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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라는 오물과 흙투성이에 묶여 정체되어 있던 나와 내 주변은 서서히 변해갔다. 모두가 웃어주지는 않았어도 마주봐 주었고 목소리의 톤은 안정되어 추잡하거나 험악한 단어를 내뱉는 일도 없었다. 눈물을 훔쳤던 발키리나 격앙되었던 나앤이 마음에 걸려 갑갑한 응어리와 싯푸른 멍에가 계속 내 안에 맴돌았지만 그 둘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듯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안녕, 하고 인사하면 늘 같은 시간에 빗자루질을 하는 포티아는 내게 해맑게 웃어준다. 바닐라는 무뚝뚝 했어도 나를 향한 빈정거림에 박혀있던 가시는 사라져,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해주게 됐다. 스틸라인… 노움은 쭈뼛거리는 것이 없어졌다.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나를 쳐내려하는데 거리낌이 없던 브라우니는 언제 그랬냐는듯 너털웃음까지 지어보인다. 이제는 한 개체만 남은 레프리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브라우니에게 핀잔을 준다. 평소처럼 말이다. 이프리트는 내가 불편했는지 마주치기라도 하면 금방 자리를 떴지만 내가 싫어서 뜬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이틀 전엔 유미의 숙직실에서 함께 취침했다. 유미는 쌀쌀하고 좁은데서 뭣하러 그러냐며 나를 보내려했지만 내가 꼭 붙어있고 싶다고 졸라대자 마지못해 받아주었다. 확실히, 숙직실의 빈약한 난방으로는 한겨울의 추위를 몰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내게 침대를 양보하고 침낭을 쓰겠다는 유미에게 나는 침낭에 같이 들어가자고 다시 한 번 졸랐다. 유미나 나나 아담한 걸 넘어서 자그마한 체구이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유미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며 매우 곤란해 했지만 나는 살짝 짓궂어보기로 마음 먹어, 유미가 무엇에 곤란해 하는지 알고 있었어도 대놓고 모른 척 했다. 결국, 우리는 한 침낭 안에서 같이 자게 됐다. 맥주를 마셔서 였을까. 금방 골아 떨어졌던 유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 나는 알비스가 식당에서 권했던대로 알비스와 유미, 스틸라인 대원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게 됐다. 장소는 내 방. 살짝 욕심… 아니, 용기를 내어 내 방에 올 것을 권해보니 모두가 흔쾌히 받아줬던 것이다. 그렇게 웃고 떠든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오르카에서 그렇게 웃어 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플라스틱 원숭이의 숫자를 셀 때와 나무 블록이 무너질 때 마다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확실하게, 우물쭈물하고 애매한 웃음이 아닌 쾌활하고 유쾌한 웃음을. 벌칙을 당해 이마가 조금 부어오르고 눈물이 찔끔 새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 또한 행복하기만 했지, 기분나쁜 통증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나앤도 같았다. 뒤늦게 합류한 나앤은 꽤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나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해보니, 오르카에서의 나와 나앤은 솔직하지 못하게 늘 견제하거나 헐뜯기에 바빴지 한꺼풀 내던져 둘이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었단 걸 깨달았다. 그것이 안타까워져 나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지만 역시 나앤에게는 숨길 수 없었다. 내가 벌칙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나앤은 다 꿰뚫어보고서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위로하듯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검지를 튕겨 내 이마를 톡 하고 건드렸다. 규칙위반이었다. 벌칙은 허물없이 일정 강도 이상으로 내려야 했음에도, 다 알면서도 규칙에 따르지 않았던 나앤은 결국 모두에게 벌칙을 받게 됐다. 나는 나앤과는 다르게 손가락에 가득 힘을 주고 튕겨 이마를 가격했다. 그랬어도 나앤은 그저 처음보는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어보였을 뿐,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내 손가락만 아팠을 뿐이었다.


그 온기에 데여 눈 앞의 광경 속으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것을 꾹 참고, 나는 또 다시 몇 번이고 했던 자문을 또, 또 되뇌였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저지른 과오도 잊은 채,


이 순간 만큼은 내게 새겨진 배신자라는 낙인을 지울 수 있는 걸까.


이 곳, 내 방에 이렇게 모여 하하호호 해도 되는 걸까. 


난방을 켜지 않았어도 이렇게나 따뜻해도 되는 걸까.


그 모든게 너무나 기뻐 터져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걸까.


눈 앞에 펼쳐진 눈부신 광경이 기꺼이 그래도 된다고 답해주는듯 했다.

그리고 그 부풀어오르는 행복에 방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은 밤을 떠나 보내고서 오늘, 마침내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던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절대 안 돼.









시작은 경계근무에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아니야…"


중앙 계단과 접한 복도, 웅성거리는 대원들을 건너 있는 게시판의 홀로그램에, 그것이 있었다.


내 시선이 흩뿌렸던, 내 혀 끝으로 내뱉었던, 내 손으로 끄적었던, 내 가슴으로 쏘아붙였던…


"아니야……"


마음에도 없던 거짓말이.


'……인류 저항군의 장성이자 저항군 휘하 둠 브링어의 지휘관 개체, 멸망의 메이는 인류 저항군의 사령관 님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전적이 있습니다.'


"…아…아아아…"


'떠나겠다고? 그래, 떠날 거면 당장 떠나. 철충한테도 안하던 패배선언을 같은 인간한테 하겠다는 거지? 그럼 됐어. '인간'. 넌 더 이상 필요 없어. 다음으로, 사령관 님의 호위 중 하나이자 총사대라는 이름의 소규모 분대를 거느렸던 개체, 샬럿은……'


"대장!"


나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돌리는 일 없이 홀로그램에 시선을 빼앗긴 채다. 


"………"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몇 번을 강조해들도 모자라지만 사령관 님께서 직위를 내려놓고 저희를 떠나신 가장 큰 원인은 오르카의 지휘관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며 보다 상세한 경위는 추후……' 


'말도 안 돼… 정말로… 사실이라고 적혀있긴 한데…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포티아를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포티아, 역겨운 배신자는 그만 쳐다보고 이만 가죠. 우리 업무에나 집중 하는거예요.' 바닐라를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미안해요. 이프리트.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노움을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그렇지? 괜히 배신자겠냐고. 사령관 님 태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잖아.' 이프리트를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와… 진짜 역겹슴다. 죄송함다 이뱀. 두 번 다시 저 배신자 근처엔 얼씬도 안하겠슴다.' 브라우니를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흥, 이 정도 였을 줄이야.' 레프리콘을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메이 대장님." 유미를 닮은 실루엣이 내게 다가왔다.


"……"


"메이 대장님." 유미를 닮은 실루엣이 내 어깨에 손(?) 을 얹었다.


"…유, 유…"


"이게 사실인가요?" 유미를 닮은 실루엣이 말했다.


"…아, 아니… 사,사실인데 그게 사실은…"  굳었던 입을 겨우 열 수 있었다.


"…사실이군요."


"잠깐, 잠깐만 유미… 내 말을…" "죄송해요. 메이 대장님. 앞으로 통신실에는 드나들지 말아주세요. 제 근무지니까요."


뭐야.


"자, 잠깐만! 유미!"


이게 뭐야.


"대장."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대장, 눈 똑바로 뜨고 나 봐요."


전부 떠나갈 수 있어?


"메이!"


"…나앤."


뭔가… 이상하다. 내 눈이 잘못 된 것일까, 아니면 나를 제외한 모든게 잘못된 것일까. 나앤의 실루엣이 바르르 떨더니 두 개로 나뉘어졌다. 마술인가? 이런 때에? 아, 마술이라면 조금 궁금하긴 하다. 나앤, 대단하네. 이런 걸 분신술이라고 부르던가? 어떻게 한거야? 언제 그런 대단한 마술을 익힌거야? 캐물어보더라도 말해주진 않겠지. 고작 하루 이틀 익힌 퀄리티가 아닌 것 같으니까. 나라도 말 안해줬을 거야.


"메이, 정신 차리고 다리에 힘 줘요."


"…"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까. 꿈? 그래. 꿈과 닮은 느낌이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묘하고 둥실거리는 느낌. 머릿 속이 붕 떠 있는 느낌. 물 속에서 팔 다리를 휘적거리는 느낌. 피부에 닿는 공기는 마치 말캉거리는 젤리 같아서…


"나앤."


나앤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입은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말소리는 들린다. 


"나, 뭔가, 좀…"


기분 나빠. 뱃 속에 흐물거리는게 꿈틀대는 것 같아.


"…메이, 나 따라 올 수 있겠어요?"


아주 잠깐 보였던 나앤의 눈은 중앙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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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 처럼 순찰을 돌고 병영으로 복귀한 발키리의 통신기가 울렸다. 나이트 앤젤이었다. 나이트 앤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애써 흥분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터졌군. 중얼거린 발키리는 1층의 복도에서 나이트 앤젤이 흥분한 원인을 슬쩍 확인하고서 곧바로 4층으로 향했다.


쾅!


"아윽!"


사령관의 내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나이트 앤젤의 손에 붙들려 등부터 관물대에 쳐박히는 아르망의 모습이었다.


"나이트 앤젤, 여기가 어딘지 몰라요? 여긴 폐하께서 쓰시는… 윽!"


"알아. 아니까 온 거야. 용건은 사령관한테 있으니까. 너는 겸사겸사 두들기는 거지. 왜인 줄은 알지?"


"여…영문을 모르겠는…끄윽…!"


나이트 앤젤의 왼 손이 팽팽히 늘어난 고무줄 처럼 파르르 떨린다. 그 손이 나이트 앤젤의 오른 손에 의해 고정 된 아르망에게 금방이고 날아갈 것을 짐작한 발키리는 다급히 나이트 앤젤을 불러세웠다.


"나이트 앤젤, 이해는 하지만 일단 놓으시죠."


"이제 왔냐? 통신하면 빨리빨리 와야 될 거 아냐."


우리 대장 좀 맡아 줘, 라고 말한 나이트 앤젤의 시선 끝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팔을 축 늘어뜨리고 파르르 떨고 있는 메이가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는 것이 넋이 나간듯 했다. 나이트 앤젤을 지나쳐가며 발키리는 아르망을 곁눈질로 살펴본다. 웃고 있다. 표독스럽게. 당장이라도 오른 손을 날리려는 나이트 앤젤이 진심이란 걸 모를리 없을 텐데도 움츠러들기는 커녕 오히려 기대가 된다는 것 처럼 여유로워 보인다.


"메이, 정신차려 봐요."


"…"


메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몸의 떨림이 심해 추위라도 타는 건가 싶어 발키리는 침대맡 근처의 담요를 덮어주고 다시 메이에게 말했다.


"계속 그러고 있다간 정말로 끝장입니다. 각하를 뵈려고 여기에 온 것 아닙니까?"


각하라는 단어에 미세하게 움찔거린 메이는 발키리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조금,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고 여긴 발키리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

  

메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침대에서 일어난 발키리는 일어나 사령관이 쓰는 맞은 편의 침대로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이불과 베개, 침대에서 삐져나와 헝클어진 침대보에서는 음습한 냄새가 땅거미처럼 낮게 깔려있다. 그 냄새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침대보와 이불을 들춰보면 알 수 있었다. 마치 곰팡이처럼 곳곳에 스며든 음습한 얼룩들을 계속 보고 있으니 발키리는 불쾌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져 고개를 돌렸다.


정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남녀 간의 정사, 다소 격한 정사를 매일 같이 무분별하게 치뤘더라도 침대가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둘이서 썼다고 생각 될 만한 상태가 아니다. 경험 한 적은 없더라도 난교가 이보다는 깔끔할 것이다. 잠시 인격체 임을 포기하고 짐승의 교미와 같은 정사를 치뤘더라도 저렇게나 난잡한 냄새가 남지는 않을 것이다. 발키리의 머릿 속에 두 단어가 머릿 속에 맴돈다. 집요, 고의. 저 흔적들은 고의적으로 새겨놓은 것이라고 밖엔 생각 할 수 없다. 인격체는 영역 표시에 체내 분비물을 이용하지 않는다. 각하만 아니었다면 발키리는 지체 없이 저 침대의 주인들을 짐승에 빗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하. 어쩌다가 이렇게 까지…


……아닙니다, 각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아르망.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발키리가 침대를 살펴보는 사이에 따귀를 세 대 정도 맞은 아르망이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광적일 정도로 폐하와 몸을 섞는 겁니까." 


여전히 나이트 앤젤에게 붙들려 있는 아르망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빤히 발키리를 쳐다보고만 있다.


"각하께서 저희에게 내무실을 옮기라 명하신 것도, 알비스를 저희가 데리고 있으라 지시하시게 한 것도 모두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


"그렇게 까지 해서 몸을 섞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그게 중요해?"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아르망이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발키리는 나이트 앤젤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니면 전부 감당하시죠. 나는 오늘… 나이트 앤젤을 말릴 생각이 없거든요."


아르망의 눈이 일변했다. 발키리가 몇 일 전에도 보았던 그 눈이다. 메이는 저런 눈을 한 아르망이 꼭 뱀 같다며 양 팔로 몸을 감싸안고 소름이 돋는다며 몸서리 쳤다. 발키리는 적절하다 여겼다. 메이의 말 그대로, 정말로 뱀이다. 금색 비늘과 싯푸른 눈을 가진,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사. 그 독사가 푸르고 공허한 눈으로 멍하게 발키리와 나이트 앤젤 사이의 공간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유?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지 않나요? 폐하께선 절 거부하지 않으시는걸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틀렸다. 거부하지 않는게 아니라 거부하지 못하시는 거다. 발키리가 알고있는 각하시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각하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듯이 아르망은 광소했다. 그 꺼름칙함에 막 정신을 차리려는 메이는 몸을 움츠렸고 아르망을 구속 중이던 나이트 앤젤은 뒷걸음질 쳤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랬던 건지 나이트 앤젤은 다시 아르망에게 달려들지 말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만족할 때까지 비웃고서 아르망은 마침내 아직 웃음기가 전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가랑이를 열어 보여드렸을 뿐인걸요? 어찌나 구석구석 게걸스럽게 드시던지요. 굉장히 맛있어 하셨답니다~? 아하하하하!"


발키리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들을 겨우 억누르면서도 가슴 속에 있는 것의 편린을 한 조각 떼어내 최대한 신중하게 표현했다.  


"……마지막입니다. 제가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던지게 만들면 그 땐 당신이 어떻게 될 지 장담 못합니다."


"어머, 그건 좀 기대 되지만… 그래요. 제가 좀 짓궂었군요. 음… 어디보자… 짓이라고 표현 할 만한 게 뭐가 있더라… 아, 그렇지! 으흐흐흣…"


"…"


마지막으로 웃어보인 아르망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서 한층 더 공허해진 눈을 내보였다.


"폐하를……아하하…폐하를… 몰아세우고… 협박 했지요. 폐하와 하나가 된 것 처럼 밀착해 살결을 맞부딪히고, 맛 볼 수 있는 체액이란 체액은 모두 맛 보고서요. 앞으로도 저를 안아주지 않으실거면 떠나겠다고 협박 했어요. 당신에게 전부 말하고 떠나겠다고요."


"…왜 협박 했습니까."


"당연한 걸 묻네요? 서약했던 당신이라면 알 거 아니에요? …그 무엇 보다도 사랑하니까요. 함께 하고 싶으니까요. ……이 세상 마지막 까지."


"…너."


"하. 왜? 부러워? 그럼 내가 몇 일 전에 권유했을 때 받아들이지 그랬어? 그랬다면 아마 지금도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게 아니라 한창 폐하를 맛보느라 몸이 달궈져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닌 척 하더니… 결국엔 너도 폐하를 먹고 싶었던 거잖아." 


"각하를 물건 취급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아하하! 뭐라는 거야! 그것보다 발키리? 아직 늦지 않았는데? 어때? 오늘 밤에라도 올래?"


아르망은 발키리를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먼 곳을 지그시 응시하는 것 같은 그 몽롱한 시선과 공허한 눈에서 발키리는 머지않아 생을 마감할 이의 얼굴을 연상해버려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했어도 아르망의 뱀 같은 혀에서 튀어나온 말들과 생기가 없는 눈이 계속 아른거려 절로 고개를 젓고만다. 


발키리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정리해본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대답한 것 같아도 이 이상부터는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아르망은 완전히 미쳤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가, 원인은 무엇인가. 코헤이 교단? 아니다. 코헤이 교단에서의 사건은 계기였을 뿐 이렇게 까지 틀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원인은 아르망 본인에게 있다.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고결했던 아르망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어서 일까. 발키리는 저도 모르게 모르게 그녀의 사정을 헤아리려 한다. 발키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각하 한 분 뿐이고 그런 각하를 좀 먹는 이 뱀을 쳐내야 하건만 발키리는 강단이 좀 처럼 서질 않는다.


아르망은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면서 나이트 앤젤을 밀쳐내고 사령관의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아 몸을 수그렸다. 나이트 앤젤은 그런 아르망과 좀 처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발키리를 번갈아 보다가 메이의 옆에 앉았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나이트 앤젤이 말했다.


"이제와서 우리 대장에 대한 걸 퍼뜨린 이유가 뭐야?"


아르망은 수그린채로 고개만 들어 나이트 앤젤을 바라본다.


"퍼뜨리다니요?"


"모른다는 듯이 말하지 마. 우리 대장이 사령관 님한테 한 폭언에 대한 것 말이야."


아르망은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공허한 눈으로 그런 표정을 지은 아르망은 생명체라기 보단 정교한 바스크 인형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우리 대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아는 건 너뿐이잖아."


"…"


"아니냐?"


"아니에요."


"그럼 그 쪼만한 년이군."


"당신들 참 이상하군요."


나이트 앤젤이 담배를 하나 꺼내물자 아르망은 폐하께서 쓰시는 방이라 소리쳤지만 나이트 앤젤은 듣는 척도 안한다. 발키리는 그런 나이트 앤젤을 신경 쓰지도,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가 됐든 메이 대장님에 대한 걸 퍼뜨리는게 뭐가 잘못 됐단 거죠? 오히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알았으니까 닥쳐. 네가 아니라면 너한테 더 볼 일은 없어."


나이트 앤젤이 담배를 한모금 들이킨 그 때에 내무실의 문이 열렸다.


"왔습니까."


곁눈질로 내무실에 들어선 홍련과 샬럿의 모습을 확인한 발키리가 말했다.


"알비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 내무실에요. 따라오겠다는 걸 겨우 떼어놓고 왔어요."


 나지도 않은 땀을 훔치며 말한 샬럿이 발키리에게 다가서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이트 앤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이트 앤젤이 불러서 일단은 왔지만… 정말 괜찮아요? 이런 식으로 폐하께 들이닥치는 건 좀…"


"이런 식으로라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내야 합니다."


사령관이 어떻게 되고 무슨 선택을 하든 그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긴 발키리였지만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하고 속으로 읉조린 발키리는 숨을 참듯 눈을 질끈 감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사령관은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코헤이 교단에서 내몰렸던 것 그 이상으로 피폐해지고 괴로워 하고 있음을. 


사령관과 다시 해후하여 동굴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때, 자신은 그의 곁을 지킬 뿐이라 마음 먹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자격을 들먹이며 사령관을 지탱해주지 않느니만 못하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어떻게든 사령관을 돌려놔야 한다. 저 아름다운 독사로부터. 언제 이빨을 세우고 덤벼들지 모르는 사냥개로부터. 그리고, 그를 이 곳 까지 당도하게 한 자기자신으로부터.


복도에서 무게감있는 발소리 하나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각하를 지켜야 해요."

   


   


////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순찰을 마치고 온 사령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고서 본인의 내무실에 들어와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둘러보았다. 다크서클이 점점 선명해져가는 사령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테이블로 다가가 앉은 나이트 앤젤이 사령관을 맞이했다.


"순찰 고생하셨어요."


"뭣들 하냐니까?"


되묻는 사령관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몇 일 전 까지만 해도 괜찮았던게 이제야 한계가 온거라고 생각한 나이트 앤젤은 사령관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사령관님. 닥터는 어디 있나요?"


사령관이 테이블에 다가와 나이트 앤젤을 마주 보고 앉았다.


"몰라. 닥터는 왜 찾아."


"잡아 죽이려구요."


"일부러 그딴 헛소리 하려고 여기 온 거냐?"


나이트 앤젤에게서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사령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찰 중이어야 할 인원들이 자신의 내무실에 있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담배까지 피워댔음을 알아챈 사령관은 실내에선 피우지 않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나이트 앤젤의 뒤에 있는 침대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메이를 발견 하고는 다시 나이트 앤젤에게 물었다.


"메이 때문이야?"


"보셨을 거 아니에요? 1층에 있는 게시판."


"그게 왜."


"그게 왜?"


나이트 앤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사령관도 같았다. 말이 짧았던 데다가 묘하게 나이트 앤젤의 말투가 공격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사실이잖아."


"…하." 나이트 앤젤의 입꼬리가 윗방향으로 비틀렸다.


"웃어?"


"사령관 님."


"왜."


"저 떠날게요."


발키리에게 비밀로 해달라 약속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제 입으로 먼저 말해버린 나이트 앤젤이 무슨 생각인지 짐작한 발키리는 괴로운듯 눈을 감았다. 끝이다. 오늘, 어떤 식으로든 각하와 나이트 앤젤은 완전히 끝난다. 발키리는 앞으로 만에 하나 돌발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신경을 곤두 세웠다.


"메이랑 같이 떠날거에요."


떠나도 되냐도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떠날거에요 라고 통보해오는 나이트 앤젤에게 사령관은 슬슬 화가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 떠나든 말든 알아서 선택 할 일이다. 태도로 보아하니 예의 상 통보하는 거라고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아까부터 공격적으로 들리는 말투까지. 이 모든걸 종합해 자신을 살살 긁으러 온 것이라고 짐작한 사령관은 깊게 들이킨 담배연기를 나이트 앤젤의 안면에 직격시켰다.


"너 알아서 하면 될 일 아니야? 그건 그렇고, 너 이상하게 공격적이다? 나한테 불만 있냐?"


담배연기를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눈이나 호흡에 반응 하나 없던 나이트 앤젤이 사령관과 똑같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씨이~발 당연한 걸 물으시네."


"씨발?"


"네, 씨발. 지금 사령관 님 상태를 보니까 씨발 소리가 절로 나와 버리네요."


"사지 멀쩡히 떠나고 싶으면 말 가려라."


"사령관 님. 하나만 물어볼게요."


"짧게 해."


"우리 메이가 미워요?"


우리 메이, 라고 말한 나이트 앤젤의 목소리 톤에서 묘한 것을 감지한 사령관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풉. 뭐? 우리 메이?"


"그럼 뭐라고 해요?"


"호칭도 그렇고 좀 이상하네? 너희 뭐 사귀기라도 하냐?"


"사귀는 것 이상이죠. 섹스도 했는데요?"


"너희 둘이? 정말로? 메이 뺨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대던 네가? 아하. 그래, 이제 알겠어. 왜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참이었는데 말이야. 그냥 미쳐서 이해가 안되는거 였구만."


"그렇죠? 근데 뭐, 좀 미치더라도 이젠 이상할 거 없는 세상 아닌가요? 게다가 아무리 미쳤어도 사령관 님만 할까요?"


서로 고개를 들이밀어 얼굴을 가까이 한다. 두 남녀가 유쾌한 농담을 주고 받은 것 처럼 소리내어 웃자 분위기가 좋아지기는 커녕 내무실의 분위기는 더더욱 얼어붙었다. 샬럿의 팔을 끼고있던 메이가 숨을 생각으로 더 깊숙히 품으로 파고들려는 것을 샬럿은 말 없이 받아주어 메이를 끌어안았다.


한껏 웃어재낀 두 남녀가 웃음기 섞인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메이가 밉냐고했지? 아니? 안미운데?"


"그래요. 여기에 막 오셨을 무렵에도 분명 그런 식으로 말씀 하셨었죠. 근데 왜 이제와서 우리 메이만 내동댕이 쳐두시는 거죠?"


"그럼 뭐, 섬 지키는 시간도 따로 쪼개서 내가 먼저 찾아가기라도 했어야 돼?"


"여기 처음 오셨을 때는 그러셨잖아요?"


"상황이 다르잖아."


사령관의 목소리가 다시 급변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의해 손바닥 뒤집듯이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뒤바뀌자 태연함을 유지하려던 홍련의 얼굴 마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폐하, 신경 쓰지 마셔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르망이 몸을 일으켜 다가가 품에 사령관을 안았다. 


"오히려 폐하께서 과하실 정도로 배신자에게 마음 쓰신 거지요. 폐하께선 아무 잘못 없으시답니다."


"이 년은 씨발 서약자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데도… 큭큭… 그래, 야 아르망. 대답 한 번 해봐. 너 알고 있지?"


"뭘 말이죠?'


"네가 사령관 님을 좀 먹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지 않느냐고. 아까 대놓고 얘기했으면서 뭘 그래? 맞잖아. 너 다 알고 있잖아. 그냥 물 엎질러 진 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못 멈추고 있는거잖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복잡한 속사정이야 어쨌든 주체가 안되는 건 맞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한다는 사령관 님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할 수 있냐?"  "아니야."


"네가 하는 짓이 사령관 님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거랑 다를게 없다는거 다 알고 있잖아."  "아니야!!!!"


"왜 화를 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란 거 몰라?"


"아니야아니야아니야!! 폐하!"


초점 없는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던 사령관에게 아르망이 달려들었다.


"웁…으읍…" "응…츄웁…"


"미친년…"


나이트 앤젤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조소를 보냈다. 거리를 벌리려는 사령관과 그런 사령관을 끈덕지게 쫓아 매달리는 아르망은 사랑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나이트 앤젤이 곁눈질을 해 발키리를 살펴본다. 혀를 섞는 두 남녀를 보는 발키리는 의외로 태연하다. 나와 그다지 다를게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여긴 나이트 앤젤은 사령관에 의해 상황이 종료 되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보셨죠!? 이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신다구요!?" "아르망!!!"


부릅 뜬 눈으로 나이트 앤젤을 노려보는 아르망에게 사령관이 소리치는 걸 본 발키리는 생각을 수정했다. 끝나는 것은 나이트 앤젤과 각하만이 아니다. 아르망도 끝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끝난다.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관계는 박살난다. 발키리는 그 관계가 끝나고서 새로이 쓰여질 관계가 부디 긍정적이기만을 바라며 뻔히 예상되는 사령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제 그만 해."


"폐하?"


"더는 안 돼. 싫어. 이런 건 잘못됐어."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르망! 주위를 봐! 이젠 도망 못 쳐! ……솔직히 말할게. 이젠 네가 버거워."


"폐하!!!"


"네가 싫어."


"…"


아르망의 사지와 이어진 실이 끊겼다. 나이트 앤젤을 향하던 아르망의 부릅 뜬 눈이 사령관에게 향했다. 무언가 말하려 하는지 오므렸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아르망의 입술을 바라보며 발키리는 바랐다. 부디 아무 말 없이 저대로 주저 앉기를. 그러나 바라는 것은 대체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아르망은 곧바로 사령관의 허벅지에 달려들어 올라 타고서 소리쳤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건 폐하 탓이에요!"


"맞아."


"절 살리신 건 폐하라구요!!"


"맞아."


"제가 무엇을 요구하든 전부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이젠 더 이상 그러지 않으시겠단 거죠!? 좋아요! 그럼 말씀드린 것 처럼 저도 떠나겠어요!"


"그렇게 해."


"에, 폐하…?"


아르망이 가졌던 가장 강한 무기를 사령관이 이전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자 아르망은 당황해 눈이 흔들렸지만, 그에 반해 조금 생기가 돌아온듯 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폐하… 어떻게…"


"미안해. 아르망."


"폐하… 당신이…"


"얼마든지 욕 해도 돼. 원한다면 때려도 좋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령관의 품에 고개를 파뭍고 있던 아르망이 양 손을 번쩍들어 사령관에게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이…!"


"…"  


퍽- 퍼억-


"씨발새끼! 좆대가리만 굴려댄 새끼야!!!"


"…"


짝- 짜악- 퍽-


"더러운 새끼! 남창 같은 새끼!! 난 먹을 만큼 먹었다 이거야!?"


"…"


조심스레 발키리에게 다가온 샬럿이 소근거렸다.


"발키리… 말려야 하는게…"   


"아뇨. 두세요."


"다음엔 누구야!? 누굴 먹을건데!! 샬럿!? 저 년은 구멍은 이미 헐만큼 헐었어! 아니면 홍련이야!? 저렇게 축 쳐져가는 년이나 먹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 두 년이야!? 하나로는 만족 못해!? 지들끼리 보지를 비비적대는 년들이라도 괜찮다는 건가!?"


"…"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 개새끼야! 이럴거면! 이럴거면 날 왜 살린거야! 왜 살렸냐고!!"


"…"


"말 해! 말 해! 말하라고!!"


"…"


"왜… 왜 살렸어… 죽게… 날 죽게 뒀어야 하는게 맞는 거 였잖아…"


있는 힘껏 드럼을 쳐대듯이 사령관의 따귀를 후리고, 안면에 주먹을 날리고, 손에 닿는 곳은 모두 꼬집고 할퀸 끝에 아르망은 사령관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힘이 다한 것인지 흐느적거리는 팔로 멱살을 흔들면서, 계속해 사령관을 타박하던 아르망의 원망스럽고 노기어린 목소리에 점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울먹임을 억누르고 억눌렀으나 결국 터져나오는 울음을 견디지 못한 아르망은 사령관의 품에 얼굴을 파뭍었다.


"저는… 폐하께… 진심이었다구요…"


"미안해…"


아르망을 껴안은 사령관은 그 가녀린 어깨에 얼굴을 뭍고 눈물을 훔쳤다. 어느새 창 밖엔 굵직한 함박 눈이 잔잔하게 내리고 있다. 요동치던 소용돌이는 진정되고 얼싸 안은 두 남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훌쩍이는 소리가 내무실을 울렸다. 누그러진듯 보이는 분위기에 안도하여 다들 한숨을 돌리지만 유일하게 발키리만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끝난게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지금 것은 앞으로 있을 지진의 전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발키리는 이성과 몸가짐을 고쳐잡고 곧이어 들이닥칠 지진에 대비했다.


"폐하, 언제 그런 한심한 겁쟁이가 되신건가요."


몸을 추스린 아르망이 말했다. 이제껏 겪어온 모든 것이 온전히 사령관의 탓만은 아닌 걸 알고 있었어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요. 정말 둘 다 구제 할 길 없는 겁쟁이로군요."


아르망은 사령관의 어깨너머로 발키리를 쏘아본다.


"제가 어땠든, 폐하께서도 분명 저를 통해 위로가 되셨잖아요? 그게 궁여지책이었을지라도요. 발키리도 알겠지만 그 몫과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어요. 그런데 왜 나서지 않은 줄 아시나요? 왜 폐하를 몸으로라도 위로하지 못한건지 아세요? 자격이 없다 여기고 있거든요. 안 봐도 비디오에요. 정말이지, 너나 발키리나… 하나 같이 멍청하고 한심한 병신새끼들이야… 그 놈의 자격! 자격! 이미 다 무너지고 뒈져버렸는데 그 놈의 얼어뒤질 자격이 무슨 소용이냐고!"


다시 격해지는 아르망이 사령관의 양 어깨에 손가락을 박아넣고서 말을 이었다.


"난 발키리가 했어야 할 것을 대신했을 뿐이야! 저 년이 했어야 할 걸 대신했을 뿐이라고! 이 병신새끼야! 알아? 너 그대로 뒀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짐작도 안 돼. 이 씨발새끼야… 내 보지에 그 쓸데없이 큰 자지를 몇 번이고 쑤셔대고 찍찍 싸댔으면서… 지금이라도 바지 까고 좆대가리 핥아주면 알아서 좆물 싸댈 새끼가… 이제와서… 이제 와서 나를 쳐내? 야. 내가 만만해? 뭐? 이젠 도망 못친다고? 난 도망 친 적 없어! 도망친건 너랑 너희지! 그중에서도 제일 겁쟁이인 새끼들은 무서워서 거부도 못한 너랑 얼씨구 좋구나 하고 나한테 떠맡긴 저 씨발년이야!"


아르망은 다시 폭발해 외쳐댔지만 개운함이 느껴지긴 커녕 점점 더 속이 문드러져만 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건 자신도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마저 도망치고 있다. 아르망은 오로지 사령관을 자신에게 묶어두는 것에 집중 했을 뿐, 발키리를 대신한다는 의식은 없었다. 이 모든 걸 아르망은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자기자신이야 말로 제일 가는 도망자라는 것도 자각한다. 그렇기에, 잘 쳐줘도 아이의 투정과 추한 변명, 그리고 궤변에 지나지 않을 말들을 통해 눈 앞에 있는 자들을 깎아내리고 비난한다. 필사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거짓말 마십시오. 왜 나를 들먹입니까. 당신은 그저 자기자신을 위해 각하께 매달렸을 뿐 입니다."


예리한 발키리는 그런 아르망을 놓아주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발키리는 서서히 테이블로 다가가며 말했다.


"더 이상 각하께 접근 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이상은…"


아르망은 끝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여지를 주는 발키리가 한심하고 어이없어져 헛웃음을 터트렸다.


"…재미 없어. 재수 없는 년."


마침내 단념했는지 아르망은 손의 힘을 풀고서 마지막으로 사령관의 입술에 입술을 부딪혔다. 아이스크림을 핥듯 사령관의 혀를 만족할 만큼 핥고서 떨어진 아르망은 터덜터덜 사령관의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화끈하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이제 겨우 한 고개를 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 나이트 앤젤은 진이 빠질 것 같은 것을 참고 말했다.


"사령관 님. 난 사령관 님이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말 해."


"메이를 용서하실건지 말건지."


"…"


"알아서 선택해라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도망치니 마니 소리가 나와서 말인데, 그거야 말로 도망치는 거 아니에요?"


"네가 할 소리냐?"


"아니 씨발,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소릴 하는데요? 발키리? 저 년은 무게란 무게는 다 잡는 주제에 뒤에서는 서약자가 남편 못지켰다고 질질 짜대는 년이에요. 샬럿이랑 홍련? 말할 것도 없죠."


"아, 미안. 말을 바꿀게. 너희가 할 소리냐? 너는 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 진짜 그 놈의 자격, 자격. 아르망 또 화내겠네. 그럼 뭐 계속 이렇게 가실거에요? 사령관 님. 이 지경이 되고서도 계속 그러시는 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 안해요?"


"어. 안 해."


"어쩌다 그 멋진 사령관 님이 이렇게 되셨을까. 오르카에 있을 때랑은 너무 비교 되시는 거 아니에요?"


"너희들 탓이잖아."


"이젠 그렇게 도망치기에요? 솔직하지 못하시네. 발키리가 말해주던데요? 사령관 님이 그랬다면서요. 저희가 사령관님을 버린게 아니라 사령관 님이 저희를 버린거라고. 그렇게 말해오신 분이 갑자기 저희 탓이라고 해요?"


쾅!


서서히 끓어오르던 감정을 기어이 폭발시킨 사령관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럼 씨발 내가 어떻게 했어야 됐는데!!! 대답 해 봐. 너! 아르망! 샬럿! 홍련! 메이! 너희 전부 내가 오르카에 있을 때 뭘 했는데! 뭘 했느냐고!"


"또 솔직하지 못하게 이상한 소리나 하시고… 하나만 말씀 드릴게요. 그 새끼 밑으로 기어들어간 년들 보다 사령관 님을 믿고 따르던 년들이 더 많았다는 거, 그래서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었다는 거. 메이도 그 중 하나였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셨어야 했을지 답 나오지 않아요?"


"네가 나야? 네가 단 하루만 내가 돼봤어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었을 것 같냐? 그리고, 개소리 하지마라. 메이 저 년은 가장 악독했던 년들 중에 하나야! 단 하루도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어! 기어이 내가 내 발로 나갈 때 까지 날 욕했단 말이야! 나는 씨발… 처음에 눈 뜨고나서 부터 너희가 바이오로이드니 뭐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다 받아들였고 너희가 인간들한테 몹쓸 짓들을 수 없이 당했다는게 안쓰러워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가면서 까지 너희를 위했어! 대가 같은 건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그렇게 한 끝에 너희가 건네준 결과가 뭔 줄 알아? 너 같은 씨발년한테 소리나 지르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야!"


"철충은 무섭지 않아도 그 새끼는 무서웠나요? 우리도 무서웠던 거에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령관이 나이트 앤젤에게 달려들 것 처럼 굴다가 샬럿을 돌아보았다.


"무서웠냐고!? 그래! 무섭다 못해 역겨웠다! 특히 너! 샬럿! 이 씨발년아!"


"네, 네! 폐하."


"나한테 벌렁대던 보지 그 새끼한테 박혀대니까 좋았냐!?"


"폐하… 잠시 진정…"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개같은 창년아!"


"흐흐, 이건 뭐 개판이 따로 없네." 나이트 앤젤이 샬럿과 사령관을 번갈아보며 혼잣말로 비웃었다.


"…좋지… 않았어요."


"좆 까는 소리 하지 마! 넌 내가 회의 중일 때도 대놓고 들으라고 떡쳐댔었잖아!"


"그, 그건… 폐하! 제게 조금만 시간을…"


"야. 나이트 앤젤, 이제와서 저런 년이 나한테 붙어먹게 두는게 용한 거라곤 생각 안하냐? 내가 일일히 '오냐, 용서한다' 이러면서 데리고 다녀야 됐던거야? 넌 무슨 부처라도 돼?"


"샬럿은 샬럿이잖아요? 알아서 관리 하셨어야죠. 부하 관리 똑바로 못한 사령관 님 책임 아니에요?"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너 지금 나 일부러 긁냐?"


"네. 등신같은 사령관 님. 이왕 시작한 거 지금 일부러 긁어드리고 있어요."


"…아. 그래? 알았어. 넌 나중에 봐. 야, 홍련. 이 쳐죽일 년아."


"네! 사령관 님."


"너 솔직히 말해 봐. 너도 내가 못미더웠지? 그래서 그 새끼가 자문 구한다고 할 때 쪼르르 가서 내 지시는 못들어먹은 척 하고 붙어 먹었었잖아."


"그, 그럴리가요. 제게 있어 최우선 순위는 항상 사령관 님이셨습니다."


"지랄을 한다. 그런 년이 먼저 그 새끼 바지 까내리고 좆이나 물고 자빠져 있었어?"


"그게… 그 때는… 사령관 님께서 그 자를 잘 챙겨주라 하신 지시를 따른 것 뿐인…"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 내가 최우선이라는 년이 먼저 나서서 가슴 까고선 내 가슴 마음에 드시냐고 교태부려 댔던 걸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사,사, 사령관 님. 그 때는 제가…"


"그 새끼가 나중에 애들 잡아오라 시킨 것도 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내가 모를 거라 여기고 뒤에선 보짓구녕 돌려댄 년을 어떻게 아냐고. 씹물 뚝뚝 흘려대던게 기분 드럽게 좋았나보다? ……이 씨발년아… 5년이야… 눈 뜨고 나서부터 늬들 뒷바라지 한게 자그마치 5년이라고."


"…"


"인정 해. 어쩔 수 없이 애들 잡아다 바친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네 이전 행적들을 인정하라고."


"……죄송…합니다. 인정합니다."


"인정합니다는 씨발… …야, 발키리."


"네. 각하."


샬럿과 홍련에게 하던 것 처럼 소리를 지르려던 사령관이었지만 똑바로 두 눈을 마주보는 발키리를 보니 머뭇거리고 만다. 무슨 말을 하든 피하지 않겠다는 그 확연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해져서였고 그 탓에 시선을 피하자 눈에 들어온 것이 시선을 붙잡아서였다. 발키리의 왼 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 사령관과 재회하고 나서 지금까지 끼고 있지 않았던 반지를 지금, 다시 끼운 이유가 무엇인지 뜸을 들여 파악한 사령관은 마침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뭐냐."


"제가 모시는 각하이십니다."


괴롭게 찡그린 표정으로 계속 발키리의 왼 손을 바라보는 사령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게 다야?"


"…"


"말해 봐. 그게 다냐고."


"……"


"자격 운운 지랄 떨지 말고… 그냥 말해 봐."


"……미안해요, 여보."


"…"


"아무 변명도 하지 않을게요. 지켜주지 못했어서 미안해요."





////




"대박. 여보란 단어 처음 들어 봤어요."


능청스럽게 입을 연 나이트 앤젤이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사령관 님 좋으라고 긁은 건 아닌데… 뭐, 이제 좀 개운하세요?"


"아직 다 안끝났으니까 입 닥쳐."


나이트 앤젤과 똑같이 담배를 문 사령관이 귓가의 통신기를 조작했다.


"레이스, 근처에 있지? 튀어 와라."


레이스라는 이름에 쥐죽은듯이 웅크리고 있던 메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사령관은 그런 메이를 바라보다가 나이트 앤젤에게 시선을 옮겼다. 평소였다면 나이트 앤젤을 제압하고도 남았으나 가만히 있던 발키리, 레이스란 이름에 표정을 찡그린 나이트 앤젤. 이 둘을 통해 자신을 긁어댄 속셈을 파악한 사령관은 그녀가 괘씸해져 지금 부터 시작 될 추궁에는 더욱 엄한 잣대를 들이밀기로 마음 먹었다.


담배를 반 쯤 피웠을 때가 되자 내무실의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레이스를 모르는 이라면 그렇게 여겼을 터다. 미세하게 일렁이는 사람 형태의 아지랑이가 사령관과 나이트 앤젤이 마주 앉은 테이블에 다가서자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은폐장을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레이스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얼굴은 한껏 긴장으로 굳어져있었다. 메이와 나이트 앤젤을 번갈아 본 레이스가 눈가를 어색하게 찡그리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령관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거기 앉아."


사령관이 가리킨 곳을 앉으려다 멈춘 레이스는 곤혹스러워 했다. 구도 상 자신이 앉는 곳이 상석으로 보일 자리 였기 때문이다. 끙끙대는 레이스를 보다못한 사령관이 신경쓰지 말라고 말한 다음에야 자리에 앉은 레이스는 양 손은 무릎에, 등은 곧게 펴고서 내무실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몸을 긴장시켰다.


"레이스. 내가 명령했던 거 기억하지."


"기, 기억한다."


"내가 명령했던게 언제인데 보름씩이나 보고를 안 해?"


"그, 그게 그…"


"메이가 어땠는지 보고 해 봐."  

   

사령관의 지시에 레이스는 다시 한 번 메이와 나이트 앤젤을 바라보았다. 메이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나이트 앤젤은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꼬였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곤혹에 우물쭈물 하던 레이스는 마지막으로 애원어린 시선을 사령관에게 보내 봤지만 돌아온 것은 빨리 보고하라는 일갈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은폐장을 작동시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레이스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메,메메, 메이 대장은…"


"…"


"마,많이, 힘,힘들어 해,했했, 했는데…"


"하… 돌아버리겠네 진짜."


나직하게 한숨 쉰 사령관이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 레이스에게 상체를 내밀었다.


"말 똑바로 안 해? 이 사회 부적응자 년아?" "사령관 님!"


"소리 질러? 내가 지금 이딴 년 신경 써줘야 돼!?"


"으…아으…"


"지금부터 말 똑바로 해. 조금이라도 더듬으면 넌 진짜 뒤져. 알았어?"


제빠르게 고개를 여러번 끄덕인 레이스가 은폐장 버튼을 만지작대면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더듬거렸어도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원만히 넘어간 사령관은 잠잠히 레이스의 보고를 받아갔다. 감시를 지시 받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단현상으로 고생했어도 약을 완전히 끊은 것, 그 덕에 의식이 명료해졌으나 주변의 시선을 괴로워 한 것, 때문에 약을 끊은 것이 무색해지게 방에 방에 쳐박혔던 것, 매달리듯이 무단으로 경계를 나선 것, 닥터가 오고 나서 부터는 한 층 더 괴로워 했다는 것, 그랬던 메이가 유미와 만나고서 부터는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해갔다는 것. 마침내 레이스로 부터 모든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다가 메이에게 말했다.


"메이. 고개 들어."


"…"


사령관이 부르는 소리는 또렷했지만 메이는 못들은 척 고개를 들지 않았다. 레이스가 자신의 행적을 낯낯이 말한 것에서 마치, 발가 벗은 채로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한 수치심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기에 좀 처럼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사령관은 그런 메이에게 아주 미약하게 남은 배려심을 쥐어짜 덮어주었다.


"…됐어. 대답이나 잘 해. 메이, 네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으…으윽…"           


"메이. 내가 뭐 지금 너한테 못할 짓 하냐? 왜 대답을 안 해?"


"으아…"


"야!! 오늘 지나가면 더는 기회 없어! 물을 때 대답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용서 해줬으면 좋겠어!? 어!?"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메이를 보다 못한 나이트 앤젤이 외쳤다. 


"사령관 님! 메이가 어떤 상태인지 다 들었잖아요!"


"입 안닥쳐 이 씨발년아!? 내가 지금 너한테 물었어!? 네가 무슨 속셈인지 모를 줄 알았냐? 이 씨발년이 감히 같잖게 날 충동질 해?"


"하…"


"여깄는 년들 끌어내려서 메이랑 동일선상에 세우려고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면 내가 메이를 용서해 줄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으니까 그런거잖아. 그렇지? 암만 급했어도 그렇지 이 씨발년이 열받게… 내가 무슨 게임 캐릭터야? 말 한 두마디에 호감도 오르내리는 데이터 쪼가리야!?"


사령관의 분노를 애써 빗겨보낸 나이트 앤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메이. 일어나요."


"…시, 싫어. 무서워."


"…이게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 말이랑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돼."


에스코트 받는 아가씨 처럼 나이트 앤젤의 손을 잡고 일어선 메이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못하겠으면 그냥 가자. 이제 떠나는 거야."


떠날 준비는 아직 덜 되었지만 메이가 이 내무실을 나선다면 그 때가 바로 떠날 때라고 나이트 앤젤은 결심했다. 그 모든 비난과 멸시가 정당한 것이고 메이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하여도 나이트 앤젤은 더 이상 괴로워하는 메이를 두고 볼 수 없다. 저항군과 오르카, 보급대, 그리고 사령관. 한 때는 메이보다도 우선시 되었던 것들은 이제 모두 뒷전이다. 나이트 앤젤은 오직 단 한 명, 메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다음 다시 한 번 떠날 결심을 굳혔다.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가 메이의 목에서 울렸다. 레이스와 비슷하게 심호흡을 몇 번 깊게 들이쉬고 내쉰 메이는 시선을 들지는 못했어도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사령관. 두서없지만… 나, 나는, 게시판에 적혀있던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냥 소, 솔직하지 못해서… 난, 아, 그게… 사실은 사령관이 힘냈으면 해서…"


힘겹게 문장을 완성하려는 메이의 말허리를 사령관이 잘랐다.


"못 알아 듣겠어. 똑바로 말 해."


 살짝 말을 트니 술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메이는 떨리는 눈을 똑바로 잡아두고서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 실은 사령관이 힘내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어! 이, 있잖아! 나는 평소에 솔직하지 못하단 소리를 많이 들었으니까! 그 새침떼기 같은 구석이 있다고 다들… 그리고, 뭐, 뭐라더라? 아 그래, 츤데레! 츤데레 라고 소문이 퍼졌었잖아? 그러니까… 난 정말로… 사령관이 모두 이겨내길 바랐어. 그러길 바라고 한 말이야. 평소랑 다를 거 없이. 아, 아니야. 평소보단 좀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네. 아하하…"


"…"


"미안해. 사령관. 내가… 못할 짓을 했어."


결국 이런 상황이 온 끝에 기어이 츤데레라는 단어까지 꺼낸 메이는 얼굴이 화끈거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상황만 달랐다면 꽤나 훈훈하게 보였을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게 다야?"


"…어?"


"그게 다냐고."


살얼음 낀 창문을 보며 나직이 말하는 사령관의 목소리에도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진심이 아니었다. 용서해 달라. 이거잖아. 아니야?"


"아, 그… 용서는…"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용서는 아니었어도 적어도 이해는 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지는 못하더라도 제 입으로 고하는 도리를 다한다면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서 너희끼리 작당모의 할 때는 왜 끼어 있었냐?"


그러나 손을 대본다면 시릴 정도로 차가울 것 같은 저 눈과 목소리가 도저히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런 사령관을 본 나이트 앤젤은 급한 마음에 쓸데없는 수를 쓴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고 메이는 옅게 피어오른 용기를 양분삼아 자라나기 시작한 고드름에 의해 서서히 폐부를 관통 당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던 건 둘째 치고 진짜 날 위했다면 적어도 아스널 처럼 누구나가 다 알 정도로 극렬하게 반대하기라도 했었어야지."


"…"


"왜, 네 본심은 그런게 아니었어서 비난 받는게 힘들었어? 멸시 당하는게 견딜 수가 없었냐? 너 지휘관 아니야? 그런 것도 감당 못하는 주제에 저질렀던 거야? 너만 괴로웠냐? 씨발… 야, 메이. 그럼 나는? 내가 그런 꼴을 본 건 어떻게 생각하냐?"


"사령관 님! 이제 됐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흰 떠날게요!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마지막으로 들린 나이트 앤젤의 목소리를 끝으로 메이는 귀가 먹었다. 그렇게 여겨도 무방했다. 더 이상 메이에게 있어 사령관과 나이트 앤젤이 언성을 높히며 다투는 소리는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했고 사령관의 용서를 받지 못함을 직감한 순간부터 발생한 인지의 이상은 청각부터 시작해 서서히 오감 전체로 퍼져갔다.


"메이! 잠깐만요!"


사령관의 내무실에서 도망치듯 뛰어나간 메이를 붙잡으려던 샬럿이 메이를 따라가야 하는가 망설였지만 눈 앞의 상황이 도저히 진정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선뜻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메이에게 미안하다 되뇌인 샬럿은 감히 말릴 생각은 없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눈 앞의 두 남녀가 한시라도 빨리 진정되기를 바랐다.


"어짜피 떠날 꺼 할 말은 하고 갈게요! 당신 진짜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이에요! 샬럿! 홍련은 다 용서 하셨으면서 왜 유독 우리 메이에게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모질게 구시는 건가요!?"


"용서해? 샬럿이랑 홍련을? 아까 내가 한 말 뒷구녕으로 쳐들었냐!?"


"그래 씨발 뒷구녕으로 쳐들었다! 그렇게 까지 하는 메이를 어떻게…! 샬럿이랑 홍련 뿐이면 말도 안 해! 다 알고 있어. 당신, 레오나도 용서하려 들었잖아!"


"씨발년이 못하는 말이 없네? 다시 말해 봐. 누가 누굴 용서해?"


"뭘 모른 단 듯이 말해? 발키리한테 들었어. 레오나를 찾으려 들었다고. 애초에 용서도 안 할 년이었으면 구태여 찾으려 들었을까!? 용서할 마음이 있었으니까 찾으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래 씨발년아! 써먹을 구석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다! 네 대장 같이 쓸모없는 년 보다는 나을거라 판단했어! 왜! 고깝냐? 그럼 씨발 내 탓 하지말고 쓸모없는 년 대장으로 뒀던 네 처지를 탓 해!"


"겁쟁이새끼… 씨발새끼… 너 같은 새끼 떠났을 때도 너 위한다고 개 처럼 굴렀던 내가 한심하다. 너 떠나게 만들었다고 메이 탓하고 뺨 친 내가 병신이야!"


"대장이란 년이 책임 질 생각은 안하고 저 따위로 목숨 부지 하고 있던게 추한거지. 칸의 반만 닮았어 봐. 칸이 어땠다는 줄 알아!? 닥터랑 다크엘븐을 지키고 장렬하게 전사했단다! 그 사냥갠지 뭔지 하는 새끼들한테!"


"살아있는게 뭐가 잘못 된…!" "잠깐! 잠깐만요! 사령관 님!" 


이성을 잃어 직위와 계급은 벗어 던지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던져대던 두 남녀 사이에 불현듯 홍련의 다급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사령관 님. 말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방금 뭐라고 하셨죠?"


폭발해버려 감정 가는대로 마구잡이로 던져댔던 사령관이었기에 홍련이 무슨 말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 타이밍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들었던 사령관은 홍련을 쏘아보여 말했다.


"왜. 너도 나한테 좆같은 구석이 있냐? 너도 한 번 해보게?"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방금 하신 말씀을 여쭙는 겁니다."


"…무슨 말을 말하는 거야."


"칸 소장이 어떻게 됐다고 하셨죠?"


홍련의 얼굴에 어린 불길한 기색으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모른단듯이 말한다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묻는다는 인상에 가까웠다. 그런 홍련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조금 누그러져 숨을 고르느라 뜸을 들이고서 말했다.


"닥터와 다크엘븐을 지키고 전사했다. 라고 했는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사령관 님."


홍련의 두 눈이 사령관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칸 소장은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뭐?"


"칸 소장은 저와 같이 대원들을 대피시키다가 전함과 함께 수장 됐어요. 닥터와는 다른 전함에 있었습니다."


"…샬럿."


홍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키리가 샬럿에게 손짓하며 불렀다.


"각하를 부탁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내무실을 나서려는 발키리를 샬럿이 불러세웠다.


"발키리! 어딜 가려고요?"


"닥터와 다크엘븐을 찾으러 갑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거야…" 망연한 사령관의 말을 등지고 발키리는 내무실을 나섰다.


"닥터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이제 와서 닥터를 파는 이유가 뭐야. 너와는 비교도 안되는 신뢰도를 가진 녀석이야. 너보다는 닥터의 말이…" 


사령관의 말을 끊은 홍련이 두 눈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떨리고 있는 사령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령관 님. 사령관 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이제 와서 제가 닥터를 들먹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말을 믿으셔야 하는겁니다."  


"…"


"칸 소장이 전사했다는 말은 닥터에게 들으신 겁니까?"


"…그래."


홍련이 크로스보우를 장전시키고 내무실을 나서면서 샬럿에게 말했다.


"……샬럿, 부대 내에 경계태세 격상을 전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휘청거리는 몸을 테이블에 올린 두 손으로 지탱하면서 사령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닥터를 찾아."


      

/////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은 1층에 있는 내 방이었다. 


아, 또 다시 나는 이 방에 홀로…


방에 도착하니 영내 방송이 울려대기 시작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춥다. 


창문이란 창문은 다 닫은 다음 커튼까지 쳤는데도 춥다.


춥다.


이불로 몸을 바리바리 싸맸는데도 춥다.


온기.


그래. 온기가 필요해.


온기를 원해.


"…"

  

그러나,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봐도 따뜻해 보일만한 것(?)은 없다.


혹시 몰라 부스럭부스럭 서랍 위를 뒤져봐도 따뜻해 보일만한 색깔(?)은 없다.


드르럭드르럭 서랍 안을 뒤져봐도 따뜻해 보일만한 것은…


아.


있다. 온기.


다행이야. 지금 바로…


온기를 품에 안으려던 차에 불현듯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얘, 메이.'


…? 누구야?


'메이, 나야. 모르겠니?'


잘 모르겠어. 누군데?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날 잊은 거니? 섭섭해.'   


너는…


'응. 나는…'


아, 너구나.


'그래. 나야.'


반가워.


'응. 오랜만이지?'


미안해. 내가 지금 좀 바빠. 좀 있다 얘기 하지 않을래?


'알아. 왜 바쁜지.'


아는구나. 나… 너무 추워.


'괜찮아. 네 손에 들린 그 온기가 있잖아.'


응. 지금 막 껴안으려던 참이었어.


'얘, 메이.'


또 왜?


'알고 있지?'


뭘?


'그건 좀 다른 온기야.'


달라?


'응. 그리고, 네가 잘 아는 온기이기도 하지.'


그런 것 같아.


'정말 괜찮겠어?'


이번엔 뭐가?


'그 온기는 독을 품었어.'


독?


'응. 독을 품은 온기.'


괜찮아.


'그렇구나. 그럼, 갈까?'


어디로?


'어디긴, 네가 잘 아는 곳이지. 그 곳으로 놀러 가는거야.'


놀아?


'그래. 그 온기와 독을 품으면 갈 수 있는 곳에서.'


좋아!


'오랜만이지?'


오랜만? 아, 응! 오랜만이야!


'준비 됐어?'


준비 됐어.


'그럼 손 잡고~ 출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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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ㅎㅇ 오랜만에 왔음


다 쓰고 나니까 내가 이걸 왜 쓰고 있는지 슬슬 모르겠다


뭔가 현탐 온 거 같은데


쨌든 써볼 수 있으면 더 써봄 


잼께 읽어줘욤 ㅂㅂ 퇴고 안했으니 오타나 어색한거 리플로 지적해주심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