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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둥 같은 함성이 피부를 때리자 모든 스틸라인의 피가 격발했다.

 굴러다니던 브라우니는 물론 투덜거리던 이프리트마저도 괴성을 내지르며 가슴에 불을 질렀다.


 모든 총과 모든 포탄,

 스틸라인에게 남겨진 모든 불꽃이 폭풍우가 되어 몰아쳤다.


 사정없이 퍼붓는 화력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수많은 나이트칙과 빅칙이 박살나 주저앉았다.

 그러나 멈추는 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철충은 분명하게 화망을 돌파하고 있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언제 방어선이 뚫릴 것이다.

 언제 물자가 떨어지고, 언제 부대가 궤멸할 것이며, 언제 맘스베리가 무너질 것이다.

 그런 사실들은 더 이상 아무 의미없다.


 이제 그녀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단 한 가지를

 철충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녀들이 그 어느때보다도 단단해진 그 순간에


 비웃는 것처럼


 전장을 가르고 날아오는


 한 줄기 섬뜩한


 섬광이



 .............



 "쟤는 왜 이 상황에 어벙벙하고 있어?"


 칸의 등에 업힌 지휘관이 툴툴거렸다. 그가 죽을 상인 이유는 피닉스의 반응이 굼뜬 것도 있거니와 시원하게 구토를 해놓고도 멀미가 그치지 않은 탓도 있다. 지휘관에게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에도 칸은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도로를 질주했다.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스쳐지나갈 때마다 지휘관은 구역질을 하며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그제야 칸이 힐끔 시선을 주었다.


 "여기에 살아남은 블러디팬서가 하나 있다고 하더군. 방금 우리를 살려준 장본인이다."

 "그래서?"

 "그것뿐이다."

 "뭐 어쩌라는 거야."


 칸의 날카로운 시선이 무레스버그를 살폈다. 도시 밖으로 기어나오는 철충의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그렇지. 이제 업혀있기도 힘들다. 팔다리 떨어지겠어. 죽을 때 다 됐네."


 지휘관은 신맛 나는 입술을 핥으며 대충 대답했다.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칸은 하늘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명령해라 지휘관. 망설이는 바이오로이드를 부리는 데에는 인간의 명령이 가장 효과적이다. 호프필드에 도착할 때까지는 피닉스의 시야가 필요해."


 그는 여전히 멀미하는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칸의 통신채널을 빌렸다.


 "피닉스, 들려?"

 -들려 지휘관.

 "왜 그렇게 빙빙 돌고 있어?"

 -여기 아직 블러디팬서가 있는데, 부상이 심해서 움직일.......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지휘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그냥 걔 도와줘."

 -뭐?


 칸이 휙 돌아봤다. 지휘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블러디팬서가 아프니 도와주고 싶다는 거 아냐? 그럼 도와주러 가."

 -정말? 좋아. 지금 바로....... 아냐. 아니지 지휘관. 그건 아냐. 나는 지휘관을 호프필드로 데려가야 해. 그게 내 임무야.

 "너나 마리나 노예근성이......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지휘관.

 "여기 무레스버그 철충 놈들이 내 뒤통수에 총알을 날려대고 있단 말이야. 이대로 가면 나랑 칸은 그대로 포위된다. 그러니 너랑 블러디팬서가 여기 철충들 좀 막아줘. 나랑 칸이 적당히 벗어날 때까지만. 그 다음은 나랑 칸이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칸?"


 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칸도 동의했어. 지휘관과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의 전술적인 판단이다 이말이야. 귀관은 따라주면 좋겠는데."

 -그건...... 여기를 막고 나면? 그 다음은?

 "아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니까. 너는 그냥 블러디팬서 데리고 도망쳐. 네 앞가림이나 알아서 하라고."



 .................


 

 -.......팬서!


 어둠 속에 소리가 들려왔다.


 -블러디팬서!!


 한 번 더 소리가 울린다. 블러디팬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철근 같은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눈을 떠보니 수복실의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는 낭만적인 일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변함없이 깜깜한 어둠과

 방벽을 관통한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

 그 빛이 비추는 창백한 이오의 시체였다.


 -블러디팬서!


 몽롱한 의식 속에 다시 한 번 피닉스의 통신이 울렸다.

 블러디팬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듣고 있어. 쿨럭, 말해."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죽은 줄 알았잖아!

 "잠깐 죽어있었어. 그래서, 뭐 때문에 그래."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려. 구해줄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 말에 블러디팬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침울하던 눈동자가 희망의 빛으로 번들거렸다.


 "진짜? 지금?"

 -싫어?

 "하하, 싫을 리가 없잖아. 쿨럭, 어서 와주면 좋겠어."

 -지금 착륙할 데 찾고 있어. 주변의 철충만 처리하면 바로 내려갈 거야. 몸만 들고 갈 거니 장비는 전부 버려.


 블러디팬서의 눈이 이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결심한 듯이 답했다.


 "알았어."

 -몸 상태는 어때? 수복실까지 버틸 수 있겠어?


 블러디팬서는 웃으며 답했다.


 "하, 내가 누구인데. 나 블러디팬서야. 이 정도 상처로는-"


 문득 말이 멎었다.

 블러디팬서는 가만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배를 보았다.

 총상을 막고 있던 손에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강과

 축축하게 젖은 바지가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왠지 춥더라.


 블러디팬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깊은 숨이 한 번 그녀의 폐를 훑고 나왔다.


 -블러디팬서?


 이상한 낌새를 차린 피닉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블러디팬서는 최대한 차분하게 답했다.


 "지휘관님은? 인간이랑 같이 왔다면서?"

 -응? 그렇긴 한데, 지금은 갔어. 걱정 마. 내 너를 구할 거니까.

 "날 구하겠다고 남은 거야?"

 -지휘관이 직접 명령했어. 널 구하라고. 그러니까 걱정 마라고.

 "네가 없어도 돼? 지휘관님을 지킬 애들이 많이 있는 거고?"

 -......걱정 말라니까. 그냥 네가 살아남을 운수라고 생각해.


 블러디팬서는 이마를 움켜쥐었다. 장갑에 묻은 피가 얼굴에 들러붙었다.


 "아니야. 안 돼. 나는 이미 글렀어."

 -......


 혹시나 하던 말이 결국 나왔다. 피닉스는 눈앞이 깜깜해져 입을 다물었다. 블러디팬서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 상관없어. 쿨럭, 지금이라도 지휘관을 따라가. 그게 우리 임무잖아."

 -천하의 블러디팬서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한다니 믿기지 않는데. 정신차려. 할 수 있잖아. 조금만 견디라고. 지금 아픈 것만 어떻게든 참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이제 아픈 것도 안 느껴져서 하는 말이야."

 -그래도, 지금이라도 바로 가면 어떻게든.......

 "솔직히 네가 착륙할 때까지도 못 버틸 거 같아."


 매 순간 블러디팬서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빠지고 있었다. 피닉스는 착잡한 얼굴로 무레스버그의 위를 맴돌았다. 하늘은 드넓었지만 나아갈 길이 보이질 않았다.


 블러디팬서는 약해져가는 숨결을 붙잡으며 한 마디 한 마디 명확하게 말했다.


 "피닉스, 난 괜찮아. 가."

 -......


 괜찮은 것은 없었다.

 피닉스는 아직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공장에서 눈을 뜨자마자 전선에 배치된 후부터 지금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전부

 하나도 괜찮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해내야 했던 일. 실패와 포기. 그리고 납득.

 단 하나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블러디팬서.


 피닉스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어. 너랑 같이 여기 남은 철충이 쫓아오지 않게 막으래. 포위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아... 피닉스, 피곤하게 하지 마. 칸이랑 같이 왔다면서? 여기 철충들은 날고 기어도 호드 못 따라가. 포위 같은 건 절대 안 당한다고. 알잖아."

 -지휘관은 명령을 내렸고 나는 따를 뿐이야. 어차피 아까 총소리를 듣고 네쪽으로 철충들이 가고 있어. 거기 앉아있다가 철충들이 방호벽 까고 널 끄집어내 죽이길 기다려도 상관없어.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이제부터 나랑 같이 무레스버그의 철충들을 박살내고, 본부로 귀환해서 수복실에 드러눕는 거지. 인간의 명령대로 말이야. 어때?


 블러디팬서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어차피 나한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러니까 그 남은 시간동안 더 싸워.


 어처구니가 없었다.

 블러디팬서는 반쯤 웃으며 물었다.


 "싸우라고?"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징징대지 말고 한 놈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라고! 그게 네 역할이잖아! 블러디팬서라는 이름은 장식이야?!


 분노와 억울함

 두 가지 부싯돌이 블러디팬서의 죽어가던 눈동자 안에 작은 불을 피웠다.


 "내 역할은 스틸라인이 퇴각할 때까지 버티는 거였어!! 우린 이미 역할을 다 했다고! 우린 죽는 그 순간까지 다 했어!"

 -넌 아직 살아있어 블러디팬서! 네 역할은 끝나지 않았어!

 "망할 역할 같은 소리! 네 역할은 뭔데 나한테 그렇게 말해?"


 그녀의 질문에 피닉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네가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놈들을 정말로 지옥으로 보내주는 역할이지!

 "뭐! 아니......... 어이가 없네....... 하, 어이가 없어. 피곤하게........"


 쿨럭 쿨럭, 거칠게 기침하던 블러디팬서가 입을 한 번 스윽 닦았다. 장갑에 검은 피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블러디팬서는 그 피를 가만히 보더니

 옆에 있는 이오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자신의 피를 보고

 이내 또 한 번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검붉은 이를 악물고,

 블러디팬서는 몸을 일으켰다.


 "철충이 많이 남았어?"

 -철충은 언제나 많이 남아있어.

 "그랬지. 죽을 때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네."


 너덜너덜한 몸이 중기관포를 들어 올렸다. 방호벽 밖으로 내민 총구가 세상을 겨눴다.

 지켜야할 모든 것을 짓밟고 서있는 시커먼 벌레들을 향해,


 "어디 실력 좀 볼까 피닉스!"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나와야지!


 쾅! 피닉스의 대포소리가 울린다.



 ..........



 쾅 쾅 콰쾅


 등 뒤로 멀찌감치 피닉스의 포격소리가 울려왔다. 지휘관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어째 나 지킬 때보다 신나게 쏴대네. 하아암-"

 "하품이 나오나? 너는 변함없이 태평하군."

 "죽기 직전이라 초연해졌나봐. 그냥 막 졸리네."


 칸은 회피기동을 멈춘 채 올곧게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미 철충의 화망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무레스버그의 두 발 달린 철충들은 결코 그녀를 따라올 수 없었다. 지휘관이 말했던 '포위 당하는 상황' 따위는 호드 무리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면 몰라도 칸 개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부대원들과 떨어져 혼자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피닉스의 시야가 필요하다고 했을 텐데."

 "에이, 신속의 칸이 있는데 어떻게든 해주겠지."

 "네가 죽는다고 내 수명까지 같이 깎을 셈이군."

 "대장이나 되는 녀석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칸은 그다지 싫은 기색없이 대꾸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나는 대장급으로 설계된 모델이 아니다. 너도 알텐데."

 "어쩐지 마리 같은 고상한 말투를 안 쓰더라니. 근데 상관없어.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들거든."

 "그런가?"

 "그래. 너도 한 20년만 지나봐라. 부하들한테 '너'라고 안하고 '자네'나 '귀관'이라고 하고 있을 걸. 그 칼 같은 말투도 사무실 아저씨마냥 유들유들해질 거고. 시간은 아무도...... 하아암."


 그의 늘어지는 하품소리에 냉정하던 칸이 피식 웃는다.


 "상상이 안 되는군."


 우욱, 하품하던 지휘관이 또 구역질을 한다. 고통스럽게 허덕이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칸이 물었다.


 "너는 정말로 살고 싶다는 희망이 없는 건가."

 "그렇게 우울하게 보여? 아냐. 나도 살고 싶지. 근데 현실이 그게 되나."

 "그렇다기보다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아서 말이지. 너를 지키겠다는 바이오로이드들을 굳이 하나 둘씩 쳐내고 이제 나밖에 안 남지 않았나."

 "너는 나 호프필드까지 데려다 줘야지."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지휘관에게 칸은 다시 물었다.


 "호프필드에 도착해서, 나까지 쳐내고 나면, 그 다음은 어쩔거지?"

 "어쩌기는. 내 다리로 걷는 거지. 그러다 때 돼서 죽는 거고. 나 죽을 때 너희들이 옆에 있을 필요 없잖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들은 네들 가고 싶은대로 가라는 거야. 가망도 없는 인간 옆에서 붙들고 있지 말고."


 칸은 대답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길게 이어진 도로 너머에 붉은 빛이 섞인 먼지구름이 보였다. 지휘관을 쫓아온 철충 본대였다.

 점차 그녀의 진로를 덮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철충무리를 보고도 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피닉스가 부탁했다. 레프리콘을 꼭 복귀시켜 달라고."

 "갑자기 웬 레프리콘."

 "마리가 레프리콘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다더군."

 "걔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뭔 수로 챙겨.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랑 같이 보내질 말았어야지."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휘관은 썩 맘에 들지 않는지 곧바로 화제를 옮겼다.


 "야 근데 내가 죽긴 죽어도 여기서 철충 총맞아 죽긴 싫은데."


 그녀의 침묵을 찔러보듯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나 호프필드 갈 수 있는 거 맞지?"

 "글쎄. 지금부터 저 앞에 오는 철충무리를 우회해야 하는데 기동장치의 연료가 모자란다. 운이 좋다면 호프필드에 갈 수도 있겠지. 운이 없다면 벌판에 주저 앉아 철충들이 죽이러 오길 기다려야 할 거고."

 "왜 기름이 부족해?  신속의 칸이 거리계산도 못 했어?"

 "공중 지원이 없으니 철충이 어떻게 퍼져있는지 알 수 없다. 철충이 어떻게 퍼져있는지 모르니 얼마나 우회해서 가야할 지도 알 수 없지. 얼마나 가야할 지 모르니 얼마나 연료가 필요할지도 알 수 없고."


 칸이 짖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이제 좀 피닉스를 보낸 게 후회되나?"

 "에라. 그래. 그냥 일이 좀 안 풀렸다고 치지 뭐."

 "잘 풀릴 리가 있나. 갑자기 무레스버그로 진로를 바꾸질 않나, 철충이란 철충들은 죄다 끌어모으질 않나, 이제는 유일한 공중 지원까지 포기했다. 덕분에 나는 부대원들 해산시킨 것도 모자라 목숨 걸고 도박까지 하게 생겼고. 원래 계획대로 갔다면 진작 호프필드에 도착했을 것 아닌가."

 "불만이 많구만. 하긴 이 상황에 불만이 없으면 네가 보살이지 바이오로이드냐."


 칸이 지휘관을 고쳐업으며 속도를 높였다.


 "그래도 네 선택들이 싫지는 않다."


 의외의 대답에 지휘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또 뭔 소리래. 나 때문에 네 부대원 하나 병신 됐을지도 모르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그건 내 잘못이다. 네 탓을 할 생각은 없어."

 "하아암-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라. 아우, 되게 졸리네."


 칸은 잡담을 끊으려는 듯이 차갑게 말했다.


 "최대한 짧은 거리로 우회할 거다. 당연히 놈들이 있는대로 다 쏴댈테니 꽉 잡아라."


 그녀의 진지한 목소리에도 지휘관은 대답이 없었다.

 칸이 등을 한 번 흔들었다.


 "대답해라. 설마 또 졸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지휘관."

 "........."

 "지휘관!! 일어나라!!"


 칸이 계속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다. 그는 완전히 잠에 빠져있었다.


 앞길을 포위해가는 철충무리를 보며 칸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힘써야 할 때만 일부러 잠드는 것 같군."


 그녀의 기동장치가 속도를 높이며 더욱 큰 소리를 냈다.



 ...........



 텅 텅 텅 텅!

 묵직한 총성과 함께 중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블러디팬서는 무레스버그에서 멀어지려는 철충부터 차례대로 총알을 박아넣었다. 대구경탄환에 맞은 나이트칙들은 구멍이 뻥 뚫려 주저앉았다. 몇몇이 블러디팬서를 향해 응사했지만 그녀의 단단한 방호벽에 전부 튕겨나갔다.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 이 새끼들아!!"


 방호벽 안이 총알 튕기는 쇳소리로 매섭게 울려댔지만 블러디팬서에게는 익숙한 리듬일 뿐이었다. 그녀의 중기관포가 덤벼드는 철충들을 모조리 벌집으로 만들어주었다. 큼직한 탄피가 툭툭 떨어지며 그녀의 발을 덮어갈 때마다 산산조각난 나이트칙이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렀다.


 -9시 방향에 빅칙!


 피닉스 통신을 들은 블러디팬서가 재빨리 총구를 돌렸다. 방호벽의 좁은 틈 사이에 빅칙이 보였다. 그 커다란 쇳덩이는 건물 사이로 나오자마자 블러디팬서를 향해 기관포를 겨눴다.


 쾅쾅쾅쾅!!

 빅칙의 중기관포가 요란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콘크리트도 두부처럼 뚫어버리는 대구경탄 세례가 블러디팬서의 방호벽을 덥쳤다.


 쾅 쾅 쾅콰쾅!!!

 방호벽이 요란하게 들썩이며 큰 소리를 냈다. 철판의 표면에 붙어있던 먼지가 충격에 터져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방호벽 사이로 블러디팬서의 중기관포가 번뜩였다.


 텅! 텅 텅 텅!


 그녀의 기관포탄이 빅칙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빅칙은 두터운 장갑으로 버티며 계속해서 블러디팬서를 공격했다. 두 중장갑 유닛의 정면대결이었다.

 이내 빅칙의 까만 장갑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장갑이 파괴되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빅칙의 내부가 터져나갔다. 그 크고 무겁던 철충이 기능을 멈추고 주저앉아 불타기 시작했다.

 빅칙의 불타는 몸뚱이를 꿰뚫어 반토막을 내고 나서야 블러디팬서는 총구를 돌렸다.


 -괜찮아?

 "저런 놈들 따위로 나를 잡겠다고? 자존심 상하지."

 -9시 방향에 착륙할 위치 찾았어. 주변 철충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좀 더 정리하면 갈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그때까지 견뎌!

 "얼마든지 오라고 해. 다 죽여버릴 테니."


 블러디팬서의 힘이 들어간 눈동자가 이오의 시체를 힐끔 본다.


 "보고 있어 이오? 복수해줄게. 널 죽인 철충놈도, 스프리건이랑 칼리스타를 죽인 놈도, 다 찾아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기관포를 쏘았다. 묵직한 반동에 몸이 흔들릴 때마다 복부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렀다. 흠뻑 젖은 방탄복 아래로 뚝뚝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흐르는 피만큼이나 기관포도 빠르게 탄을 쏟아냈다.


 텅! 텅텅! 텅!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릴 거야!"


 텅텅텅!! 텅텅!!


 "아머드메이든은 아직 지지 않았어!!"


 울부짖으며 토해낸 분노가 철충들을 집어삼켰다. 그녀를 노리고 도로에 나온 철충들이 모조리 중기관포에 찢겨나갔다.

 기관포가 요란하게 울리는 방향의 반대에서는 철충들이 블러디팬서의 사각을 향해 묵직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방호벽에 다가가보기도 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격에 휘말려 산산조각 났다. 폭발로 건물이 무너지며 블러디팬서의 뒤로 다가갈 길마저 막혔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버둥거리는 철충 위로 또 한 번 포격이 떨어졌다.


 상공의 피닉스도 쉴 틈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단 한 명이 보내오는 표적신호

 단 한 명에게 가는 시선

 단 한 명에게 필요한 도움

 선택할 필요 따윈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순간.


 피닉스의 감각은 그 어느때보다도 날카롭게 서있었다.

 포격의 우선순위, 폭발의 범위, 방아쇠 한 번 당길 때의 이득과 손실, 지형파괴에 따른 부수효과,

 모든 것이 명확한 선을 그리며 머릿속을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고, 찰나의 시간조차 낭비 하지 않으며, 모든 판단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


 블러디팬서, 단 하나의 자매에 집중한 피닉스는 매 순간 그야말로 최고의 능력을 뿜어내고 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빠르게 쓰러져가는 철충들을 보며 피닉스는 계속 되뇌였다.

 지상에서는 사방에서 터지는 포격과 총성에 지지않으려는 듯이 블러디팬서가 더 크게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더 와 벌레새끼들아! 더 오라고!! 난 아직 이만큼이나 살아있다 이 새끼들아!!"


 철충들은 이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더욱 거세게 맹공을 퍼부었다.

 총탄이 방호벽에 튕기는 소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블러디팬서! 지금 오는 녀석들만 처리하고 착륙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쪽으로 와!

 "아직도 날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이미 이만큼 저질러 놓고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놈들이 더 몰려들면 기회도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블러디팬서는 멍해지는 머리를 마구 치며 깨웠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입이 체념한 듯이 소리쳤다.


 "알았으니까 어서 오기나 해! 기어서라도 갈 테니까!"


 피닉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좋아 그럼 내가 신호하면 바로-


 그 순간 지상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이더니


 쿵


 지금까지 들려왔던 총알 튕기는 소리와는 다른

 어떤 불길한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긁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아아아아아아악!!!!"


 블러디팬서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놀란 피닉스가 급하게 외쳤다.


 -블러디팬서? 무슨 일이야 블러디팬서? 블러디팬서!?


 블러디팬서는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방호벽 안을 구르고 있었다.

 터져버린 오른팔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와 뼛조각, 근섬유뭉텅이가 그나마 남은 흔적이었다.

 방호벽에 뚫린 주먹만한 구멍에서 빛이 새어들어온다.


 "이 개새끼! 이 개새끼들이!! 아아아아악!!"

 -정신차려 블러디팬서!


 쏟아지는 총탄이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와 피닉스의 외침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블러디팬서는 피를 흩뿌리며 마구 발버둥쳤다.

 그녀의 비명소리가 격해질수록 피닉스는 더욱 조급해졌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번쩍

 한 번 더 지상에 번뜩이는 섬광


 쿵

 연이어 울리는 관통음.


 방호벽에 또 하나의 구멍이 뚫렸다.

 그와 동시에 블러디팬서의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피닉스는 입을 다물었다.

 맹렬한 총알 소리속에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긴장 섞인 땀이 흐른다.


 한참이 지나도 블러디팬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블러디팬서.......?


 피닉스가 조심스럽게 불러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어째서 마리 모델에게 '불굴'이란 칭호가 붙었는가.


 마리가 있다면 스틸라인은 승리할 것인가? 아니다.

 마리가 없다면 스틸라인은 패배할 것인가? 아니다.


 스틸라인은 군대다.

 세상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승리할 때가 있고 언젠가 패배할 때가 있으며, 이 법칙이 마리라는 한 개체에 의해 바뀔 일은 없다.


 하지만

 마리가 있기에 스틸라인은 계속 싸울 것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난적이 상대라도 싸울 것이며, 이미 그 적들이 머리를 짓밟고 있더라도 싸울 것이다.


 무수히 담금질하는 시뻘건 강철처럼

 스틸라인은 계속 역경을 버텨낼 수 있다.


 그렇기에 '불굴의' 마리다.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 스틸라인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은 염원이기도 했다.

 그녀가 쓰러진다면, 스틸라인 또한 쓰러질 것이니.


 그 어떤 힘과 역경에도 부러지지 말고 굳건히 버티라는 의미로,

 불굴이란 칭호를 받아,

 마리 모델은 스틸라인의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그렇기에


 전장을 가르고 날아오는


 한 줄기 섬뜩한


 섬광이


 마리 7호의 가슴을 꿰뚫었을 때에


 신처럼 당당하던 그녀의 등이 피를 터뜨리고

 자랑스럽던 코트가 찢겨 날아가던 때에


 맘스베리의 모든 스틸라인은 숨을 삼켰고

 강철전선은 찢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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