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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하늘빛의 장막 사이 새하얀 얼굴이였다. 올빼미의 눈 같은 노랗고 날카로운 눈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 흐레레짱?!"

"쉿! 밖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조용히 하세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 그... 흐레레짱..."

"흐레레짱? ...뭔가요. 그 이상한 호칭은. 아니, 그보다...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에 누워있었지요?"


흐레스벨그는 눈을 날카롭게 뜬 채 겁먹은 듯 벽에 몸을 붙인 남자에게 물었다. 그녀로써는 당황스럽고 의심스러울만도 하다. 따라붙은 몇 기의 스카우트와 건물 사이에서 공중전을 벌이는 중이였을 터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왠 남자가 옆에서 제 손을 잡고 자고 있었으니. 마땅한 무기도 없는 그녀는 간신히 스카우트를 전부 쓰러뜨렸지만, 싸움이 끝나자마자 격추 직전 스카우트가 날린 미사일에 격추되어 남자가 사는 집으로 떨어진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흐레스벨그는 그저 싸우다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보는 방에 낯선 남자와 있었고, 남자는 갑작스레 제 방으로 떨어진 '흐레레짱'을 급히 도와주려 한 것 뿐이였으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남자는 안절부절 못 하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마주치지 못 하고 있었고, 흐레스벨그는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고민하느라 더 추궁하지도 않고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다행이라 할 것은 이 침묵을 깨뜨릴 총성은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뿐일까. 바깥의 철충들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시체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남자였다.


"저, 흐레레짱..."

"흐레레짱이 대체 뭡니까?"


...간신히 낸 그의 용기를 깨트린 건 흐레스벨그였다.


두 남녀가 잠들었을 때처럼의 침묵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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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격추당해서 당신의 집에 떨어진 것이군요."

"네, 네. 흐레레... 아니. 흐, 흐레스벨그 씨가 갑자기 제 집 창문을 뚫고 들어오셔서... 기절하셨던 건지 깨어나시지도 않으셨고... 그래서 일단 이렇게..."


남자는 우물쭈물 손을 들었다가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흐레스벨그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가리키려는 것이였지만, 이야기하며 눈조차 마주치지 못 하는 그로써는 힘든 일이였다. 하지만 흐레스벨그는 대충 눈치를 채고는 제 머리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엉성하고 급하게 감아놓은 듯한 붕대. 이제는 멎은 피가 붕대 사이에 끼인 머리카락과 굳어 기분나쁜 진득함이 느껴졌다. 그렇다해도 남자를 탓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서투르다 해도, 그녀를 위해서 한 일일 테니.


"...감사합니다. 도와주셨던 건데, 제가 너무 무례하게 대했군요."

"아, 네? 아니예요! 그,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드린 것도 있고... 제대로 치료도 못 해드렸고..."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남자는 말끝을 흐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보이는 표정에는 미약한 웃음이 있는 것 같았다. '흐레레짱에게 칭찬받았다'는 기쁨일까.


"그런데, 이제 어떡할 생각이시죠? ...저는 비행장치도 고장나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합니다. 마땅한 무기도 없어서 싸우지도 못 하고요. 지금같은 상황에서 저는 방해만 될 뿐인데, 저는 여기서 나가는 게..."

"안 돼요!"


흐레스벨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갑작스런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항상 우물쭈물하던 남자가 소리쳤던 것이다. 남자는 이전의 모습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각오와, 동시에 두려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눈으로 흐레스벨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 여기에 먹을 것도 많이 있어요. 평소에 나가는 걸 싫어해서 잔뜩 쌓아놨거든요...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물도 많이 있어요! 둘이라도 제, 제가 먹는 양을 줄일게요. 운동같은 것도 그만뒀으니 하루에 한 번만 먹으면 돼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바, 밖은 위험하잖아요!"


남자는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흐레스벨그는 남자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고작 바이오로이드를, 그것도 쓸모없는 바이오로이드를 붙잡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흐레레짱'으로써의 흐레스벨그를 붙잡고 싶어서일까? 인형으로 쓰기 위해서? 아니면 성욕배출? 그녀로써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애절해 저도 모르게 다시 자리에 앉아버리게 되었다.


"......"

"...저, 그..."

"...일단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해볼까요?"


남자는 약간 촉촉해진 눈가를 닦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레스벨그는 여전히 의문을 가진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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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역시 이 세계는 멸망한 거네요."

"그렇게 단정짓기엔 아직 방어선이 있지만... ...네.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이죠. 제가 마지막으로 싸울 때도 계속해서 방어선이 뚫리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인류가 전부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생명체가 인간을 멸망시킨다니... 마법소녀 매지컬 모모 서프라이즈 퓨처같네요."

"네?"

"아, 아니예요!"


흐레스벨그는 '마법소녀 매지컬 모모'라는 말에 흠칫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로써는 자신이 아는... 아니, 자신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반응한 것이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화가 난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흠, 흠. 일단 여기서 적어도 3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레이더에 잡히는 철충도 거의 없으니 제 레이더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제한적이지만 외부활동도 가능하겠고요. ...벙커같은 건 없죠?"

"네, 죄,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상상을 못 해서..."

"아닙니다. 당연한 거지요. 아무도 이런 사태는 예상하지 못 했으니..."


대체 어느 누가 갑작스레 외계에서 날아온 금속기생충에 인류가 괴멸당할 것이라 믿겠는가. 그래, 예전이였다면 이건 광인의 헛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미래에서 온 패러독스 골타리온 13세가 현재의 골타리온 13세와 합쳐져 모모를 압도하는 상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골타리온 13세가 어나더 모모로 변신하겠지.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흐레스벨그는 말도 안 되게 방금 남자가 말한 '마법소녀 매지컬 모모'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딴 것이나 상상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정신이 나갔다고 여기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함께할지─운이 나쁘다면 몇 개월도 못 가겠지만─모르는 이 남자와 솔직한 이야기도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작품, 좋아하는 캐릭터, 좋아하는 장면, 좋아하는 굿즈, 좋아하는 완구...


"차라리 골타리온이라면 대화라도 시도해봤을 것 같은데... 아, 혹시 골타리온도 감염됐으려-"

"혹시 마법소녀 매지컬 모모 아십니까?"

"...네?"


아. 저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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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염치없게 창작물로 올렸습니다


그나저나 설정 정리해서 좀 올려야겠다 도저히 글 속에 설정을 자연스레 녹여낼 수가 없어


난 초보니까 봐줄 거지...? 이영도 선생님 진짜 존경합니다...


필력이 상승곡선을 그려야할 걸 유지되다못해 내려가고 있지만 봐주십쇼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흐레레쟝 사랑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