뚫는 녀석들이 있으니까."

 "알았어. 대장 아니랄까봐 매번 잔소리야. 내가 그렇게 혼자 나댈 만큼 바보처럼 보여?"

 "아니야?"

 

 머리를 다 묶은 칼리스타가 성을 냈다. 자기가 브라우니인줄 아냐는 그녀의 대꾸를 블러디팬서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칼리스타는 계속 투덜거리며 외골격슈트를 입었다. 그녀가 시험 삼아 팔을 움직이자 큼직한 대포가 따라 움직였다. 외골격슈트의 작동을 확인한 칼리스타는 곧장 출구로 발을 옮겼다.

 슈쿵, 슈쿵,

 슈트의 금속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대로 정비한 거 맞지? 우리는 무거워서 싸울 때 고장 나면 빼도 박도 못 해."

 "안다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이년이 빠져가지고, 요새 오냐오냐 해줬더니...... 하여튼 조심해서 다녀와."

 "다녀올게."

 

 칼리스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격납고를 훌쩍 떠났다.

 

 슈쿵, 슈쿵,

 

 외골격슈트의 쇳소리가 멀어져갈수록 블러디팬서의 미소도 희미해졌다.

 

 이내

 방벽을 닦던 손이 멈췄다.

 

 ".......... 후우."

 

 무거운 한숨을 내쉰 그녀는 방벽모듈 옆에 걸린 자신의 전투복을 보았다.

 담담한 눈동자에 비친 녹색 전투복이 꼭 낙엽처럼 느껴졌다.

 

 다시

 그녀는 방벽을 닦기 시작했다.

 이미 더 닦을 구석도 없었지만 계속 닦았다.

 

 

 #3

 

 

 "대장, 혹시 물자확보 한 번 나가실래요?"

 

 함께 점심을 먹던 이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블러디팬서는 솔깃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저번에 페어리자매분들이 확보한 도시 있잖아요. 거기에 신병들 데리고 교육 겸 자원 찾아오라고......."

 "그거 사령관님이 너한테 주신 임무 아니야?"

 

 이오는 뜨끔하여 시선을 돌렸다.

 

 "저는 오늘따라 몸상태가 좀,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 제안이 그녀의 소심한 배려라는 것을 블러디팬서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껌뻑이던 블러디팬서는 시선을 내려 식판에 집중했다.

 오늘 메뉴는 호드가 잡아왔다던 멧돼지 고기였다.

 

 "사령관님이 주신 임무잖아. 잘 해서 점수 딸 생각을 해야지 너도. 남한테 네 임무 맡기는 거 아니다."

 "저는 그냥, 대장이 혹시 바람 쐬고 싶지 않을까 해서요."

 "바람은 매일 쐬고 있어. 너나 몸조심하고 제대로 다녀와. 안전지대라고 안심하지 말고."

 "아....... 네."

 

 이오는 시무룩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갔다. 그걸 보는 블러디팬서의 표정도 편하지는 않았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 언니만 잘 따라오면 된다는 거예요."

 

 블러디팬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컴패니언 셋이 보였다.

 블랙리리스가 하치코와 페로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연습해두지 않으면 저희도 그 아머드메이든처럼 주인님을 실망시킬 거라고요. 그렇게 첫날밤만에 꼴사납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면-"

 "와아! 맛있는 냄새가 나요! 오늘 점심은 고기인가 봐요!"

 "하치코, 언니 말 듣고 있어요?"

 

 블랙리리스가 흘겨보았지만 하치코는 신이 난 얼굴로 배식대를 향해 달려가버렸다. 고기에 홀린 귀여운 동생을 보며 블랙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후-, 페로, 하여튼 제가 하려는 말은, 컴패니언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페로랑 하치코, 그리고 펜리르.......도 이 언니처럼 완벽해야 해요. 주인님의 어떤 요구에도 응답할 수 있어야 하고요. 아, 그래도 순서지키는 건 중요해요. 이 언니가 제일 첫번째니까요."

 "언니, 잠시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페로가 신나게 말하고 있는 블랙리리스를 툭툭 건드렸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블랙리리스는 그제야 구석의 식탁에 앉아 있는 블러디팬서를 발견했다.

 

 블러디팬서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블랙리리스는 비웃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머 실례했네요. 동생들을 교육하느라."

 "사령관님은 누굴 버리거나 하시는 분이 아냐."

 "알아요. 제가 자매님보다 훨씬 가까우니까, 잘 알죠."

 

 블랙리리스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기 빈자리가 있군요. 페로, 하치코를 데려오세요."

 

 식탁으로 향하는 블랙리리스 뒤에서 페로가 블러디팬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블러디팬서는 무뚝뚝하게 시선을 내렸다. 포크에 꽂힌 고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대장........"

 

 이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르자 블러디팬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응?"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어서 먹어. 식겠다. 물자확보 나가야 한다면서."

 

 이오는 그제야 식사를 이어갔다. 블러디팬서도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고 계속 포크로 뒤적거리기만 한다.

 

 익숙해졌다.

 

 블랙리리스의 겉만 친절한 말투도,

 음식을 주는 소완의 비릿한 미소도,

 말을 고민하는 이오의 눈동자도,

 

 자신을 향하는 자매들의 표정과 목소리에

 닳고 닳고 닳아서

 그녀 본인도 놀랄 만큼 무뎌졌다.

 

 블러디팬서는 차게 식은 고기를 어렵사리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4

 

 

 칼리스타는 아침 일찍 출격했다.

 이오는 신병들과 함께 물자확보를 하러 떠났다.

 스프리건도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는 여태껏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격납고에 남은 블러디팬서는 방벽을 닦고 있었다.

 항상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커다란 쇳덩이를 얼마나 더 닦고 있었을까.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이걸 걸치고 싸우는 거야? 멋지네!"

 "올라타시면 안 됨다 사령관님! 장갑판에 넘어지면 무릎 아작나지 말임다!"

 "아니 빙판도 아니고 철판인데 왜 미끄러어어아악!!"

 "사령관니임!!!"

 

 사령관은 하루 정도 다리를 절고 다녀야 했다. 경호원 자매들에게 따끔하게 혼난 블러디팬서는 콘스탄챠에게 '사령관님을 방벽 위에서 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요지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그렇게 블러디팬서가 풀이 죽어있을 때, 사령관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애처럼 생각 없는 미소를 지어줬다.

 

 그는 생각이 많고 한없이 진지했지만, 가끔 유치할 정도로 순진한 인간이기도 했다.

 

 블러디팬서는 그 순박한 미소가 싫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방벽을 다 닦았다.

 블러디팬서는 기름때 묻은 천을 던져두고 격납고 구석에 쭈구려 앉았다. 손이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풍선껌을 찾았다.

 

 껌 하나를 입에 넣자 단맛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 잠깐의 달콤함에 의지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도 하나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블러디팬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무슨 맛이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몸이 이 지경이 된 거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방벽 안에 있으면 무섭지 않아?

 

 무섭다뇨? 오히려 든든함다. 전장에서는 이 안이 제일 안전하지 말임다.

 

 하지만 방벽이 뚫렸을 때 피할 곳이 없잖아.

 

 하하! 사령관님, 저 이래 봬도 블러디팬서임다 블러디팬서. 피할 수 있어도 안 피함다. 제 뒤에는 늘 자매들이 있으니까 말임다.

 

 무적이란 건 없어. 네 방벽으로도 못 막는 공격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때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버텨야함다. 저희는 막을 수 있어서 막는 게 아니라 막아야 하니까 막는 거지 말임다.

 

 그러다 죽으면?

 

 죽으면 죽는 검다. 어쩌겠슴까. 보호기들은 다 그렇슴다. 자기 목숨 하나로 자매들 백 명 살릴 수 있다면, 죽을 만 하지 않겠슴까?

 

 죽으려하지만 말고 살려고도 좀 해.

 

 하하하! 당연히 살고 싶지 말임다. 누가 죽고 싶겠슴까. 그냥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까 힘닿는 데로 애쓰는 것 뿐임다.

 

 죽지 마.

 

 ..........사령관님은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슴다. 방벽이 뚫리고, 몸이 찢어지더라도, 반드시.

 

 

 ...............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소리에 블러디팬서는 눈을 떴다.

 땀에 젖은 스프리건이 헐떡이며 격납고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블러디팬서를 발견하더니 곧바로 다가왔다.

 

 "대장! 특종이야 특종! 진짜 특종!!"

 

 블러디팬서는 그녀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또 어디를 싸돌아다니다 이제 오냐. 대기조 똑바로 안 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어마어마한 빅뉴스가 있다니까!"

 "어쭈? 말 돌려?"

 

 스프리건은 숨돌릴 틈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사령관이 대장을 호출했어!"

 

 블러디팬서가 스프리건을 괘씸하게 흘겨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두 눈이 커졌다.

 

 "진짜?"

 "당연히 진짜지! 이걸로 가짜뉴스 냈다가 대장한테 맞아 죽게!"

 "........언제?"

 

 그녀가 묻기 무섭게 격납고에 방송이 울렸다.

 콘스탄챠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A-1 블러디팬서, 사령관님의 호출입니다. 지금 브리핑실로 와주세요. 반복합니다. A-1 블러디팬서, 사령관님의 호출입니다. 지금 브리핑실로 와주세요.'

 

 봐봐! 내 말 맞지! 스프리건이 기세 좋게 소리쳤지만 블러디팬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실감한 그녀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울, 격납고에는 거울이 없었다.

 

 블러디팬서는 초조한 몸놀림으로 깨끗한 수건을 찾아 얼굴을 닦았다.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더니 쫓기는 사람마냥 전투복을 낚아채 팔다리를 쑤셔넣었다.

 

 갑자기 긴박해진 분위기에 조금 긴장한 스프리건이 물었다.

 

 "도와줄까?"

 

 블러디팬서는 홀린 것마냥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어찌저찌 차림새를 정돈한 그녀는 곧바로 격납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스프리건만 멍하니 홀로 남았다.

 

 "......... 아........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카메라! 카메라 어디 있어?!"

 

 그제야 급하게 카메라를 찾아나선다.

 

 

 #5

 

 

 "A-1 블러디팬서가 사령관 각하의 호위를 맡는다."

 

 마리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러디팬서는 각잡힌 자세로 씩씩하게 답했다.

 

 "맡겨주십쇼 사령관님! 안전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르카 함교 지휘실

 사령관을 사이에 두고 마리와 레오나, 메이가 서있었다.

 사령관이 탐색 지점으로 직접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호위작전을 짜는 중이라 하였다.

 

 목적은 근처에서 목격된 스피커라는 철충의 소리를 듣는 것.

 스피커의 주위에는 많은 철충이 밀집해있다. 그만큼 접근할 때 거친 포화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블러디팬서를 부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정말 꼭 직접 가야겠어 사령관?"

 

 레오나의 차분한 질문에 사령관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가야만 알 수 있을 거 같아. 닥터도 가능성이 있다고 했으니까."

 

 메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레오나와 마리를 흘겨보았다.

 

 "걱정 마. 호위할 필요도 없이 앞에서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사령관 각하께서 가시는 거다. 만전을 기해야 해."

 "만전을 기해서 쓸어버리겠다니까."

 

 마리와 메이의 눈빛이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레오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무시하며 사령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팬텀이 녹음해온 거 들었잖아? 직접 듣는다고 다를 수가 있어?"

 "가보면 알겠지."

 

 사령관의 태도는 완고했다. 레오나는 맘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동상처럼 서있던 블러디팬서를 향했다.

 

 "블러디팬서, 해낼 수 있겠어?"

 "해낼 수 있어."

 "최근에 전투경험이 없던데, 감이 떨어졌다고 실수했다가는 욕 먹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

 

 마리가 메이에게서 시선을 떼며 제안했다.

 

 "각하, 역시 제가 호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의 화력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여러 병사들로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스틸라인이 호위에 보다 적합할 겁니다."

 

 레오나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병사들의 유동적인 작전능력은 나와 발할라의 전문 분야야.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가 호위를 맡아야지."

 "아니 내가 다 쓸어버린다니까?!"

 "쓸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각하께서 스피커의 소리를 못 듣지 않나. 더 진지하게 생각해라."

 "뭐라고 이 땅개가!"

 

 사령관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말렸다.

 

 "진정해. 위험한 임무라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래. 너희들의 힘도 필요하잖아. 다 같이 협력해야 제대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그때

 

 "제가 지킬 수 있슴다."

 

 블러디팬서가 말했다.

 

 "제가 지킬 수 있슴다 사령관님. 지킬 수 있슴다."

 

 사령관과 다른 대장들의 시선이 블러디팬서를 향했다.

 블러디팬서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녀를 쳐다보던 사령관이 문득 시선을 피했다.

 블러디팬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안에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

 

 밤

 

 아머드메이든 격납고

 

 늦게 일과를 마친 칼리스타가 격납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춰섰다. 그녀의 피곤한 시선이 블러디팬서를 향했다.

 블러디팬서는 또 한 번 방벽모듈을 정비하고 있었다. 가동부의 관절, 모터의 출력, 방벽판의 고정 나사 하나까지 꼼꼼하게 다시 살펴보았다.

 

 "일찍 자. 내일 나간다면서."

 "알았어. 잘 자."

 

 블러디팬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맘에 들지 않았는지 칼리스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표정이 풀린 그녀는 손을 들며 말했다.

 

 "대장."

 

 블러디팬서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칼리스타를 쳐다보았다. 칼리스타는 빙긋 웃으며 주먹을 힘있게 들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응원의 제스쳐를 취한 것이었다.

 잠시 의아하게 쳐다보던 블러디팬서는 이내 미소로 반겨주며 똑같이 주먹을 들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칼리스타가 하품을 하며 격납고를 나갔다.

 

 블러디팬서는 들고 있던 주먹을 쥐락펴락하더니 다시 방벽을 정비했다.

 

 가동부위에 기름칠을 하고, 나사가 단단히 조여있는지 확인하고, 소프트웨어 오류를 검사한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일이었다.

 방벽에 새겨진 해골마크가 그녀의 노력을 지켜봐왔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아머드메이든을 상징하는 해골마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총알자국을 여러 번 메꾼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자랑. 그녀의 목숨.

 거기에 이마를 기대며

 블러디팬서는 기도했다.

 

 

 #6

 

 

 드르르르르, 덜컹!

 

 블러디팬서의 발에 달린 기동장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지면이 거칠어 진동이 심했다.

 사방이 방벽으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물었다.

 

 "좀 버틸만 하심까?"

 

 그녀의 바로 뒤에 있던 사령관이 헤드폰을 통해 답했다.

 

 "솔직히 멀미나는 거 같아."

 "속도를 낮추면 좀 나을지도 모르지 말임다."

 "아냐, 빨리 용건만 보고 가자. 여기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니까."

 "현명한 판단이시지 말임다."

 

 블러디팬서는 본래 내부에 추가인원을 탑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모델이 아니었다. 이 작전을 위해 닥터가 나름 신경 써서 블러디팬서의 방벽모듈 안에 임시 좌석을 만들어주었지만 승차감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말하길-'시간과 예산이 더 있었더라면!'

 

 사령관은 블러디팬서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출발한 직후부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한궤도와 엔진에서 내뿜는 소리 때문에 자연스럽게 잡담도 막혔다. 블러디팬서를 호위하며 이동하고 있을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발소리도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블러디팬서는 방벽내부의 디스플레이 화면만 쳐다보다 간간히 방벽을 살짝 열어 주위를 살폈다.

 뒤를 볼 일은 없었다.

 원래 그랬다.

 그녀는 항상 앞을 향했다.

 항상, 등 뒤에는 철벽이 물러나지 말라며 막아서고 있었다.

 

 항상.

 

 "........."

 

 문득 사령관이 헤드폰을 벗고 블러디팬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블러디팬서가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그러심까?"

 

 블러디팬서가 묻자 사령관이 무어라 대답했다. 그러나 엔진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헤드폰 쓰고 말하십쇼! 안 들리지 말임다!"

 

 그녀가 대꾸하자 사령관이 입을 크게 벌려 소리쳤다.

 

 "그냥 이야기 좀 하자고!!"

 

 블러디팬서는 사령관이 말하는 의미를 곱씹어보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다.

 몇 초가 지난 뒤 그녀는 이내 디스플레이의 버튼을 몇 개 눌렀다.

 

 "잠깐동안 다른 자매들은 못 들을 검다!"

 

 그제야 사령관이 헤드폰을 다시 쓰고 말했다.

 

 "여기 안이 이렇게 시끄러운 줄은 몰랐네."

 "장비가 그만큼 무거워서 그런 거지 말임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그렇게 말하기엔 주위에 일행이 너무 많지 않슴까?"

 

 사령관은 조금 긴장한 미소를 지었다.

 

 "요새 어떻게 지냈어?"

 "덕분에 항상 잘 지내지 말임다. 사령관님은 어떻게 지내셨슴까?"

 "나도 덕분에 잘 지냈지."

 "그렇슴까?"

 

 대꾸에 약간의 냉기가 서려있었다. 그러나 블러디팬서의 표정은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사령관은 몰랐을 테지만, 그녀의 얼굴은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어때? 나 잘 지켜줄 수 있겠어?"

 "물론임다. 그렇게 생각해서 절 선택하신 것 아님까."

 "절반은 그렇지. 나머지 절반은 사적인 이유고."

 

 블러디팬서는 시야를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사령관에게는 그녀의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죄송하지만 작전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좋지 않은 판단이지 말임다."

 "알아.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노력해보겠슴다."

 "고마워."

 "..........."

 "..........."

 "최근에 같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잖아. 이참에 어떨까 해서."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지 않았슴까."

 "그렇지."

 "..........."

 "..........."

 

 대화의 맥이 끊겼다.

 예전에는 말이 없어질 때마다 눈빛이 오갔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무겁기만 하다.

 어색함이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엔진소리보다 침묵이 요란했다.

 

 "그래서-"

 

 결국 블러디팬서가 말머리를 열었다.

 

 "그 사적인 이유라는 게 뭡니까.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검까."

 "아니, 그냥......."

 

 사령관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해졌다.

 블러디팬서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이마에 이상할 정도로 땀이 맺혔다.

 

 사령관이 억지로 웃음을 섞어 말했다.

 

 "최근에 계속 쉬게 둬서, 혹시 기분 상했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아쉽기는 했슴다."

 "그렇구나."

 "........."

 "........."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검까?"

 

 사령관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이유, 아니 딱히 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냥?"

 "그러니까 그냥, 좀 쉬게 해줄까 하고."

 "........그렇슴까."

 

 블러디팬서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목소리만큼이나 표정에도 힘이 빠졌다.

 사령관은 안타까운 듯이 말을 삼키고 있었다.

 

 블러디팬서는 조심스럽게 뒤를 보려다 황급히 다시 앞을 보았다.

 엎지른 컵을 잡아보려는 손짓 같았다.

 

 "사령관님."

 "응."

 

 블러디팬서는 혹시나 들릴까 조용히 침을 삼켰다.

 눈을 몇 번 껌뻑이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일단 기회만 생기면 잘 말할 줄 알았는데 말야."

 

 둘이 동시에 말했다. 말이 묻힌 블러디팬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령관이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막상 이렇게 상황이 되니까 말이 잘 안 나오네."

 "괜찮슴다. 편하게 말씀하십쇼."

 "그래. 말해야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팬서, 그때 내가 너한테 했던 말은, 그 행동은-"

 

 블러디팬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온몸의 신경이 사령관의 다음 말에 쏠렸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응답해라 블러디팬서. 각하의 회선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뭔가 문제가 있나?"

 

 마리의 통신이었다.

 그걸 들은 사령관은 침묵했다.

 그가 말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블러디팬서는 떨리는 손으로 디스플레이를 눌러 응답했다.

 

 "아니, 이쪽은 아무 문제 없어. 다시 연결해봐."

 

 그녀가 사령관을 향해 고개를 조금 돌려 통신이 연결되었다는 신호를 주었다. 빠르게 숨을 고른 사령관은 헤드셋의 마이크를 입에 댔다.

 

 "무슨 일이야?"

 "다행입니다. 별문제 없으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예상보다 빠르게 목표지점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스피커의 소리를 확대할 테니 준비해주십시오."

 "좋아. 부탁할게. 빨리 끝내고 오르카로 돌아가자."

 "맡겨만 주십쇼."

 

 마리는 충직한 목소리로 힘있게 답했다.

 사령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마리의 신호를 기다렸다.

 블러디팬서는 미련을 미룬 채 눈빛을 굳혔다.

 

 ...........

 

 스피커의 소리를 들은 사령관의 표정이 무거웠다.

 블러디팬서에게는 잡음일 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의미심장했던 모양이다.

 

 "이제 철수하자."

 

 사령관이 명령하자 방벽 밖으로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블러디팬서도 기동장치의 출력을 높였다. 점점 커지는 엔진소리가 스피커의 괴성을 덮었다.

 그녀가 힐끔 뒤를 보며 의도가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나 사령관은 생각에 잠겨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블러디팬서는 초조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무한궤도가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오르카로 돌아가는 길 내내 사령관은 말이 없었다.

 

 블러디팬서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비좁은 방벽 안에, 비좁은 그와 그녀의 사이 안에,

 끝없이 침몰하는 늪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침묵이 점점 무겁게 쌓여가는 때에

 

 타다다당!

 

 총성이 울렸다.

 요란한 엔진소리를 찢고 들어올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사령관님!"

 

 블러디팬서가 소리쳤다. 생각에 빠져있던 사령관이 번개처럼 헤드폰을 쥐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마리?"

 "3시 방향 적습입니다. 안심하십쇼. 제 부하들이 처리할 겁니다."

 

 사령관이 턱을 쥐고 얼굴을 찌푸렸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각하를 잘 지켜라 블러디팬서."

 "맡겨줘."

 

 타다당, 타다다당!

 총성이 점점 격해졌다. 전투가 예상보다 길어진다.

 간간이 블러디팬서의 장갑판에 총알 튀는 소리가 울렸다.

 

 "밖이 안 보이는데."

 "답답해도 좀 참아주시지 말임다. 자매들이 잘 처리해줄 검다."

 "매복인가........ 녀석들이 매복을 했다고? 굳이 먼저 치지 않고?"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검까."

 "느낌이 안 좋아. 이 근방에 녀석들의 병력이 훨씬 많은데 아무 이유 없이 습격을 늦출 리 없어."

 

 블러디팬서는 낌새를 차린 듯이 물었다.

 

 "마리에게 전달함까?"

 "그래. 속도를 높이자. 반격은 최소화하면서 일단 여기를 벗어-"

 

 그때 마리의 긴박한 통신이 들어왔다.

 

 "블러디팬서!! 칙엠페러다!! 각하를 보호해!!"

 "어디? 어디에 있어?! 이런 미친-"

 

 마리가 보내준 좌표를 향해 블러디팬서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사령관의 몸이 방벽에 부딪혔다. 블러디팬서가 주포의 조준경을 통해 칙엠페러의 위치를 확인했다.

 타다다당!!

 갑자기 총격이 격해지며 방벽 위에 무수한 불꽃이 튀었다. 사방에 총알 튀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울려대는 와중에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꽉 잡으시지 말임다!! 조금 거칠 검다!"

 

 무한궤도가 전속력으로 후진했다. 방벽이 거친 지면을 밀고 나가며 심하게 떨렸다. 사령관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소리쳤다.

 

 "전원 후퇴! 연막치고 빠져! 싸우지 마!"

 "속도가 느리다 블러디팬서! 이러다간 각하께서 피격당하신다!!"

 "다른 쪽 내주면 뚫려!"

 "전면장갑도 어차피 뚫릴 거다!"

 

 블러디팬서가 분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알아!"

 "지금 부하들을 보낼 테니 도착하는 대로 각하를 모시고 빠져나와! 메이의 부대가 출격했다고 하니 5분만 버텨라!"

 

 그때 레오나의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안 돼. 기다릴 시간이 없어. 블러디팬서, 지금 바로 사령관 데리고 방벽을 빠져나와."

 "철충 놈들 사격이 너무 거세! 나갔다간 사령관도 나도 바로 죽어!"

 "어차피 칙엠페러가 쏘면 못 막아.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 없어. 당장 사령관 데리고 나와."

 

 타당탕타당탕

 이 순간에도 방벽에 총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블러디팬서는 초조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해결할 단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절실한 눈빛을 보고도 사령관은 해답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 네 경험을 믿어."

 

 블러디팬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의 목이 격하게 침을 삼켰다.

 

 지켜야 한다.

 그 생각 하나로 그녀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짧은 시간,

 그 안에서 블러디팬서는 선택을 내렸다.

 

 그녀의 방벽이 급정지했다.

 

 "뭐하고 있나 블러디팬서!!"

 "미쳤어? 지금 뭐하는 짓이야?"

 

 마리와 레오나의 목청이 통신을 채웠다. 블러디팬서는 대답 없이 방벽을 조작하는 데 집중했다. 사방을 감싸고 있던 방벽이 전방으로 움직이며 햇빛이 들어왔다.

 

 "한 번 막고 가겠슴다 사령관님! 칙엠페러의 탄만 빼놓으면 나머지는 제 몸으로 어떻게든 막아볼 수 있을 검다!"

 "재장전하는 사이에 빠지겠다고?"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슴다! 저한테 딱 달라붙으시지 말임다!"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블러디팬서의 곁에 앉았다. 블러디팬서의 방벽모듈이 지면에 고정되어 방벽을 전개했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방벽이 칙엠페러가 있을 방향으로 겹치며 최대한 비스듬하게 경사를 만들었다.

 방벽이 빠진 부분으로 총알이 날아왔다. 사령관은 더욱 블러디팬서에게 밀착하며 몸을 숨겼다.

 

 일정한 틈을 두고 겹겹이 선 방벽 뒤에서 블러디팬서는 사령관의 손을 꽉 잡았다.

 

 "전에 말씀드린 거 기억하심까?!"

 "나 지켜준다는 거?"

 "대충 맞슴다!"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슴다. 방벽이 뚫리고, 몸이 찢어지더라도, 반드시.

 블러디팬서는 각오를 되새기며 기도했다.

 

 '한 번만 막으면 된다. 한 번만 막자.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순간

 칙엠페러에게서 공격이 감지되었다.

 

 -

 

 눈을 떴을 때 블러디팬서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쓰러진 것인지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뿌옇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흙이 툭툭 튀어 올랐다.

 총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녀는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득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브라우니였다.

 급한 얼굴로 무어라 소리쳐댔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곧 총알비를 뚫고 달려온 다른 브라우니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블러디팬서는 고장 난 것마냥 아무것도 못 하고 끌려갔다.

 끌려가는 그녀의 눈에 전장의 풍경이 비쳤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쇳조각이 보였다.

 뼈대만 남아 불타고 있는 방벽모듈이 보였다.

 반 토막 난 아머드메이든의 마크가 보였다.

 

 곧

 다른 브라우니들이 끌고 가는 핏덩이가 보였다.

 사령관이었다.

 의식이 없는지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왼팔이 잘려나간 자리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왼다리도, 무릎 아래로는 남지 않았다.

 

 안 돼.

 

 블러디팬서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질 않았다.

 

 안 돼.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브라우니들이 사령관을 부축해갔다.

 그가 점점 멀어진다.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간다.

 

 손을 뻗을 수가 없다.

 

 닿지 않는다.

 

 안 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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