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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했다. 이제 내가 하지.


 나이트칙들이 퀵카멜과 워울프를 쫓아 먼지구름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칸이 먼지구름을 찢고 쏜살처럼 날아왔다.

 그야말로 ‘날아왔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속도. 나이트칙은 사격을 위해 자세를 추스를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번뜩이는 작은 섬광이 비치더니 나이트칙의 선두가 와르르 무너진다.

 잘려나간 강철다리가 튀어 오르고 두 동강 난 몸체가 따로 구른다.

 급하게 멈춰선 나이트칙들이 탄막을 흩뿌린다. 타다당!! 총성이 울리자마자 또 몇 기의 나이트칙이 토막난다.

 칸이 달리는 궤적은 거의 직선에 가깝다. 회피기동은 커녕 총알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최단거리로 나이트칙에게 접근한다.

 과정도 없다. 그냥 사진에 찍힌 잔상 같은 것이 나이트칙을 관통해 지나가는 걸로 보인다.

 그때마다 또 몇 기의 나이트칙이 토막 나 떨어진다. 자기가 절단된 것도 모르고 계속 총을 쏴댄다.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쓰러져나가는 동족을 본 철충들이 급하게 대열에서 떨어져 거리를 벌린다.

 이어지는 일제사격.

 빅칙과 나이트칙의 탄막이 칸과 동족들 덮친다. 칸 주위에 있던 나이트칙들이 탄환에 바스러져 날아간다.

 그렇게 앞서가던 나이트칙이 전부 쓰러졌을 때, 이미 칸은 옆의 폐허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없다.


 빅칙이 그녀의 동선을 쫓으며 계속 탄을 쏟아붓는다.

 벌집이 되어 무너지는 콘크리트를 향해 나이트칙 추격조가 뛰어든다.

 어두운 폐허 안에서 불이 번뜩이며 나이트칙의 총성이 연달아 울린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총성이 뚝 그치고 칸만 폐허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제 남은 건 빅칙 하나와 나이트칙 셋.

 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빅칙을 향해 질주한다. 그녀의 다리 옆으로 길게 빠진 칼날이 섬뜩한 빛을 낸다.

 빅칙과 나이트칙이 맹렬하게 총탄을 퍼붓는다. 탄막은 아무 소용없다. 그녀가 빅칙의 오른쪽으로 급선회하자 철충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빅칙이 오른쪽으로 총구를 돌리는 사이에 왼쪽에 서 있던 나이트칙부터 차례차례 세 토막이 난다.


 순식간에 나이트칙이 쇳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남은 건 빅칙 하나.


 키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빅칙의 다리에 불꽃이 튀며 긴 흠집이 생긴다. 칸의 칼날이 빅칙의 장갑을 가르지 못하고 긁은 것이다. 반동으로 튕겨 나온 그녀가 도로 위로 빠르게 회전하며 미끄러진다.

 칸의 방향을 인지한 빅칙이 곧바로 몸체를 돌린다. 조준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돌아가는 총구는 이미 불을 뿜고 있다.

 칸은 중기관포를 피해 폐허의 벽 사이로 가속한다. 빅칙의 왼쪽으로 선회하며 무너진 건물을 타고 더 높은 층으로 달린다.

 수많은 동족을 통해 그녀의 속도를 확인한 빅칙은 그녀가 나아갈 방향의 한참 앞에 미리 총알을 뿌린다.

 중기관포의 사선을 따라 건물이 빠른 속도로 박살 나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칸이 뛰어오른다.

 그녀가 나타난 방향은 터무니없이 앞선 지점에 총탄을 뿌려댄 빅칙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앞선 지점.

 빅칙의 측면이다.


 무너지는 2층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온 칸이 빅칙의 얇은 상부장갑 위를 스쳐 지나간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고, 빅칙의 윗부분은 이미 지워진 것처럼 잘려나가 없다.


 착지한 칸이 뒤로 달리며 빅칙을 주시한다.


 쿵.

 빅칙의 거대한 몸뚱이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그제야 칸은 속도를 늦추며 허리를 폈다.


 워울프와 퀵카멜을 쫓던 철충무리는 27초만에 사라졌다.


 앞으로 몸을 돌려 달리는 칸의 옆에 어느새 퀵카멜과 워울프가 따라붙었다.


 "워우 다 쓸어버렸네. 몸은 좀 괜찮아 대장?"


 워울프가 장난스레 묻자 칸이 자신의 배를 보여줬다.


 "응급처치하는 법을 더 익혔으면 좋겠군 워울프."


 워울프가 힐끗 보니 칸의 배에 감은 붕대가 새빨갛게 젖어가고 있었다.


 "이런, 미안. 그런데 대장처럼 움직이면 바늘로 수십 바늘을 꿰매놓아도 바로 터질걸."


 퀵카멜이 워울프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내가 감아줄게. 쟤한테 좀 맡기지 마."

 "항상 네가 다 해줄 수는 없어. 살아남는데 필요한 거라면 워울프들도 알아야 한다. 네가 연습시켜줘라."


 칸의 대답에 퀵카멜의 눈이 더욱 가늘어진다.


 "또 상처 터져도 난 몰라."


 워울프가 염치도 없이 실실 웃어댄다. 칸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슬쩍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호프필드의 도심지를 향했다.


 지휘관, 서비스는 해줬다. 나머지는 잘 해봐라.


 호드의 세 바이오로이드는 곧장 호프필드 밖으로 나아갔다.



 .......



 맘스베리.

 도심지 한가운데에 시커먼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시가지는 완전히 무너져 평탄한 곳이 없었다. 도시 자체가 커다란 웅덩이처럼 푹 꺼져있었다.


 사방을 가린 두꺼운 먼지구름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낮인데도 달 없는 새까만 밤 같다.


 쿵 쿠궁

 아직도 요란하게 무너져내리는 콘크리트 잔해가 있었다.

 난잡하게 부스러지는 소리 사이에 빅칙의 육중한 발소리도 섞여 있다.


 어둠 속에 철충의 붉은빛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타다다당!!


 시커먼 구름 속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타다당!!

 타다다당!

 타당!


 총소리가 점점 늘어난다. 불처럼 번진다.


 "마리 대장님!"


 브라우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리는 한참을 걸려 힘겹게 눈을 떴다.

 숨이 텁텁했다. 얼굴에 두껍게 쌓인 먼지가 느껴졌다.

 몽롱한 시야에 그녀의 어깨를 흔드는 브라우니가 보였다.


 "이제 어떡함까 대장님? 명령을 내려주시지 말임다!"


 콘크리트에 기대어 앉아 있던 마리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입이 안 움직였다.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움직여 상황을 살폈다. 시커멓게 내려앉은 먼지구름 속에 스틸라인이 모여들고 있었다.


 기껏해야 20명이나 될지 모르는 숫자다.

 광학장비를 착용한 레프리콘들이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에 바짝 엎드려 총을 쏴댔다. 총알이 없는 몇몇 브라우니는 남는 총을 찾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부상을 입은 브라우니는 무너진 벽 뒤에 움츠려 별다른 치료 없이 죽어갔다.


 철충은 사방에서 총을 쏘아댔다. 먼지구름 때문에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만 보였다.


 방어선 뒤로는 절단된 지반이 절벽이 되어 퇴로를 막고 있다.

 후퇴하는 건 어렵겠지.

 아니, 후퇴할 일도 없고 후퇴할 곳도 없다.


 3차 방어선이 마지막이었다.

 4차 방어선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설치해둔 폭탄도, 피닉스의 포격도, 이제 없다.


 스틸라인이 쌓아놓은 수단은 모두 무너졌다.


 남은 것은 스틸라인, 그 자체.


 "마리 대장님?"


 브라우니가 부른다. 마리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여전히 말은 못 했다. 그녀의 목에 박힌 소구경탄이 혈관을 짓이기고 있었다.


 브라우니는 마리의 눈이 움직이는 걸 보더니 그녀의 옆에 놓아두었던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비홀더의 눈 두 개였다.


 "아직 쓸 수 있으심까?"


 마리의 눈에 푸른 빛이 돌았다. 비홀더의 눈이 전원신호를 깜빡이며 몸을 떨었다. 그 작은 레이져드론들은 브라우니의 손 위로 약간 떠오르더니, 곧 동력을 잃고 툭 떨어졌다.

 그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보고도 브라우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리의 옆에 비홀더의 눈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녀는 마리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에 놀라거나 좌절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탄입대에서 무언가 꺼내 내밀었다.


 스팸이었다.


 "좀 드시고 쉬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검다!"


 활짝 웃는 브라우니의 흙투성이 얼굴을 보자니 마리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린다.

 그 희미한 미소를 본 브라우니는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뻥 뚫린 가슴 아래로 검붉게 말라붙은 피.

 몸의 왼쪽은 새까맣게 타버렸고 왼팔은 아예 없다.

 온몸에 피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피를.


 마리는 자신이 지금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을 것이다.


 타다다당!! 몰아치는 총성이 더욱 강해진다.


 브라우니는 서둘러 마리의 손에 스팸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총을 들고 나서려는 찰나, 그녀의 손을 붙드는 작은 힘을 느꼈다.

 마리의 커다란 손이 아기처럼 미약한 힘으로 브라우니의 손을 쥐고 있었다.


 마리는 브라우니의 팔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윗몸만 긁어댈 뿐 더 이상 팔을 올리지 못했다. 눈치 빠른 브라우니는 마리의 오른쪽 어깨주머니를 뒤졌다.


 여러 번 접힌 종이가 나왔다.

 지도였다. 핏방울이 조금 묻어있긴 하지만 큰 탈은 없어 보였다.


 마리는 지도를 쥔 브라우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이 실낱같은 힘을 쥐어짜 브라우니의 손을 눌렀다. 지도를 쥔 손가락이 꾸욱 감긴다.


 "싸....."


 마리가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브라우니는 마리의 입에 귀를 갖다 댔다.

 사방에 울리는 총소리 속에 꺼져가는 촛불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싸워...... 나는 아직....... 제군....... 곁에 있다......."


 브라우니는 마리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총을 굳게 쥔 그녀는 씩씩하게 답했다.


 "모두에게 전하겠슴다!!"


 그러고는 총알이 빗발치는 자매들 곁으로 달려갔다. 마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브라우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손 옆에 놓인 스팸에 아직 브라우니의 체온이 남아있다.



 ..........



 털썩.

 지휘관이 또 주저앉았다. 세 번째다.

 레프리콘은 기관총을 옆구리에 끼고 그를 부축했다.

 그의 앙상한 얼굴은 여전히 실실 웃고 있다.


 "야, 네가 나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 철충은 누가 막냐."

 "혼자서 못 걷는 걸 어떡해요."

 "이상하게 졸리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힘이."

 "........"


 건물 밖으로 나가기 직전 레프리콘이 멈춰 섰다. 반쯤 졸고 있던 지휘관이 고개를 들었다. 레프리콘의 손가락이 폐차로 가득한 긴 도로 너머 100m 정도 떨어진 폐허를 가리켰다.


 "저기 맞죠? 세이프하우스."

 "위치를 아가씨가 어떻게 알아?"

 "출발하기 전에 마리대장님이 말해주셨어요. 그래서 맞냐고요."

 "몰라 흐려서 잘 안 보여. 네가 맞다니까 맞겠지."

 "정신 좀 차려요."


 레프리콘은 지휘관을 잠시 벽에 기대어 놓고 기관총을 살폈다. 무엇이 나타나든 곧바로 쏠 기세였다.


 "여기서부터는 엄폐물이 없어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요."

 "아까부터 최대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더 열심히 움직이라고요. 땅 울리는 소리 안 들려요? 철충놈들이 이미 호프필드로 들어왔단 말이에요."


 지휘관이 웃는다.


 "소리가 나고 있었어? 몰랐네."


 레프리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대로 도시 전체에 철충의 발소리가 울려댔다. 멀리서 묵직하게 울리는 발소리였지만, 그 거리는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정말 그 소리가 안 들린다는 표정이다. 뻔뻔할 정도로, 음흉하게 웃고만 있다.


 "........ 그러니까 서둘러요. 따라잡히는데 몇 분 안 걸릴 테니까요."


 레프리콘이 다시 지휘관을 부축했다.


 "가다가 총 맞으면 어떡해."

 "맞는 거죠.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다고 하더니."

 "총 맞으면 아프잖아."

 "가요."


 레프리콘이 건물 밖으로 나아갔다. 지휘관이 그녀의 속도에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 빠르게 걷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의 다리는 필사적이었다.


 폐차와 쓰레기만 넘쳐나는 드넓은 도로 위에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철충에게 발각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표적이 될 것이었다.


 지휘관은 정신없이 걷는 도중에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폐허 속에 익숙한 풍경이 하나둘 보인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그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말할 여유 있으면 더 빨리 걸어요."


 레프리콘은 예민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 총알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지휘관은 태평하게 말했다.


 "아가씨 참 이상한 레프리콘이야."

 "또 왜요."

 "나 왜 따라왔어?"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지휘관님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말고."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아가씨 나 안 믿는다면서."

 "네. 안 믿어요. 그러니까 직접 확인하러 온 거죠. 저기 뭐가 있는지."

 "그런 것 때문에 친구들 말고 날 따라 왔다고? 브라우니 하나 때문에 그렇게 우울하던 애가?"


 레프리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진짜 이유가 뭐야?"


 지휘관이 묻는다.


 "더 빨리 걸어요."


 레프리콘은 짧게 답했다.

 그 순간 지휘관이 자리에 쓰러졌다. 놀란 레프리콘이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지휘관의 두 다리는 똑바로 서지 못 했다.


 "하, 여기까지인가 보다. 인제 와서 몸뚱이가 지랄이네. 처바른 돈이 얼마인데."

 "세이프하우스가 코앞이에요."

 "필요 없어. 가봐야 별거 없는 걸 뭐."

 "별거 없다고요?"

 "그래."


 지친 얼굴로 허탈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레프리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지휘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휘관님이야말로 이유가 뭐죠?"

 "이유? 뭔 이유?"

 "왜 항상 다 그렇게 포기한 것처럼 말해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포기할 게 어디 있어. 애초에 아무 목적도 생각도 없고...... 이미 가진 게 없었는데."

 "그럼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온 건데요. 여기에 온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오려고 했던 이유가!"

 "그냥."

 "그냥이라고요?"

 "그래. 그냥."


 그 짧은 대답이 끝이었다.

 레프리콘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당신이 제 눈앞에 남은 마지막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인간?"


 지휘관은 비웃듯이 내뱉었다.


 "아가씨, 난 옛날에는 세상에 인간이 바글바글한 줄 알았거든?"


 목소리가 격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랑을 줄 줄만 아는 노예년들이랑 사랑을 받을 줄만 아는 돼지새끼들밖에 안 보이더라고."


 그는 스스로 일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레프리콘은 그런 그를 보고만 있었다.


 "철충 그 버러지들은 아무 상관 없어. 이미 한참 오래전부터 인간이란 건 다 사라졌으니까. 네들이 지키고 말고 하기도 전에, 이미 인간이란 건 없었으니까. 이 세상에는 사람새끼 하나 안 남았다고. 내 말 알아들어?"


 그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도 똑같은 새끼야. 마지막 인간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단 말이야 아가씨."


 지휘관의 시선이 뜨겁다. 분노인 것 같기도 하고 후회인 것 같기도 했다. 그걸 보는 레프리콘도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입이 격하게 벌어지려는 순간-


 타다다당!!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린다.


 레프리콘이 곧바로 자리에 엎드렸다. 주위에 총탄이 튀었다. 지휘관은 폐차 옆으로 기어가 몸을 숨겼다. 타다다당!! 레프리콘이 반격하며 총성을 터뜨렸다.


 "나이트칙이 따라붙었어요!"

 "숫자는?"

 "둘이요!"

 "이기겠어?"

 "질 걸요!"

 "그럴 것 같다 야!"


 나이트칙 두 기가 폐차들을 밟으며 빠르게 달려왔다. 레프리콘이 총알을 뿌려댔지만 멈출 기미가 없었다.

 타다다다당!! 끊임없이 쏟아지는 탄환 중 하나가 나이트칙의 다리에 맞는다. 달려오던 나이트칙이 바닥에 처박히며 굴렀다. 레프리콘은 쓰러진 나이트칙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나이트칙은 그대로 벌집이 되어 박살 났다.


 그 사이 나머지 나이트칙 하나가 레프리콘에게 접근했다. 레프리콘이 재빨리 총구를 돌려 다가오는 나이트칙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철컥.

 총이 나가지 않는다.

 탄이 떨어졌다.


 레프리콘은 침착하게 새 탄통을 꺼내 장전을 시작했다. 나이트칙의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그녀의 손이 분주하게 탄띠를 꺼내 기관총에 넣는다.


 틱, 틱,

 탄이 자리에 맞물리지 않는다. 손이 떨린다. 탄띠가 계속 자리와 엇나간다.


 쿵. 강철다리의 무거운 걸음이 그녀의 앞에 내리꽂혔다. 레프리콘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나이트칙의 총구가 보였다.


 탕!


 총성과 함께 나이트칙의 뒤통수에 불이 튄다. 탕! 탕! 연달아 울리는 총소리에 나이트칙이 몸을 돌렸다. 권총을 들고 있는 지휘관이 보였다.

 탕!

 권총이 불을 뿜었지만 나이트칙의 외피에 맞고 튕겨나간다. 철충의 장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관은 멈추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타다다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관총탄이 나이트칙의 몸을 뚫었다. 박살 난 나이트칙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기관총을 들고 있는 레프리콘이 보였다.

 막 장전된 기관총의 총구에서 하얀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지휘관이 앉아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당신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나도 몰랐지."

 "그 권총이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힌다. 레프리콘의 눈이 커진다.

 지휘관은 평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에이 씨, 좀 빨리 처리하지 그랬어."


 그의 배에 뚫린 총상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



 "맘스베리까지 3부운-."


 다이카의 늘어지는 목소리에 메이가 스위치커버를 내려친다.


 "말 좀 빨리하라고 몇 번을 말해 다이카!"

 "네에-"

 "아악! 됐으니까 거기 땅개들 상황이나 봐봐!"


 다이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스캔 결과, 없네요오."


 그 말에 둠브링어 대원들 모두가 말을 잃었다. 메이만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묻는다.


 "정확해? 하나도 없다고?"

 "커다란 낙진...... 같은 것 때문에..... 잘 스캔이 안 되지만....... 확인되는 스틸라인 신호는- 없어요오."


 선두의 지니야의 대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악! 날뛰지 마세요 피닉스 대령님! 떨어져요!"

 "이 망할 철충새끼들이!!""


 피닉스가 분을 못 이겨 바둥거리자 그녀를 붙잡고 있던 지니야의 비행모듈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걸 보던 메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닥치고 찌그러져 피닉스. 내 부대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하지만-"

 "지니야가 뭘 잘못했는데."


 피닉스는 대답을 못 했다. 그녀가 잠잠해지자 메이의 시선이 다시 다이카를 향한다.


 "철충은 있어?"

 "확인되는 것만- 200기 조금 넘네요오-."

 "오호라. 마리나부랭이들이 그 병력으로 용케 놈들을 반토막 내놓았네. 마냥 똥별은 아니었나 봐."


 나이트앤젤이 평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할 건가요 대장."

 "물어볼 필요가 있어 빨래판?"


 턱을 괸 메이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이글거렸다.


 "폭탄 안전장치 전부 풀어. 저 도시에서 개미 새끼 하나라도 살아나왔다간 네들 전부 추락시켜버리겠어."



 .........



 시커멓던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잿빛하늘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조금 밝아졌지만 나아질 건 없었다.

 맘스베리에 남은 마지막 스틸라인 방어선은 매 순간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타다다다당!!

 엄청난 속도로 불을 뿜던 기관총이 갑자기 뚝 멈춘다. 레프리콘이 고개를 틀어 빈 탄통을 보았다.


 "브라우니! 탄 가져와요!!"

 "그게 마지막임다! 이 근방은 다 뒤졌지 말임다!!


 검은 먼지구름을 뚫고 나온 나이트칙들이 곧장 방어선을 향해 달렸다. 레프리콘이 다른 자매들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 탄 남은 거 없어요?!"


 다른 레프리콘들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도 빈 기관총을 놓은 지 오래였다.

 철충의 총알이 쏟아졌다. 레프리콘은 콘크리트 뒤로 쭈구려 앉으며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 아직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더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돌려도 그녀를 구해줄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10명 남짓한 자매들과 바닥에 깔린 탄피뿐이다.


 레프리콘은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로 나이트칙이 다가오는 진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을 쥐어 들었다.


 철충의 기척이 더욱 가까워진다.


 다른 스틸라인들도 손에 무언가를 들었다.

 돌덩이든, 철근이든, 빈 총이든, 맨 주먹이든-


 철충이 더욱더 가까워진다.


 침묵으로 무거워진 전선의 공기를 헤치고 브라우니 하나가 마리에게 다가왔다.


 "마리대장님, 아무래도 이제-"


 말을 하려던 브라우니의 입이 굳었다.


 "대장님?"



 ...............



 지휘관의 배가 순식간에 빨갛게 젖어갔다.

 레프리콘은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안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쉬자. 많이 왔잖아 우리."


 그가 폐차에 편하게 등을 기댄다. 레프리콘도 기관총을 쥔 손에 힘을 뺐다.

 붉은 눈동자에 지휘관의 피가 비친다.


 "아파요?"

 "아프긴한데. 솔직히 모르겠다. 몽롱해서..... 감각이 잘 안 느껴지네."


 그는 또 실실 웃는다.


 "죽을 때 됐나보다 야."

 "........."


 그를 빤히 쳐다보던 레프리콘이 말했다.


 "지금쯤 맘스베리는 무너졌겠죠?"

 "그래. 그렇겠지."

 "저희 스틸라인은 용감해요.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싸웠을 거예요."

 "멍청한 년들."

 "그러니 누군가는, 자매들한테 말해줘야죠. 우리가 지키던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지휘관이 그제야 깨달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유가 그거네. 나 죽는 거 보러 온 거네. 그런데 뭐, 나 죽는 거 보려고 아가씨도 같이 죽겠다고?"

 "어차피 갈 데도 없어요. 복귀하면 다른 브라우니들이랑 만나고, 또 걔들 죽는 거나 보겠죠."

 "그래서 저세상 친구들 만나러 가시겠다?"


 레프리콘은 대답이 없다.

 지휘관은 또 실실 웃으며 물었다.


 "나 죽는 거 보니까 좋아?"

 "좋을 리가 있나요. 바이오로이드인데."

 "아가씨 나 싫어하잖아?"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싫어한 게 아니에요! 싫어할 수 없다고요!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냥 당신이 저희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주길 원한 것뿐인데! 당신이 저희 스틸라인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니......"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피한다.


 "됐어요.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도 지쳐요. 어차피 다 끝났는데요."


 레프리콘이 입을 다물었다. 지휘관은 시선을 힐끔 내려 자신의 배를 살폈다. 옷이 피에 흠뻑 젖은 게 썩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지휘관은 배에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보았다. 잿빛구름만 보인다.


 "나 그렇게 너희들 봐줄 수 있는 사람 아니야. 허구한 날 남 등처먹고 속이면서 입에 풀칠해왔는데. 이젠 나도 내가 했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가. 너희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잖아. 나 안 믿는다며. 그런데 뭘 남을 봐주고 있어 봐주긴."


 그가 힘없이 고개를 내려 손에 들린 권총을 빤히 쳐다본다. 레프리콘이 수상한 낌새를 차리고 물었다.


 "뭐하시게요."

 "내 고통을 줄이려고. 이러라고 준 거잖아? 잘 쓸게."


 레프리콘이 재빨리 권총을 낚아챘다. 지휘관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하냐."

 "제 앞에서 자살하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아니, 언제는 자기가 쓰라고 줘놓고 지금 와서 왜 이래."

 "자살할 거면 제 눈에서 안 보이는데 가서 해요."

 "내 배에 총알 박힌 거 안 보여? 내가 어떻게 가. 가려면 아가씨가 가야지."

 "안 가요. 당신이 죽는 걸 지켜봐야 하니까."

 "뭔 개소리야. 나보고 어쩌라고."


 그가 고개로 폐차 너머를 가리켰다.


 "철충 몰려오고 있다며? 나 죽기전에 칙이라도 달려오면, 너도 죽을래?"

 "말했잖아요. 그럴 생각으로 따라왔다고요. 죽으실 때까지 철충은 최대한 막아드릴게요."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너희들이 싫다는 거야. 하나 같이 다 뒤질 궁리만 하네. 좀 살면 어때서."

 "먼저 모범을 보이고 나서나 그렇게 말하던가요."


 레프리콘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걸 본 지휘관은 또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하 씨, 마리가 너 살려보내달라고 했는데."

 "당신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나요."

 "쓰지. 괜히 약속 못 지키면 묫자리가 뒤숭숭하잖아."


 레프리콘의 눈이 가늘어진다.


 "당신은 말이 안 되는 인간이에요. 언제는 거짓말쟁이라면서 지금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고, 희망을 가져라, 희망은 쓸 데 없다 둘 다 말하고 다니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서 생떼를 써서 여기까지 기어오고. 정작 그렇게 개고생을 하며 왔더니 그냥 온 것뿐이라며 주저앉아 버리고......"

 "나만 그러냐. 원래 인간이라는 게 다 그래."

 "그래서 어쩔 건가요. 권총도 저한테 뺏기고 없는데. 그냥 천천히 죽으시죠."


 레프리콘의 당돌한 태도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쿨럭, 문득 기침이 나온다. 레프리콘이 힐끔 쳐다본다. 지휘관은 태연한 얼굴로 피가 섞인 침을 뱉더니 또 실실 웃었다.


 "그거 알아?"

 "뭘요."

 "여기서 남서쪽으로 국도 타고 쭉 내려가면 10km도 안 되서 공단 나온다? 거기가 펙스 거 바이오로이드공단이거든."

 "그래서요."

 "지금은 우리가 쓰지. 제품에 하자 있으면 그리로 보내라더라."


 쿨럭, 쿨럭, 기침이 심해진다. 레프리콘은 그의 안색이 꽤나 창백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말하기 힘들면 그냥 쉬세요."

 "하여튼 거기에 네 브라우니도 있을 거야."


 그 말에

 레프리콘의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뭐라고요?"

 "거기 담당자 새끼가 튀었으면, 쿨럭, 아직 네 브라우니도 폐기처분 안 되고 남아있을 거라고."

 "거짓말 마요. 지금 저 보내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믿기 싫음 믿지 마."

 "....... 진짜에요?"

 "진짜라니까."


 레프리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타오른다. 그녀가 짐승처럼 달려들어 지휘관의 어깨를 쥐었다.


 "왜 그걸 이제 말해 이 새끼야!!"

 "쿨럭, 쿨럭, 어이구, 없을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괜히 너한테 희망심어줬는데, 막상 가보니 이미 폐기처분 되어있으면, 너 자살이라도 하면 어떡해. 내가 기분 나쁘잖아."


 그는 또 실실 웃었다. 레프리콘은 어금니가 박살나도록 이를 악물며 주먹을 들었다. 당장 그의 웃는 얼굴을 깨부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잠깐."


 그런 그녀에게 지휘관은 말했다. 


 "총으로 해줘. 한 방에 끝내게."

 "이.....!!"


 레프리콘은 입을 앙다물며 간신히 주먹을 내렸다. 그녀가 도로 주저앉았다. 지휘관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본다.


 "이래도 안 죽여?"

 "당신 안 믿어요. 거짓말쟁이니까."

 "진짜라니, 쿨럭, 쿨럭 쿨럭, 진짜라니까 그러네. 철충 새끼 오기 전에- 빨리......."


 점점 그의 숨이 가빠진다. 흐린 눈을 자꾸 깜박여댄다. 레프리콘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봤다.


 "그렇다면 말해봐요. 저한테 했던 이야기도 진짜였어요?"

 "진짜라니까."

 "재벌이랑 가정부 바이오로이드들, 소완 이야기요."

 "아니, 아니다. 그것들은 개소리야. 그냥 그때 아가씨 재밌으라고 한 이야기였어."

 "소완이랑 약속한 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지휘관은 실실 웃으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이 아가씨 왜 이래. 다 거짓말인 거 알잖아. 쿨럭, 그냥 네들한테서 빠져나오려고 지어낸 거라고 이, 쿨럭, 멍청한 년아. 됐으니까 빨리 나 죽이고 너는 네 갈 길이나 가."


 이제는 말하기도 힘든지 반응이 격해졌다. 그걸 본 레프리콘은 직감했다.


 "거짓말이군요."

 "그래. 몇 번을 말해. 거짓말이라고."

 "아무 이유 없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군요."


 지휘관의 숨이 순간 멎는다.

 그 경직을 숨기려는 듯이 그는 재빨리 실실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레프리콘은 확신한 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

 "왜 여기서 멈추려고 해요?"

 "........."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그 뒤에 남은 건 지친 한숨뿐이었다.

 레프리콘의 눈빛이 한층 차분해졌다.

 '그래서 이 임무를 너에게 맡긴 거다.'

 마리의 말이 떠올랐다.


 "저라면 브라우니를 눈앞에 두고 멈추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라고."

 "세이프하우스, 안 들어가 볼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지휘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늘 뻔뻔하게 웃어대던 얼굴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가서 뭐하게. 눈이 달렸으면 좀 봐라 뭐가 남아있게 생겼나. 다 박살났는데 약속이고 뭐고 지킬 방법이 어디 있어. 기껏해야 걔 시체나 찾겠지."

 "그래서 여기서 그만두게요?"

 "충분히 왔잖아. 사실 중간에 오다가 분명 총 맞아 뒈질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진짜, 쿨럭, 와버렸네."


 지휘관이 고개를 든다. 안쓰럽게 웃는다.


 "막상 오니까, 들어가기 무섭잖아....... 별로 안을 보고 싶지가 않아. 진짜....... 안을 보고 싶지가 않아........ 원래는 저 안까지 가서 아가씨 보내주려 했는데......."

 "보내주다뇨? 저를 보내준다고요?"


 그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부탁했다.


 "그냥 좀 여기서 끝내주라."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걸 본 레프리콘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진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절 데리고 온 거였네요."


 그녀의 시선이 손에 들린 권총을 향한다.


 "당신이 죽으면, 철충은 절 쫓지 않을 테니까......."


 쿵, 쿵,

 잿빛하늘에 철충의 발소리가 울린다.

 권총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휘관님."


 레프리콘의 시선이 지휘관의 창백한 얼굴을 향한다.


 "당신에게, 소완은 뭐였죠?"


 그 말에

 지휘관은 웃었다.

 실실,

 고개를 저으며, 실실,

 계속 웃다가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레프리콘은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신과 분노가 잔불처럼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당신은.....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죽인다는 게 얼마나 상처받는 일인지 알긴 아나요."

 "내가 어떻게 알아."

 "끝까지 뻔뻔해."


 망설이던 팔이 올라간다. 권총이 그의 머리를 겨눈다.

 지휘관은 웃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쏴드릴게요."

 "고마워."


 레프리콘의 루비빛 눈동자가 떨린다.


 "진짜 쏴드릴 테니까-"


 그녀는 권총을 내렸다.


 "우리 조금만 더 가요. 여기까지 왔잖아요."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가기 싫다니까. 가봐야 아무것도 없는 거 알잖아. 나 이제 힘들어. 배에 총알도 박혔고. 졸려 죽겠고......."

 "소완 보고 싶지 않아요?"


 그가 시선을 들어 레프리콘을 쳐다본다.

 레프리콘은 다시 물었다.


 "보고 싶지 않냐고요."



 ............. 



 맘스베리.

 이젠 총성조차 울리지 않는 방어선.


 나이트칙들이 콘크리트 잔해를 기어오르고 있다.

 그 잔해 뒤에는 살아남은 마지막 스틸라인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손에 쥔 것은 돌과 쇠붙이.

 그런 걸로는 나이트칙 하나를 잡기는 커녕 그들의 장갑에 흠집도 못 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아직 불이 타고 있었다.


 철컥, 철컥,


 가까워지던 기계의 발소리가 이윽고 경계를 넘는다.

 콘크리트 더미 위로 나이트칙의 붉은 눈빛이 드러났다. 철충의 차가운 총구가 스틸라인을 겨눈다.


 그녀들 모두가 마지막 숨을 삼키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나이트칙은 몸을 들어 하늘을 본다.

 맘스베리의 모든 철충들이 동시에 하늘을 본다.


 타다다다당!!


 우레 같은 총소리와 함께 온갖 탄환이 잿빛하늘을 휘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틸라인 병사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나이트칙은 그녀들을 방치한 채 빈 하늘을 쏘기에 바빴다.

 빗발치는 탄환이 검은 먼지구름을 휘저어 찢었다. 저 멀리 빅칙런쳐의 미사일이 치솟는 것도 보인다.


 그 순간 잿빛 하늘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미사일이었다.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수 십 개의 미사일이 철충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빅칙런쳐가 쏜 미사일과 떨어진 미사일이 접근하며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을 뚫고 몇 개의 미사일이 더 떨어졌다.

 철충의 집중포화를 사이로 떨어진 미사일은, 지상에 닿기 수 십 미터 전에 폭발했다.


 떨어지던 수 많은 미사일이 공중에서 폭발했으나 파괴력은 거의 없었다. 터진 미사일에서 나온 것은 충격과 불꽃이 아니라, 반짝이는 가루였다.


 금박지처럼 반짝이는 빛무리가 맘스베리를 뒤덮었다.

 방금 전만해도 거침없이 총알을 쏟아붇던 철충들이 얼어붙은 듯이 멈춰섰다. 총구가 목표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온 도시를 울리던 총소리가 뚝 그쳤다.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들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봤다.


 빛나는 눈이 내리며 잠시 동안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쿠우웅-!


 멀리서 들려온 굉음이 피부를 때린다. 퍼뜩 정신을 차린 스틸라인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도시의 외곽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는 게 보였다.


 쿠우웅-!


 그 앞에 불기둥이 또 하나 치솟으며 땅을 흔들었다.


 쿠우웅-! 쿠우웅-!


 불기둥이 연달아 솟는다. 지반이 거꾸로 솟는 대폭발에 주위에 있던 건물들이 성냥개비처럼 무너져 날아간다.


 쿠궁-! 쿵! 쿵! 쿵! 쿵!


 거대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며 다가왔다. 경로에 있는 모든 폐허가 가루가 되어 불타올랐다. 엄청난 속도로 땅을 뒤엎으며 다가오는 화염의 파도가 괴물처럼 울부짖는다.


 콰아앙!!


 그제야 철충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가루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탈출루트를 찾는다. 정신 없이 튀어오르는 나이트칙들이 서로 뒤엉켜 부딪힌다. 넘어지는 빅칙에 나이트칙이 깔려 박살난다. 그걸 밟고 뛰어오른 나이트칙들이 다가오는 폭발로부터 벗어나려 전속력으로 달린다.

 스틸라인은 엄폐물 뒤에 납작 엎드렸다. 수많은 나이트칙들이 그녀들 위로 달려 지나갔다. 포식자를 피해 무리지어 도망가는 짐승무리 같았다. 철충이 만들어낸 무수한 발소리가 거침 없이 귀를 때렸다. 그걸 뒤덮어 버릴 듯한 폭발의 굉음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도시를 씹어삼키는 폭발의 연쇄는 자비가 없었다.


 무리지어 달리는 나이트칙들이 팝콘 터지듯이 튀어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건물 아래 숨은 칙들은 콘크리트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지하로 파고든 나이트칙들은 흙에 묻혀 잿더미가 되었다.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빈틈없이 떨어지는 융단폭격은 맘스베리를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밀어버리고 있었다. 


 -N-1, B1 투하완료. B2 투하. 투하.

 -N-2, B1 투하완료. B2 투하합니다. 투하.

 -N-3, B1 투하-


 나이트앤젤 세 기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보고하며 폭탄을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뜨렸다.

 훨씬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 보는 메이는 아무 말 없이 턱을 괴고 있었다.

 그녀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 불타오르는 맘스베리가 비친다.


 지니야에게 안긴 피닉스도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만해도 자매들과 함께 먹고 떠들었던 땅이 새빨간 점이 되어 사라지려 한다.


 "폭격이에요!! 저희가 있다는 거 알려야 해요!!"


 레프리콘이 엄폐물 밖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나이트칙 사이로 브라우니들이 달려왔다. 이미 철충과 스틸라인은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서로 제각기 갈 방향으로 달릴 뿐이었다.


 "거기요!! 아무도 안 들려요?!"

 "통신 채널 바꿔봐요!"

 "안 돼요! 다 먹통이에요! 저거 채프인가 봐요!"


 레프리콘 둘이 모여 급하게 떠들어댔다. 그 사이 브라우니 몇몇이 하나 남은 이프리트에게로 달려갔다.


 "병장님!! 지금 폭탄 떨어지고 있지 말임다!! 저희 있다고 알려야 하지 말임다!!"


 박격포를 부둥켜 안고 있는 이프리트는 대답이 없다. 브라우니들이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지금 주무실 때 아님다!! 뭐 조명탄 같은 거라도 쏘셔야 하지 말임다!"


 이프리트의 몸뚱이가 뒤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의 가슴은 총알에 파헤쳐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쿵! 쿠웅! 쿵!

 폭격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도망치는 나이트칙은 거의 다 지나갔다.

 스틸라인 병사들은 마지막 체력을 다해 다급하게 뛰어다녔으나 살아남을 방법은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폭격은 그녀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그녀들은 바다로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 한 곳에 모여들었다.

 마리 7호의 곁이었다.


 불굴의 마리라면 어떻게든-


 "마리 대장님! 아무래도 둠브링어가 온 것 같아요!! 어서 뭐라도 해야-"


 마지막으로 도착한 레프리콘이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앞서 모인 모두가 심상치 않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11기의 스틸라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마리를 내려다 보았다.

 마리 곁에 앉아있던 브라우니가 벌개진 얼굴로 눈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부르고 있는데, 심장이 안 뛰시지 말임다."


 그녀가 마리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마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돌덩이처럼, 그렇게 벽에 기대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 단단한 몸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굳어서 흐르지도 않았다.


 피로 물든 눈동자는 하늘을 향한 채 감기지 않고, 뻥 뚫린 가슴은 아무런 박동이 없다.


 스틸라인의 병사들은 그제야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가오는 폭격을 보았다.

 드높게 치솟으며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는 폭발을 보았다.


 두려움과 허망함이 섞인 표정으로 하늘을 보는 브라우니.


 "브라우니."


 레프리콘이 부르지만 못 듣는다.


 "브라우니!"


 어깨를 두들기며 소리치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레프리콘이 흙투성이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이제 쉬어요."


 왠지 그 짧은 말이 모든 걸 해결해준 것 같았다.

 브라우니는 실없이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다른 자매들도 제각기 편한 자리를 찾았다.


 싸움도 없이

 적도 없이

 오직 지친 몸만 남기고


 드디어 온 그녀들의 순간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용맹하게 빛나는 화염을.



 ............



 레프리콘은 지휘관을 간신히 등에 엎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비명이 터진다.


 "야! 야! 움직이니까 아프다!"

 "조금만 참아요!"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세이프하우스가 코앞에 있었다.

 등이 피로 빠르게 젖어가는게 느껴졌지만 레프리콘은 짐짓 안심시키려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알 한 두 방 맞은 걸로 엄살 피우지 마세요."


 레프리콘의 발이 조금 미끄러진다. 몸이 흔들리자 지휘관이 고통스럽게 신음한다.


 "좀! 아니 천천히 좀 가자 우리."

 "여기 있다는 걸 들켰으니 곧 우르르 몰려올 건데, 천천히 가도 괜찮겠어요?"

 "알았어 빨리 가 빨리."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진다. 그만큼 레프리콘의 걸음도 급해졌다.


 "정신차려요."

 "되게 신기하네. 아픈 건 아픈데 졸리긴 또 졸리다."

 "이 상황에 졸지 마요."

 "애쓰고 있어."


 그녀는 지휘관의 정신을 붙들려는 듯이 소리쳤다.


 "저한테 말했잖아요! 희망이라는 게, 저희 등을 밀어준다고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우리는 계속 등을 밀려서,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고, 간다고 뭐가 해결될 지도 모르는데, 계속 꾸역꾸역 불쌍하게 나아간다고요!!"


 인간의 꺼져가는 온기를 느끼며

 레프리콘은 간절하게 외쳤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기적이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모른다고요!!"



 ............



 파직-

 스파크가 튄다.


 하늘을 보는 브라우니의 뺨 옆으로 번갯불이 지나간다.


 아주 잠깐 스쳐간 섬광.

 브라우니는 무심코 그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브라우니가 무언가 가만히 쳐다본다.

 레프리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려본다.


 그녀들을 따라 다른 스틸라인들이 고개를 돌려본다.


 파직- 파지직!

 번갯불이 사방으로 뿌리를 뻗으며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 번갯불의 중심에

 다가오는 폭발의 괴성을 찢으며

 가라앉은 먼지구름을 태우며

 마리 7호의 너덜너덜한 육체가

 일어난다.


 브라우니들은 말이 없다.

 레프리콘들도 눈만 깜빡인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먹먹하게 귀를 채우는 폭발 소리 속에

 마리는 하나 남은 팔을 높게 든다.

 팔 옆에 비홀더의 눈 두 개가 떠오른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까맣게 물든다.

 이미 세상은 그녀에게 내줄 자리가 없다는 듯이 멀어져간다.


 그럼에도

 그저 매달리 듯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입이 움직인다.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를 낸다.


 ".........렇기에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비홀더의 눈이 빛을 뿜는다. 쥐어 짜내듯이 쏘아내는 레이져가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어둠을 찢는 별빛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소원처럼

 선명하게 솟아 올라 하늘에 흩뿌린다.


 하지만 그녀들을 향해 떨어지는 폭탄에는 닿지 않고

 한계를 넘은 비홀더의 눈 하나가 연기를 내며 추락한다.


 폭격이 온다.

 레프리콘들이 반사적으로 브라우니들을 감싸안는다.

 그녀들이 엄폐물로 삼았던 모든 벽들이 무너지고 공기가 타오른다.


 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 남은 비홀더의 눈이 계속해서 레이져를 쏘아 올린다.


 이미 보이는 것은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레이져를 쏘고 있다는 감각마저도 없다.


 불굴의 마리는 서서


 그저 계속 서서


 서서


 -


 이윽고

 그녀의 피투성이 손을 잡아주듯이

 레이져 한 줄기가 폭탄을 뚫는다.



 .........



 "폭격 끝났어요오. 포착되는 움직임은....... 없네요. 맘스베리는 완전히 소멸했습니다아."

 "알았어. 그만 말해 다이카."

 "이제 어떡하죠 대장."

 "돌아가야지. 놈들 잔소리들을 꺼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나네."

 "방금 그 말은, 일지에서 지울 게요오-"



 ...........



 세이프하우스의 현관이 보였다.

 앞으로 두 세 걸음이면-


 타다다당!!


 등 뒤로 멀리서 총성이 울린다. 레프리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가슴과 머리에 후려치는 충격이 느껴진다.

 앞에 매어놓았던 기관총이 박살나며 그녀의 몸이 자빠졌다. 등에서 떨어진 지휘관이 세이프하우스 안으로 굴렀다.

 현관 주위에 매섭게 총알이 박히며 콘크리트가 깨졌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레프리콘이 지휘관을 끌고 벽 뒤로 숨었다.

 지휘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빠르게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저새끼들 벌써 또 왔어?"

 "올 거라고 했잖아요."


 레프리콘이 휑한 창틀 위로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저 멀리 철충의 붉은 빛이 보였다. 무슨 칙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시야가 반 토막 난 것처럼 답답했다.


 타다다다당!!

 멀찍한 총성과 함께 또 한 번 탄환이 쏟아진다. 레프리콘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총탄이 남은 벽마저 깨부술 기세로 두들겨댔다.


 레프리콘의 시선이 지휘관을 향한다. 버려진 소파에 기대어 앉은 그는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움켜쥐고 있는 배는 시뻘겋다. 바지까지 피에 흠뻑 젖었다.


 레프리콘은 벽을 등지고 주저앉으며 툭 내뱉었다.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아가씨는, 쿨럭, 쿨럭. 얼마나 잘 나서."


 레프리콘의 얼굴 왼쪽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왼눈은 완전히 으깨졌고 눈두덩 주위의 살은 전부 찢어졌다. 가슴에도 부서진 기관총의 파편이 박혀 조금씩 피가 나왔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날카로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서...... 여기 맞죠?"


 그녀가 묻는다. 지휘관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살폈다. 철충이 총알을 퍼부어대는 탓에 천장이 흔들리며 먼지를 쏟았다. 그 아래로 주인 없이 방치된 테이블과 의자들, 책과 이불이 보였다.

 무너진 벽에 얼룩처럼 남아있는 벽지와 커튼이 보였다.

 전원이 끊긴 냉장고와 깨진 TV가 보였다.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그대로였다.


 지휘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왔네. 쿨럭, 쿨럭."


 그는 숨이 잘 안 쉬어지는지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려 뒤척이더니, 곧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포기하지 않는다. 또 몇 번 숨을 헐떡이더니 일어나려한다. 그러나 망가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나 좀 일으켜 줘야 할 거 같아."


 지휘관의 창백한 얼굴이 또 실실 웃는다. 레프리콘은 그를 부축해 일으켜세웠다.

 그녀가 먼저 자세를 낮춰 창틀 아래를 통과했다. 그녀에게 매달린 지휘관이 덜덜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따라온다. 머리 위로 총알이 지가나는 소리가 매섭다.


 몇 걸음 더 나아가 코너를 도니 거실이 나왔다. 거실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가구들은 전부 박살났고 뚫린 벽으로는 총알이 들어오고 있다.

 그나마 현관에는 남아있던 천장마저 없다. 심지어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까지.


 "어때요?"


 레프리콘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지휘관이 그새 잠들었나 싶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에 시선이 박혀 동상처럼 굳은 것뿐이었다.

 뭘 보고 있길래 그런 것인지, 레프리콘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실에 붙은 부엌에 바이오로이드 하나가 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바이오로이드였다.

 싱크대 아래 기대어 앉은 모습이 잠든 것처럼 평온해보였다.

 그러나 싱크대에 난 총알자국은 그녀의 몸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총상에서 흘러나왔을 피가 하얀 옷을 엉망으로 물들여놓았다.

 피는 지나간 시간을 증명하려듯이 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저 얼굴만.

 얼굴만 잠에 든 듯이 평온하다.


 "소완인가요."


 레프리콘이 물었지만 지휘관은 대답이 없었다.


 쿠궁 쾅!

 날아온 총알이 벽을 하나 더 무너뜨린다. 레프리콘은 재빨리 지휘관을 내려놓고 창가에 붙었다. 총을 쏘며 다가오는 나이트칙들이 보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기관총을 들려했다. 그러나 이미 박살 나 사라진 기관총이 손에 잡힐 리 없다.


 "후우-"


 한숨을 내쉰 레프리콘이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댔다. 또 한 번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

 그녀의 지친 시선이 지휘관을 향했다.


 그는 어느새 전자식 조리대 앞까지 기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다한 것인지 조리대에 기대어 헐떡거린다. 조리대 위에는 무엇이 담겨있는지 모를 냄비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아까부터 풍겨오던 불쾌한 냄새는 냄비 안의 내용물이 부패하며 낸 악취일 것이다.


 "뭐해요."


 레프리콘이 묻자. 지휘관이 손에 들고 있던 걸 들어 보였다. 쪽지였다.


 "이런 게 있더라고. 읽고 있어."

 "칙들이 뛰어와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글자는 많은데. 쿨럭, 지금 내 눈깔이 구려서 영 읽기가 힘들다 야."

 "읽어줘요?"

 "아니. 너도 외눈박이잖아. 쿨럭, 쿨럭, 하아......... 편지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후우, 됐어. 내용은....... 가서 직접 물어보지 뭐."


 그는 곧 쪽지를 내려놓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칠대로 지친 눈동자가 소완을 향한다. 시선이 그저 애뜻하다. 지휘관이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쳐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레프리콘은 처음 알았다.


 "저희도 그렇게 봐주는 인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지휘관이 레프리콘을 보았다.

 그녀의 하나 남은 붉은 눈동자가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희도 엄청 열심히 싸워왔는데. 언젠가는 그런 인간을 만날 수 있을까요."


 늘 실실 웃어대던 지휘관도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레프리콘은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답을 해줄 자가 아무도 없어서, 그녀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조용한 레프리콘을 가만히 쳐다보던 지휘관이 문득 말했다.


 "아까 브라우니 말한 거. 그거 진짜야. 쿨럭."


 레프리콘이 고개를 든다.


 "이미 없을 확률이 높다는 것도 진짜지만. 쿨럭, 쿨럭, 어차피 복귀 안 할 거면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가서 뒤져보든가."

 "그럴 거예요."


 철컥, 철컥, 철컥,

 멀리서 쇳소리가 울렸다. 나이트칙이 폐차들을 뛰어넘는 소리였다.

 빗발치던 총성은 어느새 멎었다. 곧 나이트칙이 직접 집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레프리콘은 권총을 꺼내 탄약을 확인했다. 아직 다섯발이 남아있었다.


 "슬슬 쉬고 싶은데."


 지휘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녀가 지휘관을 본다. 평소처럼 실실 웃고 있는 지휘관이 보였다. 단지, 그는 많이 지쳐보였다.


 그가 신음하며 몸을 움직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뚱이가 소완을 향해 기어가려고 한다. 레프리콘이 재빨리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힘겹게 웃는 그의 얼굴 옆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이제 힘들다. 응?....... 이쯤이면 다 오지 않았냐. 많이 온 거, 같은데.........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예. 다 왔어요."


 레프리콘은 그를 소완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소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고 레프리콘을 봤다.

 그녀는 심란한 얼굴로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철컥, 철컥,

 나이트칙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없었지만 그는 닥달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레프리콘 1184."


 레프리콘의 눈이 커진다.


 "제 제조번호...... 알고 있었어요?"

 "덕분에 집에 왔어........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대강 지켰다고 변명할 수 있을 거 같고."


 지휘관의 어깨에 힘이 풀린다. 그는 소완의 다리 위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녀의 허벅지를 배고, 그녀의 차가운 무릎을 쓰다듬는다.


 "이제 죽을 장소도 완벽해."


 그토록 기다리던 인간이 앞에 있는데도 소완은 여전히 곱게 잠든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레프리콘은 서글픈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미안해요.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네요."

 "일어났잖아."

 "이게 뭐가 기적이에요."

 "이게 전부 기적이지."


 지휘관은 짓눌리듯이 눈을 감았다. 억지로 웃어오던 입이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고마워 아가씨."


 그 말에

 레프리콘의 눈 아래로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 했다.


 "왜 이제서야......"

 "이제 나 자도 되지?"

 "왜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해요......."


 그가 애원하듯이 중얼거렸다.


 "이제 나 자도 되지?"


 이미 그는 레프리콘의 목소리를 듣지 못 했다. 그저 홀로 꿈길을 걸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제 나 자도...... 이제......."


 레프리콘은 숨을 삼키며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답했다.

 

 "예. 지휘관님. 이제 자도 돼요. 푹 주무세요."


 그는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나 왔어..... 배고프다......"


 그제야 지친 얼굴이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온기가 소완의 차가운 무릎을 보듬었다.


 "진짜 맛있다 야."


 그 말을 끝으로 지휘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컥, 철컥, 철컥,

 집밖에서 들려오는 나이트칙의 발소리.


 레프리콘은 권총을 들어 지휘관의 머리를 겨눴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이트칙의 발소리도, 자기를 겨눈 총구도, 아무것도.


 잠든 인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테지만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철컥, 철컥,

 나이트칙의 기척이 현관까지 들어온다.


 "지휘관님....."


 레프리콘은 대답할 리 없는 인간을 향해 물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뭐가 기적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변하고.......... 결국 이렇게 끝났는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뭐가 기적이에요........"


 그 순간

 레프리콘은 방아쇠를 놓았다.

 눈물 젖은 눈이 커진다. 입이 벌어졌다.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소완이 눈을 떴다.


 여전히 꿈을 꾸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배고 있는 인간을 내려봤다.

 그러더니 뻣뻣하게 굳은 팔을 조리대의 냄비로 뻗었다.

 닿지 않는다.

 망가진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팔이 힘없이 싱크대의 선반을 긁어댔다.


 그걸 보는 레프리콘의 눈에 눈물이 몇 방울 더 흘러내린다.


 "일어나세요 지휘관님."


 레프리콘이 지휘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시라고요.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좀."


 레프리콘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눈을 뜨지 않았다.


 "왜 안 일어나세요. 이렇게 꾸역꾸역 와놓고 왜 안 일어나. 왜. 왜."


 간절한 목소리에도 대답은 없었다.


 문득 소완이 레프리콘의 손을 잡는다. 레프리콘은 고개를 들어 소완을 보았다.


 소완은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프리콘은 우는 얼굴로 멍하니 그 미소를 쳐다보았다.

 손에 힘이 풀린다.

 그녀는 결국 지휘관의 어깨를 놓았다.


 소완이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머리를 본다.

 쓰다듬는다.


 가까스로 입을 조금 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계속

 소완은 지휘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로 다 됐다는 듯이

 이걸로 다 됐다는 듯이 그렇게

 그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철컥, 철컥,

 나이트칙의 기척이 코앞까지 가까워진다.


 레프리콘은 떨리는 숨을 삼켰다.


 권총을 든다.


 지휘관과 소완을 보는 붉은 눈동자에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탕.


 탕.


 두 번의 총소리가 울렸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나이트칙이 거실을 본다.

 그러더니 곧 몸을 돌려 무너진 벽으로 빠져나갔다.


 철컥, 철컥

 차분한 쇳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잿빛구름이 개고 햇볕이 내리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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