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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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년 3월 29일


이어서 쓰겠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다락문을 열었을 때 펼쳐진 풍경은 며칠 전과는 달랐다.

일주일 전의 모습은 살풍경이라 할 만했지만 지금은 멀쩡히 서 있는 빌딩을 찾기가 더 힘들었고 곳곳에서는 불길이 솟아 있었다.

도로는 부서진 채 망가져 있었고 하늘에서는 잿가루가 흩날리고 있는 풍경, 지옥도라 할만하다.


하늘을 뒤덮은 잿가루에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뒤집어쓰곤 PDA의 GPS로 방향을 잡는다.

친절하게 도로를 따라가라고 알려주지만 남은 건 콘크리트 조각뿐, 예전에는 길이었던 것을 천천히 걸어간다.

부서진 도로 파편들과 방독면 때문에 걷기가 힘들지만 다행인 것은 어제의 공습 덕분인지 주변에 철충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가지고 있는 쇠지레로는 반항은커녕 바로 바람 구멍행이기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나마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엄폐물이 되어준 덕분에 꽤나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런 문제 없이 걷다 보니 기지국이 위치한 산에 가까워지자 마음이 풀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GPS를 따라 골목을 돌았고.


그곳에는 펍 헤드 개체가 있었다.

하지만 평소 모습과는 다른.

다리는 한 짝이 없고 푸른색이었던 몸과 HUD는 붉은빛이 도는 검은 색이 되어있었다.

감염된 펍 헤드, 철충이였다.


처음 본 철충의 징그럽다와 괴기스럽다를 넘은 형용할 수 없는 모습에 나는 그만 몸이 얼어 붙어 버렸다.

감염된 부위는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펍헤드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해댔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알아선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펍 헤드가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겠지.

이성과 본성이 동시에 도망치라 말하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리곤 펍 헤드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눈앞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 방 한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죽인 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보지도 못한 펍 헤드가 쫓아올 리가 없고 오히려 도망치는 소리에 쫓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겁에 질려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 10분가량은 숨어있었던 거 같다.

주변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 공포로 흥분했던 머리가 점점 차분해지자 나의 행동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다가가 쇠지레로 후려쳤으면 해치울 수 있었지 않을까 라는 근거 없는 용기까지 솟아나자 나 자신이 또다시 우스워졌다.

방독면을 벗고 한바탕 숨죽여 웃고 나니 한동안 안 아프던 머리가 다시 아프다.

레프리콘한테 맞고 나서 이틀 정도는 괜찮더니 다시 아픈 걸 보니 돌아가면 레프리콘에게 부탁이나 할까.

머리를 잡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우회로를 검색한다.

예상치 못한 철충의 등장에 시간이 꽤나 지체됐고 빨리 밤이 되기 전에 벙커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기지국까지는 몇백 미터 남지 않은 상태였고 다행히 가는 동안 또 다른 철충은 만나지 않았다.

도착한 기지국은 폭격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1/4이 날아간 상태였고 컴컴한 입구와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골, 스파크가 튀고 있는 전선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졌다.

가방에서 손전등을 꺼내 들곤 심호흡을 한다.

저 안에 만약 철충이 있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 벙커에서의 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분명 미쳐버리겠지.

왼손의 손전등과 오른손의 쇠지레를 꽉 쥐곤 어둠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다.


여기가 폐병동인지 불 꺼진 기지국인지 모를 섬뜩한 분위기가 감돈다.

들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와 스파크가 튀는 소리뿐.

철충은 없다 철충은 없다고 자기암시를 하며 희미한 손전등의 빛에 의존해서 한 걸음씩 걸어간다.

왼쪽 벽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기지국 전체를 다 돌 수 있을 것이다.


벽을 짚으며 가다 처음 만난 방은 휴게실인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열려있는 냉장고, 안에 음식은 없었지만 캔 맥주를 여러 개 얻을 수 있었다.

조금 미지근했지만 베이크드빈이 아닌 게 어딘가.

누가 냉장고에 맥주만 넣어 놓는지 불평하다 땅에도 캔 맥주가 굴러다니기에 몇 개를 주워 가방에 넣던 중


붉은 웅덩이를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손전등으로 방안을 넓게 비워보면 들어온 입구의 벽면에는 자상이 가득히 나 있었고 핏자국은 웅덩이에서 다른 문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소름이 돋았지만 이내 정신을 붙잡았다. 만약 철충이 남아있었더라면 이미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겠지.


천천히 다가가 살펴본 문에는 숙직실이라 적혀있는 팻말이 붙어있었고 칼자국이 가득했다.

안에는 뭐가 있을지 모른다, 잠시 망설인 나는 이내 마음을 먹곤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이 방이라는 걸 직감한 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문을 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쇠지레를 문틈에 끼워 넣곤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려 노력했고 6~7분의 사투 끝에 땀범벅이 된 채 겨우 열 수 있었다. 

문을 열기 전 귀를 기울였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황.

오른손의 쇠지레를 움켜쥐곤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연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점등을 제외하곤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시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느낄 수 없던 나는 방안을 손전등으로 비추어본다.

핏자국은 입구에서 반대쪽 벽의 웅덩이까지 쭉 이어져 있었고 웅덩이 위에는 보라색 머리를 한 소녀가 벽에 기대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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