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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한 침대를 같이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나는 더 이상 발작하지 않았다. 연립주택에 있을 무렵 부터 발작한 횟수와 동일한 횟수 만큼 자장가를 들어온 나는 그녀의 단 한 번의 자장가로 도중에 일어나 소리치고 허우적대는 일 따윈 두번 다시 겪지 않은 것이다. '마리아가 가르쳐 줬어.' 마지막 발작이 멎었던 때, 그녀가 말했다. '다 큰 어른이 자장가나 듣다니, 애야, 애.' 비웃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어린애임을 인정하면 품에 파고들어 응석 부릴 수 있었으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비웃어 주었으면 했다.


거실에서 혼인신고서에 서명 하자마자 가족들의 그녀에 대한 호칭은 '아가씨'가 되었는데 그 해 말에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기에 우리는 한 번 정도 호칭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다 큰 어른에 애 딸린 아줌마를 아가씨라고 부를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하니 등짝에 불이 났다. 이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서열 1위에 오른 그녀였으니 다른 가족들도 그저 쓴웃음만 지었을 뿐이었다. 나 역시 그 불이 괴롭긴 커녕 사랑스럽기만 했다.


최종적으로 나는 그대로 '도련 님'이라 불리게 됐다. 20년이 넘게 부른 호칭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는가? 라는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고 그녀는 '아씨'로 정해졌는데, 아씨나 아가씨나 뭔 차이겠냐만 아가씨 쪽이 좀 더 예쁘게 들리니 그 호칭은 딸에게 주겠다는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자, 꼬맹이. 아빠 나가신다. 인사 하렴. '돈 많이 벌어오세요~'"


"돈 많이 벌어오세요."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나는 생에 있어 가장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여섯 살 짜리 혀짧배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여겨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래서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피부에 닿는대로 느끼기로 했다. 이것은 그녀와의 첫만남과 같다고. 형용 할 수 없는 무언가. 수백만 마리의 나비. 아, 그렇구나. 나는 이해했다. 그녀와의 첫만남에서 느낀 것도 형용 할 수 없는데 아이라고 다를리가 있겠는가. '운명'의 결실을 어떻게 감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녀와 아이가 짓궂은 인사를 하게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마땅히 표현 할 방법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우리 공주님. 금방 다녀올게. 다녀오면 놀러 가자."


"오디로?"


"어디든."


그래. 어디든.


"그러니까 아빠 올 때 까지 준비 해놔야 한다? 얼마나 이쁘게 하고 있을지 두고 볼거야."


그녀에게 안겨든 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




"리리스."


"네, 주인 님."


대형 SUV 앞에서 대기 중이던 블랙리리스에게 말했다.


"운전은 내가 할 거야. 조수석에 타."


"하지만 주인 님. 그럴 수는…"


오늘도 리리스는 곤란하단 얼굴로 내 시간을 뺏을 셈인 것 같았다.


"또또. 한 번 하는 말엔 고분고분 따르겠다고 약속 했잖니."


"그랬습니다만… 역시, 주인 님께서 직접 수고를 들이시는 건 옳지 않아요."


"자율주행 시켜놓을 건데 무슨 소리 하는거야… 아니면 내 운전은 못 미덥다는거야?"


"겨! 결코 그런 건 아니에요!"


허둥지둥 거린 리리스가 제 빨리 조수석으로 향했다. 이 녀석은 들인 날 부터 놀리는 맛이 있었다.


차량이 대로로 들어섰을 때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주인이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듣다니 말이야. 우리 리리스는 끝까지 운전석을 지켰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 님!"


"장난이야."


서서히 뺨에 붉은 빛이 떠오르는 이 리리스는 들인지 1년 정도 된, 직원혜택으로 잔뜩 할인 받아서 구매한 녀석이다. 할인 받았어도 부가세가 있었으니 가격은 상당 했지만 그 동안 모은 재산도 상당했어서 나는 고민 없이 리리스의 구매를 강행했다. 재산… 그렇다. 나는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은 테마파크에서의 그 날로 부터, 그려오던 바람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재산을 모으는데에 집중 했다. 현대사회에서 '노동'을 하는 인간은 정말로 소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직종 또한 있다. 나는 그런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고 노동을 하지 않는 (정확히는 하지 못하는) 인간이 대부분인 만큼 급여도 높았다. 그 급여를, 나는 더 높히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서. 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내 세계의 모든 것을 위해서.


그래서 나는 바이오로이드를 뒤틀었다. 블랙리버를 위시로 한 경쟁 기업들과의 사이에서 스산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바이오로이드로 구성 된(인간으로 구성 된 부대는 이 때 쯤 해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군 부대를 방문한 다음, 전장 및 흑색작전에 투입되길 거부하는 바이오로이드 몇을 데리고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퀵 카멜과 워울프를 마취시키고 마지막으로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고서 그들의 머릿 속을 백지로 만들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을 뿐인데, 내 급여는 수십 배나 뛰었다. 기억을 지우는 건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조치였지만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기억을 온전히 유지하고, 감정도 온전히 품은 채 자발적으로 전투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나만이 가능했다.


전장과 전투를 '아름다운 무언가' 로 인식한 두 개체를 본 본사와 연구소는 그 즉시 내게 특별한 주문을 요청했다. 육체가 아닌 정신이 중파 당해 얄짤없이 폐기 될 예정인 바이오로이드를 모두 내게로 보내어 '재가용'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달란 것이었다. 나는 내게 보낼 필요 없이 곧바로 전장이 펼쳐질 곳에 문제의 개체들을 대기시키라 요청하고, 필요한 수 만큼의 '백지'를 보냈다.


 나노머신 캡슐 하나와 모듈 하나로 구성 된 '백지'는 대단한 효율을 보였다. 폐기 될 예정일 개체들이 전장에 재투입 됐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육체가 얼마나 박살이 나든 무기를 들 수 있는 상태라면 끝까지 싸우게 된 것이다. 돈이 전부인 기업에 막대한 비용적 효율을 안겨다 주었으니 내가 받는 대우는 기존의 좋은 대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존재 자체가 기술이었기에 이 무렵, 보안을 위해 나와 관련 된 모든 기록과 정보는 말소 된다.) 하늘을 뚫고 치솟을 정도라고 하면 대충 알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늘을 치솟는 효율과 대우 만큼 내 죄책감도 하늘을 뚫었다. 연구실에 누워 마지막 꿈을 보기 전 까지 건강한 웃음을 지었던 퀵 카멜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는 고기 파편이 된 것을 보았을 땐 집으로 전화해 오늘은 밖에서 자겠다고 연락하고 연구실 구석에 쳐박혀 한참 동안 눈물을 훔쳤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옭매는 사슬을 끊기 위한 내 연구는 현실에 의해 변색되었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까지 한참이나 걸렸지만 변색되었을지언정 바람 마저 바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때도, 지금도 바이오로이드의 해방과 좁게는 가족들의 자유를 바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지'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또 다른 초석이기도 했다. 퀵 카멜과 워 울프, 그 외 백지를 투여받은 수많을 바이오로이드들. 그녀들 모두를 위해 묵념한다.


이 모든 것은 쓸데없이 육중한 SUV와 리리스를 구매하기 위해서.

더더욱 끔찍해져 가는 사회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현실과 타협한 것 뿐이다, 나는 그렇게 되뇌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대쉬보드에 얹혀진 가족들의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게 있어 리리스에게 말했다.


"리리스. 만약 네가 내 딸의 어머니 였다면, 어땠을 것 같니?"


"에, 넷!?"


아무래도 리리스는 그런 쪽으로 곡해하여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말 그대로의 의미야."


"음…"


고개에 손을 얹고 한참이나 생각한 리리스가 말했다.


"주인 님과 다를게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집에 있는 다른 녀석들이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 그건! 경우에 따라 달라요!"


"알아알아. 어쨌든, 소중하게 대할 거란 거지?"


"그럼요."


"그래… 그렇지. 그게 맞는거지."


"주인 님?"


나는 아이가 소중하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겠다.

아이에게는 좋은 것만, 아름다운 것만, 사랑스러운 것만 보여줄 것이다.

그러기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 감상 없었던 내 아버지라는 그 쓰레기에게 분노했고 분노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제 자식인 나를 어떻게 한 때 쓰고 버릴 장난감으로 취급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사랑, 혹은 운명이라고도 부를 이 세상 제일 가는 긍정적인 감정의 결정체를 어떻게 그렇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인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되었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 편이 빠르다. 더는 그와 만날 일도 없고 만나러 갈 생각도 없다. 쓰레기 같은 놈. 최근에 알아보기로, 그 자체는 정말 별 거 없는 인간이었다. 그 저택과 재산은 그의 것이었으나 엄밀히 말해 그 재산은 아버지 위의 조상들이 일구어내 축적해 놓았던 재산이었다. 그 쓰레기는 단지 가족들이 대성한 타이밍을, 시대를 잘 타고 났을 뿐이었던 것이다. 금과 지폐와 보석으로 이루어진 마르지 않을 영원의 샘 위에서 신선 놀음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놀음의 대상엔 나 뿐만이 아닌 내 어머니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씨발… 씨발!!"


"주인 님…?"


리리스의 입이 세 번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절대 내 아이에게, 그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겠노라 다짐에 또 다짐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





주말은 오직 아이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주말인 오늘은 아이에게 '역동적인' 경험을 선사해주기 위한 날이었다. '놀러 나갈 때 만큼은 젊어져야 한다.' 는 그녀의 지론 아래, 나와 그녀는 풋풋한 20대 시절을 그리며 신경 쓴 패션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공주님~ 오늘 어디갈지 기대 되니?"


푸른 데님 자켓에 검은 색 데님 팬츠 차림의 그녀가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은 연하늘색 도트 원피스 차림의 공주님께 말했다.


"웅. 우리 어디 가?"


"비밀."


내 말에 동승한 마리아가 쿡쿡 웃었다. 운전석에 위치한 리리스가 고개를 돌려가며 출발 전 최종점검을 하던 중이었다.


"리리스. 출발 해."


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내가 말했다.


"알렉산드라 선생님한테 잘 배우고 있니?"


"알렉산드라 선생님. 무서워."


아이가 가늘게 떨었다. 나 때와는 달리 상냥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걸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아이에겐 무서운 듯 했다. 이상하진 않다. 그 알렉산드라니까.


"선생님 말 안들었어?"


"아냐. 말 잘들었어."


"이 꼬맹이가 또 거짓말 하네. 땡땡이 쳤잖아. 땡땡이."


"안쳤…쪄!"


그녀의 양 손에 의해 찹살떡 같이 늘어난 아이의 볼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땡땡이라. 보통 딸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는다는데 우리 아이는 반대인 것 같다. 외모는 그녀를, 성격은 나를 닮았다. 그렇다면 땡땡이를 친 심정 또한 나와 같았겠지. 그녀를 말려 줄 순 없어도 이해만은 해주겠다고 아이에게 속으로만 읊조렸다.


"아프잖아! 바보 똥개야!"


"이게 어디 엄마한테 바보 똥개래!"


"흥이다! 못생긴 여자야!"


"뭐?!"


"자자, 아가씨. 그만."


"마리아! 이 나쁜 마귀할멈이 나 괴롭혀!" 


마리아. 미안… 나 원. 볼을 땡기는 것 까진 좋았는데 입씨름으로 까지 번지면 어쩌자는 건가? 정정한다. 성격도 그녀를 닮았다. 이제 저 괄괄함에 마이웨이함을 조금만 첨가해준다면 머지않아 그녀와 똑닮은 존재가 하나 더 탄생 할 것이다. 그녀는 기가 찼는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기지배를 직접 수유 해가며 키웠다니 내가 바보였다.' 라고 여섯 살 짜리 애한테 거침 없이 말하는게 살짝 선을 넘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얼마 안가 또 공주님이라 부르며 미안하다 할게 뻔했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잠자코 있는 것 밖에 달리 수가 없지만. 괜히 끼어들었다간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될 테니까. 정말 유감스럽게도 난 집안에서 서열 꼴찌이니 말이다.


"넌 오늘 죽었어!"


"마리아! 공격!"


아무래도 오늘은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소매를 걷고 우둑우둑 팔을 푸는 그녀와 아이가 마리아를 앞세워 본격적인 육탄전을 시작하려들기에 이르자 나는 결국 뒷좌석으로 넘어가 새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





부채꼴 형태의 야외 서커스 공연장에서 아이는 감탄사와 혀 짧은 발음으로 귀여운 의성어를 연신 입에 올리는 중이었다. 새끼 코끼리가 공 위에 올라선 채로 나타나 무대의 끝부터 끝까지 두 번 정도 왕복했을 때에는 그녀 마저 아이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소리를 냈다. "재밌어?" 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무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그냥 물어본건데. 성격대로 솔직하게 즐기면 될 것을 왜 이럴 때 못 보일 것을 보였다는 듯이 구는 걸까? 혹시 아까 아이랑 싸워서 그런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실수한 거다. 지금 그 반응이 되려 더 아이 같아 보였으니까. 아이 너머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가 시선을 의식하고 돌아 봤을 때 능글 맞은 웃음을 보냈다. 아이 너머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내 예상은 정답인 것 같았다. 이 여자. 지금 아이랑 똑같은 수준에서 놀고있다.


"재주부리는 코끼리 보고 놀랄 수도 있는거지. 주먹을 날릴 필요는 없잖아…"


그래. 죽어버린 동심이 되살아나 순수하게 즐길 수도 있는거다. 쓸데없이 애는 왜 의식하냔 말이야.


"시끄러워."


"애랑 어깨를 나란히 한 것 같아서 싫어? 엄마면 같은 수준에서 놀 수도 있는거잖아."


"득츠르그 흤드?"


턱에 스트레이트가 추가로 꽂혀 머리를 부여잡고 마리아에게 매달려 있기를 몇 분. 서커스의 메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붉은 막이 전부 젖혀진 타이밍에 맞춰 양팔을 활짝 벌려 관객을 맞이한 써니가 차크람을 휘휘 돌리자 파트너인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아…!" "우아…!"


톤만 다른 같은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이번엔 진짜 기절할 지도 모를 일이니 무대에 시선을 박아 고정했다.


"오오오…!" "오오오…!" "오오오…!"


써니와 호랑이가 펼치는 아크로바틱은 가히 경이로웠다. 도대체 몇 미터를 점프하는거지? 체공 중에 투사체를 낚아채기까지 하잖아? 심지어는 그 투사체를 서로 주고 받기까지 한다. 대단 해. 이런 시대에 서커스가 다시 부흥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란 것을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는 사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인류는 도덕과 윤리만이 아닌 취향까지 퇴보 했는가 하고 비웃었던 몇 년 전의 내게 꼭 말해주고 싶다.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아니, 서커스를 퇴보의 카테고리에 넣는 것은 옳지 않다. 1세기 전 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서커스는 대수도 아니다. 현시대 최고의 '스포츠'로 통하는 '얼티밋 콜로세움'은 최소 10세기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 진정한 퇴보라 하면 바로 이녀석이다. 살육의 현장에서 튀어오르는 피와 살점, 그리고 내장.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검열 하나 거치지 않은 적나라한 쾌락을 좇는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즐길거리로써의 건전함으로는 서커스의 압승이다.


"와아!" "와아!" "와아!" "와아!"


거의 날다시피 하는 써니와 호랑이 페어에게서 결국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마리아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너머로 보이던 리리스의 움직임과 얼굴도 마리아와 같았다.


"…"


내 와이프는 그렇다쳐도, 이 둘까지 왜 이러지. 당황하는 이유야 그녀와 다를테지만 상관 없이 그냥 즐기면 되잖아. 이것 참. 우리 집 가족들이 이렇게 까지 쑥쓰러움이 많은 편이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물론 내 와이프의 경우 쑥스러워 한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막을 내린 서커스 무대를 뒤로 하고 차량으로 향했다.


"재밌었니?"


한 쪽은 내 손을, 한 쪽은 그녀의 손을 잡고 리드미컬하게 깡총대는 아이에게 물었다.


"응!"


"어휴~ 우리 공주 님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한 타임 더 예약해 둘 걸 그랬네."


오늘 따라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게 늦었던 그녀가 아이의 움직임에 맞춰 손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안 돼. 강렬할 수록 금방 식는 법이야. 빨리 다음 장소로 가자."


실은 본인이 한번 더 보고싶은거 아니냐고 물어볼까 했는데,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






오직 인간만이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이유로 쇠락한 구기 종목 스포츠들은 공원이든 운동장이든 경기장이든 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프로 리그의 명맥만은 간신히 유지하여 오늘 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라는 것이 그녀와 마리아의 설명이었다.


"빨리 뛰어 임마!"


왼쪽에는 2루로 달려가는 주자에게 빽빽 소리치는 그녀.


"아가씨!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코 앞에는 응원석 무대에 올라 흥을 주체할 줄 모르는 딸.


"듀인님. 다움 일뎡은 한 디간 뒤이니 도듕에라더 나가실 듕비를…"


"다 먹고 말해…"


오른 쪽에는 매점에서 사온 간식들을 걸신들린 듯이 입에 욱여넣는 리리스.


"야야… 누가 보면 평소에 굶기는 줄 알겠어."


"그, 그럴리가… 우웁…"


"야!"


이럴 줄 알았다. 안좋은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괴로운 표정으로 목을 긁어대는 리리스에게 물을 건네고 리리스가 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괴로운 표정으로 컥컥 댄다.


"일어 나!"


리리스를 일으켜 세우고 뒤에서 복부를 끌어안아 대여섯번 힘을 줘 들춰올렸다.


"켁, 켁켁!"


리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떡 두덩이가 앞좌석의 등받이에 부딪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인 님… 켁… 죄, 죄송해요."


"넌 경호원이란 애가 주인한테 하임리히법을 하게 만드니…?"


이 쯤 해줬으면 알아서 추스리겠거니 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본다. 홀로 막춤을 추던 딸은 캐럴 두 명과 손을 하나씩 맞잡고 더욱 격렬해진 응원의 도가니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는 좌석 난간 까지 내려가 '내가 해도 그것 보단 낫겠다!' 라며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마리아는 반 쯤 포기한 채 도와달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미안 마리아. 벌써 4번째 사과다. 오늘은 마리아에게 사과할 일이 참 많이도 일어난다.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먹다가 죽을 뻔한 경호원에 과몰입한 나머지 폭력적으로 돌변한 아내, 그에 지지않는 딸. 야구라 관중이 거의 없기에 망정이지 관중이 조금이라도 모인다는 축구 경기장이었다면 얄짤 없이 퇴장 조치 당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거지. 분명 처음엔 야구라는 스포츠를 처음 본다는데에서 오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는데. 슬슬 지쳐가는 아이에게 말했다. 응원하는 건 좋은데 정작 관중은 없다고. 아이는 몰라도 될 현실을 들이미는 것 같아 살짝 거부감이 들긴 했는데 이렇게라도 안하면 도무지 들어 줄 것 같지 않을 기세다. 뭐 실제로 듣지도 않고 아이는 계속해 방방 뛰었다.


실룩거리는 뺨을 억누르고 빨리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길 간절히 바라며 남은 30분을 1초부터 새기 시작했다.






//////



스마트 워치에 내장되어 있는 입장권을 터치하고 잭 오 랜턴이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나자 그 때와 같은 형형색색의 눈부신 판타지가 펼쳐져있었다. 매점이나 회전목마, 회전그네 같은 놀이기구를 지나 바이킹에 다다른 순간 아이는 환성을 질렀다. 그래. 바로 그 기분이지. 아빠도 알아. 거대한 해적선을 올려다 보는 아이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이 아닌 행복을 찾고, 약탈이 아닌 사랑을 퍼뜨리는 해적선. 지금부터 단 몇 분, 우리는 이 해적선의 일일 선원이 될 예정이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소짓고, 아이의 손을 잡아 나란히 걸어갔다.


놀이기구의 구동음과 함께 테마파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경쾌한 빅밴드 음악이 흘러나오고, 어트랙션 근처에서는 할로윈에 걸맞지만 다소 귀엽게 느껴지는 으스스한 음색이 들렸다. 주말에 걸맞게 테마파크는 상당한 숫자의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관람객들은 커플과 가족이 반반으로, 이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라곤 이 곳 뿐인 것 처럼 모두가 꺅꺅 들 뜬 목소리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거 귀여워!" 테마파크 한 켠에 있는 어뮤즈먼트 시설을 가리킨 아이가 말했다. 시설 입구에서 관람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검은 토끼탈 인형이 눈에 띄었다. 익살스런 표정 아래 위협적인 이빨을 드러내고 한 쪽 눈은 붉게 X, 한 쪽 눈은 파랗게 O로 된 할로윈에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오호라. 우리 딸은 이런 취향이로군. 결코 얌전하지만은 않은 아이가 마음에 들어할만 했다.


토끼 옆에 일열로 선 우리는 폴라로이드를 든 키르케를 향했다.


"자, 셋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김치!" "치즈!" 


김치는 나와 리리스. 치즈는 그녀와 아이, 마리아였다.


"…"


치즈가 맞다고 구박 받는 리리스를 뒤로 하고 키르케에게 사진을 받아들었다. 사진 속의 가족들은 딸만을 제외하고서 엇갈린 것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해가 질 때 까지 바쁘게 테마파크 곳곳을 돌아다닌 우리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대관람차에서 멈춰섰다.


"어머! 손님! 또 오셨군요! 6년만 이시네요?"


"어라? 그 때 그 키르케니?"


6년이 지났어도 어디 하나 변하지 않은 대관람차 담당 키르케가 다가와 내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기억에 남은 손님들이 또 와주셔서 기쁘네요. 이번에는… 후훗. 두 분끼리 오신게 아니군요."


"응. 그렇게 됐어."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마치 천사 같네요."


"고마워."


비어있는 곤돌라가 떠나려는 것을 손짓해 알리자 키르케가 다급히 멈춰세웠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손님. 아이가 너무 이쁜 나머지 넋을 놨네요." 


"괜찮아. 이제 들어가도 될까?"


"물론이죠! 모쪼록 좋은 시간 되시길!"






천천히 호를 그리며 이동 중인 곤돌라에서 아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검지를 세워 아이의 볼을 꾹 하고 누르자 소동물 처럼 꼬물대며 사랑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어지간히도 곤히 잠들었다. 무리도 아니다.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만 골라 최소 3번씩은 탔으니 말이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체력이다. 


"오늘 어땠어?" 그녀가 말했다. "난 좋았어. 애도 즐거워 보였고… 곤돌라에서 내리면 롤러 코스터라도 한 번 더 탈까?"


"난 됐어. 힘들어."


"벌써? 약골이네 약골이야."


"뭐… 그렇지."


"그래서 둘 째나 가질 수 있겠어?"


"둘 째 생각하고 있었어?"


"된다면~"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아랫배 언저리를 톡톡 두들겼다. 나는 까무라쳤지만 워낙 피곤했기에 별 반응 하지 않았다. 제발 외모와 일치하는 언행을 갖춰 줘. 그렇게 속삭이고 대관람차 아래로 펼쳐진 테마파크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암흑 속에서 반짝반짝 명멸하는 조명들이 흡사 별들과 같았다.


"그 때랑 비교하면 오늘은 좀 춥네."


눈만 돌려 흘깃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곤돌라의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오려나 봐."


말하기가 무섭게 곤돌라를 훑은 서풍에서 북쪽의 기운이 느껴졌다. 곤돌라의 출입문에서 피리같은 소리가 흘렀다.  


"7년 전 기억 나?" 


"기억 나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게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당연히."


"그럼…" 하고 눈을 가늘게 만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날 운명이라고 생각 해?"


"물어볼 필요도 없어."


"그렇구나."


"왜?"


"아니… 왠지 말이야. 나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한 건 느꼈었거든? 근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는거야. 최근까지도."


"응."


"지금은 왠지 알 것 같아서."


"그래?"


"응. 그래서 물어 본 거야."


"당신은 뭘 느꼈어?"


"음… 비밀."


그녀는 소리 없이 짓궂게 웃고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이번에도 별 반응 하지 않았지만 입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수백만 마리 나비는 아니야."


아하하 하고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얼굴이 단숨에 뜨거워졌다. 소녀 감성 충만했던 당시에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감상이었는데 그녀는 그게 어지간히도 웃긴 듯 했다.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비웃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나 또한 웃어 넘겼다.


그 때 부터 조성된 내 안의 나비 정원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당신의 나비가 좋아할만 한 것이라고만 말해줄게."


나는 토라진 척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비가 좋아할 만한 것이라. 뭘까. 온갖 꽃들이 흐드러진 정원일까. 모란, 장미, 리시안서스, 수국, 히아신스, 나팔, 칼랑코에…… 상상만해도 어질어질할 농도의 달큰한 향기들이 그녀의 운명이 갖춘 형태였을까. 납득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무렵부터 꽃꽂이를 취미로 삼은 그녀에 의해 우리 집의 절반 정도는 정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모습이 되었으니까. 이거야 원. 원래 성격도 그랬지만 다른 의미로도 참 솔직한 사람이다. 


다음엔 집에다 나비를 풀어놓고 키워볼까 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아이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원인인 듯 했다.


"오구오구. 아가 일어났니?" 눈을 비비적대는 아이에게 그녀가 말했다. "바깥 볼래? 우리 지금 엄청 높은데에 와있어."


"여기 머야?"


"대관람차." 내가 말했다. "어때? 예쁘지?"


"응. 시골로 여행 갔을 때 본 하늘 같아."


아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다시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잠결에 잠깐 일어난 것 같았다. 아이가 이 밤풍경을 꿈이 아닌 온전한 기억으로 갖길 바라며 다시 테마파크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i wonder what you are…"


익숙한 자장가가 귓가를 적셨다. 마지막으로 들은게 어림잡아 7년, 발작하지 않게 되고서 부터 7년.


"up above the world so high…" 


반가운걸.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연기로 가슴 한 구석에 김이 서려갔다. 


"like a diamond in the sky…"


자장가의 풍경을 그려본다. 침대에서, 이부자리에서, 별채의 소파에서, 


마리아에서 그녀로 이어진 모차르트의 변주곡 음율은 이제 아이의 전유물이 되어 아이만을 향하고 있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딱 알맞은 속삭이는 듯한 볼륨이 기분 좋았다. 나도 모르게 절로 눈을 감을 것만 같았다. 


"how i wonder what you are…" 


곤돌라에서 치뤄진 세상 제일가는 고요하고 포근한 공연은 한 곡으로 마무리 되었다.

앵콜. 앵콜. 하고 홀로 외쳐도 주요 관람객은 잠들었기에 그녀가 번외 공연의 무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


"오랜만이야. 기분 좋네."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그녀 앞에서 솔직한 감상을 입에 올렸다. 


"당신한테도 자장가 불러줄까?"


"아냐. 난 이제 괜찮아. 그럴 나이도 아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잖아. 해준다 할 때 받아들이지? 언제 또 기회가 올 줄 알고?"


"…그러면 집에 가서."


"거 봐. 그럴거면서."


쿡쿡 그녀가 웃고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곤돌라는 반환점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 아이가 커서 말이야."


"응."


"손자나 손녀한테 그대로 이 자장가를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치?"


"그렇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결혼 시킬 일은 없겠지만."


"애도 당신 처럼 운명이라면서 매달리는 사람을 만나도?"


"응. 안 돼."


"뭐야~"


당연히 농담이지만 어떤 놈이 됐든 순순히 내 딸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값어치를 매기는 것이 불가능한 보물을 선뜻 넘겨줄 머저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그녀의 장인어른들인 '삼촌'들이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점잖은 분들이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은 없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다수의 장인어른들께 린치 당하는 광경을 그려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귀가한 그녀와 나는 아이에게 알렉산드라와 소완에게 줄 선물을 손에 쥐여주고서 곧바로 침실로 들어섰다. 나는 피곤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힘이 남아돌았기에 뜻하지 않은 격렬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그녀의 몸에 포개고 몰려오는 잠에 의식을 기대자 '사랑 해.' 라고 들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 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도 그랬다. 아마도 그녀와 나 둘 다 그런 짓을 했다간 뒤이을 멋쩍음이 신경쓰여서 였을테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사랑하고 사랑해 왔지만 직접적인 표현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잠결에 들린 '사랑 해.' 가 생생하고 명료했다. 체온이 올랐고, 하반신에 피가 쏠렸다. 결국 가용 가능한 정력을 '사랑 해.' 란 말과 함께 모조리 쏟아내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좀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것을 언제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려온 목표에 드디어 도달했다.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다는 환희에 사로 잡혀 바로 귀가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달렸다. 도중에 몇몇 연구원들과 부딪혔지만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내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고 있는 이오였다.


조수석에 태운 이오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운전석에 앉았다.


"이오. 다시 말해 봐." 좀 처럼 진정되지 않는 흥분이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넌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야?"


"네, 네… 저는… 이, 인간이에요…"


멸균적인 이미지의 피실험복을 입은 이오가 말했다. 팔에 드러난 흉터를 매만지고 있는 이오에게 손을 뻗자 이오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움찔 떨었다. 기업의 흑색작전에서 사로 잡은 녀석이었으니 험한 꼴을 당했을테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와 함께 있는다면 폭력적인 경험 따윈 더 겪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내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이 아이는 내 인생의 결실이자 소망의 구현체이니까.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오래, 정말 오래 살아주어야 한다. '개변'의 완성도를 더욱 높히고 세밀히 조율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괴로움을 겪게 되더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명령이야. 지금 당장 내 손을 잡아."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확인해봤다. 겁먹은 이오의 얼굴에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는 문장이 드러났다. 그 반응에 확신을 품고 대시보드에 비춰진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집 까지 앞으로 20분. 돌아가면 바로 3층에 마련해 둔 개인 공방으로 향할 것이다. 향한 다음엔 먼저 이오의 머리를 열어 추가적으로 물리적인 시술을 가해봐야겠지.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이오의 반응으로 보건데 아직 충분하지 않다. 바이오로이드라는 존재의 정체성의 근간을 흔들고 뇌리 깊숙이 박혀있는 사슬들을 확실히 끊어내기는 했지만 조율할 것은 넘쳐날 것이다. 예를 들면 기억이라던가. 이오 개인이 갖는 정체성의 유지라던가. 섣불리 가족에게 '개변'을 시술했다가 더 이상 가족이 아닐지도 모르게 될 일이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30년 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동차는 집의 차고에 도착했으나 나는 내리지 못했다. 혹시… 만약, '개변'의 안정성을 아무리 높혔더라도 마리아와 소완, 알렉산드라가 내가 아는 그녀들이 아니게 된다면? '개변'의 효과는 이 이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아니 애초에, 그녀들이 '개변'의 시술을 거부한다면?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고개를 저어 머릿 속을 비웠다. 나는 무슨 생각을… 이제 와서 망설인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녀와 아이를 제한다면 오직 이것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한 인생이다. 나의 보호자, 은인들을 속박하는 세계를 부수는 것이 나의 제일 가는 염원이었다. 실패할 리가 없다. 그녀들이 거부할 리가 없다.


머릿 속을 추스르고 현관까지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10초 정도 지나 매끄러운 구동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이오와 함께 들어섰다.


   


//////////




거실에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눈에 날아든 것은 강렬한 진홍색의 향연이었다. 눈에 비쳐진 풍경을 뇌가 제대로 처리해내지 못하는 사이에 이오의 입에서 맥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오의 이마에 날렵한 쇠붙이 하나가 깊숙이 박혀있다. 내 머릿 속엔 아아, 이건 속절없이 즉사구나. 라는 감상이 전부였다. 진홍색으로 물들어 오류가 일어난 뇌는 그 정도 기능 밖에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멍하니 이오를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든 순간 측두부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시야의 고도가 낮아졌고 90도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무언가에 얻어맞았다는 걸 깨닫기 까지 몇 분은 걸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가 내지른 주먹이거나 도구를 사용한 것일거다. 발목이 강하게 조여지는 감각과 등이 쓸리는 감각이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제대로 상이 맺혀지지 않았다. 의식을 되찾고 제 기능을 하게 된 두 눈이 처음으로 맺은 상은 한 자루의 칼을 든 소완이었다. 소완이 무어라 입을 움직였고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제대로 된 정보로서 인식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귀에도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그 쯤 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의문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소완이 식도를 무기로 사용한다면 한 자루가 아니라 두 자루를 사용할텐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대퇴 언저리에 느껴지는 열기로 알 수 있었다. 나머지 한 자루의 식도는 사선 방향으로 대퇴에 박혀있다. 바깥 쪽에서 안쪽으로. 꼿꼿히. 기묘하게도 아프진 않다. 어디까지나 뜨거웠을 뿐이고 그 뜨거움이 불쾌한 덩어리를 맺어갔을 뿐이다. 기술 한 번 좋군. 소완 정도 되는 요리사라면 요리가 아닌 살상행위를 위한 식도 사용법도 알고있나보다. 아니, 나는 무슨 소릴 하는거람? 실제로 한 번 본 적 있잖아. 저택에서 나올 때 말이야. 저 혼자 빨리감기 한 것 같은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바이오로이드 둘의 목을 단숨에 떨어뜨렸었잖아.


저택… 저택…? 연립주택 무렵부터 지금까지 뇌리에 떠올릴 필요가 없었던 단어가 떠오르자 혼란스러웠다. 여긴 저택이 아니라 내 집인데? 소완의 집이기도 하잖아. 그런데 왜 칼을 저택에서 처럼 사용한거지? 왜 내 대퇴에 칼을 박은거지? 영문을 알 수 없던 차에 거실 구석에서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 다가왔다. 그 실루엣이 선명해진 순간 내 뇌에 한 번 더 오류가 일었다. 정신적인 요인으로 일어난 오류가 아닌 물리적인 요인으로 일어난 오류였다.


구두라고 생각되는 것이 눈 앞을 스쳤고, 머리가 뒤흔들렸다. 고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어렴풋한 정도였고 입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혀에서 딱딱하고 각진 무언가가 굴러다녔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반사적으로 퉤하고 뱉었다. 어금니다. 보아하니 부러진게 아니라 완전히 뽑혀버린 것 같았다. 내 머리를 공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은 것인지 어지간히도 세게 걷어찼다. 입에 어린 쓴맛이 강해지고 이가 뽑힌 자리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구강 안을 채워갔다. 가글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양이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니?" 실루엣이 말했다. "아니면 도망쳤다고 생각해서 안도한 거니."


그 실루엣이 아버지라는 건 기능이 돌아온 뇌로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다. 다만 소완이 그 옆에 나란히 서있는 것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내게 칼을 꽂은 이유의 해명이 먼저 였다. 왜인지 내 하의를 벗기고 하복부에 앉은 소완을 가족이 아닌 적으로 규정하고 생각해본다. 대전제로서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그와 같은 엄한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여러 이유로 제작단계에서부터 뇌리 깊숙하게 박아놓은 바이오로이드로서의 정체성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때문이다. 따라서 눈 앞의 소완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라는 가설은 폐기다. 위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련의 행동을 했다는 가설은 검토 할 필요도 없다. 


속옷까지 벗겨져 드러난 내 성기에 코를 가져다댄 소완이 황홀하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추잡스럽게 코를 킁킁대고 혀를 꺼내 귀두를 핥기에 이르러서야 가설에서 도출한 결과가 전해오는 격렬한 배신감이 몸을 뒤흔들었다. 앞으로 겪을 일들을 예상해보니 배신감에 비례한 난폭한 분노의 발작에 휩싸였다.                 


"측은하다만, 어쩔 수 없는 것이란다. 넌 내 장난감이니까.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라고 말한 아버지가 궁금하지도 않은 말들을 제멋대로 나불대기 시작했다. 너는 탈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느끼도록 했을 뿐이고, 네가 살아온 시간은 보다 질 좋게 숙성시키기 위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소완과 마리아, 알렉산드라는 네 것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소유였고 내가 주인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아와 알렉산드라가 거실 한 켠에서 무릎 꿇은 채 결박되어 있고 소완과 달리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있다. 눈에선 눈물이 줄줄줄줄 흘렀고 입가엔 피딱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리고…


거실에 들어선 그 순간, 이미 눈에 담았었지만 도저히 직시 할 수 없어 부정했던 사실이 그녀들의 옆에 놓여있었다.


"아아아아아악!"


거실을 진홍색으로 물들인 피의 주인인, 나의 그녀가 처량하고 끔찍한 몰골로 거실 구석에 쳐박혀있었다.


"안돼! 안돼애애!!"


"도령… 쉬이잇…"


하복부를 들쳐올려서 거북한 무게감을 떨쳐내려는데 목 언저리에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일단… 이걸 받으시옵소서…"


그 압박감의 원인이 주사기라는 것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주사기가 뽑혀나온 자리를 소완의 혀가 훑었다. 혀의 움직임으로 보건데 맺혀나오는 핏방울들을 핥아 마시는 듯 했다.


"너… 너!! 왜!!"


"후훗… 조금만… 조금만 계시면 되옵니다…"


"너… 오… 윽…"


주사기의 내용물이 몸속을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는지 아픔과 아픔 사이를 메우듯 현기증이 끼어들었다. 식도에 의해 진즉에 힘이 들어가지 않던 다리는 무기력해졌고 전신은 마치 나른함이라 명명해놓은 액체에 절여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힘이 들어가고 민감한 부위가 있었는데 소완이 비부를 비벼대는 내 성기가 그 곳이었다. 소완에 의해 양팔이 들린다. 손목에 끈 같은 것이 감기고 강하게 조여졌다. 뭔가 하고 무의식적으로 배에 떨어진 손을 내려다봤는데 소완이 허벅지에 감고 다니던 가터링이었다. 하하하. 형용하기 어려운 수치심에 웃음이 나왔다. 입가가 늘어져 웃음소리는 물감번지듯 흐물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이 현기증이 신경쓰였다. 저택에서 장난감이 되었을 때 몇 번이고 겪었던 그 감각과 이 현기증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 이건… 위험 해… 


"응… 앗… 아앗…"


비부의 연분홍빛 점막에 눌려 배꼽 방향으로 눌린 성기가 소완의 애액으로 젖어간다. 전신이 무뎌진 만큼 민감해진 성기에서 어찌 할 도리없는 사정감이 치고 올라온다. 


"앗! 아앙!"


웬만하면 들을 수 없는 퓻- 퓻- 꾸르륵 거리는 사정음이 심장박동 소리마냥 몸을 타고 들려왔다. 이렇게 기분 나쁜 사정이 존재한다니. 저택에서 유린 당했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감각이었다.


"응… 도령. 도령도 이제 참기 어려우시겠지요…?"


소완의 허리가 들리고 귀두의 끝부분이 소음순의 점막과 맞닿았다. 안 돼. 안 돼! 소리쳐 보려 해도 입근육이 좀 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소첩과 하나가 되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싶었다. 움찔대는 귀두와 맥동하는 성기가 서서히 소완의 탐욕스러운 소음순을 넘어 작은 구멍에 삼켜져간다.


"으… 아… 그만… 안, 돼…"


"아. 아아. 그 표정. 바로, 바로 그 표정이옵니다."


소완의 내려다보는 시선이 빠르게 내려가고, 동시에 성기에 강렬한 자극이 가해졌다. 


"안 돼애애!!"


마침내 소리내어 울부짖고 절규할 수 있었다. 소완의 성기에 완전히 먹혀 버리자마자 음경이 맥동하여 끈적하고 미끈한 질벽과 귀두에 맞닿은 자궁구에 정액을 쏟아냈다. 싫다. 이런 건 싫다. 분노와 절망으로 엉망진창이 된 머릿 속으로 원하지 않는 고감도의 쾌락이 비집고 들어오는 끔찍한 감각을 뿌리치고자 허리를 튕겼다. 


여보. 아니야.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겁탈 당하고 있는 거야. 소완에게. 바이오로이드에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 줘. 바라건데 제발 내게서 고개를 돌려 줘.


"앙! 아앙! 도, 도령! 그리 세차게 허리를 쳐올리셨다간 소첩, 몸을 쉬이 가눌 수 없게 되옵… 윽… 아윽…"   


소완의 복부가 전방으로 한 번 튕기고, 뒤로 튀더니 전신을 바르르 떤다. 절정한 것인지 성기가 조여든다. 그 조여드는 감각에 이기지 못하고 나는 또 한 번 연달아 사정했다.


"아… 굉장한 양… 이제 시작일 뿐이온데 벌써 부터 소첩의 그곳, 자리할 곳이 없어졌사옵니다…"


소완과 내가 바르르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를 몇 분. 꽃향기로 가득한 거실에 불쾌한 악취가 끼어들었다. 악취가 발생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담배연기를 뿜으며 수트의 재킷을 벗고 셔츠의 앞섶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마리아, 알렉산드라." 아버지가 말했다. "저 녀석을 붙들어라."


"으, 아… 으윽!"


실이 엉킨 마리오네트 처럼 힘겹게 일어선 마리아와 소완이 괴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왼팔엔 마리아, 오른팔엔 알렉산드라가 위치해 무릎을 꿇고 양 팔로 내 팔을 붙들었다. 도련 님… 죄송해요… 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이 쯤 해서 내 이성은 완전히 날아가 거실의 풍경과 환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팔뚝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흐릿한 눈으로 올려보니 마리아가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죄송한가? 죄송하면 그만 두면 될 일이다. 당장 이 팔을 풀고, 저 악마를 어떻게든 제압하면 될 일이다.


아버지가 마리아의 뒤에 서고, 마리아가 허리를 들어올렸다. 치마가 들춰진다. 얼마 안가 마리아의 입에서 괴로움과 달콤함을 반씩 섞은 듯한 교성이 튀어나왔다. 살결과 살결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거실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엉덩이 더 빼고, 허리 올려."


마리아가 격하게 들썩이기 시작했을 때 성기에 자극이 있었다. 소완이 허리를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려 든다. 제발. 이젠 안 돼. 음낭이 저리고 요도가 얼얼했다. 그러나 음경은 내부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귀두가 한계까지 팽창한 직후에 소완이 허리를 단번에 내렸다. 자궁구와 격돌해 귀두에 어린 그 감각은 이제 쾌감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감각이었다.


"앗. 앗. 아앗. 앗." 마리아의 마른 신음이 지척에서 들려오고, 다시 팔뚝에 따뜻한 감각이 있었다. 악마의 성기가 마리아의 가장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찌르고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아주 잠깐 마리아와 시선이 맞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괴로운 듯 입술을 질끈 문 마리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흉부에 느껴진 보드러운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도령. 소첩은… 오늘 만을… 이 날 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사옵니다."


"…으 …아아…"


"도령과 하나 되는 이 순간을, 소첩의 비루한 몸뚱아리로 도령에게 극상의 쾌락을 전해 줄 이 날을."


"싫… 어…"


"도령의 아기씨를 소첩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순간을…"


"앗. 앗앗. 아앗! 앗! 아아앗! 아아아아앗!"


사정 당한 마리아가 절정하고, 나는 제대로 된 문장을 읊을 수 없고, 소완은 허리를 돌려가며 멋대로 지껄인다. 머리채를 잡혀올려진 마리아가 바닥에 내쳐져 팔에 압통이 일었다. 정액과 애액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성기가 이번에는 알렉산드라에게 향했다. 알렉산드라는 신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알렉산드라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서 뺨을 몇 대 후렸다. 그래도 알렉산드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멍청하긴. 나는 알렉산드라에게 조소했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그런데, 블랙 리리스 이 쓸모 없는 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런 상황을 포함한 모든 위험요소를 막으라고 거금을 들인 년이 정작 필요할 땐 없다니. 이러다 씨발 뒈지게 생겼단 말이야.


"도령… 앙… 도령…"


"우… 으…"


"무려… 30년 가까운 시간이나 인내해 왔사옵니다."


"윽…"


"그러니, 도령… 제 모든 걸 바쳐 사모해온 도령…"


"그, 그만…"


"소첩에게 도령의 소중한 아기씨를, 도령을 사모하는 이 마음 만큼, 30년 분 만큼 쏟아내 주시어요."


쮸걱쮸걱 하고 점막과 점막이 부비대는 소리와 찌걱찌걱하고 체액과 체액이 뒤엉켜 날뛰는 소리가 반 쯤 정상이 아닌 귀에 선명했다.


"너, 도, 도대체."


라고 물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바이오로이드인 이상 결코 나를 해칠 일 없다는 대전제에서 도출한 가설들은 차치하고서 소완의 언행에서 미루어볼 수 있었다. 이 년, 이 개같은 화냥 년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똑바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을 죄악이라 여기지 않는다. 본인의 욕망이 조금 첨가 되었을 뿐, 나를 위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년이 자행한 일련의 행위들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을 알고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기꺼이 자신이 언젠가 저질렀을 행위를 거들어 줄 방아쇠에 불과할 뿐이다. 즉, 이 씨발년은 배신자다. 아니, 애초에 나와 같은 편이었는지도 의심 된다. 아마 아니겠지. 결합부에서 들려오는 추잡한 소리마저 반찬삼아 황홀경에 젖어든 이 년의 꼬라지를 보건데 결코 아니겠지.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 년은 철저히 바이오로이드였어. 


그렇다면 마리아와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내 팔을 붙든 상태로 겁탈 당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주인이 아니었을 뿐이다. 실소유주는 아버지였을 뿐이다. 어라? 그러고보니, 나 여태까지 이 개같은 년들한테 단 한 번도 명령을 해본 적이 없었네?


"하하하! 아하하하!"


그런 아무래도 좋을 안타까움은 상관 없었다. 그것보다 더 한 소용돌이가 나를 뒤흔들었기에.


함께 지나온 30년에 가까운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아버지의 명령 한 번이 이 씨발년들에게 그 시간들 보다 무겁게 다가왔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리 가소로운 존재가 있을 수 있지? 나는 여태껏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거지? 이 따위 년들을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혼자 무슨 짓을 해온거지? 


내가 어쩌자고 이런 것들을 가족이라 불러온 거지?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불쾌한 파열음이 일었다.


"소완. 궁금한게 있어."


양 손을 소완의 골반에 얹고 물었다.


"이게 네가 중고가 된 이유야?"


사방으로 난폭하게 튀어대던 소완의 허리가 멈췄다.


"…"


"대답 해. 대답하면, 내가 직접 널 범해줄게."


"후, 후후…"


그 특유의 재수없는 미소를 띄우고 소완이 말했다.


"맞사옵니다. 소첩은, 전 주인에게 이러한 이유로 버림 받았사옵니다."


"그래?"


무심히 대답하자 소완이 상체를 숙여 밀착해 두 눈을 부릅떴다. 하. 항상 나른한 것 처럼 가늘더니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군.


"그렇사옵니다! 소첩은! 다른 소완 개체들 보다 유별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 주인에게 버림 받았사옵니다. 그렇게 지금의 주인께 팔려왔사옵고 도령을 맡게 된 것이지요! 도령을 본 순간 맹세 하였사옵니다! 이번에야 말로 이루어내겠다고! 얻어내겠다고! 인간의 사랑을!"


"이레귤러 치고 노력 했네?"


그렇게 말하고 소완의 젖가슴을 터트려버릴 기세로 쥐었다. 새된 비명이 들렸지만 상관 않고 소완을 사타구니 너머로 밀어넘겼다. 활짝 벌어진 소완의 가랑이에서 음경을 한 번 뽑자 강렬한 냄새와 함께 엄청난 양의 체액들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이 년이 바라는대로, 질구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정액줄기를 귀두로 긁어모아 음경과 함께 다시 질구에 쑤셔 넣었다.


"앙! 도, 도령! 단번에…"  "입 닥쳐! 이 씨발년아!"


거실에 고여있던 피웅덩이가 소완의 어지러진 머리칼까지 번져있었다. 그것 또한 상관하지 않았다. 상체를 들이밀고 다리와 허벅지를 소완의 허벅지 위로 고정시킨 다음 전신을 밀착시켰다. 그 다음은 그저 가능한 난폭하게 허리를 흔들어 음경을 쑤셔박고 빼내길 반복했다.


"앙, 앗! 악! 아악!"  "으아아!! 아아아아악!"


"자, 잠깐. 도려… 응오… 오윽…"


달콤한 교성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소완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상관 하지 않았다. 피웅덩이도, 이 씨발년의 고백도, 방금 막 절정해 울부짖은 알렉산드라도, 허망한 눈으로 나와 소완의 결합부를 쳐다보는 마리아도,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듣는 것을 그만두었다. 느끼는 것을 그만두었다.


프레스기 처럼 위 아래로 내려찍어대는 허리에만 집중했다. 1초에 수십 번은 내려 찍을 기세로 사정 없이. 음경을 가능한 깊고 깊게. 최대한 뽑아내고 단숨에. 그러길 반복하고 있으니 일 분도 채 안됐을 시간에 첫 번째 사정감이 음낭에서부터 치고올라왔다. 허리를 그라인더 처럼 돌려대고 더욱 빨리 찍어대다가 한계까지 차오른 정액이 귀두 끄트머리에서 느껴지자 자궁구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으옥! 오오윽! 흐윽!"  


"이 개같은 년아! 닥치라고 했어!"


정액은 끊임없이 터져나왔지만 극치감은 잠시였을 뿐이다. 그것이 불쾌하고 괴상한 신음을 흘리는 소완은 더더욱 불쾌하여 사정 중임에도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 죽어! 네년이 원하던 정액과 성교로 죽여주마! 죽어!


체위를 바꾸지도 않고 결합된 성기를 뽑아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네 번째로 사정했을 때, 등에 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면적은 좁은 걸로 보니 아마 담뱃불에 지져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화상 따위, 지금의 내겐 간소한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의미야 있겠냐만 여섯 번째로 사정하고 나서 지금까지 사정한 총횟수를 정리해봤다. 스마타로 한 번, 삽입하자마자 한 번, 절정한 보지에 압박 당해 또 한 번. 그 다음 여섯 번. 놀랍군. 아홉 번이나 연달아 사정했다니. 목에 주입됐던 약에 뭔가 특별한 성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이 년이 제 무덤을 판 꼴이었으니까.


아홉 번, 열 번, 열 한 번을 넘어서자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래도 나는 착실히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거의 맛이 간 소완의 얼굴이 서서히 흐릿해지고 작아질 때 까지 나는 끝 없이 허리를 흔들고 흔들고 또 흔들어 사정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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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신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들고 보니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분주히 돌아다니는 삼안의 보안 팀을 보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어안이 벙벙할 일도 없었다. 내 바이탈 사인에 문제가 생겨 들이닥쳐온 것이겠지. 최첨단 테크놀러지란 대단 해. 마음에도 없던 감상을 흘려보내고 몸을 살폈다. 몸에는 가운이 덮여있고 응급처치를 한 흔적이 있었다. 소완과 아버지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이 벌집이 되었다. 둘 다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있다. 씨발 것들. 이 표정을 보니 뒈질 걸 알면서도 저지른 짓인 듯 했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런 짓으로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충실한 삶을 살다가 곱게 갔다고 여겨져 머리통을 짓이겨버렸다.


"…"


그녀의 시체가 보안 팀에 들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마 직시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보안 팀 중 한 명… 아니, 하나인 페로가 인사하며 귀를 빌렸다. 따님의 목숨은 붙어있으나 위중한 상태라고 지껄였다. 무언가에 중독된 듯 하다고. 나는 듣다 말고 나체로 벌집이 된 소완에게 향해 아버지와 똑같이 머리를 짓이겼는데 내구성은 인간보다 좋았던 탓에 만족할 만큼 손상시킬 순 없었다. 당황한 페로가 머뭇대다가 다시 달라붙었다. 그것이 몹시 불쾌해 있는 힘껏 뺨을 후려쳤다.


"내게… 내게 다가오지 마. 너희 모두. 바이오로이드는 내게 접근 하지 마라."


죽이겠다. 한 번이라도 접근한다면 반드시 죽이겠다. 역겹고 더러운 오물들 같으니.


샤워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거친 타월로 같은 부위를 정성스레 빡빡 문대 닦았다.

피가 나도 괜찮았다. 이 더러움과 역겨움, 거북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피부가 얼마나 벗겨지든 괜찮았다.


샤워실에서 나와 심호흡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가 물컵에 물을 가득 따른 다음, 연달아 세 잔을 비웠다. 그제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진정될 리가 없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아. 나는 직감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공허함은 그저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구나. 아가리를 쩍 벌려 싯누런 이빨을 드러낸 공허가 나비 정원을 먹어 치운거로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절규했다. 목청이 찢어져라 울부짖고 온 몸을 찢어발기듯이 긁어댔다.


환기를 위해 보안 팀이 열어둔 창문으로 세찬 북서풍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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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안에 끝날 예정. 다음 편도 매울 예정.


퇴고는 천천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