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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양 어깨너머로 한번 씩, 총 두번에 걸쳐 머리채를 어깨까지 잘라냈다. 허리를 넘어 둔부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던데다 웨이브가 과하게 져있는 스타일(지금 보니, 잘도 이런 스타일을 여태까지 고수해온 것이 어떤 의미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었다 보니 영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아… 아아…! 이뱀! 이뱀!!"


앞으로 이어질 모든 전투에서는 그 작은 거슬림이 어떻게, 어떤 타이밍에 발목을 잡아올지 몰랐기에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해안의 한 면을 끝에서 끝까지 맹렬히 뛰어다니던 도중에 위험한 상황이 몇 번이나 연출되었다. 상륙함에서 뛰쳐나온 녀석들의 무력은 별로 눈에 띌 것 없는 수준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아…"   


 실은 침착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을, 나는 평소 보다 당장 치르고 있는 전투에 집중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모래사장 한복판에 수북히 쌓인 머리카락에서 찾았다. 초조로 떨리는 손을 손으로 부여잡고나니 한숨을 흘리고 싶은 걸 걸 참을 수가 없어져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가늘게 쉰다. 한심한 년. 아무리 매달릴게 없다 해도 이제는 그렇게나 아끼던 머리카락 따위를 탓하는 건가.


"아직 싸울 수 있는 인원들, 일어나세요."


아, 지금 말투는 조금 냉정했나. 이미 명이 다한 이프리트를 향해 소리쳐대면 일어날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이 절박하게 외쳐대던 브라우니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그런 브라우니를 보고서 속이 캥길 시간도, 해안을 따라 널부러진 시신들을 돌아보며 참담함에 고개를 내리깔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문질러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하나, 둘, 셋… 브라우니와 그녀를 부축 해주는 바닐라까지 하면 남은 인원은 다섯인가. 몸을 놀리기가 영 편치 않았었는데 잘도 이 정도 인원으로 막아냈다고 생각한다.  


"신속히 이동하겠어요. 따라 오세요."


아니, 막아냈다기 보다는 묶여있었다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열 명도 안되던 인원으로 어림잡아 스무 명 내외… 두 개 분대를 막아낸 것은 결코 이 쪽의 화력과 무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다. 해안에 상륙했던 녀석들은 미끼다. 귀로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다소 모자라 보였던 무력이나 화력, 분대 별로 엉성하게 펼쳤던 전술들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알아채지 못하는게 바보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미끼라니, 마치 쳐들어 올 타이밍에 우리가 해안에 있을 걸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무 명 남짓한 것들을 아깝게 미끼로 삼을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다. 예지라도 한 것인가. 사냥 개의 구성원엔 또 다른 아르망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안 돼…"


달아올랐던 몸이 겨울 바람에 식어 다시 차가워졌어도 선명한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유인책, 미끼를 상대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첫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다. 미끼였던 이상, 녀석들은 죽었어도 승리했다. 멍청한 년. 뭘 잘난듯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거냐. 유인책에 대해 다 정리되고 나서 유인책이었다고 깨닫는 것 만큼 멍청한 것도 없다. 바보 같긴… 전투 도중에 알아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폐하의 지시를 이행했어야 했다.


"더 빨리 이동하겠어요! 다들 뛰세요!"


숲으로 들어선지 몇 분이 지났을까. 우거진 수풀과 나뭇가지들이 살결에 생채기를 내는 것도 모르고 나는 두 다리를 채찍질했다. 사냥개들이 미끼를 푼 이유 같은 걸, 이미 당해놓고나서 생각해봤자 동요만 커질 뿐이다. 머리를 비워라. 폐하의 지시 외에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오히려 그 틈새로 불길함으로 점철된 숱한 생각들이 흘러 들어온다. 렌즈에 묻은 이물을 지우려다가 괜히 더 지저분해지는 것 처럼 초조함이 번져나간다.


다리를 박차 속도를 올리고 물수제비처럼 튀어오르기를 몇 번, 뒤따라오는 인원들의 기척이 사라졌지만 멈추기는 커녕 더, 더, 더 속도를 올린다. 이 쓸데없이 뛰어난 몸뚱아리는 그러는 와중에도 나무 하나에 칼로 새겨놓은 표식을 발견했다. 이제 곧이다. 앞으로 서너번 정도 정면으로 도약하면, 폐하께서 준비해 두신 장소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의 도약을 남겨놓고, 나는 본능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측면으로 몸을 내던졌다.


"크윽…!"


처음 느꼈던 것은 육중한 섬광, 혹은 그것과 같다고 착각할 만한 돌풍.


'크르르르…'


뒤이어 느낀 것은 날카로운 공포. 혹은 그것과 다를 것 없다고 여길만한 이형.


내달리던 속도에 비례한 횟수 만큼 구르고서 제빨리 몸을 일으킨다.


숨이 멎고,

바람이 멎고,

눈이 멎는다.


구름이 걷힌다.


"오… 피하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눈을 의심한다.

나무 위, 3m 정도 높이에 있는 가지에서 한 발로 여유롭게 통통대는 존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 나무 아래, 나를 습격했던 존재가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리쬐기 시작한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나는 송곳니.

어둠 속에서 기웃대는 움직임에 맞춰 위 아래로 천천히 물결치는 싯누런 안광.


"…호랑이!?"


진짜인가? 경직된 몸과는 반대로 날뛰기 시작한 두뇌는 눈 앞에 있는 맹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해내려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뭐야? 호랑이 처음 봐?"


경악에 잠겨있을 틈도 없이,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공포가 양 팔을 쩍 벌려 쇄도해온다!


"으윽!"


아슬하게 몸의 감각을 되찾자마자 궤적을 예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다. 

긴가민가 할 때는 일단 보이는대로 대처하는 것이 대체로 정답이라고, 고개를 숙인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허옇게 날선 궤적이 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고,

위로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 이빨 만큼이나 치명적인 발톱에 베여나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캬오오!'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곧 바로 다음 연격이 날아들어온다.

내지르듯이 무게중심을 전방으로 실은 호랑이가 오른 발을 치켜들고,


이번에는 위에서 부터, 


퍽-!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곳을 내리친 자리가 터져올라 눈만이 아니라 얼어붙은 흙 파편까지 휘날린다.    


"이런…! 젠장!"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 뛰고 구르느라 잘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죽는다.

두 앞 발을 순차적으로 내밀어오는 그 움직임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그 무게와 위력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도신이 얇은 레이피어로는 섣불리 막을 수도 없다. 


"칫…!"


하지만 내 레이피어는 출력 무기다. 금속이 아닌 빔으로 되어있다.


"캬아아!'


어떻게든 거리를 벌린 것이 무색하게 직선으로 튀어오른 도약 한 번으로 호랑이의 앞 발이 내게 당도한다.

큰 동작, 두 앞 발을 교차해서 할퀴려든다.


'지금!'


그 앞 발이 서로 지나쳐가는 교차점에,

양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꼿꼿이 고쳐잡고 레이피어를 가져다대면,


쉭-!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린 뒤에, 호랑이의 앞 발은 깔끔하게 절단되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출력 무기의 장점, 방어가 공격이고 공격이 방어다. 무기 그 자체가 공방일체인 것이다!


"헙…!"


그러나 호랑이의 육중한 앞 발은 내 빈궁한 노림수 따위 우습다는 듯이,


"끄아악…!"


레이피어 째로 뚫고 들어와 후려쳐오는 것이다.


"헉… 헉…"


'크르르르…'


신속하게 몸을 일으켜 슬쩍, 곁눈질로 바닥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운이 좋았다. 뒷걸음질 중에 이 돌부리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 호랑이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널부러져 쉰 소리나 내고 있었을 것이다. 팔을 타고 내리던 뜨거운 것이 손바닥에 방울져 뚝뚝 떨어진다. 땀은 아니다. 내 목을 노렸던 발톱은 간발의 차로 빗나가 쇄골에서부터 어깨까지 윗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베어냈다. 운 좋게 넘어지지 않았다면, 이라는 만약의 경우가 뇌리에 닥쳐와 열이 오른 목에 서늘한 감각이 어려온다. 다시 한 번 곁눈질한 돌부리에 무언의 감사를 보내고 소매를 걷어 레이피어를 고쳐 잡으니 이제 막 나무 위에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온 존재, 써니가 어둑한 곳에서부터 들뜬 얼굴을 보여왔다.


"…흐음~"


"…"



숨을 고르고 다시 몸이 식기 시작하자 어깻죽지에 새겨진 발톱자국에서 부터 욱신대는 시린 통증이 점점 선명해진다.


'크르르…'


제 머리를 쓰다듬는 써니의 손은 아랑곳 않고 호랑이는 우뚝 서서 가만히 나를 노려다본다.

레이피어를 뚫고 들어왔던 호랑이의 앞 발은 절단되긴 커녕 털 끄트머리만 살짝 그을렸을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따로 생각할 것도 없지만, 호랑이를 본 순간부터 나무 위의 존재가 써니라는 것은 진작에 알아챘다. 아크로바틱 써니. 그녀는 '홀로그램'으로 된 호랑이를 다뤘었으니까.


"우리 나비, 첫 투입인데도 대단하네?"


그렇기에 처음 습격당한 순간부터 어깻죽지가 베였던 순간 까지, 지금 이 소강상태를 통해 숨을 돌리고 있는 이 순간까지, 그렇게 믿고 싶기라도 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저 호랑이는 분명히 가짜라고 생각했다.


"윽…"


그런데 아니다. 믿을 수 없게도 저건 '진짜'다. 홀로그램 따위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온 사방을 헤집어놓고 내 어깨를 후벼낸 것은 '진짜'다. 

'호.랑.이.' 읊을 기회조차 없었던 그 단어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읊어보니 무슨 특이한 요리의 이름인 것 처럼 들려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진짜 호랑이라니. 습격 당한 여파가 남아 아직도 정신을 다 못차려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더해 오로지 파편적인 지식과 이어받은 기억으로만 알고 있던 존재를 맞닥드린데에서 온 거대한 당혹감이 추가로 내 어깨를 짓눌러온다. 


'잘 알고는 있는데, 모른다.' 말 그대로다. 눈 앞의 호랑이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문장은 없다. 수많던 바이오로이드 중에 진짜 호랑이를 상대해 본 이가 몇이나 있을까. 추측해보건데, 멸망 전부터 생존해왔던 개체들도 맨 몸으로 호랑이를 상대해 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직접 저 흉악한 이빨과 손톱을 맛보고 나니 느껴진다. 머리로는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 보고서 아는 것의 차이는 지금 느껴지는 당혹감 만큼이나 거대하다. 직감한다. 저건 내가 이길 수 없다. 계속해 싸운다면 제대로 된 대처가 가능할지나 의문이다. 대처가 되는데 안 된다는, 말장난 같은 상황이 연이어 벌어질 것이다. 


소름에 가까운 낯선 감각이 온 몸에 퍼져나간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로는 저건 미지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애매한 미지. 이 세상에 애매한 미지라는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공포를 건네온다는 점에서는 미지와 공통분모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옳지 옳지~ 예쁘다, 우리 나비~"

            

계속되는 써니의 쓰다듬에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거둔 나비라는 이름의 호랑이가 이번에는 낮게 그르렁 거리며 흑복 차림의 써니에게 볼을 부비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바스락대는 소리에 반응한 호랑이는 써니가 올라가있던 나무를 시작으로 나무 사이사이를 도약해 눈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늦었다. 빠르게 호랑이와 바톤 터치를 하듯 또 다른 존재가 써니의 옆에 나타난 다음,


"어딜 천치마냥 멍하니 서 있는 게야."


지체 없이 내게 거합자세로 달려들어왔다.


"금란!?"


"창기 따위가 감히!"


틀림없다. 이 녀석은 금란이다. 전술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렸어도 그 특유의 자세와 손에든 환도, 말투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레이피어에 환도를 맞대고서(도신에 특수한 코팅이라도 된 것인가?) 고개를 들이미는 금란은, 내 입에서 제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 몹시 불쾌하다는 기색을 부릅 뜬 눈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내온다. 부릅 뜬 눈? 그러고 보니 이 금란, 멀쩡히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예의 오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더더욱 눈에 힘을 주어 미간을 잔뜩 찌푸린 금란은 마스크에 억눌려 보다 위협적으로 내리 깔린 목소리로 말해왔다.


"범 새끼에게 쩔쩔매는 이 따위 것에게 암사자라는 코드명을 붙인게야? 엔지니어도 유난을 떨었군."


"범 새끼라니! 우리 중에 제일 강한…! 아, 아니지. 두번 째로 강한 애거든?! 그리고 내 아들이거든!?"


근처에서 검격이 얼마나 맞부딪히든 신경쓰지 않던 써니가 팔뚝에 두른 차크람을 휘휘 돌리다 말고 소리쳤다.


"되었다. 다물어라, 광대. 그만 노닐고 어서 이 창기의 목을 거둬라. 한시가 바쁘다."


탕- 탕탕-


밀어붙여오는 금란을 뿌리치고 목을 노리려던 찰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총성과 함께 공포에 물든 비명이 숲에 울려퍼져 온다.


"흠~ 여기는 대충 정리 됐나. 좋아. 나비는 지금부터 식사 할 것 같으니까 좀 거들어줄게."


써니의 날렵한 손짓에 거대한 한 자루의 차크람은 중앙부가 쪼개져 두 개의 반원이 되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부메랑 처럼 날아든 차크람이 도달한 곳은 정확히 내가 위치한 곳의 상공, 날아든 차크람을 쫓듯 써니가 그 지점까지 도약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금란에게 틈을 주지 않고 찌르기를 내지르고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어딜!"


찌르기를 가볍게 받아쳐낸 금란이 한 번 회전하여 종방향으로 환도를 휘두른 뒤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회전한다.


"뭣!"


우아하게도 보이는 몸짓은 칼춤의 그것을 연상케 했지만 한 번 더 회전한 뒤에 날아든 것은 칼이 아니었다.


"망할!"


금란의 손에 들린 것은 돌격 소총, 환도는 어느새 칼집에 수납되어 등에 매달려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사격 자세를 취하고 조준해오는 금란, 손이 방아쇠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탕-!


쐐액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뺨을 스치고 귀를 훑었고,


"이리 와!"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 뛰어나간 경로를 공중에서부터 돌진해 온 써니가 가로막는다.


캉-! 


차크람에 의해 후려쳐진 레이피어는 징과 같이 울려 손잡이까지 떨려온다. 확신한다. 이 녀석들, 처음부터 나를 노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력 무기에 대비책을 세워뒀을 리 없다. 

차크람에 짓눌려 지직대는 검신이 굽이친다.       


"표정 봐라? 왜 그렇게 심각해?"


반원이었던 두 자루의 차크람은 결합부에서 새로 날이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인지, 어느새 각각 완만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두 자루가 되어 크기만 작아졌을 뿐, 모양은 그대로인 차크람을 아크로바틱이란 단어 그대로 곡예처럼 휘둘러온다.


목, 어깨, 미간, 안면. 중간중간 무릎을 노려오는 변칙적인 공격까지. 틈이 없다. 화려하게 제비를 돌아가며 휘두르기라도 하면 궤적을 온전히 읽을 수도 없다.


"큭…!"


써니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금란을 신경쓰지 않을 수도 없다. 한 합을 겨룰 때 마다 거리가 벌어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드는 탄환. 사격을 의식해 합을 겨루고 거리를 좁혀 들어가면 제빨리 환도로 바꿔잡아 차크람의 궤적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공격을 보조한다.

기계와 같이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이 협공은 한 두 번 합을 맞춘 수준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무엇을 상대로 합을 맞춰 온 것일까.

생각 할 것도 없다. 역겨운 것들. 오르카의 동료들을 죽여오며 맞춘 것이겠지. 

 

"헉… 헉…"


이대로 가다간…


'섬멸 프로토콜 활성화. 현 시간 부로 전 대원의 위치가 공유 됩니다.'


불현듯 기계음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오자 두 사냥 개의 협공이 멎었다. 거리를 벌린 금란과 써니는 각자 자신의 손목에 장착한 시계와도 같은 장치를 응시하고 있다. 방금의 목소리는 인공지능일까. 뭐가 됐든, 마침 잘 됐다. 손은 슬슬 저려오기 시작했고 숨은 금방이고 넘어갈 듯이 차올랐었으니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지친 기색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주의하면서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뒤 사냥개들의 태세를 살핀다.


"강철이 내려왔나 보군." 금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섬멸… 인가. 진짜 마지막이긴 마지막인가 보네." 아쉽다는 눈매를 지어보이며 흑복의 소매를 걷고, 장치에 입을 가져다댄 써니가 말했다.


"여기는 광대. 현재 암사자와 대치 중. 순조롭게 제압될 것으로 예상되니 지원은 필요 없어."


'야! 광대가 뭐야! 마지막이니까 코드명은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그 발키리도 막 불러대는데!' 장치 너머로 톤이 높고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닥쳐라, 흑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헛짓거리 말고 빨리 네 년의 임무나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렇게나 대장한테 졸라대서 따낸 역할이 아니더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써니 대신 대답한 금란의 눈매가 아니꼬움에 잔뜩 찌푸려졌다.  


'딱딱 하기는~ 걱정 마. 준비물도 제대로 챙겼으니까. 아~ 기대 되는 걸~'


"교신 종료. 꺼져라."


무심하게 손목의 장치를 매만지고서 내게 고개를 돌린 금란은 소총을 집어던지고 눈매를 따라 호를 그리며 천천히 뽑아든 환도를 밑으로 늘어뜨렸다. 이미 화기를 사용한 주제에 뒤늦게 나마 칼 대 칼이라는 구도로 무인으로서의 예를 찾으려는 것인가. 한가하게 받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그럴 거라면 소총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써니까지 물러야 할 것이다. 의외로 올곧은 호승심을 가진 타입인지 소총을 다시 집어들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잘만 하면 일 대 일로 맞붙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된다면, 둘 모두 제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지.       


"그 라비아타에 필적 한다더니, 제법 하는구나. 범 새끼를 상대할 때와는 달라. 그래, 범을 상대 해 본 적은 없었던 게냐?"


새끼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써니를 밀어내면서 금란이 한 발 짝 다가온다.


"…"


"물으면 답을 해야 할 것이 아니더냐. 아니면 무엇이냐? 설마 적에게 입을 열 가치 따윈 못느낀다, 뭐 그런 것이더냐?"


흥, 암사자래 봤자 일찍이 창기였던 천박한 년이. 그 말에 부아가 치밀어올라 몸이 튀어나갈 뻔 했지만 그래선 안 된다. 뻔히 보이는 도발이다. 지금은 돌파할 구석을 찾아야 한다.


"아, 됐어. 우리 금란 씨 또 무게 잡으려고 하네. 아까 급하다며?"


끼어든 써니의 태세로 보아 역시, 일 대 일 대결 따윈 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뭐 당연한가. 애초에 기대 따윈 해서도 안됐지만 하지도 않았다. 


"그럼 싸게싸게 끝내야지."


스릉- 


한 팔은 아래로, 한 팔은 머리 위로 위치한 써니의 차크람 위로 달빛이 매끄럽게 흐른다.


"후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던 비명은 멎은지 오래다. 같이 숲으로 들어섰던 대원들의 지원은 기대 할 수 없다. 이 둘을 달고서 숲을 빠져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만에 하나 빠져나가더라도 오히려 전세가 불리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 중에서도 폐하와 마주치는 것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창기였더라도, 갈 때 만큼은 순수한 한 떨기의 꽃잎이 되거라."


저항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가볍게 무시한다. 써니와 금란의 사이, 아주 작게 난 틈을 응시한다.


"눈깔 굴려대는 것 봐? 급해?"


저려오던 손에 힘이 돌아온다. 힘이 풀려 이완됐던 두 다리가 다시 긴장한다. 

폐하가 지시하신 곳, 참조점.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온갗 함정과 폭발물을 설치해둔 그 곳이다.

아니, 그 곳 뿐이다. 그 곳 이외에 가능성은 없다.

해보자. 이 들개들아. 이판사판이다.


"죽어!"


달려들어오는 차크람은 위에서부터. 

횡 베기.


"흡!"


날을 빗겨세워 차크람을 흘려내고 역으로 파고든다.


"꺄악!"


자세가 무너진 써니를 들이받고서 직선으로, 온 힘을 다해 튀어올랐다.


"서라!"


뽑아든 환도와 함께 금란의 목소리가 뒤쫓아온다. 


설까보냐. 잡고 싶거든 따라와라.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내게 둘씩이나 붙어 준 것이 잘 된 일이구나 싶다.

그래, 내가 누구인가. 그 총사대의 대장 샬럿이다. 당연히 둘은 되야 성에 찬다.


개들을 상대하면서 어지간히도 목적지와 떨어진건지 몇 번이고 도약해 날아도 참조점은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도약하던 와중에 있을리 없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린듯했다. 

필시 귓가에 날아드는 바람소리를 착각한 것이겠지만 착각이면 어떤가.

착각이었기에 나만이 들을 수 있었던 소리라면 분명 나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마지막 도약의 순간, 나는 한겨울에 존재할 리 없는 풀벌레에게 예를 갖춰 감사의 말을 읊조리고 두 다리를 박찼다. 

   


//

 



통신기로 받은 지시에 따라 다시 돌아온 병영에서 알비스와 합류 한 뒤, 곧바로 4층의 사령관 님이 사용하던 내무실로 향했다.


"아르…!"


없다.


"망…"


허망하게 중얼거린 이름의 주인은 내무실에 없었다.


"몽구스 팀! 병영에 있지! 여기는 레이스! 들린다면 즉시 응답 바란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있던 사이에 다시 통신기가 울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연신 몽구스 팀이라 외쳐대던 레이스는 이내 홍련이라 외쳐대기 시작했다.


"말씀하세요."


"지금 바로 연병장 전체를 상공을 포함해 경계해주길 바란다! 위화감이나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띈다면 지체말고 바로 사격해야 한다!"


"경계사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녀석을 놓쳤다! 나와 동일한 개체가 병영으로 향할거다! 모습은 보이지 않겠지만 찾아낼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 으, 은폐장을 거둔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 보충하자면, 흑복 차림에 처음보는 전술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녀석이다. 눈에 띄면 즉시 사살해야 한다!"


"위협이 되는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주세요."


버릇이 나왔다. 당연한 걸 물은거지만 언뜻 들으면 바보 소리 듣기 딱 좋은 질문이었다. 위협 포인트나 요소 따위를 따질게 어디에 있나. 그들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 레이스의 말대로 발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사살해 버리면 그만이다.


눈에 띄게 말을 더듬지 않게 된 레이스가 다소 차갑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내 말투는 아랑곳 않고 내 질문에 답했다.


"맞붙는 중에 섬멸이 어쩌고 하는 걸 들었다! 타격유도다! 그 놈들, 섬에 뭔가를 떨어뜨릴 생각이다! 가능하면 사살하는 것 뿐만 아니라 화기에 달린 표적지시기 까지 파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어도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고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미호나 드라코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레이스? 타격? 작전과 전투에서 내가 고수해오던 냉정함과는 비교도 안 될 김서린 얼음 송곳이 흉부 중앙에 꽂힌 듯 했다. 감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항군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유도를 받아야 할 정도의 고화력 무기를 사냥개라는 놈들은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이 지경이니 보유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가. 레이스의 통신대로라면 아르망을 찾는 데에 시간을 허비 할 수는 없다.


"몽구스 팀. 주목."


내무실을 나서자마자 둘 뿐인 대원들을 집중시키고 한 번씩 바라보았다.    


"드라코는 지금 바로 병영을 나서서 연병장 방향으로 나있는 식당의 외벽으로 가세요. 연병장을 한 눈에 담되, 반드시 후방에 외벽을 끼고 있어야 합니다. 미호는 옥상으로 향하세요. 도착하면 지상 보다는 공중을 경계할 것. 옥상으로부터 위 아래로 3m 정도의 높이를 주시해 줘요. 목표는 은폐장을 작동 중인 적성개체, 레이스 입니다. 은폐장의 특징은 알고 있죠? 기묘한 위화감이나 이질감이 들거든 지체 없이 해당 지점에 사격할 것. 상황이 급하니 추가적인 부연 설명이나 자세한 개요는 필요하다면 통신으로 전파 하겠습니다. 이상이에요."


"엄마, 엄마는 어쩌게?"


평소라면 엄마라는 호칭은 삼가라고 야단쳤겠지만 지금 그게 대수인가. 섬 곳곳에서 미약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총성에 비하면야 엄마라 불러대는 드라코의 목소리는 꾀꼬리와 다를 게 없다. 


"병영 근처에 있는 대원들을 모아 신속히 재편성 하겠습니다. 그 다음 곧바로 지원 할게요."


"알았어."


"홍련 언니. 아르망 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나, 그리고 지시대로 움직이려던 드라코와 미호 까지 알비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대원들은 내 지시와 맞닥드린 상황을 통해 짐작하고서 말을 아꼈겠지만 알비스는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알비스. 아르망을 찾을 시간은 없어요."


아무렇게나 지어낸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알비스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안 돼! 찾아야 해!"


쏘아보는 알비스의 표정과 말투는 단순히 떼를 쓰는 아이의 그것이 아니다. 기관단총을 고쳐잡은 손과 굳은 눈은 일종의 결의를 품고 있고 떨림 없이 맞물고 있는 입술에선 물러서 주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맞다. 잊고 있었다. 이 아이도 일단은 군인이었지. 


"…"


일단은, 이라고? 미친 년. 이 아이는 감히 너 따위가 은연 중에라도 내리깔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나와 비교해서, 혹은 이 곳에 생존해있는 오르카의 모두와는 달리 더러운 티끌이나 흠집 하나 묻지 않았고 사령관 님께 상처를 준 적도 없는 가장 깨끗한 존재야. 그 사령관 님 마저 이 아이에겐 온 신경을 집중 해서 주의한다고. 오물투성이인 네가 그 같잖은 냉정을 내보일 존재가 아니라고.


얼른 고개를 저어 머릿 속에서 욕지거리를 폭격해대던 또 다른 나를 지운다. 그 폭격의 내용물은 모두 사실이기에 애써 부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 같잖다는 냉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손짓으로 대원들에게 이동하라 지시하고 다시 알비스에게 말했다.


"아르망은 이 병영에 없을… 거에요. 그러니 알비스. 저와 함께 가요. 남아있는 대원들을 모으면서 찾아보는 거에요. 어때요?"


"없을 거에요, 잖아.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됐어! 난 홍련 언니랑 안 가. 아르망 언니를 찾아서 바로 사령관 님한테 갈 거야!"


"알비스!"


도도도 하는 발소리를 내면서 복도를 달려나가기 시작한 알비스는 내 외침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속도를 올려갔다.


그리고,


투쾅―!! 콰앙―!!!!


다시 내 발 밑 까지 날아왔다.


"……뭐?"


울려오는 이명에 청각이 차단되고, 터져나온 파편과 먼지가 시야에 내려 앉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된거냐 하면…


"윽…"


천장이 내려 앉았다. 아니, 내려 앉았다기 보다는, 폭발하듯 뚫려버렸다. 알비스의 바로 앞쪽에서. 정말 아슬한 차이였다. 알비스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려나갔다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 되돌아 올 일 없이 그 자리에서 저 무너져내린 천장과 하나가 되어 뒤섞여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ㅁ! ㅇ ㅓ… 마!"


바로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를 반복하는 드라코를 빤히 바라보다가 불길한 확신을 갖고서 그 무너져내린 천장 아래에 퍼져있는 먼지구름을 향해 크로스 보우를 겨눴다.


"으…!"


다행이도 큰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닌지 끙끙대며 일어선 알비스가 나와 대원들과 같이 전방에 화기를 겨눈다. 뚫려버린 천장에선 시멘트 가루와 파편이 수도에서 졸졸 새어나오는 물처럼 흘러내려 자욱한 먼지구름이 더 짙어지는 것에 몫을 거들고 있었지만 먼지구름이 얼마나 짙든, 선명하게 떠오른 불빛 한 쌍은 점점 명료해지더니 천장 쪽으로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 불빛, 호박색을 머금은 이글거리는 불빛이 명멸한다. 차분하게, 아주 느긋한 속도로. 실루엣 뿐이었지만 대원들 모두가 저 움직임이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지시한 적도 없는데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격 중지!"


라고 버릇 처럼 외쳤지만 실은 사격을 멈추지 말았으면 했다. 지시도 없이 사격을 시작한 것도 이해했다. 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을 것이다. 먼지구름과 안광이 점점 옅어져갈수록, 그에 반해 아른거리던 거대한 실루엣이 차근차근 확실한 형태를 잡아갈수록 서서히 변해가는 복도의 기류가 대원들의 총구를 당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


복도… 아니, 병영 전체를 울려댄 충격에 의해 깨져버린 창문에서 세찬 밤바람 한 뭉치가 들이닥쳐 옅어져가던 먼지구름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마침내 그 먼지구름에 숨겨져 있던 실루엣의 주인이 드러난 순간, 가장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제압해야 한다.'도 '지시를 내려야 한다.'도 '후퇴해야 한다.'도 아니었다. 지금이 바로 전투와 관련된 판단과 연산이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그 따위 것들은 눈 앞의 존재가 선사하는 공포와 중압에 먹혀버린지 오래였으니까.


유일하게 떠오른 것은, 의문.


"음… 적당한 것이라 해서 뭔가 했더니."


여기는 4층, 이 위는 옥상이다. 


"전함에서 봤던 녀석들이군."


그런데도 저 존재는 위에서부터 떨어졌다. 


"스카디…?"


그 말은, 옥상을 뚫고 천장을 뚫어서 이 복도에 내려 앉았다는 것인데,


"몽구스 팀이라는 이름이었지?"


그 키르케나 닥터의 말대로 규격 외의 존재라지만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설마. 제 아무리 뛰어난 신체를 가진 바이오로이드라도 단 한 방에 병영의 외부부터 뚫고 들어온다는, 그런 질떨어지는 농담 같은 행위가 가능할 리 없다.


"그, 그거…"


조준을 당하고 있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른 팔에 달린… 파일 벙커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스카디가 허망한 미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아, 이거 말인가? 요정 마을에서 노획한 것이다만, 쓸만 한 것 같아서 한 쪽만 빌렸다. 불가사리라는 녀석이 쓰던 것이었지."


철컹-


그 말을 끝으로 파일 벙커의 말뚝을 되돌린 스카디는 불가사리라는 이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다는 듯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 없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


역시, 맨 몸으로 뚫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는가. 그렇다해도 이 녀석들은 정상이 아니다. 파일 벙커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옥상째로 뚫고 들어온다는 행위는 여전히 비상식적으로 느껴진다. 그 뿐인가. 나는 이 사냥개라는 것들이 당연히 특수전을 상정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녀석들은, 적어도 이 스카디가 보여오는 작전 양상은 절대 특수전이라고 부를 수 없다. 멍청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무모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되어버린 상식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눈 앞의 스카디에게 대입해보려는 나는 얼마나 더 멍청한 것인가.    


칠흑 일색의 흑복과 유일하게 눈만 가리지 않은 전술 마스크 차림에서 느껴지는 기계적이고 무기질적인 공포. 그것이 선사하는 중압을 이겨낸 드라코가 한 발 접근하면서 스카디에게 물었다.   


"불가사리는 어쨌어…!?"


"죽였다."


드라코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굵고 짧게 대답한 스카디는 알비스를 바라보고 있다.


"…흠."


"뭐, 뭐야! 거기서 비켜! 아르망 언니를 찾아야 해!"


기관단총을 겨눈 알비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안 쪽으로 오므린 두 다리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스카디에게서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는 알비스가 가상하게라도 느껴진 것인지 눈매가 풀어진듯 보이는 스카디는 귓불 쪽에 있던 마스크의 끄트머리를 톡하고 건드려 이목구비 전부를 드러내었다.


"……몽구스들. 제안 하나 하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여유롭고 육중한 걸음걸이로 스카디가 서서히 다가온다. 


"머리 뒤로 손 깍지끼고 엎드려! 지시에 불응할 시 사살하겠다!"


방패에 걸쳐둔 산탄총을 들이미는 드라코를 스카디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당혹감이 가시고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고 바라보니 이 스카디, 내가 알던 스카디와는 완전히 다르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을 잘 살펴보니 신장은 내 기억 속의 스카디와는 다르게 월등히 크고(라비아타 이상 일지도 모르겠다.) 제조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영양이 투입된 것인지 노출 하나 없는 복장으로도 그 위협적인 근육의 윤곽과 크기가 다 숨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온 몸을 뒤덮는 흑복에 가려  제대로 확인 할 수는 없었어도 몸에 두르고 있어야 할 웨어러블 컴퓨터라고 부를 만한 장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며 인상은 표표해서 시종일관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그 얼굴과는 겉모습만 같을 뿐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선택 해라."


"다가오지 마!"


"이 곳에서 모두 죽을지."


"엎드려!"


"아이만은 살려 보낼지."


탕!


드라코의 산탄총에서 터져나온 탄환들을 오른 손을 들어 가볍게 막아낸 스카디는 표표하게 서서 알비스를 본다.


"생긴 것 만큼이나 급하군. 걱정 마라. 아이는 몰라도 너희를 살려보낼 생각은 없으니."


"…나, 나는…!"


"음?"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 알비스에게 고개를 갸웃거린 스카디가 알비스의 이어질 말을 재촉하듯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


"싸울거야! 이 괴, 괴물아! 죽더라도 같이 죽을거라고!"


"후후… 그래. 그렇구나."


알비스의 대답에 흐뭇한 웃음으로 답한 스카디는 오른 팔을 휘휘 돌려 풀고서 장착했던 파일 벙커를 해체해 바닥에 떨궜다.


"할 수 없지.

…용서하렴, 아가야."


퉁―


뒤로 쓰러지듯 몸을 튕긴 스카디는 도약 한 번에 반대편의 복도 끝 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옥상을 박살내고 침투해온 것에 비하면 놀라울 것도 없어서 나는 차분하게 대원들의 진형 수정을 명하고 연산을 통해 이어질 상황을 예측하고자 자세를 숙였다.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온 신경을 머리에 집중하자 시선이 향한 복도 바닥의 한 면이 은은한 푸른 빛으로 물들어간다. 


"미호! 사격!"


지시를 내린 것과 거의 동시에 뒤편에서 부터 총성과 바람을 가르는 탄환의 소리가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그 일련의 과정 끝에 탄환이 목표물로 잡은 스카디는,


"잡았어…?"


제빠르게 얼굴 앞으로 들어올린 왼 손을 다시 내리고 있었다.


뗑그랑-


미약하게 들려오는 맑은 쇳소리에 당황한 미호의 기색이 등 뒤로 부터 느껴진다. 


"미호! 계속 사격 해!"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와 방패를 쳐들고 전진하기 시작한 드라코는 거의 동시였다.


그에 뒤이어 나와 알비스가 함께 화기를 쳐든 그 순간,


퉁―!


그 거구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헉…!"


다시 나타난 곳은 드라코의 전방. 그 덩치에 걸맞게 마냥 느릴 거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거리를 벌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십미터 떨어져있던 드라코에게 날아든 스카디는 돌풍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파캉―!!


공간 자체를 짖누르는 듯한 질량. 그에 비례하는 괴물 같은 속도.

그 두가지를 합하여 만들어낸 선풍을 두른 오른 손이 드라코의 방패에 작렬하자, 


펑―!


공기가 폭발했다.


"억…!"


드라코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매인 신음은 유언이었다.

방패 째로 깔끔하게 뜯겨나간 팔은 방패와 함께 썰매 처럼 미끄러지다 등 뒤의 복도 저만치까지 나뒹굴었다.


"……어?"


라는 망연한 외마디가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미호는 나보다 조금 더 나았는지 


"드라코!!"


즉사한 이의 이름을 외쳐대며 치켜든 소총을 지근거리에서 다급히 발사해 대느라 쉼 없이 손을 놀리고 있다.


"꺄아악!"


그러나 이… 괴물은 별 것도 아니라는 것 처럼 악몽과 같은 속도로 거리를 좁혀 그 말도 안되는 완력을 가진 팔로 미호를 쳐들어올린다.


"놔! 놔!!!"


쏴야 하는데…이 빙결 볼트를… 

쏴야 해! 지금 당장!


그런데, 누구한테 쏴야 하지?

스카디? 먹힐까? 피스톨도 아니고 저격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을 잡아대는 저 괴물한테?

아니면, 미호? 그래. 미호다. 지금 당장 미호한테 쏴야한다. 정확히 미간에 맞춰서 한 방에 보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꺄아아악! 엄마!!!"


나는,

쏴야한다고, 지금 당장… 반드시 쏴야 한다고 되뇌이고는 있지만…

떨리는 손이 좀 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아아아! 아아아악!"


손과 팔을 버둥대는 미호는 뭍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와 다를 것이 없다.

미호를 바닥과 수평으로 붙잡아올린 스카디의 양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미호의 외침은 고통을 머금은 찢어질듯한 비명이 되어 복도를 울렸다.


"아아아아아악―!"


쩌적-


옷가지가 끊어지는 소린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산채로 살덩어리와 골격이 분리되는 소리였다.

허리가 찢어져 두 개로 분리 된 미호.

상체에선 내장이 꾸물대며 줄줄 흘러나오고 하체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다음, 덕지덕지 매달려있는 찢기다 만 살점이 처량하게 덜렁거렸다.


"…"


산채로 찢어죽인다는 말은 멸망 전의 기억 속에서 몇 번이나 들어왔던 표현이었다.


"미, 미…"


그러나 설마, 그저 위협이라고만 생각했던 찢어죽인다는 그 표현을 실제로 가능케하는 이가 있었을 줄은.


…그 아르망에게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꽤 뛰어난 연산능력을 가지고 있다. 활용법도 달랐다. 나는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의 확률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어떠한 상황에서든 돌파구를 마련하는 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연산은 어디까지나 연산. 이런 상황에서 이런 괴물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는 그 따위 연산이 무슨 소용인가. 잘못 됐다. 처음부터 잘못 되었던 것이다. 같잖은 냉정을 품고 눈을 시퍼렇게 빛냈어야 할 게 아니라 단 한 발만 적중시켜도 좋으니 빙결 볼트를 쏟아부었어야 했다. 그렇게 전투의 순간 순간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행위를 취했더라면 확률과는 전혀 상관없는 천운에 기대어 승리한다는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었다.   


"컥…"


미호였던 두 살덩이를 바닥에 던지고 달려든 스카디의 손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한 무리의 우두머리라 조금은 기대 했었는데 이거야 원, 한심하기 짝이 없군."


목젖이 으스러지고 목구멍이 통째로 터져나갈 것 같은 완력이 자비 없이 숨통을 조여온다.


"어떻게 된 것이냐, 홍련. 전함에서 네 손으로 네 동료들을 잡아들였을 때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나 절박하고 필사적이었던 녀석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으극…그흑…"



"꽤 자주 중얼거렸지.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주인에게 따른 것이라고. 아니, 거짓말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저항 한 번 못할리가 없지 않은가. 뭐… 결국엔 그런거지. 넌 네 목숨을 가장 우선시 했을 뿐인거지. 아까 내가 팔에 둘렀던 파일 벙커 기억나나? 네가 아이라 부르던 불가사리란 녀석이 쓰던 것 말이다. 내가 그 불가사리에게서 어떻게 노획한 것인지 말해줄까."


"꺼어억… 꺽…"


"그 불가사리란 녀석 말이야. 제법 배짱이 있더군. 남다른 정신력을 가졌다고 해야하나. 우리 자매들에게 둘러싸여 희롱 당하는데도 기죽는 일 없이 그 말뚝을 겨눠왔어. 그래서, 내 친히 자비를 베풀었지. 모든 자매들을 물리고 일 대 일로… 네 아이, 불가사리는 정정당당한 결투 끝에 명을 다했다. 다른 자매들이 노발대발 하던 말던 내가 직접 장례도 치뤄주었지."


아… 의식이…


"그런데 넌 뭘 하는 거냐. 몽구스인 너희들에게 우리는 독사가 아니냐. 아이라고 부르던 녀석들에게 작전관 소리를 듣던 녀석이 꼬리내린 토이푸들이 되어서는… 쯧." 


멀어진다.


"너는 죽이지 않겠다. 지금 당장은."



///



의식을 잃어 축 늘어진 홍련의 손에서 크로스 보우가 떨어졌다.


"흥."


그럼에도 홍련이 모두 듣고 있을 거라고 여긴 스카디는 코웃음 치고서 홍련을 들쳐매 자리를 막 뜨려던 참이었다.


탕! 타타탕!


연발로 날아든 소구경 탄환을 간단하게 피하고서 알비스에게 단숨에 날아든 스카디는,


"아가야."


기관단총만을 빠르게 쳐내고 알비스에게 눈을 맞추고자 몸을 숙였다.


"대단한 용기구나. 이 한심한 빨간 머리와는 비교하는게 미안 할 정도야."


"이익! 저리 가!"


미소 짓는 스카디와는 달리 분노한 알비스는 눈 앞의 존재와 처참한 복도의 상황에도 기죽지 않고 주먹 쥔 손을 힘껏 내지른다.


퍽-


"…"


기세는 좋았지만 그 뿐이다. 스카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일은 없었다. 주먹과 뺨에서 울린, 좋게 봐주더라도 갸날프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타격음은 알비스에겐 한층 더 큰 분노와 스멀거리며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절망을 선사했고 스카디에게는 아이에 대한 더욱 큰, 연민과 닮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감각을 뺨에 선사했다. 


퍽- 퍽- 퍼억-


참을 수 없다. 지지 않겠다. 연달아 날아드는 주먹과 스카디의 눈에 비친 알비스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듯 했다. 스카디는 들쳐맨 홍련을 내려놓고 제 입장을 잊은 듯 제거해야 할 적인게 분명한 아이를 어르고자 감싸안듯 양 팔을 벌렸다. 연민을 느낀 것은 아니다. 때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때려도 좋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아. 이렇게 받아준다는 것 자체가 연민을 느낀다는 것 아닌가?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아 아리송해진 스카디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라도 받아주어 아이가 자신을 너무 원망하지만 않게 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스카디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장이 안다면 또 무르게 군다고 한 소리 할 것이 뻔했지만 그 정도 쯤이야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헥… 헥…"


제 풀에 지친 알비스가 다시 힘겹게 들어올린 손을 맞잡고서 스카디가 말했다.


"필사적이구나."


"놔!"


"금방 놔 줄 테니 가만히 있으렴."


혹시라도 맞잡은 손이 다칠까 신경써서 힘조절을 한 스카디가 다시 말했다.


"아가야."


"…"


"내가 너희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너는 분명 방패를 쓰는 아이였지?"


"…맞아."

               

"잠깐만 있어라."


손을 풀고 알비스의 뺨을 한 번 쓰다듬은 스카디는 먼 발치에 나뒹굴고 있던 드라코의 방패로 단숨에 도약했다.


"…"


방패의 손잡이에 걸쳐져 있는 드라코의 팔을 빼낸 스카디는 다시 한 번 단숨에 알비스의 앞까지 도달했다. 스카디가 몰고 온 돌풍에 알비스가 움찔하여 스카디도 움찔했지만 알비스가 알아채지는 못했다.


"받아라. 아직 쓸 수 있을 거야."


방패를 내밀면서도 이 아이에게는 좀 큰 것이 아닌가 싶은 스카디였지만 아까 보여준 능숙한 사격실력을 생각한다면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스카디 앞에 선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 것인지 알비스는 머뭇거리면서도 내밀어오는 방패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러나 스카디의 우려대로 괜찮았던 것은 처음 뿐, 방패의 사이즈가 그 아담한 신장과 영 맞지 않아 살짝 휘청거리고 있다.


"음… 잠깐만 다시 줘 보겠니?"


당황한 탓이었을까. 조금은 다정하게도 느껴질 법한 말투로 알비스에게 말한 스카디는 알비스에게서 방패를 받아들고 높게 들었다.


"…흐읍!"


방패의 하단부를 우그러뜨려 떼어내자 그럭저럭 아이가 다룰 수 있게 됐다고 여긴 스카디는 다시 알비스에게 방패를 건넸다.


"자, 가라."


"…뭐야. 넌 나쁜 놈이잖아. 갑자기 왜 이래?"


드라코와 미호를 자비 없이 죽이던 모습과 알비스 본인에게 대하는 태도의 갭에 다시 경계심이 피어난 알비스가 방패를 들이밀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다만…"


고개를 내리깐 스카디는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아이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수복실에서 만났던 소녀를 떠올렸다.


"…"


알비스는 아주 잠깐 무언가 떠오른게 있는 것 처럼 찌푸렸던 표정을 풀었지만 뒤이은 스카디의 말에 다시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 건물은 곧 폭발해 사라질거다. 그러니, 어서 벗어나라."


바닥에 뉘였던 홍련을 들쳐맨 스카디가 깨진 창 너머로 보이는 숲을 가리켰다.


"벗어나거든, 네 주인에게 가거라."


그 말을 끝으로 스카디는 사라졌다.

알비스는 멍하니 스카디가 사라진 창가를 바라보다가 방패를 등에 매고서 병영의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




"샬럿. 샬럿?"


확인차 교신해봤지만 통신기 너머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발키리. 어디 있어?"


마찬가지다. 발키리도 응답하지 않는다.


"…"


뭔가 잘못 됐다.


어딘가 먼 곳에서 섬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총성이다.


"젠장…"


일일히 주변을 경계해가며 움직일 시간은 없다.

비스듬히 올리고 있던 소총을 등에 매고 속도를 올렸다.


"후우…"


적막하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차단되어 있는 다른 세계의 일이라도 되는 것인지 이 숲에 이는 것은 스산한 바람소리 뿐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무와 수풀은 늪과 같이 느껴져 헤치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하하…"


이런 식의 감상을 품어 본 것이 언제적 일이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아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곧바로 이런 상황에서 웃냐고 나 자신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썩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기에 넘어가 줄 수 있지 않느냐고, 이 숲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바람을 통해 능글맞게 속삭인다. 


"씨발…"


나는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걸까.


"…"


잘못된 걸까? 이상하다. 나는 발키리와 재회하고서 이곳까지 달려오며 겪은 것들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들이라고 되뇌였을 터였다. 그러니 이런 자문은 해선 안된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 내가 선택한 것이지 않은가?


'또 도망치는 건가요?'


"아."


이미 죽어버린 나이트 앤젤의 목소리가 들린 듯 하여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환청이라니, 갈 때 까지 갔군. 그래, 혹시 모른다. 갈 때 까지 갔다고 여기지만 보다 더 아득한 곳 까지 떨어져 버린걸지도. 그 사실을 나만 모르는 걸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진다. 나이트 앤젤이나 발키리는 그런 내 꼴을 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


콰직!


나뒹굴고 있던 애꿎은 나뭇가지를 즈려밟아 부쉈다.

진정해. 스스로를 타이른다. 이 나뭇가지가 무슨 죄야. 그냥 발에 치였을 뿐 원래부터 이 숲, 이 자리에 있던 것에 불과 해.

나뭇가지는 죄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저 끓어오르기 시작한 화를 억누르지 못해 분풀이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씨발! 씨발!"


그렇다. 잘못한 것은 나다.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분노의 발작에 휩싸여 이미 바스라진 나뭇가지를 온 힘을 다해 짓밟는다. 놀랍다. 나는 이렇게까지 분노 할 수 있는 인간이었는가. 코헤이 녀석들을 쳐죽였을 때도 이렇게까지 분노하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것은, 이 분노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그녀들에 의해 눈을 뜬 그 날 이후로,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다.


나뭇가지가 완전히 바스라져 가루와 다를게 없게 되자 겨우 갈피를 잡았다. 이 분노가 향하는 곳은 나 자신이다. 한 번 중심을 잡으니 그 다음은 술술 넘어간다. 나 자신을 능멸할 온갖 문구들이 뇌리를 가득 채워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지고 귓가에 펄펄끓는 쇳물이라도 부어넣은 양 머리가 뜨거워진다. 한 발 떨어져서 본다면 몸에서 김이라도 새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씨발새끼. 개병신새끼야. 지금이라도 대답 해. 나이트 앤젤이 던진 무수한 질문 중에 단 하나라도 대답해 봐.   


'나는 그 해안에서 떠나오면 안됐어.'


"…"


또다. 이 미친 놈. 몇 번이고 반복해온 짓을 또 하고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후회하고 또 후회 했으면서.

또 다시.

그녀들에게 느끼지 말아야 할 죄책감에 물들어간다.


그리고 또 다시, 두 번 다시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혼자 개지랄을 떨겠지. 그러나 그것도 한 때다. 어짜피 일주일도 안가 또 다시 또 다시, 내가 내뱉어 오던 말에 따르면 느끼지 말아야 할 후회와 죄책감에 허우적 거릴게 뻔하다. 나란 놈은 학습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새끼인가. 혹시 오르카를 떠나오면서 뇌 한 구석 어딘가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용서가 안된다. 후회든 죄책감이든 뭐가 됐든간에 한 가지에 대해 학습을 한다면 두 개를 습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말이다. 이건 아마 먼저 간 LRL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나는 씨발 나쁜 쪽에 일방적으로 편향된 학습을 해왔다. 이런게 어떻게 씨발 최후의 인류…


빠직-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큰 나무 하나를 돌자 방금 전에 밟아댄 것 보다 얇은 나뭇가지가 발에 밟혔다. 그리고,


"어라?"


노래하는 듯한 천진한 목소리가 숲에 퍼졌다.


"와아…! 드디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웃자란 수풀 속에 있었다.


"드디어 찾았어!"


달빛을 받아 보다 선명히 떠오른 얼굴은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안녕! 인간 오빠!"


진심으로 기쁜듯 양 팔을 들어보였다.


그 양 팔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가 있는 방향으로 떼구르르 굴렀다.


"…"


바람이 멎는다.


구른 것은 보급대의 대원들. 

경계근무를 서던 번호미상의 브라우니와 실키의 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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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왔음


진짜 마지막 파트긴 한데 쓰다보니 길어지네 ㅜㅜ


야스씬이랑 똑같이 전투묘사 해본 적이 없어서 참 많이 헤맸음 심심해도 이해 해 줘


ㅂㅂ 또 봐 어색한데나 오타 있으면 알려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