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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둠브링어가 왜 여기에...?"


 피닉스는 의아한 얼굴로 메이를 쳐다보다 문득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움켜쥐었다. 스카우트에게 당한 총상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배를 안고 있던 실피드가 그제야 자신의 팔이 따뜻하게 젖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괜찮아? 대장! 피닉스 대령 부상 입은 거 같은데!"

 "괜찮아. 많이 아프긴 하지만..."


 메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휙 저었다.


 "다이카, 가서 응급처치 해줘. 응급처치 끝나면 지니야 1호가 실피드 대신 피닉스 들어주고."

 "제가요?"


 대열 선두의 지니야 1호기가 되물었다. 그게 도화선이 되어 메이가 좌석을 내리치며 성을 냈다.


 "옥수수 처먹은 값은 해야 할 거 아냐 이 젖소년아!!"

 "히잉. 쩝쩝."

 "아니 왜 아직도 옥수수가 있는 건데!! 도대체 몇 개나 갖고 온 거야!! 탄창에 옥수수라도 넣어온 거냐고!"

 "앗."

 "진짜냐아아아!!"


 메이가 천둥처럼 성을 냈다. 풀이 죽은 지니야가 대열에서 이탈하여 피닉스를 안고 있는 실피드에게 다가갔다.

 이미 다이카가 피닉스 곁에 붙어 붕대를 감아주는 중이었다.

 피닉스는 날개 때문에 부피가 큰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들이 안방처럼 편하게 붙어있다는 사실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스틸라인에서는 주로 임펫과 피닉스만 하늘을 날았다. 이마저도 압도적으로 수가 부족해 넓게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진~ 않나요?"


 다이카가 느린 말투로 물었다.


 "참을 만해. 고마워."

 "다행이네요오. 그럼~ 조심해요~"


 다이카가 멀어지고 실피드가 지니야에게 피닉스를 건네준다. 지니야의 팔은 실피드보다 훨씬 푹신푹신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뒤통수를 압박해왔지만 오히려 따스한 귀마개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이트앤젤 하나가 거리를 좁혀왔다.


 "오랜만이네요 피닉스. 그다지 안녕하진 않은 것 같지만요."


 피닉스는 고통에 눈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애써 웃었다.


 "아, 미안 나이트앤젤. 나는 제조된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옛날 기억이 별로 없어."

 "흠, 그래도 상관없죠. 제가 아는 피닉스 모델은 빚진 걸 절대 잊지 않거든요."

 "목숨 빚 말하는 거라면, 물론 절대 잊지 않을게. 둠브링어 너희 모두 고마워."


 문득 피닉스의 시선이 나이트앤젤의 비행모듈을 향했다. 날개에 폭탄이 주렁주렁 매달린 게 수확기의 터질듯한 포도송이를 보는 것 같았다. 싣고 제대로 날 수나 있을까 싶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런 걸 달고 어디로 가는 거야? 퇴각한다면서? 혹시 상부에서 다시 지원명령이 내려온 거야?"

 "아니."


 칼처럼 대답한 건 메이였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전방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 멍청이들은 퇴각명령을 내린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우린 시킨 대로 퇴각하고 있던 것뿐이고."


 피닉스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럼 맘스베리는...."

 "맘스베리가 뭐?"


 메이가 차갑게 되묻자 피닉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쥐덫작전인가 뭔가는 망했어. 둠브링어의 퇴각은 결정됐고. 마리 그 똥별도 상황 판단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미 퇴각한 부대의 지원을 바라고 싸우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녀의 칼 같은 시선이 피닉스를 흘겨보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멋대로 맘스베리에 가서 스틸라인을 도와줘? 인간 수뇌부의 명령을 어기고? 일개 보병부대도 아니고 핵병기를 가진 전략폭격팀이?"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피닉스는 절벽처럼 막혀버린 말문을 뚫으려 화제를 돌렸다.


 "왠지 다 잡았다던 스카우트가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더라니, 너희들 쫓아서 온 거였구나."

 "하! 우리 다이카를 뭘로 보고! 그런 급 낮은 놈들한테 걸릴 정도로 허접할 리 없잖아. 그 날파리들은 우리를 쫓아온 게 아니라 맘스베리로 가고 있던 거야. 넌 그냥 얻어걸린 거고."


 의외의 정보에 피닉스의 눈이 커진다.


 "스카우트가 맘스베리로?"


 다이카가 헤실헤실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네에~ 다른 지역의 스카우트들이~ 동시에 맘스베리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맘스베리의 철충이~ 지원을 요청한 거겠죠오. 스틸라인 자매들이, 시뮬레이션의 예상보다, 잘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요오?"


 그녀의 느려터진 말투를 듣고 있던 메이는 이미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그러나 폭탄처럼 부글거리는 메이와 달리 피닉스의 표정은 싸늘했다.


 "안 돼...."


 그녀가 다급하게 메이를 향해 외쳤다.


 "어서 맘스베리에 알려야 해!! 지금 거기 피닉스들이 쓰는 전술은 스카우트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한단 말이야!"

 "애초에 그런 파격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 전술을 쓴 게 문제지. 마리 걔가 아무리 돌격바보여도 그 정도 생각할 머리는 있어. 그런데도 굳이 그 전술인가 뭔가를 썼다는 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던가, 실패할 걸 감안하고 썼다는 거겠지."


 냉소적인 메이의 태도에도 피닉스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이카가 진정하라는 듯이 설명해주었다.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어요오. 가까운 지역에 있던 스카우트 몇 기는, 이미 맘스베리에 진입했을 거예요. 저희가 손 쓸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메이가 왕좌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구출됐으면 얌전히 입이나 다물고 있어!! 어차피 그 동네로 가고 있으니까!!"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 잠깐, 가고 있다고?"


 벙찐 표정이 된 피닉스를 두고 메이가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 도대체! 설명해라 전봇대!!"


 피닉스 옆에 날고 있던 나이트앤젤도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이럴 수가. 미안해요 대장. 제가 헤비스카우트에게 쫓기던 피닉스를 구출하는 도중에 중대한 손상을 입고 말았어요. 정확히는 비행모듈의 연료조절 장치가 파손되어 이 무게로 운행하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폭탄을 싣고 복귀할 방법이 없어요. 도대체 어떡해야 하죠 땅딸보 대장."

 "날 구해준 건 실피드인데?"


 반문하는 피닉스를 두고 메이가 또 한 번 왕좌를 내려쳤다.


 "멍청한 빨래판 같으니!! 지금 인류의 전력에 이 폭탄들이 얼마나 귀중한데 이걸 그냥 버리고 가자고? 허, 나 참, 그렇다고 저 빨래판을 추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다 다른 나이트앤젤들을 보며 묻는다.


 "그래도 너희들은 괜찮지?"

 "저는 돕다가 무장플랫폼이 고장 나서 폭탄이 떨어질 것 같아요."

 "저도 돕다가 소프트웨어가 재부팅 되면서 화기고정장치가 맛이 갔네요."


 나이트앤젤들이 각각 대답하자 메이가 이마를 탁 친다.


 "아이고! 헤비 스카우트 날파리 하나가 이렇게 크게 일을 벌렸네! 하지만 따져보면 전술 지휘를 내려줄 인간들이 뻗어버린 게 제일 큰 잘못 아닐까?!"

 "아- 대장~ 그 부분은 삭제할게요오~"

 "하여튼! 지금 이 폭탄들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 하지만 퇴각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버릴 수밖에 없어!"


 메이의 눈동자에 불이 붙는다. 악마도 울고 갈 사악한 미소가 드러난다. 그걸 보고 나서야 피닉스는 그녀들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렇다면!! 기왕 버리는 거!! 당연히 저 벌레들 대가리 위에 처박아줘야지!!"


 메이의 신이 난 외침에는 파괴에 대한 갈망과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피닉스는 그 작은 체구의 바이오로이드가 왜 멸망의 메이라고 불리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대자앙~ 운항일지는 다 손 봤는데에~ 나중에 상부에서 따지고 들면 뭐라고 할 건가요오~"

 "하! 생각해 봐 다이카. 퇴각하라고 해서 퇴각했는데 지들이 뭐라고 할 거야? 꼬우면 중간보고 할 담당자 한 명이라도 남겨뒀어야지!"


 메이의 눈빛에는 한 점 흔들림 없었다.


 "전부 속도 높여! 목적지는 맘스베리! 마리의 땅개들이 우릴 어떻게 우러러보는지 한번 보자!"



 .........



 레프리콘과 퀵카멜은 황량한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지휘관에게서 멀어진 이후로 조그만 철충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달리는 내내 조용한 레프리콘이 걱정됐는지 퀵카멜이 위를 힐끔 올려다본다.


 "레프리콘?"

 "......."

 "야."

 "아, 네? 예? 부르셨나요?"


 그녀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퀵카멜이 눈썹을 올린다.


 "왜 그래?"

 "아뇨, 그냥 좀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레프리콘의 눈빛이 한없이 어둡다."


 "저희 유인작전 실패한 거죠?"

 "어...... 글쎄."

 "스틸라인 자매들은......"

 "괜찮을 거야! 네 걱정이나 해 지금은."

 

 퀵카멜은 재빨리 말을 넘겼다. 맘스베리의 스틸라인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지금은 레프리콘이 허튼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다.

 말이 막힌 레프리콘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희 어디로 가는 거죠 지금?"

 "대장이 찍어둔 장소가 있어. 예전에 우리 애 하나가 거기서 낙오됐거든. 그 애도 찾을 겸, 호드가 재결합하는 거지."

 "그럼 지휘관님은요?"


 지휘관. 그가 레프리콘의 본 목적이었다. 그녀는 아직 마리가 준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휘관을 호프필드로 옮긴 뒤, 자매들 곁으로 복귀해야 했다.

 복귀를

 해야 했다.


 "........"

 "왜? 그 인간이 걱정돼? 딱 보니까 싫어하는 것 같던데."


 퀵카멜이 의외라는 듯이 묻자 레프리콘의 미간이 구겨졌다.


 "바이오로이드가 인간 걱정을 안 할 수 있나요. 그냥, 좀 짜증 나는 것뿐이에요."

 "그게 싫어하는 거지 뭘. 그런데 네들은 군법도 빡셀 텐데 막 그렇게 말해도 되니."

 "짜증 나는 걸 어떡해요. 그나마 있는 인간이면서 다 망했다는 듯이 실실거리기만 하고. 브라우니들 사기만 떨어뜨리고. 전선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인간인데 어쩔 거야. 그냥 잊어버려."

 "그래도 떠날 때 한 번쯤은 저희들 봐줄 수 있잖아요. 모아놓고 고맙다고 말 한 마디라도 하던가."


 레프리콘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노를 식혔다.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침착을 되찾은 그녀가 묻는다.


 "대위님은 칸 대장님 걱정 안 되세요?


 퀵카멜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글쎄, 대장은 알아서 하지 않을까. 그럴 생각으로 해산 명령을 내린 걸 테니까."

 "알아서 하다뇨?"

 "대장이 우리들한테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빡빡한 상황이었다는 거지. 그런 때에는 대장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해. 대장이 작정하고 속도 내면 우리가 못 따라가니까."


 퀵카멜의 말투가 은근히 뾰루퉁하다.


 "칸 대장님한테 짐덩이 취급받는 게 싫으신가 보네요."


 퀵카멜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끗 올려봤지만 그녀의 등에 앉아 있는 레프리콘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콧바람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맘에 들 리 없지. 우리 대장이 참 멋지고 좋긴 한데 말이야. 좀처럼 우리를 잘 안 믿어."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믿는 게 아니라, 너무 혼자 떠안으려고 해. 책임을 나눌 줄 몰라. 그런 점이 믿음직스럽기는 해도...... 가끔은 섭섭하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말야.

 퀵카멜이 작게 덧붙였다. 레프리콘은 그녀의 반응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호드 분들은 다들 가족처럼 친해 보였는데, 그런 부분도 있었네요."

 "가족 같은 건 사실이야. 칸 대장은 다른 대장들처럼 딱딱하게 굴지 않으니까. 상관이라기보다는 언니나 엄마 같은 느낌이랄까...... 그저 가끔씩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느껴지는 것뿐이지.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뿐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을 뿐이야."


 퀵카멜이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어떤데? 마리 대장도 그래?"


 레프리콘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부대가 엄청 크니까요. 사실 같이 움직이는 자매들 말고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요. 마리 대장님도 예전에는 대화 한 번 나눌 일이 없었은데....."

 "없었는데?"

 "최근에는 부대원 숫자가 많이 줄어서요. 마리 대장님이랑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어요. 제가 분대원들을 전부 잃어서 그런 걸지도-"


 레프리콘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이 기관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브라우니......"


 촛불이 꺼지듯이 레프리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때 문득 퀵카멜이 자리에 멈춰 섰다. 관성에 몸이 쏠린 레프리콘이 깜짝 놀라 기관총을 들었다.


 "적인가요?!"

 "아니, 그냥 바보야."


 퀵카멜이 무덤덤하게 말하며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레프리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먼지를 휘날리고 있었다.


 워울프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워울프가 퀼카멜의 앞에 급정거했다. 요란하게 흩날리는 먼지구름에 레프리콘이 기침을 해댔다. 퀵카멜은 눈썹을 까딱이며 워울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등에는 칸이 맡겨둔 칼날이 매여있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집합장소 알려줬잖아."


 퀵카멜이 질문하자 워울프가 능청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새로 들어온 스틸라인 동생이 걱정돼서 와봤지. 혹시 철충들이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해서."

 "길 잃었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퀵카멜의 눈빛에도 워울프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대장 지금 넘어진 애 때문에 엄청 맘고생이 심할 텐데, 그 상태로 인간 옮기느라 피똥 싸고 있을 거 아냐? 그런 상황에 너희들까지 위험해지면 안 되잖아?"

 "길 잃은 거 맞네. 지도에 그림까지 그려줬잖아. 제대로 좀 보고 까먹지 말란 말야."

 "걱정 마. 늑대는 코가 좋거든."

 "뭔 소리래. 그럼 그 좋은 코로 길이나 똑바로 찾아가지 왜 우리한테 왔어."

 "그 좋은 코로 너희들 냄새를 맡았거든."


 퀵카멜이 더욱 한심하게 쳐다본다. 그제야 기침을 억누른 레프리콘이 물었다.


 "혹시 지휘관님이랑 칸 대장님이 어디쯤 계신지 아시나요?"

 "글쎄. 그 호프 뭐시긴가에 간다고 했으니 거기로 갔겠지? 그건 그렇고 낙타 대위, 짐칸에 대장 칼도 좀 실어줘. 나 어깨 빠지겠어."

 "안 돼. 레프리콘만 해도 충분히 무거워."

 "역시 무거우셨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여튼 네 건 안 들어 워울프. 대장이 맡긴 거니까 책임감을 갖고 챙기라고."


 워울프가 담배를 문 입을 비쭉 내밀었다. 퀵카멜은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레프리콘만 초조하게 속을 태우고 있었다.


 "괜찮겠죠? 스틸라인 자매들도, 지휘관님이랑 칸 대장님도, 다른 호드분들도, 다들 어떤 상황일지 모르겠어요."


 침울한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워울프가 손을 휙휙 저었다.


 "에이 걱정할 걸 걱정해야지. 칸 대장이라면 별일 없어. 그렇지 낙타 대위?"

 "어? 그, 그렇지. 칸 대장이라면 문제없어."


 퀵카멜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불안함이 선명하게 맴돌고 있었다. 워울프도 숨기고 있던 초조함에 불이 붙었는지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바로 웃어넘기며 분위기를 바꾸려 한다.


 "하하! 왜들 그래? 칸이라고 칸. 신속의 칸이란 말야. 일단 대장이 혼자 달리기 시작하면 세상에 그보다 빠른 게 없어. 철충놈들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절대 대장 못 따라가. 절대로."


 거기에 장난스레 한 마디 덧붙인다.


 "미쳤다고 대장이 놈들 품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



 ........



 "야! 너 배에 피난다 피! 총알 맞은 거 아냐?!"

 "진정해라. 파편이다. 총에 맞은 거라면 너까지 관통했겠지."


 허리까지 피가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칸은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뒤쫓아오는 철충들이 요란하게 총을 쏴댔다. 뒤통수 바로 뒤로 총알이 지나는 소리에 지휘관이 잔뜩 움츠렸다.


 철충무리를 뚫고 나온 칸은 점차 회피기동을 줄였다. 업혀있기 훨씬 편해졌지만 지휘관의 팔은 여전히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거센 바람소리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붙들며 외쳤다.


 "피 계속 나는데 괜찮은 거 맞아?!"

 "철충놈들 품으로 뛰어든 것 치고는 값싼 대가다. 물론 너 아니었으면 치를 일도 없는 대가지만."

 "별말씀을!"

 

 칸의 미소가 날카롭게 벌어졌다.


 "너란 인간은 알수록 참 가관이군."


 뒤쫓아오는 철충이 점차 멀어져갔다. 요란하던 총성도 뒤처진다. 칸은 완전히 회피기동을 멈추고 안정된 자세로 곧게 나아갔다. 지휘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 멀미했다.


 칸은 계속 앞만 보았다.

 그녀의 허리가 점점 붉게 젖어갔다.



 ..........



 맘스베리 지하상가.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레프리콘6002와 그녀의 브라우니 둘이 달리고 있다. 어지럽게 메아리치는 그녀들의 발소리를 나이트칙들이 매서운 기세로 뒤쫓고 있었다.


 쿵, 쿵, 천장이 계속 흔들리며 먼지를 떨궜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여파였다. 그 무거운 울림이 그녀들의 다리를 채찍질했다. 레프리콘은 사력을 다해 달리며 지나치는 커다란 기둥들의 번호를 흘겨보았다.


 "E-23!!"


 레프리콘이 외치자 뒤따라 달리던 브라우니들이 우는소리를 했다.


 "도대체 30번대는 언제 나오는 검까! 이러다 따라잡히지 말임다!!"

 "아까처럼 빅칙이 벽 뚫고 들어오는 거 아님까! 걍 지상으로 가서 자매들이랑-"

 "그냥 좀 달려요! 여기 우리밖에 안 남았잖아요 지금!"


 레프리콘이라고 살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브라우니보다 체력이 부족하게 설계된 그녀에게 끝없는 전력질주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걸 배려해줄 리 없는 브라우니들은 여전히 우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막상 가면 폭탄 터뜨릴 방법은 아심까? 기폭장치도 없지 말임다!"

 "어떻게든 되겠죠!"

 "어떻게 어떻게든 된다는 검까?!"

 "아 그냥 달리라고요 좀!!"


 악을 쓰며 나아가는 레프리콘을 따라 브라우니들도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 나이트칙들의 발소리가 우르르 울려댄다.



 ..............



 쿨럭! 마리가 피를 왈칵 토하며 허리를 굽혔다. 피투성이 입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기관총을 쏴대던 레프리콘이 물었다. 마리는 손을 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그녀의 주변에서는 3개의 비홀더의 눈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레이져를 쏘아대고 있었다.


 마리는 곧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와 먼지로 난잡한 가운데 푸른 눈빛만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 눈에 보이는 시야는 너무도 흐리다. 눈앞에 들이닥치는 철충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릴 정도로.


 지하조......


 입을 뻐끔거리던 마리는 자신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더니 크게 소리쳤다.


 "지하조! 아직 도착은 멀었나!"

 -2분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통신 안에 총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마리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소리쳤다.


 "명령 기다리지 말고 도착하는 대로 폭파해라!"

 -기폭장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폭파시키죠?!

 "쏴라!"

 -네?

 "쏴라! 쿨럭, 쿨럭...... 레프리콘! 네 총으로 기둥이든 폭탄이든 쏴라!"


 마리는 힘겹게 입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탈출할 시간은 벌어줄 수 없다. 거기서 지지대를 폭파하고 죽어라."

 -알겠습니다!


 레프리콘의 힘찬 대답을 들은 마리는 곧바로 피닉스056에게로 통신을 돌렸다.


 "피닉스056, 레프리콘6002의 표적신호에 집중해라. 2분 내로 해당신호가 E-32 지지대를 표시할 거다."

 -알았어. 맡겨줘.

 "다른 표적신호는 무시해도 좋다. 어떻게 해서든 그 지지대를 박살내라."


 그때 마리의 옆에 있던 레프리콘이 소리쳤다.


 "철충이 근접합니다!!"


 화망을 뚫고 달려온 나이트칙들이 방어선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최전방에 있던 브라우니들이 나이트칙의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비홀더의 눈이 브라우니를 덮치는 나이트칙을 향해 광선을 뿜었다.


 타다다당!!

 총성과 함께 둔탁한 진동이 울렸다. 다른 방향에서 덮쳐온 나이트칙이 마리의 몸에 총을 갈긴 것이었다.

 수십 발의 납탄이 단단한 몸에 박히며 피가 터졌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목을 찢었다. 마리는 피가 터지는 목을 붙잡고 자세를 추슬렀다.


 곧이어 레프리콘의 총성이 울리고 나이트칙이 벌집이 됐다. 레프리콘은 주위도 살피지 않고 마리에게 달려왔다.


 "대장님!"

 "자리를 지켜라 레프리콘."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자리에 곧게 섰다.


 그녀의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끝없이 물려오는 철충을 응시했다. 날아오는 총알이 그녀의 어깨에 박힌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다시 섰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시야를 붉게 적셨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던가.


 몇 번이나 죽으라고 명령하고

 몇 번이나 그 대답을 들었나.


 아직이다.

 한참 남았다.


 가장 많은 총알을 맞고

 가장 많은 죽음을 보고

 가장 많은 책임을 지면서

 최후의 부하 한 명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불굴의 마리는 서있어야 한다.


 "!!"


 마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본능이 피부를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온몸의 근육이 상처도 잊고서 일시에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푸른 눈동자는 봐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강렬한 섬광이 번뜩이며 시야를 채웠다.


 이미 한 번 그녀의 심장을 도려냈던 고밀도 에너지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서.


 마리의 옆에 있던 레프리콘은 저격을 인지하지도 못 했다. 아무도 그 재빠른 기습 공격을 경고해줄 수 없었다.


 그러나 비홀더의 눈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에너지탄의 궤적을 막아섰다. 가능한 최대 출력으로 쏘아낸 레이져가 에너지탄과 맞부딪친다.


 에너지탄은 진로를 막던 레이져를 종잇장처럼 가르고 직진해 비홀더의 눈을 꿰뚫었다. 단단한 레이져드론의 몸체는 허무하게 녹아 사라졌다.


 그렇게 비홀더의 눈이 벌어준 아주 약간의,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마리는 움직였다.

 움직인 범위는 기껏해야 몇 cm 정도.

 그러나 불시에 날아온 저격과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고 할 만큼 빠른 반응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그녀가 쌓아온 경험과 최고사양의 육체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에너지탄은 그녀의 심장 대신 왼쪽 어깨를 뚫었다.


 단단한 살집이 뻥 뚫리며 왼팔이 통째로 터져 날아갔다. 그 충격에 바닥에 처박힌 마리의 몸이 몇 번이고 땅을 굴렀다. 주위에 있던 스틸라인이 경악하며 달려왔다.


 스틸라인의 최후 방어선으로부터 약 200m 떨어진 고층 폐허.

 무레스버그에 있던 것과 비슷한 외형의 철충, 또 하나의 스토커가 사격 자세를 풀었다. 막 에너지를 방출하며 달아오른 포신에서 새하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바로 재충전이 시작된다. 스토커의 상체에 달린 종양들이 번쩍거리며 출력을 올렸다.


 타다다다당!!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리며 호위로 배치해둔 나이트칙 하나가 쓰러졌다. 스토커는 재빨리 몸을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스틸라인의 기습이었다.

 두 레프리콘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브라우니 다섯이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왔다. 나이트칙들이 곧바로 응전하며 브라우니 하나를 죽였다.

 선두에 달리던 동료가 벌집이 되었음에도 브라우니들은 멈추지 않았다. 본래 돌격을 위해 태어난 모델답게 겁도 없이 나이트칙의 코앞에 총을 갈겨댄다. 그러나 버텨낸 나이트칙들이 도리어 반격해 그녀들을 죽였다. 몇 초 사이에 브라우니 둘이 더 죽었다. 나머지 브라우니 둘은 스토커를 향해 계속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들의 용맹한 돌진은 한없이 취약하고 많은 피를 요구했으며, 그만큼 빨랐다.


 쿠구궁!!

 브라우니들이 다가오는 와중에 큰 소리가 나며 천장이 울렸다. 피닉스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스토커의 시선이 표적지시탄을 쏘는 레프리콘을 향했다.

 건물 밖에 있던 빅칙이 스토커의 신호를 받고 지원사격을 쏟아부었다. 벽을 뚫고 날아온 기관포탄이 레프리콘들을 토막 냈다. 레프리콘의 엄호가 사라졌지만 브라우니들은 이미 스토커의 거대한 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쿵!! 쿵!! 다시 한번 피닉스의 포격이 두터운 콘크리트를 두들겼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며 먼지가 떨어졌다.


 스토커가 맹렬하게 몸을 흔들자 브라우니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스토커는 곧바로 떨어진 브라우니의 몸을 밟아 터뜨렸다. 그 사이에 나머지 브라우니가 스토커의 번쩍이는 종양 위에 올랐다.


 마지막 브라우니, 브라우니 871은 스토커의 종양에 돌격소총을 갖다 댔다.

 방아쇠를 누르자 불이 튀며 종양에서 스파크가 뿜어져 나왔다. 스토커의 에너지생성기가 신경질적으로 깜빡이며 요동쳤다. 브라우니 871은 멈추지 않고 계속 총알을 쑤셔 박았다.


 그 순간 주변의 나이트칙들이 스토커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수십 발의 탄환이 스토커와 그 위에 타 있는 브라우니에게 꽂혔다. 총알을 막아낸 스토커의 단단한 외피와 달리 브라우니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오른팔이 끊어지고 폐가 뚫리고 내장이 등허리로 튀어나온다.


 너덜너덜해진 브라우니 871이 촛불마냥 휘청이며 온몸으로 피를 토했다. 유일한 무기였던 돌격소총도 박살 나고 없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여전히 용기가 빛나고 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왼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총성과 총알이 살을 헤집고

 검붉은 피가 귀를 막는

 아주 짧은 그 순간


 목소리가 들린다.

 한없이 느긋하고 평온한 두 목소리가.


 '계속 단련시키다보면 진짜로 칙을 때려잡는 브라우니가 나올지도 모르잖나.'

 '안 나옴다. 나올 리 없지 말임다.'


 브라우니 871은 마지막 남은 숨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주먹이 돌격소총으로 쪼개놓은 종양을 뚫고 들어갔다.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쥐고, 끄집어낸다.


 종양이 번개처럼 강렬한 빛을 뿜었다. 터져 나오는 열기에 브라우니 871의 몸이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증발했다.

 스토커가 비명 같은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스틸라인 방어선.

 마리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이 뜯겨나간 왼쪽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에너지탄이 훑고 간 몸 절반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강직하던 두 다리는 곧 부러질 듯이 떨리고 있다.


 "마리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레프리콘들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러나 마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에 물든 고개를 들어 스토커가 있을 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 위를 가린 빌딩의 잔해 위로 피닉스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다.


 "레프리콘4405......."


 마리의 쉰 목소리가 통신 속에 울렸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저격수는 처리했나?........브라우니871......."


 그러나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다.

 달려온 레프리콘들이 마리의 망가진 몸을 붙들었다.


 "일단 후방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는 우두커니 서서 계속 중얼거렸다.


 "응답해라 브라우니...... 저격수는......"


 그 순간 마리가 보고 있던 건물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빛에 눈을 찡그릴 틈도 없이,

 건물이 통째로 폭발했다.


 엄청난 크기의 푸른 불기둥이 터지며 사방으로 충격을 퍼뜨렸다. 주위에 있던 건물들이 나뭇가지처럼 박살 나 무너졌다. 폭발의 반동은 200m 밖에 있던 스틸라인의 방어선까지 닿았다. 한참 전투 중이던 스틸라인 병사들이 충격파에 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달려오던 철충들도 갑작스런 압력에 눌려 주저앉았다.

 마리와 그녀를 부축하던 레프리콘들도 바닥에 쓰러지며 먼지를 뒤집어썼다.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서는 시커먼 먼지구름이 두텁게 솟아오르며 번갯불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리는 하늘을 집어삼키는 어둠을 보며, 의식을 잃었다.



 ..........



 콰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지하통로 전체가 울렸다. 한참 달리고 있던 레프리콘6002와 브라우니들이 갑작스러운 지진에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녀들을 뒤쫓던 나이트칙들도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 위로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등 뒤로 쏟아지는 콘크리트 더미를 보며 브라우니가 소리쳤다.


 "무너지고 있슴다!! 어서 일어나시지 말임다!!"


 그러나 레프리콘은 이미 완전히 탈진했다. 계속 이어진 전력질주로 한계를 넘어 달리고 있던 몸뚱이에 다시 일어설 힘은 없었다.

 쿠구궁! 천장에 금이 가며 먼지가 떨어졌다. 브라우니들이 다급하게 레프리콘의 어깨를 붙들고 질질 끌었다.


 "놓고 가요!"


 레프리콘이 쥐어짜듯이 외쳤다.


 "다음 기둥이, E-32니까, 거기다 쏴요! 여기!"


 그녀가 기관총을 건넸다. 브라우니들은 쉽사리 총을 받지 못했다. 쿵! 그녀들 옆으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졌다. 레프리콘은 브라우니에게 던지듯이 기관총을 쥐여주었다.

 브라우니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쏘면 됨까?"

 "그래요! 그냥 쏴요!"

 "쏜 다음은 어떻게 함까?"


 레프리콘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브라우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에 여러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짧았다. 말해야 했다.


 "다음은, 없어요 브라우니. 우리 곧 다시 봐요."


 레프리콘이 지친 얼굴로 애써 웃는다.

 브라우니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망설였다.


 그때 나이트칙들이 잔해 사이로 기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레프리콘은 더 지체하지 않고 브라우니의 돌격소총을 가져갔다.


 "가요!! 가!!"


 필사적인 외침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브라우니들은 결국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당! 타다다당!!


 등 뒤로 맹렬하게 번뜩이던 총성은 얼마 가지 않아 멎었다. 그러나 브라우니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너져가는 지하통로를 그저 계속 나아간다.



 ...........



 맘스베리 상공.

 피닉스들의 통신채널은 한참 혼란스러웠다.


 -뭐야? 뭐가 터진 거야?

 -우리 거 아냐. 방어선은 괜찮아?

 -마리 대장이 안 보이잖아!


 하늘에 어지럽게 오가는 의문 아래로는 맘스베리 도심을 집어삼킨 푸른 화염과 시커먼 먼지구름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피닉스056은 착잡한 표정으로 맘스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어선은 아직 살아있어. 그러니 다들 진정하고 내 말 들어. 곧 레프리콘6002의 표적신호가 들어올 거야. 목표는 E-32 지지대, 그게 터져야 저 벌레들을 묻어버릴 수 있어. 그러니 누구든지 신호 수신했으면 다른 거 놓아두고 그것부터 쏴."

 -레프리콘6002?

 "그래 6002."

 -알았어.


 문득 다른 피닉스가 물었다.


 -밑에 애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마리 대장은 살아있어?

 "그래. 방금 전만 해도 통신 받았어.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지만."

 -다행이네. 맷집 하나는 믿을 만하니 별일 없겠지.

 "그럴 거야."


 시원하게 대답한 피닉스056이었으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가 들었던 마리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는 필사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아니다.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모두가 마지막까지 싸우는 날이니까.

 약간의 시간 차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운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위이이잉-


 작디작은 구동음.


 거친 바람 소리와 엔진소리에 묻혀 사라졌을

 깃털처럼 작은 이질감.


 그러나 피닉스056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기척의 근원지를 보았다.


 철충 스카우트 하나가 그녀의 옆을 날고 있었다.


 피닉스의 두 눈이 커졌다.


 숨 한 번 들이쉴 짧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뒤엉켰다.


 역탐지를 피하려고 레이더를 꺼놓았다는 것.

 모두 파괴했을 스카우트가 여기 있을 리 없다는 것.

 대응할 방법도 없고, 대응해봐야 소용도 없다는 것.

 이게 현실이면 안 된다는 것.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

 아직 지킬 자매들이 남아있다는 것.


 아직 포기할 수 없다는 것.


 피닉스056은 통신채널에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전원!! 회피기-"


 콰과과과광!!

 총성이나 포탄소리와는 다른 둔한 폭발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 발의 미사일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철충무리의 빅칙런쳐들이 소형 대공미사일을 일제히 쏘아낸 것이었다. 촘촘하게 하늘을 채운 미사일이 하얀 길을 그리며 먼지구름을 갈기갈기 찢었다.


 스틸라인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 미사일의 궤적을 보았다.

 잿빛 구름속으로 들어간 미사일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다.



 .............



 "레프리콘에게는 뭐라고 말할 거지?"


 갑자기 칸이 물었다.

 지휘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뭐라고 말해."

 "레프리콘은 이 임무가 끝나면 마리 7호에게 복귀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겠나."

 "내가 걔한테 뭔 말을 해줘야 하는데."

 "모른다. 그래서 물어본 거다. 인간이라면 다를지도 모르니까."


 지휘관은 비웃듯이 실실거렸다.


 "지금 내 꼴에 뭔 현명한 대답이 나오겠냐."

 "그래서 뭐라고 말할 건가?"


 칸은 계속 묻는다. 지휘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가 말 안 해도 스스로 알겠지. 현실은 알아서 파악하게 되는 법이야. 그리고..... 그 아가씨도 자기 부대 운명 정도는 알고 있었어."

 "알고 있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다르지. 막상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레프리콘이 어떻게 반응할 것 같나?"

 "언제부터 레프리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있나?"


 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심심해서 물어봤다."

 "천하의 칸도 심심할 때가 있구만."

 "이런 상황이니까."


 칸과 지휘관은 도로 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철충무리를 돌파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것은 좋았으나 호프필드를 몇 km 남기고 결국 연료가 떨어졌다.

 가만히 앉아서 철충이 오기를 기다리던가, 걸어서라도 호프필드로 가던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몇 분 걷지도 않았건만 지휘관은 자꾸 다리를 절어댔다. 몇 주 동안 잠만 잤다고 해서 강화시술을 받은 몸이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망가진 것은 정신이었다. 그의 시야는 안개 속을 헤엄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저 장난스럽게.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던 지휘관이 칸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기동장치를 품에 안은 채 맨발로 걷고 있었다. 허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벅지를 타고내려 종아리에 닿더니, 어느새 발가락 사이를 적시고 있다.


 "괜찮은 거 맞아?"

 "인간이 괜히 부려먹으려고 우리를 만든 게 아니다. 이 정도 상처로는 문제없어. 곧 출혈도 멈출 거다."

 "그래. 네가 괜찮다는데 뭐 어쩌겠냐."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있고?"


 공을 되돌려주듯이 묻는 칸에게 지휘관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야지. 너 죽으면 누가 나 지켜줘. 이렇게 허허벌판인데 칙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라고."

 "하긴 그렇군. 생각해보니 내 계산대로라면 호프필드에 도착하는 것보다 철충에게 따라잡히는 게 먼저다."

 "진짜?"

 "아쉽게도 진짜다."

 "그럼 뛰는 게 낫지 않냐?"

 "네가 뛸 상태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네가 나 업고 뛰는 건?"


 칸은 자신의 피 흘리는 옆구리를 보여줬다.


 "나도 몸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다."

 "그 정도는 별로 문제없다며?"

 "문제 있다. 그냥 안심하라고 거짓말한 거였다."


 지휘관이 실실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도움이 될만한 이야깃거리도 없으니 레프리콘에 대해서나 생각해 봐라."

 "아니 왜 자꾸 걔 이야기를 꺼내? 나는 걔가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몰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거 같구만."


 칸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못 만나겠지.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끝나면 레프리콘을 본부까지 데려다줘야 한다. 그러니 할 말이 필요한 거고."

 "기왕 살아남았으면 남은 생은 인간 똥 닦지 말고 보람차게 살라고 하면 되지 뭘."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자기도 맘스베리로 갈 거라고 하면 어쩔 건가?"


 지휘관은 치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맘대로 하라고 해라. 자기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운데 죽고 싶어 환장한 걸 어떻게 데리고 다녀."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행동이 정반대였지."

 "그럼 뭐 내가 네들 죽일 생각으로 움직여야 하냐. 나는 그냥 이 염병할 병 때문에 죽는 게 확정된 거라 그런 거고."

 "그런가? 네 죽음이 확정됐다고?"


 지휘관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진짜 편안히 죽는 것에 만족하려 했다면 허리에 꽂아둔 그걸 쓰면 된다."


 지휘관은 굳이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권총이 꽂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레프리콘이 줬던 것이었다.


 "하지만 넌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래서 전선을 빠져나와, 나에게 호프필드로 데려다주라고 부탁한 거지."


 칸은 썩 맘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지 않다는 거다 지휘관.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도 포기하기 싫어하니까. 인간의 그런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필요해."

 "네가 뭘 알어."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건 안다."


 그녀가 기동장치를 내려놓더니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그리고 네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도 알지."


 지휘관은 칸이 쳐다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도로 끝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내 거리가 가까워지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퀵카멜과 워울프였다. 퀵카멜의 등에 짐짝처럼 탑승한 레프리콘도 있었다. 지휘관의 생존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에 일순간 안도의 빛이 돌았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곧 날카로운 분노가 되어 그를 노려보았다.


 칸은 흔들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레프리콘에게 할 말은 정했나?"


 지휘관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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