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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맘스베리 외곽

 넓게 퍼진 콘크리트 잔해

 스틸라인 전선의 방어지점 중 하나.

 

 "지휘관님은 늘씬한 몸이 취향이었나 봄다."

 

 브라우니가 중얼거렸다. 옆에서 경계임무 중이던 레프리콘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피로가 두텁게 쌓여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그러지 않고서야 마리대장님 두고 칸대장을 따라갈 리 없잖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찔러보는 건데."

 

 브라우니가 두 손으로 쇄골에서 골반까지 자신의 몸을 쓸어내렸다. 브라우니 모델의 신체도 나름 글래머한 편이었으나 지휘모델인 마리에 비하면 초라했다. 당장 옆에 있는 레프리콘과 비교해도 열세,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건 땅딸막한 이프리트 모델 정도다.

 

 레프리콘은 한심하다는 듯이 브라우니를 흘겨보더니 다시 총구로 시선을 돌렸다. 무너진 콘크리트벽 틈으로 내민 총구는 저 멀리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향하고 있었다.

 구름 낀 하늘 아래 거인처럼 다가오는 먼지구름이 엹은 햇빛을 받는다. 먼지구름의 바닥에 알갱이처럼 작은 햇빛이 반짝반짝 반사되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육중한 발을 내딛는 강철덩어리들.

 철충이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적의 군세를 보고도 레프리콘은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지친 눈커풀은 이미 충분히 무거웠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한 나절?

 한 시간?

 몇 십 분?

 어찌되든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그녀는 오늘밤 별을 못 볼 것이며, 브라우니의 바보 같은 입담도 더는 듣지 못 할 것이다.

 

 레프리콘이 침묵하자 브라우니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농담이었슴다."

 

 브라우니의 처량한 목소리에 레프리콘이 힐끔 시선을 줬다.

 

 "재미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이 다시 총구를 향한다. 더욱 풀이 죽은 브라우니는 세워놓았던 총을 쥐고 경계임무로 돌아갔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른 브라우니가 슬그머니 말한다.

 

 "꽁쳐놓은 스팸 하나 남아있는데."

 

 풀이 죽어있던 브라우니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진짜?"

 

 레프리콘이 고개를 휙 돌리며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만 좀 꽁쳐놓으라고 했잖아요. 대장님한테 들키면 어쩌려고요? 브라우니871처럼 되고 싶어요?"

 "하지만 이대로 두면 아무 소용없지 않슴까. 어차피 지금 안 먹으면 먹지도 못 할텐-"

 

 브라우니가 아차 싶어 말을 삼켰다. 그러나 레프리콘의 얼굴에는 이미 그늘이 가득했다. 다른 브라우니도 어색하게 웃기만 한다.

 주머니 속에 스팸을 만지작거리던 브라우니는 쓴 침을 삼켰다.

 

 내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들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원병력은 없다.

 돌아갈 곳도 없다.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라는 것을,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그저 마리가 아직 말해주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그녀들은 애초에 희망이라는 것을 품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들은 애초에 절망할 일이 없었다.

 

 앞만 보고 계속 나아가다 죽는 순간에야 멈추는 것. 그것이 공장에서 출하되는 순간 그녀들에게 부여된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다.

 곧 다가올 당연하고 마땅한 미래 앞에서

 자매들이 모두 말이 없어지는 것을.

 실없는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애정어린 핀잔이 사라지고, 넘쳐나던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진짜-"

 

 레프리콘이 표정을 찌푸리며 침묵을 깼다.

 

 "잘 숨어서 먹어요. 걸리지 말고요."

 

 두 브라우니의 표정이 꽃처럼 피었다. 그녀들은 다람쥐만큼 잽싸게 벽 뒤로 숨어들어 스팸을 꺼내들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방어지점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말한다.

 

 "레프리콘 상병님 먼저 한 점 하시지 말임다."

 

 레프리콘은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총구를 쳐다보았다.

 

 "됐어요. 망 봐줄 때동안 빨리 먹기나 해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슴다?"

 "됐다니까요! 걸려서 저까지 구르면 나중에 스팸으로 쳐맞을 줄 알아요!"

 "헤헿."

 

 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두 브라우니가 스팸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총구만 보고 있던 레프리콘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녀들은 잃고 싶지 않았다.

 실없는 웃음소리, 애정어린 핀잔, 넘쳐나는 표정.

 세 명의 브라우니와 한 명의 레프리콘.

 

 그녀들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들이 가진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문득 레프리콘이 귀에 꽂힌 수신기에 집중했다. 브라우니들은 스팸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이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잠시 후 레프리콘이 말했다.

 

 "마리대장님 명령입니다. 집합이에요."

 

 그제야 다람쥐처럼 뺨을 가득 채운 브라우니들이 고개를 들었다. 둥그렇게 뜬 눈이 공포에 질려있다.

 

 

 ..................

 

 

 위이이이이잉-

 기동장치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드가 질주한다.

 지휘관을 엎고 달리는 칸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호위대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빈 도로를 전세낸 것처럼 가득 채우고 나아가는 호드의 뒤로 먼지바람이 꼬리를 그렸다.

 

 몰아치는 바람이 지휘관의 얼굴을 거세게 할퀴었다. 그는 어미에게 매달리는 원숭이마냥 안간힘을 쓰며 칸의 등에 밀착했다. 그녀의 등은 작았지만 강철처럼 단단했다.

 

 "힘든가?"

 

 칸이 태연하게 물었다. 그녀는 지휘관을 엎은 채로 움직이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야 빠르긴 진짜 빠르구만. 괜히 호드가 아니야."

 

 지휘관의 힘겨운 목소리에 칸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바이크 안 타봤나?"

 "그건 헬멧을 쓰고 탔었지."

 "헬멧이 없어서 미안하군.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 이보다 훨씬 빨라질 거다. 여유가 있을 때 숨쉬는 연습을 해둬라."

 "후읍 하! 후읍 하!"

 

 그가 요란하게 숨쉬는 소리를 냈다. 칸은 헛웃음을 짓고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호드 전체가 그녀를 따라 속도를 높인다.

 

 -1시 방향 4km 거리에서 접촉예상. 놈들은 아직 별다른 반응 없어.

 

 상공에서 엄호 중인 피닉스의 통신이었다. 칸은 지휘관을 고쳐엎으며 말했다.

 

 "준비는 됐겠지. 네가 부탁한 심부름이니 후회하지 마라."

 "잘 부탁해."

 

 지휘관은 전혀 위기감 없는 말투로 답했다. 칸은 콧소리를 한 번 내더니 호드 전체회선을 켰다.

 

 "모두 집중해라. 곧 적과 접촉한다. 공격이 거셀 테니 침착하게 움직여라."

 

 지휘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퀵카멜에게 업힌 레프리콘이 보였다. 그녀는 못 마땅한 얼굴로 앞을 보라는 눈짓을 줬다.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비쭉 내밀었다.

 레프리콘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진다.

 

 

 ..............

 

 

 "전부 모였슴다."

 

 마리 7호는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옆을 보니 브라우니 하나가 서있었다.

 

 "말씀하신대로 경계근무 인원까지 전부 집합시켰슴다. 괜찮슴까?"

 "그래. 레드후드가 없어서 널 고생시키는군. 수고했다."

 

 대장의 칭찬에 브라우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리는 브라우니의 작은 미소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망원경을 들어 다가오는 철충무리를 향했다.

 마리를 올려보던 브라우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집합했는데, 안 가심까?"

 "하나만 확인하고 갈 거다. 철충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바뀔 테니까."

 "바뀌다니, 뭐 말씀이심까?"

 

 마리가 브라우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진한 눈동자로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것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무언가가 바뀔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는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 무언가 할 말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드의 작은 먼지구름이 철충군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다 속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빗물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지휘관님과 호드가 철충을 유인할 거다. 철충이 지휘관님을 따라간다면 우린 전선을 보강하거나 이동할 기회를 얻는다. 반대로 철충이 지휘관님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온다면, 이미 우리 뒤쪽에 있는 요새를 감지했다는 의미이니 상부에 보고하고 후퇴를 요청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움직일 수 있겠지."

 

 브라우니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진짜임까? 그런데 지휘관님 휩노스 아니었슴까? 그렇게 위험한 작전을 할 수 있슴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 하신 걸 거다."

 "하하, 그냥 저희 버리고 도망가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겠슴까."

 

 마리는 다시 브라우니를 보았다. 브라우니는 웃고 있었다. 말을 잘못했다는 기색은 없었다. 자신의 말이 진리라는 듯이 확신하고 있었다.

 인간을 위해 태어나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끝내는 반드시 버림받는다. 모든 '물건'이 그렇듯이.

 그 과정이 변할 리가 없다. 아무리 바보인 브라우니라도 그 당연한 사실은 알고 있다.

 그녀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

 

 마리는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너희를 모은 거다."

 

 그녀는 다시 망원경을 보았다.

 

 망원경의 광학렌즈 안

 저 멀리

 그녀들을 버리고 간 인간이 철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철충을 향해 달리는 호드.

 퀵카멜에게 업혀있던 레프리콘이 물었다.

 

 "퀵카멜 대위님. 안 무거우세요?"

 

 퀵카멜은 여전히 못 마땅한 표정으로 답했다.

 

 "날 뭘로 보고. 평소에 내 무장이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너 정도는 걸리는 느낌도 없다고."

 "그,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레프리콘이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철충무리가 만든 거대한 먼지구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긴장돼?"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기관총을 쥔 레프리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퀵카멜은 레프리콘의 기색을 살피려다 말았다.

 

 "맘 편히 먹으라는 말은 안 할게. 네 실력에 우리 목숨이 달린 건 사실이니까."

 "네. 꼭 잘 하겠습니다."

 "내가 못 쏜 만큼 네가 쏴. 너한테 내 자매들을 부탁하는 거야 지금."

 

 레프리콘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 할게요."

 

 퀵카멜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우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부담갖지는 말고. 여기서 널 탓할 애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레프리콘이 힐끔 뒤를 보았다.

 

 "퀵카멜 대위님."

 "왜."

 "스틸라인은 괜찮을까요."

 "글쎄."

 

 레프리콘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무레스버그가 무너진 뒤로 다들 힘이 없었어요. 저희들도, 브라우니들도, 마리대장님도......... 만약에 이 유인작전이 실패한다면 제 자매들은-"

 "맘은 알겠는데 지금은 우리들한테 집중해줘. 지금 네 자매들은 우리야. 네가 지켜야 할 건 우리라고. 그게 중요한 거야. 네 하나뿐인 총이 흔들리면 안 돼."

 

 맞는 말이었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 희망이 생긴다. 그래서 너를 보낸다고, 마리7호는 말했었다.

 

 "죄송해요."

 

 레프리콘의 눈빛이 철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각오는 했습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퀵카멜은 그제야 슬쩍 웃었다.

 

 "그리고 너무 걱정 마. 스틸라인이 얼마나 끈질긴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마리대장도 우리 대장만큼은 아니지만 무시무시한 바이오로이드라구."

 "그렇죠? 역시 마리대장님은 굉장하죠?"

 "그래. 우리 대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때였다.

 

 "전원 집중. 2시 방향, 2분 내로 철충의 사거리에 접한다. 신호에 맞춰 즉각 행동해라."

 

 칸의 목소리에 퀵카멜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레프리콘도 감각을 쫑긋세우고 정면을 경계했다.

 주위에서 떠들던 워울프들도 순식간에 침묵했다.

 

 이이이이이이잉-

 구름그늘에 덮인 도로 위에 기동장치의 소리만 시끄럽게 울렸다.

 

 칸에게 업혀있던 지휘관이 고개를 들어 철충군집을 향했다. 칸이 칼처럼 지적했다.

 

 "위험하다. 고개 숙여라."

 "이래야 잘 보일 거 아냐. 쟤네들 나 보이려나 몰라."

 "답은 녀석들이 줄 거다. 그러니 고개 숙여."

 

 지휘관은 칸의 충고를 무시한 채 철충이 보일 방향을 계속 응시했다.

 호드가 달리는 도로와 2km정도 떨어진 다른 도로 위로 두터운 먼지구름의 뿌리가 보였다.

 얉은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반사광이 모래알처럼 넓게 퍼져있다.

 전성기의 인류조차 채우지 못 했던 16차선 국도가 시커먼 금속생명체와 먼지구름으로 가득 차있던 것이었다.

 

 아직 거리는 멀었다.

 지휘관의 시력으로는 먼지구름 속에 숨은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직감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그는 무언가 낌새를 차린 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벌레새끼들."

 

 그 경멸의 한 마디와 함께

 

 시작했다.

 

 먼지구름 속

 햇빛으로 번쩍이던 반사광이, 일제히 붉은 빛으로 돌변한다.

 인류의 피를 뒤집어쓴 쓰나미마냥 새빨간 섬광으로 먼지구름이 타오른다.

 그렇게 건너편 도로가 한 순간에 붉은 빛으로 가득 차는 순간-

 

 -온다! 조심해!

 

 피닉스가 외쳤다. 칸은 왼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며 명령했다.

 

 "숙여라."

 

 그 짧은 한 마디만으로 모든 워울프와 퀵카멜이 약속이라도 해둔 듯이 동시에 움직였다. 호위열과 운송열이 교차하며 위치를 바꾸는 것과 동시에 칸과 같은 방향으로 진로를 틀어 충돌방지턱 너머로 뛰어오른다. 호드 전체가 눈깜짝 할 사이에 도로밖으로 나왔을 때는 호위열이 오른쪽으로 몰려 운송열과 철충 사이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콰과광! 쾅! 콰광!

 

 천둥구름이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탄환이 쏟아졌다. 불과 3초 전에 호드가 달리던 도로가 순식간에 갈려 부스러지며 하늘로 치솟았다. 천 미터를 날아온 대구경 금속탄이 아스팔트를 뚫고 땅을 깨부쉈다. 도로 외곽의 충돌 방지 난간이 종잇장처럼 찢겨 날아갔다. 폭죽처럼 요란하게 터져오르는 흙먼지가 호드의 뒤를 따랐다.

 

 뒤통수 너머가 돌 나무 할 것 없이 순식간에 박살나는 통에 지휘관은 칸에게 들러붙어 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칸은 태연한 얼굴로 지휘관을 고쳐업으며 자세를 낮췄다. 그 가는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가 낮아진다.

 

 "전원 산개. 이대로 철충과 거리를 벌린다. 호위 2조가 앞으로."

 

 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완전무장한 퀵카멜과 워울프 둘이 속도를 높여 선두에 섰다. 다른 부대원들은 넓게 퍼지며 선두에 선 그룹을 따라갔다.

 

 쾅 쾅 콰광!!

 호드의 뒤를 매섭게 따라오던 포탄세례가 점점 멀어져간다. 이내 호드가 완전히 사거리 밖으로 빠져나가자 더 이상 총알이 날아오지 않았다.

 지휘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숨을 뱉었다.

 

 "워우 야 살벌하다. 최전선은 뭔가 다르네!"

 "안 끝났다. 고개들지 마라."

 "뭐?"

 

 그가 묻기 무섭게 피닉스가 외쳤다.

 

 -미사일!

 

 지휘관이 고개를 휙 돌려 하늘을 보았다. 철충을 감싼 먼지구름 안에서 수십 개의 별이 치솟았다.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르던 섬광들은 곧 호드를 향해 떨어지는 별똥별이 되었다.

 눈이 둥그래진 지휘관이 악을 쓰며 칸을 끌어안았다.

 

 쾅! 쾅! 쾅! 쾅!

 미사일 세례가 정신없이 지면을 강타했다. 지각이 발작한 것마냥 지진이 일어났다. 사방에서 흙과 열기가 튀고 고막이 떨린다. 지휘관의 나 살려라는 외침도 폭발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칸과 호드 대원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여유롭게 폭발을 피했다. 기동장치의 가속과 선회가 너무 부드러워 우아하게 보일 정도였다. 호위조로 붙은 워울프 몇몇이 우는 소리를 하는 지휘관을 보며 깔깔 웃어댔지만 이 또한 폭발음에 삼켜졌다.

 

 이내 로켓공격에서도 빠져나온 호드는 전열을 재정비하며 속도를 높였다. 이제 속도를 낮출 틈따위는 없었다.

 더 빠르게, 더더욱 빠르게, 적들의 품속을 향해 도망칠 일만 남았다.

 

 "피닉스, 철충의 움직임이 확인되나?"

 -좋아. 움직이고 있어. 녀석들이 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녀의 말대로, 도로를 따라 맘스베리를 향해 나아가던 철충군집은 댐이 무너진 것마냥 서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철충에 감염된 AGS들의 시커먼 다리가 도로의 방지턱을 무참히 짓밟고 외곽으로 쏟아져나왔다. 조그만 폴른형 철충부터 중장갑 빅칙까지 일제히 방향을 틀어 도로를 벗어났다.

 

 "그럼 됐지! 어서 가자 야!"

 

 지휘관이 힘든 건 다한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칸은 슬쩍 미소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퀵카멜에게 업힌 레프리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공한 거군요. 저희가 성공했어요. 성공했어요 마리대장."

 

 퀵카멜의 미간이 팍 일그러진다.

 

 "고생길이 훤해졌는데 속편한 말을 하네. 몇 분만 지나면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올 걸."

 "그래도 스틸라인 자매들을 구했으니까요."

 "그럼 이제 우릴 구해주지 않을래."

 "물론이죠!"

 

 레프리콘이 힘차게 답했다. 퀵카멜은 그 대답이 꽤나 맘에 드는 표정이었다.

 

 그때

 

 -잠깐, 뭔가 이상해.

 

 피닉스의 통신.

 일순간 호드의 신경이 칸 쪽으로 쏠린다.

 레프리콘의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이 감돈다.

 지휘관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응?"

 

 칸이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뭐지 피닉스?"

 -철충이 여전히 맘스베리를 향하고 있어! 남하하고 있다고!

 

 피닉스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칸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녀석들은 우리들을 쫓아 방향을 틀었다고 하지 않았나."

 -철충무리가 둘로 나뉘었어. 일부가 네들을 쫓고 나머지는 그대로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중이야.

 

 그제야 칸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네 배달부탁이 꼬인 모양이군 지휘관."

 

 그녀의 말에 지휘관은 혀를 찼다.

 

 "아 씨, 이걸 생각 안 한 건 아닌데........."

 

 이마를 문지르며 신음하던 그는 피닉스에게 물었다.

 

 "철충물량이 어느 정도 비율로 갈라졌어?"

 -일단 눈으로 보기에는 반반이야. 너희 쪽으로 반. 맘스베리 쪽으로 반.

 "알았어. 계속 보고 이변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

 -알겠어.

 

 칸이 곧바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할 게 뭐 있어. 놈들이 이미 요새를 감지했다는 뜻이잖아. 이참에 처박혀 숨어있던 놈들 다 죽어버리라지. 어차피 휩노스로 죽을 거 식량 축내지 말고 빨리 죽으라고 해."

 

 지휘관은 눈치도 안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눈에 짜증이 가득하다. 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지? 이대로 가다간 철충에게 포위된다. 이미 실패한 작전이라면 신속하게 빠져야할텐데."

 

 지휘관은 이마를 몇 번 두드리더니 잠시 후에 대답했다.

 

 "아니, 아냐 우리는 이대로 계속 가. 나는 배달해줘야지. 너도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내 부탁들어준 거 아냐."

 "그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애초에 네가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아. 철충이 반만 따라온다고 해도 천 마리다. 지금 우리쪽으로 유인하는게 요새쪽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어."

 "지금 철충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긴 한 건가 지휘관?"

 

 지휘관은 또 한 번 한숨 소리를 냈다.

 

 "내가 저 벌레새끼들 대가리에 뭔 생각이 있는지 어찌 알겠냐. 그냥 어림짐작으로 때려맞추는 거지."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칸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놈들이 네 예상과 다르게 움직인 이유가 뭔지도 때려 맞출 수 있나?"

 

 지휘관은 눈을 질끈 감고 몇 초동안 생각에 빠졌다. 손가락이 초조하게 이마를 두드린다.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지은 그는 고개를 돌려 맘스베리쪽을 쳐다보았다.

 

 ".........."

 

 맘스베리를 보는 지휘관의 눈빛에 초조함이 가득하다.

 그가 침묵하자 칸은 더이상 철충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았으므로, 다른 말을 했다.

 

 "의외군. 바이오로이드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인간이었나."

 "관심은 뭔 얼어죽을 관심."

 "무시하지 마라. 호락호락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다. 알아서 판단할 거다."

 "알아서 하긴 개뿔이. 노예근성만 빡빡하게 차있-"

 

 갑자기 지휘관의 눈이 풀린다. 시야가 급하게 흐려지며 균형감각이 사라진다.

 그가 실이 끊긴 인형마냥 뒤로 넘어가려 하자 칸이 번개 같은 반사신경으로 그의 몸을 고쳐업었다.

 

 "지휘관!"

 

 좀처럼 목청을 높이지 않던 칸이 호랑이처럼 소리질렀다. 미사일도 웃으며 피하던 호드 대원들이 깜짝 놀라 칸을 쳐다보았다.

 정작 당사자인 지휘관은 멍한 얼굴로 손만 휙휙 휘둘렀다.

 

 "괜찮아. 잠깐 졸았다. 잠깐."

 "졸았다고?"

 "피곤해서 그래 그냥. 나 원래 육체파 아닌 거 알잖아."

 

 하아암-

 늘어지는 하품을 한 번 한 지휘관은 다시 능글 맞은 얼굴을 되찾았다.

 칸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쓰러지려면 앞쪽으로 쓰러져라."

 

 지휘관은 대답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졸린 시선이 힘겹게 지평선을 쳐다본다. 그 너머 어딘가에 맘스베리가 있을 것이다.

 

 지휘관을 걱정스럽게 살피던 레프리콘도 고개를 돌려 맘스베리쪽을 향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불안한 침묵이 차올랐다.

 

 

 ............

 

 

 2천 기의 철충 중에 절반이 지휘관을 쫓아갔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맘스베리를 향해 남하하는 중이다.

 철충이 남하한다는 것은 케이프타운에 숨은 인간을 감지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남하하는 철충이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은 그곳에 숨어있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어느 정도의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 했다는 의미다.

 

 즉, 녀석들은 아직 요새의 존재를 모른다.

 모른다면, 계속 모르게 해야한다.

 

 그게 그녀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다.

 

 마리 7호는 망원경을 내렸다.

 옆을 보니 여전히 브라우니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마리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 불만이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됐다. 가자."

 

 마리가 앞장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브라우니가 그 뒤를 쫄래쫄래 뒤따랐다.

 막사가 설치된 콘크리트 잔해 아래로 내려오자 지저분한 공터에 모여있는 스틸라인 병사들이 보였다.

 

 브라우니 277기, 레프리콘 119기, 실키 13기와 이프리트 3기, 그리고 피닉스 8기.

 마지막으로, 마리 자신, 1기.

 이 전선에 남아있는 전투원 전부였다.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던 대열이 마리를 보자마자 각을 잡고 정렬했다.

 약간 높은 위치에서 보면 그 많은 병사들 중 누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외로 잘 보인다. 대열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예로 몸에 힘을 준 브라우니 몇몇의 얼굴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게 마리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브라우니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보통 다 거기서 거기였고, 숨기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마리는 굳이 그녀들에게 스팸의 짠내가 나는지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짠내가 나더라도 지금은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부터 할 말은 그 모든 것들을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 테니까.

 

 마리 7호는 막사 앞에 서서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팔짱을 낀 채, 흔들림 없는 강인한 표정으로 말했다.

 

 "쉬어. 편한 자세로 들어라."

 

 그 말에 피닉스들이 곧바로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나 다른 보병들은 눈치만 볼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리는 굳이 쉬라고 강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수행할 작전은 '쥐덫작전'이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철충과 교전하며 발을 묶어두는 동안 둠브링어 전략폭격팀이 열핵병기를 투하하는 작전이다. 우리가 철충의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무력화하면, 나머지는 열핵병기가.........."

 

 병사들은 마리의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속닥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리를 빤히 쳐다본다.

 마리는 부하들을 무표정한 얼굴을 훑어보았다.

 

 "투하될......."

 

 그녀의 입이 멈춘다.

 대장의 말이 멎었지만 부하들은 여전히 동요하지 않는다.

 앞내용에 놀라지도 않았고 뒷내용에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그럴 것 같았던 대로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녀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

 

 말해야 한다.

 인간이 그녀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그것이 왜 취소되었는지.

 취소된 결과 어떤 명령이 내려졌는지.

 

 수많은 자매들을 희생시키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끝에

 왜 이렇게 버려졌는지.

 

 그녀들은 알 권리가 있다.

 이미 알고 있더라도.

 

 그러니 마리는 말을 해야한다.

 

 말을 해야 한다.

 

 "작전 시행은 언제지 말임까?"

 

 마리 옆에 서있던 브라우니가 물었다.

 마리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침묵이 계속 되자 브라우니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주눅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마리가 브라우니에게 손을 뻗었다.

 브라우니가 눈을 질끈 감으며 움츠러들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지저분한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브라우니가 의아한 얼굴로 마리를 쳐다보았다. 집합해 있는 부하들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먼 미래에-"

 

 마리는 꿈을 꾸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지금의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간이 있다면........."

 

 마리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내일이 없다는 건 그곳의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인간은 우리를 위해 웃어줄지도 모른다. 우리를 위해 울며 슬퍼해줄지도 모른다. 적을 죽이라는 명령 대신, 살아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릴지도 모른다."

 

 브라우니를 쓰다듬는 손이 멈췄다.

 

 "그 미래에는, 나 대신 그 인간이 제군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겠지."

 

 그녀는 손을 거두고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 미래를 포기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미래로 가는 길을 열고 싶어."

 

 그녀는 물었다.

 

 "제군들은 어떻지?"

 

 대답이 없었다.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는 자신의 옆에 서있던 브라우니에게 물었다.

 

 "브라우니 871호, 어떤가? 귀관은 내가 말한 미래를 위해 싸워줄건가?"

 

 그제야 무표정하던 브라우니가 멋쩍게 웃었다.

 

 "마리대장님이 명령하시면 언제든지 싸울검다. 하지만....... 인간님들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 말임다. 마리대장님이 말씀하신 미래는, 저는 잘 모르겠슴다."

 

 마리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지휘관님께서 왜 떠났는지 알고 있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 같은 위압감이 없었다. 온화한 질문에 브라우니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지, 지휘관님은........ 지휘관님도 저희를 버리고 가신 것 같지 말임다."

 "그래. 정답이다. 지휘관님께서는 전선을 벗어나지 말라는 상부의 명을 어기고 호드와 함께 떠나셨다. 떠나실 때 직접 말씀하셨지. 전장에서 도망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바이오로이드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락하게 살 거라고 하셨다."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여전히 별 감흥이 없었다. 전황이 절망적일 때 도주하거나 자살하거나 쾌락을 탐하는 건 어느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전선에 파견된 인간 지휘관은 모두 그러했다.

 그런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가 잔잔하게 흐를 때 마리는 그 위로 조약돌을 던지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왜 지휘관님께서는 북쪽으로 향하신 걸까. 왜 철충이 가장 많은 쪽으로 가신 거지?"

 

 그녀는 다시 한 번 브라우니 871호를 보았다. 답을 요구하는 상관의 눈빛에 브라우니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모르겠지 말임다."

 "우리는 철충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한 점을 안다. 철충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철충을 전선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건 이 전선에 지휘관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지."

 

 마리의 손가락이 철충무리가 만든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그리고 지금 지휘관님은 저 철충 옆으로 이동하고 계신다."

 

 듣고 있던 피닉스가 비웃는 투로 물었다.

 

 "대장, 지금 그 남자가 철충을 유인하러 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우리를 위해서?"

 

 그 말에 스틸라인의 부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묵묵한 표정이 무너지고 의심과 의아함이 부풀었다.

 조금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도 마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봐야 군법에 걸릴 테니 이판사판으로 간 거 아냐?"

 

 스틸라인의 병사들이 동조하는 눈빛을 보낸다. 마리는 그 눈빛이 무엇인지 안다.

 인간을 사랑하게 만들어졌기에 인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때의 눈빛.

 원망과 불신과 간절함이 뒤섞여 애증이라는 눈동자가 되었다.

 

 지휘관이 종이지도가 필요하다고 할 때, 마리도 그런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귀관, 휩노스에 대해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피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왜? 그거 모르는 애들이 어디 있어? 지금 인류를 박살내고 있는 주범인데."

 "휩노스에 걸린 자가 어떻게 되나?"

 "악몽을 꾸지. 악몽을 꾸고, 악몽을 꾸다가, 또 악몽을 꾸고, 그렇게 죽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류는 휩노스를 극복하려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내가 듣기로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지휘관님도 마찬가지지. 휩노스에 걸리셨고, 극복하지 못 하셨다.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이 조만간 지휘관님께도 똑같은 결말이 찾아오겠지. 지휘관, 그 남자는 애초에 도망 따위 칠 수 없었다. 우리들처럼."

 

 피닉스의 눈이 조금 커진다.

 눈치가 빠른 레프리콘 몇몇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휘관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를 생각해주는 인간이 있다면, 내가 말한 '미래'도 그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거다."

 

 고요함은 깨졌다.

 한 인간이 그녀들에게 선행을 베풀었을지도 모른다. 이 추측 하나만으로 스틸라인의 전투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놀라고, 의심하고, 안타까워하고, 격분했으며, 기뻐했다.

 정작 지휘관 본인이 이 모습을 봤다면 노예근성이라 욕하며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선행,

 동정심에서 나온 우발적인 선행,

 심지어 의도치 않은 우연적인 선행일지라도,

 

 그녀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제군들."

 

 마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부하들의 이목을 끌었다. 소란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가식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지휘관의 유인작전은 실패했다. 우리는 여기서 철충을 막아야 한다. 후퇴는 없을 거다. 지원도 없을 거다. 이길 방법도, 없을 거다."

 

 그녀의 손이 부대원들을 향한다. 흙먼지가 조금 묻은 장갑을 쓴 커다란 손이다.

 

 "하지만 여기서 철충을 1초 막을 때마다 요새의 인류와 자매들은 1초의 시간을 얻는다. 그 1초가 미래를 바꿀 기적이 될지도 모르지. 그 1초 덕분에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를 아껴주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꾸욱, 손이 주먹을 쥔다.

 

 "물론 제군들이 그런 미래를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차피 우리는 인류가 싸우라는 곳에서 싸우고, 죽으라는 곳에서 죽는다. 그러니 제군들에게 함께 싸워주겠냐고 묻지도 않을 거다."

 

 그렇다. 어차피 그녀들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선택권을 줄 수도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해답을 찾으려해도,

 그녀들은 바이오로이드다.

 

 그렇기에 마리는 소망했다.

 

 "나는 그저 싸울 이유를 주고 싶었다. 제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해주고 싶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목소리에 한 순간 과하게 힘이 들어갔다.

 

 "내가, 나 불굴의 마리 7호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또 말이 막혔다.

 수 십 번, 수 백 번, 부하들에게 말하리라 각오를 다져왔음에도, 이렇게 실패했다.

 지휘관의 말이 맞았다.

 불굴의 마리란 이름이 아까웠다. 그녀는 겁에 질려있었다.

 자신과 부하들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부하들을 죽여왔는데, 그게 결국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

 그렇게 아무 의미없게 죽는 걸 본인들이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

 

 더 이상 웃지 않는 브라우니를 볼 때마다

 마리는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두려웠다.

 

 "대장님."

 

 옆에 서 있던 브라우니 871호가 불렀다. 침묵하고 있던 마리가 시선을 돌렸다.

 브라우니는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기 많은, 그 생각 없어 보이는 웃음이다.

 

 "저는 미래처럼 멀리 있는 거 모르지 말임다. 하지만 대장님이 그 미래를 갖고 싶으시다면, 제가 싸워드리겠슴다. 적어도 저는 그걸로 충분함다."

 "........."

 

 마리는 대답을 못 했다. 그녀의 강인한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대답할 말을 찾으려는 듯이,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부하들을 쳐다본다.

 모두가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받아들인 표정으로,

 하지만 무언가 해내겠다는 그런 표정으로.

 

 마리는 망가지려는 표정을 애써 굳혔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맹목적인 병사란 말인가. 대장이 망상 같은 헛소리 한 번 했다고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삼으려한다.

 이 앞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면서도 해내겠다는 것마냥 의젓한 표정을 짓는다.

 아픔도 숨기고 절망도 숨기고 분노도 숨기고,

 그녀들을 강제해온 군기를 뛰어넘어

 터무니 없이 허황된 목표 하나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바보같은 부하들이

 나의 모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랬었지.

 이게 스틸라인이었지.

 이렇게 우리는 강철이 되어왔던 거였지.

 

 "좋다. 보답이다."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철충과의 교전까지 약 40분 남았다. 지금부터 15분 동안 제군들에게 휴식시간을 주겠다. 무엇을 해도 좋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라. 군법도, 바이오로이드 윤리도 따지지 않겠다. 나 또한 쉴 테니 제군들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먹고,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고, 자고 싶다면 자라. 전투용 식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식량은 전부 소비해도 좋다."

 

 그 말에 브라우니들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브라우니가 들뜨는 걸 보니 레프리콘의 굳어있던 표정도 점차 풀어졌다.

 피닉스들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거렸다.

 

 간만에 신이 난 부하들을 보자 마리의 주먹에도 힘이 빠진다.

 

 "그리고 15분 뒤에는-"

 

 그녀는 애정과 고마움을 담아 자매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이 전선에서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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