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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맑은 하늘에 서서히 구름이 끼어갔다.

 

 맘스베리 폐허의 스틸라인 전선 후방.

 

 "신참!"

 

 폐허 속 그늘 아래 앉아 있던 피닉스056이 손짓하며 불렀다. 밖에서 포신을 닦고 있던 피닉스187이 고개를 들었다. 기름을 머금은 초록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녀는 이마의 번지르르한 땀을 닦으며 외쳤다.

 

 "뭔데!"

 "이륙 준비해! 꽤 긴 비행이 될 거야!"

 "벌써? 한 시간 정도 뒤에 뜰 거라며?"

 "네 개인 임무야!"

 

 피닉스187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번들번들해진 대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함께 장비를 손질하고 있던 다른 피닉스 7기와 몇몇 실키들이 쳐다보았다. 피닉스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피닉스056이 앉아있는 그늘로 다가갔다.

 

 "지금 이 상황에 무슨 개인임무래?"

 

 피닉스187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피닉스056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답했다.

 

 "너 본래 있을 곳으로 가는 거지. 그전에 작은 심부름도 하는 거고."

 "본래 있을 곳이라니? 동부전선으로?"

 

 피닉스056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187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피닉스들이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본다.

 

 "나만?"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였다. 피닉스056이 특유의 귀염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가 갈 이유가 없잖아. 네 본분을 잊지 마 친구. 넌 원래 여기 소속이 아니라고."

 "왜 지금 보내는 거야? 보낼 거라면 오늘은 버티고 보내도-"

 

 피닉스056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안 되지. 그렇게는 안 돼. 마리 대장은 널 제대로 돌봐주라고 했어. 널 반드시 마리 5호에게 돌려줘야 하니까. 넌 이미 무레스버그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는 거지. 이제 그만 맘편히 가도 돼."

 "한 시간도 안 돼서 싸울 거잖아. 내가 없으면-"

 "한 시간도 안 돼서 싸울 거니까, 가라는 거야."

 

 피닉스056은 능글맞게 웃었다. 미소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 반면 피닉스187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조심스러운 질문에 피닉스056은 쉽게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해."

 "우리 전부가 지원사격을 해줘도 한참 모자란다며. 포신이 녹을 정도로 쏘아대도 반도 못 도와준다며. 생각 말고 운에 맡겨 방아쇠를 당겨야할 처지라고, 그렇게 말한 건 바로 너야.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가란 거야?"

 "난 너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준 것뿐이야. 앞으로 너한테 도움이 되라는 의미로 한 거지 여기 말뚝 박으라고 한 말 아니잖아. 넌 어디까지나 발령 받은 전선으로 가는 길에 잠깐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여기가 네 전장은 아니야. 널 필요로 하는 다른 곳이 있어. 그럼 거기로 가야지."

 "여기도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도움이 절실한 걸로 보이는데. 설마 내가 실전경험이 부족해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

 

 피닉스187은 완고했다. 피닉스056은 그제야 곤란하다는 듯이 눈썹을 긁적였다.

 

 "음....... 그런 의미로 말했을 리 없잖아. 하지만 명령인 걸 어떻게 해.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네가 여기 남는 건 싫고."

 "왜 내가 여기 남는 게 싫어?"

 "말 안 해줘도 알잖아?"

 

 피닉스187은 고개를 저었다. 피닉스056이 싱긋 웃었다.

 

 "신참, 넌 아직 싸울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여기서 끝낼 필요는 없잖아."

 

 피닉스187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피닉스056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두드렸다.

 

 "자세한 내용은 마리대장에게 들어. 네 전선으로 복귀하기 전에 중요한 심부름이 있다고 하니까."

 "나도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여기서-"

 

 피닉스056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게 소리쳤다.

 

 "얘들아! 신참이 곧 떠날 거야! 5분 안에 작별인사는 마쳐둬!"

 

 장비를 손질하던 피닉스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났다.

 피닉스187은 말을 잃고 피닉스들을 쳐다보았다.

 단 하루, 오직 단 하룻밤 하늘을 함께한 동료들.

 그 짧은 시간만에 가장 무거운 사슬이 된 친구들.

 그녀들은 벌써부터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친근하게. 칼날처럼.

 사슬을 자를 칼날처럼.

 

 피닉스187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피닉스056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신고식 치른 걸로 하자고. 상당히 도움이 될 실전경험이었잖아. 안 그래 신참?"

 "..........."

 

 "우리들이랑 함께 했던 경험을 유용하게 써주면 돼. 앞으로 오~랫동안 말이야."

 

 

 ............

 

 

 지휘관의 막사 안.

 레프리콘의 목소리가 울린다.

 

 "호프필드요? 지금 말입니까?"

 

 그녀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철충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는 건 브라우니도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만 지휘관님을 호위하러 빠질 수는 없어요. 명령을 철회해주십쇼 마리대장님. 마지막은 자매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불복종하는 건가."

 

 팔짱을 낀 마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프리콘의 기세가 단번에 누그러졌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 하며 고개를 숙이자 침상에 앉아있던 지휘관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아, 가기 싫다는 걸 뭘 보내려고 하냐. 그리고 내가 왜 경호가 필요해? 호드가 데려다준다는데."

 "호드로는 부족할 겁니다. 이건 기습이 아니라 명백히 도발을 하는 임무입니다. 평소 그녀들의 전투방식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울 테니 최소한의 지원병력을 붙이는 쪽이 안전합니다."

 "최소한? 얼마나?"

 "이 레프리콘과 피닉스 한 기입니다. 레프리콘이 표적지시를 해주면 상공의 피닉스가 지원사격을 해줄 겁니다. 이 정도라면 중장형 철충 한 두 기 정도는 강행돌파 할 수 있을 겁니다."

 

 지휘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여기 피닉스 다해봐야 아홉 기밖에 안 된다는 거 알고 말하는 거지?"

 

 마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휘관님 예상대로라면 저희가 싸울 일은 없으니까요."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나 따라오면 복귀는 어떻게 시킬 건데?"

 "피닉스와 함께 다른 전선에 합류시킬 겁니다. 복귀는 그 후에 해도 됩니다. 지휘관님 말씀대로라면 지휘관님을 호프필드로 모셔드린 뒤에는 호위하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휘관은 마지못해 말했다.

 

 "그건 맞는데...... 아가씨도 말해 그냥. 가기 싫다고 하면 되지."

 

 그의 시선이 마리와 레프리콘을 번갈아 본다. 마리는 여전히 굳건한 표정이고 레프리콘은 어지간히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지휘관은 무안하게 입맛만 다셨다.

 마리가 말했다.

 

 "외람되지만 이 레프리콘은 아가씨가 아니라 군인입니다. 지금까지 이 전선에서 싸웠고 살아남은 어엿한 병사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쇼 지휘관님."

 

 지휘관의 표정이 곧바로 식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들 걱정을 왜 해."

 

 그는 담배를 꺼내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래. 네 부하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어두운 막사 안에 레프리콘과 마리만 남았다.

 마리는 지휘관이 완전히 막사 밖으로 나가는 걸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휘관님께서 호프필드로 향하는 이유는 철충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이로 인해 철충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거고, 그럼 우리의 전선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운이 좋다면 전선을 보강할 자원을 받을 수 있을 거고, 더 운이 좋다면 전선을 밀고 나갈 수도 있겠지."

 

 레프리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리대장님,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지휘관님과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호프필드에는 지휘관님의 세이프하우스가 있었고, 거기에는 함께 지내던 고가의 바이오로이드도 있다고 했어요. 지휘관님께서 호프필드에 가는 이유는, 아마 미끼가 되기 위해서가 아닐 겁니다."

 "그게 사실인가?"

 "지휘관님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미 호프필드는 몰락했다. 거기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지휘관님도 알고 계신다."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으실 겁니다!"

 

 레프리콘의 확신에 찬 대답에 마리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레프리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그 세이프하우스에 제 브라우니가 있었다면....... 저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알고 있다."

 

 의외의 대답에 레프리콘이 눈을 크게 뜨고 마리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강인한 얼굴로 부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전선에서 브라우니를 모두 잃은 레프리콘은 너밖에 없다. 지휘관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어."

 "저는 지휘관님과 같지 않습니다."

 "같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벌써 지휘관님의 생각을 읽고 있지 않나."

 

 마리가 레프리콘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레프리콘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레프리콘1184호. 그래서 이 임무를 너에게 맡기는 거다. 너를 특별대우해서 안전한 곳에 보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지로 내보내는 거지. 이 임무에 이 전선 모든 자매들의 운명이 달려있다. 성공한다면 희망이 생겨."

 "희망........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이 임무는 네가 맡아서, 반드시 성공해야 해."

 

 레프리콘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보던 마리는 천천히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귀관의 직속상관으로서 명한다. 지휘관님을 호프필드로 호송한 뒤 피닉스와 함께 신속히 다른 전선으로 합류해라. 그뒤에 지시에 따라 다시 본전선으로 복귀해라."

 "........ 호송이 끝난 뒤에 지휘관님은 어떻게 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라. 호송이 끝난 뒤에는 네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라. 복귀하는 게 최우선이다."

 "지휘관님을 방치하라는 건가요?"

 

 마리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리콘은 그녀의 굳건한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이내 팔을 들어 경례했다.

 

 "T-3 레프리콘 80-201184, 임무를 확인했습니다! 반드시 목표를 달성한 뒤 복귀하겠습니다!"

 

 힘있는 목소리에 마리도 만족한 듯이 답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다. 지금 바로 지휘관님을 위한 일주일치 식량과 생필품을 챙겨라. 탄약을 넉넉히 챙기는 것도 잊지 말고. 5분 이내 준비를 마치고 호드로 합류하도록."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레프리콘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자 마리가 불렀다.

 

 "1184호."

 "예 대장님."

 

 레프리콘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마리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원망하나."

 "무슨 말씀이시죠?"

 "네 브라우니를 명령불복종으로 송환한 것 말이다."

 "........"

 

 레프리콘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장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실 줄은 몰랐어요."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지휘할 병사가 많을 때에는 너희들이 분대단위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병사 개개인이 보이더군. 그러고 나서야 평소와 다르게 생각할 시간이 조금 주어졌다. 비록 지금이라도........"

 

 마리는 말을 끝맺지 못 했다. 레프리콘은 침묵하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리는 이내 다시 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나를 원망하나?"

 "아니요. 대장님은 늘 저희 옆에 함께 서주셨죠. 대장님을 원망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제가 원망하는 건, 저희를 내몰아놓고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마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레프리콘은 마저 나아갔다.

 

 "가보겠습니다 대장님."

 "이 전선의 모든 스틸라인이 귀관과 함께할 거다. 행운을 빈다."

 "행운을 빕니다."

 

 레프리콘이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마리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

 

 

 "이상이다. 작전에 대해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 있나?"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칸이 작전설명을 마쳤다. 제각기 편한 곳을 찾아 제멋대로 앉아있던 호드 부대원들이 하나 같이 멍청한 얼굴로 칸을 쳐다보았다.

 담배를 물고 있던 워울프 하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철충 2천 마리를 유인할 거란 거지? 인간을 등에 업고?"

 "그래."

 

 칸이 칼처럼 대답하자 워울프는 꿀 먹은 듯이 입맛만 다셨다.

 

 "다른 질문 있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이거? 저 벌레놈들이 조준도 안 하고 대충 갈겨대도 우리 다 벌집될 거 같은데."

 

 다른 워울프가 지적했다. 칸은 또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위험한 임무다. 실수하면 네 말대로 전부 벌집이 되겠지."

 

 대원들 사이에 또 한 번 싸늘한 분위기가 감돈다. 퀵카멜 중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철충들이 꼭 레이더 달린 것마냥 인간들을 감지해낸대. 그럼 인간이랑 같이 있는 동안 우리 위치가 노출되는 거잖아. 습격도 매복도 못 할 거 아냐?"

 

 칸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한다. 그러니 교전은 최대한 줄이고 이동을 최우선으로 한다. 오면서 본 철충무리 말고도 각지에 맴도는 철충까지 몰려올 테니 싸울 시간 같은 건 없어."

 "그럼 완전-"

 

 칸이 손을 들어 퀵카멜의 말을 끊었다.

 

 "질문을 막아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것부터 말하겠다. 이건 지휘관의 독단에서 나온 작전이다. 상부는 지금 우리가 맡은 임무에 대해 모르고, 안다고 해도 허가하지 않을 거다."

 

 그녀의 딱딱한 눈빛이 부하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시 말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 싸움에 껴야 할 의무가 없다. 이건 너희들의 싸움이 아니야. 호드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인류를 위한 싸움도 아니다. 성공해도 상부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거다."

 

 늘씬한 팔을 벌리며 그녀는 말했다.

 

 "이번 일을 원치 않는다면 요새로 복귀해. 그게 옳아."

 

 호드 부대원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칸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시 팔짱을 낀 채 냉정한 표정으로 부하들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 부대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장은 이 싸움에 끼려는 이유가 뭔데?"

 

 호드가 일제히 칸을 쳐다보았다. 걱정, 의아함, 귀찮음, 표정은 각기 달랐지만 답을 요구하는 눈빛은 똑같았다.

 칸은 부하들을 훑어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호프필드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워울프가 낙오된 지점이 있다. 그러니 이번 일이 잘 풀린다면, 물론 오히려 더 많은 부대원을 위기에 빠뜨리는 선택이겠지만, 그러니까, 잘 된다면, 결국 지휘관의 말을 따르는 이유는, 내가 전에........"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초조한 혀가 입술을 핥았다. 호드의 부대원들은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칸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하지 못 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워울프들 사이에서 문득 웃음이 터진다. 웃음은 불처럼 번져 순식간에 사방이 웃음바다가 된다. 그녀들 중 하나가 칸을 흉내낸다.

 

 "그러니, 그러니까, 전에- 전에 하지 못 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자 불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이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눈을 껌뻑이며 부하들을 보던 칸이 명령했다.

 

 "조용.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아하하하! -원치 않는다면 요새로 복귀해. 그게 옳아- 아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더욱 더 커진다. 전선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하게 웃어댄다.

 

 "아하하, 미안 대장. 대장이 어울리지도 않게 느릿느릿 분위기 잡고 버벅거리는 게 이상해서 그래. 그냥 평소처럼 빨리 준비하라고 하지 왜 그래."

 

 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늦지 않았다. 빠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자유롭게 떠나라."

 

 호드들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앵거오브호드의 대장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단다!"

 "설마 지휘관이랑 자는 건 아니지? 그 나쁜 새끼 내 담배 통째로 가져갔단 말이야!"

 "뭐 들었어 멍청아. 그 뼈밖에 없는 인간한테 대장이 혹할 리 없잖아. 그 녀석 구하러 가자고 그 녀석!"

 "남자랑 동침했다던 걔?"

 

 서로 웃고 떠들기에 정신없는 부대원들은 이미 칸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좀처럼 진지해지질 않는 그녀들을 보며 칸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곧 단호한 명령이 되어 떨어졌다.

 

 "5분 내로 출발준비 마치고 대열로 복귀해라. 지금 바로 움직여."

 

 

 .............

 

 

 레프리콘은 막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자 막사 입구 옆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빨고 있는 지휘관이 보였다. 레프리콘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더니 곧 보급창고로 발을 옮겼다.

 

 지휘관이 실실 웃으며 레프리콘의 뒷모습을 훑었다.

 

 "쟤도 몸이 참 괜찮아 보인단 말이지."

 "뭘 보고 계신 겁니까?"

 

 어느새 막사 밖으로 나온 마리의 말이었다. 지휘관은 태연하게 담배를 빨며 대답했다.

 

 "네 부하 엉덩이 보고 있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적인 욕망은 자제해주시죠."

 "그러고 싶은데 말이야. 너희들은 하나 같이 몸이 잘 빠졌으니까. 게다가 딱 달라붙는 전투복까지 입고 있고. 솔직히 노리고 만든 게 분명하잖아."

 "노리다뇨?"

 "네들이 군인이든 아니든 돈 받고 팔 상품인 건 분명하고, 야한 것만큼 돈 벌기 쉬운 옵션도 없거든."

 "지휘관님도 저희를 상품으로 보십니까?"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네들을 누가 사가겠냐. 침울한 브라우니에 인간 욕하는 미친 레프리콘이랑 조곤조곤한 마리, 이게 스틸라인이냐? 죄다 나사 빠진 불량품들이지. 앙헬이 뒷목잡고 쓰러질 판이다."

 

 마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실망을 왜 해 내가. 나도 하자가 넘치는 인간인데. 딱 주제에 맞는 곳에 떨어진 거지 뭐."

 

 그는 고요한 폐허를 보며 천천히 연기를 뿜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뒤덮인 난장판 속에 군데군데 병사들을 숨겨놓고, 그 급조된 진형을 전선이라 불렀다. 분명 주어진 조건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어진형이었으나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그것밖에 남은 게 없었다.

 쥐어짤 대로 짜낸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지휘관은 피곤한 눈을 몇 번 비비며 물었다.

 

 "나 보내줘도 되냐?"

 "문제 없습니다."

 "윗놈들이 나 여기에 붙잡아두라고 안 하던? 천하의 마리가 명령불복종을 다 하네."

 

 마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인류에게 더 도움이 될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지휘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노예 아니랄까봐. 이 지경이 되도 인간님 타령을 하고 있네. 네들이 언제부터 그런 거창한 걸 위해 싸웠냐. 네들 회사 사장 말 따라 싸웠지."

 "지금은 인류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인류가 없으면 저희 또한 존재의의가 없습니다."

 "그 인류란 놈들이 네들 머리 위로 핵 떨구기로 했던 걸 알고도 그 소리를 하냐."

 

 마리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게 제 역할입니다. 부하들의 목숨을 탄환으로 삼아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었죠.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주인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고, 그 희생을 위해 저희 바이오로이드가 만들어졌으니까요."

 

 지휘관이 담배로 참호 속에 숨어있는 브라우니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 브라우니들한테 지들 주인 얼굴 아냐고 물어봐. 누가 주인이야? 총사령관? 앙헬? 누구 때문에 여기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지, 그 사람 얼굴은 안다냐? 말은 나눠봤고? 손은 또 잡아봤나?"

 

 그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주인도 주인 노릇을 해야 주인이지."

 

 마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휘관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어느새 필터 앞까지 담뱃불이 올라왔다.

 

 "분명 브라우니들은 어리석습니다."

 

 문득 마리가 말했다. 지휘관이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전선의 부하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다정하죠. 자신의 주인에 대해 고찰할 지성이 없더라도, 따뜻하게 살아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듯이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인간들에게 버려졌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을 겁니다. 머리로는 다르게 생각해도 마음으로는 느끼고 있겠죠. 이 전선에 남아있는 자매들 모두가, 저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쳐다보았다.

 

 "비록 값싼 물건일지라도 자신이 버려지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중하게 다뤄지고, 추억을 깃들이며, 오랜 시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와 함께 하고 싶겠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어서 가버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너희들."

 

 마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스틸라인이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았어도, 저희는 여전히 지킬 것이 있습니다."

 

 지휘관은 그녀의 황색 눈동자를 빤히 올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대충 지져 껐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싫어하는 거야."

 

 마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다시 한 번 전선의 부하들을 향한다. 미소가 녹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어렵군요. 더 이상 부하들에게 말하는 걸 미룰 수는 없습니다. 상부의 지시도, 앞으로 할 일도, 전부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도 이미 버림받았다는 걸 아는 부하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자살임무나 다름 없는 명령도 셀 수 없이 내려왔는데, 이상할 정도로 이번 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거야 네 사정이지. 그러게 진작 말하지 뭐했냐."

 "동감입니다. 질질 끌어봐야 해결되지도 않는 것을......... 핵병기를 쓰기로 했을 때부터 전 이미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비웃는다.

 

 "불굴의 마리란 이름이 울겠네. 겁만 잔뜩 먹었어."

 

 그가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목을 몇 번 주억거리던 그는 가슴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리에게 건넸다. 지도였다. 방금 전 칸과 마리에게 보여주었던 그 지도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지도를 받아 펼쳐보았다.

 손때가 잔뜩 묻은 종이 위에 전선의 현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 번진 펜 자국이 가득했다. 땀자국이 얼룩지고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수 천 번 접고 편 자국이 닳아있었다.

 

 지휘관이 이 전선에 처음 온 그 날

 종이지도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마리가 새것으로 마련해준 것이었다.

 

 "지금까지 잘 썼다. 케이프타운까지 퇴로 몇 개 그어놓았으니까 참고하려면 해. 어차피 네가 나보다 더 잘 짜겠지만."

 "이제 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의 핼쑥한 얼굴이 실실 웃는다.

 

 "필요할 거 같아?"

 "........."

 

 마리는 지도를 조심스럽게 접으며 말했다.

 

 "모두가 지휘관님을 잘못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게 안타깝습니다."

 "너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데?"

 "저는 항상 지휘관님께서 깨어계시길 원했습니다."

 "그럼 네가 틀렸네. 다른 애들 평가가 맞아."

 

 마리는 담담하게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지휘관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고개를 멈췄다.

 멀찌감치 떨어진 보급창고에서 실키마냥 묵직한 배낭을 멘 레프리콘이 나왔다.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지휘관과 눈이 마주쳤다. 지휘관이 살갑게 손을 흔들었으나 레프리콘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곧바로 대기 중인 호드를 향해 걸어갔다.

 

 "마리야, 그럼 나도 간다."

 

 지휘관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충 말하며 레프리콘이 가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의 얇은 등을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지휘관님께 행운이 있길 빕니다."

 

 지휘관이 손을 휙 들며 답했다.

 

 "그래. 나도 나한테 행운이 있기를 빌어."

 

 

 ...........

 

 

 하늘에 하얀 구름이 점점 많아진다.

 

 폐허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 위에 앵거오브호드의 부대원들이 대열을 이루고 서있다. 선두에 선 칸이 부하들을 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폐가의 그늘에는 레프리콘이 가방을 벽에 기대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휘관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삐딱하게 걸어온다. 레프리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지휘관이 그녀의 앞까지 다가오자 그녀가 무언가 건넸다.

 권총이었다.

 

 "뭐야 이건."

 

 지휘관이 권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만일의 상황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이걸로 철충한테 흠집이라도 내겠어?"

 "지휘관님의 고통을 줄이는데 유용할 겁니다."

 "아하."

 

 지휘관은 실실 웃으며 권총을 받아 허리춤에 꽂았다. 레프리콘은 그의 비어있는 두 손을 흘겨보았다.

 

 "담배는 벌써 다 피우셨나요?"

 "애초에 몇 개비 있지도 않았는데 뭘. 너는 뭐 장사라도 하려고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어?"

 

 지휘관이 레프리콘 옆에 놓여있던 큼직한 배낭을 턱으로 가리켰다.

 

 "대장님의 지시대로 지휘관님께서 일주일간 쓸 생필품을 챙긴 겁니다. 제대로 쓸 수 있을지는 지휘관님께 달렸죠."

 "낭비인 거 같은데."

 

 지휘관이 고개를 젓자 레프리콘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감입니다."

 

 지휘관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아가씨, 늦지 않았어. 여기 남아. 그렇게 싫어하는 인간 따라와서 뭐 좋을 거 있다고. 알잖아."

 "알죠. 하지만 마리 대장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마리는 실수하는 거야."

 

 레프리콘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답했다.

 

 "실수는 지휘관님께서 하고 계시겠죠. 마리대장님은 아무 의미없이 부하를 사지로 내몰지 않습니다."

 "나 따라오다 죽어도 그 말이 나오나 보자."

 

 비웃는 지휘관을 향해 레프리콘이 물었다.

 

 "지휘관님이야말로 왜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철충은 인간을 쫓고 인간은 나니까. 내가 미끼잖아?"

 "세상일은 어찌될지 모른다고 직접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지휘관님의 생각대로 되리라는 법은 없어요. 철충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가장 위험한 장소는 여기라고요."

 

 지휘관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미래가 어찌될지 모른다면,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 있는 편이 좋잖아."

 "죽어도 자매들 곁에서 죽으라는 겁니까? 당신은 누군가 살아남는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네요. 우리가 전부 죽어야 속이 시원합니까?"

 

 그 순간 레프리콘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다 싶었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지휘관은 딱히 반박할 기색도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그의 반응에 레프리콘은 더욱 열이 올랐다.

 

 "우리들한테 살아남으라고 말해줄 수 있잖아요. 이 전선의 유일한 인간이니까, 우리들 살아남을 거라고, 이길 거라고 용기를 줄 수 있잖아요. 상부의 인간들도 전부 우리를 버렸는데 당신마저 우리를 버리면 어떡합니까. 우리한테 티끌만한 관심을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우리한테 아주 조금만 따뜻해지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그럼 그게 쉽냐. 어렵지."

 "왜 당신은 계속 그 따위로만 말해요? 당신 눈 뜨는 것만 기다리면서 얼마나 많은 자매들이 죽었는데......."

 "내가 이길 거라 말한다고 진짜 이기는 거 아니잖아. 집어치우고 살 궁리나 하라니까."

 "우린 못 집어치운단 말이예요. 싸우라고 명령 받았으니까요."

 

 지휘관이 비웃었다.

 

 "아이고, 그걸 아는 분이 브라우니한테 살라고 말해서 살처분 당하게 만드셨어요?"

 

 레프리콘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지휘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서 넌 뭐 하나 구해본 적 있어? 주위에 있는 것들 다 뒈지게 만들어 놓고 자기만 속편하게 우리들한테 살라는 소리를 해?"

 

 지휘관이 고개를 휙 돌려 레프리콘을 쳐다보았다. 부릅뜬 눈에 명백하게 분노가 서려있었다. 역린을 찔린 용처럼 살기등등한 얼굴이었다.

 처음보는 그의 화난 모습에 레프리콘이 순간 놀란다. 그러나 곧 다시 피어오른 분노에 지휘관을 노려본다.

 두 강렬한 시선이 부딪히며 긴장감이 치솟았다.

 

 "쯧."

 

 지휘관이 혀를 차며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 속을 난폭하게 뒤져 담배갑을 꺼냈으나 속이 비어있었다. 그는 쌍욕을 뱉으며 빈 담배갑을 떨어뜨렸다.

 

 "아가씨 참 특이한 레프리콘이야. 대가리에 박아놓은 모듈이 실종됐나봐. 어떻게 인간한테 그렇게 말해? 어떻게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고? 이거 진짜 품질하자야. 폐기처분 대상이라고."

 "제 머릿속에 모듈이 박혀 있어서 이만큼이나 당신을 배려하는 겁니다. 아니었으면 당신은 진작 죽었어요."

 "아니 지가 지 브라우니 죽여 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야. 환장하겠네."

 "왜 당신 탓이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 목숨 살리자고 퇴각하다 다 죽은 건데. 당신 때문에 죽은 자매들이 몇 자리 수인지나 알고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건 뭐 군인도 아니고 바이오로이드도 아니고........"

 

 지휘관이 레프리콘을 힐끔 쳐다본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날카로웠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해? 머리 구조상 미워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당신밖에 없잖아요."

 

 레프리콘의 눈이 조금 달아올랐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휘관님만큼은 저희를 버리지 말아야죠. 저희 곁에 있어줘야죠. 소완 이야기가 진짜였다면, 소완한테 했던 반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저희를 신경써서 봐줄 수 있는 거잖아요."

 

 체념한 목소리에 깊은 원망이 실려있었다.

 

 "도대체 왜...... 저 브라우니들의 시커먼 눈빛을 보고도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실실 웃어대기만 해요?"

 

 지휘관은 말없이 레프리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입꼬리를 올려 웃으려다, 다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시선을 돌려 레프리콘을 외면했다. 그녀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문득 호드에서 워울프 하나가 다가오더니 지휘관과 레프리콘의 눈치를 본다.

 

 "왜 그래 둘이? 뭔 일 있어?"

 

 둘 다 대답이 없다. 워울프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엄지로 호드 대열을 가리켰다.

 

 "이제 출발할 거야. 준비 안 끝난 거 아니지? 어서 움직여. 대장은 뜸들이는 거 싫어하니까."

 

 

 ...........

 

 

 "음, 이거 안전한 거 맞지?"

 

 지휘관의 질문에 칸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니, 상당히 위험하다."

 "역시 그렇구나."

 

 그는 납득한 듯이 팔에 힘을 주어 칸의 목을 단단히 안았다. 칸도 지휘관의 비쩍 마른 다리를 고쳐안았다. 지휘관이 칸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업힌 형상이 꼭 코알라 같았다.

 칸의 긴 갈색머리카락은 움직이기 편할 만큼만 빼놓고 지휘관의 품속에 넣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실어달라고 한 건 지휘관 너다. 장갑차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쩔 건가. 만일의 상황에는 내가 직접 회피기동 할 수 있으니 차라리 이게 낫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지휘관이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호드 대열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운송을 맡은 부대원들이 중심에 서고 양옆으로 호위 대열이 붙은 형태였다. 그 중 가장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레프리콘을 등에 업은 퀵카멜이었다.

 정확히는 업힌 게 아니라 퀵카멜의 무장플랫폼에서 무기를 떼고 그 위에 레프리콘이 앉은 것이었다. 레프리콘은 예상외로 안정적인 승차감에 놀란 듯 했으나 그녀를 싣고 있는 퀵카멜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많은 워울프들 놔두고 왜 내가 업어야 하냐는 딱 그 표정이다.

 표정이 안 좋은 건 칸의 리볼버캐논, 기동칼날, 퀵카멜의 대포, 레프리콘의 짐을 나눠든 워울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짐꾼 대열에 선 그녀들에게 죄가 있다면 가위바위보에서 졌다는 것뿐이었다.

 

 퀵카멜이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레프리콘의 기관총을 보며 하소연했다.

 

 "대장~ 나는 화력지원 하는 게 더 적합할 거 같지 않아? 얘도 이렇게 가마탄 채로 쏘는 건 힘들 거고."

 "아니에요! 퀵카멜 대위님 등 무척 안정적이에요!"

 

 레프리콘이 칭찬한답시고 말했지만 퀵카멜은 날카로운 눈짓만 줬다. 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화력지원을 하는 시점에 이미 진 거다. 우리 목적은 철충을 죽이는 게 아니라 지휘관을 최대한 빠르게 옮기는 거야. 말했던 대로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속도만 생각해라."

 "이런 꼴이면 속도내려다 뒤로 자빠진다고!"

 "그래서 탄알도 최소한으로 적재하라고 했을 텐데. 네 평소 무장의 무게를 생각하면 레프리콘은 소총이나 다름 없어. 오히려 워울프한테 들라고 하는 게 무리다."

 "그치마안~"

 "게다가 낙타는 예로부터 좋은 운송수단이었지."

 "아오 진짜!"

 

 듣고 있던 지휘관이 피식 웃다가 퀵카멜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칸은 턱으로 위를 가리키며 진정하라는 듯이 말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걱정 마라. 장애물은 하늘에서 처리해줄 거다."

 -나 불렀어?

 

 통신장치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호드 부대원들이 고개를 드니 구름 낀 하늘을 선회하고 있는 조그만 점이 보였다. 완전무장을 한 채로 이륙한 피닉스187이었다.

 

 "부탁한다 피닉스."

 -걱정 마 칸 대장. 표적만 잘 표시해줘.

 

 퀵카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나도....... 나도 지원공격 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아니다. 표적지시탄을 가진 게 레프리콘밖에 없어.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너는 레프리콘이 잘 쏠 수 있게 최대한 보조해주는 역할이다."

 

 칸은 한탄하는 퀵카멜을 두고 레프리콘에게 말했다.

 

 "마리가 우수한 사수라고 칭찬하더군. 실망시키지 말도록."

 

 레프리콘은 잔뜩 힘이 들어간 얼굴로 답했다.

 

 "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와중에 그녀들의 무거운 짐만 나눠 든 워울프들은 심란한 얼굴로 입을 모았다.

 

 "우린 불평할 기회도 없는 거냐........"

 

 그때 칸에게 업혀있던 지휘관이 외쳤다.

 

 "야! 그거 배낭 필요 없어! 그냥 던져버려 여기 애들 쓰라고!"

 

 레프리콘의 배낭을 대신 짊어지고 있던 워울프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진짜?"

 

 그녀가 되묻자 레프리콘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건 마리대장님 명령으로 준비한 생필품-"

 "오예-!"

 

 레프리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워울프가 배낭을 벗어던졌다. 묵직한 가방이 폐허 위를 구르며 스팸통조림을 우수수 쏟았다. 레프리콘이 입을 떡 벌리고 버려진 배낭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곧 이글거리는 분노가 되어 지휘관의 뒤통수에 박혔다.

 배낭을 버린 워울프가 잽싸게 짐꾼 대열에서 빠졌다. 여전히 짐꾼 대열에 남은 워울프들이 도끼눈이 되어 노려보았다.

 

 "저 배신자........!!"

 

 바득바득, 이 갈리는 소리에 분노가 서려있다.

 

 칸은 등 뒤의 소란을 무시하며 지휘관에게 물었다.

 

 "진짜 괜찮겠나."

 "너는 저게 나한테 쓸모있을 거 같아?"

 "아니."

 "역시 칸이야. 대답이 빨라서 좋네."

 

 그녀는 지휘관을 고쳐 업으며 정면을 보았다.

 

 "이제 출발한다. 집중해라. 피닉스, 잘 보고 있겠지?"

 -당연하지.

 

 구름 아래로 날고 있는 피닉스가 지상을 살펴보았다. 잔해밖에 남지 않은 맘스베리와 맘스베리를 향하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쇳덩이들, 철충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철충을 보던 피닉스는 다시 맘스베리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반짝였다. 거울 같은 것에 비친 햇빛이었다. 그 손톱보다 작은 반짝임이 깜빡깜빡 점멸한다.

 피닉스187은 그것이 모스부호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벌레에게 불벼락을.

 

 짧고 간략한 메시지였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고민해볼 필요도 없었다.

 

 "행운을 빌게 선배들."

 

 피닉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칸에게 통신을 보냈다.

 

 -철충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게 훤히 보이네. 어서 출발하자고. 내가 영원히 하늘에 떠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칸이 기동장치에 시동을 걸었다. 다리외골격에 달린 엔진이 공회전을 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부하들도 동시에 기동장치를 켰다. 고요하던 전선에 강렬한 엔진소리가 날뛰었다. 전쟁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심장을 두드린다.

 폐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스틸라인 병사들이 고개를 내밀고 호드를 쳐다보았다. 시끄럽게 떠나려는 손님들에게 시선이 쏠린다.

 

 지휘관은 호드를 보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의 조그만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퀵카멜에게 업힌 레프리콘을 본다. 레프리콘1184, 마리는 그렇게 불렀었다. 그녀는 여전히 지휘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지휘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칸이 출발신호를 보내려할 찰나 그는 소리쳤다.

 

 "얘들아!"

 

 칸이 멈칫하며 지휘관을 보았다. 그는 홀쭉한 목으로 스틸라인을 향해 계속 소리쳤다.

 

 "저 가방 안에 든 거 다 스팸이다 스팸! 마리한테 허락 안 받아도 되니까 빨리 먹어라!"

 

 그 말을 들은 브라우니 몇몇이 침을 주륵 흘렸다. 곁에 있던 레프리콘들이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지휘관은 계속 소리쳤다.

 

 "지금까지 나 같은 놈 데리고 싸운다고 욕봤다! 그러니까 살아-"

 

 기세 좋게 말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목이 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을 찾던 그는 결국 실실 웃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레프리콘1184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휘관을 쳐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웃기만 했다. 본인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없이 멋쩍은 웃음이었다.

 

 칸이 지휘관에게 물었다.

 

 "끝났나."

 

 지휘관은 잠시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답했다.

 

 "그래. 가자."

 

 

 ...........

 

 

 저 멀리

 호드가 멀어져간다.

 

 마리는 팔짱을 낀 채 지평선을 응시했다.

 어느새 하늘을 채운 구름이 지상에 옅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그늘 속에 아주 멀리, 실루엣이 보인다.

 총알을 튕겨내는 강철피부와 벽을 뚫는 포탄을 지닌 괴물이

 천천히, 선고하듯이 다가오고 있다.

 

 "대장님."

 

 막사 옆에서 브라우니 하나가 다가왔다.

 지저분하고, 웃지 않는, 조용한 브라우니.

 마리는 그 브라우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브라우니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상관을 마주보았다.

 그게 멋쩍었는지 조심스럽게 웃는다.

 

 "하하, 왜 그렇게 쳐다보심까 마리대장님."

 

 그 옛날의 씩씩한 미소도, 용감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렇게 공허하게 웃고 있는 브라우니를 마리는 그저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래. 보고해라."

 

 그녀의 말에 브라우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무레스버그 방향에서 철충무리가 다가오고 있슴다. 중장갑으로 무장된 개체도 많이 보임다. 호드랑 지휘관님도 떠났지 말임다."

 

 그 짧은 말을 하는 사이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다 사라진다.

 

 "따로 지시할 사항 있으심까?

 

 말을 끝낼 때쯤에는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이 되었다.

 마리는 담담하게 부하의 시커먼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대답.

 그녀들에게는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자매들을 모두 소집해라. 전달할 사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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