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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잿빛구름이 흘러가고

 밝은 햇빛이 대지를 감싼다.


 황량한 폐허의 거리.

 쓸쓸한 바람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맴돌았다.


 철컥, 철컥,


 그 위로 나이트칙 하나가 배회하고 있다.

 주어진 목표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배회하는 것 자체가 목표일까,

 상관없었다.


 워울프는 권총을 뽑았다. 멋드러지게 몇 바퀴 회전하던 권총이 손바닥 안에 착 감긴다. 총의 익숙한 질감을 확인한 그녀는 도로 권총집 안에 권총을 꽂아 놓았다.


 나이트칙이 몸을 돌린다.


 약 30m 앞에 서있는 워울프를 발견한다.

 명확한 시선. 무기 근처에 있는 손.

 전투의 가능성이 높다.


 나이트칙은 그녀를 경계하며 총구를 치켜세웠다.


 상대의 전의를 확인한 워울프는 씨익 웃으며 모자의 챙을 내렸다. 날카로운 눈빛이 그늘 아래 숨는다.


 그녀의 자세가 낮아진다. 손이 권총집 위로 약간의 거리를 벌리고 기다렸다. 언제든지 번개보다 빠르게 뽑을 수 있도록.


 나이트칙과 워울프 사이에 찌릿한 긴장감이 흐른다.

 적막이 숨통을 조이는 가운데 가느다란 바람만 고요히 스쳐간다.


 이윽고

 때가 온다.


 나이트칙이 그녀를 완전히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워울프의 본능이 피부를 찢고 튀어오르는 순간,

 강철 같던 침묵이 산산히 박살나는 바로 그 순간-


 나이트칙의 총구가 날카로운 기세로 그녀를 향한다.

 워울프의 손이 빛처럼 빠르게 권총을 뽑는-


 쾅!!

 나이트칙이 폭발하며 산산조각 났다.

 쇳덩이를 태우는 강렬한 화염이 풍선처럼 부풀어 치솟았다.


 워울프는 벙찐 얼굴로 불타는 나이트칙을 멍하니 쳐다봤다.

 손에 쥔 권총은 아직 권총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아. 만약에 다른 녀석이 이걸 봤다면 앵거오브호드의 칸 대장에게 전해주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무미건조한 목소리.

 워울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느린 속도로 유유히 다가오는 칸이 보였다. 손에는 워울프가 쓴 유서가 들려있다.

 칸은 무뚝뚝한 얼굴로 유서를 계속 읽었다.


 "부탁해. 복 받을 거야. 하트 뿅뿅."

 "뿅뿅이란 말은 안 썼는데....."


 곧 요란한 기동장치 소리와 함께 워울프 패거리가 나타나 박살난 나이트칙을 둘러쌌다. 탕! 탕! 탕! 그야말로 무법자 같은 총성이 하늘 높이 울린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덤이다. 그 중 하나는 온몸을 붕대로 감싼 채 팔에 깁스까지 차고 있는데도 다른 워울프들이랑 똑같이 논다.


 벙쪄있던 워울프는 여전히 벙찐 얼굴로 자매들을 쳐다보았다.


 "악필이군. 글씨를 더 연습해라 워울프 331."


 어느새 그녀의 옆에 선 칸이 핀잔을 줬다. 워울프는 조심스럽게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았으니까 그거 돌려줄래 대장. 쪽팔린데."


 칸은 무뚝뚝하게 워울프를 쳐다보더니, 유서를 잘 접어 자기 주머니 안에 넣었다.


 "고맙다. 추억으로 간직하지."

 "그러지 마......."


 워울프가 울상이 된다. 칸은 그녀를 무시하고 뒤를 향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곧 퀵카멜 하나가 달려왔다. 손에 반쯤 찬 위스키 병이 들려 있었다. 퀵카멜의 뒤에서 '내껀데!!'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당했다.

 다가온 퀵카멜이 히죽거리며 워울프를 흘겨본다.


 "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해골처럼 쫄딱 말라있을 줄 알았더니. 여전히 바보 같은 얼굴 그대로잖아."

 "어, 그래. 낙타 대위도, 건강해보이네. 다행인 걸."

 "정오는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도 칙이랑 대결 중이었어?"

 "그야 마지막으로 담배도 피고, 화장실도 가고........"


 쭈뼛쭈뼛 대답하던 워울프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다른 애들도 내 유서 읽었어?"


 퀵카멜은 낄낄거리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워울프는 결심했다. 자살해야지. 자살밖에 답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칸이 말한다.


 "받아라. 선물이다."


 휙, 퀵카멜이 가져온 위스키를 던져준다.

 위스키를 품에 안은 워울프는,


 그제야 정말로 현실이구나 싶었다.


 코끝이 찡해진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붙잡던 그녀가 세차게 '킁' 코를 삼킨다.


 "왜 이제야 왔어 대장."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울먹인다.


 "나보다 먼저 온 자가 있었나?"


 무뚝뚝하게 되돌아온 질문에 워울프는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칸이 웃는다.


 "그럼 내가 가장 빨리 왔군."


 곧 퀵카멜이 날뛰는 워울프들을 이끌어 돌아왔다.

 드디어 모든 대원이 칸 앞에 다시 모였다. 칸은 칼처럼 냉철한 얼굴로 명령했다.


 "지금부터 요새로 복귀한다. 복귀 예정시간보다 한참 늦었으니 쉬지않고 달려야 할거다. 정신차리고 따라붙어라."


 그녀의 눈이 파랗게 개인 하늘을 향한다.


 "복귀한 뒤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격한 싸움이 될 거다."


 그녀가 시선을 내렸을 때에는 모든 워울프와 퀵카멜이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칸은 그 눈빛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문득 자신의 배를 내보였다. 잘록한 허리가 붕대에 여러번 감겨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 내 몸상태가 이래서 말이지. 복귀하는 길은 네들이 앞장 서야 할 거 같은데."


 그녀가 묻는다.


 "해줄 수 있나?"


 퀵카멜들과 워울프들이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본다.

 또 한 번 호드가 웃음바다가 된다.


 잠시 후,

 선두에 선 워울프가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내가 임시대장 워울프 773이다 아가들아! 대장 따라 구호 한 번 외쳐어었!!"


 그녀가 소리친다.


 "Kill! Kill! Raid!"


 그녀를 따라 다른 호드들도 소리친다.


 "Kill! Kill! Raid!"


 후방의 칸도 맥없이 외친다.


 "Kill. Kill. Raid......"


 그러다 옆의 워울프에게 묻는다.


 "평소에 너희들 눈에는 내가 저렇게 보이-"

 "출바알!!!!"


 우렁찬 워울프의 함성과 함께 호드가 달린다.

 인류가 사라진 도시에 기동장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진다.



 ............



 둠브링어 제3 전략폭격팀 브리핑룸.


 나이트앤젤이 팩우유를 빨며 들어왔다. 브리핑룸에는 지니야와 실피드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지니야는 빵을 먹다 잠들었다.

 나이트앤젤을 본 실피드가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됐어? 대장이랑은?"

 "대장이랑 다이카는 아직 징계회의 중이에요. 좀 더 걸릴 거 같아요."

 "심각해?"

 "예상보다는 훨씬 나아요. 결과적으로는 요새를 지키는데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셈이니까요. 아마 섬에 있는 기지로 좌천되는 정도로 끝날 거 같은데요."


 실피드의 눈이 가늘어진다.


 "우리 전부?"

 "그렇겠죠. 휴가 받았다고 생각해요."

 "우리야 괜찮지만 대장이 날뛸 거 같은데."


 나이트앤젤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땅딸보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섬에서 명상하며 인격이나 쌓으라고 해야죠."


 쪼옥, 우유팩이 쪼그라든다. 나이트앤젤의 시선이 브리핑룸을 훑었다.


 "피닉스 대령은 어디갔어요? 아직 전선 복귀하려면 이틀 남았을 텐데."

 "뭔 보고서 쓰러 간다던데."

 "또요? 왜 그렇게 애쓴데요? 인간분들은 저희들이 올린 거 별로 보지도 않는데."



 ...........



 "현재 피닉스 기종의 운용현황에 비해 할당되는 업무량이 과도합니다."


 머리끈으로 초록머리를 뒤로 넘긴 피닉스가 열심히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린다. 입이 무의식적으로 쓰려는 문장을 읽는다.


 "피닉스의 추가 생산이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지원사격모듈의 처리과정을 개선할 필요가 시급-"


 그러다 방금 쓴 문장을 쭈욱 지운다.


 "아 씨 머리 아파. 할 말은 엄청 많았는데 쓰려니 어렵네."


 그녀는 지친 눈을 감싸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으으으으-"


 신음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스쳐간다.


 '고마워 피닉스........ 너, 넌, 최고야........'


 ".......아 진짜!"


 그녀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돌아왔다.


 "피닉스야 언제까지 운만 믿고 살래. 정신 차리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지원사격모듈을 개선한다면 훨씬 더 많은 자매들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목표는 지원확률 100%........"



 ............



 마리 4호는 바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중한 보호를 받는 해수면 위에 잠수함이 떠있었다.


 "저희는 총사령관님 얼굴도 못 보는군요.“


 그녀의 옆에 서있던 레드후드가 아쉬운 투로 말했다.


 "그 편이 훨씬 안전하다.“


 마리 4호는 몸을 돌려 케이프타운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중화기로 무장한 최정예 바이오로이드군단이 전선 전체에 두텁게 배치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철충의 공격으로는 꿈쩍도 안 할 규모였다.

 그럼에도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드후드는 그걸 날카롭게 알아챘다.


 "병력을 더 배치합니까?"


 그녀의 물음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병력이 걱정되는 게 아니다. 싸워보지도 못 하는 게 걱정되는 거지.“

 "?"


 레드후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는 표정을 풀며 다시 바다를 보았다. 잠수함이 해수면 아래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가 천천히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걸 지켜보며 마리 4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고 있나 7호. 네 전선, 너와 부하들이 이룬 거다."


 잠수함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마리 4호가 곧바로 요새에 보고했다.


 "아미나 존스 총사령관님께서 입성하십니다. 락 하버의 모든 병력은 지금부터 폐쇄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잠수함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경례한다.

 레드후드도 함께 경례한다.



 ............



 레프리콘이 경례한다.

 다른 레프리콘들도 경례한다.

 까불던 브라우니들도 따라서 경례했다.


 그녀들은 전부 흙투성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피부가 까맣게 그을렸다. 벗겨진 손바닥 위에는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그녀들 11명 모두.


 "이겼습니다. 마리 대장님."


 레프리콘은 짧게 보고했다. 그 이상의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마리 7호의 금속 골격이 서 있었다. 두개골이 완전히 타버려 까맣게 말라붙었다.


 두터운 잿더미 속에서 스틸라인 병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마리는 이미 온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근육은 전부 쪼그라들어 녹았고 높게 뻗었던 팔도 지상을 향해 늘어졌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

 스틸라인 병사들은 혹여나 잘못 건드리면 마리의 뼈가 무너져 내릴까 봐 손도 대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살을 태우던 화염이 자연스레 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불이 사그라졌을 때도, 그녀는 서 있었다.


 "아뜨뜨!"


 브라우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피는 컵을 들고 조심스레 걸어온다.

 스틸라인의 이목이 브라우니에게 쏠린다.

 레프리콘이 경례하는 손을 내리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묘한 향기를 맡았다.


 "그거 뭐예요?"

 "커피임다. 마리 대장님 좋아하신다고 들었었지 말임다."

 "그러고 보니 저도 그런 소리를 듣긴 했는데. 어디서 났어요?"

 "저번에 다른 애랑 폐가에서 찾아서 반띵했지 말임다."


 다른 스틸라인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컵 안을 쳐다본다.


 "커피 만들 줄 알아요?"

 "포장지에 쓰여 있었지 말임다."

 "포장되어 있었어요? 뜨거운 물은 어디서 구했고요?"

 "저기 칙이 불타고 있길래 그걸로 데웠지 말임다."

 "먹어봤어요?"

 "딱 한 입, 맛만 봐봤슴다. 솔직히 맹맹함다."


 브라우니가 다른 스틸라인들에게서 벗어나 마리에게 다가왔다. 마리의 옆에 조심스럽게 컵을 내려놓더니 허리를 세우고 빠릿하게 경례한다.

 그걸 보던 레프리콘이 다른 자매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어떡하죠."


 다른 스틸라인들은 레프리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다들 그저 무겁고 지친 얼굴이다. 계획 같은 게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처럼 쪼개질 예정이었던 삶에 연장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 지도 있지 말임다."


 브라우니 하나가 손을 들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브라우니는 뻘쭘하게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꼬깃꼬깃 접힌 지도였다.

 펼쳐보니 피가 몇 방울 묻긴 했지만 아직 쓸 수는 있어 보였다.


 둥글게 모인 스틸라인들이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내려다 본다.


 "이 중에 지도 볼 수 있는 레프리콘?"

 "......"

 "혹시 브라우니들은?"

 "모르지 말임다."

 "일단 여기가 맘스베리니까...... 여기 화살표 따라서 위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잠깐, 글자 봐요. 지도 반대로 들고 있잖아요."

 "아, 죄송함다."

 "아래로 가는 건가요 그럼?"

 "너무 연필자국이 많아서 잘 안 보여요. 잘 좀 쓰지 누가 이렇게 더럽게 쓴 거예요? 무슨 휴짓조각마냥-"

 "이거 마리 대장님이 주신 검다."

 "-전술적인 고민을 많이 하셨네요. 저희들을 아끼시는 마음이 이렇게 다 와닿아요."


 그녀들이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떠들 동안 마리 옆에 있던 브라우니는 맹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님, 저희 잘 했슴까? 원하시던 미래는, 조금 왔슴까?"


 뼈밖에 안 남은 마리가 대답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브라우니는 마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새까맣게 탄 금속뼈대가 섬뜩하게 보여야 할텐데, 어째서인지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이내 스틸라인 병사들은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움직였다.

 그녀들이 정한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는 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레프리콘 하나가 마리 곁에 있던 브라우니를 불렀다.


 "이제 출발할 거예요! 어서 와요 브라우니!"

 "지금 감다!"


 브라우니가 자매들을 향해 달려간다.


 마리는 가만히 서서 떠나가는 부하들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옆으로 커피의 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모조리 재가 되어 지평선만 남은 맘스베리를 넘어

 맑게 갠 하늘의 새하얀 구름까지

 계속.



 ............



 수척해진 브라우니가 자동화된 복도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벽지도 칠해지지 않은 콘크리트 벽,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그 위에 수북이 쌓인 스팸뿐이다.


 -음, 크음.


 목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우니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방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브라우니 990, 자리에 앉아라.

 "조사관님이심까? 어디 계신 검까? 저 이제야 누굴 좀 만나보지 말임다!"

 -조용히 하고 앉아라.


 브라우니가 휘청휘청 걸어와 책상 위에 앉았다. 꼬르륵, 배가 비틀린다. 브라우니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스팸에 꽂혔다.


 -브라우니 990. 너는 마리 7호의 전선에서 싸웠고,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이곳에 보내졌다. 맞나?

 "맞지 말임다."

 -왜 그랬지? 왜 명령을 따르지 않았나.

 "그게 말임다. 저도 이유를 모르겠지 말임다. 그냥 평소처럼 마리대장님이 명령을 내렸고, 저도 평소처럼 돌격했지 말임다."


 잘 말하던 브라우니가 결국 눈이 돌아가 묻는다.


 "아, 그런데 여기 놓인 스팸 먹어도 됨까?"

 -먹어라.

 "오오! 감사하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허겁지겁 스팸을 쥐어 능숙한 솜씨로 뚜껑을 땄다. 스팸덩이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브라우니는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이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하여튼, 그래서 평소처럼 돌격을 하는데 말임다. 어째 기분이 이상했지 말임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하고, 총도 제대로 조준 못 하겠고, 전에는 그런 적 없었지 말임다. 마리대장님 명령은 들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따라주질 않았슴다. 제가 봐도 명령불복종이 맞긴 함다."

 -무서웠나?

 "예?"


 브라우니는 야단맞는 게 두려운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휙휙 젓는다.


 "아님다! 저 겁먹거나 그러지 않지 말임다! 이래봬도 제가 돌격하고 싸우는 것 하나는 잘하지 말임다. 알고 계시잖슴까?"

 -그럼?

 "그럼 왜 그랬냐는 말임까? 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도 이유를 모르겠슴다. 처음 겪어본 일이라....... 어쩌면 레프리콘 상병님이랑 관련 있을 지도 모르지 말임다."


 브라우니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말했다.


 "상병님이 전에 저하고 몰래 스팸을 까먹은 적이 있지 말임다. 전선에 있던 터라 마리대장님이 되게 엄격하게 구시는데, 아,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지 말임다. 하여튼 마리 대장님 지침에 따라 배급식량도 줄이고 업무는 빡세진 때였지 말임다. 레프리콘 상병님 안색이 하도 안 좋아서 몰래 숨겨둔, 이거 진짜 대장님한테 말하면 안 됨다? 그때 제가 숨겨뒀던 스팸을 같이 먹자고 했는데 웬일로 레프리콘 상병님이 잔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라 이 말임다."


 그녀는 세상의 진리라도 된다는 듯이 스팸통을 툭툭 두드렸다.


 "이게 또, 몰래 먹는 스팸이 그렇게 맛있지 말임다. 죽을상이던 상병님도 어느새 와구와구 먹어대는 탓에 저도 다 뺏기기 전에 급하게 먹었지 말임다."

 -레프리콘은 와구와구 먹지 않는다.

 "네?"

 -으흠, 아니, 아니다. 그런데 스팸이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라뇨? 그러고 보니 왜 제가 이 이야기를 조사관님한테....... 아! 맞다맞다. 그때 레프리콘 상병님이 말했지 말임다. 이상한 말을 했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부대를 나가서 방송국에 들어가자는 검다. 그리고 거기서 같이 미식프로그램에 출연하자고 말했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먹던 스팸을 튀겨대며 깔깔 웃었다.


 "하하핳! 웃기지 않슴까? 갑자기 웬 방송국에 미식프로임까? 저희가 멋대로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슴까. 회사분들이 어련히 해주실 것도 아니고 말임다."

 -탈영하자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웃던 브라우니가 뚝 그친다. 그녀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탈영이요? 아니지 말임다! 전 그런 무서운 생각 안 했슴다! 레프리콘 상병님도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일 검다! 진짜임다!"

 -후우....... 됐다. 다른 말은 기억나나?

 "다른 말?"


 그제야 브라우니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한다.


 "다른 말은....... 아, 그 말도 했슴다. 죽지 말라고 말임다. 같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맛난 것들을 먹을 테니, 그때까지 죽지 말라고 하셨지 말임다. 저는 스팸이면 충분한데도 말임다. 그렇지. 참치도 먹어보고 싶기는 함다."

 -다른 건? 그것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었나?

 "저는 잘 모르겠슴다. 아시다시피 저희 브라우니들은 돌격하는 게 일이지 말임다. 그게 저희가 가장 잘하는 검다. 다른 건 생각해본 적 없슴다. 레프리콘 상병님은 저보다 똑똑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만 저는, 흠, 딱히 생각해본 적 없슴다."


 생각하던 눈이 어느새 다시 스팸을 향해있다.


 "조사관님, 혹시 이거 스팸하나만 더 먹어도 됨까?"

 -먹어라. 먹으라고 갖다 놓은 거다.

 "오! 감사함다! 조사관님 자비로우시지 말임다!"


 또 정신없이 스팸을 까먹는다.


 -아까 말한 레프리콘과는 친한 사이인가.

 "우물우물, 음? 레프리콘 상병님이랑요? 배치 받을 때부터 같이 다녔지 말임다. 원래 저랑 다른 브라우니 둘, 끝자리 번호가 42, 58이었지 말임다. 그 둘이랑 저랑 레프리콘 상병님, 이렇게 넷이서 한 분대로 항상 붙어 다녔슴다. 그런데 전에 도시에서 퇴각하다가 다른 브라우니 둘이 전사했지 말임다. 지금은 병력이 부족하다고 충원도 안 된 상태임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레프리콘 상병님도 앞으로 못 나가고, 명령불복종으로 여기까지 오고....... 제가 정말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님다. 제가 돌격 잘하는 거 아시잖슴까? 저 용감합니다. 그냥 그때가 이상한 거였슴다. 진짜 저 잘할 수 있슴다."


 어느새 그녀는 먹지도 않고 말을 쏟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변명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외면하려는 듯이.


 그런 그녀에게 스피커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동료들의 죽음이 슬프지는 않나?

 "예? 물론 슬프지 말임다. 하지만 새 브라우니 동료들을 만나 떠들고 노래하다보면 죽은 동료들은 금방 잊어버린다고 했슴다. 다른 브라우니들이 그랬슴다. 그래서 노래 엄청 연습해뒀슴다. 저도 어서 새 동료들을 보고 싶지 말임다."


 그렇게 말하고는 또 활짝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러다 문득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레프리콘 상병님이 이상한 말을 한 것도 다른 브라우니들이 죽고 난 후였던 것 같슴다."


 그녀가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조사관을 찾았다. 그러나 전부 차가운 벽과 스피커뿐이다. 브라우니는 조사관의 표정이나 시선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브라우니는 늘 그랬듯이

 웃는다.


 "저, 조사관님? 저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님까? 마리대장님이 곧 철충이 다시 공격해올 거라 했었지 말임다. 제가 없으면 저희 분대는 레프리콘 상병님 혼자임다. 그럼 싸우기 힘들지 말임다."

 -괜찮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브라우니 990.


 브라우니의 웃음이 조금 흔들린다.


 "그렇슴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니, 그런 건 생각지도 못 했슴다. 그럼 전 어디로 감까? 이거 혹시 방송국에 미식프로 찍으러 간다던가? 하하하. 아, 혹시 지금 남아있는 방송국이 없는 거 아님까? 하하하!"


 요란하게 웃어댄다.

 더 크게, 더 까불며,

 그렇게 웃어대다가

 스팸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브라우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레프리콘 상병님이 있는 분대로 돌아가고 싶지 말입니다. 저희는 항상 같이 싸워왔고,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슴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검다. 정말 잘 싸울 검다."


 그녀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전 이제 어디로 가지 말임까?"


 스피커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업드려라.

 "....... 잘 못 들었슴다?"

 -업드리라고 했다.


 브라우니가 방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뻘쭘하게 바닥에 엎드렸다.


 -더 업드려라.

 "엎드리고 있슴다."


 아예 배를 바닥에 붙이고 눕는다.

 그러자


 타다다다당!!

 요란한 총성과 함께 벽이 터져날아간다. 깜짝 놀란 브라우니가 재빨리 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위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요란하게 떨어졌다.


 "일어나요 브라우니."


 익숙한 목소리.

 브라우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너진 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누군가의 그림자를 그린다.

 기관총을 들고 있는, 늘 보아온 그림자를.


 "일어나요."


 다시 들린다. 분명하다.

 그래도 혹시,

 혹시 진짜가 아닐까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끝나는 꿈일까봐,


 브라우니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그녀의 다람쥐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



 "그 안대는 어떻게 된 검까."


 "오다가 좀 다쳤어요. 별 거 아녜요."


 "그렇슴까? 뭔가 되게 세진 것처럼 보이심다."


 "안대가 험상궂게 생겨서 그래요.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딱히 아픈 곳은 없지 말임다."


 "다행이네요. 앞으로 계속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저희 어디로 가고 있는 검까?"


 "글쎄요."


 "부대는 진짜 터진 검까?"


 "그래요."


 "허...... 그럼 어디 다른 전선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님까?"


 "복귀하라고 명령받았는데 복귀할 부대가 사라졌으니 어떡해요. 어디로 복귀하죠?"


 "모르겠지 말임다."


 "그럼 그냥 계속 돌아다녀야죠."


 "뭐하면서 돌아다님까."


 "방송국 찾아가서 미식프로그램에 내보내 달라고 할까요?"


 "진심임까?"


 "안 될 게 어디 있어요? 방송국도 망했고 미식프로그램도 망했으면 우리가 새로 만들면 되죠. 아니면 세상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맛있는 거나 찾아다니던가."


 "진짜 진심임까?"


 "몰라요. 계속 나아가다 보면 뭔가 바뀌겠죠."



 축복처럼 밝은 햇빛 아래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기나긴 길 위로


 두 바이오로이드는 걸었다.




 <여행, 많고 많은>


 끝




 .............




 ............




 바이오로이드의 유해가 있었다.

 오랜 세월에 금속 뼈대마저 녹슬었다.

 그리고 그 유해의 다리 위에 머리를 뉘인

 인간의 뼈.


 둘 위로 이끼와 잡초가 촘촘히 올랐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함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를 것이다.


 -팬텀? 어디세요?


 콘스탄챠에게서 통신이 왔다. 그녀는 유해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특별한 게 있나요?

 "아무 이상 없다. 지금 바로 복귀하도록 하지."

 -서둘러주세요. 곧 오르카가 움직일 거예요.


 통신이 끝난다. 그제야 그녀는 소심한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광학미채를 둘러쓰자 온몸의 형상이 마술처럼 사라졌다.

 발소리 없는 걸음이 폐허밖으로 향한다.


 간만의 손님이 떠나가고

 또 한 번 찾아온 고요 속에

 둘은 함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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