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창작물검색용 채널


인간은 다섯 살부터 자기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나는 나 자신과 부모라는 존재를 막 인지했을 그 때에 그들과 분리 되었다. 주거지가 바뀐 것은 아니다. 나는 태어나고 다섯 살 까지 자란 이 장소에서 좀 더 나이가 들 때 까지 살았었고 부모들도 저들의 집인 이 곳에서 멀쩡히 살아가고 있었다.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버리겠다 마음 먹었다면 나는 그 저택의 정돈되지 않은 동백나무의 성긴 가지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고만 있었을 게 아니라 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도시의 슬럼 어딘가에서 하루 하루 연명하느라 눈 코 뜰새도 없었을 것이다.


한 지붕 아래 같은 장소를 거닐지만 결코 만나지도 마주치지도 못했다. 마주치지 않는게 아니다. 못한거다. 나 또한 지구 상의 자식 된 입장의 생명체인 이상, 본능에 가까운 심정으로 부모들과 마주하길 바랐다. 그러나 다섯 살 때 부터 열 일곱 살 무렵 까지 돌아 온 대답은 '주어진 일과'를 수행해라, 라는 건조한 대답이었다. 첫 일 년은 나름 슬프다는 감정을 가졌었지만 일곱 살 무렵부터는 꽤 무덤덤해지게 됐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어째서 나는 슬프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고 다섯 살 무렵의 나에게 의문을 던져댔다. 나는 그것을 체념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부모의 의무는 착실하게 수행해 주고 있으니 그것에 만족하기로 한 것 뿐이다, 라는 그런 자기암시를, 나는 일곱 살에 걸었다.


"도련 님." 정원에 어스름이 질 즈음 해서, 의무의 대리자가 다가왔다. "휴식 시간은 끝났습니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알았어." 


알렉산드라는 다소 고압적인 분위기로 할 말만 마치고 내가 지내는 곳, 저택에서 정원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별채로 향했다. 피하고 싶은 그녀의 등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데 오늘 따라 발이 무겁다. 좀 더 여기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녀의 무서운 면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별 수 없다. 평소 처럼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수업내용은 적당히 한 쪽으로 흘리면서 시간을 떼울 수 밖에. 그녀야 내가 수업을 듣던 말던 본인의 의무만 제대로 수행했다는 사실만 갖춘다면 별 문제 삼지 않으니까. 그래. 알렉산드라는 그런 여성이다. 실은 내가 살아있지 않은 목석이었더래도 신경쓰지도 않을 여성인 것이다.





//





내 부모의 의무를 대신하는 대리자들. 나를 보살피는 보호자들. 그녀들은 총 세 명이다. 마리아, 알렉산드라, 소완.


마리아는 내가 부모에게서 일방적으로 떨어져 나왔을 무렵, 즉, 다섯 살 부터 함께 해 온 여성이다. 마리아가 말하기로는 본인은 내가 젖먹이 때부터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덤으로 그녀의 모유를 먹고 자랐다고 한다.) 내가 세상을 인지하게 된 것은 다섯 살 때 부터이니 그렇다고 하자. 그녀에겐 감사한게 많다. 그녀의 보살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어딘가 결손 된 채로 성장했을 테니까. 가령 애정결핍이라던가. 혹은 반사회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거나 하는, 결코 좋은 소리는 못들을 인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소완은 가사 전반과 내 식사를 책임진다. 그녀에게 듣기로 소완은 내 아버지라는 사람의 친척되는 사람을 통해 이 저택을 들어오게 됐다고 하는데 마리아나 알렉산드라가 곧잘 그녀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곤 했다. 그녀가 지닌 능력은 뛰어났지만 나는 그보다 그녀의 다른 부분에 관심이 갔다. 허리께까지 떨어지는 고운 백발, 언뜻 차가워 보이나 마리아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옅은 미소, 탄탄하고 균형잡힌 몸매. 둘의 조심하라는 경고는 한 귀로 흘려버릴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뛰어났어서 이성에 막 눈뜨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내 섹스심벌은 그녀였을 정도로, 그녀는 내게 시각적으로 각별했다.


알렉산드라는 넘어가겠다. 그녀에겐 별 다른 인상도 감상도 감정도 없다. 정확히는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필요하기에 함께 할 뿐, 그녀와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관계인 것으로. 그녀와의 관계는 성년이 될 때 까지만 이라고, 그 때 까지만 이용하자고 나는 열 살도 되기 전에 다짐했다.


라고, 부모라는 인간들이 고용한 사용인들임에도 나는 그녀들을 나름 각별히 여겼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엄격하기만 한 알렉산드라에게도 나름대로의 정은 있었다. 아마도.


바이오로이드라는 단어와 그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건 아주 잠깐 다녔던 사립 초등학교 고학년 때이다. 첫 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의 가장 떠들썩한 시간에 같은 반의 학우들은 여느 때와 같이 떠들어댔고 나도 여느 때와 같이 그들과 섞이는 일 없이 창가에 있는 내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한 학우가 연신 입에 올리는 바이오로이드라는 단어와 '마리아' 라는 이름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바이오로이드? 그게 뭐야?"


내가 말하자 학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별 것을 봤다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를 몰라?" 반에서 가장 기운 찬 남자아이가 말했다. "우리들의 노예잖아!"


"노예가 아니야! 인형이야!" 반에서 가장 귀여운 여자아이가 말했다. "우리 아빠가 인형이랬어!"


"멍청아! 노예도 인형도 아냐!" 반에서 가장 덩치가 좋은 남자아이가 말했다. "무슨 뜻인진 모르지만 우리 아빠는 노리개랬어!"


…노예? 인형? 노리개? 알렉산드라에게 배우기로 사람들에게 써선 안된다는 단어들이 학우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 이런 것들 말이야."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아이가 스마트 워치의 패널을 띄웠다. "마리아 같은 것들."


"…마리아?"


스마트 워치의 패널에는 우리 집에 있는 그 마리아와 똑닮은 여성이 나타나 있었다.


"이 사람은 우리 유모야."


내 말의 어디가 웃긴건지 학우들은 교실이 떠나가라 웃어재꼈다. 개중에는 바닥을 뒹구는 아이도, 책상에 엎드려 배를 부여잡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웃긴가? 우리 유모길래 유모라고 말했을 뿐인데.


"사람? 이건 바이오로이드야! 유모 기능을 탑재한 바이오로이드라구! 우리 집에선 아빠의 장난감으로 쓰고 있어!"


'난 다 자랐으니까!' 그렇게 말한 학우가 다른 학우들과 같이 웃기 시작한다. 


"…"


그 날, 나는 학우들에게 소완과 알렉산드라 라는 이름도 아느냐고 물어봤다. 학우들은 역으로 놀란 얼굴을 한채 내게 물었다. 너희 집에 마리아 뿐만이 아니라 소완과 알렉산드라도 있느냐고. 얼마나 잘사는 거냐고. 마치 소완과 알렉산드라를 물건인 양 말하는 그들에게 당황해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확실히 모자람 없는 집이긴 하지만 잘 사는가는 모르겠다. 나는 내 부모의 직업이 뭐고 사회적 지위는 어떻고 같은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기는 커녕 멀쩡히 살아있는 부모의 얼굴도 몰랐으니까.


도중에 학교를 나와 곧바로 대기 중이었던 운전기사에게 갔다. 기사는 지금 당장 집으로 가달라는 내 요구에 당황해 어서 교실로 돌아가라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가야한다며 완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덤으로 물었다. 바이오로이드가 무엇이냐고. 기사는 잠시 동안 학우들과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뒷 좌석에 죽은 듯 앉은 나에게 본인이 아는 한도 내에서 모두 설명했다. 


별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녀들을 거실에 한데 모았다.


"마리아, 소완, 알렉산드라."


"도련 님! 학교는 어쩌시고 지금…" 


당황한 표정의 마리아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만큼 마리아의 눈에 비친 내 표정은 안좋은 듯 했다.


"너희는 누구야?"


"…네?"


"너희는 누구냐고."


"무슨 뜻인지…"


내 말이 가리키는 뜻을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마리아는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을 보내온다. 소완과 알렉산드라는 무표정인 채로 말이 없다. 그런 둘이 참을 수 없어 나는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야?"


"…"


마리아는 양 손을 입으로, 소완은 눈썹을 움찔 거리고, 알렉산드라는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희는 바이오로이드야?"


"도, 도련 님… 그건 어디서…"


"대답 해 줘. 너희는 바이오로이드야?"


"도령." 뒤돌아선 소완이 말했다. "시장하시지요? 지금 바로 상을 준비 하겠사옵니다."


"소완… 기다려."


내 말을 무시하고 소완은 거실을 떠나갔다. 나는 그런 소완의 행동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람이 아니구나. ……왜 말 안해줬어?"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표정은 평소 보다 엄하고 차가웠지만 말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평온했다.


"숨겼잖아.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숨긴 게 아니에요. 아직은 알릴 때가 아니라 여긴 것 뿐입니다."


"때? 너희는 주인 된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걸 모두 밝혀야 된다고 들었어. 그런데 때는 무슨 때라는거야?"


"…도련 님. 도련 님은 모르시겠지만 현재 도련 님이 사시는 세상은 매우 위험한 곳이에요."


"뭐가 어떻게 위험한데? 난 열 두 살이나 되어서야 처음으로 저택 밖을 나가 본 녀석이잖아. 또 나를 백치 다루 듯 대하려는 거야?"


"…아직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세요. 도련 님. 모두 도련 님을 위해서니까요." 


알렉산드라가 잠시 뜸을 들이고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답해 드릴 의무도 없지요. 엄밀히 말해 저희의 실소유주이신 분은 도련 님이 아니니까요."


"알렉사!"


잠자코 있던 마리아가 알렉산드라에게 외쳤다. 꼭 화를 내는 것 같은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제발 말은 가려주세요! 도련 님께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 까진 하지 말라고요!"


"…알았어. 더 이상 안물어 볼게."


별채를 나왔다. 마리아가 내게 무어라 외친 것 같았지만 나는 못들은 척 정원으로 향했다. 아치 모양 펜스를 넘어 관리되지 않아 웃자라있는 잡초들을 헤치고 나아가 이 정원에서 가장 큰 녀석인 탱자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손 언저리에 닿은 덜익은 녹색 탱자를 하나 쥐고 의미 없이 주물럭대다가 겉껍질에 손톱을 박아넣어 상흔을 몇 줄 새기고 끝내는 으깨버렸다. 나는 늘 알렉산드라가 가르친대로 차분했다. 감정적이지 않았고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별채로 달려가서 그녀들의 파르르 떠는 눈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았다. 내 추궁에도 끝내 본인들의 정체를 제 입에 올리지 않은 것에도 나아가 이실직고 하지 않은 것에도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다만, 거짓에 속아 넘어가거나 배신을 당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단지 그녀들이 숨겼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에 준하는 충격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때 깨닫는다. 그렇게 충격을 받을 정도로 그녀들은 내게 각별하고 소중한 이들이었음을. 부모에게 예속 된 존재라는 데에서 오는 그녀들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마저 걷어내 줄 정도로 나는 그녀들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알렉산드라가 말했지 않는가. 모두 나를 위해서라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종류의 긍정적인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들이 인간 취급 못받는 인간과 닮은 무언가였다는 사실보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 알렉산드라가 더욱 놀라웠다. 늘 엄격하기만 했던 알렉산드라 였지만 엄격했기에 그녀의 말에 신뢰가 갔다. 기존의 이미지와의 갭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절대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했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에 어렴풋하게만 있었던 그녀들에 대한 감정은 갈수록 커지고 증폭되어 더욱 뚜렷해지게 됐다.


남들과는 다르게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없었어서 그랬던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후에, 그녀들이 내게 사실을 숨긴 이유는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나로 하여금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그것이 왜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내가 열 일곱 살이 됐을 때 알게 된다.





/////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라는 사람은 노예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갈 것을 명했다. 계단에서부터 옆으로 넘어져 축축한 돌바닥에 팔꿈치와 옆구리를 부딪힌 아픔으로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그 곳에는 입가만 드러난 불길한 가면을 쓴 무리들이 모여었있다. 그들은 나의 등장에 흐릿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제멋대로 내 신체에 대해 평가하거나 저속하고 음침한 말들을 던져댔다. 중세의 지하감옥을 연상케하는 지하실은 벽에 걸린 횃불에 의해 주홍빛으로 가득했고 횃불의 빛이 들어서지 못하는 철창들의 안 쪽에서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들이 들려왔다. 손바닥이 축축해 펴서 확인해 본다. 피가 흥건히 묻어있다. 손바닥에 상처는 없다. 피는 바닥에 고여있다. 고여있는 피웅덩이와 이어진 줄기를 눈으로 따라가 보니 피는 철창의 안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기서 이성이 끊겨 도망치기 위해 발 길을 돌려서 지상 층의 계단으로 달리려 하자 종아리와 다리 관절에 몽둥이가 날아들어 격통에 이기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물이 썩은 듯한 냄새와 곰팡내와 비릿한 금속질의 냄새로 금새 피로해질게 뻔 했던 코에도 발길질이 날아들어 격통이 일고 핏줄기들이 흘렀다. 깔깔 웃는 소리와 욕설과 저속한 표현들이 환호성 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할 새도 없이 그들에게 유린당해갔다. 한 사람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글라스에 양껏 찰랑찰랑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마셔라. 단숨에." 미지의 액체와 다시 날아들지도 모를 몽둥이에 겁 먹어 손을 내밀다 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으니 향수와 샴푸향과 땀과 지하실의 곰팡내가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냄새를 풍겨대는 여자가 무사하고 싶으면 따르라고 겁박해왔다. 액체냐, 몽둥이냐. 어느 쪽이든 괴로울 것 같다고 망설이던 때에 여자가 내 뒤편에 있던 여자에게 눈짓하자, 또 다른 여자는 내 발을 걸어 거칠게 넘어뜨린 뒤 등 뒤에서 팔을 꺾어 몸을 고정시키고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글라스의 내용물이 무리하게 입을 비집고 들어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부글대는 소리가 입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액체를 거부해 모두 뱉어내자 뺨 언저리에 발길이 날아들었다. 금속질과 약과 나무와 보리를 엉망진창으로 섞은 듯한 향과 맛이 혀에서 느껴졌다. 다시 예의 액체가 입 안에 들이부어져 두려움에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 피섞인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흘려넣고 말았다. 꿀꺽- 하고 목구멍이 넘실댄 것을 본 무리들은 또 다시 깔깔대며 무어라 지껄인다. 머리채와 팔을 붙들린채로 20초 정도 지나니 위와 목에서 타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눈에 안개가 낀다. 의식이 돌고 세상이 돈다. 여자에게 붙들려 뒤흔들리는 건 머리채가 아니라 뇌라는 착각이 든다. 꼴꼴꼴꼴- 옆에서 세 번 째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가 생리적인 공포를 부추겨온다. "두 잔 째 가 볼까?" 무리의 호응을 유도하는 손짓을 한 사람이 이번에는 컵 째로 입에 액체를 때려박았다.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아 아까까지 발버둥 치던 다리에 힘이 빠진다. 눈에 낀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목구멍과 위에 일어난 불길은 잦아들 생각을 안한다. 켁켁- 피와 액체가 뒤섞인 침을 흘려대며 기침했다. 팔을 구속하던 여자가 뒤에서부터 더럽다며 뺨을 치고선 나를 일으켜 세우고 풀어줬다.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 있는 힘은 모두 쥐어짜내서 계단으로 향했지만 평형감각이 사라진 내 몸은 얼마 가지 않아 공중으로 붕 떠 천장에 달라붙었다. 실제로는 바닥에 뻗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착각할 만큼 시야와 의식과 세계가 핑핑 돌았다.


죽는다. 나는 생각했다. 내 의식을 뒤흔들은 액체와 고통과 이 상황, 모두 낯설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는 것 만큼은 확신에 가깝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죽고싶지 않다. 나가야 한다. 도망치려고 팔을 어깨 쪽으로 굽혀 기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발목을 붙들려 질질 끌려간다. 내게 액체를 마시는 걸 강요했던 여자가 "한 잔 더 마시고 삼십 분 동안 멀쩡하면 풀어줄게." 라고 말했다. 나는 불가능함을 알고 거절하려 했지만 머리와 손과 발과 입이 따로 놀아 무의미하게 허공을 휘저으며 제멋대로 움직여대는 혀를 통해 웅얼거리기만 했다. 여자의 손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고, 복부에 충격이 있었다. 웨에엑- 배를 부여잡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집자마자 강제로 마셨던 두 잔의 액체와 아침으로 먹었던 스크램블 에그와 빵과 소세지 쪼가리로 만든 죽이 입에서 쏟아지고, 내가 이러길 기다렸다는 듯 환성이 터져나왔다. 탁- 타탁- 물먹은 나무가 타는 것 같은 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들렸다. 모든게 낯선 이곳에서, 그 소리 만큼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많이 어렸을 무렵, 알렉산드라가 진행한 호신장비 교육에서 배웠던 스턴 건 소리라는 걸 깨달은 직후, 전극이 뒷목에 닿고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내 것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 비명이 지하실을 울렸다. 무리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흥이 오른 스턴 건을 쥔 여자는 피부가 얇은 부위와 민감한 부위만을 골라 몇 번이고 전기 충격을 가해왔다. 손가락에서 부터 옆 목, 허벅지, 겨드랑이, 옆구리에 이르기 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혹시 이 무리는 한도라는 것을 모르는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엽총에 맞아 다죽어가는 사냥감 처럼 몸을 허우적대면서 나는 바랐다. 제발, 이대로 빨리 의식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람은 이루어진건지 의식은 서서히 멀어져 간다. 사냥 개들이 매도와 욕설, 스턴 건과 몽둥이를 이빨 삼아 내밀어와도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응 할 수가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그래서인지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의 순간에는 특별히 긴 일격들이 날아들었다.


이런 꼴을 당할 바엔, 차라리 알렉산드라의 수업이 나았다. 짓궂던 소완의 장난들이 나았다. 간혹 꾸짖던 마리아의 무서운 얼굴이 나았다.


마리아… 소완… 알렉산드라…


어디 있어?


그녀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눈 앞에 뿌옇게 되어 모습을 찾을 수도 없다.


'아, 이런 건 싫은데.'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혼자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란 자에 의해 갑작스럽게 저택으로 돌아간 나는, 하루 걸러 하루마다 정체도 모르는 이들에게 온갖 고문을 받아갔다. 이유는 네 번째 고문을 받은 다음 날에서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란 바이오로이드는 이제 질렸기에 인간으로 재미를 보기로 했다는, 참으로 터무니 없고 억지로도 이해 하는게 불가능한 이유였다. 욱신대는 몸을 부여잡고 나는 실 없이 웃으며 깨달은 것을 읊조렸다. 사회에서 바이오로이드는 이런 취급이었구나. 이제는 내가 그런 취급을 받는구나. 아버지란 자에게 나는 그저 알맞게 숙성 된 17년산 와인에 지나지 않았구나. 어라? 그렇다면 별채는 와이너리가 되는 건가. 나는 내게 조소했다. 이런 인간을 보고 싶어 했던 때가 있었다니. 부모를 보지 못하는 것이 슬퍼 울먹인 적이 있었다니. 참 우스운 일이다.


 그 뒤로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왜일까. 나는 기묘할 정도로 무감정한 내 상태에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그저 수면 위에 가만히 떠있는 듯한 감각만을 지닌채 시간을 흘려 보냈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홉 번 째 인지 열 번 째 인지 횟수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고문의 날, 자극적인 기쁨을 찾아 저택을 찾아온 손님들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각별한 유희의 날, 그 날은 지하실로 끌려가지 않았다. 곱게 다려진 정장을 처음으로 차려 입고, 넓직한 라운드 테이블에 펼쳐진 만찬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낸 뒤 저택에서 가장 큰 장소인 연회장으로 끌려갔다. 역시나. 오늘은 고문을 받지 않는 건가 하고 아주 잠깐 기대를 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새하얗고 휑뎅그렁한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 환성이 터져나왔다. 바닥에 나뒹구는 잘리고 터지고 능욕당한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그들의 피와 육편을 뒤집어 쓴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잘 보니, 모두 여성들이다.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답이라는 듯 나는 정체를 모르는 여성들에게 이끌려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 내던져졌다. 바이오로이드 취급 받는 인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래도 나는 되도록 정조만은 잃고 싶지 않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의 손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무수히 많은 손에 의해 성기를 자극당하여 난생 처음 사정해버리고, 첫 키스를 빼앗기고, 혀를 빼앗기고, 그 미지의 액체(그것이 술이라는 것을 안 것은 이 때이다.)를 끼얹은 그들의 나체를 내 몸에 부비대고, 입과 혀로 성기를 빨려 제정신을 유지 할 수 없을 때 까지, 나는 유린당하고 또 유린 당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조만은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들어준 것 같아 오히려 감사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정조를 지키고 싶어 한 걸까 라는, 아무래도 좋을 고집을 피운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뭐 본능 같은 거겠지. 혹은 알렉산드라의 '올바른' 교육 탓일지도. 그러고보니 알렉산드라의 윤리 수업에서 배운 것 중에 그런게 있었지. 소돔과 고모라. 맞다. 이 연회장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은 그 두 도시에서 벌어진 하룻 밤의 축제와 다를게 없다. 나 참, 난생 처음 경험하는 축제라는 것이 이런 핏빛 아비규환이라니. 아, 마냥 핏빛은 아니다. 몇몇 여성들의 입과 사지가 하나 이상은 절단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뿌려진 내 정액도 있다. 뭐 어쨌든, 아비규환인 건 다름 없었다. 


나를 유린한 여성들은 모두 아버지의 지인들이 거느린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됐지만 나는 평소처럼 별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 내 태생이 인간이라 한들 이 곳에서의 취급은 바이오로이드와 다를게 없었으니까. 그들은 바이오로이드인 이상 인간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 그렇게 여겼기에 무덤덤 했다.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차마 말로는 전부 형용 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마리아와 소완과 알렉산드라와 보낸 나날들 보다 이 저택에 들어서고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느끼면서도, 나는 알렉산드라에게 배우기로, 입에 올려선 안 될 욕설과 저주들을 곰팡내나는 세 평 남짓한 방에 웅크려 앉아 허공에 퍼뜨렸다. 


거느린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나를 능욕할 것을 지시하고 그것을 즐긴 인간들은 차치하고서, 내 분노는 인간들 보다 나를 능욕한 그 여성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향했다. 왜냐고? 그녀들은 웃었으니까. 지시 때문에 마지못해 한다는 인상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능동적으로, 지시 그 이상의 것들을 내게 자행 했으니까. 비록 저들의 성기로 내 성기를 탐하진 않았어도 나를 충분히 먹어치우고 탐했으니까. 그들의 손으로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찢고 토막내고 으깨고 잘라냈으니까.


전부, 아주 즐겁다는 듯이 말이다.






///////






더러운 하천에 침잠해 있던 것을 끌어올려 햇볕에 말려두면 이런 냄새가 나겠다고, 그렇게 생각 할 만한 냄새를 풍기는 침대가 물이 새고 곰팡내나는 이 세 평 남짓한 방에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이 저택 한 켠에 마련 된 내 방이었다. 시계도 없고 시간감각도 무뎌져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마 한달 쯤 지났을 때였을까. 감각적으로 새벽이라고 느낄 시간대에 끼이익 하는 이음새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방 문이 열렸다. 고문은 하루 걸러 하루마다 자행되니 오늘은 조용히 지나갈 날인데 뭘까. 혹시 같은 인간을 너무나 괴롭히고 싶은 욕망을 못이겨 급히 이 저택을 찾아온 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곤란하다. 고작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억지로 술을 마셔대 헤롱대고 있었으니까. 그 뿐이면 다행이지. 이상한 약까지 투여 당했다. 내가 아는 주사기나 약이라면 어렸을 때 마리아가 놓아준 예방접종 뿐인데, 세상엔 참 다양한 약이 있구나.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고 감정을 주체 할 수 없던 것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문에서부터 다가온 몇몇이 내 앞에 섰다. 불이 들어온다. 어둑한 방에서 한참 동안 감겨있던 눈은 엄습해온 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 뒤에 숨었다.


"도련 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거진 한 달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마리아?"


"쉬잇…"


그려진다. 아마도 마리아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올렸으리라. 엄격한 알렉산드라를 피해 정원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마리아는 종종 손가락 하나만으로 내 여가시간을 좀 더 늘려주곤 했었다.


눈을 꿈뻑이며 몸을 일으키자 벌거벗은 상체에 보드라운 느낌이 덮여왔다. 허리까지 덮고도 꽤 남는게 담요같은 것일까. 어깨 쪽에 손을 대어 확인해보니 담요가 맞는 것 같았다. 꼭 나를 숨겨주려는 것 같잖아. 그렇게 생각한 것이 정답이었는지 담요는 나풀대다 머리 위에도 얹어졌다.


"도련 님. 제 목에 팔을 감아주세요."


'그래야 들기 편하니까요.' 그런 말이 귀에 울리고 곧장 몸이 들렸다. 갑작스레 등과 엉덩이 아래가 허전해져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아, 알렉산드라… 지금 뭘…" "이 곳에서 나갈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해요."


이 상황은 마치… 어렸을 적 마리아가 읽어 준 동화책의 한 장면 같다. 곤란해. 난 공주가 아닌데. 


"신속히 움직이겠사옵니다. 주인께서 눈치라도 채시는 때엔, 모든게 허사가 되옵니다."


두 자루의 식도를 각각 한 손씩 쥔 소완이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설마하니 주방에서만 쓰던 저런 걸 무기로 쓰려는 건가. 무기를 쓸 상황이 펼쳐지는 걸까. 소완도 그렇지만, 알렉산드라는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내가 목에 팔을 둘렀다 해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나선으로 된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발소리도 최대한 억제해가면서 말이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바이오로이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됐지만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지식 뿐이라 나는 그녀들의 근력과 신속함과 소완의 말대로 당장 끝장나도 모를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저택을 탈출하려는 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끔찍한 곳에서 탈출 할 수 있다는 기대와 기쁨도 뒤덮을 정도의 놀라움이었다. 


저택의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와 이어진 지하실에 들어서자 두 명의 여성, 아마 저택을 지키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우리를 막아섰지만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쇄도한 소완에게 목이 날아갔다. 마치 저 혼자 몇 배 속으로 빨리감기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대단 해. 요리에나 쓸 그런 칼로 잘도 목을 베어 낼 수 있구나. 무기가 없었더래도 소완은 바닥에 나뒹구는 두 명의 바이오로이드 정도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이 쪽이에요. 저택의 설계도에 따르면 이 밑에 탈출용으로 마련 된 지하도가 있을거에요."


지하실의 가장 안 쪽에서 벽을 살펴보던 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비밀 계단을 가리켰다. 이런게 있었을 줄이야. 알렉산드라의 어깨 너머로 멀어져가는 지하실을 바라본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수도 없이 비명을 질러댔던 그 지하실에는 나 말고도 인간의 유희를 위해 온몸으로 봉사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갇혀 있을 것이었지만 알렉산드라나 마리아나 소완은 그들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잠자코 있었다. 걱정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들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구하자고 말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도련 님."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하도를 걸으며 수십 여분 동안 침묵하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도련 님이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막을 수 없었던 것… 구출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물먹은 듯이 차츰 떨려간다. 그 알렉산드라가 죄송하다니, 울먹이다니, 오늘은 참 놀라운 일이 많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응…"


나직이 대답하고 우리들은 다시 침묵했다. 가장 앞서 걷고있는 소완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앞에서 걷는 마리아의 어깨가 진동하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입가로 올라가 있는 팔은 꼭 새어나오려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듯이 굳어있다. 지하도를 나서자 나무로 빽빽한 산과 같은 장소가 펼쳐졌다. 먼 발치에는 차도로로 보이는 것이 있고 그 너머엔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몇 번이고 차 창을 통해 지나쳤던 익숙한 간판들이 보였다. 국도구나. 그렇게 읊조린 순간, 내 머리에서 여러 가지들이 떠올랐다. 그 여러 가지들은 대부분 다섯 살 부터 열 세살 무렵의 기억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위층이라면 꼭 익혀야 한다며 가져야 할 예법과 몸가짐을 가르쳐주던 알렉산드라. 그런 알렉산드라에게 어짜피 저택을 나가지도 못한다며 찡찡대던 나. 알렉산드라에게 혼난 날의 깊은 밤, 정원에서 마리아와 함께 보았던 별자리들. 여름 밤, 이불 하나를 함께 뒤집어쓰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던 마리아. 거실의 소파에 단둘이 있을 때, 내 귓불과 목을 깨물어대던 소완. 그런 소완과 목과 귀에 묻은 타액이 무서워 밀어대던 나. 용서해 달라며 디저트를 만들어 온 소완. 소파에서 있었던 일을 이르자 불 같이 화를 내던 마리아와 알렉산드라.


혹시, 주마등인가? 알렉산드라는 죽기 직전에나 마주할 현상이라고 알려줬는데. 하지만 난 살아있어. 아니, 아니야. 죽음에 가까운 경험은 꽤나 겪었잖아. 그러니 주마등을 본다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렇다면, 만약 주마등이라면 왜 17살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거지. 왜 바로 어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거지. 내 뇌의 용량은 17년치 인데 어째서 16년 분량 만큼의 기억 밖에 없는거지. 왜, 내 기억은 그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거지.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고 몸이 떨렸다. 국도를 따라 나있는 가로등 밑을 하나하나 지날 때 마다 다섯 살 부터 열 세살 까지 나열 된 기억의 파편들을 가로등 렌즈에 하나씩 비춰보던 나는 결국 소리내어 울었다. 그녀들도 전염된 듯 나를 따라 한 명씩 차례대로 울었다. 알렉산드라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마리아가 우는 소리는 제법 크다. 소완은 피하듯 발걸음을 빨리 한다.


아주 잠깐 다녔던 초등학교를 제외하고서, 내게 허락된 건 저택의 울타리 안, 더 좁게는 그 저택의 별채와 정원 뿐이었다.


그 곳 만이 내게 허락 된 세계였다. 그 곳 만이 내 세계였다. 그 세계를 만든 것은 그녀들이다.


오늘, 그녀들은 그 세계를 부쉈다. 


"흑… 흑흑…" 깨닫는게 늦잖아. 속으로 중얼거리고 알렉산드라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죄송합니다… 도련 님…"


그녀들이 나의 세계였다.





///////





우리의 새 보금자리는 근방의 도시, 그 도시에서도 근교에 위치한 초라하기 짝이 없는 5층 짜리 연립주택이었다. 건물 자체는 내가 자라온 별채보다도 큰데 녹슬고 흠집이 가득한 철문 뒤에 마련된 공간은 거실 하나에 방 하나인 12평으로, 네 명이 부대껴 살기에는 다소 좁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소완만이 작디작은 주방을 언짢아 하긴 했지만 적당히 요리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금새 평소의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에게 물었다. 이런 곳을 구할 재산이 있었느냐고. 알렉산드라는 다 방법이 있었다며 도련 님은 모르셔도 된다고 답하고서 미소지었다. 불안해져 캐묻고 싶었지만 무려 알렉산드라가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에 놀라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도련 님, 이제 부터는 학교에 나가세요. 열 일곱 살이 되어서야 사회에 나오신 도련 님이 늦게 나마 사회에 적응 하시기 위해선 그러셔야 합니다."


나는 거절했지만 알렉산드라의 의견에 마리아와 소완이 고개를 끄덕여 별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추적해오면 어떻게 해? 알렉산드라는 걱정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듣자니 아버지는 꽤 시대착오적이고 사회와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나를 추적해 올 일은 없다고 덧붙였다. 가장 시대착오적인 건 내가 아닐까. 라고 혼잣말을 하니 마리아가 내 손바닥을 쳤다. 그런 건 착오적인게 아니며, 내 탓도 아니며, 나는 아직 창창하니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란다. 덤으로, 본래 자신은 경호도 수행해야 하나 앞으로는 생계를 꾸려야 하니 나와 함께 하는 건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저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소완과 저도 아침 부터 저녁 까진 집을 비웁니다. 그러니 도련 님, 어려우시겠지만 부디 학교 생활 힘내주세요."


"알렉산드라랑 소완도 일 하러 가?" 내가 말했다.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취직을 한거야?"


"도령. 소첩과 알렉산드라 양의 능력은 굉장히 출중하옵니다. 후후… 취직 정도, 필요하다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런 거야?"


"네."


알렉산드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나는 계속 새어들어오는 의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 바이오로이드는 개인 재산을 소유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어. 지급 받을 급여는 어떻게 할 건데?"


"모두 도련 님의 명의로 된 계좌로 들어갈 겁니다."


"계좌? 내 명의로 된 계좌가 있었어?"


"전부 다 개설해 뒀지요. 편리한 세상이니까요."


"학교는 갈 수 있다면야 가긴 할 건데… 아무렇게나 막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이제 곧 가을이잖아."


"네. 막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는 어마어마한 저출산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도련 님 같이 창창한 젊은 인간 님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환영 받으실 거란 얘깁니다."


"아… 응…"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땡땡이 치시면 혼날 각오 하세요."


"…응."


정말이지 빈틈이 없다.





////////





비가 내린다. 도착 시간 보다 5분 늦은 버스에 오르고 적당히 후미에 있는 자리에 앉아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왜 늦었냐고 운전대를 잡은 바이오로이드에게 날아드는 욕을 한 귀로 흘리며 시선만 돌려보니, 앞 좌석 뒷편에 달린 그물망에 들어있는 색 바랜 여행 카탈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도 죽일까해서 집어든다. 겉표지엔 '바닐라, 포티아 대여 가능. 숏 20, 롱 50' 이라 적혀있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대여고 숏이고 롱이고 간에 그것이 꽤나 외설적인 내용인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관광명소라도 소개해줄 것 같았던 카탈로그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여 여행지에 대한 안내는 단 몇 줄뿐 이고 현지의 고급 모델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서비스'를 헐값에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 주를 이뤘다. 넓은 세상에 퍼져있는 풍경들을 버스에서 감상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집 근처의 상가에서 내리긴 했는데,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하지. 막막했다. 직접 식재료를 사오라는 소완의 주문에 따라야 하긴 하겠는데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궁금한게 생길 때면 같은 반 학우들은 스마트 워치를 사용했더랬지. 하지만 나는 그런 형편 좋은 문명의 이기 따윈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마트 워치야 초등학교 때도 본 적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쳐도 다른 이기 따위들도 거의 몰랐다. 내가 아는 거라곤 주말을 이용해 마리아에게 배운 버스 이용법과 크레딧 카드 사용법 뿐이며 유일하게 자신 있는 건 학교 수업이었는데, 내 눈엔 굉장히 수준 낮은 내용의 수업들이었다. 학교 바깥에선 완전히 백치인데 학교 안에서는 성적 좋은 우등생이다. 그 불균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미아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상가를 거닐고 있자 눈에 띄는 복장의 여성이 초로의 부부에게 미소지으며 손짓 하는게 보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인상에 어울리는 살가운 말투로 길 안내를 해주고 있는 듯 했다. 이거다. 나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서성이다가 부부가 떠나간 뒤에 여성에게 향했다.


"저기…"  "안전!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떨어진 곳에서 듣기로는 상냥한 목소리였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묘하게 박력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한 발 뒷걸음질 쳤다.


"학생 분, 괜찮으십니까?"


"아… 음… 그게…"


"3지구 소속 미스 세이프티 입니다." 내가 할 말을 알아챘다는 듯 세이프티란 여성이 배려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게 세이프티라 불러주세요."


"아, 네. 그… 세이프티 씨."


"씨는 빼셔도 됩니다."


그런가. 이 여성도 바이오로이드 인 듯 했다.


"…식재료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네?"


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다 큰 남자가 식재료를 구입 할 만 한 곳도 몰라 길 한복판에서 헤매다가 바이오로이드를 붙잡고 물어본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확실히 자각하고 있으니까 제발 그렇게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고개 내밀지 말라고. 절감한다. 나는 정말로 미아와 다를 게 없다. 보호자들이 있어도 그렇다. 왜 알렉산드라는 내게 기본 상식 같은 걸 가르쳐주지 않은 거지. 덕분에 눈 앞의 바이오로이드가 상식이 파괴 됐단 표정을 짓고 있잖아. 안 된다. 죄 없는 알렉산드라에게 속으로 외쳐봐야 별 수 없다. 가르쳐 줬더래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헤매는 건 똑같았을 거다. 게다가 상식이란 방대해서 일일히 가르치는 것도 어려웠겠지. 어쩌면 가르칠 생각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유가 없었을 지도 모르고. 축제에 쓰일 와인에 지나지 않았던 나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겠다 싶었다.


"길 건너 바로 앞에 있는 상가로 가시면 됩니다." 세이프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따라가 본다. "1층에 위치한 마트라면 필요하신 식재료는 전부 구입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존댓말을 해주시는 인간 님이라니,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기쁘네요."


"고생 하세요."


불필요하게 허리를 90도까지 꺾어가며 인사하는 세이프티를 따라 나도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길을 건너 상가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영어로 마트라 적힌 곳이 보여 바로 향했다.


"…이, 이게 뭐야…"


귀를 때리는 경쾌한 멜로디, 삑삑 대는 기계 소리, 분주히 움직이는 로봇들과 마이크를 붙잡고 상품들을 소개하는(아마도 바이오로이드) 판매원들. 그 앞을 지나쳐가는 수많은 인파들. 넓다. 정말 넓다. 소완. 이 짓궂은 녀석. 들어서자마자 그렇게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쪽지를 폈다. 


'양파, 돼지 고기 두 근, 요리용 와인(브랜드 상관 없음), 깻잎, 대파, 배추, 두부. 포장 되어 있는 것들로 한 묶음 씩만 구입하시어요♥'


사회와 단절 된 삶을 살아왔어도 딱히 대인기피증 같은 게 있던 건 아니라서 마트를 돌아다니는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경험 없이 머리로만 아는 상식과 지식을 가지고 여러 상황을 직접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영 쉽지 않은 일이라 두려움에 가까운 거부감이 추 처럼 발목에 매달려 한 걸음 내딛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다. 세상에는 새로운 경험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다고 하던데 나로써는 이해가 안 되는 얘기였다. 뭐 나 같은 경우는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세이프티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마트 안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될 수 있는대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의 시간을 뺏었다.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을 준 건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아닌 로봇이었고 외형에 어울리는 기계음으로 에스코트해오는 로봇을 따라 무인 계산대에서 장장 10분에 걸친 처절한 씨름 끝에 무사히 식재료들을 챙겨 마트를 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측은했는지 '익스프레스76' 이라고 소개 해 온 바이오로이드가 쾌속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것을 권했지만 이미 폐는 끼칠 만큼 끼쳤기에 최대한 에둘러 거절하자 세이프티 때와 마찬가지로 존댓말이나 인사는 처음 받아본다며 쾌활한 미소로 배웅해 줬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오늘 학교에서 말이야." 식기들이 달그락 거리는 사이에서 내가 말했다. "못 볼 걸 봤어."


"뭘 보셨는데요?"


입에 올리던 젓가락을 멈추고 마리아가 대답했다. 먹던 거 마저 먹으라고 손짓 했지만 마리아는 기대된다는 미소로 고개를 내밀어왔다.


"점심 시간에 옥상에 갔거든. 조용히 떼우려고. 근데 옥상에 선객들이 있었어."


"그게 왜요?"


"선객들이 성행위를 하고 있더라고."


"어머…"


젓가락 대신 입에 손을 가져다댄 마리아가 미간을 구겼다. 맞아. 그 때 내가 지었던 표정도 딱 이런 표정이었어.


"같은 반 애랑 옆 반 여자애 였는데… 방해 한 것 같아서 못 본 척하고 바로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어. 그랬더니 걔가 뭐라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같이 하자고 했어. 빌려 주겠다고. 여자 애를 가리키면서. 아마 그 여자 애는 바이오로이드 였나 봐."


"이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접이식 테이블의 다리가 휘청거려 물 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컵을 잡아 똑바로 세우고 손에 묻은 물을 티슈로 닦으며 테이블을 내려친 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도련 님은 어떻게 하셨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도련 님 앞에서 무슨 짓이냐고 질타하는 마리아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채 두 눈에 불을 켰다. 옛날 부터 몇 번이고 봐온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표정이 익숙한 건 다름 없었기에 괜스레 혼나는 느낌이 들어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갔다.


"당연히 거절 했지… 정조를 소중히 하라고 알렉산드라가 가르쳤잖아."


"잘하셨어요."


알렉산드라는 언제 테이블을 내려쳤냐는 듯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마리아는 한숨을 푹 쉬고 소완은 겨우 들릴 정도로 키득거렸다.


"알렉산드라가 진심으로 화내는 거 처음 봤어…"


"당연히 화가 나죠. 도련 님께서 그런 식으로 정조를 잃으신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인간 님이라지만 도련 님께 그런 꼴을 보게 한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알렉산드라의 '그런 꼴을 보게 한다.' 라는 표현이 신경 쓰여 혹시라도 만약, 내가 권유에 따라 직접 그 행위에 참가 했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어볼까 싶었으나 보나마나 혼날게 뻔했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짐작은 되오나, 도령.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진즉에 식사를 마치고 다소곳이 차를 홀짝이던 소완이 말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


"음… 토모 였던가. 꽤 활달한 애야."


"쯧…"


혀를 찬 것은 소완이 아니라 알렉산드라였다.


"…왜?"


"그 토모란 바이오로이드는 경호를 목적으로 제작 된 개체이옵니다."


"아 그래? 그럼 그 남자 애의 경호원이었나 보네."


" '아 그래?' 가 아니옵니다. 토모는 비밀스러운 개체이옵니다."


"…들킨 거야?"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완의 옆에서 마리아가 말했다.


"그 인간 남성 분의 개인 경호원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요. 개체에 따라선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배치 한 개체들도 있으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학교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싶어요."


식사를 더 할 생각은 없는지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마리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심각하게 여길 일인가 의아 했지만 그녀들이 그리 생각한다면 심각한 게 맞겠지. 그래도 학교는 나름 다닐 만 했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학우들은 없었지만 안들어도 별 문제 없는 수업을 한 귀로 흘리며 가만히 시간을 죽이는 건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학교 측에 보안에 관한 문의를 보내봐야 겠어요."


"개인 경호를 맡은 개체일 수도 있으니 주의 하시길."


"차라리 마리아 양께서 도령의 경호를 맡는 것은 어떠시온지? 생계 유지는 소첩 하나 만으로도 충분 하옵니다."


"그건 안 돼요. 도련 님의 앞 날을 생각한다면 좀 더 벌이를 해도 모자라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소완. 당신 정말 괜찮습니까? 나도 그렇지만 당신은 더 눈에 띄잖아요."


"기인지우이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눈에 띄지 않지요. 태반은 소첩의 이름 두 자 조차 모르옵니다."


분위기부터가 눈에 띈다고 생각하며 소완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일어섰다. 아무래도 식사는 여기까지 인 듯 해서 테이블 위의 그릇들을 주방으로 하나 둘 씩 옮겼다. 보통 이러면 마리아가 한사코 나를 말리는데 어지간히도 대화에 집중하는지 마리아는 물론이고 소완이나 알렉산드라도 내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은 것을 참다가 주방에 가서야 소리내어 웃었다.


낙후된 3지구, 낡은 연립 주택. 저택의 별채에 살 때에 비하면 불쾌하고 불편하다 못해 두렵고 꽤 불결하기 까지 했지만 그 모든 걸 뒤덮어주는 해방감과 고즈넉함이 어느새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 되물었다. 해방감? 저택에 있을 땐 말 그대로 허수아비 처럼 아무 생각도 감상도 담지 않고 살았기에 당연히 해방감을 느끼기 위한 억압 따위도 느끼지 않았었다. 나중에 가서야 꽤나 끔찍한 꼴을 당하던 와중에도 '아, 오늘은 일찍 자긴 글렀구나.' 정도의 감상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뜻 문제 없이 성장한 것 같지만 역시 환경이 문제였던 것인지, 최근 들어서는 간혹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시꺼먼 공허함이 머릿 속 한 켠에서 아가리를 쩍 하고 벌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게 불길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내제된 무언가가 서서히 나를 좀먹어 가는 듯하여 몰래 눈물을 훔칠 정도로 무서웠다. 환경 따윈 상관 없이 나는 태생적으로 텅 빈 인간이 아니었을까. 그저 인간인 척 연기만 하는, 어쩌면 정말로 바이오로이드와 다를게 없는, 아니… 그 이하인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가족이란 개념을 몰랐던 내가, 그 개념을 포함한 모든 걸 가르쳐준 그녀들에게 마저 그 때 뿐인 감정 밖에 갖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상해서가 아닐까. 그녀들에게 가졌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감정들 마저 흐릿한 연기 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인간'이어서일까.


나는 어딘가 결손된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들에게 미안하다. 애정 자체는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갈피가 잡히지 않아 빙빙 도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처음으로 해보는 설거지를 어렵사리 끝냈다.


이 집은 넷이서 살기에 좁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유로움의 문제이지, 생활 자체를 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전에 살던 별채 쪽이 쓸데 없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공간이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는데 그녀들은 이 집에서의 첫 날, 하나 딸린 방에서 따로 자겠다는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거실로 끌고 갔다. "앞으로는 이렇게 자는 거에요." 가슴에 꼭 껴안긴 내게 마리아가 말했다. 몸을 빼려고 해봤지만 뒤에서도 누군가가 압박하고 있었다. 두 다리에 매끄러운 다리가 얽혀오는게 아마도 소완일 것이라 짐작했다. 부탁인데 속옷만 입고 자지 말아줬으면 했다. 알렉산드라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가슴에 뭉겨져 닿지 않은 듯 했다. 결국 첫 날은 꼼짝 없이 갇힌 모양새로 잠들었고 그 뒤로도 쭉 이런 식으로 잠들게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설거지를 한 그 날. 나는 발작했다. 저택을 나온 이후로 두번 째 발작이었다. 원인은 물을 것도 없다. 저택에서의 그 시간들에 별 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지만 자각을 못했을 뿐이었는지 발작이란 것을 일으키기엔 내외적으로 충분한 데미지를 받았었나보다. 발작은 언제나 깊은 밤에만, 그것도 잠들어 있는 와중에 예고도 없이 시작된다. 처음엔 누군가가 강제로 눈꺼풀을 뒤집은 것 처럼 두 눈이 부릅 떠진다. 머리는 맑지만 몸은 아직 잠들어 있다. 눈이 떠지면 뒤이어 손과 발이 바르르 떨려오기 시작한다. 몸은 잠들어 있기에 당연히 통제가 안 된다. 가슴이 문이라도 된 양 열어 젖혀지는 기묘한 감각이 든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고통이다. 노크라도 하고 들어오면 좋을텐데 고통이란 자는 제 이름에 걸맞게 정도도 양해도 모른다. 그저 가능한 되도록 가슴을 후벼 파는데 집중 할 뿐이다. 슬슬 그녀들이 몸을 뒤척이고 이 쯤 되면 다시 자기는 글렀다. 여전히 사지는 통제 되지 않지만 누군가 내 몸에 실이라도 달아놨는지 거의 들어올려지듯 몸이 일으켜진다. 그리고 돈다. 머리든 뇌든 눈이든 뭐가 도는 건지 파악은 안되지만 집 전체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혹은 내 몸이 돌아가는 건지도 몰랐다. 저택에서의 그 액체, 이름 모를 술이 떠오른다. 그렇게 한참 불쾌한 회전을 겪다가 그녀들이 깨어나고 내 몸의 통제권도 조금은 돌아와 풀썩 주저 앉는다.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쥐어 짤 기세로 부여잡고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충동의 파도에 휩쓸린다. 그리고 이미 있는 힘껏 소리 지르고 있다. 환희와 절망과 기쁨과 체념을 절묘한 비율로 섞은 뇌내 분비물이 머리를 가득 적신다. 이 다음은 잠에서 깬 그녀들도 이 발작에 참가한다. 충분히 소리 지르고 나면 웅크린 몸을 누군가가 제멋대로 뒤로 젖혀버리게 만들고 허리가 꺾여들어갈 정도로 휘어진다. 그 누군가는 손과 발은 워밍 업이었을 뿐이라며 내 몸을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대는데 그렇게 되면 전신이 떨린다. 정말이다. 손과 발은 그저 맛보기 였을 뿐이다. 그 지하실에서 맛 본 스턴 건의 전극이 절로 떠오를 만한 격렬한 떨림에 나는 몸부림 치고 만다. 


"도련 님… 도련 님…"


마리아가 꼭 껴안고 달래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품 끓는 소리를 내는 것 뿐이다. 깨워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과 혀가 좀 처럼 같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쉬… 쉬… 괜찮아요. 도련 님."


마리아의 가슴에 안겨도 발작은 진정되지 않는다. 빨리 잦아들어야 하는데… 이래선 잠들 수 없다. 나야 상관 없지만 마리아가 쉬지 못하는 건 곤란하다.


"여긴 안전해요. 무서운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스으읍- 스으읍- 호흡은 잘 되고 있는데 폐가 더 많은 공기를 원하는지 뇌를 통해 코에 명령한다. 거친 호흡에 섞여 샴푸 냄새와 바디 워시 냄새, 특유의 달콤한 살 냄새가 코에 침투해온다. 안정에 도움이 될 만한 향이지만 꽁무니에 불이 붙은 정신나간 망아지 처럼 내 몸은 이제 떤다기 보다는 튀어댄다고 표현하는게 나을 상태가 된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그르륵 거리는 불쾌한 소리 사이로 상냥하고 청명한 소리가 귀에 울린다. 발작과 나를 가로막아 찢어 놓겠다는 의지를 가진 그 목소리에 손 만이 통제가 가능해져 나는 매달리듯 마리아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고, 부숴버릴 정도로 껴안았다.


"how i wonder what you are…"


오랫만에 듣는 걸. 그런 감상을 엉망진창이 된 뇌의 바늘구멍 만한 틈에 집어넣었다. 모차르트의 '아, 어머니 들어주세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 멜로디 위로 가사를 얹은 동요는 내 아동 시절의 자장가였다. 짓궂어… 나는 중얼거렸다. 물론 입으로 중얼거린게 아니다. 나는 이제 애가 아닌데 이럴 때 뜬금 없이 애 취급하는 마리아가 짓궂었다. 간혹 느끼던 거지만 가끔 보면 마리아는 짓궂을 때가 있었다. 그 특유의 상냥함을 발휘하려고 할 때면 더 그랬다. 그러니 어떤 의미론 소완 보다도 더 짓궂다고 느꼈다. 


"up above the world so high…"


그럼에도 나는 마리아의 품에 더욱 파고 들면서 속삭인다. 좀 더… 더…


"like a diamond in the sky…"


멈추지 마.


"twinkle twinkle little star…"


끝내지 말아 줘.


"how i wonder what you are."


바람과는 달리 마리아는 자장가를 1절 만으로 끝냈다. 아쉬웠지만 발작이 가셨다는 걸 뒤늦게 자각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 만큼 상냥한 입술과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눈망울이 지척에 있었다. 나도, 마리아도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마리아의 허리춤에서 음영이 일렁였다. 원인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빛 한줄기가 소완의 다리맡에 내리쬐고 있었다. 나쁜 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도 없이 훔쳐보고 있던 빛줄기에게 한마디 읊조렸다. 훔쳐볼거면 기척이라도 숨기던가. 그러면 부끄럽다는 생각에 마리아를 밀어낼 일도 없었을텐데.


"도련 님. 좀 더 주무세요."


몇 시간 뒤면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고분고분 마리아의 권유에 따라 눈을 감았다.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는 마리아의 손길과 특유의 달콤한 살 냄새에 차분함을 찾아가면서 나는 부족했던 수면량을 메꾸고자 서서히 의식의 전원을 내렸다. 


결국 그 날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가 되어서야 등교했다. 



   

//////////




좆간의 이야기는 좀 더 이어짐


혹시 좆간 새끼 과거를 왜 얘기하냐 싫다 라고 한다면 그냥 넘기겠음

  


 


             


   

https://arca.live/b/lastorigin/27754430?mode=best&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