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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스가 표정을 흐렸다.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병영은 향해선 안되는 장소가 되었다는 걸.


"폐하."


"앗! 아르망 언니! 기다리고 있으라 했잖아! 위험하다니깐!"


목소리를 따라가자 웃자란 수풀 속에 아르망이 있었다.

무사했구나. 급하게 병영을 나서느라 신경 쓸 수 없어 걱정 되었는데 다행이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아르망은 맥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되 시선을 맞춰오지는 않는다.

왜 그런지 안다. 허나 그런 것에 짓눌려 있어야 할 것은 아르망이 아니다.


"아르망. 가자."


"폐하… 저는…"


죄악감은 내 몫이다.


"빨리 벗어나자."


아르망의 말을 끊고 손을 잡았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고로 추기경 씩이나 되는 이의 고해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시간도 없다. 


"폐하!" "각하!"


아르망의 손을 이끌고 가려던 그 순간, 숲을 좌좌좌좍 하는 미끄러지는 소리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양 방향에서 들려왔다.


"발키리, 샬럿."


성격이 고약한 누군가가 짜놓은 것 같은, 위기를 넘긴 다음에야 동료들이 합류한다는 만화 같은 상황에 헛웃음이 나올 뻔 했다.  

각각 반대편에서 달려나온 발키리와 샬럿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쓰러져 있는 캐럴을 바라보다가 각자 동시에 말했다.


"각하. 서둘러 섬에서 탈출하셔야 합니다." "폐하. 어서 섬에서 나가셔야 해요."


"대원들은?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됐어?"


"각하."


발키리가 굳은 시선을 보내왔다. 대답을 귀로 들을 필요는 없는 듯 했다.

꽤 격렬한 전투들을 벌였던 것인지 발키리의 소매는 붉게 얼룩져 있었고 샬럿은 절단이라도 당했는지 오른 팔에 옷가지를 찢어 묶어놓고 있었다. 들어보니 샬럿은 금란과 써니,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 '진짜 호랑이'를 상대했고 발키리는 …발키리를 상대 했다고 한다. 



"너희는 괜찮은 거냐? 더 움직일 수 있겠어?"


괜찮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구태여 물은 것이 그녀들에게 채찍질이라도 해버린 것 같이 거북하여 둘을 제대로 마주볼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 괴로워 고개를 떨궜다. 여유가 없어 표정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날 게 뻔했고 숨길 자신도 없었다.


"보트는 이쪽입니다. 어서 서두르시죠."


"그래. 가자."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다. 사냥개들에게 물려 줄 생각은 없고 그 사냥개들을 만든 그 미친새끼의 독선에 휘말릴 생각도 없었다. 누가 누굴 멋대로 구원하는가. 내가 왜 그런 미친 놈에게 동정을 받아야 하냔 말이다. 됐다. 파고들고 이해하려 들면 머리만 아프다. 일단은 움직인다. 생존만을 도모한다면 아직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른다. 


앞장서는 발키리를 뒤 따라 한 발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폐하?"


시야 한 구석에서 무언가 꿈틀거린 것 같아 나는 다시 훽 하고 몸을 돌렸다.


뒤따르던 샬럿이 의아하다는 고갯짓을 해보이더니 내 시선을 따라온다.


"그아아…갸아아아…"


나뭇가지나 풀떼기가 흔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쿠크리를 늑골에 꽂아 넣은 다음 숨이 멎은 것 까지 분명히 확인했다. 그런데,


"캬하아아악…!"


"폐하!"


어째서 저 사냥개가 다시 꿈틀댈 수 있는 것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되물었다. 어째서 움직일 수 있지? 그 답은 캐럴의 손 언저리에 있었다.

헝클어진 하얀 눈 바닥 위에서 홀로 노랗게 빛나 이질감을 내뿜는 물건이 하나.

모양은 다소 달랐어도 그것이 앰플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전투자극제…!"


"기기긱… 그극… 그윽…"


인간의 구강으로 칠판긁는 소리를 낸다면 저런 소리가 나겠다고 생각할 법한 기괴한 신음을 흘리는 캐럴이 기묘한 움직임으로 하체는 미동도 않은 채 상체만을 일으켰다.


"키이이… 히히… 히히힉…"


악몽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캐럴의 온 관절이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방향으로 사방팔방 뒤틀렸다. 뚝- 뚜둑- 우드득- 어찌나 심각하게 꺾여들어가는지 눈을 감으면 빼빼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이라고 느껴질 끔찍한 괴음이 생생히 들려온다. 


비상식적이다. 정말로 비상식적이다. 이 개새끼들이 모든 면에서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광기의 산물이라는 걸 지금은 끔찍하게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적응 될만도 한 저 비상식은 도무지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비상식에 적응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분수 처럼 토해내는 피. 우글거리는 살덩이에 밀려나오는 탄환. 눈가 언저리에 선명히 드러난 팽창된 핏줄들과 충혈 된 눈.

전투 속행만이 아니라 쾌속 수복까지… 저 앰플이 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일반적인 전투자극제는 아니다. 깊게 생각 마라. 저 비상식적인 괴물에게 어울리는 비상식적인 물건이라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눈에 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더 시간 죽일 여유도 없다. 저 캐럴은 금방 일어날 것이고 다시 일어난다면 이길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이긴다 해도 또 저렇게 고장난 구체관절인형 마냥 온 몸을 뒤틀며 또 다시 일어나겠지. 확실하게 목을 끊어놨어야 했나? 아니, 생각해 봐야 부질 없다. 지금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다. 


"뛰어!"


내 신호에 맞춰 발키리를 선두로 모두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망에게 받아든 피스톨을 캐럴에게 한 발 박아넣고 나는 일행을 뒤따랐다.


달은 숨었다. 구름의 색과 모양으로 보건데 오늘 밤은 두 번 다시 그 고개를 내미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





'연병장 제압 완료. 타격유도는 순조롭게 진행 중.'


'경계지 및 초소 소탕 완료. 잔당을 정리하겠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통신을 조용히 받아넘기던 팬텀은 해안을 산책 중이었다. 방금까지 살벌하게 몰아치던 바람과 눈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고 격하게 굽이치던 바다는 요람 속의 아이 처럼 울음을 그치고 잠에 들려하고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팬텀은 해안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섰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게 걷는데 이상하게 초조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여긴 탓이었다. 이윽고 초조함은 발을 넘어 손과 목 까지 차올랐다. 작전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는데 이상하군. 팬텀이 나직이 중얼거리고 고개를 저었다. 초조해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일생일대의 목표와 소명의 완수를 목전에 두고 그 누구도 떨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일생일대라. 이런 거창한 표현을 쓰기엔 자신이 살아 온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아닌가 하여 팬텀은 드물게 피식 웃었다.


슬슬 때다. 이제 곧 그녀가 올 것이다. 

오르카의 기술자이자 과학자. 참모.

사냥개의 지휘관.    

주인님의 진정한 이해자.


"오셨습니까."


잔잔해진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던 팬텀이 고개를 돌렸다.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팬텀과는 또 다른 종류의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팬텀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가운을 건넸다.


"확인 차 묻겠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입니까."


"…공적인 질문이니? 아니면 네 개인적인 질문?"


"사적입니다. 제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버릇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해를 바라는 시선으로 말하는 팬텀에게 그녀가 말했다.


"난 닥터야. 그러니 걱정 마. '팬텀'."


팬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이면서도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가 대단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휘관 님."


"……"


"지휘관 님?"


손에 쥔 검은 가운을 바라보던 닥터가 퍼뜩 몸을 튕기고 가운을 걸쳤다.


"너무 오래 잠들어 계셨지요. 아직 부작용이 다 가시지 않으신 듯 합니다만…"


팬텀이 말했다. 말투엔 우려와 걱정이 어려있었다.


"아냐. 괜찮아. 그리고 팬텀."


"네."


"난 잠들어 있던 적 없어."


알고 있잖니. 받은 걸 되돌려 준다는 듯 닥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죠. 실례했습니다. 종종 잊게 되는군요."


닥터 앞에서만 보이게 되는 머쓱한 태도에서 진지함을 되찾은 팬텀이 닥터에게 할당 된 사냥개의 장비를 건넸다.

닥터는 장치를 손목에 장착하고 패널을 띄워 활성화 된 프로토콜이 보내오는 신호를 바라보며 팬텀에게 말했다.


"흑토의 생명반응이 소멸… 아, 다시 소생 됐네. 얘는 진짜…"


닥터는 질린다는 얼굴로 집게 손가락을 미간에 가져다댔다. 차라리 베로니카나 리리스 처럼 떠나주는 편이 더 도움이 됐지 않을까 싶었지만 캐럴은 그 둘과는 달리 최소한의 통제는 가능했고 본인도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주인님의 방침을 생각한다면 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방지축에 짐승 같은 기질은 어디 안간다고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쳐대긴 했지만 전투에서 활약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참 곤란한 아이야. 닥터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 정도 활약을 해왔으니 사냥 개의 비공식 돌격대장 역을 맡는 거겠지. 거기에 다른 대원들과 차별화 하기에 충분한 인간에 대한 남다른 집착까지. 확실히 제 몫을 해줬기에 오늘 날을 순탄히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늘 이런 패턴이다. 쳐낼까 하다가도 결국엔 다시 참작해주게 된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닥터에게 팬텀이 헛기침을 했다.


"캐럴이 쫓고 있겠구나."


"그럴 겁니다."


"마지막이네." 닥터가 말했다. "팬텀도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부하의 노고를 치하한 닥터가 마지막 명을 내렸다.


"어서 가. 유령. 네가 직접 나서 줘. 캐럴이 엄한 짓 못하게 막아주고. 그리고…"


"네."


오빠를


"인간을."


구해 줘.


"잡아 와."


그 말을 끝으로 닥터는 장치를 조작하면서 걸어온 곳을 되돌아갔다.

가만히 서서 닥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배웅한 팬텀은 한 겨울 밤의 유령이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



"으햐햐햐햐햐햐!!"


사령관의 일행이 숲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하고서 수 분. 인간과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듯한, 웃는건지 우는건지 분간이 안되는 괴성이 숲에 메아리 쳤는가 싶더니 금새 뒤따라 붙어 온 캐럴은 이제 막 사령관을 시야에 포착한 참이었다. "찾았다! 오빠!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오빠!! 캬햐햐햐!!" 자신을 참 애타게도 불러대는 괴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사령관이 발견한 것은 무게 중심이 과하게 앞으로 쏠린 자세로 미친듯이 뒤쫓아오는 캐럴이었다. 왜 사냥개라는 이름을 붙인지 알겠다고 질색한 사령관은 이대로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가속해오는 캐럴에게 금방 따라잡힐거라 생각하여 옆에서 달리던 알비스를 들어안고 방패를 등에 매었다.


"알비스! 쏴 버려!"


사령관의 양 어깨를 거치대 삼은 알비스가 좌우로 휙휙 튀어대는 한 쌍의 붉은 빛을 따라 점사했으나 자세가 불안정하고 몸이 위아래로 들썩였기에 영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너지!? 나한테 다짜고짜 쏴댄 년이! 이 좆만한 년아! 넌 반드시 찢어죽인다!" 지그재그로 달리는 캐럴이 얼마나 빠른지 추격경로에 쌓인 눈이 휘날리는 것을 흡사 눈보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탕-! 타탕-! 타타타탕-!


위협에 기죽지 않고 다시 호흡을 고른 알비스가 보다 신중히 총구를 겨눴다. 어지간히 빠른 캐럴을 따라 총구를 옮겨대기 보다는 딱 정중앙에 왔을 때를 노리기로 한 것이다. 좌, 우, 좌, 우. 감겨있는 왼쪽 눈의 긴장을 풀고 머금은 숨의 3분의2만 내뱉고서 속으로 타이밍을 가늠하던 알비스는 다섯 번 째로 캐럴이 우측으로 향할 때 방아쇠를 당겼다.


탕-!


왼 쪽 어깨를 명중 당해 팽이 처럼 몸이 돌아간 캐럴이 숲을 나뒹굴다가 나무에 충돌했다. 속도가 속도였던지라 어둠 속에서도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강한 충돌이었다. 됐어! 고양감을 느껴 표정이 밝아진 알비스였지만 곧바로 어둠을 뚫고 날아들어와 방패에 꽂힌 토마호크를 보고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사령관이 자신을 안아들지 않았다면 이라는 끔찍한 만약을 생각한 알비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총에 피격 당해 느려지기는 커녕 더욱 빠르게 추격해오는 캐럴에게 다시 총구를 겨눴다.


"이야하하하하! 도망쳐라 도망쳐!!"


검은 토끼, 줄여서 흑토. 처음엔 동료들이 자신에게 붙인 이 코드명을 캐럴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사냥개에게 잘 쳐줘 봐야 사냥감 밖에 안되는 동물을 빗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같이 뚱해 있던 캐럴을 보다못한 스카디가 입을 열었다. '캐럴. 검은 토끼가 뭘 상징하는 줄 알아?' 토라져 대답도 안하던 캐럴에게 스카디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검은 토끼는 불행을 상징 해.'


"우효오오하하하! 검은 토끼가 쫓아간다! 검은 토끼가 쫓아 가! 입에 불행을 머금은 검은 토끼가 너희를 쫓는다아!"


그런 훈훈한 일이 있은 뒤, 흑토라는 코드명을 흔쾌히 받아들게 된 캐럴은 자신의 상징을 유감 없이 오물들에게 퍼뜨렸다. 흑토는 특별했다. 자신의 동료들 중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신력과 무모함을 가진 흑토만이 사용 할 수 있던 일회성 장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닥터가 만들어준 개량형 전투자극제. 투여하면 신체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그 스카디와도 맞먹을 정도로 신체능력이 상승하지만 엄청난 부작용의 후폭풍이 뒤따르는 위험한 물건. 


"오우오우오우오우오우!"


그 물건이 흑토를 특별하게 했다. 사냥개들 중 남다른 정신력을 가진 흑토만이 유일하게 그 부작용을 온전히 견뎌낼 수 있었다. 흑토가 전투자극제를 처음 사용했던 날, 흑토는 직감한 것이다. 이것은 나만을 위한 장비다. 이것을 사용하면 완전한 검은 토끼가 된다. 이것을 사용한 나야말로 진정한 나다.


"간다간다간다간다아!!"


그리고 오늘, 다시 진정한 검은 토끼로 탈태한 캐럴은 끊임없이 뇌가 수축되고 이완되는 듯한 감각 속에서 광기를 두르고 환희에 젖어 달빛이 내려앉은 눈 덮인 숲을 질주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마침내, 불행을 전해줘야 할 마지막 오물들만이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저 년들만 잡아 죽이면 정말로 끝난다. 그렇게 되면 저 인간은 내 것이 된다. 주인이 내려준 소명 따위 관심 없다. 나는 인간과 교미만 할 수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미래를 그리자 캐럴은 안그래도 넘치는 힘이 더욱 샘솟는 것 같았다.       


"이런 씨…"


총을 몇 발이나 맞든 멀쩡히 쫓아온다는 알비스의 말에 사령관이 혀를 찼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지척에서 뛰고 있던 아르망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샬…! 발키리! 아르망을 들고 뛰어! 이러다 따라 잡히겠어!"


"꺄악!"


양해를 구하는 일도 없이 아르망을 들어올리는 그 모습은 언뜻 보면 공격하기 위해 쇄도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발키리가 이렇게나 신체능력이 뛰어났던가. 아르망을 들쳐매 속도가 떨어지긴 커녕 오히려 더 빨라진 것 같아보이는 발키리는 부상을 입은 것도 잊은 듯 했다. 


탕-! 타탕-!


"사령관 님! 이제 마지막 탄창이야!"  

                   

탄창을 결합하는 소리가 사령관의 귓가에 울리고 빈 탄창이 어깨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알비스! 달라붙지만 못하게 견제 해!"


"오빠아아!!!"


"오빠라고 부르지마 이 괴물아!"


꽤나 달렸다. 알비스를 안아 들 때를 제외하고는 멈춘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해안은 좀 처럼 모습을 드러내긴 커녕 오히려 무질서하게 난립한 나무들의 숫자만 늘어가 슬슬 제 속도를 내기가 힘들어져간다. 방향을 잘못 잡았나? 달리면 달릴 수록 숲이 무성해져가는 것 같아 사령관은 속도를 유지하며 주위를 살폈다.  


"각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달리면 됩니다."


기다려 마지 않은 말이었지만 사령관이 그 말을 반색하는 일은 없었다.


좌측면, 커다란 나무 서너 개 정도 너머의 한 지점에서 이질감이 일었다. 아지랑이가 연상되는 일렁임. 공간이 물결치는 듯한 위화감. 숲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달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시야 정중앙에 고정된 액자 처럼 계속 포착되고 있는 그 아지랑이가 무엇인지 알아챈 사령관은 일행들에게 외쳤다.


"조심 해!"


경고가 떨어진 바로 그 다음, 나무와 나무를 세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윽!"


소음기에 부착 된 격발음에 맞춰 몸을 움츠리자 샬럿이 막 지나친 나무에서 파편이 튀었다. 


"씨발!"


사령관이 욕지거리를 내뱉길 기다렸던 것인지 아지랑이가 빛을 띄더니 점으로 모였다가 하나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팬텀…!"


나무 위, 2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무와 나무를 도약하여 추격해오는 팬텀이 다시 총을 겨누려던 때에 사령관과 시선을 마주쳤다.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눈썹을 들썩인 팬텀은 머뭇거리다 총을 허리춤에 수납하고서 도약하며 양 팔을 빠르게 펼치고 교차해 오므렸다.   


"으윽!"


팬텀으로 부터 여러 줄기의 빛이 쏘아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자 샬럿이 마른 신음을 흘리며 하나 뿐인 팔을 어깨에 가져다 댔다.

쑤욱- 깔끔하게 삼각근 언저리에 박힌 투척용 단검을 뽑아들고 투박한 자세로 팬텀에게 되던진다. "다들 내 옆으로 와! 열을 맞춰서 뛰어!" 자신을 의식하여 화기에서 단검으로 선회했음을 알아챈 사령관은 일행들을 팬텀과 떨어진 우측에 두고자 좌측 바깥으로 경로를 옮겼다.


"옷! 오옷! 오우오옷! 오오옷!"


팬텀만이 아니라 나 또한 있는 것을 잊지 말란 모양새로 뒤쫓아오는 캐럴은 또 다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짧고 묵직한 기합과 함께 맹추격하여 사령관에게 거의 근접했다.


탕-! 타탕-!


난이도 높은 사격을 통해 알비스가 쏜 세 발이 전탄 훌륭하게 명중했다. 그러나 의미는 없었다. 각각 대퇴와 흉부, 얼굴을 가린 손바닥에 명중했으나 캐럴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시 따라붙는다. 저 괴물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탄환이 저지력을 상실한 것인가. 시시각각 따라 붙는 미친 년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대장이라는 팬텀까지 가세했다. 게다가 이젠 한계다. 몸에 연결 된 계기판의 초침은 십 수분이 넘는 시간 동안 운행기록계의 한계점을 침범하고 있었기에 몸의 곳곳이 삐걱대고 있다. 폐와 심장이 경종을 울려대고 다리는 쌓여있는 눈에 방해받아 평소의 곱절은 되는 피로로 부하가 걸려 더 이상 내딛기도 힘들었다.


"각하!"


뻐억-!


"크악!"


돌연 알비스의 고개가 뒤로, 사령관이 달리는 방향으로 휙 젖혀졌는가 싶더니 등에 맨 방패를 통해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으으윽…"


앞으로 날아가 엎어지기 직전의 순간, 사령관은 알비스를 끌어안고 몸을 휙 돌려 방패를 지면으로 향하게 했다.


"인간 오빠아!!"


눈과 방패 덕에 충격을 최소화한 사령관은 품에 안은 알비스를 제빨리 옆으로 밀어 던지고 등에 맨 방패를 앞으로 꺼내 들어올렸다. 


떠엉-!


"으헉!"


화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탄 방패로도 온전히 흡수해내지 못한 충격이 또 한 번 손잡이를 통해 사령관에게 전해졌다. 온 힘을 다해 사령관을 들이받은 캐럴은 기괴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띄우고 방패 너머로 보이는 사령관에게 고개를 들이민다. 눈가와 관자놀이에 일어난 팽창된 핏줄은 편형돌물 처럼 꿈틀댔고 목과 입은 무리한 수복 과정에서 발생한 출혈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그 피가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굳어버려 마치 불쾌한 구리빛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오빠! 발 엄청 빠르네!? 응!?"


"이 역겨운 개새끼야! 뒈져버려!"


허리춤에서 뽑아든 쿠크리가 허공을 갈랐다. 여유롭게 피한 캐럴은 전투를 몸소 가르쳐주겠단 태도로 손바닥 위에서 휘리릭하고 노닐던 토마호크를 고쳐잡았다.


"아… 이런 오빠는 싫어. 못 된 오빠는 벌을 받아야 해. 맞아맞아. 어짜피 캐럴의 개가 될 테니까 지금부터 미리 차근차근 훈련 하자? 알았지 오빠? 첫 훈련은 배변 가리기 부터…"


"떨어져!"


레이피어를 쳐들고 쇄도해온 샬럿이 캐럴을 밀쳐냈으나 곧바로 캐럴에 의해 들어매쳐져 땅에 고꾸라졌다. 


탕-! 타탕-!


사령관과 거리가 벌어진 캐럴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 보다도 빠르게 알비스가 떨군 기관단총을 집어든 발키리가 거리를 좁혀가며 신중히 사격했으나,


"윽…"


샬럿의 어깨에 박혔던 것과 똑같은 단검이 어둠 속에서 날아들어 발키리의 대퇴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쉭- 쉬쉭-


발키리가 쓰러지자 탄환과는 또 다른 예리한 그 소리가 연이어 아르망을 노렸다. 아르망은 가슴께에 들이닥친 격통에 주저앉아 다시 대치하기 시작한 캐럴과 사령관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의식을 잃고 눈을 감았다.

 

"오빠! 이리 와!"


주변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침을 질질 흘려가며 추격해오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찬찬히 먹잇감을 살피던 토끼가 마침내 한계까지 압박된 용수철 같은 뒷 다리로 지면을 박차 사령관에게 달려들려던 때였다. 쉬쉭- 들려선 안 될 예리한 소리가 자신에게 향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캐럴이었지만 이미 팬텀의 단검은 캐럴의 팔 관절과 손, 어깨와 무릎에 꼿꼿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다렸다는 듯 목에 들이밀린 환도와 차크람. 이성이 날아가 오직 사령관만을 바라보던 캐럴은 평소라면 진작에 느끼고도 남았을 금란과 써니의 기척을 전혀 알아 챌 수 없었다.


 같은 사냥개들에게 제압 당한 캐럴을 등지고 스크래치 같은 잔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팬텀이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인간 님."


"…"


"저희 대원이 과했군요. 너그러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팬텀이 무어라 지껄이든 전혀 들리지 않던 사령관은 손에서 힘을 뺐다. 들려있던 방패와 쿠크리가 힘 없이 처량하게 바닥에 떨어지고 세찬 겨울바람이 불어 숲을 뒤흔들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들은 픽셀들이 정교하게 구현해낸 디스플레이 속 화면인 듯 했고 금란과 써니를 이어 숲의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와 스카디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라 픽셀들로는 구현해내지 못할 만큼 실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팬터어엄!!"


몸에 박힌 단검들을 털어내는 것에 가깝게 뽑아낸 캐럴이 일어서려던 것을 금란과 써니가 다시 눌러 제압했다. 팬텀은 자신을 불러대는 캐럴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오직 두 눈에 마지막 인간만을 담았다. "내꺼야! 내가 잡았어! 그 인간은 내꺼라고!" 분노로 가득 찬 캐럴의 목소리는 마주 보고 있는 사령관과 팬텀에게 있어 별세계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숲은 고요하다고 봐도 좋았다.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찬찬히 고개를 돌려가던 사령관과 시선을 맞춘 각 사냥개들이 차례로 팬텀과 같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그저 우뚝 서있기만 할 뿐, 적의를 드러내며 팬텀 앞에 나서지도(심지어 호랑이마저도) 그 베로니카 처럼 추잡한 단어들을 읊는 일도 없었다. 한동안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패배했다는 무력감이 다시 한 번 들이친 겨울 바람 처럼 사령관의 온 몸을 훑었고 수 분 정도 지나 다시 변덕을 부려 모습을 드러낸 달을 신호로 팬텀이 소매를 걷었다. 팬텀의 눈에 비친 사령관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었기에 충분히 배려했다고 생각한 팬텀은 입가에 손목을 가져다댔다.


"인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작전코드 구원을 전송한다. 구원. 마지막 청소가 완료 되었다."





///////




"이런 씨이발!! 칼 한 번 조온나게 안들어쳐먹네! 야! 스카디 이 씨팔년아! 다른 거 가져와!"


사령관의 일행이 목표로 했던 정박지가 접한 해안에 분노에 찬 고성이 메아리쳤다.


짜악!


분에 못이긴 캐럴이 막 새 칼을 가져온 스카디의 뺨을 쳤다. 까치 발을 들어올리면서 까지 온 힘을 다해 쳤기에 살을 울리는 소리가 착륙해 있는 수송기 까지 들려왔다.  


"내가 칼 갈아두라고 했어 안했어. 어?! 대답 해! 이 씨발 덩치만 쓸데없이 큰 년아!"


"미안해. 캐럴."


손에 든 칼을 버리고 스카디에게서 새 칼을 받아든 캐럴이 눈 앞에 무릎꿇고 있는 포로, 보급대 최후의 브라우니의 머리채를 잡아올렸다.


"가만히 있어라. 응? 눈에 힘 똑바로 주고."


목에 나있던 칼집에 새 칼을 들이밀고 캐럴은 중단 됐던 분풀이를 다시 시작했다.


"으그윽그으윽!"


슥- 스슥- 톱질하듯 캐럴의 손이 움직이자 해안은 으스스한 한기가 도는 도축장과 같은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고기가 절단되는 익숙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얼마안가 검붉은 피가 포로의 목에서 넘쳐흘러 누구나가 절로 귀를 틀어막을만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이곳엔 그 끔찍한 소리에 못이겨 귀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냥개들이야 딱히 신경쓰지 않았고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포로들은 모두 손이 결박 당했기에 시각을 가려봤자 차단된 오감 하나를 메우듯 민감해진 청각을 통해 저도 모르게 브라우니의 비명을 뇌리 속에서 시각화 하고 만다.


"게에에엑! 케헤엑!"


칼이 목을 절반 쯤 파고 들어가니 포로에게서 기침과 엇비슷한 소리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산채로 썰려 목구멍이 날아가고 성대가 뭉개지는 감각이란 목감기로 인해 간질거리는 느낌과 닮은 걸까. 죽을 땐 모두 저런 표정을 짓게 되는 걸까. 나도 곧 저렇게 되는 걸까. 얼마 되지 않는 포로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단념한듯 입을 다물고 있거나, 울거나, 사시나무 떨듯 떨거나. 근처에 있는 사냥개들에게 살려달라 애원 하는 등, 하나 같이 모두가 캐럴의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아오! 씨발!"


잘 갈린 칼날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죽음을 머금은 기침 소리를 내던 브라우니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끝에 가서는 비곗살 발라내듯 목을 잇던 얇은 살점을 끊어내어 목이 떨어졌고, 캐럴은 손에 들린 브라우니의 머리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씨발! 씨발! 씨발년의 팬텀 년아! 아아아아악!"


퍽- 퍽- 팬텀에 대한 분노를 담은 캐럴의 군홧발이 브라우니의 머리를 사정 없이 짓밟아 뭉갠다. 브라우니의 머리가 팬텀인 양 밟고, 밟고, 또 밟는다. 치아가 부서져 튀어 나오고 안구가 덜렁거린 끝에 떨어져 나가도 캐럴은 영 성에 차지 않았고 분이 가시기는 커녕 되려 차분해질 정도로 머리 끝까지 열이 올랐다. 고개를 돌린다. 남은 포로는 일곱. 칼에 묻은 피를 손을 튕겨 대충 걷어낸 캐럴의 눈에 흰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래, 저 쥐좆만한 년만 아니었으면 난 지금 쯤 인간과 이 섬을 나가 어딘가에서 한창 교미로 열을 올리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목적으로 탄생된 존재인데. 그렇게만 됐다면 목적 실현에서 오는 충실감을 한껏 맛볼 수 있었을 텐데!  


"고개 들어."


알비스의 앞에 선 캐럴이 허리춤의 토마호크를 오른 손에 쥐고 말했다.


"히히히. 이것 봐라?"


알비스는 고개만 드는 것에 끝나지 않고 아예 일어서서 캐럴을 쏘아보았다. 캐럴의 눈에는 알비스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 귀여운 외모 때문에 뾰로통해 보이는 아이의 인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속에 숨겨져있는 의연함이 너무나 못마땅하여 왼 손을 치켜들었다.


짜악-!


"눈 깔아."   


짝-!


"눈 깔아!"


"…"


세 번째로 알비스의 뺨을 강타하기 위해 치켜든 캐럴의 손목이 날아든 거구에 의해 붙들렸다.


"…너 지금 뭐하냐 스카디?"


"그만…"


"뭐?"


"그만 해."


어렵사리 캐럴과 눈을 맞춘 스카디에게 캐럴은 당황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옛부터 캐럴에게 있어 스카디는 자신의 유일한 벗과 같이 느껴졌고 때로는 하인과 다름 없기도 했다. 가벼운 농담 부터 짓궃은 장난까지 뭘 하든 전부 받아주었고 때로는 감정을 주체 못해 짐승같은 기질을 여과없이 드러내더라도, 그렇게 되어 토마호크가 몸 어딘가에 박히는 일이 있더라도 스카디는 캐럴에게 최소한의 분노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이 결코 없었다. 즉, 호구였던 것이다. 얘는 바보인가. 스카디의 사냥개 답지 않게 멍청할 정도로 착한 그런 부분이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캐럴이었지만 생체 샌드백 취급을 당해도 괜찮은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단정지었던 캐럴은 오늘 날 까지도 스카디를 제 기분과 감정에 따라 마구잡이로 휘둘러왔다. 그랬기에 지금, 자신의 팔을 잡고 놔주지 않는 스카디의 사나운 표정이 낯설었다.


"이… 씨발… 이거 안 놔?"


"아이는 건들지 마."


"놔라."


"아이는 건들지 말라고!"


"놔!"


탕-!


오른 손에 들린 토마호크가 캐럴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스카디의 팔에 내리꽂히기 직전, 총성이 울렸다.


"야, 캐럴. 적당히 좀 하지? 마지막 까지 와서도 난리난리 개난리를 쳐대니?"


"저건 또 뭐야?" 캐럴의 화살이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발키리에게 향했다. "너도 뒤지고 싶어?"


"내가 뒤지기 전에 네가 먼저 뒤지는 거 아니니? 스카디 한테 말이야." 몸을 돌린 발키리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캐럴을 곁눈질 하고서 말을 이었다. "대장의 지시야. 아르망, 샬럿, 알비스, 발…… 인간의 서약자를 수송기로 연행하래."


"포로들을 살려 주겠다고!? 팬텀 그 년이 기어이 미쳐버린거냐!?"


"지휘관 님 명령이거든!? 그리고 살려 주는게 아니라 살려 두는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 지휘관이란 단어가 스카디의 팔보다 강하게 캐럴의 몸을 붙들었다. 팬텀을 포함한 다른 년들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지휘관이라 불리는 그녀는 아무리 막나가는 캐럴 본인에게 있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뿌드득- 캐럴의 이를 가는 소리가 스카디에게까지 전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스카디가 손에서 힘을 빼자 캐럴은 스카디를 강하게 밀치고 호명되지 않은 포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 년들은 썰어버려도 상관 없지?!"


캐럴의 외침에 발키리가 등 돌린 채로 팔을 휘적거렸다.


"빨간 머리. 너부터다. 이 창년아."


머리채를 붙들린 홍련이 짓이겨진 브라우니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질질 끌려간다.

스카디는 분이 가시지 않은 캐럴을 바라보다가 툭툭 자신의 등을 두들기는 감각에 몸을 돌렸다.


"야 스카디." 써니가 말했다. "우리의 본분에 대해 말해 봐."


 "…청소." 


스카디가 맥없이 답했다.


"우리의 주적은?"


"아미나 존스, 에바 프로토타입."    


"실재하는 주적은?"


"바이오로이드."


"우리의 목표는?"


"아미나 존스와 에바 프로토타입, 그 둘에 의해 연성된 망집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


"우리의 목적은?"


"인류의 구원."


"네 기분이나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팔을 쭉 뻗어 스카디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들긴 써니가 말을 이었다.


"잊지는 마. 알겠지? 이렇게나 무르고 여려서야… 너만 보고 있으면 가끔은 걱정 돼."


"미안해."


"됐어. 어짜피 마지막인데… 빨리 가 봐. 캐럴 저 년은 알아서 할테니까."


"…고마워."


발키리와 같이 손을 휘적이는 써니를 뒤로 한 스카디가 포로들에게 말했다.


"따라오도록."




////////



사령관은 수송기의 카고 해치로 들어서는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인간 님이 부탁하신대로 포로들은 살려 두겠다는군요."


'일부 만요.' 살려 주겠다가 아닌 살려 두겠다라는 말과 모습이 보이지 않는 홍련이 신경쓰였지만 사령관은 말을 아꼈다. 패배자인 자신이 이 이상 분수에 맞지 않게 행동했다가는 기껏 목숨을 연명한 네 명 마저 멀리 보이는 보급대의 대원들과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핏줄기 하나가 주르륵하고 사령관의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패배를 한 자신이 분했고 패배를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을 조성한 자신이 증오스러웠으며 이겨내기만 했다면 대원들의 호칭은 포로가 아닌 생존자가 되었을 것이다. 포로나 생존자나 안쓰럽게 들리긴 매한가지지만 역시 생존자가 낫다고, 그렇게 생각한 사령관은 이미 피가 새어나올 만큼 질끈 깨문 입술을 아예 끊어버릴 듯이 더욱 힘을 줘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입가를 닦는 사령관에게 팬텀이 말했다.


"가시죠. 저희의 지휘관이 인간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발길을 옮긴 팬텀을 따라가며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상념의 파도에 잠겼다. 오르카를 떠난 그 때에 이미 패배했다고 여겼다 한들, 발버둥치면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욕을 퍼붓는 것으로 자괴감이란 쓰나미를 버텨낸 사령관을 비웃듯, 절절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라는 쓰나미가 곧바로 들이닥쳤다. 현실이 말했다. 동료를 모으고, 힘을 합쳐서 과거의 자신 처럼 어떻게든 발버둥쳐 적을 물리친 다음 인류 저항군을 재건한다는 결말은 허무맹랑한 공상,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의 망상, 형편 없는 어릿광대의 인삿말과도 같다며. 사령관은 그런 현실에게 순순히 인정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고. 뭐가 됐든 그냥 잊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던 것 같다며 형편 없는 변명을 통해 현실에게 동의했다. 그래. 정말로 내가 이긴다는 현실 따위, 싸구려 해피엔딩에 지나지 않지. 억지 투성이에, 형편 좋고, 지극히 예정 조화적인 엔딩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에 있는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아 사령관은 팬텀 몰래 눈물을 훔쳤다. 속절없이 단념할 수 밖에 없는 자기자신이 너무나도 분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여깁니다."


팬텀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또 다른 수송기 한 대가 착륙해 있었다. 도착한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엔진부에서 미약한 열이 느껴졌다.


"드시죠." 팬텀이 손목의 장치를 조작하자 수송기의 해치가 열렸다. "이 안에 있습니다."


사령관이 해치에 발을 내딛은 순간, 먼 발치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나온 다음 팬텀의 손목에서 통신음이 들려왔다.


'여기는 까마귀. 적성 레이스 개체 사살 및 타격유도 완료.'





/////////





무기질적인 분위기의 카고 해치 중앙에는 브라운색 목제 테이블 하나와 두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앉을 자리는 많았고 비행 중에 흔들릴 동체를 생각하면 쓸데없이 느껴질 물체였지만 방문하는 이가 최후의 인류인 이상 군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테이블은 이질감을 뿜어내는 일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팬텀이 평소의 실리적인 성향은 접어두고 직접 테이블을 옮겨두었다. 별 일이라고 생각한 사냥개들이었지만 대장이 직접 몸을 쓰면서 나선 이상 딱히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테이블을 끼고 그녀가 앉아 있었다. 


사령관은 오빠라고 불러오는 그녀가 처음보는 이 처럼 느껴져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으로 본 닥터는 어떤 모습이었더라. 적어도 어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때까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 동생도, 오르카의 참모도 아니다. 흑복을 입고, 입과 코를 가리는 검은 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검은 가운을 걸치고 있다. 그 모습이 꼭 사냥개와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전투복에 가운? 여전히 가운은 고수하는구나. 


닥터가 귓불 언저리를 매만지자 마스크가 날렵한 소리를 내며 목에 있는 장치에 수납됐다.


훤히 드러난 얼굴은 사령관이 아는 닥터였지만 닥터가 아니었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마저 느껴졌고 입술은 미세하게 벌어진 채 미동도 않았으며 눈은 조금 가늘게 뜬 상태로 굳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마치 영원히 침묵하고 있는 바스크 인형을 연상한 사령관은 서늘한 카고 해치를 걸어가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 닥터를 마주보고 앉았다.


"너는…"


"응."


"누구야?"


팬텀과 똑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 닥터는 작게 쓴웃음을 짓고서 곧바로 무표정으로 되돌렸다. 질문 자체는 같았어도 결은 달랐다.


"소개할게. '인간.' 난 닥터야." 몇 초 정도 뜸을 들인 뒤 닥터가 말을 이었다.  " 어서 와. '오빠.' "


"…"


"고생 많았어."


"…정체가 뭐야?"


사냥개의 모습과 자신이 익히 아는 동생의 모습, 눈 앞의 닥터는 그 두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아는 닥터를 연기를 하는건가?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모습이 같은 또 다른 개체라면 아무리 연기한다 해도 바이오로이드들을 끔직히 사랑했던 사령관을 속아 넘길 수는 없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가짜라는 것을 분명히 판별해냈을 것이다. 게다가 리리스, 베로니카, 캐럴, 팬텀 등등… 사냥개들 모두가 자신이 아는 바이오로이드들과 외모는 같았어도 전술 차원에서 기만을 해온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막나가는 것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듯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닥터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느 정도 짐작한 사령관은 닥터의 답을 기다렸다.


"말했잖아. 오빠. 닥터라고."


"제대로 말해 줘."


"사냥개의 지휘관. 오르카의 박사님. 사령관의 참모. 그리고… 오빠의 동생. 전부 다야."


"…"


"아하하…"


"언제부터니?"


"…미안해 오빠."


"…괜찮아. 말해 줘. 언제부터였니…"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 처음이란 언제인가. 이 섬에 발을 들였을 때? 그 무인도에서 해후 했을 때? 아니면 오르카에서 함께 있었을 때? 아니면…


"두번째 인간을 발견 했을 때였니?"


"…맞아. 정말 미안해."


거듭 사과하는 닥터를 손을 들어올려 막은 사령관이 침묵했다.


"정확히는 주인님… 두번 째 인간을 발견하고 나서 얼마 뒤지만…"


"…"


"…오빠만 괜찮다면, 말해 줄 수 있어."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령관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탁해."


수송기가 비행을 준비 중인지 동체가 떤다. 카고 해치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닥터에게 애써 미소지은 것은 의연하게 받아 들이겠다는 뜻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서글픈 기색을 감출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닥터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인 사령관의 손에 자신의 손을 내밀어 포개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해."


"그래."


"알았어. 아직 밤도 깊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정말 길게 느껴진 하루였지만 시계의 초침은 자정에 가깝긴 커녕 이제 막 초저녁을 넘긴 참이었다.


"그럼, 시작할게. 오빠."


그러니, 긴 밤이 될듯 싶었다.





/////////





와 씨바 드디어 스토리 끝냈다.


참 이게 뭐라고 혼자 판을 키운건지 ㅜㅜ


쓰다보니 한 스토리를 서른 편을 넘게 썼네. 참 달려오느라 힘들었어


너희도 힘들었지? ㅋㅋ 힘들었어도 여기까지 같이 달려와준 라붕이들에게 고맙단 말을 건넨다


힘들었지만 너희가 내 글로 인해 조금이라도 즐거웠다면 난 만족 해


에휴 이젠 두 번 다시 후회물 같은 거 못쓰겄다


아직 완전히는 안끝났어. 다음편이 에필로그야 등장인물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확인해야지


에필로그는 이번 편이랑 분량은 비슷할 것 같고 그냥 너희가 느끼는 의문점들을 조금 해소해주는 해답편이 될 예정이야


그럼 ㅂㅂ 에필로그에서 봐


아 그리고 여기까지 정독해준 라붕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닥터 시점에서 진행된 편은 대부분이 페이크였어!


ㅋㅋ 또 보자


퇴고는 못하겠다 ㅜㅜ 오탈자나 어색한 부분 있으면 꼭 알려 줘


+


혹시 에필로그 까지 끝내고 후기 써도 되니? 너희만 괜찮으면 한 번 쓰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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