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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는 정오에 거의 도달했다.

 가장 밝을 시간이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습하지도, 춥지도 않고, 그저 조금 어둡다.

 온 세상에 그늘이 깔린 것만 같다.

 구름이 빈 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보인다. 

 

 맘스베리의 전선은 그 어느 때보다 웃고 있다.

 

 브라우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스팸을 정신없이 흡입하고 있다. 얼굴에 붙은 스팸조각을 핥아먹을 틈도 없다. 정작 상부에서 보급해준 전투식량은 맛이 없다며 내팽개쳤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브라우니들에게 기호식품을 모조리 털린 실키는 홀쭉해진 가방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입에 스팸을 가득 채운 브라우니들이 웃고 떠들며 얼싸안고 춤을 추는 대혼돈 사이에 이프리트 하나도 누워서 스팸을 씹는다.

 

 이프리트 병장님. 그렇게 먹다 체하지 말임다.

 안 해. 한다 해도 누워서 먹을 거야.

 

 다른 이프리트 둘은 진작 스팸통을 비우고 그늘로 기어들어가 자고 있다. 간만의 허가받은 낮잠이라 그런지 녹을 것 같이 행복한 얼굴이다.

 

 광란의 먹자판에서 좀 떨어진 곳에 레프리콘 하나가 기관총을 정비하고 있다. 약실 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노리쇠를 앞뒤로 움직인다.

 브라우니 하나가 쫄래쫄래 다가와 스팸 한 덩이를 내밀었다. 레프리콘은 스팸을 힐끗 보더니 크게 한 입 베어문다.

 스팸 절반이 한 순간에 사라지자 브라우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그렇게 많이 드심 어떡함까!

 쩝쩝, 먹으라고 내민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맞긴 한데, 이거 제 마지막 스팸이지 말임다. 진짜.

 평소에 몰래 먹을 때 망 많이 봐줬잖아요.

 

 레프리콘이 눈깜짝할 사이에 총을 재조립하더니 브라우니가 든 스팸덩이를 통째로 낚아챈다. 브라우니가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스팸은 레프리콘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간다.

 다람쥐처럼 뺨이 부푼 레프리콘이 스팸을 오물오물 씹으며 음미한다.

 브라우니가 울상이 되어 한탄한다.

 

 아 씨-

 

 '씨'라는 말에 레프리콘이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본다.

 브라우니는 또 놀란 표정이 되어 말을 버벅인다.

 

 씨, 씨, 날씨가 좋지 말임다. 그늘지고, 시원하고.

 

 브라우니가 구름낀 하늘을 가리키며 딱딱하게 웃는다.

 그걸 빤히 쳐다보던 레프리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입 속의 스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소리를 삼켜 끅끅 웃는다.

 브라우니는 다시 울상이 되어 스팸 기름기만 남은 자신의 두 손을 본다.

 

 입 속의 스팸을 다 먹은 레프리콘이 활짝 웃으며 브라우니의 빈 손을 툭 친다.

 

 아이고~

 

 그렇게 실실 웃으며 탄알집 안에서 스팸 두 통을 꺼내 브라우니에게 던진다. 당황하며 스팸을 받아든 브라우니는 이내 세상 행복한 표정이 되어 스팸통을 깐다.

 레프리콘은 그런 브라우니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 누그러진다.

 

 실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실키가 고개를 돌린다. 피닉스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와봐! 어서!

 

 오전 내내 피닉스의 대포만 닦았는데 또 뭘 시킬 생각인가. 실키는 홀쭉해진 가방만큼이나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키가 다가오자마자 피닉스는 묻는다.

 

 스팸 있어?

 없어요. 저 먹을 것도 브라우니들한테 다 털렸어요.

 그래?

 

 피닉스가 실키의 어깨를 잡고 임시격납고로 이끈다. 마지못해 끌려간 실키는 곧 자신처럼 끌려온 나머지 12기의 실키를 발견한다. 그녀들은 피닉스들과 함께 돗자리를 깔고 앉아 뭔가 먹고 있었다.

 

 아침에 정비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맛난 거 좀 먹고 가라고.

 

 피닉스가 어서 앉으라며 등을 두드린다. 예상외의 대접에 놀란 실키가 엉거주춤 돗자리에 앉는다. 요리담당으로 보이는 피닉스가 크래커 위에 무언가 발라 건넨다. 실키가 그걸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크래커 위에 바른 것은 다름 아닌 참치다.

 스팸에 휩쓸려 브라우니 사이에 돌아다니겠거니 했던 참치캔이 여기에 전부 쌓여있던 것이다.

 참치는 그녀같은 하급병사들에게는 스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식품이다. 보급담당인 실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문제는 그 참치가 왜 크래커 위에 있냐는 것이다.

 

 왜 이 둘을 같이......?

 그냥 먹어봐.

 

 피닉스가 참치크래커를 내밀자 실키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한 입 베어문다.

 몇 번 입 속에서 씹어보자 실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피닉스들이 깔깔 웃으며 잽싸게 참치크래커 하나를 더 만들어준다.

 

 많이 먹어. 사양 말고.

 장교님들은 항상 이런 걸 먹는 건가요?!

 그럴 리 없잖아. 요즘은 물자가 제대로 안 나오니까. 어서 먹기나 해. 브라우니들한테 들키면 다 털린다 이거.

 

 실키들이 합심하여 열심히 참치크래커를 먹어치운다. 피닉스들은 그걸 보고 또 깔깔 웃어댄다.

 

 

 ............

 

 

 모자는 옆에 내려놓았다.

 막사에 등을 기대고 앉은 마리는 축제라도 벌어진 것마냥 시끌벅적한 부하들을 보았다. 브라우니들이 스팸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춤을 춘다. 분위기에 취한 몇몇 레프리콘도 브라우니와 어깨동무를 하고 요란하게 웃어댄다.

 

 마리는 조용히 안식을 음미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여본 게 언제였던가.

 등을 벽에 기대어본 게 언제였던가.

 두 다리를 뻗고 쉬어본 게 언제였던가.

 

 그 누구도 지휘관이 휩노스로 갑자기 쓰러질지 몰랐다.

 가능성은 열어 두었다. 준비도 해뒀다. 그러나 안일했다.

 지휘관의 공백에 대처할 지휘체계는 상상 이상으로 부실했다.

 그나마 분투하던 레드후드마저 죽은 뒤로는 사실상 마리가 모든 지휘를 맡아야 했다.

 

 지난 2주 동안 그녀는 두 눈을 뜬 채로 서있었다.

 가장 높고, 가장 밝으며, 결코 잠들지 않는 등대로서 전선을 보아왔다.

 철충이 급습을 해올 것도 아니었건만 그녀는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칸의 지적이 없었다면 자신의 몸상태가 어떤지 알아차리지도 못 했을 것이다.

 

 "지친 심신을 달래는데에는 그게 최고인데 말이지."

 

 마리는 간절한 생각을 삼키며 두 눈을 감았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놓아주자마자 피로와 잠기운이 와르르 쏟아졌다.

 시원한 바람이 자장가처럼 불어와 그녀의 금색 머릿결을 보듬었다.

 

 그 바람이 싣고 온 웃음소리와 스팸냄새........

 

 .........아니 잠깐,

 이건 스팸냄새가 아니라-

 

 마리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옆에 서있던 브라우니871이 화들짝 놀랐다.

 

 "어우 씨, 아니 이게 아니라, 죄송함다! 깨울 생각은 없었지 말임다!"

 

 마리는 대답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손에 든 낡은 컵을 보고 있었다.

 

 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브라우니가 눈을 껌뻑이더니 자신이 든 컵과 마리를 번갈아본다.

 브라우니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린 마리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것뿐이다. 무슨 일이지?"

 

 브라우니는 그제야 컵을 마리에게 내밀었다.

 

 "잔해 속에서 커피 하나를 구했지 말임다. 대장님이 좋아하신다고 들었슴다."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나?"

 "그냥 소문임다."

 

 마리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실없는 소문이군. 하지만 부하의 선의를 거절할 수는 없지. 고맙게 받겠다."

 "일단 거기 적혀있던대로 해보긴 했는데 제대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슴다."

 "괜찮다."

 "제가 살짝 맛봤는데 원래 커피맛이 어떤지는 몰라도 좀 그랬지 말임다."

 "알았다."

 "차라리 그냥 포장된 채로 드렸어야-"

 "알았으니까 어서 줘라 브라우니 871호!"

 

 마리의 날카로운 재촉에 브라우니는 재빨리 컵을 건넸다. 마리는 낡은 플라스틱 컵 안에 담긴 흑갈색의 액체를 보았다. 곧이어 크게 숨을 들이쉬니 감미로운 향기가 머릿속을 채웠다.

 온몸에 끼어있던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인스턴트 스틱커피인가."

 "무슨 커피인지까지는 모르겠지 말임다. 막대기 모양 포장지 안에 담겨있었슴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기대와 달리 맛은 맹맹했다.

 물을 너무 많이 탔다. 쓴맛도 신맛도, 스틱커피 특유의 단맛도 약하다.

 커피향이 나는 맹물 수준,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절망적인' 맛이다.

 

 "맘에 드심까?"

 

 브라우니가 은근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마리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답했다.

 

 "그래. 훌륭하다. 소질이 있군."

 "그렇슴까?"

 

 브라우니는 좋다고 실실 웃는다.

 마리는 시선을 옮겨 왁자지껄한 부하들의 모습을 보았다. 입이 다시 한 번 커피를 머금자 향기가 콧속을 감돌았다.

 

 이 정도면 과분하지.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귀관은 전우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건가."

 

 그녀의 물음에 브라우니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희 분대는 다들 스팸에 취해서 뻗어버렸지 말임다."

 "스팸에....... 취했다고.........?"

 "그런 느낌이지 말임다."

 "전투에 지장은 없는 건가."

 "그럴 검다."

 "그럼 됐다."

 

 마리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한참을 굴렸다. 그러다 후각이 커피의 향에 익숙해질 때쯤 브라우니를 보며 말했다.

 

 "앉아라. 그편이 편하지 않나."

 "괜찮슴다. 대장님 옆에서는 서있는 게 더 편함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가. 가슴 아프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한참 눈치를 보더니 결국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다 곧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편히 앉았다.

 

 두 바이오로이드는 나란히 앉아 자매들을 보았다.

 

 

 .............

 

 

 -후퇴하는 기미는 없어.

 

 피닉스의 통신에 칸도 말을 보탰다.

 

 "마리는 자신의 임무를 잘 알고 있다. 후퇴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지휘관은 세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답답해 미치겠네. 죽고 싶어 환장해가지고 다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휘관."

 

 그는 대답없이 철충이 쫓아오고 있을 방향과 맘스베리가 있을 방향을 어림잡아 보았다.

 지휘관을 태운 호드는 호프필드를 향해 북서쪽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철충무리와도 맘스베리와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문득 뒤따라오는 퀵카멜과 레프리콘이 보였다.

 시야가 흐려서 말끔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레프리콘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지 않을까, 지휘관은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레프리콘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았어야 했는데...... 나 혼자만.......!!"

 

 레프리콘이 이를 갈며 중얼거린다. 그 살벌한 소리에 퀵카멜도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정작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어 소리가 닿지 않는다.

 

 지휘관은 눈을 질끈 감더니 칸에게 물었다.

 

 "야, 혹시 서비스 되냐."

 "서비스?"

 "나 데려다주는 김에 부탁 하나만 더 하자."

 

 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알게 뭐야 그건 네가 판단하는 거지. 부탁하는 사람이 사정보고 부탁하냐."

 "지휘관, 너는 인간 중에서도 꽤나 못돼먹은 부류군."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뭘 원하지?"

 "방향 틀자. 무레스버그로."

 "무레스버그라면 북동쪽이군. 즉,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철충쪽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지휘관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정확해. 역시 똑똑하구먼."

 "굳이 말할 필요없겠지만 위험하다. 무레스버그에 남은 철충이 있을 거다. 뒤따라오는 철충무리 때문에 앞뒤로 포위당할 거고, 그렇게 되면 되돌아가기도 어렵겠지. 무레스버그에 도착한 뒤에 호프필드로 못 갈 수도 있다."

 "그렇지. 정확해. 역시 똑똑하구먼."

 

 칸은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결국 소리를 삼켰다.

 잠시 침묵을 유지한 그녀는 이내 진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부터 들어보겠다."

 "벌레새끼들 시선 좀 더 끌어보게. 어차피 유인할 거 더 붙들어 보자고."

 "의도는 알겠다만, 언제부터 철충과 그리 친했지?"

 "어디 갈 때는 친구 많이 데려가고 싶잖아. 원래 사람이라는 게 외로운 거 싫어해."

 

 칸은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휘관의 말을 따라야할 이유와 따르면 안 되는 이유가 어지럽게 얽히며 머릿속을 채웠다.

 지휘관은 말없이 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부탁을 거절해야할 이유가 훨씬 많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휘관."

 "어때? 결정했어?"

 "만약에 네가 너무 일찍 죽는다면 지금 유인하고 있는 철충도 전부 남하하게 된다. 그 대가는 마리가 지불해야할 거고."

 "내가 안 죽으면 되지. 아니, 그리고 걔가 어찌되는 내 알 바인가. 지들 멍청한 탓에 지들이 죽는 건데."

 

 지휘관은 거침없이 투덜거렸다.

 

 "애초에 이길 싸움이 아니라는 건 알 짬이잖아. 거기 스틸라인 다 합해봐야 3백명 되냐? 기적적으로 1 대 1로 교환비 맞춘다고 해도 철충 3백 마리 상대하는게 다야. 그것도 뭐 죄다 잡졸벌레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장갑병째로 우르르 기어오는 걸 뭐 어떻게 하게. 우리가 천을 유인하든 천 오백을 유인하든 똑같아. 싸우겠다고 버티고 앉은 시점에 거기 애들은 다 죽은 거야. 제발 후퇴하라고 판을 깔아줘도 후퇴를 안 해. 등신들."

 "그런데도 무레스버그로 가자고 하는 건가?"

 "그래!"

 

 그 힘찬 대답에 칸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음기는 순식간에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칼처럼 날카로운 무표정만 남는다.

 

 "전원 주목."

 

 칸이 부대원들에게 통신을 보냈다.

 

 "계획을 변경한다. 무레스버그를 먼저 거쳐서 호프필드로 향한다. 철충을 좀 더 유인해서 맘스베리 자매들의 부담을 덜어줄 거다. 거센 공격이 예상되니 각오하도록."

 

 부대원들이 일제히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다. 레프리콘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

 퀵카멜이 재빨리 말했다.

 

 "대장! 잘못된 거 같은데?! 지금 철충쪽으로 가자고?"

 "그래."

 "이미 우리한테 총구 겨누고 있을텐데 그걸 그냥 지나가?"

 "그래."

 "진짜로?"

 "그래. 가기 싫은가?"

 

 혈기가 오른 워울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달궜다.

 그녀들의 호응은 작전의 위험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이 사실을 피부로 경험해온 퀵카멜은 반쯤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뭘 어떻게 하려는 거죠?"

 

 상황을 이해 못한 레프리콘이 퀵카멜을 보며 물었다.

 

 "그러게 말이다."

 

 퀵카멜은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

 

 한편 이 혼란의 근원인 지휘관은 속편하게 휘파람을 불며 칸의 주의를 끌었다.

 

 "진짜 가게?"

 "네가 묻지 마라 지휘관."

 

 차갑게 대답한 칸은 자세를 낮추며 방향을 크게 꺾었다. 호드 부대원들도 그녀를 따라 일제히 방향을 꺾었다.

 

 무레스버그

 자매들의 시체와 철충만 남아있을 지옥으로

 호드는 달린다.

 

 

 ..............

 

 

 여전히 시끄러운 스틸라인의 난장판.

 

 커피가 들어있던 잔은 말끔하게 비었지만 아직 온기를 품고 있었다.

 마리와 브라우니는 나란히 앉아 떠들었다.

 

 귀관이 스팸 먹다 걸렸을 때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

 그때 완전군장하고 뺑이 도느라 죽는 줄 알았지 말임다.

 덕분에 심신이 단련되지 않았나.

 힘든 건 확실했는데 단련된 건지는 모르겠슴다.

 믿어라. 귀관은 맨손으로 칙을 제압할 정도로 강해졌다.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겁니다만, 그건 역시 좀 무리 아님까.

 무리 맞다. 농담으로 해본 말이다. 제대로 총으로 싸우도록.

 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검까?

 그래. 쉬는 시간동안에는 대장이 아니니까. 지금의 나는 그저 자매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오, 계급장 떼신단 말임까.

 그런 셈이지.

 야, 그럼 말 놓는다?

 좋은 태도다 브라우니 일병. 쉬는 시간 끝나고 보도록 하지.

 계급장 떼신다고 하지 않으셨슴까?!

 좀 있다가 다시 붙여야 하니까.

 완전 사기임다!!!

 하하! 순진하군 브라우니! 원래 상관 앞에서는 긴장을 놓지 않는 법이다. 권력 있는 자들은 구렁이 같은 법이거든.

 

 .............그런데 말임다. 대장님이 항상 맨손으로 칙 잡는다고 하실 때마다 궁금했지 말임다.

 뭐가 말인가.

 대장님 진짜 맨손으로 칙 잡아본 적 있슴까?

 있다. 세게 치면 칙 머리 뚫는다.

 진짜였슴까?!

 아니, 농담이다. 강화된 철판을 주먹으로 뚫긴 힘들지.

 아....... 그럼 결국 거짓말이었슴까.

 부하들이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 강해질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모든 마리모델들이 똑같이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그렇슴까.

 게다가 계속 단련시키다보면 진짜로 칙을 때려잡는 브라우니가 나올지도 모르잖나.

 안 나옴다. 나올 리 없지 말임다.

 귀관은 낭만이 없군.

 도대체 뭐가 낭만적인 검까.

 하하!

 ............마리 대장님.

 뭔가.

 스팸 드시겠슴까?

 스팸? 귀관이 좋아하는 것 아닌가? 나한테 줘도 되나?

 대장님은 좀처럼 안 드시니까 양보하는 검다. 저는 몰래 많이 먹었습니다.

 흠, 그런가.

 

 마리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더니 무언가 잔뜩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스팸의 노란색 플라스틱 덮개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 덮개.

 

 사실 나도 막사 안에서 틈날 때마다 먹고 있다.

 ..........????

 영양공급은 중요한 거다.

 아니, 와, 이거 되게 배신감 느끼지 말임다!! 군수비리 아님까 이거!! 이 많은 걸 혼자 드신 검까?! 대장님이랑 같이 싸울 마음 없어지지 말임다!!

 하하하!

 웃지마시지 말임다!! 정 떨어짐다!!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마리는 브라우니에게 빈 잔을 건넸다.

 

 "고맙다. 귀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군."

 "전 충격만 받았지 말임다."

 "하하, 너무 미워하지 마라. 원래 간부들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뻔뻔하시지 말임다!"

 "이 맛에 레프리콘들이 브라우니를 놀리나 보군."

 

 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구름이 끼어 어둡다.

 저 너머에 해가 빛나고 있을텐데도, 보이지 않는다.

 

 "............."

 

 마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그걸 보는 브라우니의 화난 표정도 눈녹듯이 사라졌다.

 브라우니들은 어리석었으나 그만큼 예리한 마음이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녀들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내려 자신을 쳐다보는 브라우니를 보았다.

 브라우니의 표정은 무거웠다.

 지저분한 두 손이 플라스틱 컵을 꼬옥 쥐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참 놀고있던 브라우니 중 하나가 멈춰서서 쳐다본다.

 하나, 둘,

 곧 다른 브라우니들도 마리를 쳐다본다.

 이내 레프리콘들도 고개를 들고 브라우니들의 시선을 따랐다.

 춤이 멈췄다. 노래가 멈췄다.

 소란 속에서 단잠을 자던 이프리트가 침묵에 눈을 떴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실키와 피닉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가 서 있는 막사 쪽을 보았다.

 

 활기가 넘치던 맘스베리에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그렇게 칼로 자른 것처럼

 그녀들의 시간은 끝났다.

 

 마리는 말없이 도시 밖을 쳐다보았다.

 건물이 모조리 무너진 콘크리트 폐허 너머로 두터운 먼지구름이 보인다.

 그 안에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눈빛들이 보인다.

 무수히 많은 죽음이 보인다.

 

 서늘한 그늘 아래 도로를 밟아부수며 진격해오는 강철의 파도는 그녀들의 뼈와 살보다 훨씬 단단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

 상부의 시뮬레이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질 싸움은 결국 질 싸움이라는 지휘관의 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전선에 이길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은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아니, 이기라는 명령 자체가 없었다.

 버티라고. 그저 버티라고.

 무기도, 참호도, 자매도, 곁에 있던 인간마저도 버리고,

 그저 1초라도 철충의 다리를 붙들라고,

 인류는 그렇게 명령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만 기억하겠지.

 그 기나긴 가시밭길 위에 죽어간 것들을 외면하면서.

 

 바람이 불었다.

 흙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마리의 금색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흙과 기름으로 얼룩진 바이오로이드들을 어루만졌다.

 스틸라인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코트를 흩날리는 마리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마리는 철충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자매들이여.

 

 잔잔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부대원들의 귀에 깔렸다.

 

 가혹한 운명이 절벽처럼 가파를 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

 미루고 미룬 죽음이 드디어 우리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암울한 하루하루,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던 이 전선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된 거다.

 

 .........

 죽음이라........

 

 그녀는 몸을 돌려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는 우리가 죽기 위해 태어난다 했지.

 얼굴도 모르는 주인을 위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예라 했다.

 그러한가?

 

 바이오로이드들은 대답이 없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갈 곳이 없어서,

 다른 일을 할 줄 몰라서,

 우리는 이곳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끝난다.

 

 더 이상 우리는 후퇴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이제 끝났으니까.

 

 마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되뇌였다.

 

 이제...........

 

 차분한 황색 눈동자에 손바닥이 비친다.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감돈다.

 

 이제...........

 

 힘이 들어간 손이 주먹을 꽈악 쥔다.

 황색 눈동자에 산불이 번지듯이 푸른 빛이 차오른다.

 

 흐흐.......... 흐흐흐흐..........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이 벌어진다.

 송곳니가 드러난 악랄한 미소를 짓는다.

 

 제군들.

 

 파직!

 거친 섬광이 금발을 태우며 스파크를 일으킨다.

 무거운 코트가 중력을 거슬러 떠오르고 공기는 쐐기처럼 날카롭게 달아올랐다.

 

 타오르듯이 파랗게 빛나는 마리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자리의 모든 스틸라인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느껴지나. 압도적인 적의 군세가 땅을 흔드는 것이-

 

 타는 먼지가 불꽃이 되어 휘날린다.

 눈부시게 튀어오르는 번갯불 사이로 마리의 몸이 떠오른다.

 조그만 공 모양의 레이져드론 네 개, '비홀더의 눈'이 기동을 개시하며 그녀의 몸을 맴돌았다.

 

 느껴지나. 철근 같은 절망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공기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전율한 스틸라인 부대원들이 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푸른 번갯불과 난공불락의 요격드론을 두른 채 중력을 밟고 올라 전선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명백하게 인간을 벗어난 그 모습은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신과 같은 형상으로 비쳤으며, 그녀와 함께했던 스틸라인에게조차 다른 생물로 느껴질 정도의 육중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모습을 안다.

 그 모습을 안다.

 

 그 옛날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던 강철전선의 최선두.

 모든 승리에 '당연'을 붙이고,

 제일 먼저 포탄에 맞는 걸 의무라 여기는,

 

 그녀들의 가장 단단한 불굴.

 

 이제-

 

 그랬던 그녀가 그랬던 그녀의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 오롯이 우리의 싸움만이 남았다.

 

 전의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뛴다. 혈류가 빨라지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마리를 올려다보고만 있던 브라우니 몇몇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마리를 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모조리 뚫어버릴 기세로 쳐다본다.

 시선에 담긴 침묵이 부글부글 끓었다. 툭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 것처럼.

 

 "대장님."

 

 그때 누군가가 마리를 부른다. 그녀의 옆에 서있던 브라우니 871호였다. 브라우니는 굳은 눈빛으로 마리를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마리의 모자였다.

 

 스파크를 튀기며 엄정한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내려다보던 마리는 한 순간 긴장된 공기를 녹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이 모자를 받아 머리로 가져간다.

 전선에서 닳고 닳은 모자를 잘 눌러 쓴 마리는 다시 스틸라인을 보았다.

 

 자신의 자매들을 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터질 듯이

 

 크게 숨을 들이 쉬어

 

 외쳤다.

 

 나의 자랑스러운 자매들이여!!!

 

 천둥 같은 목소리가 맘스베리를 뒤흔들었다.

 

 보아라!!

 

 가혹한 운명이 절벽처럼 가파를 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

 모두가 포기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 우린 이 자리에 섰다!!!

 

 지구 반대편까지 퍼질 기세로 하늘이 쩌렁쩌렁 울린다. 소리로 얻어맞는 것마냥 피부가 떨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표정을 찡그리거나 귀를 막지 않았다.

 

 누군가는 우리가 죽기 위해 태어난다 했었지!

 얼굴도 모르는 주인을 위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예라 했다!

 

 그렇다! 우린 노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온 끝에 노예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란 건 뭔가?

 저 뒤에 숨어 떨고 있는 자들이 우리의 주인인가?

 끝내 손 한 번 내밀지 않는 게 우리의 주인인가?!

 

 아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우리가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라 증명해주는!

 

 그런 인간이 나타날 것이란 희망!!

 

 그게 미래다!

 그게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다!!

 그게 바로 목숨을 바칠 주인인 것이다!!!

 

 마리의 푸르게 불타는 눈빛이 조금 차분해졌다. 요란하게 튀던 스파크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러니 이곳에 '당연한' 죽음은 없다.

 

 그녀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무겁게 말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울지 않고 그 누구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때,

 나와 제군들은 끝내 만나지 못 한 주인을 살리기 위해

 안타깝고 원통하고, 슬프게 죽는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이다.

 

 바이오로이드들은 굳은 눈빛으로 마리의 시선을 받았다.

 패배와 후퇴만 쌓인 전선에서 나날이 메말라가던 그녀들의 눈동자에

 따뜻한 습기가 차오른다.

 

 스팸이 묻은 브라우니의 얼굴에도, 검댕이 묻은 레프리콘의 얼굴에도,

 이프리트와 실키, 피닉스의 얼굴에도,

 바이오로이드로서 억눌러왔던 수많은 것들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미움과 원망, 그리고 그보다 큰 간절함........

 

 마리는 다시 단단하게 눈을 빛냈다.

 

 하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제군들이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제군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마리가 손을 내밀어 주먹을 움켜쥐자 스파크가 터지며 섬광을 빛냈다.

 으스러질 듯이 꽉 쥔 주먹만큼 그녀의 목에도 핏대가 섰다.

 

 세상이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서로의 눈으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살아왔노라!!

 마음을 굽히지 않고 절실하게 싸웠노라!!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죽었노라!!

 

 그녀는 절규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 온 생명을 다해 외칠 것이다!!!

 

 그 필사적인 목소리는 단번에 바이오로이드들의 심장을 관통했다.

 

 이미 미련을 놓은 그녀들에게,

 이미 분노를 놓은 그녀들에게,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그녀들에게,

 

 미련을 주고

 분노를 주고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모든 걸 받아들일 힘을 준다.

 

 이미

 그녀들은 모두 대답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지옥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침묵 속에서,

 전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마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답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

 이래야지.

 이래야 나의-

 

 마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사방에 튀는 스파크와 함께 코트가 격하게 휘날렸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

 

 그녀의 강철전선이 명령을 기다린다.

 

 자! 때가 왔다!

 오늘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마지막 날!

 우리의 살과 뼈가 철보다 강하단 것을 증명할 날이다!

 제군들의 앞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것이다!

 제군들의 뒤에는 언제나 자매들이 있을 것이다!

 버리는 자도 버려지는 자도 없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싸워 한 몸으로 쓰러질 것이니!

 

 피할 수 없는 패배에 맞서!!

 우린 가장 단단한 불굴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강철이 된다!

 

 그것은 구호였다.

 병사들도, 간부들도, 만든 마리 본인도 유치하다며 돌려까던 그 구호.

 전선이 무너진 이후로 한 번도 꺼내지 못 했던 그 구호.

 마리 7호의 스틸라인이 가진, 단 하나의 구호.

 

 누가 먼저 외쳤는지는 모른다.

 상관없었다.

 그 한 마디에 들끓던 침묵은 기화했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막힌 댐을 터뜨리듯이

 짓눌린 가슴 속 한 켠에 묻혀있던 그 구호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강철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강철이 된다!!

 

 몇 번이고 목놓아 부르짖었다.

 

 그렇게 우리는 강철이 된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온 하늘에 쩌렁쩌렁 울린다.

 마리도 그녀들과 함께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선의 강철이 된다!!!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달아오른 눈동자로 하나뿐인 대장을 쳐다보며 말을 기다렸다.

 마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시선에 답했다. 

 

 일어나라 스틸라인! 나 불굴의 마리 7호가 그대들의 상관으로서 명한다!!

 

 마리는 굳센 주먹을 내밀어 다가오는 철충무리를 가리켰다.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죽여라!!

 전부 밟아버려라!!

 저 승리에 취한 버러지들에게 감히 누구를 얕보고 있는 건지 똑똑히 알려줘라!!!

 

 스틸라인 전원이 함성으로 대답했다. 대포소리보다 우렁차고 확실한 대답이 사방을 채웠다.

 온몸을 흔드는 함성 속에서 마리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지도였다. 작고 지저분하고 낡은 지도. 이제 더는 쓸 일이 없을 종이조각.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주먹 안에 꽈악 쥐었다.

 그 손을 높이 들었다.

 

 "바로 오늘!!!"

 

 부디

 

 "인류가 버린 우리가!!!"

 

 모두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 세상이 오길 바라며

 

 "인류가 버린 이 땅 위에!!!"

 

 그녀는 기도했다.

 

 "인류의 미래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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