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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칵

 입에서 뭔가가 터져나왔다. 장갑으로 슥 닦아보니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 그녀는 피에 젖은 장갑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철컥 철컥


 그녀의 등 뒤로 나이트칙의 발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철충이 방어선의 잔해를 기어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칙들의 총구가 일제히 마리의 등을 겨눈다.


 피범벅이 된 입이 웃는다.


 맹렬한 스파크가 튀며 금발이 휘날리고

 눈동자는 다시 한 번 파랗게 빛났다.



 ...........



 퉁 투둥 퉁


 철판에 총알이 튕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블러디팬서! 제발 대답해 블러디팬서!


 피닉스가 자꾸 소리쳐댄다. 꿈틀꿈틀 피만 토해대던 블러디팬서는 똑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피와 뼛조각이 진득하게 들러붙은 왼손이 느릿느릿 바닥을 기었다.

 단단한 쇳덩이가 잡혔다. 중기관포였다.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며 윗몸을 일으켰다. 허전한 오른쪽 어깨 때문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간신히 방호벽에 등을 기대고 나니 새어들어오는 빛속에 그녀의 복부가 보인다. 파편에 헤집어져 어디가 살이고 어디가 옷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저 다 빨갛다.


 쿨럭, 쿨럭,


 그녀는 계속 피를 토하며 숨을 삼켰다. 불처럼 달아오른 공기가 목구멍을 찔러댔다.


 "피, 피닉스......."


 위태로운 촛불처럼 떨리는 목소리에 곧바로 피닉스가 답해왔다.


 -블러디팬서! 아, 아아, 다행이야. 살아있어! 살아있구나!

 "어디, 서 쏴, 쐈는지....... 봤어?"

 -방벽 뒤쪽 5시 방향인 거 같아. 갑자기 빛이 번쩍여서 정확한 위치는 못 봤어 건물 안에 숨은 거 같은데.

 "아..... 거기였, 구나 썅...... 쿨럭, 컥....."

 -몸은 괜찮은 거야 블러디팬서?


 블러디팬서는 중기관포를 품으로 당겼다. 왼팔의 근육도 손상된 모양인지 기관포를 들 수가 없었다. 여전히 방벽에 철충의 총탄이 쏟아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마워 피닉스........ 너, 넌, 최고야........"


 블러디팬서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그녀가 기대고 있던 방호벽에 지저분한 핏자국이 길게 남았다.


 -블러디팬서......


 피닉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맹렬하게 방호벽을 두들기는 총탄 소리 안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쉴 차례가 왔다는 듯이.


 .......그러나


 훗날 '스토커'라고 불리는 이 철충개체는 블러디팬서에게 느긋한 안식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콘크리트 폐허 아래 숨은 스토커의 견고한 대포가 블러디팬서의 방호벽을 겨누고 있었다. 이 철충의 상체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양 같은 생김새의 에너지 생성기가 꿈틀거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오는 출력이 대포의 탄환이 될 것이고, 그 위력은 이미 여러번 블러디팬서의 방호벽에 구멍을 내면서 확실히 증명되었다.


 파지직, 위협스러운 섬광을 번뜩이며 스토커의 종양이 다시 한 번 꿈틀댔다. 어마어마한 고출력 에너지가 스파크를 튀길 때마다 폐허 안의 그늘이 환하게 빛났다. 신경질적으로 반짝이는 빛무리가 스토커의 대포 안에 모이며 불안하게 진동했다.


 이번 한 발로 블러디팬서를 확실하게 마무리한다면, 다음은 하늘을 맴도는 피닉스의 차례다.


 스토커는 망설임 없이 블러디팬서의 방벽을 향해 포를 쏘았다. 시야가 타들어가는 강렬한 섬광이 일직선으로 날았다.

 이미 수 차례 구멍이 뚫린 방호벽은 스토커의 포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빛이 충돌한다.

 빅칙의 기관포조차 버텨내던 철판이 나무판자처럼 간단하게 떨어져나갔다.


 뚫린 게 아니라, 떨어져나갔다.


 고정장치가 해제된 탓에 방호벽이 포격을 버티다 뚫리지 않고 그대로 함께 날아갔다. 강렬한 빛이 방호벽으로 쌓여있던 어둠을 날려버리며 환하게 시야가 트였다.


 바짝 드러누운 채로 정강이에 중기관포를 거치한 블러디팬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분명하게 스토커를 향하고 있었다.


 "찾았다 이 새끼."


 텅!

 중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단 한 발의 반동에 블러디팬서는 기관포를 놓쳤다.


 총알은 올곶게 날아가 스토커의 몸뚱이에 정확히 꽂혔다.

 상체 일부가 날아간 스토커가 푹 주저앉는다.


 블러디팬서는 팔을 뻗어 기관포를 쥐었지만 다시 몸으로 끌고 오질 못 했다. 피투성이로 혹사당한 팔에는 더 이상 제기능을 할 근육이 남아있지 않았다.


 탕 타다다당!

 철충들의 탄환이 계속 쏟아진다. 블러디팬서는 몸에 몇 발의 총알이 박히면서도 벌레처럼 기어 남아있던 방호벽 뒤로 숨었다. 공기 반 피 반의 거친 호흡을 이어가며 그녀는 다시 중기관포를 품에 안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폐허 안에서 다시 빛이 빛난다.

 스토커의 충전이 내는 빛이다.


 블러디팬서의 충혈된 눈이 스토커의 빛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체에 피격되고도 핵심기능에는 이상이 없었는지, 스토커는 너무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


 블러디팬서는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과 동시에

 불벼락이 폐허를 내리 뚫는다.


 스토커가 있던 자리가 통째로 폭발하며 화염을 터뜨렸다. 콘크리트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며 먼지구름이 치솟았다.

 폭발의 열기에 눈을 감았던 블러디팬서가 다시 스토커를 보았을 때, 남아있는 건 화염과 잿더미뿐이었다.


 -제대로 맞췄어?

 "하하....... 제, 제법인데 피닉스. 쿨럭, 쿨럭."

 -표적지시탄은 이오 거로 식별되네. 철충들 뻥뻥 뚫어대길래 뭔 총인가 했더니.

 "좀 빌렸지."


 피닉스는 안도할 틈 없이 주위를 살폈다.


 -아직 철충들이 남아있어. 놈들만 처리하고 어서 가자고. 마지막 한 번만 힘을 쥐어짜내봐.


 블러디팬서는 철충의 총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총알이 방호벽을 두들길 때마다 등 뒤로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야지. 쿨럭, 쿨럭."


 중기관포를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숨이 격해진다.


 "어딜 이, 이 따위 것들이 블러디팬서를 잡, 으려고."


 이를 악물며 기관포를 든다. 철근처럼 무겁던 기관포가 마술 같이 총구를 돌렸다.

 방호벽 위로 포신을 올리며 블러디팬서는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두고 봐라 이 새끼들, 두고 봐라. 수복실 가, 가서, 몸 단장 한 번 하고 오면, 전부 궤도로 밟아버리겠어."


 쾅! 쾅!


 피닉스의 포격이 연달아 터졌다.


 -블러디팬서! 이 악물고 버티고 싸워! 놈들이 가까워지고 있잖아!

 "두고 봐라...... 두고 봐 벌레 새끼들......"

 -블러디팬서!


 철충의 총소리, 총알 튕기는 쇳소리, 피닉스의 고함 소리가 섞여,


 숨소리 속으로 침몰되어 간다.


 "나는 죽지 않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쿨럭, 아머드메이든은 지지 않았어......."


 어느 순간엔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문득

 블러디팬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하늘 어딘가에 피닉스가 있을 텐데 시야가 흐려 보이지 않는다.


 "쿨럭, 쿨럭, 으욱, 퉤."


 걸쭉하게 피를 뱉어낸 그녀는


 "후우."


 어느 때보다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에 젖은 손에 힘이 풀리며 기관포가 넘어졌다.

 몸이 푹 주저앉으며 방호벽에 등을 기댔다.


 -팬서?


 피닉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부른다. 블러디팬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아 있는 이오가 보였다. 흙먼지에 얼룩진 차가운 얼굴. 평온해 보이는 표정에는 눈물자국이 길게 남아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렵고 슬펐던 것일까.


 "피닉스."

 -왜 그래?

 "스틸라인은....... 잘 후퇴했어?"


 피닉스는 숨을 삼켰다.

 철충들이 블러디팬서의 방호벽에 도달하는 장면이 똑똑히 보였다.

 약해진 먹잇감을 둘러싼 늑대처럼

 천천히, 확실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무 가까워져서 피닉스의 포로 쏠 수 없을 지경까지.


 그제서야

 블러디팬서가 총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피닉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녀는 말했다.


 -스틸라인은 맘스베리로 안전하게 후퇴했어. 상부의 지원을 받아 병력을 보강 중이야. 곧 철충들을 밀어낼 수 있다고 들었어.


 철컥, 나이트칙의 발걸음이 방호벽 옆에 닿았다. 그 시커먼 철충이 몸뚱이를 돌려 블러디팬서를 내려다보았다.

 나이트칙의 총구가 자신의 뒤통수를 향하는 순간에도, 블러디팬서는 이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마워 아머드메이든. 임무 완수야.


 그 말에 블러디팬서는 활짝 웃으며 이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들었지?"


 타다다당!!


 나이트칙의 총성이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모든 것을 확인한 피닉스는 그제야 지긋이 눈을 감았다.



 ............



 개걸스럽게 탄띠를 빨아삼키던 기관총이 뚝 멈췄다. 레프리콘이 난처한 얼굴로 빈 탄통을 살폈다. 쳐다본다고 없는 총알이 생길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이트칙들은 방어선을 향해 달려오며 총을 쏴대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탄환을 피해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엄폐물 뒤에 바짝 엎드렸다.


 "브라우니! 실키 상병님 갔어요?"

 "간 지 한참 되셨슴다! 저도 진작 탄 떨어졌지 말임다!"


 콘크리트가 부서지며 브라우니의 머리 위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털며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로든 가야 함다! 이대로는 개죽음이지 말임다! 저희 이제 어디로 감까?!"

 "저도 몰라요! 마리 대장님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고. 다른 자매들이 어디로 모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리 대장님 전사하신 검까? 아까 그 커다란 광선 맞으신 것 같지 않슴까?"


 레프리콘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른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마리 대장님이 그렇게 갑자기-"


 그 순간 마리의 7호 통신이 닿았다.


 -주목. 2차 폭파 실패. 반복한다. 2차 폭파는 실패다. 전 병력 3차선으로 후퇴한다. 탄이 남은 분대가 엄호하고, 나머지가 먼저 이동한 뒤 보급, 엄호조와 교대해라.


 그녀의 목소리에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이동하며 사용가능한 화기를 전부 챙기, 쿨럭, 쿨럭 쿨럭........ 화기를 전부 챙기도록.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불안한 예감을 찢어버리듯이 마리는 천둥처럼 소리쳤다.


 -당장 움직여라!!


 그 외침에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틸라인의 방어선 전체가 동시에 움직이며 전선의 대립상황이 무너졌다. 철충은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오며 스틸라인을 쫓았고 스틸라인은 다음 방어선까지 전력질주 했다. 더욱 급박하게 쏟아지는 피닉스의 포격이 지상의 자매들을 약간이나마 보호해줬다.


 마리의 레이져드론, '비홀더의 눈'도 맹렬하게 레이져를 퍼부으며 철충의 진격을 늦췄다. 푸른 스파크를 퍼트리며 떠오른 그녀의 몸이 빠르게 후퇴하며 나이트칙들의 시선을 끌었다.


 "지하조! 지하조 응답해라! 생존자 없나?"

 -레프리콘 108입니다! 지금 3차 폭파위치로 이동 중 입니다!!


 통신 속에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통로 너머로 들려오는 나이트칙의 격발음도 섞여있다.


 "3차 폭파는 가능한가?"

 -기폭 장치가 없어요! 지금 수동으로 폭파시키러 이동 중 입니다!! 3분 정도 걸릴, 브라우니!!

 -늦었어요! 앞에 봐요!!

 -비켜요! 내 브라우니가-

 -안 된다니까요 이런!!!


 총성과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마리는 입 안에 고인 피를 한 번 뱉어내고 소리쳤다.


 "지하조! 운용가능한 병력은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계속 움직여라!! E-32번 지지대를 폭파한다!!"

 -레프리콘 6002입니다!! 지하조 생존 인원 셋, 지금 E-32번 지지대로 갈게요!!

 -E-32가 어딘지 아심까!?

 -몰라요! 방금 게 E-11이니까 같은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오겠죠! 일단 달려-


 통신이 끝났다. 끝에 탐탁지 않은 내용이 덧붙었지만 마리에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추적해오는 나이트칙들의 총알이 그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호위조의 레프리콘들이 몰려드는 철충을 향해 기관총을 쏴댔지만 파도에 돌맹이를 던지는 것 같았다. 기관총이 쏘아대는 탄알보다 나이트칙이 많아보일 지경이었다.

 나이트칙 추격조가 매서운 속도로 따라붙으며 후퇴하는 스틸라인들을 하나 하나 잡아 죽였다. 뒤통수를 두드리는 비명과 총성을 뒤로 한 채 이프리트 셋이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작은 체구가 붙들고 있는 커다란 박격포가 세상에 둘도 없는 족쇄가 되고 있었다.


 "야 브라우니들아 이것 좀 나눠 들어줘라! 실키! 실키라도 들어줘야 할 거 아냐! 이걸 어떻게 들고 뛰냐고!"


 가장 앞서 뛰던 이프리트가 마구 소리쳤다.


 "애들 손이 비어있어야 싸우던가 말던가 하지 들어주라 해서 뭐하게!!"

 "둘 다 좀 조용히 좀 해 안 그래도 숨차 죽겠는데! 그러다 탄 떨궈서 터치지나 말고!"


 뒤따라 달리던 둘이 핀잔을 줬지만 선두의 이프리트는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망할 철충 새끼들! 죽기 전까지 땀흘리게 하네 진짜!"


 그 순간 주위에서 호위하던 브라우니 하나가 뒤로 총구를 돌리며 소리쳤다.


 "칙 붙었슴다! 더 빨리 달리시지 말임다!!"


 타다다당!! 브라우니들이 일제히 뒤를 향해 총질하기 시작했다. 이프리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내달리며 욕을 내뱉었다.


 그러다,


 팅!


 가장 후방에서 달리던 이프리트 몸에 무언가 튕기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스파크가 튀었다.


 쾅!


 굉음과 함께 피안개가 터졌다. 충격으로 날아간 두 이프리트가 땅을 굴렀다.

 브라우니 하나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병장님 괜찮으심까?!"


 브라우니가 이프리트 하나를 질질 끌고가며 묻는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린 이프리트가 뿌연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브라우니들이 나이트칙과 대치 중이었다. 폭발지점에서는 다른 이프리트가 토막난 다리를 부둥켜 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일 뒤에 따라오던 이프리트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까만 폭발자국과 근처에 들러붙어있는 작은 살덩어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편 레프리콘 4405와 브라우니 871을 포함한 일곱의 스틸라인은 콘크리트 잔해 뒤에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벽 너머로 스틸라인을 쫓아 달리는 나이트칙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레프리콘 4405가 손짓하자 다른 병사들이 잔해를 따라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격수를 어떻게 찾아요?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알아야죠."


 다른 레프리콘 하나가 속삭이듯이 작게 물었다. 레프리콘 4405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마리 대장님이 그곳에 꼭 나타날 거라고 했어요. 완벽한 저격 장소는 거기뿐이라고......."

 "거기 안 나타나면 어떡해요? 만약에, 마리대장님이 유인에 실패하면?"

 "해보는 수 밖에 없잖아요. 마리 대장님을 믿어요."

 "거기에 빅칙 하나라도 있다면 브라우니들 못 지켜요."

 "브라우니들도 알아요."


 레프리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철충의 흐름을 몰래 거슬러 올랐다. 브라우니 871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빛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맘스베리의 마지막 방어선,

 제 3차 방어선에 스틸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앞서 도착한 실키가 있는 탄창을 모조리 쏟아놓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브라우니들이 탄창을 잔뜩 품에 안았다.


 타다당!! 타다다다당!!


 레프리콘의 기관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철충이 근접했다는 의미였다. 탄을 보급한 스틸라인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방어선으로 달려나갔다.

 미사일처럼 날아온 마리가 방어선 중앙에 멈춰서며 먼지폭풍을 일으켰다. 그녀는 곧바로 철충이 다가오는 방향을 보며 소리쳤다.


 "레프리콘 882! 살아있나!"

 -살아있습니다! 지금 실탄보급 중이에요!

 "3차선 후퇴 현황 보고해라!"

 -도착한 인원은 브라우니 33, 레프리콘 21, 실키 둘, 이프리트 하나 입니다! 나머지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고생했다! 이제 전투에 전념하도록!"

 -알겠습니다!


 아직 후퇴 중인 몇몇 스틸라인을 쫓아 나이트칙들이 달려왔다. 곧 빅칙들도 그 거대한 몸을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리는 철충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자매들을 엄호하라!! 사격개시!!"


 방어선의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몸을 숨긴 스틸라인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철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리어 쏟아지는 역습에 스틸라인의 방어선이 두들겨 맞는다. 빅칙의 대구경총알이 엄폐물을 뚫고 나이트칙의 탄막이 스틸라인을 내리 눌렀다.


 숨을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마리는 당당하게 섰다. 그녀의 피투성이 몸을, 그러나 굽히지 않은 그 몸을 본 스틸라인들은 하나 같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 안에는 절망과 경이로움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마리를 본 뒤에는 움츠려있는 자가 없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납탄 세례에 맞서, 그녀들은 바위처럼 싸웠다.


 두려움이 없기는 철충도 마찬가지. 방어선에 근접한 나이트칙들이 박살나는 그 순간까지 총알을 흩뿌려댔다.

 마리는 오른쪽 어깨로 머리를 보호하며 소구경탄을 맨몸으로 버텨냈다. 납탄에 살이 파이며 피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서 와라. 나만 죽이면 네놈의 승리가 아니던가."


 피에 젖은 이를 악물었다.


 "쏘지 않고는 못 배길 텐데."



 ............



 "이 버러지새끼들아!!"


 쾅! 쾅!


 피닉스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블러디팬서를 둘러싸고 있던 철충들이 포격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더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녀의 포탄이 맨땅을 터트린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떠날 자는 떠났고 남을 자는 남았다.


 "이것도 운이 없는 거야?! 이것도 운이 없는 거냐고!!"


 그러나 피닉스는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구해준다고 했잖아...... 했는데......."


 철충들은 이미 건물 아래로 숨어들었다. 하늘에 있는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쏘려고 해도 뭘 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이를 악물던 피닉스는 이내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이제......"


 지휘관은 알아서 하라고 말했었다. 그의 말은 명령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지금 그녀에게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러나 피닉스는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더 이상 응답할 이 없는 무레스버그의 하늘을, 그저 맴돌 뿐이었다.


 그때 경고신호가 울렸다. 피닉스가 반사적으로 레이더를 확인하니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비행체 셋이 감지됐다.

 속도로 보아 헤비스카우트였다.


 "어디서 자꾸 스카우트가 나오는 거야! 전부 다 처리했다고 했잖아! 도대체 뭘 처리한 거냐고!"


 피닉스가 툴툴거리며 스카우트를 피해 방향을 틀었다. 대공병력의 엄호가 없는 상황에 스카우트에게 노출된다면 그녀로서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움직여야한다. 어디로 가든 지금 당장 격추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피닉스의 비행모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래 떠있는 걸 중점에 두고 설계된 피닉스 모델은 스카우트를 떨쳐낼만큼 빠르지 않았다.

 스카우트들이 점차 다가온다. 피닉스는 각오한 듯이 굳은 표정으로 대포를 들었다.


 "제발 맞아라."


 그녀가 비행모듈의 동체를 기울이며 뒤를 향해 대포를 겨눴다. 쾅! 포탄 한 발이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스카우트가 옆으로 방향을 조금 튼 것만으로 포탄은 크게 빗나갔다.

 쾅! 다시 한 번 피닉스가 발포했다. 이번에도 스카우트는 그녀의 사격을 보고 피했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헤비스카우트도 기관총을 쏴댔다. 옆으로 기관총탄이 스쳐가는 와중에도 피닉스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쾅!


 올곧게 날아간 포탄이 스카우트 중 하나에 적중했다. 포탄은 터지지 않고 그대로 관통했고 스카우트는 흔적도 없이 박살났다.


 그러나 한 발의 명중으로는 숨 돌릴 틈조차 벌 수 없었다. 다른 스카우트들이 쏜 총알이 결국 그녀의 비행모듈을 닿았다. 쇳소리를 내며 구멍이 숭숭 뚫린 날개가 까만 연기를 뿜었다.

 곧 피닉스는 중심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진짜!"


 추락하는 와중에도 피닉스는 이를 갈며 대포를 쏴댔다. 헤비스카우트들도 추락하는 그녀를 쫓으며 계속 총을 쏴댔다.

 퉁! 퉁퉁!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피닉스의 비행모듈이 몇 발 더 피격당했다.


 "아악!"


 그녀가 신음을 내지르며 대포를 놓쳤다. 다급하게 대포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그녀의 절망적인 시선이 자신의 배를 향했다. 허리에 시뻘건 핏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헤비스카우트의 총알이 뚫고 간 것이었다.

 펑! 비행모듈의 날개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불이 붙었다. 피닉스는 장비 손상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헤비스카우트는 그녀를 쫓으며 총알을 퍼붓고 있었다.


 피에 젖은 빈손이 쥐락펴락 공기를 훑는다.


 "후."


 한 마디 한숨과 함께 피닉스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바람 소리와 총알 소리가 귀를 할퀴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망할 놈의 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 순간이지만 허공의 찬 공기가 이불마냥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어?


 누군가가 보낸 통신.

 피닉스가 눈을 떴다.


 난데 없이 날아온 미사일 두 발이 두 헤비스카우트에 각각 적중했다. 정확한 명중과 폭발. 헤비스카우트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게 무엇인지 알 틈도 없이 불꽃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누구야?"

 -일단 날개부터 벗어. 살고 싶으면.


 펑! 비행모듈의 뒤쪽에서 또 한 번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날개에 붙었던 불이 더욱 번지며 매서운 열기를 뿜어댔다. 완전히 작동을 멈춘 프로펠러는 이미 새까맣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알았어! 누군진 모르겠지만 제대로 책임져!"


 피닉스가 비행모듈을 벗었다. 그녀가 팔다리를 펴 활강하자 비행모듈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곧 불이 비행모듈 전체에 옮겨붙었다.


 불타는 날개가 별똥별이 되어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멀어져가는 불씨를 가만히 보고 있던 피닉스는 곧 몸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추락하는 신세가 언제까지나 여유로울 리 없었다.


 "어서 뭐라도 좀 해봐!"


 외침은 바람소리에 순식간에 먹혔다.

 그녀가 투덜거리며 피에 젖은 허리춤을 만졌다. 그 순간 쏜살 같이 날아온 비행체가 그녀를 낚아챘다. 갑작스런 접촉의 충격에 놀란 피닉스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녕 피닉스 대령! 지금 구해준 거 꼭 기억해 둬야 해."

 "실피드?"


 피닉스는 바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둠브링어 소속의 기동형 바이오로이드, 실피드였다.


 실피드는 피닉스의 몸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고도를 높였다. 이내 잿빛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온통 시커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피닉스의 질문에 실피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대장 따라 왔지 뭐."

 "대장이라니?"


 좀더 고도가 높아지자 구름이 걷히고 강렬한 햇빛이 비쳤다. 피닉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햇빛을 받는 새하얀 구름 위로 수십기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진형을 갖춰 날고 있었다.


 그 진형의 가운데에 왕좌처럼 생긴 기묘한 비행모듈이 눈에 띄었다. 피닉스는 그 왕좌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어서 와 피닉스."


 왕좌의 주인이 신처럼 거만한 눈빛으로 피닉스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몸은 왕좌에 비해 작았다. 자신의 부하들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러나 도도하게 다리를 꼰 채 내려다보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 안에는 눈사태처럼 거대한 위압감이 서려있었다.


 "마리 그 똥고집 아래 구르느라 꽤 힘들었겠어."


 둠브링어의 대장, 멸망의 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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