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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lastorigin/24568964 전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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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의 물자창고에서 쓸만한 것들을 보트로 옮겼어. 지금 머무는 부대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대서 오빠가 그럴 필요 없다는 걸 내가 고집을 부렸거든. 물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늘 말했던 건 오빠라고 하니까 별 말 않더라고. 중간에 지휘실에 다시 가서 그 키르케 한테 내가 미처 놓쳤을만한 것들이 있을까 싶어 이것저것 물어볼까 했지만 샬럿이 가지 않는게 좋을 거라고 해서 그만뒀어. 망할 년. 네가 말려서 안가는게 아니라 네 역겨운 얼굴 때문에 기분이 잡쳐서 안가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오빠를 봐서 참아야 돼.


"오빠. 아직도 담배 펴? 끊는다고 했었잖아."


물자 정리가 대충 끝나서 보트 앞에 예쁜이 타이탄을 두고 오빠를 찾아봤는데 승강기에 걸터 앉아있네. 옛날 같았으면 아무 말이나 해도 생글생글 웃어줬는데 지금은 무표정이더라도 항상 근심이 어려있는 것 같아. 미간이 늘어져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얼굴에 기운이 없어보여. 뭐, 당연한가. 사실 이렇게 모른단 식으로 말하는게 웃긴거지. 오빠는 오르카에서 쫓겨났었으니까. 아르망 언니가 오빠는 이후에도 말로 다 설명 못할 고생을 해왔다고 했으니까. 살아있을 때의 그년들이나 지금의 오빠는 계속 제 발로 나간거라고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야. 인정 못해. 오빠는 쫓겨난거야. 오빠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야. 다른 사정도 있는 것 같지만 전부 오빠를 그렇게 몰아넣었던 그년들 탓이야.


"궁금하네. 지금 담배를 구할 만한 데가 있어? 오빠가 있는 부대에 비축 돼 있나?"


"다 구할 수 있는데가 있어. 꼬맹이는 몰라도 돼."


"오빠 그러다 몸 상하면 어떡해? 이제 다른 몸 구할 수도 없잖아."


"걱정마라. 더 한게 널렸는데 담배 좀 핀다고 상하겠니?"


"그러게~ 어쩜 좋아. 우리 오빠 오래 살아야 되는데."


"…하하… 오래 살아야 하나…"


"당연하지! 나랑 같이 오래 살아야 돼. 그래야 자식새끼도 보고 그럴 거 아냐."


"에비~ 저리가. 닥터는 오빠 취향 아니야."


"알아요 알아. 발키리 언니 같은 쭉쭉빵빵이 취향이지?"


발키리 언니 소리가 나오니까 눈썹이 움찔거렸어. 그러고보니 발키리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같은 전함에 있던 건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발키리 언니는 서약자라는 이유로 엄청 고생 했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오빠… 발키리 언니는 어떻게 됐어?"


"그런 표정으로 묻지 마. 발키리가 죽은 것 같잖아. 멀쩡히 살아있어. 두고 왔다."


"다행이야…"


발키리 언니에 다른 전함인가… 참. 오빠한테 선언한게 있었지. 내가 본 것들을 말하겠다고. 그래. 마음 고생 했을 걸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알 건 알아야 해. 내가 아는 상냥한 오빠라면 분명 불안정한 상태일 거야. 냉정한 판단이 잘 안되겠지. 그러니 저런 죽여 마땅한 것들을 다시 품어주고 거느리고 있는 거겠지. 오빠, 미안. 역시 저 가증스러운 것들을 품어주는 건 이해가 안 돼. 다시 생각하게 해야 해. 오빠를 배신한 자들의 선택이 저항군의 몰락 이전에 무엇을 불러왔는지를 안다면 마냥 저들을 품어주지 않을거야. 뒤늦게라도 벌을 내려줄거야. 그러니까, 오빠는 알아야 해. 지금은 냉정해져서 쳐낼 것을 쳐내게 만드는 것이 오빠를 위하는 일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오빠의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라도 거침없이 벌레들을 때려잡게 만들거야.


"오빠. 갑자기 궁금해졌어. 오르카를 떠나고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그 전에, 오빠의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알아둬야겠지. 그래야 오빠가 어떤 상태인지 조금이라도 짐작 할 수 있겠지. 아르망 언니의 말대로라면 나를 만나기 까지의 여정은 끔찍함 일색이었겠지만, 그건 지금부터라도 다잡을 수 있어. 그 끔찍함이 계속 되더라도 오빠만은 온전하게 만들 수 있어.


"음… 닥터가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또 그런다. 오빠. 나 어린 애 아니야. 아니면 쟁여 둔 성장 약이라도 마실까? 눈에 비치는게 다르면 생각하는 것도 좀 바꿔줄 수 있겠지?"


"아냐 아냐. 됐어. 옷 한 벌이라도 더 아껴야 되잖아."


"뭐야… 왜 그 쪽을 걱정해."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으니까 담배 향이 뒤섞인 그리운 냄새가 나. 바디워시 향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오빠 고유의 살 냄새. 절로 편안해지다 못해 기분 좋게 잠들 것만 같은 그리운 향. 예전엔 이 냄새 때문에 자주 오빠 무릎에 앉아서 낮잠을 잤었는데 말이야. 그 때가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고개를 오빠 어깨에 기대고 말았어. 다정하게 한 팔로 감싸 안아주니까 조금은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승강기 밑으로 들어오는 파도가 신발 바닥을 적시고 돌아가는 걸 빤히 보고 있으니까 오빠가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했어.


"진짜? 진짜로 그 서바이벌 관련 서적으로 독학해서 살아 남았다고?"


"그래. 옛날에 다크엘븐이 탐색 중에 찾았다고 해서 받아둔게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그렇구나~ 아. 그래 오빠. 지금이니까 물어보는건데, 오빠 발키리 언니 말고도 다크엘븐 언니도 마음에 뒀었지?"


"…음. 그랬지. 둘 다 분에 넘치는 좋은 여자니까."


"뭐야… 맥 빠져~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네?"


"옛날 얘기니까. 지금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기도 하고."


"…오빠. 옛날 얘기라고 치부할 만한 게 아니잖아. 오빠 와이프에 오빠가 좋아했던… 아냐아냐.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글쎄… 잘 모르겠어."


"이럴 때 이니까 더 잘 챙겨줘야 한다고 닥터는 생각한답니다? 오빠."


이럴 때면 볼을 꼬집으려고 한단 말이지. 아직 안까먹었어. 몸이 알아서 반응해버려. 가볍게 피하니까 아쉬운 듯이 째려보는 오빠도 꽤 오랫만이야.


"그 뒤에 오르카랑 전함들이 폭발하는 소릴 듣고 LRL과 알비스를 거뒀어."


"L… LRL?"


"응. 내가 말 안했나?"


"알비스만 들었지."


"그렇구나. 그 둘이 같이 떠내려 왔었거든.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LRL… LRL인가. 생각도 못한 이름이 오빠 입에서 나올 줄은… 그 아이도 오빠가 거뒀었구나.


"LRL은 잘 있어?"


"…죽었어."


"…하…"


"닥터?"


"……"


"닥터? 왜 그래?"


"아, 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LRL은 아르망 언니 처럼 유일 기종 유일 개체야. 다른 개체가 있을 리 없어. 그 말은, 오빠가 거뒀던 LRL은 내가 아는 그 LRL이란 소리지. 그래. 결국… 죽었구나. 불쌍한 아이. 어렵게 오빠와 만나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오빠. 혹시… 그 LRL 말이야. 한 쪽 눈이 많이 상했었지?"


"어… 응. 그랬어. 안대도 없었고. 언행도 많이 얌전했었지. …알고 있었구나 닥터."


"…내 눈 앞에서 그렇게 됐거든."


"음…"


"오빠…"


"그래."


"미안해."


"또 왜."


"오빠가 오르카를 떠나고 나서도 고생한 건 내 탓이 커. 뭐가 됐든… 그런 괴물들을 만드는데 일조했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그게 닥터 잘못이야.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 닥터가 이유 없이 그럴 아이는 아니잖아."


어깨를 감싸안은 오빠의 팔에 힘이 들어가서 가슴에 안겨버리고 말았어. 노린 건 아니야.


"오빠. 하나 더 물어볼게. 왜 샬럿이나 홍련 같은 것들을 받아준거야? 나한테 있어서 그 둘은, 특히 샬럿은 죽여 마땅한 존재야. 하물며 오빠한테는… 오빠가 얼마나 괴로워 했을까를 상상하면 진정이 안 돼."


"받아준 거라기 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따라오면 따라오는 거고, 떠난다면 떠나는 거지. 있지, 닥터. 닥터한텐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도 일단 인간이잖아. 그것도 굉장히 무른 인간. 당연히 미운 녀석들은 미워. 전부 다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야. 직접 손댄 적도 있어. 고백 하나 할까? 닥터의 오빠는 잠깐 미쳤던 적이 있어서 제 손으로 코헤이의 수녀들과 천사들을 죽여버린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나한테 있어서 코헤이 녀석들이 저지른 짓은 견딜 수가 없는 짓이었거든. 그 녀석들은 나를 위해서 마리를 죽였다고 말했지만, 글쎄. 마리가 죄 많은 녀석인 건 맞지만…"


"…오빠. 울지 마. 무리 안해도 돼."


"……닥터. 나는 처음에 오르카를 떠날 때 너희와 관련 된 것은 모두 머릿 속에서 지우자고 마음 먹었었어. 근데… 그게 안되더라. 애써 그럴려고 하면 그냥 나잇값 못하는 유치한 어른 처럼 행동해버려. 하하… 발키리 녀석이 고생많았지. 있잖아, 닥터. 처음에 나는 마주치는 오르카 녀석들을 다 쫓아내버릴까 싶기도 했고 마음이 약해졌던 탓인지 용서할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나중에는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면 직접 발로 뛰는 것 쯤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아. 근데… 이젠 모르겠어. 슬픈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아니면 느껴보지 못한 다른 무언가 인건지… 정말…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닥터.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오르카를 떠난 이후에…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


"미안해 닥터. 말이 많았지. 이제 슬슬 정리가 끝난 것 같으니까 돌아가자."


일정하게 치던 파도가 갑자기 강해져서 물보라가 휘날리고… 얼굴에 튄 바닷물을 슥슥 닦아낸 오빠가 자리를 일어서려는 걸, 나는 막았어. 막을 수 밖에 없었어. 아직 오빠가 지나온 얘기들을 듣지도 못했고 내가 겪었던 얘기는 오빠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해주려 했지만… 눈물을 감추는 오빠를 보니까 더는 기다릴 수 없었어. 오빠는 눈물을 흘려야 될 사람이 아니야. 눈물을 흘려야 할 건 저 나쁜 년들이야. 


"오빠… 내 얘기를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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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정하고 들어."


함교의 통신 패널에 떠오른 콘스탄챠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어떤 전함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언니는 한 번 뜸을 들이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오르카의 격납고에 있던 AGS들이 수장 됐어."


"…"


"…닥터."


"하나도 빠짐 없이?"


"그것 까지는… 모르겠어. 나도 전해 들은 거니까."


내 예쁜이들이 수장 됐다고. 아하하… 그렇게 허망하게… 의식도 없는 채로 가버렸다고.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콘스탄챠 언니에게 정보를 전해준 이가 누가 됐든, 잘못 본 걸 거야. 아니면 고의적으로 날조 된 정보를 퍼뜨린거겠지. 그래. 우리야 어쨌든 AGS들의 저항이 없었을 리가 없어. AGS의 명령권자는 오빠야. 그 미친놈이 아무리 교활하더라도 그렇게 손쉽게 내 예쁜이들에게 손 댈 수 있을 리 없어.


"…"


"닥터. 괜찮니?"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완강히 부정하는 동시에 그 놈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도 더 똑똑한 그 미친놈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납득해버리는 내가 있다. 그런 내가 증오스러워 말 없이 교신을 종료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뭍고는 아무도 없는 함교에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그렇게 한동안,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칠칠치 못하게 콧물까지 흘려버려 코를 소매로 닦고 있으니 함교의 문이 열렸다. 함교에 나타난 그녀의 얼굴은 미약하게나마 함교를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통신 패널의 푸르스름한 빛에 물들어 파랗게 떠올라 있었다.


"…닥터? 울었니…?"


"…뭐야? 전함은 알아서 움직이니까 올 일 없잖아. 함교는 내가 쓰겠다고 말 했을텐데?"


"닥터… 미안해. 네가 알아야 하는 사항이 있어."


"AGS들이 수장 됐다고!? 알아! 아니! 그게 왜 내가 알아야 하는 사항인데? 뭐, 내 가슴팍에 직접 대못이라도 박으러 친히 납신건가!? 레오나 대장님!?"


"…"


"그따위 표정 짓지 마. 착잡 해? 후회 돼? 귓등으로도 안듣더니… 난… 경고했어. 경고했다고."


"쿠데타를 일으킬 거야. 닥터, 네 도움이 필요 해."


"이제 와서? 그 미친놈을 상대로? 함대의 권한이 다 넘어갔는데 뭘 어떻게 이기겠다고? 알잖아? 우린 이 전함에 대피한게 아니야. 여긴 감옥이야. 갖힌거지. 그러니까 그 놈이 가만히 내버려 둔거지."


"닥터… 이제 와서가 아냐. 지금이라도 싸우겠다는 거야. …무적의 용이 죽었어."


"그래? 무적이라는 이름이 아깝네. 2주 가까이 연락이 안된다 싶어서 짐작은 했어. 보나마나 암살이라도 당했겠지. 내가 그 놈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걸? 멍청하긴."


"…맞아. 누가 저지른 건지 명확하진 않아서 그 자는 능청스럽게 발뺌하고 있지만… 흔적도 그렇고 정황도 그렇고, 암살 이외엔 다른 가능성이 없어."


연회 이후 한 달. 무적의 용이 현 사령관에게 모든 권한을 넘겼을 때부터… 아니, 오빠가 떠났을 때 부터 우리의 패배와 말로는 정해졌다. 그 때, 무적의 용이 사령관에게 거부 할 수 있을 거라곤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타협 할 수 있는 수단이나 카드는 일절 없었고 거부한다면 얻는 것은 없이, 그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을 것이다. 권한을 넘겨주고 뒤늦게 나마 본인의 능력을 이용해 레오나의 말대로 쿠데타라도 일으킬 생각이었겠지만 사령관은 타이밍 좋게 머리를 쳤다. 


그 뿐이다.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 아무리 말로 다 표현 못할 것들을 목도했다고 해서 어떻게 지휘관으로서의 총기를 단 한 줌도 남김없이 잃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이런 존재였을 줄 몰랐다는 변명은 이해한다. 그는 나무 위에 똬리를 틀고 우리 라는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교활한 구렁이 였으니까. 그가 비춰주던 미래를 향한 빛은 쩍벌어진 뱀의 아가리 속 서슬퍼런 송곳니에 맺혔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건 그 아르망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몰랐다는 변명은 납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빠를 떠나게 둔 것에 대한 변명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휘관들은 말했다. 그저, 무언가에 씌였던 것 같다고. 나는 일축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오빠가 떠난다는 소문이 지휘관들에게 돌자 그에 대한 처분을 두고 왈가왈부 할 때 참모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들었던 건 지휘관들이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칸 언니를 제외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지상으로 나선 오빠가 이미 죽었을거라고 판단 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다. 뭍 보다는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던 인간이 육지에서 적응할 수 있을리 없는 데다가 인간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철충이 바글바글한 것은 덤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겨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왜 진즉에 그러지들 못하셨을까. 거기에 무엇보다도, 본인들이 오빠가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좀 더 깊이 자각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었지만 현사령관의 본 모습을 뒤늦게 알고서 허둥 대는 꼬라지들이 우스웠기에 직접 말로 빈정대는 것은 가능하면 삼가기로 했다.   


본모습을 드러낸 그 자에게 있어서 우리는 이끌어야 할 존재가 아닌 하루 정도 쓰다 버리는 장난감 정도의 존재였다. 그 이하는 있었어도 그 이상은 없었다. 철충이니 뭐니 하는 것엔 일절 관심이 없었으니 인류재건에 대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능력 좋네. 무적의 용은 지휘함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호위함을 뚫고 침투하는 건 고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사성장군 님 목을 어떻게 땄을까?"


"닥터! …네가 화난 건 알겠는데 말은 가려.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힘을 합쳐야 해!"


소리칠 때 조차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레오나가 대단했다. 정말 대단할 정도로 역겨웠다. 


"부탁이에요. 레오나 대장님. 내 눈 앞에서 꺼져 줘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난 경고했다고."


"…닥터, 제발. 부탁이야. 네 힘이 필요해."


"나보다는 아르망 언니한테 가보는게 어때? 어느 함선에 있는지만 안다면 말이야."


"…힘을 쓸 수가 없대."


"그야 그러겠지."


"닥터! 이대로면 정말 최악으로 치닫을 거야. 그것만은 막아야 해! 부탁이야. 만에 하나 쿠데타가 실패한다면 육지로라도 도망칠거야. 어떤 식으로든 그와 최대한 멀어져야 해."


"이미 최악이거든? 그건 그렇고 하나만 물어볼게."


통신 패널을 밀어젖히자 함교의 천장이 보다 파랗게 물들었다. 일어서서 레오나에게 다가가 팔을 쭉 뻗어 멱살을 잡아 당기니 넘어질 뻔한 레오나가 상체를 숙인 상태로 겨우 몸을 가누었다. 나는 그 위태로운 면상에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만약에, 오빠가 살아있다고 치고."


"닥터. …이거 놔."


"만나게 된다면, 레오나… 너는 어떻게 할 거야?"


"…"


드물게 표정을 구긴 레오나가 시선을 피한다. 그냥 곤란한건지, 아니면 오빠에게 염치가 있어서 인지는 모른다.


"대답 안 해?"


"내 권총을 건넬거야."


"뭐, 설마 죽여달라 말하기라도 하게?"


"…맞아."


레오나의 멱살을 잡아 당기고 있던 손이 붕 떠올랐다. 남 일 처럼 말하는 것은 내 자각이 옅어진 탓이다. 내 보잘 것 없는 완력으로 손바닥을 휘둘러 따귀를 후려봤자 아플 리야 없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는 이 여자의 오만함, 자존심, 그 외 무어라고 불러도 좋을 하찮은 것들을 전부 날려버리고 밑바닥에 쳐박히는 기분을 맛보여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본인보다 정신적으로 한참 어린 것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이 레오나를 그리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따귀 정도야 백번이든 천번이든 얼마든지 날려 줄 수 있었다.


짜악-


"…"


짝- 짝- 짜악-


은은한 푸른 빛을 머금은 어둠 속에서 내가 생각해도 처절하고 앳된 기합과 살을 울리는 소리가 함교에 퍼져나갔다. 후련함이나 상쾌함 같은 만족감은 전혀 없었으나 딱히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힘이 닿는대로 때리고 또 때려 어떻게서든 레오나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맞았으면 끙끙댈만 한데도 레오나는 그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특유의 눈매가 나를 낮잡아 보는 듯 하여 나는 다급히 소매를 걷고 주먹을 쥐어 있는 힘껏 후려치는 것으로 선회했다. 울어. 울으란 말야. 그만해달라고 애원 해. 재수없는 년. 가증스러운 년. 어떻게 오빠에게 그렇게 지독하게 굴 수가 있어? 오빠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제 발로 오르카를 나갔겠냐고. 역겨운 년. 오르카에서 쫓겨나야 했을 것들은 너희야.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은 채 발가 벗겨 쫓아내도 성치 않을 년들.


"네 더러운 피로 오빠 손을 더럽히게 만들겠다고? 오빠가 역겨워 할 건 생각 안 해? 주제를 알아. 괴로우면 어디 따로 쳐박혀서 자살이나 해. 뒷처리 하게 만들지 말고."


벌겋게 부어오른 양 뺨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본다. 눈매가 조금 풀려 보였지만 고통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라고 꼿꼿히 선 자세가 내게 알려왔다.


"뭐야. 불만 있어? 새파랗게 어린 애 한테 따귀를 난타 당하니까 성질 나? 그럼 뭐, 한 번 해볼래?"


레오나라는 개체가 가지는 개인의 무력은 보잘 것 없다. 내 타이탄이라면 레오나가 한 트럭이 몰려오더라도 전부 뭉개줄 수 있다. 내세울 수 있는 건 그 잘난 지휘능력 뿐이지. 지금이야 우습게도 그 지휘능력은 빛을 볼 일도 없고 되려 본인을 더 비참하게 만들 요소일 뿐이다. 레오나에게 염치가 있다면 그리 느낄 것이다.


"닥터. 우린 살아있어. 살 사람은 살아야 돼."


"씨발년아!!!!"


할 말을 가리라고 한 것은 레오나다. 오빠가 있을 때라면 입에 담지도 않았을 저급한 말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더러운 것들 덕이다. 그리고 뭐, 사람? 그런 표현은 용납 못 해. 우린 바이오로이드야.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야. 그 사람이라는 건 오빠 뿐이라고.


"너 지금 나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내 성질 돋구려고 작정한 거냐고!"


다시 멱살을 움켜 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내 손을 가볍게 흘린 레오나가 짧은 한숨을 쉬고서 뒤집힌 패널 탓에 새파랗게 물든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되돌아가고 싶어도… 되돌릴 수는… 없는 거잖아."


"흐흐… 으흐흐… 어떻게든 냉정한 척 하려는게 진짜 꼴같잖네. 너 진짜 미쳤구나. 혹시 그 미친놈이 오기 전부터 오빠가 미웠어? 아 설마… 오빠가 너하고는 동침을 안해줘서 마음에 안들었던거야? 그렇다면 말해두겠는데, 오빠는 너무 착해서 그랬을 뿐이야. 다짜고짜 찾아갔던 네가 이상한거지."


"닥터! 그런 게 아니야!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거니!?"


"웃기지 마! 그 때 오빠가 곤란해 했던 건 너도 알잖아! 오빠랑 너 어색해졌던 걸 아무도 몰랐을 것 같아? 나한테 들을 소리겠냐만 아무리 오빠가 여자들한테 둘러 쌓여 있던 특수한 상황이었다해도 감정이란게 있는 거야. 너라면 서슴없이 동침 할 수 있었겠어? 아니, 아니지. 어쩌면 말이야. 오빠도 네가 싫었던 걸지도 몰라. 오빠는 서약하기 전엔 절륜하단 소문이 돌았으니까. 그런 오빠가 너와의 동침을 피했다?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만 해."


"그만 해? 먼저 찾아 온 건 너야. 게다가 전부 사실이잖아? 설마 듣고싶은 말만 들으려는 건 아니지? 편식하는 꼬라지가 애새끼가 따로없어."                 


"그만 해!"


속이 좀 시원해졌을 참에 주제도 모르고 폭발한 레오나가 덤벼들려는 참이었다. 함교의 문이 열리고 기척도 없이 들어온 자가 레오나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끌었다.


"둘, 지금 뭐하는 거야."


"무슨 일이야? 사디 언니."


나뒹구는 레오나를 내려다 보던 사디어스 언니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단발로 유지해오던 머리는 오랫동안 관리를 안한 탓에 등 언저리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결은 어두운 함교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푸석하고 갈라져 있었다.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면서 언니가 말했다.


"알면서 묻지 마라 닥터. 이런 때에 둘이 처박혀서 한딱가리 하려는 걸 누가 좋게 보겠나. 따라와라."


"또야?"


오르카에 있었을 때엔 그다지 접점이 없는 언니였지만 이 전함에 오고난 뒤로는 꽤나 교류하게 되었다. 물론, 하하호호 할 만한 일로 교류하게 된 것은 아니다. 사디어스 언니는 용건이 있을 때만 날 찾을 뿐이지만 그 용건이란게 날이 갈수록 꽤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일부러 찾아와 감정 없는 말투로 따라 오라는 것도 다른게 아닌 그 용건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럼 달리 뭐가 있겠어. 이 전함에서 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너와 다프네 뿐이야. 바로 따라 와."


답지 않게 가냘픈 인상으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오나에게 시선 한 번 주지않은 언니가 함교를 먼저 빠져나갔다. 나 또한 그런 사디어스 언니 처럼 레오나에게 신경을 끊고서 함교를 나섰다. 함교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허망하고 비탄에 잠긴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 마저도 그녀에겐 분에 넘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급히 언니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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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베라 언니. 이거 먹고 누워있으면 숨쉬기가 좀 편해질거야."


"윽…으읍…"


괴롭게 찡그린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킨 베라 언니가 한 팔로 힘 없이 허공을 휘저으며 나를 찾았다. 알비스는 무사하느냐고 물어오는 그 물음에 나는 거짓말 외에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나보다 아주 조금 큰 그 작은 아이는 베라 언니가 대신 희생했기에 무사히 이 전함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 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까지는 알 수 없었고 찾을 시간도 없었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지옥이다. 전함의 내무실은 물론이고 AGS들과 테티스와 같은 함재 요원들의 대기 장소인 격납고도 자리 할 곳 없이 환자들로 빽빽이 들이 차 있다. 오르카 만이 아닌 다른 전함에서 실려온 이들까지…… 부하들을 건들지 않겠다는 사령관의 약속은 거짓 아닌 거짓이었다. 그가 직접 손대지는 않았으니까. 오르카에 있었기에 직접 손대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 할 수 있는 길도 없었으니까. 


전함으로 대다수 오르카의 인원들이 탈출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자 작게는 전우조부터 크게는 중대에서 날아드는 실종 신고가 끊임 없이 이어졌다. 당연히 제대로 된 대처는 불가능했다. 그저 넓디 넓은 전함 내 어딘가에서 따로 활동 하고 있을 것이니 찾아보라는 형편없는 거짓말부터 나아가서는 침묵으로 일관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피하고서 2주 차가 되자 전함의 내부에서는 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흑색 전투복과 슈트 차림의 사신이 홀로 나도는 이들을 어딘가로 잡아간다고. 모습은 같으나 전혀 다른 이들이 우리들 사이에 숨어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후덥지근한 여름 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듯 옹기종기 모인 한 무리의 바이오로이드들로 부터 시작된 그 소문은 점점 더 뼈가 두터워지고 살이 붙여져 한 가지 사실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작전을 위해 전함으로 온 것이 아닌, 현사령관으로 부터 도망치기 위해 전함에 온 것이라고. 대피해 온 것이라고. 무서운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의 정체를 모두가 알게 되고 사신이라 불리우는 이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모습을 숨기지 않게 되자 전함에는 일장 혼란이 일었고 그 혼란은 몸을 가눌 수 없는 고통어린 신음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다. 


"언니, 다음은 어디야?"


내 물음에 사디어스 언니가 격납고의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세이프티. 베라와 마찬가지야."


"알았어."


"닥터."


언니를 지나쳐 세이프티 언니에게 다가가려 하자 내 어깨를 붙잡은 사디어스 언니가 드물게 표정을 흐리고 격납고를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좀 어떨 것 같아?"


환자들의 예상되는 차도가 어떨 것이냐고 묻는 말에 나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사디어스 언니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매번, 이렇게 나와 함께 할 때 마다 사디어스 언니는 물어온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기대어 내게 물어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럴 때 마다 말 없이 좋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숨기고, 거짓을 고하고, 괴로움에 몸을 떨고마는 것은 이제 넌더리가 난다. 솔직하게 답해주는 건 그것 나름대로 괴로울 테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포장한 되먹지 못한 것 보다는 나았다.


이번에 오르카에서 실려온 베라 언니와 세이프티 언니는 호흡기에 손상을 입었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오르카의 수복실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회복 할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이었다. 그 쓸데없이 치밀하고도 악의적인 손상에 나는 분노와 함께 두려움에 몸서리 칠 뿐이다. 목구멍을 통해서만 겨우 보이는 화상의 흔적과 괴롭게 몰아쉬는 숨소리로 알 수 있는 폐의 상태, 두 언니는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괴로움에 몸부림 치겠지.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으나 내게는 그럴 용기도 아량도 없었다. 사디어스 언니는 나와 달리 그럴 용기는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디어스 언니는 오르카에 있을 때 보다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도 줄었지만 레오나와 달리 그 위엄있는 냉정함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더라도 환자들의 회복을 그 누구보다 처절할 정도로 바랐기에 제 손으로 목숨을 끊어준다는 선택은 사디어스 언니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단 처치는 끝났어. …사디 언니, 또 다쳤구나? 팔 보여 줘. 이번에도 또 그 이상한 것들이랑 충돌한 거야?"


셔츠의 팔꿈치 부분이 붉게 물든 걸 확인한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소매를 걷어내려 했지만 언니는 별거 아니라며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됐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 개자식들.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해. 이 전함은 물론이고 대놓고 여기저기서 대원들을 잡아들이고 있어. 이번엔 어떻게든 막았지만 서펀트 녀석이 희생 됐고… 정말 말도 안 돼. 결코 낮은 높이가 아니었는데 도약 한 번으로 서펀트의 머리를 으깨버렸어. 그것도 맨손으로…"


"그게 무슨…"


"전신이 흑복인 것도 재수가 없는데 얼굴까지 가려서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말도 없고. 도발에도 넘어오지 않아."


"…"


"모자란 것들이 붙인 별명 그대로 진짜 사신이야. 그 미친놈. 도대체 언제 그런 것들을 만든거야. …이런 짓을 하는 진짜 이유는 뭐냔 말이야."


"언니, 진정해."


사디어스 언니의 입가에서 뿌드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퀭해지는 눈과 갈라져가는 입이 사디어스 언니의 위태함을 대신 말해주었다. 등에 이고 있는 스턴 캐논의 한 쪽은 파괴당해 프레임만 남아 덜렁거렸고 늘 함께 하던 경찰견은 얼마 전 부터 모습을 감췄다. 눈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사디어스 언니가 간신히 들릴 정도로만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고생한다 닥터. 오늘도 환자들 돌보느라 쉴 시간도 없었겠지. 이만 쉬도록 해. 나머지는 내가 하마."


"…알았어. 다프네 언니랑 교대할게. 사디 언니도 좀 쉬어."


손짓만으로 대답한 사디어스 언니가 터벅터벅 힘 없는 발걸음으로 격납고를 나섰다. 그런 언니를 배웅하고서 나는 다프네 언니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내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함교의 바로 밑 층, 내무실의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지나치려던 차에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격한 고성과 울먹이는 소리가 한대섞여 화장실에서 휘몰아쳤기에 나는 내무실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화장실에 고개를 들여 살펴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이러지 마!"


"네가 전 사령관 님을 욕보였던 거 기억 안 나~? 너 같은 년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 분이 떠나신 건 너도 알잖아."


집단 린치. 이 또한 익숙한 광경이다. 나를 포함한 오르카의 인원들이 서로를 향해 헐뜯고 욕보이고 뒤늦게 책임을 묻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히다니 역시 질 좋은 행위는 아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린치를 당한 다른 이들 처럼 저 한 명 또한 죽거나 자살한다면 그 다음 타겟은 저들 사이에서 나오게 된다. 서로를 합리화 해주고 정당화 하기 위해 뭉쳤으면서 말이다. 끝나지 않는다. 주먹과 총부리를 겨눠야 할 대상을 잘못 겨눈 끝에 서로를 밀어내다가 마지막 한 명 마저 죽어버릴 때 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비난 할 마음은 없다.  나 또한 저들과 다를 건 없으니까. 제 살 깎기, 제 얼굴에 침 뱉기니까. 그리고… 사디 언니가 안다면 경을 치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건 필요하다고 느끼니까.


울먹이며 벽까지 뒷걸음질 친 린트블룸의 정강이를 테티스가 걷어찼다.


"흑…! 잠깐만, 아파! 제발 그만 해… 왜 우리끼리 이러는 거야!?"


"아프라고 친건데? 그리고 뭐어? 우리? 네가 언제 우리였어? 여긴 '우리' 전함이거든? 너 같은게 있을 자리는 없다는 거야."


"아악! 싫어! 더러 워! 하지 마!"


"닥치고 있어 봐. 너 머리 오랫 동안 못감았잖아. 내가 씻겨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변깃물에 적신 대걸레를 린트블룸의 얼굴에 얹은 실피드가 자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구정물이 린트블룸의 얼굴을 흠뻑 적시며 이목구비 전부에 스며들었고 그 역함에 몸부림 치던 린트블룸이 바로 옆에 있던 화장실의 가장 안 쪽 칸으로 도망쳐 문을 닫았다.


"문 열어 이 벌레년아~ 아주 걸렛물로 샤워를 시켜버리기 전에. 아니면 널 걸레짝으로 만들어줄까?"


그게 좋겠다며 깔깔 웃는 테티스의 뒤에서 토모와 바바리아나가 앞으로 나와 문 앞에 섰다.


"야. 우리가 들어가면 너 죽어. 싸게싸게 문 열어라?"


"됐어. 그냥 부숴. 씹걸레 같은 년 ㅋㅋ 닌 뒤졌다 진짜."


바바리아나의 발길질 한 번에 손쉽게 나가 떨어진 문은 화장실에 들어와 있던 내 발치까지 날아와 미끄러졌다. 린트블룸을 린치하던 이들은 뒤늦게 나를 발견했지만 잠깐 시선이 머물렀을 뿐,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린트블룸을 끌어내어 더욱 가혹한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다.    

   

"자~ 입 벌리시고~ 한 입 크게 물어라? 구정물 다 빠질 때 까지 쪽쪽 빠는거야. 알았지?"


"으웁… 그우욱…"


"끝까지 문 안열어? 너 내가 뒤진다고 했지? 가만히 있어 썅년아."


"그에에엑! 케헥! 케헤엑!"


"아오 씨발 더러워. 정성들여 우려냈는데 다 토하기나 하고, 나 마음 상했어."


"넌 오늘 끝을 보자. 진짜 뒤질 때 까지 안놔준다. 아니, 그냥 뒤져. 뒤지면 바다에 물고기 밥으로 던져줄게."


린트블룸의 입이 바바리아나에 의해 강제로 벌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이 이상 두고 볼 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아니고 린트블룸이 이후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안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에 없던 흥도 날아가 버렸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복도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해의 위치로 보아 오후, 저녁이 되기 조금 전 시간대라고 짐작 할 수 있었다. 이 곳에 와서 피곤하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오늘은 함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유난히 더 피곤했다. 쪽잠을 자다 새벽에 깼었으니 슬슬 몸에 무리가 올 때라고 여겨져 발걸음을 빨리 했다. 나까지 앓아 누우면 그 때는 정말로 끝이다. 함께 환자들을 돌보는 다프네 언니를 생각해서라도 쉴 때는 쉬어둬야 한다. 몸이 조금 가벼워 질 때 까지는 시티 가드 언니들과 간호를 돕는 인원들에게 기댈 수 밖에…


최소한의 전등만 켜놓은 복도를 지나 내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내무실 이라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은 내 침대로 한정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은 환자들의 몫이다.  보나마나 다프네 언니는 본인의 휴식시간 까지 환자들을 돌보는데에 쓰고 있을 것이 뻔했다. 시간은 물론이고, 비품, 자신의 침대까지 모두 내어주면서.


"다프네 언니, 나 왔…어?"


내무실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그 단 하나만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내무실의 분위기와 공기, 인상을 뒤틀어놓고 있었다. 잿빛 일색의 내무실은 더욱 흐려보였고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폐를 얼어붙게 만드는 듯 했으며 출입문을 등지고 서서 내  서랍을 내려다보는 그 존재의 주위만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듯 했다.


"…누구야?"


라고 물으면서도 확신한다. 이 자다. 이 자가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존재들 중 하나다. 용을 암살한 장본인이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튼튼해 보이는 흑색 전투복에 그 위로 잘 갖춰진 전술 장비. 등을 돌리자 보이는 백골 문양이 새겨진 전술 마스크와 하르페이아 언니가 생각나는 흑색 바이저. 전신을 가린 그 기계적인 위압감과 공포가 나를 발견하고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고양잇과 맹수를 맞닥드린 초식동물 처럼 꼼짝 할 수 없게 된 나는 그 검은 존재가 다가오는 사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알을 굴려가며 내무실을 살폈다.


누구지? 얼굴이 전혀 안보여서 누구인지는 커녕 인상 조차 알 수 없어. 다프네 언니는 어디갔지? 환자들은 어디 간거야? 내 서랍에서 뭘 뒤적거린거지?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액자? 안 돼. 돌려 줘. 그건 오빠와 단 둘이서 찍었던 사진이야. 내 유일한 보물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것 만큼은 가져가게 둘 수 없어. 차라리 너희가 해왔던 대로 다른 녀석들을 데려 가.


"반갑군. 그 쪽이 닥터인가?"


기계적인 인상에 어울리는 변조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다행이다. 청각은 살아있다. 아마도 다른 감각도 살아 있겠지. 잠깐, 다행인건가? 감각만 살아있고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건 큰 일 아닌가? 이 녀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꼼짝 없이 죽을 거야. 감각이 살아있는 탓에 고통이 가감없이 느껴지겠지. 평소 보다 민감해서 곱절로 느껴질 거야. 안 돼. 싫어. 오빠. 살려 줘 오빠.


"아, 실례."


'예쁜 사진이로군. 특히 웃는 표정이 예뻐.' 라고 말한 검은 존재가 내 앞에 서서 액자를 건네왔지만 몸이 굳어 팔이 움직여지지 않아 액자를 받아들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려다 보더니 뭔가를 납득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손을 잡아 액자를 쥐여줬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급히 등을 돌려 내무실에서 도망치고자 했으나 또 하나의 사신이 막 내무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오~ 찾아도 없길래 어디갔나 했더니 제 발로 왔네?"


샤프한 방독면을 쓴 자는 내게 액자를 건네준 이와 같이 변조된 음성이었으나 톤이 높고 쾌활한 목소리일 것이란 건 말투에서 예상 할 수 있었다. 발랄한 몸짓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에게 등 뒤에 있는 마스크를 쓴 자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마라. 정중히 대해."


"흐응~ 얘가 진짜 오르카에서 제일 똑똑한 녀석이야? 아무리 봐도 그냥 꼬맹인데?"


방독면을 쓴 자가 어린 애를 다루는 손짓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옷매무새를 정리해준다. 그가 만든 존재들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상냥함에 놀란 나는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귀여워~ 당황했어? 무섭니? 언니한테 겁먹었구나~? 걱정 마. 말만 잘들으면 괜찮을 거야. 대신…"


말을 듣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며 앙! 하고 장난스럽게 동물 흉내를 낸 방독면이 백골 옆에 다가갔다.


"대충 처리해놨어. 이제 돌아가면 될 듯?"


"알았다. … 엽견들에게 알린다. 현 시간부로 전원 '우리'로 돌아가도록."


"자~ 꼬마 박사님? 잠자코 따라 와야 돼. 알았지?"


"…다프네 언니는 어디갔어?"


"응?"


내 시선을 따라 침대를 바라 본 방독면이 대답했다.


"아~ 그 참한 언니? 너 오기 전에 먼저 잡아갔는데?"


변조 된 쾌활한 웃음소리가 기괴함을 뽐냈다. 방독면 너머의 어렴풋이 보이는 눈매도 살짝 굽어 눈웃음을 짓는 듯 했다.


"잡, 잡아가다니? 어디로?"


"그건 따라오면 알 수 있어용~ 자, 박사님. 가자?"


매끈한 전술 장갑을 낀 손이 내 팔을, 아마도 다정하게 잡아오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믿을 수 없어. 다프네 언니는 어딨어!? 언니가 안전하단 걸 보증한다면 따라갈게. 그렇지 않다면 가지 않겠어."


"박사 님. 아까 언니가 말했지? 말 안들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언니, 악력 세다? 물어뜯어 버리기 전에 말 들어."


"겁주지 마라."


"대답 해! 다프네 언니는 어디있는지! 너희는 누구야!? 사령관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따위 짓을 계속 하는거야!"


"…겁 안먹었는데?"


"테마파크 때 처럼 그저 즐기자고 이러는 거야? 너희를 만든 것도 그냥 즐기려고 그런 거냐고!!"


"할 수 없군. 재워라."


쌓였던 것들이 봇물 처럼 터져나와 멈출 수 없게 되자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이 거칠게 눈 앞의 존재들을 쏘아붙였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이에 방독면이 사라진 걸 뒤늦게 의식했지만 때는 늦었다. 뒤에서 내 목과 입, 코를 움켜잡은 방독면의 손에는 톡 쏘면서 알코올과 비슷한 냄새를 품은 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천에 의해 질식할 정도로 압박 당해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나는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




"으음…"


눈이 뜨여짐과 동시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손으로 짚은 바닥은 딱딱한데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이런 곳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자각이 들자 전신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대며 겨우 몸을 일으켜 사방을 바라보니 내가 잠들었던 장소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함교잖아…"


익숙한 선수의 거대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해질녘의 바닷가로 미루어보아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르카는 정박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창 앞에 나를 바라보고서 일열로 서있는… 사냥 개들. 백골은 그렇게 말했지. 그 검은 사냥 개들이 단 한명도 흐트러짐 없는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자고 있던 나를 한가하게 관찰하고 있던 건 아닐테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정답이라는 듯 함교의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등장하자 열중쉬어 중인 사냥 개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로 고쳐잡았다. 그 후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홀로 경례하며 입을 열었다.


"사령관 님. 중대장을 포함한 현재 인원 8명, 17시 경에 오르카로 복귀했음을 신고합니다."


사령관이라는 단어에 퍼뜩 오한이 든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다. 그 남자다. 우리가 피하고 도망치고자 했던 그 악마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마음 속에서 백번이고 천번이고 죽였던 자가 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나쳐가면서 사냥 개들 앞에 섰다. 그 무방비함을 지금 파고든다면 죽일 수 있었겠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깐 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고 나는 바이오로이드 라는 것을. 뇌리에 새겨진 본능이 어떻게든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속삭여온다. 네가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인간이었더라도 그를 공격할 수 없었을 거라고. 칼을 들고 있었더라도 그 목을 뚫지는 못할 거라고. 천만에. 할 수 있다. 이 말로는 다 표현 못할 증오를 담는다면 수 천 수 만 번을 찌를 수 있다.


"…"


생각은 쉽지.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절대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 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저렇게 내게 등을 보인 채로 자신의 사냥 개들을 일일히 격려하고 있는 것이겠지. 태생적인 차이만이 아니다. 그는 후천적으로도 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 강함의 원천인 악의를 그는 서슴없이, 망설이지 않고 활용한다. 기록에서만 살아 숨 쉬는 멸망 전 인류도 혀를 찰 정도로. 


"역시. 볼 때 마다 생각하지만 이래야 좀 전쟁을 하는 군인들 답지. 쓸데없이 헐 벗고 다니는 건 꼴보기 싫었단 말이야. …그럼 대원들. 마지막 까지 수고들 하고 어서 쉬도록. 오늘 하루도 고생 해줘서 고마워. 이상."


"부대 차렷."


경례는 됐다면서 다정하게 웃어보인 사령관은 내게 시선 한 번 주지않고서 유유히 함교를 빠져나갔다. 경악했다. 그는 우리를 장난감 이상으로 보지 않는 잔혹한 자였지만 제 부대원에게 만큼은 따뜻하게 대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악의의 현신인 줄 알았던 그도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혀를 끊어버릴 정도로 깨물었다. 손목을 부숴버릴 정도로 팔을 쥐었다. 그가 아주 잠깐 보인 모습에서 오빠를 비쳐 본 내가 죄스러워 나를 부수고자 했다.


"근데 왜 8명이야? 파견나간 애를 빼도 10명이어야 하는 거 아냐?"


사령관에게 보고를 끝낸 사냥 개들이 저마다 흩어지는 중이었다. 나를 마취시켰던 것으로 추정되는 방독면이 백골, 중대장에게 물었다.


"리리스는 오늘 사령관 님의 시중을 든다. 그 준비 때문에 먼저 자리를 비웠지. 오랫만에 사령관 님께서 직접 부르셨다는군."


"와~ 그 미친 개를 지명하셨다고? 부러워라. 오늘 찐하게 놀아주시겠네. 나머지 한명은? 누구였더라?"


"궁금한게 많군. 베로니카는 탈영했다."


"엑!?"


"사령관 님께서 묵인 하셨으니 탈영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만."


"뭐야~ 그럼 그냥 놀러 나간거네."


"자… 잠깐! 이거 놔!"


콧소리를 흘리며 다가온 방독면이 짐짝이라도 다루는 것 처럼 나를 들쳐맸다. 등을 할퀴고 복부에 발길질을 날려대면서 버둥대도 방독면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란히 걷는 백골을 향해 재잘댈 뿐이다. 


"이 꼬맹이만 끝내면 오늘도 끝이네~ 빨리 끝내고 사령관 님 침실 훔쳐보러 가야겠다~"


"꼭 매를 벌 짓만 골라 하는 군. 버릇이야. 고쳐라."


"뭐 어때~ 항상 용서해 주시는데. 리리스랑 동침 하시는거면 오늘은 꽤 난폭하게 하시겠네."


"내려 놔!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다프네 언니는 어디에 있어!"


"새벽에 한 잔 콜? 요새 못마셔서 좀 땡기네."


"됐다. 내일도 일찍 부터 임무다. 너도 헛짓거리 하지 말고 빨리 취침 해."


"물으면 대답하는 척이라도 해!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고!"


"그러고보니 준비는 다 끝났나?"


"응. 바로 시작하면 돼. 아~ 기대 돼~ 재밌겠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해."


"무슨 소릴 하는거야? 사령관 님이 내게 일임 하셨는데 거리낄게 뭐가 있어."


내 물음엔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은 두 사냥 개가 복도를 지나 홀로그램을 조작해 어느 공간으로 들어섰다. 매달린 채 몸을 뒤흔드느라 바빴던 탓에 주변을 살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익숙한 공간이 어디인지 들어서기도 전에 알 수 있을 나였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차린 것은 방독면이 나를 공간 한 가운데에 던져놓고 이 공간과 이어진 다른 방으로 들어섰을 때 였다.


"여긴… 수복실 이잖아…"


"스카디, 수복실로 와라. 녀석의 지원 요청이다."


시계 같이 생긴 통신장비에 입을 대고 말한 백골이 바이저를 벗어 던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인물을 구별하는 데에는 눈과 코 주변이 가장 주요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바이오로이드가 어느 개체인지는 판별 할 수 없었다. 한 때엔 익숙하게 오고갔던 이 수복실은 익숙했으나 낯설었다. 있으니만 못한 어두운 조명에 병상이 있어야 할 자리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자리해 있었고 내가 있는 중앙 근처에는 덩그러니 놓여있는 수술대와 그 바로 위 천장에는 크고 작은 전등들이 여러 개. 그 어느 장소보다 피어오르는 생기가 가득했어야 할 수복실은 필요 최소한의 손길만 느껴졌을 뿐 도무지 생명을 다루는 공간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짜고짜 수복실에 데려와서 뭘 하려는 거야…"


"기다리고 있으면 알게 된다. 걱정 마라. 네게 해를 끼치진 않을테니."


음성은 변조되지 않았으나 한껏 내리깐 목소리는 마스크에 억눌려 위압감이 느껴졌다. 백골은 시선을 돌리는 일 없이 계속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바이저로 계속 눈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그 안 쪽에 한 번 더 흑색 위장 페인트로 정체를 가려놓은 그 철저함이 이 존재의 성향을 짐작케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단 한 가지, 위안 아닌 위안인 것이 있었다면 빈틈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백골의 그 철저함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에 신뢰를 불어넣어 준다는 점이었다.


"대장. 지원 하러 왔다."


수복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들어온 흑색 전투복 차림의 스카디… 내가 아는 스카디 언니와는 전혀 다른 그 존재가 백골에게 다가갔다.


"그래. 거들어 줘라. 지금 쯤 혼자서 낑낑대고 있을거다."


고개를 끄덕인 스카디가 방독면이 들어간 장소로 들어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데에 온 힘을 쏟는 시간이 지나가자 방독면과 스카디가 커다란 가방, 아마도 사체포로 보이는 것을 들고 와 수술대 근처에 내려놓았다.


"닥터. 일어나도록."


백골의 말에 주변을 살피며 일어났다. 방독면과 스카디가 가방에서 꺼낸 것을 확인한 나는 사체포가 맞았다며 혼잣말을 하고 수술대 위에 올려진 그 끔찍한 몰골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뒤이어 들려온 백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깨워라. 네가 할 일이다."


"뭐…?"


깨우라니, 무엇을? 백골의 시선은 내게서 수술대로 옮겨져 있다. 이걸? 깨우라고? 시체를? 그것도 전신이 불에 타 분사한 시체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곤란하게 만드려는 질 나쁜 심문, 혹은 일종의 고문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골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기색으로 다가와 다시 말했다.


"사망 하기 전에 동면시켰다. 아직 죽지 않았지."


"…이걸 깨워서 어떻게 하라고?"


"최소한의 수복을 거치면 수술 해라."


"무슨 수술을 하란거야."


백골은 내 물음에 말 없이 수술대 너머의 벽을 가리켰다. 진열대에 들어가 있는 작은 앰플들. 그 앰플을 보자 이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나는 뒷걸음질 치며 소리 질렀다.


"오리진 더스트를 시술하라고!? 이런 죽느니만 못한 상태인 개체한테?"


"그 전에, 깨워라."


"제정신이야?! 손상된 바이오로이드를 깨우는 건 고사하고 전신이 타버린 바이오로이드를 어떻게 수복 시키라는 거야!? 이 정도면 차라리 안락사를 시키는게 현명해! 깨운 순간 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죽을게 뻔하다고!"


"아- 아아- 후-후- 대장, 여기서 부턴 내가."


장난스럽게 목을 푼 방독면이 막 말을 꺼내려던 백골을 제지하고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꼬마야. 확률이나 가능성 얘기를 하는게 아니야. 네가 한다는게 중요한거야. 너는 반드시 우리 리리스를 깨워야 해. 그래야만 할거야."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해 할 수가 없어."


"스카디, 걔 데려 와."


"걔?"


리리스라고 불린 동면 중인 개체가 있던 장소로 다시 들어간 스카디가 또 다른 바이오로이드를 안고 나타났다. 내 정면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의자를 두고 그 잠든 바이오로이드를 앉힌 스카디가 바이오로이드를 구속한 다음, 방독면의 지시대로 병상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장치들에서 케이블 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 바이오로이드에게 잇고, 착용시켰다. 


"얘, 꼬마야. 잘 봐봐. 저게 누군지 알겠어?"


내 어깨에 손을 걸치고 의자에 앉은 바이오로이드를 가리킨 방독면이 귓가에 속삭여왔다. 그러고보니, 누구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외형이다. 누구지? 처음본다. 거리가 있고 앉아 있었기에 정확히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키는 눈 앞의 백골과 비슷한 듯 했고 등받이 너머 바닥까지 내려간 머리칼은 어두운 조명을 감안해도 꽤 톤이 밝은 하늘색이다. 이런 개성들에 더해 곧게 뻗은 하체와 적당히 볼륨 있는 상체가 어우러진 균형잡힌 몸매를 소유한 바이오로이드는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잠든 탓에 얼굴을 확인 할 수도 없다. 정말로… 누구지?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은 그 잡힐랑 말랑한 감각이 가슴 속에서 불길하게 맴돈다.


"누구…"


"잘 봐봐~ 옷이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저렇게 찢어지고 터졌을까?"


"…아."


앉아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입고 있는 옷은 엉망인 상태다. 마치 안쪽에서 부터 팽창해 터진 것 같은 옷은 거적대기 처럼 아슬하게 몸에 걸쳐져 겨우 국부만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이기에 확신했다. 저 바이오로이드가 입은 옷이 왜 저렇게 된 것인지. 그리고 알아차렸다. 저 바이오로이드가 누구인지.


"LRL…"


"정답~ 꼬마가 만든 성장촉진제를 마신 LRL이랍니다~ 네가 잠든 사이에 먹여뒀지롱~"


"왜…? 왜 그걸 이런데서? 아, 아니. 그 물약은 어디서 찾은 거야?"


"응? 너, 네 방에서 나랑 만났었잖아. 서랍 뒤져보니까 있던데? 뭐 사실, 그거 찾으려고 네 방에 갔던 거지만."


재밌어서 못참겠다는 웃음기 섞인 말투가 제 주인을 똑닮았다고 느껴졌다. 방독면 너머로 들려오는 숨죽여 웃는 소리가 참을 수 없어 나는 수복실 안에 있는 검은 녀석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쩌겠다는 거야!? 다프네 언니에 이어서 LRL까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마음대로 써대고! LRL을 풀어주고 지금 당장 다프네 언니를 만나게 해 줘!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겠어!"


"어휴 무서워라~ 헤헷,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다 준비한거거든."


"…손대지 마."


내 말은 듣는 채도 안하는 방독면이 LRL을 깨우고자 다가가 뺨을 치고 몸을 흔들어댔다.


"얘~ 아가~ 일어나렴~"


"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일어난 LRL이 주위를 둘러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옷 때문에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 것인지 고개를 숙여 몸 상태를 확인하자 경악하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처럼 울먹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뭐야? 몸이 이상해. 목소리도 이상해. 여긴 어디야? 너희는 누구야? 이, 이거 풀어 줘…"


"자, 꼬마 박사님. 바로 시작할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걸?"




/////



  

"자, 아가. 일단 이거 한 대 맞고 시작하자~"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내가 울먹이는 LRL을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품에서 꺼낸 주사기를 LRL의 목에 겨눈 방독면이 말했다.


"이거 맞으면 정신이 들거야."


"싫어! 그거 뭐야! 싫어! 아… 아악!"


LRL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목에 주사기를 꽂아넣자 LRL은 조여드는 듯한 고통과 압박감에 신음했다. 주사기의 내용물을 거칠게 주입한 방독면이 LRL의 고개를 들어올려 그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하고는 흡족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LRL과 연결 된 장치로 걸어갔다.


"뭐야 박사님. 아직도 시작 안했어? 수복실은 거의 다 치워버려서 도구는 한정돼 있어. 언제 리리스를 깨우려고?"


"…"


"에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됐나?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가? 뭐 됐어. 일단 한 번 봐. 선택은 네 몫이야."


딸칵-


"꺄아아아아악!"


장치의 스위치를 올리자 LRL과 이어진 케이블 하나에서 빛이 일었다.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댐과 동시에 고통에 못이겨 반사적으로 발바닥을 들어대는 LRL의 얼굴에서 눈물과 콧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방금 목에 놓은 약은 각성제거든. 의식을 붙잡아두면서 감각을 예민하고 민감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졌어. 무슨 말인지 알지?"


딸칵-


"히야아아아아악!! 아아아! 아아악!"


"고통이 곱절로 느껴질 거란 소리. 방금 건 작열통. 이 장치는 통각을 건드리는 물건이거든. 외상을 입히지 않고 다양한 고통을 가할 수 있어. 이번에는 감전시켜볼까?"


"…자, 잠깐!"


딸칵-


"그으으으으…그르르륵…"


"유후~ 반응 좋은데? 약빨 잘받았나 보네. 어머 박사님, 아직도 시작 안했어? 빨리 해야지. 널 생각해서 성장촉진제도 쓴건데."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에이 설마, 몰라서 묻는거 아니지? 저 작은 몸으론 이런 걸 버틸 수가 없거든. 금방 쇼크사 할껄? 그래서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둔거야. 정신이야 어쨌든… 자, 이제 좀 할 마음이 들어?"


"내가 만든 약을… 고문에 쓰려고…"


"맞아용~ 그래야 너한테 주어지는 시간이 길어지지. 제한시간은 이 꼬마가 죽을 때 까지거든. 뭐, 안하겠다고 해도 상관 없어. 사실 난 딱히 신경 안 써. 저 리리스가 깨어나든 말든."


딸칵-


"케에엑- 케흑…"


"이예이~! 푸하하! 눈알 쪼그라 드는거 봐! 숨구녕을 막는게 효과가 좋나본데? 신경계를 통해서 질식 당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할게. 한다고! 부탁이야! LRL을 놔 줘!"


딸칵-


천진난만하게 장치의 스위치를 연속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방독면이 나와 LRL을 빠르게 번갈아 본다. 그 시선을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라고 재촉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나는 수술대 옆에 놓여있는 간이 진열대에서 필요한 수술도구를 찾았다. 정말이다. 도구는 한정 되어 있다. 수술장갑도 없고 신체를 열어젖히는 도구는 조악한 것들 뿐이다. 메스, 원형 톱. 주사기… 그 외에는 없느니만 못한 것들 뿐이다. 이런 것들로는 오리진 더스트를 이식하긴 커녕 동면에서 깨울 수도 없다. 


"이, 이것들로 어떻게 동면에서 깨우라는 거야! 제조실을 쓰게 해 줘! 목숨을 유지한 채로 동면에서 깨우려면 보다 전문적인 장치가 필요해!"


"음… 그건 곤란해. 대신 다른 걸 줄게."


방독면의 손짓에 반응한 스카디가 자신의 발치에 있던 것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내게 한 손으로 건넨 것을 받아 확인해 보니 그것은 각종 연장이 수납되어 있는 툴 박스였다. 


"이걸로… 어떻게…"


딸칵-


"으아…아아…아…"


방독면은 본인 대신 LRL의 쉰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알아서 하라고. 재주 껏 깨우라고. 진심인가. 정말 이런 의료도구와는 거리가 먼 것들로 이 새까맣게 탄 리리스를 깨우라는 것인가.


딸칵-


"……아…윽…"


처음에 들린 찢어지던 비명은 몸을 떨고 들썩이는 소리보다 작아졌다. 이들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짓을 하는가를 파악하려 드는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미약한 신음만 흘릴 뿐인 LRL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툴 박스의 내부를 살펴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었없다. 이런 걸 쓰라는 건 의료행위를 행하란 소리가 아니다. 그냥 해부하고, 신경 반응을 살피고, 어떻게든 생명반응을 이끌어내는 실험이나 하라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한 번 쓰지 않고 머뭇거리면 LRL은 죽는다. 미친 년들. 괴물 같은 년들. 오냐. 하겠다. 해주마. 어떻게든 눈을 뜨게만 만들면 되는 거지?


"오?"


메스와 가위, 의료용이라기 보단 공업용이라고 보는게 좋을 원형 톱과 드릴을 챙겨 리리스의 머리맡으로 향했다.  머리카락 하나 없는 새카만 리리스의 두피를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만지자 난생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촉감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바삭한 튀김의 느낌과 눅눅한 튀김의 느낌을 섞고 살결의 보드라움을 살짝 첨가한 듯한 그 말 못할 촉감에 소름이 돋는 걸 애써 억누르고 메스를 빳빳히 세워 리리스의 정가운데 이맛자락에 찔러넣고 뒤통수까지 단번에 그었다. 붉은색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검푸른 색에 가까운 피가 새어나와 손을 적시는 것도 아랑곳 않고 메스를 이용해 덜 베여진 곳을 고기를 발라내듯이 쓱쓱 베어내고 가위를 이용해 마무리 하고서 숨을 돌린다. 벌어진 틈에 감으로 도구를 쑤셔넣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그렇다고 억지로 열어 젖히자니 두피가 뭉개질 것 같았다. 할 수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LRL이 죽는다. 좋다. 너희가 내 사정을 봐주지 않듯이 나도 사정 봐주지 않겠다. 이 리리스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 두피를 전부 벗겨내주마. 다시 한 번 이마에 메스를 대고 양 옆의 관자놀이 방향으로 한번 씩 빠르게 그었다. 세 방향으로 칼집이 난 두피의 틈에 가위와 메스를 비집어 넣어 붙어있는 살점을 베어가며 억지로 두피를 떼어냈다.


"와우~ 화끈한데?"


딸칵-


장치가 가하는 다양한 고통에 몸을 움찔 댈 뿐, 더 이상 LRL은 소리 내지 않는다. 그것을 확인한 방독면이 혀를 차고서는 품에 손을 넣더니 손바닥만한 크기의 물건을 꺼냈다. 리모콘… 으로 보이는 것을 방독면이 끙끙대며 조작하자 병상 자리에 위치한 장치가 익숙한 기계음을 내면서 상당한 크기의 패널을 내보였다.


"계속 하면서 확인해~ 네가 찾던 다프네 언니야."


"…아."


패널에 나타난 화면은 오르카의 한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오르카의 대원들이 사용하던 내무실로 추정되는 그 장소는 이 수복실과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의 테이블 같은 장치와 맞닿아 있는 의자에 다프네 언니와… 리제 언니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우리 박사님이 결심을 늦게 해서 시간이 늦어졌잖아? 그래서 추가 시간을 주려고. 꼬맹이는 얼마 못버틸 것 같아서 말이야. 귀가 좀 허전하지? 소리 틀어줄게."


방독면이 추가로 리모콘을 조작하자 영상 뿐인 화면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기계음과 다프네 언니가 정신을 잃은 리제 언니를 향해 소리치는 음성이 내 귀를 향해 날아들었고 테이블에서 부터 솟아오른 예리한 칼날이 회전하며 두 언니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더 이상 화면을 바라보지 않고 두개골이 완전히 드러난 리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제 언니! 일어나! 벗어나야 돼! 리제 언니!"


"자~ 누가 빠를까? 박사님이 빠를까? 저 두 자매의 목이 날아가는게 빠를까? 두근두근하네~ 아 맞다. 꼬맹이도 잊지 마."


딸칵-


"성장한 몸이여도 내구력이 영 아니네. 태생이 약한건가? 아 맞다 박사 님. 하면서 들어? 그거 알아? 박사님이 만든 물약으로 몸을 성장시켜도 어린 육체의 특성이 완전히 날아가진 않는다? 몰랐지? 이 꼬맹이 한테서 말이야…"


딸칵-


"미성숙한 육체 특유의 풋풋한 향기가 나더라구~ 성숙한 육체의 야릇한 냄새도 나고. 진짜 신기해. 어떻게 이런 걸 발명할 생각을 했어? 히히… 그래서 말이야. 이 꼬맹이가 잠든 사이에 몰래 한 번 맛 봤다? 너무 맛있더라~ 우리 주인님 한테 진상하면 엄청 좋아하실 거야. 그래서 말인데, 어때? 그 약 더 있으면 좀 주지 않을래? 그럼 좀 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닥쳐닥쳐닥쳐닥쳐!! 입 닥쳐!"


"리제 언니! 이대로 가다간 큰 일 날거야! 제발 일어나!"


딸칵-


"어라? 꼬맹이 반응이 점점 약해지는데? 아까우니까 그냥 한 번 더 따먹을까?"


머릿 속은 이미 엉망진창인데 눈 앞에 펼쳐지는 광기의 현장은 더더욱 엉망진창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순수한 악의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넋이나가 생각도 못한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온다. 피에 흠뻑 젖은 내 몸과 수술대는 말할 것도 없고 LRL을 바라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방독면은 사정없이 장치를 껐다켰다를 반복한다. 패널의 건너 편에서는 다프네 언니의 절규어린 비명과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다. 발이 땅을 딛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비현실이라는 뭉실뭉실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그 불쾌하고도 붕 뜬 감각이 뇌를 긁어대고 쉼 없이 눈과 귀를 강타해오는 그 작은 아비규환이 다시금 억지로 현실임을 자각시킨다.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하기 곤란하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 것을 애써 억누르고 심호흡을 반복해 평정을 유지한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두개골에 박아넣은 톱을 작동시켰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사방으로 튀어대는 검붉은 피가 얼굴에 까지 묻었지만 닦아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톱을 서서히 안쪽으로 박아 넣을수록 검붉은 피에 맑은 색의 액체가 섞여나온다. 작업을 계속해 전류를 흘려보낼 장치를 삽입할 틈이 확보됐다고 생각한 나는 툴 박스에서 부터 가는 케이블을 끌어와 두개골의 갈라진 틈에 쑤셔넣으려 했지만 계속해 흘러나오는 피와 뇌수가 방해를 해대 녹록치 않았다. 


"맛 좋은~ 꼬맹이~ 한 번 더 맛 보자~ 찻찻차~"


씨발씨발씨발씨발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빠르겠다고 판단하고서 옆에 있던 핸드 드릴을 쥐어 심을 적당한 크기로 바꾼 다음 두개골에 쳐박아 작동시켰다. 두개골에 구멍이 날수록 거품을 일으키며 맺히는 체액이 종종 눈에 튀었지만 상관 없었다. 실수로 뇌 까지 뚫어버리지 않도록 신중을 기울여 수술이라는 명목의 기행을 계속하다가 더 이상 두개골을 파고 들지 못하는 드릴로 시선을 옮겼다. 심이 나갔다. 다른 심은 전부 다 쓸데 없이 큰 것들 뿐이다. 이런 걸로 뚫었다가는 동면에서 깨어나긴 커녕 바로 뒈져버릴게 뻔하다. 망연한 눈으로 드릴을 바라보다가 들려온 단말마에 시선이 향했다. 패널의 건너편에 있는 두 자매가 이제 막 최후를 맞이하려던 참이었다. 


"리제 언니! 안 돼! 아아아악!"


회전 하는 두 개의 칼날이 두 자매의 목을 동시에 파고 들었다. 비명은 점차 쇳소리로 변해가다가 완전히 절단 되지 않아 덜렁거리는 목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바람소리로 변해 서서히 잦아들었다. 자매는 한낱한시에 최후를 맞았다. 그 뿐이다. 내 탓이다. 아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주문한 저 미친년들 탓이다. 오리진 더스트의 이식 수술은 커녕 동면에서 깨우는 것 부터가 불가능했다. 내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백골의 말은 거짓 아닌 거짓이었다. 고문은 LRL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고문의 대상이었다. 나는 오르카의 선의로서 수술을 집도한 것이 아닌 고문 받는 포로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하하…아하하하…"


"이런 이런~ 박사님의 패배네요. 꼬맹이는 이미 죽은 것 같고 예쁜이 두 자매는… 으 어떡해~ 목이 덜렁거리잖아. 저 두 자매는 귀신이 되서 오르카를 떠돌겠는 걸? 목이 덜렁거리는 귀신! 아하하하하! 조심해 박사님! 귀신이 찾아간다아~"


"그만…해…"


드릴을 든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죽었다고 여겨진 LRL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닥터…를… 괴롭히면… 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진조가 용서치 않을테야…"


"…뭐?"


LRL의 말에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린 방독면이 장치에서 손을 떼고 LRL에게 걸음을 옮겼다. LRL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그 검은 존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고 방독면 너머로 웃음이 가득했을 그 존재는 아마도 표정을 지우고서 LRL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다시 말해 봐."


급속히 성장한 LRL의 땅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발로 짓밟으며 정수리의 머리채를 쥐어잡은 방독면이 LRL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개가 당겨진 LRL은 힘겹게 매서운 표정을 지어보이고 방독면에게 맞받아쳤다.


"윽…아… 내 친히… 너희 에게… 파멸을 안겨 줄… 것이야. 작렬하는 사안…으로… 짐이 소유한 무한영겁의 불구덩이에… 너희 모두를 쳐박아 주마…!"


"흐응~"


"켁켁- 쿨럭…"


남은 힘을 쥐어짜내 진조로 탈태한 LRL은 안쓰러운 저주를 퍼붓고 기운이 다한 듯 했다. 그런 LRL을 재밌다는 눈치로 살펴보고는 콧소리를 흘린 방독면이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내려가던 LRL의 고개를 강제로 꺾어올렸다.


"아하~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중2병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으으~ 닭살 돋아. 뭔 말투가 이래? 진조? 사안? 무한영겁? 음… 그래? 알았어. 널 죽이는 건 보류야. 그 대신…"


방독면이 손짓하자 다가온 스카디가 LRL의 앞에 섰다. 


"그 중2병은 내가 졸업하게 해줄게. 감사히 여기렴? 그러고보니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랬지? 안대를 껴써 외눈이라고 자칭하는 거니?"


"이 더러운 손… 놓지 못할까…!"


"공주님 하려고 안대 끼려니 귀찮지 않아? 내가 그 안대 필요 없게 진짜 외눈으로 만들어줄게. …스카디."


방독면의 손짓에 다가온 스카디가 LRL의 앞에 우뚝 서서 방독면을 바라보았다.


"저 안대 낀 쪽 눈을 작살내버려."


"안 돼!!!!"


방독면의 지시에 몸을 돌린 스카디가 한 손을 내밀어 LRL의 옆 얼굴을 움켜잡았다. 엄지를 제외한 스카디의 나머지 손가락이 LRL의 귓가를 붙잡자 힘이 가득 들어간 엄지가 LRL의 사안에 달려들었다.


"꺄아아아아!"


"미친 년! 미친 년들아! 이 씨발년들! 애한테! 애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냐고!"


"애라니? 너도 애잖아. 적어도 얜 몸 만은 어른인데?"


짓이겨진 LRL의 눈에서 스카디가 엄지를 빼내자 피와 눈물이 여러 가닥으로 쏟아졌다.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LRL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손으로 붙잡은 스카디가 이번에는 나머지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피가 흘러나오는 곳을 가볍게 치고 두드리고 눌러서 압박해댄다. 스카디의 완력에 고개를 흔들 수도 없어진 LRL은 남은 하나의 눈을 위로 치켜뜨고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살이 짓이겨지고 액체가 압력에 의해 터져나오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한 LRL의 눈이 이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던 그 순간, 처음부터 가만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백골이 입을 열었다.


"그만."


백골의 예상치 못한 지시에 나와 방독면은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지만 스카디는 다른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 신속히 LRL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이제 충분하겠지. 그 정도로만 해 둬."


"이건 또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저 중2병 대사 듣고 너도 정신이 나간거냐?"


분위기와 목소리가 일변한 방독면이 거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백골에게 다가갔다.


"야이 씨발년아. 네가 뭔데 주인님께서 내게 내리신 포상을 거두는거야? 지금 중대장이라고 거들먹거리냐? 권한 행사 한 번 하겠다는거야?"


"포상이든 뭐든 내려받은 게 있는 건 너만이 아니야. 중대장은 너희를 통제하라고 주인님께서 내게 하사하신 직책이지. 적합한 판단하에 권한을 행사하는 것 뿐인데, 문제 있나. 캐럴?"


방독면을 거칠게 벗어던진 바이오로이드… 캐럴라이나가 신장 차이는 아랑곳 않고 백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히히히. 이거 순 양아치네? 이제 몸풀기를 했을 뿐이야. 이제 막 재밌어지던 참이라고! 주인님께서 가르쳐 주신 걸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네가 뭔데 앗아가겠다는 거야! 너 설마, 저것들을 동정하는 거야? 주인님이 하신 말씀 기억 안 나? 저것들은 멸절해야 할 대상이야. 완벽히 찍어눌러서 죽이고 또 죽여야 하는 것들이라고! 갖고 노는 건 그저 소소한 유희일 뿐이야! 그 소소한 것 마저 통제하겠다는 거냐!?"


"내 눈에는 즐길 만큼 즐긴 걸로 보이는데. 불만인가? 그럼 평소의 방식대로 하지. 나이프 꺼내."


"…크으…!"


"뭐하나. 나이프 꺼내지 않고. 왜, 무력을 겨루는 건 싫은가? 그러고도 네가 사냥 개 인가? 네 전문화 분야가 아니라 자신이 없어?"


"전부 주인님께 보고 할 거야."


"적합한 권한행사와 하극상. 둘 중 어느 쪽을 중히 다루실지는 안봐도 비디오다만. 뭐, 원한다면 부디 그렇게 해."


백골을 지나쳐 수복실의 입구로 향하던 캐럴라이나가 등을 돌려 다시 백골을 돌아보았다. 부르르 떨리는 귀, 그리고 그 귀에 달린 수많은 피어싱이 수복실의 어두운 조명에 반사되어 빛을 내고 있었다.


"너, 내가 기억하고 있겠다. 반드시 그 잘난 콧대를 언젠가 부러뜨려 주마. 기대하고 있어라, 팬텀."


"결과야 뻔할테니 별로 기대는 안된다만."


자동문을 통해 캐럴라이나가 나가자 팬텀이 스카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카디는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기절한 LRL을 들어 수복실을 나섰다.


"닥터. 미안하게 됐군."


마스크를 벗고 가볍게 고개를 꾸벅인 팬텀에게 내가 말했다.


"미안해? 지금 날 갖고 노는거야? 이미 벌어질 건 다 벌어졌는데? 막을 거였으면 진작에 좀 막지 그랬어?"


"갖고 논 건 맞지. 캐럴 녀석이 말이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캐럴의 말대로 지금껀 몸풀기 였을 뿐이야. 이 이후에는 더 끔찍하지. 적어도 너희에게는."


"…"


"주인님의 지시였기에 거들었을 뿐이다만, 딱히 보고 싶지 않은 꼴이라 막은 것도 아니야. 그저 뒷정리가 귀찮아지는게 싫은거니 착각 마라. 너희는 적, 동정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너는 우리 계획을 실행하는데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이라서 말이지. 다른 것들 보다 좀 더 취급이 좋을 뿐이야."


"무슨 계획?"


"저 리리스는 엄밀히 말하면 수술 대상이 아니지. 주인님께서 캐럴에게 하사한 포상이었을 뿐… 진짜로 오리진 더스트를 이식해야 할 녀석들은 따로 있어. 약속하지. 오늘 수술이 정해진 개체들의 수술을 끝마치고 그 방법을 전수해준다면 LRL과 너를 무사히 돌려보내주마. 뭐, 거부 할 수야 있겠냐만은… 협력하겠다면 지금 바로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도록 준비하지. 어때? 협력하겠나?"


언니들은 죽었다. LRL은 고문 끝에 눈을 잃고 의식도 잃었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녀석들에게 놀아났다. 그렇게 놀아나고 난 다음엔 달리 방법도 없었다. LRL만이라도 무사히 데리고 나가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루하고, 무기력하다. 그 증오스러운 남자는 커녕 그 남자가 거느린 이 사냥 개들에게 조차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다. 잠시 고민하느라 머뭇거린 나는 말 없이 팬텀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팬텀이 나를 앞서 수복실을 나섰다. 팬텀을 따라 나가기 전 수복실의 패널, 마치 이 곳에 발을 들여놓을 나를 위해서 일부러 설치해둔 것 같은 그 패널에 비춰진 영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눈가가 간질거린 끝에 데일듯이 뜨거운 눈물이 고여서 줄기가 되어 떨어졌다. 나를 부르는 팬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수복실을 나섰다. 방법이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이미 떠난 두 언니에게 거듭 사죄하면서 나는 남은 것이라도 지키고자 팬텀을 뒤따르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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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 또 왔습니다.


닥터는 참 줄글로 묘사하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캐릭터 같습니다. 어린 아이 이지만 오르카의 제일가는 똑똑이라는 캐릭터잖아요. 

어린 애 다운 태도와 생각으로 인해 갖고마는 모순, 지성인으로서의 이성적인 모습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묘사해보려 했는데 어렵네요. 거기에 고생까지 시켜야하니 더 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럼 ㅂㅂ 재밌게 읽어주세염


오타나 어색한 문장은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