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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일로 니가 피시방을 다 오자 그러냐?"

 

"나도 이제 고등학생이다. 피시방정도도 못 가게?"

 

"나 돈 못 빌려주는데."

 

"아 돈 있다고. 무슨 거지로 아나 진짜."

 

"미안미안 ㅋㅋ"

 

미호랑 헤어지고 성규랑 피시방을 왔다.

 

한 방에 컴퓨터가 이렇게나 많은 걸 보면 피시방 사장님들은 틀림없이 엄청 부자일 거다.

 

나는 내심 압도된 상태로 컴퓨터를 켰다.

 

 

 

 

 

막판은 이기고 가겠다는 고집을 부리다 보니 어느 새 밖은 발갛게 노을이 져 있었다.

 

성규랑 쓰잘데기 없는 잡담을 나누면서 집으로 향하다가 옆을 보자 성규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표정이 와 그러노?”

 

"아니, 그... 니 말이야, 미호한테 아직도 그러고 있나?"

 

"뭐가."

 

"아 미호 얘기 꺼내니까 칼같이 까칠해지네… 미호 표정 안 좋더라 야."

 

"뭐…. 아직 고등학교 온 거 적응 안 되서 그러는 거겠지 그냥."

 

"야, 니 요새 대체 왜 이러는데, 진짜로. 나한테 만이라도 말 좀 해 주던가. 이유가 뭐고? 어?"

 

"아 됐다 좀.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하는데? 니 혹시 미호 좋아하나?"

 

"아니… 나 좋아하는 애 따로 있는데."

 

"뭐? 누군데?"

 

"민핀토."

 

"뭐? 진짜 민핀토?"

 

"그래.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제법 놀랐다. 성규가 좋아하는 게 핀토라서가 아니다. 핀토는 인기가 많다.

 

내가 놀란 건 핀토가 미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릴 수 있다.

 

초등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서,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옆자리를 보자 심약해 보이는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말을 걸자 목덜미에 눈이라도 넣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왜인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웃어버렸다.

 

그러자 화가 났는지 째려본다.

 

나는 순순히 사과하고 재차 말을 걸었다.

 

"아… 화낫어? 미안해. 비웃은 거 아냐.

 

너무 놀라길래… 난 이철남이야. 너는?"

 

"김미호…"

 

"김미호… 미호아 미안하다. 화 풀자. 짝지잖아."

 

"…."

 

내가 먼저 사과했는데 넙죽 받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니 콩! 하는 소리가 났다.

 

"아! 씨…. 왜 때리는데!"

 

"왜때뤼눈뒈~~ㅋㅋㅋㅋ"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눈물이 핑 돌아서는 째려본다.

 

눈빛이 매섭다 못해 살벌하다.

 

그래도 방금 전까지의 풀이 죽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렇게 초등학생이 되어 미호를 처음으로 만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래서 쌤 집에 갔었는데 희한한 거 진짜 많더라"


"쌤 맨날 외할아버지 2차대전 얘기 하던거 진짜였어 그럼?"


"진짜라니까? 쌤 할부지가 전쟁 나가서 신기한 거 많이 갖고 온 거래. 나도 이거 받아 왔는데. 이거 봐라 이거. 신기하제?"


"와... 진짜 미군 손자였어?"


"근데 왜 생긴 건 그냥 한국사람이지"


"ㅋㅋㅋㅋ"

 

아이들은 활발하다. 신이 나서는 놀고, 떠들고, 서로의 친구가 되었다.

 

그 가운데 미호는 눈에 띄었다. 미호는 항상 이상할 정도로 축 처져 있었다.

 

나는 그런 미호가 항상 신경이 쓰여서, 마치 오빠라도 된 마냥 미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챙겼다.

 

‘미호 내 숙제 좀 보여도.‘

 

‘미호 나도 색종이 좀 같이 쓰면 안 되나?’

 

‘미호 우유 먹기 싫으면 내가 먹을게"

 

‘미호 오늘 집에 같이 갈 거제?"

 

...아무튼 챙겻다.

 

미호는 무슨 이유인지 항상 풀이 죽어 있어서 아이들이 다가가지 않았지만, 내게는 웃어 줬다.

 

"이철남 웃겨 ㅋㅋ"

 

그건 좋았지만, 애새끼답지 않게 삐뚤어진 내게는 내가 사라지기만 하면 쥐 죽은 마냥 조용해지는 미호가 신경쓰엿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 사이에는 서로 친한 그룹이 생겼고,

 

그 그룹은 남녀로 나뉘어서 섞이지 않았다.

 

나 또한 친구들이 생겼고, 대부분은 남자였다.

 

남자들끼리 놀 때에는 계집애들을 끼워주지는 않았다.

 

항상 축 처져서 조용히만 있는 미호는 당연히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겉돌게 되었다.

 

그런 미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내 옆에 두고 있자니 미호가 겉도는 것은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게다가 나는 나대로 문제였던 것이 남자애들끼리 다니며 놀지를 않고 항상 미호만 챙기다가 보니 나도 미호와 똑같은 꼴이 났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나더러 거지라느니 못 사는 티가 난다느니 하던 놈들이 있어서 귀찮았는데 한번 겉돌게 되고 나자 영 짜증나게 구는 놈들이 많아졌다.

 

어느 새 우리 둘은 반에서 왕따 비슷한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거지 공주랑 거지 호위무사라나 뭐라나.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였다.

 

하지만 나는 학기 초까지만 해도 미호가 꽤나 인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미호를 괴롭히는 건, 남자놈들이야 뭐 안 봐도 뻔한 이유일 거고, 여자애들은 미호에게 시기하는 것이 뻔했다.

 

그야 이쁘장한 여자애들이라면 으레 겪는 일이겠지만, 

본인부터가 저렇게 무기력하니 아이들에게는 만만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전적으로 미호의 태도가 문제였다. 

미호에게 나 이외의 친구가 생기고 좀 더 활발한 성격이 된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는 경우라고 봐도 좋겠지.

 

나야 뭐 처음부터 이랬지만 미호는 옷도 멀쩡하게 입고 다니고, 본인만 잘 한다면 멀쩡하게 학교를 잘 다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발이 넓은 여자애랑 미호를 붙여두고 싶었다.

 

다른 녀석들이 내가 없더라도 미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 당시에는 없던 말이지만, 초등학생 때 부터도 이미 어느 정도 인싸와 아싸가 나뉘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선천적인 기질이 좌우하는 게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 반에는 그야말로 인싸의 대명사라고 해도 좋을 만한, 발도 넓고 사람 좋은 녀석이 하나 있었다.

 

그게 민핀토였다.

 

나는 핀토에게 찾아가서 결투를 신청했다.

 

"내가 이기면 너 미호 친구인거다!"

 

그리고 나는 패배했다. 참패였다.

 

내 인중의 양쪽으로 붉은 코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내 나이 8세에 최고의 위기였다.

 

핀토의 수려한 원투펀치를 파훼할 의지를 잃은 채, 나는 양 손을 올리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올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아서 고개를 들자, 눈 앞에 손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일어나 이철남. 내가 이겼어."

 

플랜 B가 필요해졌다.

 

"내가 이겼으니까 미호는 내 친구가 아니야."

 

"...."

 

"하는 소리까지 할 정도로 내가 막돼먹진 않았어. 대신에 떡볶이 사줘."

 

플랜 B는 "벼룩의 간을 뜯어 먹히다" 의 줄임말이었다.

 

 

 

 

핀토와 미호는 무척이나 죽이 잘 맞았던지, 무슨 자석같이 들러붙어 다녔다.

 

미호가 대체 왜 그렇게나 소심했었던 걸까 의아할 정도로 밝아지고 나자, 미호 또한 핀토처럼 친구들이 많아졌다.

 

미호의 일이 해결됐다고 해서 나도 마냥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될 수 있으면 미호를 멀리하려고 했었지만,

 

미호는 핀토를 따라다니는 만큼이나 나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일이 내 뜻대로는 잘 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미호랑 있는 시간은 약간만 줄은 정도였다.

 

특히 등하교를 할 때에는 마침 동네도 같았던지라 미호와 항상 함께 다녔다.

 

나는 미호와 함께하는 등교가 좋았다. 내심 초라한 우리 동네가 컴플렉스였던 나로서는,

미호는 초라한 우리 집을 신경쓰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러닝메이트였다.



미호는 항상 일찍 일어나서 우리 집 앞으로 나와 있었다.

 

내가 나오면 미호는 크게 웃어주고는, 둘이 나란히 서서 학교로 향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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