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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밤을 지샌 전투로 폐허가 된 무레스버그


 해는 가장 높이 떴으나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고

 빌딩이 묘비처럼 선 도시에는 쓸쓸한 바람만 맴돌았다.


 도시 전체가 쓰레기장 같았다.

 무너진 건물은 뼈대만 앙상히 남아있고 널브러진 돌더미에는 총알 자국이 가득하다.

 크레이터가 벌집처럼 파인 아스팔트 도로 위에 철충의 발자국이 묵직하게 찍혀있었다.

 보이는 곳마다 스틸라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팔다리가 홀로 굴러다녔다.

 공기 속에 피 썩는 냄새가 안개처럼 떠다닌다.


 죽음과 철충만이 배회하는 그곳에

 아직 하나

 최후의 바이오로이드가 남아있었으니


 도시의 남쪽으로 나가는 검문소 옆에 거북이 등껍질 같은 쇳덩이가 있었다.

 사람 하나 크기의 네모난 철판이 여러겹 붙어 만든 방호벽이었다. 두텁고 육중한 철판 위에는 온갖 총탄에 맞선 증거로 자잘한 흠집이 수 십 겹 덧칠되어 있었다. 그 무수한 탄흔이 펼쳐진 한 가운데에 방탄모를 쓴 해골 그림, 아머드메이든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방호벽으로 둘러쌓인 내부는 어두웠다.

 그 어둠속에 움츠려있던 블러디팬서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방호벽틈으로 빛이 가늘게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쿨럭, 쿨럭, 기침이 나왔다. 입에서 침이 나오는 건지 먼지가 나오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텁텁한 공기가 목구멍에 들러붙었다.

 방호성능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방호벽을 넓게 전개했지만 완전무장한 이오와 블러디팬서만으로 자리가 가득 차있었다. 블러디팬서의 축축한 눈동자가 옆에 주저앉아있는 이오를 보았다. 그녀의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있었다. 심장까지 뚫린 구멍도, 그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피도, 모두 말라붙었다.


 블러디팬서는 눈을 껌뻑였다.

 이오는 평온해보였다.

 이제 어떡하냐고, 겁먹은 얼굴로 피를 토하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도 평온해보였다.

 이오의 시커먼 핏자국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블러디팬서는 이내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배를 향했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꾹 눌러 지혈하고 있었다.

 여전히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멈추지 않을 출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금방 죽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블러디팬서 모델이 최전방에 서는 이유는 방호벽 때문만이 아니다. 장갑을 두르고 싸우는 그녀들의 육체 또한 상식을 초월하는 내구력을 지니도록 만들어졌다.

 최초로 만들어진 장갑병인 동시에 가장 많은 요새를 함락시킨 바이오로이드,

 가장 단단하다는 아머드메이든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바이오로이드,

 그게 바로 A-1 블러디팬서

 그녀를 칭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쉽게 죽지 않는다.


 고통에 짓눌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그녀는 쉽게 죽지 않는다.


 "........."


 그때 먹먹한 귓속에 희미한 총성이 울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이, 점점 가까워진다.


 .........

 .........치직-

 -처에-어? 아무라도 좋으니까! 호드 한 명도 안 남아있어?!


 통신기에 잡음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블러디팬서는 천천히 눈알을 굴려 방벽의 틈을 보았다. 새어들어오는 빛에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통신이 올 리 없다.

 환청일 것이다.


 -누가 좀 대답해 봐!


 그러나 상대방의 필사적인 목소리에 블러디팬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


 목이 잠겨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 구해주러 온 검까?"

 -누구야?! 지금 어디에 있어?


 블러디팬서는 눈을 껌뻑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말라붙은 피가 혓바닥에 들러붙었다.

 이 통신은 환청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무레스버그 남쪽, 방벽을 전개하고 교전 중임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곱씹던 블러디팬서는 금방 생각해냈다.


 "이 목소리....... 피닉스 맞지? 나야. A-1 블러디팬서."


 상대방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뭐?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야?

 "살아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쿨럭, 덕분에 이렇게 통신하고 있네."

 -얼마나 남았어? 다른 병력은 얼마나 있는데?


 블러디팬서는 이오를 힐끔 쳐다보려다 말았다.


 "없어. 나 혼자야. 다른 자매는 못 봤어. 으윽, 아, 내가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도와줄 수 있을까."


 피닉스는 급하게 답했다.


 -미안하지만 네 힘을 먼저 빌려야겠어! 지금 칸이랑 지휘관이 헤비스카우트한테 쫓기고 있는데, 너 지금 어디에 있어? 무레스버그 안이야?

 "하아....... 남쪽 2번 검문소, 거기에 방벽 치고 있어. 그런데 지휘관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인간?"

 -그래 그 잠꾸러기 인간이야. 지금 그쪽으로 유도할테니까.....

 "안 돼. 안 돼!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저격수가 있어. 쿨럭, 쿨럭, 내 장갑판도 뚫는 녀석이야! 인간을 데려오지 마!"

 -지금 멈추면 칸이랑 지휘관은 죽어! 방법이 없다고! 칸이랑 헤비스카우트가 너무 가까워져서 내 포로 쏘면 휘말려 버릴 거야.

 "이쪽으로 오면 안되는데......"


 블러디팬서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찌뿌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먹먹한 감각 속에 한 순간 모든 생각이 떨어져 나간다.

 아니, 아직은 안 돼.

 그녀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아찔하게 멀어져가던 정신줄을 붙잡았다.


 "이런 씨, 무슨 꿈꾸는 거 같아."

 -꿈 아니야! 도와줄 수 있으면 어서 도와줘! 뭐든 상관없으니까 헤비스카우트만 없애면 돼!


 쿨럭 쿨럭

 몇 번 기침을 하던 블러디팬서가 입을 닦았다. 장갑에 진득한 피가 매달렸다. 그녀는 눈을 세게 감았다 뜨며 방호벽 안의 어둠을 훑었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쿨럭, 방법이 없어. 탄도 다 써버렸고......."


 방호벽 플랫폼에 장착된 기관총은 진작에 총알이 떨어져 장식이 되었다.

 주무장인 120mm포도 방호벽 밖으로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블러디팬서의 지친 눈동자가 방호벽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시커먼 어둠과 이오의 시체뿐이었다.


 이오의 시체.


 문득 블러디팬서의 시선이 이오의 외골격무장을 향했다.

 그녀의 오른팔에 달린 중기관포에는 여전히 탄띠가 매달려 있었다.


 ".........16번 순환도로로 와."

 -뭐?

 "16번 순환도로. 그 방향이 제일 잘 보여.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볼게."

 -알았어!


 피닉스는 곧바로 회선을 바꿔 칸과 연결했다.


 -16번 도로 타고 무레스버그를 향해 달려! 블러디팬서가 요격해줄 거야!


 칸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레스버그에 살아남은 자매가 있었나."


 그 순간에도 좌측 하늘에서 날던 헤비스카우트가 기관총을 쏟아붓고 있었다. 칸은 묘기부리듯이 도로 위를 미끄러지며 총탄을 피했다. 우측 하늘에서도 헤비스카우트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때 그녀의 옆으로 어떤 끈적한 액체가 쭈욱 떨어진다. 한 순간 시큼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우욱, 그 맛도 없는 죽을 왜 먹어가지고........ 우웩-"


 지휘관이 죽을 상으로 뱃속의 내용물을 질질 토해냈다. 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신차리고 꽉 잡아라. 운이 좋다면 죽기 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얼마 가지 않아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칸은 피닉스의 안내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16번 도로를 타자 무레스버그 외곽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터널이 나왔다. 칸이 비좁은 터널의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가자 헤비스카우트는 곧바로 고도를 높여 터널의 외벽 위로 날아올랐다.


 -블러디팬서! 칸이 지금 가고 있어! 보여?

 "터널 끝까지 계속 달리라고 해. 어두우니까 조심하고."


 블러디팬서가 이오의 외골격슈트를 조작하자 슈트의 오른팔에 달려있던 기관포가 큰 소리를 내며 분리됐다. 자기 몸뚱이만한 기관포를 본 블러디팬서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기관포를 들어올렸다. 허리에 기관포의 무게가 실리자 배에 난 상처에서 더욱 빠르게 피가 흘렀다. 블러디팬서는 눈을 질끈 감고 신음하며 총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중기관포의 총구가 방호벽의 틈으로 빠져나가 도로를 겨누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먼지와 피가 엉겨붙어 튀었다. 블러디팬서는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몽롱한 정신을 붙잡았다.


 -조심해서 쏴! 칸이랑 지휘관이 같이 있어! 조금만 빗나가도 큰일날 거야!

 "쿨럭, 알았어."


 블러디팬서는 기관포를 통나무마냥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렸다. 상처가 벌어지는 고통에 그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피에 젖은 장갑이 기관포 상단의 수동 격발 레버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총구 끝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도로에 터널의 출구가 보였다. 곧 맹렬한 속도로 터널 위를 나는 헤비스카우트가 나타났다. 블러디팬서는 두 철충의 한참 앞에 있는 터널의 출구를 조준했다.

 레버를 당겼다.


 탕!


 큰 소리와 함께 중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제대로 된 반동제어장치가 없는 탓에 블러디팬서의 어깨가 그대로 충격을 흡수했다. 배의 상처에서 더욱 피가 흘러나왔다.


 총구에서 나온 빛은 매섭게 공기를 찢으며 터널을 향해 날았다.


 기관포의 포탄이 터널의 출구 근처에 떨어지며 콘크리트를 부쉈다.

 터널의 어둠 속을 달리는 칸과 지휘관은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기동장치의 소음 탓에 기관포의 총성도 듣지 못 했다. 이는 전속력으로 엔진을 돌려 터널 끝을 향해 날아온 헤비스카우트도 마찬가지였다.


 두 철충은 휘어진 터널 위를 최단거리로 가로질러 칸보다 먼저 출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체를 180도 회전하며 터널의 입구에 총구를 겨누었다.

 철충 특유의 붉은 빛이 칸이 나타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좁은 터널 안에서는 회피기동도 소용없다. 제 아무리 칸이 날고 긴다해도 이번에는 피하지 못 할 것이다.


 -블러디팬서어!! 제대로 조준하고 있는 거 맞아?


 피닉스가 맹렬하게 소리쳤다. 블러디팬서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총구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 콘크리트가 부서진 위치를 기억하며 조준점을 바꾼다.


 -블러디팬서!!

 "머리 깨지겠다. 쿨럭, 그만 소리질러."

 -지금 급해!


 통신채널이 피닉스의 고함소리로 들썩였지만 블러디팬서는 대꾸하지 않고 숨을 들이쉬었다. 손상된 폐가 팽창하며 고통을 짜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는다.


 잠시 멈춘다.


 이윽고

 칸의 기동장치소리가 터널의 끝에 도달하고

 그녀를 기다리던 헤비스카우트들이 정조준을 위해 잠깐 제자리에 정지한다.

 어둠을 뚫고 나온 칸이 헤비스카우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타당탕탕!

 묵직한 총성과 함께 헤비스카우트들이 산산히 박살났다.


 갈기갈기 찢어진 헤비스카우트가 바닥을 구르는 것을 확인한 칸이 회피기동을 멈추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무너진 검문소의 잔해 옆으로 거북이등껍질 같은 방호벽이 보였다. 칸은 멀찌감치 보이는 방호벽을 향해 감사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블러디팬서는 그제야 기관포를 놓고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 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무거운 몸을 방호벽에 기댔지만 편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묘하게 주위가 추워졌다.


 -우후! 성공이야!! 제대로 맞췄어 블러디팬서!


 먹먹한 귓속에서 피닉스의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블러디팬서? 듣고 있어?

 "쿨럭, 쿨럭, 이제 내 차례인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그건........


 시끄럽던 피닉스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것인지 블러디팬서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피부는 희망을 내려놓은 듯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괜찮아. 내 운이 여기까지인 거지."


 운.

 그 단어 하나에 피닉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운에 맡겨.'


 선배들의 조언이 멀찍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칸한테 어서 가라고 해. 언제 놈이 공격해올지 모르니까.

 "바로 전해줄게. 고마워. 그리고 블러디팬서, 지금은 도와줄 수 없지만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타다다다당!!

 피닉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요란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피닉스가 급하게 지상을 살폈다. 칸이 총격을 피해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무레스버그에 남아있던 철충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며 인간을 향해 총알을 뿌려댔다.

 칸은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통신을 보내왔다.


 -피닉스, 이제 호프필드로 향할 거다. 보고 있나?

 "어? 어. 잘 보고 있어. 그런데-"

 -그런데?

 ".........."

 

 피닉스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을 호프필드까지 엄호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도, 바이오로이드의 본능으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운

 그 단어 하나가 피닉스의 목구멍을 틀어 막았다.


 타다당 타다다당!

 칙칙한 하늘에 메아리치는 총성이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 가......"


 블러디팬서는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방호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



 구름이 짙게 낀 맘스베리.

 도시 전체를 뒤덮은 어둑한 그늘 속에 전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콘크리트와 화염으로 난잡한 도로 위에 스틸라인의 후퇴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멈추면 안 되지 말임다!!"


 브라우니가 헐레벌떡 달려와 레프리콘을 부축했다. 이미 탈진한 레프리콘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움직였다. 기관총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그 쏜살 같은 빛무리가 그녀들의 한참 뒤에 떨어졌다.

 콰광!!

 폭발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건물이 무너지며 화염이 치솟았다. 브라우니는 더욱 서둘러 발을 움직였지만 레프리콘이 따라가지를 못 했다.


 곧 포격의 불길을 뚫고 시커먼 쇳덩이들이 뛰쳐나왔다. 나이트칙이었다.

 타다다당!! 타다당!!

 앞서 진을 친 엄호조로부터 총성이 울렸다. 추격해오는 나이트칙을 향해 황금빛 예광탄이 날아갔다. 나이트칙들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총알을 맞으며 계속 달려왔다.


 쫓아온 나이트칙이 기어코 총을 쏜다. 레프리콘과 부축해주던 브라우니 모두 눈깜짝할 사이에 핏덩이가 되어 쓰러졌다.


 엄호조에 있던 레프리콘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호위하던 브라우니를 불렀다.


 "뚫렸어요! 이제 그만 후퇴-"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브라우니의 깨진 머리를 밟고 있는 나이트칙이었다. 시뻘건 철충의 빛이 놀란 레프리콘을 응시했다.


 레프리콘은 곧바로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나이트칙의 총도 불을 뿜었다.

 피할 수도 없는 근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총알을 퍼붓는다.


 스파크가 튀며 장갑판이 떨어지고

 살점이 터지며 피를 뿌린다.


 레프리콘은 온몸이 찢겨나가는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지만, 승자는 나이트칙이었다.

 총알에 파헤쳐진 레프리콘이 축 늘어졌다.

 반쯤 박살난 나이트칙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른 적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쾅!

 하늘에서 떨어진 포탄이 나이트칙을 흔적도 없이 불태웠다.


 -기름보다 탄이 먼저 떨어지겠는데!


 구름 속에 숨은 피닉스 하나가 투덜거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대포가 굉음을 터뜨리며 대구경 포탄을 지상으로 쏘아박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포신이 찬바람을 가로지르며 하얀 김을 뿜었다. 그 김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쾅! 대포는 또 한 발의 포탄을 발사한다.


 쾅!

 쾅!

 쾅! 쾅!


 열기가 식을 틈도 없이 쏘아대고 있건만 지원사격 요청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들어오는 신호에 앞선 신호가 전부 묻혀버릴 지경이었다.

 표적지시, 표적지시, 표적지시, 표적지시.......

 피닉스는 이를 악물고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이미 쏴주지 못 한 구역의 자매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놓친 신호를 무시한 채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호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대포가 미친 듯이 연달아 불을 뿜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응답받지 못 한 표적신호가 지상을 채워가고

 그 신호가 곧 자매들의 묘비나 다름없음을

 피닉스들은 알고 있었다.


 -전원, 2차 방어선 전방 400m 지점에 집중!! 엄호사격!


 피닉스 056의 명령을 들은 그녀는 그 순간에도 정신없이 들어오고 있는 지원요청 신호를 외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그녀의 대포가 맘스베리 남쪽의 방어선을 겨누었다.

 쾅!!

 굉음과 함께 발사된 포탄이 구름을 뚫고 나왔다. 곧이어 다른 피닉스들이 쏜 포탄들도 구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포탄무리가 도로 위를 시꺼멓게 채운 철충 위로 쏟아졌다.


 콰과과광!!!

 불길이 치솟으며 아스팔트가 뒤집어졌다. 산산조각난 나이트칙의 잔해가 사방에 흩뿌렸다.

 순식간에 도로를 뒤덮은 화염과 먼지구름 속에서 나이트칙들이 우르르 달려나온다.

 몸이 불타고 있어도, 다리 하나가 없어도, 미친 짐승처럼 스틸라인을 향해 돌진한다.


 이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스틸라인의 2차 방어선에서 급한 고함소리가 터졌다.


 "1시!! 1시 지원! 1시!!"


 콘크리트 더미 위로 레프리콘이 정신없이 소리지르며 내달렸다. 그 뒤를 따라 달리는 브라우니들도 '1시! 1시!' 마구 외쳐댄다. 그녀들의 어깨에는 주인 잃은 기관총이 두 정씩 들려있었다. 자매들의 급한 목소리를 들은 다른 레프리콘 몇몇도 재빨리 총을 챙겨 따라갔다. 기관총 소리와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폐건물을 엄폐물 삼아 만든 2차 방어선을 따라 스틸라인 병사들이 부리나케 달려간다.

 선두에 달리는 레프리콘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피닉스의 포탄이 끊임없이 쏟아지며 방어선 앞을 강타하고 있었다. 곧 포격에 무너진 건물 사이로 개미떼처럼 쏟아지는 나이트칙들이 보였다. 그 앞에는 아직 방어선까지 후퇴하지 못 한 스틸라인들이 철충에게 쫓기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당!!

 방어선의 기관총 진지에서 레프리콘들이 끊임없이 엄호사격을 퍼부었다. 황금빛 예광탄이 후퇴하는 스틸라인의 머리 위를 지나 철충무리에 꽂혔다. 쏟아지는 탄에 박살난 나이트칙들이 땅을 구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나이트칙들이 달려온다.

 레프리콘의 다리 앞에 탄피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기관총은 이미 총열이 녹아내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이트칙은 쏴도 쏴도 계속 뿜어져나왔다.

 이윽고 철충의 물량공세에 기관총 진지의 엄폐물까지 돌파 당하려는 찰나, 허겁지겁 달려온 지원병 레프리콘들이 제각기 위치를 잡고 기관총을 거치했다.


 쾅 쾅!!

 다시 한 번 방어선 앞에 피닉스의 포격이 떨어지고 화염이 터진다. 불길을 돌파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나이트칙들이 방어선의 코앞까지 달려왔다.


 막 자리 잡은 레프리콘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이 맹렬하게 불을 뿜으며 탄띠를 빨아들였다. 거리가 가까워진 나이트칙들도 대응사격을 해왔다.

 사방에 총탄이 뒤엉켰다.

 방어선의 잔해에 수많은 총알이 박히며 먼지를 뿜었다. 노출된 길로 달리던 브라우니 하나가 목에 총을 맞고 고꾸라졌다. 레프리콘들은 날아오는 총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 펑!

 과열된 기관총 중 하나가 결국 폭발했다. 총을 쥐고 있던 레프리콘의 얼굴 반쪽이 찢어졌다. 융단처럼 깔린 탄피 위로 자빠진 그녀를 브라우니들이 달려와 일으켜줬다.


 "괜찮슴까?!"

 "총! 브라우니, 다른 총 갖고 와요!!"

 "괜찮으심까?!"

 "총 달라고요!"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앞도 못 보는 레프리콘이 자꾸 소리쳤다. 브라우니는 어쩔 줄 모르다 그녀의 오른팔을 쥐어흔들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레프리콘이 어깨에 얼굴을 문질러 피를 닦았다. 그나마 멀쩡한 왼눈에 팔목만 덩그라니 남은 오른팔이 보였다.


 "탄 없어요!!"


 다른 레프리콘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탄막을 뚫고 달려온 나이트칙 하나가 그녀의 곁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탄이 떨어진 브라우니들이 맨몸을 날려 나이트칙에 매달렸다. 나이트칙은 사정없이 몸을 흔들며 총을 갈겼다. 나이트칙의 총을 붙잡고 있던 브라우니의 몸뚱이가 터져나갔다. 나이트칙의 등에 매달린 브라우니 하나가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


 "실키 상병님 어디 있슴까?! 실키 상병니임!!!"


 브라우니의 외침은 사방을 채운 총성에 묻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빅칙!!"


 멀리서 날아온 대구경 탄환들이 잔해를 깨부수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기관총 진지 중 하나가 스틸로폼처럼 뻥뻥 뚫려 날아가며 피안개를 흩뿌렸다.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는 엄폐물 사이로 브라우니들이 머리를 감싸며 바짝 엎드렸다. 사방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레프리콘들은 계속 기관총을 갈겼다.


 총탄이 빗발치고 건물이 무너지는 난장판 속에서 실키는 양손 가득 탄약통을 들고 달렸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거대한 가방과 목과 어깨에 매달린 탄띠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허리와 다리를 보조하는 외골격 슈트가 매 순간 최고의 출력을 뿜어내며 전력으로 질주했다.


 쉴 틈은커녕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를 찾는 자매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메아리친다. 

 그녀가 뛰어갈 방향을 선택하는 매 순간 죽는 팀과 사는 팀이 나뉜다.

 지겹게 들어왔던 피닉스들의 불평을, 실키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판단은 사치였다.

 그저 한 팀이라도 더 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뻗을 뿐이었다.

 먼지 섞인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무너지는 콘크리트 사이로 튀어나온 실키는 레프리콘의 기관총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이윽고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브라우니 몇몇이 보였다.

 실키는 아직 안 늦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자매들을 향해 나아갔다.


 바드득, 옆에서 돌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수상한 기척을 느낀 실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바로 옆에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위로 나이트칙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앞에서 붉은 빛을 번뜩이는 철충을 본 순간 실키는 얼어붙었다.

 브라우니들이 급하게 멈춰서며 총을 들었다.

 그러나 나이트칙은 브라우니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실키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 시커먼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까지도 실키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두른 탄약과 폭탄이 쇳덩이가 되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스파크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쏜살 같이 날아온 무언가가 나이트칙을 낚아챘다. 그대로 콘크리트 잔해에 쳐박으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벽에 박힌 채 두 다리를 버둥거리는 나이트칙 위로 바이오로이드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마리 7호였다.


 나이트칙은 자신을 공격한 자가 누구인지 볼 틈도 없이 레이져에 벌집이 되었다. 

 곧이어 마리의 드론이 방어선을 넘어오려는 나이트칙들에게 푸른 광선을 퍼부었다. 천둥처럼 번뜩이는 레이져세례가 지나가자 기관총 진지를 침범했던 철충무리가 눈깜짝할 사이에 토막났다.


 사방에 정전기 폭풍이 휘돌며 피부를 찔렀다.

 격하게 휘날리는 코트 사이로 마리의 파란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정신 차려라 실키!!!"


 그녀의 천둥 같은 호통에 놀란 실키가 브라우니들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곧 실키가 떠난 반대방향에서 브라우니871이 헐떡걸리며 달려왔다. 그러다 주위에 총탄이 튀자 얼굴이 하얘져서 엄폐물 뒤에 숨었다.


 마리가 팔짱을 끼며 쳐다보았다.


 "브라우니가 그렇게 느려서 되겠나!"


 날아드는 총탄 속에 당당하게 서있는 그녀의 말에 브라우니871은 기가 막혔다.


 "저 브라우니 중에서도 느린 편 아님다! 그냥 대장님이 너무 빠른 검다!!"

 "하하!! 대답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가 보군!"


 치직, 통신이 왔다. 요란하게 울리는 총소리와 레프리콘의 목소리가 섞여들렸다.


 -대장님! 2차 방어선 우측으로 철충이 돌아들어옵니다!

 "퇴각하면서 이쪽으로 유인해라!"

 -퇴로가 막혀서 못 갈 것 같습니다. 그쪽으로 유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길동무 정도는 만들어주지."


 마리는 곧바로 통신채널을 바꿨다.


 "피닉스056, 2차 방어선 북동쪽에 우회하는 철충무리가 있다. 해당지역에 추가되는 지원사격 좌표를 이프리트와 공유해라. 이프리트 전원, 전달받은 지역에 집중 포격 개시."


 곧이어 방어선 뒤쪽에서 발사된 박격포 포탄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방어선 오른편의 건물 너머로 이프리트 포격이 떨어지자 불타는 먼지구름이 치솟았다.


 마리의 통신이 이어졌다.


 "레프리콘 882, 2차선 후퇴 현황 보고해라."

 -거의 끝났습니다! 3개 분대만 남았습니다!

 "해당 분대를 제외하고 얼마나 생존했나?"

 -지하조 인원까지 합해서 브라우니 98, 레프리콘 66, 실키 9, 아니 8, 이프리트는 전원 생존입니다!

 "좋아. 아직 반은 더 싸울 수 있군! 지상조는 집결하여 화력을 집중해라! 지하조 준비됐나?"


 타다다당!!

 2차방어선 아래의 지하상가에서도 총성이 격렬하게 메아리쳤다. 잡동사니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두고 버티려는 스틸라인과 넘으려는 나이트칙의 필사적인 힘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박살난 나이트칙의 잔해와 바이오로이드의 시체, 피와 기름에 젖은 탄피가 바리케이트 위에 두텁게 쌓여갔다.

 번뜩 번뜩 어둠을 밝히는 기관총 소리를 등진 채 레프리콘 하나가 소리쳤다.


 "폭파준비는 마쳤습니다만 오래 못 버틸 것 같습니다!!"

 -그럼 버티다 죽어라!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레프리콘이 바리케이트 위로 기관총을 갈겨댔다. 총구가 불을 뿜으며 빛을 발할 때마다 몰려드는 나이트칙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지상. 스틸라인의 2차 방어선 한 가운데.

 선두에 선 마리 7호를 중심으로 스틸라인의 화망이 점차 두터워졌다.

 

 팔짱을 끼고 선 마리의 눈빛이 철충무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미 절반이 넘는 병력이 전사했다.

 탄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그러나 철충의 군세는 건재했다.

 바닥도 없고 지치지도 않을 검은 파도.

 그 검은 파도가 피닉스의 포격을 뚫고 레프리콘의 탄막을 받아내며 밀려들어온다.

 스틸라인이 지켜왔던 모든 것을 짓밟으며 밀려들어온다.


 그럼에도

 마리의 푸른 눈동자는 열렬히 타올랐다.

 올곧게 편 단단한 등에는 단 한 점, 패배의 기색이 없다.


 그녀들은 패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그녀들은 스틸라인.

 그녀들은 무엇보다 단단한 인류의 방패다.


 지킬 것을 대신하여 부서지는 매 순간,

 그녀들은 승리한다.


 마리는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렸다.


 "싸워라 스틸라인!! 앞서 간 모든 자매들이 우리 곁에 있다!! 최후의 그 순간, 그 너머까지 우린 함께할 것이다!!!"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 철충무리를 향한다.

 레이져드론, '비홀더의 눈'이 푸른 빛을 번뜩였다.

 마리는 하늘을 찢을 기세로 목청을 터뜨렸다.


 "Standing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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