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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다는 관용적인 표현은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리라.

나는 곧게 선 자세로, 그녀는 반 쯤 몸을 돌린 자세로, 투명한 못에 의해 그렇게 그 공간에 고정 된 채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초침이 움찔거리자,

색조를 잃었던 풍경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고,

일상의 음율이 다시 풍경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았다.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가슴과 뱃 속 만큼은 간질거렸기에.

내 안에서 날개를 펼친 수백만 마리의 나비가 춤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시간이 제 궤도에 오르려는 것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팔을 뻗으려다가 멈춘다. 

아직 세계는 멈춰있다.

그렇다면 멈춰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멈춰버린 세계의 법칙이다. 

그런 법칙을 어겨버리면, 미동이라도 보이면 그녀가 완전히 뒤돌아서서 나를 떠나갈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나 나비로 가득한 이 황홀한 세계는 어디까지나 한 때다.

흡사 그녀를 마주하기 전의 내 머릿 속 처럼.


결국 시간은 다시 제 궤도에 오르고 풍경은 색조를 되찾을 테니.

음율은 생동감을 머금을 테니.


제 자리를 찾아가는 세계가 못내 아쉬워 입술을 달싹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인 그녀가 마저 등을 돌린다.

그 등에 전해받았던 나비들을 돌려주고서 나도 몸을 돌린다.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기 보다 등을 돌리는 편이 낫다.

아마도 생에 있어 가장 끔찍할게 분명한 괴로움을 겪을 바엔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역사로 향한다.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이 되고 열 번 째 걸음까지 내딛었을 때.

역사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다시 등을 돌렸다.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이번에는 속도를 빨리 한다.

세 걸음, 네 걸음이 되고 다섯 걸음 부터는 뛰다시피 한다.


아직 떠나지 않았어.

어디에 있지.


가로등과 간판의 빛이 번져 세계가 늘어난 듯 보여 그녀의 위치가 좀 처럼 가늠이 안된다.

그럼에도 나는 특정한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머리가 이끄는대로, 마음이 이끄는대로,

그녀에게 향한다.

조금 떨어진 발치에 있는 가로등 아래, 그녀가 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몸은 바쁘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사이에 늘어난 인파가 가차 없이 우리를 가로막아 찢어놓으려는 듯이 느껴져 팔짓이 절로 거칠어졌다.

누군가를 거칠게 떠밀어버린 탓에 욕지거리가 날아들었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 앞에 섰다.

거리는 방금 전에 마주섰던 때 보다도 더욱 가깝다.

스읍- 스읍- 후- 심호흡 하며 머릿 속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굴려본다.

적절한 단어들을 고르고 문장으로 짜맞춘 다음, 말더듬을 방지하기 위해 혀를 푼다.


"저, 저기!"


다소곳한 자세로 가로등에 기대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다.

망설이지 마라. 단숨에 말하는 거다. 


"당신은 제 운명이에요!"


진심을 담았음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톤의 목소리였다.

좋아. 완벽해.

이제 그녀의 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다시 시간이 멈춘다.

멈췄는데,

그녀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다.

멀뚱한 눈이 점점 게슴츠레한 모양으로 변해가고 입이 살짝 들어갔다.

미간이 좁혀지고 주름이 진다.


뭐지?


"……예?"


형편 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것이 내 진심에 대한 그녀의 답이었다.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을 뒤늦게 머릿 속에서 반복 재생하다가 나는 속삭였다. 


'이런 병신새끼.'


그렇게 몇 번이고 속삭였다.




//




"아하하하!"


이미 내뱉었겠다, 될 때로 되라 싶어서 다섯 번째로 운명이란 단어를 입에 담은 때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런게 다 있어?'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데 이 번화가 어딘가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즉, 나한테 반했다?"


트렌치 코트 안 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허리춤에 가져다댄 그녀가 가늠해 보겠다는 눈으로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내 눈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맵시있는 검은 색 터틀넥에 체크 패턴 미니스커트 차림이 매력적이었고 그보다 더 이목을 끄는 하얀 피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비약을 넣자면, 그 어떤 바이오로이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피부였다. 아, 이런. 본능적으로 살색을 찾게 되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부디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반한 정도가 아니에요. 당신은 내 운명…"  "으~ 오글거려. 이제 적당히 해요."


표정을 찡그리고 손사래 치는 그녀였지만 내게는 그 또한 매력적이었다. 아, 그렇구나. 지금 내 반응을 되돌아보고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컷 짐승들의 애처로울 정도로 반복되는 구애 행위와 아무리 거부당한들 페로몬과 본능에 휘둘려 어찌 할 도리없이 더더욱 암컷에게 빠져 들고마는 심정을. 지금의 나는 그들과 다를게 없음을. 


그러나 나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짐승 처럼 무턱대고 덮치는 일은 없다. 아니 뭐 실은 대부분의 짐승들도 암컷을 덮치진 않지만.


"…네. 반했어요."


순순히 인정한다. 사실이기도 하고 고분고분한 이미지를 심어주면 나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음…"


턱에 손을 대고 천천히 위 아래로 훑어 관찰해오는 그녀의 시선에 절로 몸이 경직된다. 뒷세계 경매장에 올라선 나신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이런 심정일까. 어두운 공간 속 스포트라이트 아래 수십의 눈에게 품평 당하는 것 같은 감각이란 새로우면서도 꽤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문득,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 외모를 의식하거나 가꿔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손질이나 피부관리는 모두 마리아에게 의지했고 직접 옷을 사본 적은 당연히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이라도 스마트 워치의 패널을 거울 삼아 용모를 살펴볼까 생각 했지만 나는 품평 당하는 수컷인 이상 주도권을 쥔 암컷 앞에서 섣불리 움직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본능적인 감정에 휘둘려 치뤄버렸다는 감당키 어려운 후회가 서서히 몸을 잠식하려 들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예?"


주눅들어가던 몸이 감전된 것 마냥 퍼뜩여서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서 평소의 목소리보다 최소 1옥타브 높았다. 한마디로, 얼빠지게 들리는 새된 소리였다. 운명이 어쩌고 지껄일 때는 좋았지. 감점, 감점, 처음부터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지금까지 전부 다 감점이다. 내가 여자였더래도 나같은 놈은 거들떠도 안볼 놈인 것이 뻔했다.


"뭘 원하는데요?"


쿡쿡 키득대며 그녀가 거리를 가까이 해왔다. 여기가 인생의 분기점일 것인데, 그 어느 때 보다도 신중해야 할 때에, 나는 또 짓궂게도 보이는 그 웃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였다. 청순이라는 명사를 인간으로 치환한 듯한 외모인데 웃는 모습은 참 짓궂은게, 언뜻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물과 기름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라는, 있을 리 없는 현상과도 같은 존재 할 리 없는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넋이 나간 상태로 대답해도 누군가는 이해해줄 것이었다.  


"…운명."


그녀는 또? 라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는 매료됐다 라고 표현하기엔 한참 모자랄 정도로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그저 입이 움직이는대로 대답했다.


"운명을 원해요."


"거 참…"


한숨을 쉬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자고 정했으니까. 그녀의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 올려다보는 눈의 떨림 하나까지 모두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따라서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운명이란 지극히 독선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운명인 것이지만 그녀에게 품은 마음을 모두 언어로써 분출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도대체 뭘 보고 운명이란 건지? 그래요. 말 나온김에 한 번 말해 봐. 그 쪽이 말하는 운명이 뭐에요?"


그 요구에, 나는 먼저 두어번 심호흡 했다. 이 질문에는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도중에 말을 더듬지 않도록 혀와 폐에 적당히 긴장을 불어넣고, 이국 땅에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사와 같은 심정으로 첫 운을 뗐다.


'운명'이란 존재한다. 나는 운명론자도 아니고 운명론에서 말하는 운명과 내가 말하는 '운명'은 완전히 다르지만 나는 '운명'을 믿는다. 그녀와 지나쳤던 찰나의 순간, 앞으로 나는 '운명'을 믿겠다고 나 자신에게 고했던 것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운명'의 상대는 존재한다. 운명의 상대라는 것은 호적수, 친구, 사업 파트너, 혹은 이웃일 수도 있으나 그녀와 마주한 나 같은 경우는 반려자를 지칭한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운명은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 만큼 존재하며 인간 마다 오직 하나 만의 운명이 할당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운명이란 것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운명의 상대를 눈 앞에 두고서도 한 차례 스쳐지나갈 뿐인 인연으로 끝맺게 된다. 내가 뒤돌지 않고 역사를 내려갔다면 나 역시 이에 해당 되었을 것이다. 


"으흠? 그래서?"


그러나 어떻게든, 운이 좋았든 우연이 됐든 그 상대를 만났을 때 말로는 도저히 형용 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인다. 이유모를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평생을 함께 할 정도의 우정을 맺고 싶다고 여길수도 있을 것이며 일상을 구성하는 파편의 하나로써 안도감을 전해받을수도 있겠다. 나 같은 경우는 날개를 펼치고 춤추는 수백만 마리의 나비였다. 긁어도 긁어도 절대 사그라들지 않을 간지러움이었던 것이다.


"아하하하하! 뭐야 그게! 나비라니 감성적인 사람이네~"


하지만 또 다시, 대부분의 인간은 은연 중에 운명임을 자각한 그 순간에 도달했더라도 그 감각을 외면하고 만다. 상식이 자리잡은 나이의 인간이라면 운명이란 산타클로스 보다도 신뢰도가 떨어지는 녀석이라고 여긴다. 다양한 매체에서 쓰이는 소재로써나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인간은 단 한발자국만을 남겨놓고서도 운명을 놓치고 만다. 그러니…


"계속 해요."


"여기까지에요."


"응? 정말? 더 없어요? 장황하게 말하더니 왜 도중에 끊어?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는 운명이란게 뭔데?"


"말했잖아요. 형용 할 수가 없는 감각이라고. 수백만 마리의 나비라고."


"아니 뭔… 아, 그래요. 형용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어찌 할 도리가 없어서, 놓치면 후회한다 같은 생각이 들기도 전에 당신에게 온거에요."


"무작정?"


"무작정일 수 밖에요. 차마 말로는 전부 표현 할 수 없잖아요. 게다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걸요. 그럼 답은 하나잖아요. 어쩔 도리 없을 정도로 어쩔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면 그저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잖아요."


"…흐음. 있잖아요. 아무래도 우린 스쳐지나갈 인연인 것 같은데?"


"무슨 소리죠?"


"난 당신에게 별 감흥 없다는 소리. 게다가, 주위 좀 봐요.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당신 목소리 꽤 컸거든요? 반했다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나 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감흥이 없다고요? 아뇨. 거짓말이에요."


"뭐?"


"거짓말이라고요."


"…당신 나 알아? 어떻게 확신 해?"


"당신도 나 처럼 뒤돌아봤잖아요. 한참을 서로 쳐다봤잖아요."


"당신을 본게 아닌…"  "내가 그랬듯이… 내가 나비를 느꼈듯이 나에게서 뭔가를 느꼈잖아요."


"…"


"게다가, 정말 별 감흥 없다면 처음부터 나를 그냥 무시하고 갔으면 될 일이잖아요."


"…진짜 장난 아니네."


"놓치기 싫으니까요."


"초면에 완전 막무가내야."


"칭찬으로 들을게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당신이 정말로 잘못 느꼈을 가능성은?"


"반대로 물을게요. 나한테 별 감흥 없다는게 진심이면 지금 바로 가던 길 가셔도 되요."


"허어…"


"내가 이겼죠?"


"……당신 뭐… 그런거에요? 선수?"


"총각이에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마침내 그녀는 항복의사를 터져나온 웃음으로 대신 나타냈다.


"됐어됐어. 일단 자리 좀 옮겨요. 다 쳐다보잖아."


그녀는 앞서 걷다가 잠시 머뭇대더니 나와 어깨를 맞췄다.


"그래서, 결국 당신이 생각하는 운명이란 건 뭔데? 당신이 말한 건 운명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으레 떠올릴 이미지잖아. '운명이란 건 이렇다.' 라고 말한 거 밖에 더 돼? 동문서답이야. 동문서답."


난 당신의 생각을 물은 거라고. 라며 재답을 촉구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게. 난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생각해 보니 참 두서 없이 지껄여댔다. 그냥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두려고 발버둥 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렴 어떤가. 그녀의 품평을 통과한 이상 뭐든 답으로 삼아도 상관 없었다. 


"당신이 대신 대답했네요. 동문서답이에요. 그런게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뭐어?"


"혹은 두서 없는 무언가일수도 있겠죠. 우리 둘 다 지나쳐갔다가 갑자기 뒤돌아 본 것 처럼."


"…됐어. 뭐라도 같이 먹을랬는데 그냥 갈래."


한동안 역사 반대편으로 같이 걷던 와중에 휙 하고 앞으로 튀어나간 그녀는 성큼성큼 멀어지다가 방금과 같이 머뭇대더니 다시 돌아왔다.


"손목."


뾰로통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네?"


"손목 달라고요!"


언성을 높힌 그녀에게 잠자코 오른 손을 건내자 다짜고짜 소매를 걷더니 팔목을 확인한다. "왼손!"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 알아챈 나는 미리 왼손의 소매를 걷고 팔을 내밀었다. 스마트 워치의 잠금패턴을 묻고서 패널을 띄운 그녀는 통화기능으로 들어가 카테고리에서 연락처 등록을 선택하고는 이내 다시 닫았다.


"내 번호. 준비되면 연락해요."


"에… 네? 준비되면요?"


"먼저 운명이니 뭐니 떠들어댔잖아. 그럼 보여 줘."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떠나갔다. 몇 번이고 불렀으나 멈추는 일은 없었다.


보여달라고. 애매모호하게 다가온 말인 만큼 애매한 짐작 밖에 가지 않았기에 나는 새 집으로 귀가 후, 후다닥 달려나온 마리아가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을 제지하고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그녀가 말한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연인이 생기셨어요!?"


"어… 음… 아마도?"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역시, 초면에 다짜고짜 고백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청혼을 했다면 어떨까. 가정해봤더니 눈 앞이 아찔해진다. 거의 본능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이성이 한 줌 정도는 남아있던게 다행이었다. 내게 연인(아마도)이 생긴 것이 제 일인 양 방방뛰며 기뻐하는 마리아를 따라 집 안을 둘러본다. 외관은 미리 봐두었어서 크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는데 이건 커도 너무 크다. 현관 복도의 길이 부터가 범상치 않은게 대충 가늠해 봐도 이 집은 과거의 그 별채보다도 반 배는 더 넓은 듯 했다. 더 흰색을 테마로 인테리어된 거실을 돌아보고 2층으로 향하기 위해 주방과 거실에 걸쳐져 있는 나선계단을 오르다가 마리아가 멈춰섰다.


"보여달라… 보여달라… 음…"


"짐작가는게 있어?"


왼손을 받침대 삼아 오른손으로 턱을 매만져가며 골똘히 생각하던 마리아가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만나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 여성 인간 님도 도련 님을 돌아봤다면서요?"


"그랬어."


"그럼 괜찮을거에요. …아마도?"


의지되는 말투였던 마리아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마친 탓에 한숨이 나왔다. 


"뭐야… 마리아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여자라곤 너희 밖에 모르니…"


"설마요. 인간 님들의 일을 안다니, 그럴 리 없어요. 알아서도 안되고요. 특히나 연애사라면 더더욱 그렇죠."


"마리아는…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다를게 없잖아."


마리아가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뇨. 달라요. 실은… 완전히 다르답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알고 있는 거라곤 도련 님을 모시기 위한 지식 뿐이에요. 게다가…"


마리아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아마도 '인간'과 다름을 내게 이해시키기 위해 추가적으로 덧붙이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마리아의 목소리가 백색으로 가득한 거실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일은 없었다. 마리아를 제지하기 위해 내가 손을 든 것 보다도 먼저 하려던 말을 목구멍 뒤로 되삼킨 마리아가 다시금 살갑게 웃으며 2층으로 나아갔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 워치의 패널을 켰다. 패널에 비춰진 얼굴은 찡그리고 있다. 딱히 찡그릴 생각은 없었는데 찡그리고 있는 이유는 모순 때문이다. 그래. 모순. 지금 마리아가 한 말은 내가 받아온 교육과 그 교육을 담당한 그녀들의 행보와 모순된다. 바이오로이드와 인간 사이에 선을 긋지 못하게 했으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근무 해오던 보육원에서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은연 중에 실수라도 했는지도. 내뱉은 말과 대비되었던 마리아의 살가운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원인은 모르겠다. 그저 훗날, 나는 모든 게 끝났을 때 아주 자그마한 시간을 통해 그럴 법한 추측을 해봤을 따름이었다.


급격하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와 함께 2층에 이어 3층까지 돌아보고 있는 사이에 알렉산드라와 소완이 돌아왔다. 구청에서 이사와 관련 된 수속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 둘 모두 말투는 건조 했으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끝에 가서는 공통된 단어를 입에 올렸다. '막무가내.' 번화가에 이어 두번 째로 듣자니 자동으로 그녀의 얼굴과 그 얼굴 앞에서 내가 저지른 구애 행위가 머릿 속에서 재생되어 식기를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표정도 말투도 모두 심드렁했다. 외식하자던 약속을 깬 것에 아직도 못마땅한 것이 남아있는 듯 했다. 나는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미안. 이라 말했으나 뒤이은 마리아의 말에 지워져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 축하가 아니라요?"


갸웃 거리는 마리아 옆에서 소완이 키득댔다.          


"무모했던 도령이 상처 받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란 것이겠지요."


"그 말대로 입니다. 도련 님.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셨어야 했어요. 인간 여성 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다음에 만나셨을 때 꼭 그 부분만은 사과하시는게 좋겠네요."


"…알았어."


"…축하드려요. 도련 님. 이걸로 저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라의 표정은 언젠가 보았던 표정이었다. 언제였지… 머릿 속을 더듬어 찾아보니 그 표정은 17살의 겨울 때 봤던 표정이었음을 떠올렸다. 그제서야 한시름 놓는다는 말이 이해가 되어 나는 웃어야 할지 울상을 지을지 알 수 없어졌다. 


"도령." 식사가 끝나 뒷정리를 하던 와중에 소완이 다가왔다. "소첩은 기쁘옵니다."


"뭐가?"


"비로소 한 명의 인간으로 완성 되셨지 않사옵니까."


가끔, 소완은 영문을 알 수 없거나 말을 하더라도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명확히 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나 그 특유의 옅은 미소를 곁들이면 살짝 오싹하기까지 한데 지금이 딱 그랬다. 


"어… 응. 고마워. 다 너희 덕분이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오늘 있었던 일을 축하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밝게 웃어주었다.


"도령… 도령…"


소완으로부터 뻗어 온 두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명치 언저리에 푹신한 감촉이 들어 서둘러 몸을 빼려는데 소완은 놔줄 생각이 없었는지 거의 조이다시피 할 정도로 팔에 힘을 준다. 오늘은 이상하다. 마리아도 그렇고 소완도 그렇고 평소와 달리 행동거지가 명확하지 못하다고 해야할까. 특히 소완은 어딘가 붕 뜬 것 같이 행동한다는 느낌이 든다.


"소, 소완. 이제 그만… 허리 아파."


"이제 머지 않았사옵니다."    


말을 해도 풀어주질 않아 어깨에 탭을 몇 번 쳐서 정말로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서야 소완은 물러났다. 도중에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곧바로 짐정리를 하러 가겠다고 해서 알 길은 없었다. 원래 말투나 목소리 자체가 차분하고 조용하니 내가 잘못 들은거 였을거다.


하루를 마치고 잠잘 준비도 마친 뒤 과하게 넓은 방과 과하게 넓은 침대에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되돌아봤다.


오전엔 실험.


해질녘 즈음엔 썩 유쾌하지 못했던 사장과의 재회.


그리고 그녀.


연갈색 눈, 라이트 플로랄 계열의 샴푸 향, 아담한 연분홍빛 입술, 검은 색 터틀넥, 체크 패턴 미니스커트, 심야의 어둠으로 직조해낸 듯한 머리칼.


처음으로 느끼는 충만감.


하루를 구성하는 모든 시간들 중에서 가장 짧았음에도 그녀와 보낸 밀도 높은 단 몇 분만이 내 머릿 속에 가득했다. 그 몇 분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고 형용 할 수 없는 만감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공허함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듯 내 안은 수백만 마리의 나비들이 노니는 시푸른 정원으로 변모해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마리아, 소완, 알렉산드라. 나의 가족들과 보낸 19년이란 시간들로도 메워지지 않던 가슴 속의 블랙홀은 오늘 보낸 고작 몇 분의 시간에 의해 나비정원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오늘 보낸 몇 분을 사랑한다면 지난 19년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좀 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놈, 나는 자조한다. 그 어떤 감정도 감흥도 일시적으로 밖에 느끼지 못해 가슴 속에 아무것도 없던 주제에, 그렇기에 가족들과의 시간을 돌아 볼 이유 따윈 없고 돌아본다는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못해야 할 것인데 이제와서 무얼하는 것인가. 설마하니 그런건가? 몸 만은 반응한다는 추잡스러운 경우 말이다. 그렇다면 뭐에 반응하는건데? 물어 볼 필요도 없다. 19년 분의 일시적인 감정들의 부산물 찌꺼기들이 반응한 것이겠지. 그래. 감정 자체는 느꼈으니까. 그 감정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공허가 아무리 아가리를 쩍 벌리고 쩝쩝댔더라도 찌꺼기는 남는 것이다. 나는 그런 찌꺼기로 구성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후로, 나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감정들의 부산물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운명의 그녀에 의해 재구성 되어 살아있다는 뚜렷한 생동감과 그 어느 때 보다도 선명하고 뚜렷한 자아를 갖추게 되었으니까. 때문에, 더 이상 나 자신을 AGS에 빗댈 필요가 없다. 그녀와 함께라면 나는 '인간'으로써 존재 할 수 있다.


가슴 속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쌓아올리면 그만이다. 내 인생도 24살이 되어서야 빛을 띄게 되었으니 쌓아올려지지 않았던 가족들과의 시간도 앞으로 쌓아올린다면 그만인 것이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을 시간들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내 안에 멤돌 시간들을.


"아, 잠깐."


나나 가족들은 이제 문제없다 쳐도, 그녀는 어떡하지? 그녀는 바깥 사회의 존재잖아. 혹시라도 바이오로이드들을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이제 막 막무가내로 맺어졌을 뿐인 관계가 금방 끊어져 버린다면 어떡하지?


가족과 그녀를 두고 저울질 해야하나?


"…"


그녀가 말한 준비. 그것을 무엇으로 해야할지 알 것 같았다. 꽃다발이나 호화스러운 선물이 더 나은 선택지로 비춰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음을 직감한다. 무엇을 근거로 하냐고? 당연히 운명이지 않은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명품 백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가슴 속에서 노니는 나비들을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막무가내로 행동해보기로 했다. 이미 한 번 저질렀으니 두 번이라고 못할 것은 없으니까.






//////





  

"가장 먼저, 이미지를 정하는 것 부터 시작해요."


"으흠?"


"이미지는 명징 할 수록 좋아요. 그리고 세부적이면 더 좋죠. 예를 들어 그냥 '하늘' 보다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인 편이 효과가 더 좋아요."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둘로 나뉘어요. 이미지를 보이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보여줄 것이냐, 자유롭게 연상하게 할 것이냐로요. 전자 같은 경우엔 그냥 이미지를 코드화 하면 되고 후자 같은 경우엔 문장을 코드화 해서, 되도록 추상적으로 넌지시 던지죠. 아무래도 후자가 좀 더 어렵지만, 그 만큼 효과는 더 커요. 그리고… 이 코드들을 나노머신에 입력하고 뇌로 향하게 하는 거에요. 주로 영향을 미칠 부분을 구체적으로 정해주면 좋지만 보통은 그냥 나노머신이 알아서 가도록 두는 편이에요. 여기에 모듈까지 추가해주면 좋은데, 나노머신이 직접 뇌에 작용하는 이상 모듈은 어디까지나 보조라 정말 세밀하게 조율하려는게 아니면 쓰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 손을 거친 바이오로이드는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바이오로이드들 나름이에요. '푸른 하늘'을 예로 들어볼까요? 푸른 하늘하면 뭐가 떠오르죠? 나같은 경우엔 상쾌함, 자유 정도가 떠오르네요. 만약 내가 '푸른 하늘'의 코드를 지닌 나노머신을 투여 받은 바이오로이드였다면, 아마 감각적으로 상쾌해져서 보고, 겪고, 받아들일 모든 것을 융통성을 가지고 대할 것 같네요. 혹은 매순간 새롭다고 여길지도 모르죠. 그리고 자유는… 바이오로이드에게 자유란 없다시피 하니 아마 바이오로이드에게 허용 된 범주 내에서 적절한 것으로 치환 되겠죠. 예를 들면… 머릿 속이 조금 가벼워진다던가. 걱정 근심 따위가 많았던 경우에는 그러한 것이 살짝 잦아든다던가."


"있잖아요."


"네."


"당신 진짜 연구원 맞아요? 바이오로이드 만드는 사람 맞아?"


"정확히는, 모듈 개발 부서에서 일해요. 연구 중인 분야는 바이오로이드의 사고회로이고요.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감정조율 쪽도 …"  "잠깐."


말허리를 끊은 그녀가 멈춰섰다. 열성적으로 말하느라 주변을 신경쓰지 못했는데 어느새 번화가를 지나쳐 낙후된 건물들이 난립한 곳으로 들어서 있었다. 금이 쩍쩍 간 차도로와 회백색 일색의 허름한 건물들과 그 사이마다 위치한 으슥한 골목의 입구들이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걸음걸이와 방향은 그녀에게 맞췄는데 어떻게 된거지? 그녀 같은 사람이 다짜고짜 이런 곳에 들어서다니. 어쩌면 그녀는 이 쪽 주변 길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되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여기서 기다려요." 인도 안 쪽으로 난 벤치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내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다가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벤치에 앉았다. 차도 너머 반대편으로 건너 간 그녀가 성큼성큼 걷는 방향의 앞 쪽엔 그래피티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건물 외벽을 배경으로 무료급식소의 봉사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겠지. 노숙자… 노숙자?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 느슨해진 것이었는지, 그 단어가 내포한 위험성을 잠시 잊고 말았던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그녀를 향해 달렸다.


"뭐야? 기다리라니까?"


"노숙자들에게 가서 뭐하게요?"


이상한 걸 볼 때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인사하러 가는데?"


"아니… 위험하잖아요."


"위험 해?"


"네."


"……아하. 그렇지 참. 당신은 모르지."


방금 전에 그녀가 지었던 표정을 이번에는 내가 지을 차례였다.


"모르고 자시고… 노숙자들은…"  "내 지인들이야."


"…에?"


지인들이라고? 우아한 랩 코트 차림의 그녀와 저 노숙자들이? 아무리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라지만 기막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삼촌들이라고."


훠이훠이 손짓하고서 그녀는 걸음을 빨리했다. 따라 잡아 몇 번 더 만류해 봤지만 이제는 대답 조차 하지 않는다.


"어~이~ 삼촌들~"


허름하고 후줄근한데다 도대체 언제 세탁했는지 의심스러운 옷 차림의 노숙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포옹하고서 그녀는 잠시 날 뒤로 한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 대화엔 급식소의 봉사자들도 함께였다. 노숙자들만이 아니라 봉사자들과도 안면이 있는 듯 했다. 


오랜만에 본다는 이야기, 날이 갈수록 그녀의 외모가 예뻐진다는 이야기, 급식소의 식사 마저 갈수록 질이 나빠진다는 이야기, 봉사자들에게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은데 일자리는 꿈도 못꾼다는 이야기, 서민과 하층민들의 자살율이 하루하루 부쩍 늘어간다는 이야기,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찾는 누군가는 마지막으로 벌어진 시위에서 맞아죽었다는 이야기.


그 어떤 이야기들도 내가 끼어들 껀덕지가 없었다. 더하여 그녀와 노숙자들의 화기애애함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 쌓아올리지 않고서는 결코 갖출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서로들 말투는 거칠었으나 거리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흡사 매체에서 비춰지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나와 내 가족들도 저렇게 까지 가깝게 굴지는 않았다. 그녀들이야 어떨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피티가 그려진 벽에 기대어 위를 올려다본다. 급식소 한 켠에 놓인 대형 스테인리스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다. 밝은 회백색을 띄고 있는 하늘은 오전보다도 밀도가 높아져 보이는게 얼마 안가 눈을 쏟아낼 준비를 끝마쳐가고 있는 듯 했다. 


그녀와의 첫만남 이후 첫 주말. 오전시간의 카페에서 부터 시작해 이 곳, 무료급식소에 이를 때 까지 파악해보기로, 그녀는 꽤나 마이웨이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청순한 외모에 우아한 차림과 완전히 대비되는 털털한 몸가짐과 시원시원한 말투도 그 마이웨이적인 성향에 한 몫 했다. 쉽게 말해 나는 오전 부터 지금 까지 내내 휘둘렸다. 그녀가 내게 요구한 준비라는 것에는 데이트의 리드도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겼는데 리드는 커녕 단 한 번도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적이 없었다. 그저 이것 저것 물어올 때 마다 대답하거나, 내가 어설프게라도 짜놓은 데이트 코스는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이끌려 다니는 것이 내가 한 전부였다.


외모와 인상과 달리 꽤 당차다는 건 첫 날 부터 느끼긴 했는데,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의외도 매력적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단, 노숙자들이 위험하다느니 뭐니 지껄인 부분 부터 사과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중에 그녀가 손짓했다.


"삼촌들 인사 해. 내… 남친. 일단은. 자, 당신도 인사."


그녀와 인연 깊은 자들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행색에서 풍겨오는 위협적인 분위기는 여전했고 표정들도 험악했기에 나는 쭈뼛댈 수 밖에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다시 일으킨 다음에 본 그들의 표정은 더 일그러져 있었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얼굴에 당장이고 달려들고 싶다고 써져있는 이도 있었고, 표정 자체는 차분 했으나 끝도 없이 내리깔린 냉기를 뿜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너한테 남친?" 후드를 뒤집어 쓴 노숙자가 말했다. "차라리 김지석이가 대중 앞에서 자위를 했다고 해라. 그 편이 더 믿을만 하니까."


"진짜야. 이 사람이 말이야, 다짜고짜 나보고 운명의 상대라면서 붙잡았다니까?"


"푸하하하!" 수염이 덥수룩한 노숙자가 웃으며 나를 보았다. "이 기지배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어느 한 구석만 마음에 드는게 아니라 전부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고 자시고 그런 생각이 들기 전부터 들이댄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목청을 높였다.


"왜! 나 정도면 좀 생겼지! 남자 하나 충분히 꼬이게 할 정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그녀가 대답하자 나와 그녀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웃었다.


"야야, 그만 놀려라."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노숙자가 한 발 나섰다. "운명이라잖냐. 얘도 이 도련님 같은 남자가 마음에 든 구석이 있었으니까 남친이라 했겠지."


"어이, 도련 님."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노숙자가 말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그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듣자니 내가 속한 직장의 임금님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한 것 같은데 (그리고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적개심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삼안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대답 했다간 당장이고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가래. 꽤 실력이 좋다나 봐."


그런가. 도중에 끊어졌던 나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나를 연구원이라기 보다 화가에 가깝다고 여겼던 듯 하다. 연구소에서도 곧잘 듣는 소리기도 했고 실제로 나 자신도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니 적절한 답변이었다.


"화가? 실력이 좋다고? 인간이? 그럼 꽤 유명할텐데?"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는 뉘앙스의 의문도 그녀는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익명으로 활동하거든. 작품들도 다 디지털이고. 삼촌들은 스마트 워치 같은 거 없으니까 확인 할 수도 없잖아."


그 쯤 해서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슬슬 이 곳을 떠나려고 마음 먹은 것 같았다. 다짜고짜 였지만 그녀의 기질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는 흐름이다. 다시 길 건너 반대편으로 향하다가 '우리 애 잘 부탁해!' 라는 외침에 나는 뒤돌아 최대한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무서운 노숙자들에서 장인 어른으로 위치가 바뀐 그들에게 마땅한 인사였다.


"화가라고 소개한 거. 나쁘지 않죠?"


씨익 웃으며 어깨를 부딪혀오는 그녀에게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런 재주는 어디서 배웠는데? 학교?"


뭘 지칭하는 건지 몰라 잠깐 헤맸는데, 곧바로 끊겼던 대화를 재개 한 것이라고 깨닫고서 입을 열었다.


"아뇨. 그냥 하다보니까요. 알아서 그렇게 되더라고요. 배운 건 기초지식 정도 였는데 말이죠."


"뭐야. 되게 모호하게 말하네. 당신 재주도 모호한 면이 있는데 주인 성향 따라가는 건가?"


"그럴지도요."


"흠흠… 그래서, 당신의 그 연구가 지향하는 건 뭔데요?"


다른 질문들과 달리 나는 이 질문만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어림잡아 1분은 넘게 고민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인생에 있어 1순위 목표였던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동료 연구원들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던 그것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반복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의 해방을 원해요. ……삼안은 대 바이오로이드 병기를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지만요."


"…"


차마 직시하지 못할 표정을 지은 그녀였기에 나는 살짝 완화된 표현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내 가족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요."


"저기요."


번화가의 초입을 앞 둔 지점에서 벤치에 앉은 그녀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두들기며 내게 앉을 것을 촉구했다.


"바이오로이드를 사랑해요?"


좋아하냐는 균형잡힌 표현도 있는데 굳이 사랑하냐는 편향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내 바람이 단순히 좋아하는 걸로는 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였을 것이다.


"사랑한다기 보단… 소중하죠."


어디까지나 가족에 한해서 말이다. 물론 공공재로 취급되는 주인 없는 바이오로이드에게도 나쁜 인식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좋아한다고 보는 편이 알맞을 것이다.


"당신은 어때요?"


그리고 그녀에게 되물은 이 질문이 오늘의 메인이었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 향후에 괴로울지 기쁠지가 결정된다. 부디, 바이오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를. 나와 같은 소수자이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철렁하고 가슴이 내려앉은 감각을 전부 느끼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싫어하지도 않고요."


"…그렇군요."


"…한 가지, 경고해도 되요?"


거리를 좁히고 얼굴을 내밀어 오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후회할 걸요."


"네?"


"바이오로이드에게 정을 주면 후회할 거라고요."


어째서? 그녀가 해온 경고에 나는 동의 할 수 없었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정을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냐 되겠냐만, 그 정을 주는 소수 중 하나인 내가 말하건데 후회 할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후회할 일 없다고 반박하려 했는데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뒤였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잖아요. 바이오로이드에게 정을 주는 인간은 주변에 정을 줄 곳이 없는 패배자라고."


"…"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패배자인 건 싫어요. …뭐, 이건 농담이지만."


후- 하고 입김을 한 번 내뿜은 그녀가 등받이에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주변에 꽤 있었거든요. 정을 준 건 아니었어도 최소한의 신뢰는 가졌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 다 하나 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 했어요. ……당신에게 경고한건요. 인간에게 바이오로이드란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같은 얘기를 떠나서, 주변에 워낙 안좋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한 소리에요. 그러니까 적당히 선을 그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어디까지나 도구니까요."


"바이오로이드가 싫지는 않다고 했죠?"


"네. 아, 한가지 더 말해주자면, 난 바이오로이드를 거칠게 다룬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다행이에요. 다른 나쁜 사람들과 같을까 걱정했었어요."


안도와 함께 내뱉은 말에,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뭐? 나쁜 사람들? 설마 바이오로이드를 거칠게 다루는 걸 나쁘게 보는 거에요?"


"당연하죠. 아무리 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라지만 하나의 인격체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건… 잘못 됐어요."


17살 무렵 골목에서의 일이 떠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낙후된 곳도 그 골목과 분위기가 엇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먼 발치에 보이는 노숙자들, 그녀가 삼촌이라 부른 자들도 어쩌면 바이오로이드를 그런 식으로 다룬 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잘못 되지 않았어요. 반대로 거칠게 다루는 게 옳은 거라고 말하지도 않을게요. 그리고 당신 말투로 미루어 보건데,"


"네."


"바이오로이드를 감싸려고 드는 것 같아요. 이건 내가 확신할 수 있는데요. 바이오로이드는 감싸 줄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도덕이 바닥에 떨어진 세상이라고요? 아뇨. 우리는 그 어느 시대와 비교해봐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위하고, 보듬고 있어요. 삼촌들이 그렇고, 내가 그렇고, 지금도 길거리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그렇죠."


"…이해가 잘 안되네요."


"당연히 안되겠죠. 당신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정을 주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 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밖에 못여기는 거 아니에요? 인간들 사이에서나 통용되고 유지되는 도덕을 바이오로이드에게 적용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요. 부탁이에요. 바이오로이드를 통해서 현대의 도덕과 윤리를 판단하지 말아요. 그런 잣대를 인간에게 들이밀지 말라고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나는 바이오로이드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 인간의 기준에서 바라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자라왔고 애초에 인간이라는 자각이 옅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는 인간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와 다를 게 없었고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보면, 바이오로이드 보단 AGS에 가까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바이오로이드가 싫지는 않다고 말한 그녀가 점점 과열되어 가는 이유를. 분명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냥 불쾌하게만 여기고 넘기면 될 일을 이렇게 까지 열을 올려가며 대할 필요는 없었다. 흡사 계도하려는 것과 같이 내게 경고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나는 실례임을 알면서도 점점 더 커져가는 그녀에 대한 감정에 떠밀려 묻고 말았다.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


"안 될까요?"


벤치에 완전히 기댄 자세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짧게 한숨을 쉬고 내게 말했다.


"……좋아요. 화가 님. 전부 말해줄게요. 단, 당신에 대한 것도 전부 말해 줘야해요."


"네."


그녀가 첫 운을 떼고 입김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그것도 특수부대라는 곳에서 근무하던 강건하고 굳센 자 였으며 육체적인 강함을 가진 자가 미덕으로 삼는 성숙하고 고결한 정신까지 겸비한 자 였다. 따라서 아버지로서도 손색이 없었는데 의젓하면서도 자상한데다,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모든 정신적 가치를 그녀가 가지길 바라던, 거기에 더해 일정 비율의 장난기를 함유하는 것도 잊지 않던, 한 마디로 매체에서 이상적으로 그려지는 존재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간호사로, 거리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돕거나, 아무 문제없는 접객태도로 딴지를 거는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시달리던 식당 종업원을 구해주거나, 운전하던 차가 추돌 당해도 뒷목을 부여잡기 보다는 상대 운전자의 몸 부터 신경쓰는 아버지의 '남자다움'에 한 눈에 반한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반해버린 당시에 대해 말하길, 그것은 운명이라 했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검지를 세워 나를 가리켰다.) 그렇게 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자신은 이 남자를 만나 그 고결함에 한 눈에 반해버릴 것이라는 운명. 그 운명에 순순히 따른 어머니는 교통사고의 가해자된 입장을 잊고, 추돌의 피해자인 그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묻는 것 보다도 빠르게 '나와 결혼하자' 라고 두서없는 청혼을 했다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한술 더 떴는데 그 갑작스러운 청혼에 당황하는 일 없이 정말 자연스럽게, 맺어져야 하는게 당연하다는 뉘앙스로 청혼을 받아들였단다. 교통사고를 수습하는 현장에서 청혼의 현장으로 변모한 도로는 축하의 박수갈채와 휘파람 대신, 경악스럽다는 표정이 주를 이뤘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게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는데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마이웨이함에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이 경악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들의 나이 20대 중반. 만나자마자 일년 뒤, 결혼식을 올리는 것 보다도 빨리 그녀는 태어났다.


인간이 가지는 직업에 있어 가장 거칠고 험한 직종을 10개만 꼽으라면 누구나가 그 10개 안에 포함시킬 것 같은 직업을 가졌던 부모였기에 그녀는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보다 홀로 집을 지키는 시간이 많은 성장배경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이상적인 부모의 소유자이기도 했어서 그녀가 엇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딸인 그녀 쪽에서 부모들을 걱정하느라 바빴다. 슬슬 그녀가 작은 몸으로도 홀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무렵부터는 그 걱정이 극에 치달았는데 날이 갈수록 귀가가 늦어지는 어머니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짙어졌고 그녀와 놀아주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시간이 더욱 길어진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시간들 속에서 하루는 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했다. 


"딸아. 먼 곳에 있는 아빠의 동료들이 지금 매우 힘들어 하고 있단다. 아빠는 그 동료들을 도와주러 가야 해. 그러니까, 기다려줄 수 있지?"


도와주러 간다는 것은 곧 싸우러 간다는 의미임을 또래에 비해 성숙했던 그녀는 알고 있었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더욱 외로워질 것이지만,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통화하는 시간 보다 자신과 놀아주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하는 것은 울며 매달려 아버지를 근심어리게 하는 것 보다 아버지와 같이 의젓한 자세로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 뒤. 믿어 의심치 않은대로 연합 전쟁의 전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어딘가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 같은 건 다름 없었다. 자주 뒤를 돌아보고, 가족이 아닌 주변인의 접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방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울부짖는 것들을 뺀다면. 몇 달의 시간이 더 흘러 아버지가 꺼낸 말에 어머니가 발작에 가까운 분노와 슬픔을 표출 한 것을 뺀다면.


허트 로커 속에서 허우적대던 아버지가 결국 선택한 것은, 전장으로의 복귀였다.


'제발! 다시 갈 필요 없잖아! 당신이 없어도 싸울 사람들은 있잖아!'


'안 돼. 여보. 그럴 순 없어.'


'내가 요새 왜 늦는 줄 알아? 나라에서 민간 병원까지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들어오는 군인들이 신음하는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 당신이 생각나서! 팔다리가 날아가고 호흡기 하나에 목숨줄을 연명하는 군인들을 보면 당신이 생각나서, 당신도 같은 꼴을 당할까봐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야!'


'여보.'


'…제발, 나와 아이를 생각 해.'


'난 가야 해.'


'가족보다 동료가 우선이라는 거야? 가족은 소중하지 않다는 거야?'


'그런 게… 아냐.'


'또 다시 전쟁터로 뛰어들면… 우리는 끝이야.'


멀쩡한 문장보다 울음소리의 비율이 더 높던 대화들이 오고 간 그 다음 날, 아버지는 떠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터로 뛰어든다면 결별할 것이라던 어머니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많이 힘들어 했지만 그녀를 양육하는데에 집중했다.


어쩌면 상실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어머니는 더욱 자신의 양육에 집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거대해져가는 상실의 괴로움을, 딸인 그녀로도 달랠 수가 없어졌을 때. 어머니는 쪽지 하나만을 남겨놓고 떠났다.


집이 아닌, 세상을.


그 당시 나이 14세. 그녀는 모든 가족을 잃었다.





"당신이 위험하다고 한 저 노숙자들. 저 삼촌들이 내 아버지의 동료들이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급식소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이 모두 떠나가고 삼촌들이 날 맡아줬어요. 학교에 보내주고, 직업을 얻을 때 까지. 전장에서 돌아온 그들이 설 자리도 없어질 때 까지."


"…"


"내 아버지는 사살 당했어요. 바이오로이드 한테요. 하루는 가족끼리 길을 가던 중에 험한 꼴을 당하던 바이오로이드를 아버지가 구해 준 적이 있었어요. 다수의 남자들을 상대했다 보니 조금 다쳤지만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죠. 그리곤 말했어요. '딸아. 바이오로이드를 미워하지 말렴. 그녀들은 정말 가여운 존재들이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들을 보듬어 줘야 해. 알았지?' 참 아이러니 하죠? 바이오로이드를 포용하고 감싸던 인간이 바이오로이드에게 죽임을 당했다는게."


"그…"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 전장에 있을 때, 아버지가 정찰 임무를 띠고 나섰을 때래요. 정찰 중에 군용 바이오로이드와 정면으로 맞닥드렸는데, 아버지 쪽이 교전에서 승리했어요. 네명 대 네명 간의 교전이었죠. 둘은 교전 중에 죽었고 둘은 포로로 잡았어요. 여기서 나머지 셋의 동료들과 갈등을 빚어요. 바이오로이드들을 살려 보낼 것이냐, 즉각 사살할 것이냐로요.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죠.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아니고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니까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바이오로이드를 살려주기로 결정해요. 가장 큰 신임과 신뢰를 받던 아버지였으니 결국은 다들 고분고분 따랐죠. 동료 한 명은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동조했지만, 나머지 둘은 큰 실수한 거라면서 아버지를 잠깐 나무랐기도 했지만요. 그리고 해가 질 즈음에 임무를 달성하고 복귀 하던 때. 아버지와 동료들은 포위 당해요. 단 네명을, 백 명에 가까운 바이오로이드들이. 아버지는 직감한 것 같았어요. 이길 수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다고. 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렇다면 투항하자. 포위 당한 중에 단 한 발의 탄환도 쏘지 않은 아버지는 무기를 내려놓고 양손을 든채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다가갔어요. 대장격으로 보이는 바이오로이드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어요. ……그 총상을 입힌게… 아버지에게 총을 쏜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무슨 짓을 한거지. 그녀로 하여금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한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다니.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일 것이 분명했다.


"풀어줬던 그 바이오로이드였어요. 그 바이오로이드. 아버지를 사살하고서는 품을 뒤지더군요. 한참이나요. 그렇게 품을 뒤지고 나서 손에 종이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확인하고는 쫙쫙 찢어버렸어요. 삼촌들에게 듣기로 그 봉투는 나한테 부칠 편지였대요. 왜 화상통화나 메일이 아닌지 궁금하죠? 바이오로이드들이 통신망을 봉쇄 했었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편지라도 쓴거라고요. ……그리고 그 바이오로이드. 꽤 기뻐 보이는 표정을 지었어요. 너털웃음까지 흘리던데요? 대단한 공을 세운 걸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겸손을 떨면서요."


나같은 경우엔 그런 인간을 아버지로 뒀던 이상 그녀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 떨리는 목소리, 책과 매체를 통해 나타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의 아픔을 감히 가늠해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상실은 감히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게 아버지의 헬멧에 달린 카메라에 녹화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전부 봤죠. 삼촌들과 함께…"


"…미안해요."


"뭐가요? 당신이 미안해할 건 없고 이런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에요. 게다가 이야기는 아직 이어져요. 내가 17살 무렵에, 하교 하자마자 전화가 한통 왔었어요. 삼촌들 중 한 명이었죠. 이렇게 말했어요. '네 아버지를 죽인 바이오로이드의 거취를 파악했다.' 라고요. 그리곤 덧붙이더군요. 선택은 나에게 맡긴다고요. 알고 있나요? 소수의 군용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는요.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하면 사회로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있대요. 내 아버지를 죽인 바이오로이드는… 브라우니는 한 중산층 가정의 경호원으로 고용된 상태였죠. 나는 학교를 빠지고 삼촌들과 함께 은밀히 움직였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 브라우니를 마주하는 날, 우리는 심야에 그 중산층 가족들의 집으로 침입했어요. 놀라도 되요. 나쁜 짓인 건 나도 아니까. 어쨌든, 우리는 그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브라우니를 포박해 무릎 꿇렸어요. 내 아버지가 당했던 것과 똑같이. 나는 물었어요. '왜 웃었냐고.' 왜 죽였냐고는 묻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동료들에게 명예로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전장에 나가는 군인인 이상 죽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고… 나는 그렇게, 매일 같이 되뇌였었으니까요. 그 브라우니가 대답했어요. '나는 웃은 적이 없다.' 라고요. 그래서 그 영상을 보여줬어요. 참 볼만한 표정을 짓던데요? 정말로 자각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듯이 굴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모르죠. 아무리 인간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존재라고는 해도, 감정을 가진 인격체인 이상 예측 불가능한 이상행동을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잖아요. 그 AGS들도 뻔하게 오류를 일으키는데 말이죠."


"계속 해줘요."


"그럼 쓸데없이 편지는 왜 찢었냐고 물었어요. 그러더니 브라우니가 이렇게 대답해요. '공을 세웠다는 고양감에 나도 모르게 그랬다.' 라고요. 그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투항한 포로를 즉결 사살한 이유를 묻고 싶긴 했지만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인간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고 대답할게 뻔했으니 말을 아꼈죠. 거기서 나는, 생에 첫 중대기로에 놓이게 돼요. 죽이느냐 마느냐. 몇 번이나 울부짖고, 삼촌들에게서 뺏어든 권총을 겨누다 내리길 반복하다가 결국 죽이지 않기로 했어요."


"그랬군요."


"나는… 나는… 아버지가 당부한 것을 따르기로 했어요. 이깟 브라우니보다 아버지의 부탁이, 가르침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니 죽여버리면 안되잖아요."


"대단… 하네요."


"칭찬해봐야 아무것도 안나오거든요. 어쨌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 그 브라우니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요. 어때요? 이 정도면, 바이오로이드를 좋아하진 않지만 최소한 미워하지도 않는게 다행이지 않나요?"


"맞아요."


"자, 그럼 당신 차례. 빨리 당신의 모든 걸 털어놔요."


약속한대로 나는 그녀에게 내 과거를 전부 말했다. 별 거 없는 과거이고 밀도도 한 없이 낮다보니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내 어깨를, 목을 끌어안고서 내 과거가 제 일인 양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주었다. 왜 이러지? 그녀의 과거에 비하면야 내 과거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여기거나 기분이 안좋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사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진즉에 내가 흘렸어야 할 눈물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운다는 건 번거롭다. 그 번거로움을, 그녀는 나를 대신해 감당해주고 있었다.


이 날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히 대화의 주제로 삼을만한 것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녀의 가장 소중한 부분은 나 혼자만이 품고, 공유하고 싶었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대화가 끝나자 눈이 그쳤다. 어깨와 머리 위로 쌓인 눈을, 우리는 서로 치워주면서 못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추위에 발그레진 그녀의 뺨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뒤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삼촌들' 에게 다가갔다. 나는 처음에 그들에게 느꼈던 거부감을 온데간데 없이 날려버리고 일일히 한 명 한 명 포옹하며 너무나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날로 부터 반년 뒤, 우리는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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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개변이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세계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는 강산도 최소 10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야 변하고 매체에서 표현되는 개변 내지 붕괴는 일반적인 스케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날, 나는 그 모든 걸 부정한다. 세계의 개변은 10년 이란 긴 시간을 들일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도 일어나며, 스케일로 따지면 한 없이 작은 규모로도 일어날 수 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지만, 나 만큼은 자각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규모로.


실제로 그런 사례를 증명하듯, 나의 세계는 그녀에 의해 하루가 멀다하고 개변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자주 웃게 됐다는 소리도 듣고, 세상 모든 것의 색조가 밝고 풍부해 보이고, 넘쳐흐르는 감정들에 기쁨을 주체 할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고.


나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야 할 청춘의 시기에 겪은 상실을, 그 상실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서로의 가슴 속을 메우고 가득 채워갔다. 그 보상의 방법은 여러가지였는데, 여행, 산책, 쇼핑, 집에서 빈둥거리기 등으로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 나 자신을 AGS와 다를게 없다 여기던 나에게는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고 그 신선함과 생동감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내가 재밌다는 듯 웃는 그녀에게도 나름대로의 각별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찾은 장소도 우리에게 새로움과 각별함을 전해주기에 손색이 없을 장소였다.


그 곳은 여러 도심 일대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테마파크였다. 스마트 워치에 내장되어 있는 입장권을 터치하고 잭 오 랜턴이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나자 형형색색의 눈부신 판타지가 펼쳐져있었다. 매점이나 회전목마, 회전그네 같은 놀이기구를 지나 바이킹에 다다른 순간 나는 아이 처럼 환성을 질렀다. 아니 실제로, 밀도 낮은 인생을 살아온 나는 아이와 다름 없었는지도 몰랐다.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배가 단진자 운동 중인 추 처럼 움직인다니, 영상으로는 봤지만 실제로 보니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것이다.


거 참 쥬브나일한 사람일세~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미소짓고 그녀의 손을 잡아 나란히 걸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된 소리들과 놀이기구의 구동음과 함께 테마파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경쾌한 빅밴드 음악이 흘러나오고,어트랙션 근처에서는 할로윈에 걸맞지만 다소 귀엽게 느껴지는 으스스한 음색이 들렸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테마파크는 상당한 숫자의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홀로 온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관람객들은 커플과 가족이 반반으로, 세상은 발전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해져만 가는데 아직 행복이 위치할 좁디 좁은 장소는 존재하고 있다는게 나름의 충격을 전해주었다.


"저긴 뭐지? B구역?" 


키르케가 다수의 남성을 인솔하는 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긴 신경 쓰지 마."


"뭔데? 알고 있어?"


"안좋아 안좋아. 나쁜 곳이야. 어린이는 가면 안되요."


"뭐야."


"궁금 해?"


"응. 궁금하지."


"정 궁금하면 말이야…"


"응?"


"내가 죽고 난 다음에 가 봐. 그건 괜찮아."


"뭐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해가 질 때 까지 바쁘게 테마파크 곳곳을 돌아다닌 우리는 마지막으로 대관람차에서 멈춰섰다.


스마트 워치의 입장권을 갱신하여 터치하고서 우리는 곤돌라에 올랐다.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대관람차의 곤돌라가 입구를 기준으로 45도 쯤 되는 위치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일은 어땠어?"


어둠이 깔린 테마파크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옆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나도 따라서 테마파크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테마파크 곳곳에서 조명들이 명멸하고 있는게, 마치 시골지역으로 여행 갔을 때 바라 본 밤하늘 같았다.


곤돌라가 90도 쯤 되는 위치에 다다랐을 때 말했다. 


"슬슬 연구 성과가 나올 것 같아."


"그렇구나."


그녀가 흐뭇하단 웃음을 흘렸다.


"일 년 전 겨울에 했던 말. 기억 나?"


"다 기억하고 있긴 한데, 그렇게 모호하게 말하면 콕 찝을 수 없잖아."


"바이오로이드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한 거 말이야."


"응 기억하지."


"후후…"


가늘게 눈을 뜬 그녀가 시선만 내게 향했다.


"왜?"


"꼭, 당신의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네. 하루 빨리 집에 있는 가족들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도 말이야. 그렇지?"


"…당신도 많이 변했네. 한 집에서 반년이나 같이 살다 보니까 당신도 바이오로이드를 가족이라고 부르는구나."


"어머, 안 돼?"


"안되긴."


가장 높은 곳을 넘어간 곤돌라는 반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있잖아. 키스할까?"


느닷없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키스?"


"싫어?"


"아니. 갑작스러워서."


"갑작스럽다고 몸을 내뺄 건 없잖아."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안그래도 내가 먼저 달려들려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게 분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얼마남지 않은 곤돌라에서의 시간을 의식하면서 때로는 다급하게.


곤돌라가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입술을 뗐다.


"나, 임신했어."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녀와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마파크의 밤하늘 먼 곳에서 쏘아올려진 불꽃이 보였다. 노란 색, 연지 색, 청록 색, 하늘 색……


내 심장에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곤돌라가 멈추고, 키르케가 입구를 열었다. 키르케에게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나가고 나도 뒤따라 나갔다.


"고마워."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손등에 그녀의 손이 포개지는 것이 느껴지고, 또 한 번 먼 발치에서 불꽃이 쏘아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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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간 과거 슬슬 끝날 거임 두 편 안에 시리즈 완결 할 듯


퇴고 못했음 ㅜㅜ 천천히 할게

   

+


글 양쪽 정렬이 자꾸 적용이 안된다!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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