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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휘관은 철충의 표적임을 명심할 것. 지휘관이 절대로 전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지휘관이 도주를 시도하거나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할 경우 지휘권한을 박탈하고 구속하는 것을 권장함. 유사시 생명이 유지되는 조건 하에 지휘관에 대한 어떠한 가해행위도 정당한 것으로 간주.

 -요새가 발각되는 것을 막는 게 최우선 임무. 최소한 금일 자정까지, 최대한 오래 전선을 유지할 것.

 

 마리는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곱씹어 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강인하고 냉정했으나 그것이 그녀의 감정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표정을 짓지 않은지 오래였다.

 더 이상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전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인류가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오직 버티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 땅에 전선을 펼치고, 지휘관이 휩노스로 쓰러지고, 전선이 처참하게 괴멸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도,

 그녀의 주인들은 버티라고 했다.

 

 가장 앞에서 벽이 되어온 그녀들에게 낙오된 자매들을 방패삼아 버티라고 했다.

 

 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울질뿐이었다.

 이번에는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 어느 병사를 포기하는 게 전력에 도움이 될 것인지. 어떻게 포기해야 그나마 나은 피해를 입을 것인지.

 

 반격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조그만 승리조차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부하들의 머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잘 훈련된 브라우니는 혼자서도 칙을 제압할 수 있다고,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전우애가 있으면 철충의 장갑보다도 단단해질 수 있다고,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때 필요한 표정도 더 이상 짓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지금처럼 강하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게 되었다.

 늘 그런 표정일 것이라고, 늘 그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을 거라고, 늘 그렇게 부러지지 않고 서있을 거라고,

 그녀가 부하들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은 이제 그런 것밖에 없었다.

 

 "대장님."

 

 망을 보던 브라우니가 다가왔다. 귀염성 있던 갈색 단발머리가 기름과 먼지로 헝클어져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늘 씩씩하게 웃을 줄만 알던 그 얼굴에 표정이 없다.

 마리는 잠시 브라우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보고해라."

 "호드가 왔슴다."

 

 

 .............

 

 

 맘스베리의 폐허 속에 흙먼지가 일어났다. 콘크리트 사이에 몸을 숨긴 브라우니들이 힐끔힐끔 손님을 엿본다.

 먼지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맘스베리에 입성한 자들은 달아오른 속도만큼이나 급하게 멈춰섰다. 다리외골격의 바퀴에 제동이 걸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무리의 선두에 있던 바이오로이드가 어깨에 걸린 갈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어내며 걸어나왔다. 앵거오브호드의 대장 칸이었다.

 

 "지휘관은 어디 있지?"

 

 칸이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은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칸의 뒤에 줄지어 선 퀵카멜과 워울프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막사 앞에 서 있던 마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드무리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왔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 와중에 지휘관이 애처럼 신이 나서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그 앙상한 몸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호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걸 본 마리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칸은 다가오는 인간 남성을 보더니 뒤에 서 있던 워울프 중 하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워울프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워울프들이 재빨리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지적받은 워울프가 표정을 팍 찡그린다.

 

 "나도 별로 없는데."

 

 못 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던 그녀는 결국 탄띠에 끼워져 있던 담배갑을 꺼냈다.

 어느새 지휘관은 호드의 앞에 도달했다. 잠깐 뛴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이 헐떡이는 그에게 워울프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내밀었다.

 지휘관이 지친 얼굴로 워울프의 손에 들린 담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그녀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갑을 통째로 낚아챘다.

 워울프가 놀라 소리친다.

 

 "아니 이런 미친-"

 

 그러나 지휘관은 이미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리를 향해 도망간다. 스틸라인과 호드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담배갑을 품에 안고 한참 내빼던 지휘관이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앙상한 팔이 호드를 향해 손짓했다. 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손짓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라는 손짓인지 오라는 손짓인지 헷갈렸다.

 

 지휘관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칸은 움직였다. 부하들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본인만 지휘관의 막사로 걸어갔다. 마리는 다가오는 칸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칸이 옆으로 스쳐지나갈 때쯤 그녀는 물었다.

 

 "퇴각 지시가 있었을 텐데. 우리들을 지원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칸은 가볍게 답했다.

 

 "지니가다 담배 한 개비 주러 들른 것뿐이다. 지원이라 할 것도 없어."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건가."

 "그 쪽은 담배 한 개비도 허락 안 할 게 뻔하다."

 

 마리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칸은 그녀를 지나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칸이 막사 밖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마리 7호. 지휘관이 부른다."

 

 그러고는 다시 쏙 들어간다. 마리는 호위 레프리콘에게 대기하라 명령하고 지휘관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

 

 "후우-"

 

 침상에 앉은 지휘관이 담배연기를 길게 뱉었다. 그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입에 물린 담배에 매달렸다. 마리와 칸은 나란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담배를 즐기셨습니까."

 

 마리의 물음에 지휘관이 고개를 저었다.

 

 "금연한 지 한참 됐지. 근데 상황이 영 이러니까. 내가 인간이라 그런지 이게 되게 땡기더라고."

 

 그가 경박하게 담배개비를 흔들었다. 칸은 칼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용건 없으면 가겠다."

 "야, 그러지 말고 좀 침착해. 숨 좀 돌리자."

 

 지휘관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마리를 보았다.

 

 "지금 남은 전력현황 좀 말해줘."

 

 마리는 의외의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지휘관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파악 안 해뒀어?"

 

 마리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T-2 브라우니 277기, T-3 레프리콘 120기, T-50PX 실키 13기, M-5 이프리트 3기, GS-130 피닉스 9기입니다."

 "........ 그리고?"

 "저와 지휘관님이 있습니다."

 

 지휘관이 피식 웃으며 담배연기를 흘렸다.

 

 "좋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쁘네. 칸, 너희는?"

 "워울프 19기, 퀵카멜 5기다."

 "워울프 하나는 어디 가고? 그새 죽었어?"

 

 칸은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낙오됐다. 연락이 닿지 않아 생존여부는 알 수 없어."

 "거 안타깝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군복의 가슴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맣게 접혀있는 지도였다. 앙상한 손이 지도를 느릿느릿 펼쳤다.

 

 "오면서 철충들 봤지? 여기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상부의 예상대로, 한 시간."

 

 칸의 짧은 대답에 지휘관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그 쓸 데 없는 시뮬레이션이 이런 건 또 잘 맞춰."

 

 그가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칸과 마리의 시선이 지도를 향했다. 손때가 잔뜩 묻은 지도에 수 십 번 접었다 편 자국이 가득했다. 지도에 그려진 것은 한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 불리던 땅의 서쪽 일부, 지휘관과 그녀들의 전장이었다. 그 안에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스틸라인 전선들의 교전, 진격, 후퇴가 손글씨로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글씨마저도 닳아 지워질 지경이다.

 

 "철충들 위치가 어디쯤인지 표시할 수 있겠어?"

 

 지휘관의 요구에 칸이 맘스베리 북쪽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레스버그와 맘스베리를 잇는 도로였다.

 

 "여기쯤이다. 포장된 도로를 이용하고 있지만 중장형 철충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고 있으니 여시 도착하는 시각에 큰 오차는 없을 거다."

 "숫자는? 정말 2천이고?"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는 되어보였다."

 

 지휘관의 시선이 마리를 향한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전투가 시작된 후 약 22분 정도입니다 지휘관님."

 

 지휘관이 눈을 크게 뜬다.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어?"

 

 마리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상부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방어선이 무너지는 데 7분, 전투원이 궤멸되는 데 22분이 걸립니다."

 "그렇지. 7분 정도라고 하겠지. 그런데 그건 시뮬레이션이잖아? 그 지랄 같은 시뮬레이션이 다 맞아 떨어졌으면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되었겠어? 그냥 네 생각 말해봐. 네가 보기엔 얼마나 버틸 거 같아?"

 "제 생각도 시뮬레이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의외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굴의 마리라는 이름이 울겠네. 왜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할까. 예전에는 무조건 믿고 맡겨달라고 큰소리 쳤으면서."

 

 마리는 여전히 강인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장에 선 저는 불굴입니다. 어떠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양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질적으로도 불리한 거겠지."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지휘관이 눈썹을 올리며 비꼬았다.

 

 "인정 안 하네? 이건 또 아니라고 생각하나봐? 뭐 브라우니가 열심히 수련하면 맨손으로 칙을 때려잡을 수 있나? 이 지경이 되고서도 그런 말을 하고 있어? 그래?"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칸이 마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노란 눈에 푸른 빛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지휘관이 실실 웃는다.

 

 "그래. 그래야 불굴이지. 그래서 네가 저 녀석들의 대장인 거야."

 

 마리가 눈을 깜빡이며 의문을 표했다. 지휘관은 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호프필드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

 

 지휘관이 지도 위의 호프필드를 콕콕 찔렀다. 맘스베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도시였다. 한때는 인간들이 살던 소도시였지만 지금은 처참할 정도로 폐허가 된 곳이다.

 칸이 지도를 살피며 답했다.

 

 "안전하게 철충을 피해서 가려면 넉넉히 두 세 시간은 잡아야 할 거다."

 

 듣고 있던 마리가 물었다.

 

 "호프필드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습니다. 지휘관님의 세이프하우스도 이미 없다는 걸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건 상관없어. 그것 때문에 물어본 거 아니야."

 "그럼 어째서.........?"

 

 지휘관이 칸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담배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줘서 참 고마운데, 와준 김에 심부름 하나만 더 해줬으면 해. 되나?"

 "상부에서 지원작전을 금지했다. 그 담배도 지침을 위반하고 가져온 거다."

 "알아. 작전 같은 거창한 일 못 해준다는 거. 그러니까 그냥 조그만 부탁만 하는 거야. 같이 안 싸워줘도 되니까 물건 배달 하나만 해줘. 기왕 온 김에 하나만. 응?"

 

 간사하게 손을 비비며 부탁하는 지휘관을 보며 칸이 얼굴을 찌푸렸다.

 

 "뭘 배달하란 거지?"

 

 지휘관이 자신을 가리킨다.

 

 "나. 내 몸뚱이 좀 호프필드로 옮겨줘라."

 "뭐?"

 

 칸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리의 눈동자에 결국 불이 붙었다. 파직! 금발 사이로 스파크가 튄다. 코트가 위로 천천히 떠오른다.

 

 "지휘관님. 군인은 후퇴는 해도 도망은 치지 않습니다. 방금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희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이 전선에 남은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지휘관은 또 피식 웃는다.

 

 "걔들이 네 부하지 내 부하냐."

 

 그 말에 마리가 팔짱을 풀려하자 칸이 곧바로 손을 들어 막았다. 마리의 푸른 눈동자가 칸을 노려보았다. 칸은 마리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진정해라. 피곤해 보이는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마리의 목소리에는 명확하게 날이 서있었다.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지휘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잠깐만 내 말 들어봐. 마리 너한테도 썩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야."

 

 마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휘관을 향했다.

 

 "어째서 호프필드로 향하십니까? 그 이유를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눈앞의 바이오로이드가 살기를 가득 머금고 물었지만 그는 숨기는 기색도 없이 편하게 말했다.

 

 "아쉽게도 나도 너랑 똑같이 생각해. 지금 이 전력으로 철충이랑 붙으면 7분 안으로 박살난다. 그러니 어쩌겠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정확히 맞아. 도망가는 거지. 나라도 일단 도망갈 수 있으면 가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마리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은 지도의 북쪽에 있는 도시 헤트크루즈를 톡톡 두드렸다.

 

 "철충은 인간을 찾아 죽여. 이게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확실한 원칙이잖아. 그래서 나보고 미끼 좀 하라고 보냈단 말이야. 그 말따라 내가 처음 발령받고 헤트크루즈에 있었을 때에는 철충이 나한테 오는 게 확실했어.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있단 말이지."

 

 그의 손가락이 아래로 쭉 내려가 맘스베리를 가리킨다.

 

 "저 놈들이 지금 나한테 오는 건지-"

 

 손가락이 맘스베리와 철충무리를 일직선으로 긋는 방향으로 내려간다. 쭉 내려가다 멈춘 손가락은 케이프타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염병할 요새로 가고 있는 건지 알 방도가 없어. 그러니까 지금 윗대가리들도 너희를 못 만지는 거야. 요새가 안 들키는 게 그놈들한테는 가장 중요하니까. 괜히 너희들 후퇴시키거나 지원해주다 케이프타운까지 철충이 흘러들면 그냥 다 망해. 인류 최후의 보루는 '뻥'하고 끝나는 거지."

 "그게 호프필드와 상관있습니까?"

 

 지휘관이 담배를 쭉 빨며 호프필드로 손가락을 그어 올렸다.

 

 "벌레들이 뭔 생각인지 알아봐야지. 일단 내가 호프필드로 움직이면 놈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거야. 놈들이 아직 요새에 대해 모른다면 날 죽이려고 환장해서 따라오겠지. 반대로 요새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면 그쪽에 인간이 훨씬 많으니 당연히 가던 방향으로 마저 갈 거고. 간단하잖아."

 

 지휘관이 고개를 들어 마리를 본다.

 

 "그럼 이제 너희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되지 않겠냐? 철충이 나를 따라서 떠나가면 그 사이에 상부에 연락해서 지원 받고 전선 보강해. 철충이 날 무시하고 다가오면 이미 요새가 발각되었다고 보고하고 빨랑 후퇴하면 되고. 어느 쪽이든 네들이 여기서 가만히 앉아있다 한 시간 뒤에 몰살당할 일은 없어. 그렇잖아?"

 

 마리는 여전히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로 물었다.

 

 "지휘관님께서는요?"

 "나도 이득이지.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죽을 거 뻔한데 최소한 도박은 해볼 수 있잖아. 철충이 날 따라온다면 별 수 없이 죽겠지만, 만약에 철충이 날 무시한다면 그대로 도망갈 수 있어. 지옥을 탈출하는 거지. 성공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선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바이오로이드 그림자도 안 비치는 곳에 가서 죽을 때까지 평화를 만끽할 거고."

 "정말로 그런 이유로 호프필드에 가시는 겁니까?"

 "그럼 어디로 가? 지금 몰려오는 철충 정면으로 뚫고 무레스버그로 가?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왜 여기 이렇게 처박혀있겠어?"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안에 복잡한 침묵이 맴돌았다.

 칸이 마리에게서 손을 떼며 지휘관을 쳐다보았다.

 

 "호드가 왜 네 명령에 따라야 하지?"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인간을 데리고 철충을 유인하는 건 자살행위다. 지금 다가오는 철충무리말고도 다른 곳에서 배회하던 철충이 전부 공격해올 거다. 포위되면 내 부대는 순식간에 전멸해."

 

 지휘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위험하지. 하지만 철충은 바이오로이드한테는 관심 없잖아. 나만 후딱 호프필드에 던져주고 네들은 튀어. 그놈들이 인간이 눈앞에 있는데 도망가는 네들을 신경쓰겠어?"

 "그전에 철충한테 따라잡힌다면?"

 "그럼 다 죽는 거지 뭘. 쯧, 설마 속도로 먹고 사는 호드가 느려터진 철갑덩어리들한테 잡힐 리는 없겠지."

 

 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위험한 일을 상부명령 없이 네 독단으로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손가락을 세우며 답했다.

 

 "일단 들어봐 칸. 제일 먼저, 지금 네가 말하는 상부는 죄다 휩노스로 쓰러졌어. 너도 알잖아. 여기 핵 떨구는 것도 최소됐다는 거. 지휘자가 없대 지휘자가. 그 상부라는 게 뇌 없는 깡통이 되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깡통이 너한테 뭘 지시하겠어? 못 해. 지시를 못 하니까 퇴각하란 거지."

 

 그가 손가락을 하나 더 올린다.

 

 "그리고 만약 상부에 머리 돌아가는 놈이 남아있었다면 지금 내 생각이랑 똑같은 지시를 내렸을지도 몰라. 안 그러냐?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발벗고 나서서 저 벌레새끼들 생각을 읽어볼 테니 허락해주십쇼 하고 상부에 말해봐야 닿을 리가 없잖아. 잘못하면 여기 스틸라인은 물론이고 애꿎은 호드까지 박살나는데다 지들이 숨어 있는 요새까지 위험해지는데."

 

 그가 세 번째 손가락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나 명령하는 거 아니야. 부탁하는 거지. 날 호프필드로 데려다줬으면 해. 싫으면 그냥 가고. 만약에 내 부탁 들어준다면, 내가 가진 건 별 거 없고 그냥 가능한 선에서 조그만 선물을 줄게."

 "선물?"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받고 싶었던 명령 하나 해줄게. 너희들은 인간 명령 있으면 훨씬 움직이기 좋아진다면서? 무슨 일이든 상관없으니까 하라고 명령해줄게."

 

 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명령 아닌 명령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지휘관이 실없이 웃으며 담배를 바닥에 지져 껐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뭘 어쩌겠어.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애초에 명령할 권한 같은 건 다 마리한테 주고 없고. 그러니 선택은 네가 해."

 

 그의 시선이 마리를 향한다. 그녀는 아직도 푸른 눈동자로 지휘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 너도 마찬가지야. 나 지금 탈영하려는 거니까 잡아서 묶어두든지 팔다리를 자르든지 맘대로 해. 칸이 된다고 하면 난 무조건 갈 거니까."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도에 목매다는 칸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바이오로이드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둘 다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지휘관이 자신의 앙상한 손목을 두드린다.

 

 "시계가 없어서 몇 시인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오고 있는 손님이 2천 마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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