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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피바다였던 거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얗고 공기 마저 새하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하게 깨끗하다. 단 십 수일만 비웠을 뿐인데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병원의 무균실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거야 원, 뭐라 마땅히 할 말이 없다. 기가 차면 웃음이라도 나온다. 


스마트 워치를 조작해 테라스와 접한 문을 여니 세찬 북서풍이 피리를 연주하며 흘러 들어온다. 북서풍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진원지로 고개를 돌려보자 마른 꽃잎 몇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제서야 거실의 풍경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거실의 절반을 덮은 꽃들은 모조리 시들어 있다. 테라스에 가득한 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구리빛을 띈 꽃잎들이 가로등 아래 명을 다한 날벌레 마냥 수북히 쌓여있다. 이럴거면 굳이 보안 팀에게 꽃은 손대지 말라고 '당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품에 안은 형태, 그녀가 가꿔온 정원에 즐비한 구리빛 시체들을 해치며 테라스로 나왔다. 나와서 돌아보니 원 모양의 100평 남짓한 테라스는 공동묘지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분위기였다. 테라스 한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바람을 맞다가 가지런히 몸을 뉘였다. 꽃과 같이 상태가 말이 아닌 잔디의 까슬함이 섬유 한 장 너머로 느껴진다. 이 까슬함이 그렇게나 비참할 수 없었다.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그녀의 죽음을, 나는 몇 일이 지나도 견뎌낼 수 없었다. 이겨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종말과도 같은 그 죽음에도 세상에는 미미한 변화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화장을 치루고 유해는 현 지구상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바다에 뿌려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인 봄이 오면 보내줄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언제까지 좁디좁은 유골함에 가둬 둘 거냐면서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에 빨리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문득, 테라스에 그녀가 스피커를 설치해 뒀던 것이 기억난다. 꽃을 포함한 식물들은 음악을 즐길 줄 안다며 아침, 낮, 잠들기 전에 한 번씩, 그녀가 엄선한 명곡들이 테라스에 흘러나왔었다. 스마트 워치를 매만져 오디오에 전원을 넣었다. 명곡 모음집의 첫 번째 트랙인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챙겨온 식도의 끄트머리를 턱 아래에 가져다댄 다음 눈을 감는다.


누군가가 본다면 식도의 올바른 사용법으로써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행위는 '알맞지 않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뭘 모르는 소리다. 언제나 잘 갈려있던 이 식도는 한 때 내 대퇴에 꼿꼿이 박혀 있었다. 따라서 한 번 인간의 피 맛을 본 식도는 두 번 세 번 더 피 맛을 보더라도 상관 없는 것이다. 마지못해 납득한 그 누군가는 '그렇다면 덜 고통스러운 방법이라도 알려주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양한다. 오히려 고통스럽길 바란다. 그래야 한 때는 살아있었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어디를 어떻게 찌르면 피가 뿜어져 나오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요리사이자 가족임을 가장하고 함께 해온 수 십년의 시간들을 단번에 무너뜨린 년이 직접 시범을 보여준 적이 있으니까.


맥동과 바이올린 협주곡 3번 2악장의 선율이 칼날을 타고 전해져온다. 아다지오로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칼끝을 당기려던 차에 트랙이 넘어갔다.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의 도입부 선율이 이 정원을, 죽음을 추도하는 장소로 변모시킨 것 같아 불쾌했다. 기다린다. 3분 정도 기다리니 플루트 협주곡 2번 3악장이 흘러나왔다. 적당하다. 지저귀는 새가 노니는 개울가가 절로 그려지는 선율이다. 다시 칼끝을 댄다. 인간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는 건 청각이라지. 지금부터 내 손으로 경동맥을 끊으면,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 남는 것은 산뜻한 플루트의 선율 뿐일 것이다. 좋다. 그녀를 보러 가는 길은 더 없이 즐겁고 경쾌해야 한다.


망설임은 사라졌는데 나도 모르게 음악을 즐기고 말아서 트랙이 네 번이나 넘어갔다. 이러다간 마지막 트랙이 끝날 때 까지 그녀를 보러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고 다시 칼끝을 경동맥이 위치한 곳에 조준한다. 스피커에선 '작은 별 변주곡'이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이런. 벌써 마지막이다. 이번에야말로 칼끝을 찔러넣고 경동맥이 위치한 곳에 단숨에 밑동까지 쑤셔 넣어야한다. 쑤셔 넣은 다음엔 측면으로 베어내 목을 끊어낸다. 그거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주인 님!"


거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 않고 자장가의 가사를 읊으며 칼끝을 찔러 넣으려 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바이오로이드' 하나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려다보고 있다. 뭐지. 이제 마지막 트랙이 끝나가려는데. 마침 타이밍도 좋았는데. 이것 참. 가는 길 한 번 녹록치 않군. 이 바이오로이드가 밉다기 보다는 쓸데없이 음악을 즐기던 방금 전이 후회스럽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놔. 마리아."


내 입에서 '마리아' 라는, 인간에게나 붙일 법한 이름이 튀어나온 것을 들었다.


"주인 님! 이러지 마세요! 제발! 죽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이 바이오로이드는 거실에서부터 날 주인 님이라고 불렀지. 이런 씨발. 이제 와서 주인 님이라고? 원 주인이 뒈졌으니 이젠 내가 주인이라 이건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온다. 요 근래 들은 농담 중 가장 재미있었다.


"주인 님이라고 부르지 마."


"…인간 님. 부탁드려요. 제발 칼을 거두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칼을 거두고 자시고, 이렇게 손을 붙들고 있으면 움직일 수도 없다. 뒤늦게 바이오로이드의 신체가 몸에 닿았다는 사실이 분노를 가져온다.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서 머리 반 개 정도 차이나는 바이오로이드를 내려보다가, 내 목을 겨누던 칼을 바이오로이드의 목에 들이밀었다.


"읏…"


"짧게 해. 계속 화를 돋구면 너부터 죽이고 죽을 거니까."


"주, 주인님이…"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


식도를 역수로 고쳐잡아 손잡이로 바이오로이드의 측두부를 후려쳤다. 힘 없이 털썩 주저 앉은 바이오로이드가 마른 신음을 흘렸다.


"인간 님께서… 죽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왜. 이유를 말해 봐."


"그, 그건…"


"말할 수 없지? 그럴 수 밖에."


그래. 그럴 수 밖에. 명령 한 번에 함께 보내온 모든 시간들을 제 손으로 무너뜨린 너희가 할 말이 있을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녀가 죽어가던 현장에서 유이하게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부분을 참작해 자비를 베푸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꺼져."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서 다시 목에 칼을 겨눴다. 이번에야말로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아가씨가 살아있잖아요!"


"…"


"아가씨한테는 인간 님이… 필요하잖아요…"


다시 돌아서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이에 대한 것이 아닌, 이 씨발년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거잖아."


"주인 님!!"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측두부를 한 대 후려 맞았음에도 또 다시 주인님이라 부른다. 아예 머리 한 구석을 함몰시켜 버려야 더 이상 주인 님이라 안부를까? 손잡이 쪽으로 내리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이 번 만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이 년은 아이에게 목숨을 빚진 거다.


아이는… 가망이 없다. 의사가 말하기로, 독극물에 의한 내상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뇌 손상이 심각하단다. 호흡기를 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상태라고.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요리사 년. 진즉에 바이오로이드의 범주를 벗어나 있던 이레귤러 년. 


그 날부터 내 손으로 그년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불쾌한 땀 처럼 들러붙어 있다.


"아아… 아아아…"


모든 트랙의 재생이 끝났다. 그게 아쉬워 모자라게나마 스피커를 대신한 내 입으로 테라스를 메웠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눈가가 맵고 뺨이 뜨거웠다. 바이오로이드가 다가와 내 손을 쥔게 불쾌했지만 나는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고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었다.


시체들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죽지 마세요… 차라리, 저희를 미워하세요."


"내 아이… 내 아이…"


"저희에게 모든 걸 쏟아내세요."





//





"주인 님!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주인 님!"


"마리아. 조용히 하게 해." 


"…네. 인간 님."


들어 볼 것도 없다. 리리스… 뒤에 확인해보기로 블랙 리리스는 당시 아버지가 대동했던 또 다른 리리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말을 들어달라는 것 같은데, 헛소리. 수 백억을 들였던 이 쓸모없는 것은 제 몫을 다해내지 못했다. 다 끝난 다음에 뒤늦게 와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리리스였던 이상 더 빠르고 더 강했어야 한다. 그거면 됐던거다. 그거면 된거였는데, 이건 그러지 못했다. 그럼 대가를 치뤄야지.


3층의 공방에서 쓸만한 것들을 가지고 나왔다. 공업용 커터, 펜치, 손망치, 니퍼, 플라이어, 송곳에 임팩 드릴까지. 이 집에 막 들어왔을 때 빼고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또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가장 먼저 커터를 손에 들고, 나체가 되어 거실 정중앙에 앉은 리리스 앞에 섰다. 거실에 깔린 넓직한 비닐이 구겨지며 부스럭 대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너한테 쓴게 아마, 800억은 될 거야. 게다가 늘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게 했지. 무슨 소린지 알지?"


"주인 님! 주인 님! 잠시만요!"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다는 소리야. ……그래도 상관 없었어."


"주인 님! 저는 정말로…! 아악!"


내 기억엔 블랙 리리스에게 변명이나 대답을 해도 된다고 했던 적은 없다. 적당히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해 오른 팔의 삼각근 언저리에 커터를 박고 아래로 쭉 내렸다. 종이와 농구공이 찢어지는 소리를 반씩 섞은 듯한 소리가 들렸다.


"너희를 가족이라 생각했어. 인간과 다름없다 여겼지. 아니… 다름 없다도 은연 중엔 선을 긋는 거지. 너희를 인간이라 여겼어.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주, 주인 님… 제가… 아아아!"


삼각근에서 뽑아든 커터를 대퇴에 박았다.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대퇴에서 다시 뽑아든 커터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커터날의 궤적을 따라 가느다란 핏줄기들이 바닥에 흩뿌려져갔다. 리리스가 바르르 떤다. 가엾지도 측은하지도 않았다. 분노만 더 커졌을 뿐이다. 뭘 잘했다고 두려워하고 떨어댄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본인의 잘못을 확실히 자각하게 하기에는 고통이 모자란듯 했다. 어쩌면 리리스는 이 정도로 끝날 거라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쓸모없는 년이 더욱 괘씸했다.


왼 쪽 어깨에 커터를 박아두고 손망치를 들어 왼 발을 가리켰다.


"마리아. 발 잡아."


"이, 인간 님…! 조금 진정…!"  "입 닥치고 빨리 잡아!"


머뭇머뭇 다가 온 마리아가 리리스의 왼 쪽 발목을 잡아 고정시켰다. 나는 조준하기 편하게 리리스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그대로,


"꺄아아아악!"


새끼 발가락을 내리쳤다. 우두둑하는 강렬한 소리가 날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별소리 나지 않았다. 아, 그렇다. 바이오로이드의 골격은 인간과 다르다. 왜 그런 중요한 걸 잊고 있었지? 바이오로이드의 뛰어난 내구성은 어느 정도 그 골격에 기인하는 면도 있다. 그렇다면 좀 더 거칠게 다뤄야 하는게 맞는거다. 고작 한 방이 아니라, 한 발가락을 최소 열 대씩 내려 찍어버려야 그 씨발것의 뛰어난 내구성을 뚫고 손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악!! 아악! 악! 아아아악!"


망치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리듬에 맞춘 리리스의 비명이 거실을 울렸다. 아무래도 이것에겐 아직 참아낼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인 것일까? 리듬을 탄다는게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타겟을 바꾸기로 했다. 짓이겨지고 휘어진 걸 더 내려쳐봤자 큰 의미도 없으니까.


다음은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보다는 큰 만큼 이번에는 손망치를 양손으로 쥐고 온 힘을 다해 내려쳤다. 거실이 꿍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서도 리리스는 한동안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리리스의 두 동공이 튀어나올듯이 확장 되어있다. 음, 그렇군. 참을만해서가 아니라 너무 아파서 그런거로군. 이건 좋다. 처음부터 이럴 것을. 마리아에게 좀 더 잘 고정시키게 지시하고 연달아 내려쳤는데, 6번째가 되어서야 발톱이 날아갔다. 대단 해. 인간이라면 한 방에 날아갔을 것을 6번이나 버텨내다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금방 망가져버리면 어쩔까 조마조마했는데 좀 더, 더 거칠게 다뤄도 되겠다.


가운데에 위치한 발가락들은 한데모아 내려쳐 뭉개버렸다. 오른 발도 똑같이 해주었다. 그런 도중에야 리리스는 커터날에 베이던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너무 늦었다. 비명으로 노래를 부르면 조금은 살살 다뤄줄 마음은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발가락이 뭉개지는 정도로는 영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뭐로 할까 고민하면서 바닥에 늘여놓은 공구들을 둘러보다가, 펜치를 들었다. 주둥이가 뭉툭하고 굵기가 적당한 녀석으로 리리스의 입 안에 비집어 넣기엔 알맞은 크기이다. 그리고, 리리스의 비명은 여간 들어줄만한게 못 된다. 따라서 그 비명소리를 조금 뭉개놓을 필요가 있었다.


지시에 따라 마리아가 리리스의 입을 벌리려고는 하는데 저항이 만만치 않다. 이런거 하나 못하는 마리아를 후려쳐버릴까 하다가 선심써서 조금 거들어주기로 했다. 손망치를 양손으로 잡고, 무게중심을 아래로 둔 뒤, 아래에서 위로 복숭아뼈를 조준해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손 끝에 '이건 확실히 뭉개졌다.' 라 생각할 수 있는 감각이 손잡이를 통해 전해졌다. 빠각- 하는 경쾌한 소리는 덤이다.


"으오오… 흐으어어…"


리리스가 벌어진 입을 통해 늘어진 신음을 흘리는 것을, 마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제빨리 양 손으로 입을 벌리고 플라이어의 손잡이를 쑤셔넣어 고정시킨다. 손잡이를 개구기 대용으로 사용하다니. 훌륭 해. 꽤 능숙하다. 역시 웬만한 일엔 적응이 빠른 마리아 다웠다.


"우굽… 우우웁…"


우물거리는 소리가 듣기싫어 펜치로 이마를 몇 번 내려쳤다.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소리는 잦아들었는데 침이 새어나온다. 더러운 년. 그래도 넘어가준다. 지금부터는 침 만이 아니라 피까지 흘리게 될 테니까. 이 좆같은 아가리가 곧 시뻘건 폭포가 될 테니까.


펜치를 벌려 앞니를 잡았을 때 리리스의 검은자위가 내 쪽으로 향한 것이 보였다. 눈물은 꽤 흘렸을텐데 또 눈물이 고여 주르륵하고 떨어져간다. 하지만 리리스도 알테지. 난 전혀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드인 님! 드인 니임! 리리슈… 리리슈가 잘멋태써여! 잘멋… 무우웁!!"


펜치를 위로 젖히니 앞니가 잇몸에서 반쯤 뽑히고, 아래로 내리니 ㄱ자로 구부러졌다. 한 번 더 동일하게 반복한 다음 손을 훽하고 뒤로 빼니까 앞니가 깔끔하게 뽑혀나왔다. 3초정도 지나 앞니가 빠져 허전해진 잇몸에서 기다렸다는듯 핏줄기가 쏟아져내렸다. 어지간히도 아팠는지 이번엔 발을 동동대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리리스는 입이 약한 듯 했다. 그렇다면 이 고통에 적응하기까지 기다려 줄 수 없다. 바로 윗니를 표적으로 삼아 펜치를 가져다댔다. 위로 젖히고, 아래로 내리고. 또 한 번 깔끔하게 치아가 빠져나왔다.


"후우…"


앞니 4개를 뽑고 윗니 3개를 뽑고나자 리리스의 구강 안이 피로 가득찼다. 그 피로 가글을 해대는 통에 벌어진 입에서 핏물이 그르륵하고 튀어댔다. 발은 더 이상 동동대지 않는다. 눈은 충혈됐고 입술은 서서히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효과 만점이다. 좋다. 아주 좋다. 그래도 입은 이쯤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다 뽑아 버리고 싶지만 과다 출혈로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아쉬운 마음에 눈에 보이는 부위의 치아를 두 개만 더 뽑고 마리아에게 지혈을 지시했다.


공기에 피가 끓어 그르륵 대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거슬려 스마트워치를 조작해 오디오의 전원을 켰다. 스피커에서 맑은 플루트 소리가 흘러나온다. 바흐의 '바디네리' …그래. '농담'이다. 이 모든 상황은 농담이야. 리리스를 곤죽으로 만들려는 나도, 거의 미쳐가기 일보 직전인 리리스를 지혈하는 마리아도, 행방을 알 수 없어진 알렉산드라도, 시들어버린 꽃만이 가득한 거실도, 그녀가 떠나버린 이 집도, 사경을 헤매는 아이도,


전부, 전부 농담이야.


"아하하하하하!"


너무나 우스운 농담들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광소에, 알레그로로 흘러나오는 플루트의 선율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깨닫는다. 난 지금 웃고 있다고. 나비 정원이 사라져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버린 나는 확실히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으아아아아!"


그것이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이 화가나고 기뻐 리리스의 입에서 플라이어를 잡아 뺐다. 억지로 빼낸 탓에 손잡이와 맞닿아있던 치아가 뽑히다 말고 덜렁거렸다. 알 바 아니다. 난 지금 당장 이 플라이어로 리리스의 안면을 후려치지 않으면 안된다. 내려찍고 휘둘러 얼굴을 얼굴이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버려야 한다. 


"도련 니임!!"


절규에 가까운 마리아의 외침이 들린 것 같았고 어깨 쪽에 압박감이 느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충 몸을 뒤흔들면 떨쳐 낼 수 있을 정도 밖에 안됐기에 방해라고 느끼진 않았다. 리리스를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제발, 날 멈춰 줘. 날 죽여 줘. 


막 피어오른 그런 거대한 소망 만큼, 나는 플라이어를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고 언제고, 이 처량한 손짓이 영원히 계속 될 것 처럼.





///





"네 말대로 했을 뿐이야."


뜯어 말리던 마리아를 뿌리치고 말했다.


"차라리 너희를 미워하라며. 그래서 그러고 있잖아."


"이, 이건… 이건 잘못 됐어요."


"뭐가? 이렇게 험하게 구는게? 어째서? 너희를 망가뜨리면 안 돼? 너희가 먼저 시작했잖아. 왜, 감당하기 어려워?"


"그런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도련 님이 두 번 다시 돌아오실 수 없을 곳으로 가실까봐 걱정 되는 거에요."


"…"


도련 님이라 부른 것은 차치하고서, 주저앉아있는 마리아의 올라 간 치마 사이로 살결이 보였다. 눈으로만 봐도 뽀얗고 탄력이 느껴지는게 도저히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지한다는게 불가능해 보이는 피부였다. 시야의 고도를 조금 올리자 풍만하다고 표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가슴 한 쌍이 피에 젖은 하얀 천 아래 도드라져 보였다. 침이 고이고, 내 안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소용돌이쳤다.


다시 자각한다. 내 안은 지금 무언가로 확실히 충만한 상태다.


"마리아. 하의 전부 벗어."


"…네?"


잘 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지만 그 표정엔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었다는 느낌도 스며들어있었다. 그것이 더욱 나를 간질였다.


"치마랑 속옷 다 벗고 가랑이 벌려."


"도련 님…?"


"명령이야 이 씨발년아! 그 따위 표정 짓지 말고 빨리 수행 해!"


엉거주춤 마리아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움직이는 모양새가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 같은게 언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그 날, 이 년이 내 팔을 붙들었을 때였음을 떠올렸다.


"흑… 흐윽…"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마리아의 가랑이를 벌리는 사이에, 손바닥에 가려진 얼굴 너머로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발년이. 킥킥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모르는가 보다. 그럴수록 더 이러고 싶다는 걸. 한껏 부풀어 오른 귀두를 마리아의 벌건 점막 끄트머리에 딱 붙이고 반응을 살폈다. 마리아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야. 너 말해 봐. 솔직히 너, 나 어렸을 때 따먹고 싶지 않았냐?"


"무슨…!"


"모르는 척 하지 마. 지금 와서 보니까 말이야. 니들 언행이 영락없이 섹스하고 싶다는 느낌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드디어 마리아가 얼굴을 드러냈다. 눈가는 촉촉했고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그게 또 참을 수가 없다.


"소완 그 화냥 년은 대놓고 들이댔었잖아. 틈만 나면 귀나 목을 빨아대고. 넌 화냈지만 솔직히…"


"도련 님!"


"너도 그러고 싶었잖아. 내 나이가 어쨌든 이 두툼한 씨발 보짓두덩으로 내 좆을 물고 싶었었잖아."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적 없어요!" 

      

귀두로 음핵을 자극하다가 점막들을 훑었다. 들어보란듯이 야릇한 마찰음이 잘 날 것 같은 부위만을 골라 집요하게 비볐다.


"아니긴 씨발… 진즉에 씹물로 젖어있던 년이. 지금도 이렇게 줄줄 나오는데."


"그건 생리적인…! 아흣!"


질구에 귀두를 반쯤 파묻고 오디오를 조작해 트랙을 넘겼다. 바흐의 '샤콘'의 템포에 맞춰 귀두를 느릿느릿 질 속으로 비집어 넣어가다가, 도중에 움직임이 저지 당했다. 마리아의 두 손이 하복부에 닿아 3분의 2쯤 삽입된 음경을 밀어내고 있었다.


"도련 님! 이래선 안 돼요! 제발! 부디 아씨를 생각하세요!"


"…뭐?"


"……아씨께서 슬퍼하실 거에요." 


…이,


"꺄악!"


이 씨발년!


"닥쳐! 닥쳐! 닥쳐어!"


"아윽! 도련 님! 너무 쎄ㅇ… 흐윽…!"


"닥쳐! 닥쳐!! 너희들의 더러운 입 위로 그녀를 올리지 마! 아아아악!"


처음엔 어찌 할 도리 없는 가학심에 이끌렸는데 지금은 거북하고 역겹기만 하다. 그러나 하반신은 이미 충실히 쾌감에 먹혀들었기에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쾌감이 커질수록 역겨움도 커져가고 역겨움이 커질수록 쾌감은 배가되어갔다. 


마리아에게 성욕을 느꼈다는 뜻은, 나는 아직 되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는지도 몰랐다. 바이오로이드가 생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없이 역겨웠던 내게 있어 마리아의 미육이 달콤하고 향기롭게 느껴졌던 것은, 아직 나는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들과 쾌감들 보다도 가슴 속에 피어난 시꺼먼 무언가가 더욱 거대했기에, 원초적인 것에 가까운 그 시꺼먼 무언가가 나를 충동질하여 하릴없게 하였기에 나로서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저 허리를 흔들고 또 흔들어 마리아의 부드럽고 따뜻한 점막과 눈물에 젖어가는 표정을 먹어치우기에 바빴다.


탐하고 또 탐했다. 가능한 모든 체위들을 동원해 마리아의 포동포동하고 부드러운 살과 체액과 체취들을 탐했다. 여섯 번째로 사정했을 때 곤죽이 되어버린 리리스의 피가 거실을 물들여 결합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번져왔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소완에게 행했던 때와 똑같지만 다소 다른 느낌으로, 나는 마리아를 완전히 먹어치울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울부짖던 마리아도 결국엔 솔직해져 달콤한 교성을 뱉어댔다.


쾌락 본위의 섹스는 눈이 그치고 해가 질 때 까지 계속되었다. 몇 번 째인지 감도 안잡히는 사정을 마치고 마리아의 비부에서 음경을 뽑아내자 상상했던 이상의 정액이 쏟아져내렸다. 뭐 마리아의 전신이 정액 범벅에 피 범벅이었지만… 힘이 빠져 마리아의 몸에 몸을 포갰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마리아의 전신은 경호가 아닌 오로지 남성을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성기도 체액도 체취도 살결도 이보다 감미로울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맛봤던 거지? 과거의 내게 말해줄 수 있다면 하루 빨리 마리아를 범하라 일러주고 싶었다.


"흑… 흑흑…"


나는 무슨 짓을 한거지.


"도, 도련… 님…"


이상한 것에 이끌려 마리아를 범하고, 쾌락을 좇았다. 그러면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우셔도 괜찮아요…"


지울 수도 없고 지워서도 안되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쾌락으로 덮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


그것은 불가능함을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리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리리스를 작살 냈을 때 느낀 그 충만감 뿐이다.


"기회를 줄게. 내게서 떠나."


나는 그 충만감을 좇아 나아갈 것이다. 내게 있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것 뿐이다.


"…도련 님."


바이오로이드를 일그러트릴 것이다.


"……도련 곁에 있을게요."


누구도 도망칠 수 없어.


땀에 젖은 마리아의 두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바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뜯고'의 선율에 귀를 기울이자 눈 앞에 초원이 드리워져, 나는 기꺼이 한 마리의 양이 되기로 했다. 테라스에서의 그녀가 생각난다. 이런 잔잔한 곡이 흐를 때면 그녀는 다소곳이 두 눈을 감아 테라스의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때때로, 그녀는 춤을 췄다. 하늘거리는 춤사위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에 어울렸고 총총대며 앙증맞은 춤사위는 '터키 행진곡'에 어울렸다. 그럴 때면 테라스는 1인 뮤지컬, 혹은 2인 뮤지컬 공연이 펼쳐지는 소극장의 무대로 변했다.


"여보…"


안다. 불러봐도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녀를 대신하듯 마리아의 손길이 목과 등을 어루고 있을 뿐이었다.  


 





////







죽일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라면 모조리 잡아죽여야 한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럴 것이며 내일도 그럴 예정이다. 그런 시간들만이 계속 되었고 오직 그것만이 내 생의 새로운 목적과 목표가 되었다. 살기 위해 바이오로이드를 죽이는지,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지 가물거릴 때도 있었지만 내겐 둘 다 별 차이 없었기에 딱히 크게 생각하진 않았다. 마리아는 죽이지 않기로 했다. 내게 있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경계에 아슬하게 위치해 있던 그녀를, 나는 절반만 인간으로써 인정하기로 했다. '몸은 인간, 정신은 바이오로이드.' 그렇게 생각하니 편리했다. 무의식 중에 끓어오르는 성욕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마리아의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풍만한 살집으로 어느정도 달랠 수 있었다. …아마도.


행방이 묘연했던 알렉산드라는 테라스에 새로이 심어놓았던 봄의 전령들이 꽃망울을 터트릴 때 쯤 해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함께 거주하던 3지구의 연립주택 단지 구석진 곳에서 목을 맨 채 발견 되었는데, 예상은 했어서 별다른 감상은 없었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반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가버릴 것이었다면 내 손으로 보내줄 수도 있었는데.


잘 가요. 선생님. 당신의 가르침은 이제와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조금은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신도 별 수 없었겠죠.


받은 것도 많았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욕보이기도 뭐했기에 나는 조용히 그녀를 수습해준 다음, 화장 후 나온 골격만을 따로 모아 이름 모를 외진 산어귀에 묻어주었다. 보호자 역을 해준데에 대한 빚은 이걸로 갚은 것이다.


"앗, 앙… 아앙… 앙… 도, 도련 님… 더 이상은 출근이 늦으실… 응… 앗…"


"조용히 하고 혀 내밀어."


소파에 걸터누운 마리아를 위에서 깔아뭉갠 상태로 내리 3회나 사정했다. 바이오로이드 중에서 유일하게 안을 수 있던 마리아는 언제 맛봐도 굉장한 것이, 시작했다 하면 한 번 사정하는 걸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고 한 번의 섹스를 끝내고 다음 섹스까지의 간극은 3일넘지 못했다. 다만, 마리아를 내 침실에 들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곳은 내게 있어 성역이었기에 반 쯤은 바이오로이드의 경계선을 넘어간 그녀를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었어서 마리아를 범하고 먹어치우는 장소들은 침실 이외의 모든 곳이 되었다. 공방, 거실, 샤워실, 욕조, 테이블, 주방, 현관, 테라스 등등… 침대 위였다면 할 수 없었을 온갗 체위와 온갗 플레이를 다 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이게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좀 더 못된 놈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육체만 보고서 마리아와 결혼했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들의 끝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꼴사납게 울부짖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만족할 만큼 사정하고나서 출근한 연구소는 어수선했다. 타 기업들과 본격적으로 무력충돌이 벌어진다느니 뭐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 괜찮나?"


복도를 지나던 와중에 연구소장이 붙잡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려는데 그가 또 다시 붙잡았다.


"괜찮지 않은걸 알고서 물은거네만. 자네, 거울은 보고 다니는거야?"


볼 필요 있느냐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상사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다. 괜찮다고 육성으로 답하고 이번에야 자리를 뜨려는데 소장은 끈질기게도 또 다시 나를 붙잡았다. 소장이 팔을 뻗었다. 내 뒷목과 눈가를 쓸어넘긴 그가 이렇게 붙잡고 얘기하는 이유를 알겠냐는듯 머리카락을 톡톡 건드렸다. 손을 대 확인해본다. 뒷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고 앞머리는 콧등 언저리까지 내려와있었다. 이렇게 긴 줄은 이제야 알았지만 그래서? 이 연구소에 용모와 관련된 규칙이 있었던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연구원들이 입모아 얘기 해. 자네 꼭 무슨 시체 같다고. 그래. 자네가 겪은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이해는 하겠다만, 부디 자신을 돌보게."


"말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반 쯤 지나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아져 희끗한 머리카락이 움찔거렸다. 풀벌레가 앉은 강아지풀 같았다. 


"실험 개체들 좀 적당히 다뤘으면 좋겠군. 아무리 자네라도 너무 도가 지나친게 아닌가 싶어."


"그러겠습니다."


"유별나게 바이오로이드를 아끼던 자네가 그러니 좀 무섭기도 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 그가 드디어 떠났다. 그 등에 욕지거리를 한 사발 퍼붓고 나도 복도를 지났다. 미친 놈. 아꼈다고? 아낀 정도가 아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간으로 대했다. 연구소 누구 하나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 나 만큼은 그들을 돌봤다. 아무 의미도 없고 허무맹랑할 뿐인 실험에 희생 당할 뻔한 녀석들을 몇 번이나 구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뭐? 적당히 다뤄? 그런 소리를 할 거라면 본인들부터가 바이오로이드를 순하게 다뤘어야지.  


그들이 내게 뭐라 할 자격은 없다.


"연구원 님!"


개인 연구실에 들어서자 아쿠아와 LRL, 알비스가 맞이해주었다. 이 녀석들 모두 각자의 이유로 이 연구소에서 바스라져갈 녀석들이었으나 내가 거두었다. 특히나 알비스는 그 이오와 같이 전장에서 생포된 녀석으로, 얄짤없이 해부당할 위기에 처했던 녀석이었다. 가운 주머니에 챙겨뒀던 초콜릿을 하나씩 건넸다. 게눈 감추듯 먹어치워버린 녀석들은 눈을 빛내며 입에 욱여넣을 것을 추가로 요구해왔다. 이해한다. 한 달 넘게 연구실에만 박혀있었으니 하루라도 배가 부른 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도 줄 수 없다. 이 녀석들은 굶주려 있어야 한다. 적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오늘은 다 같이 내 집으로 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정말요!?" 펙스 콘소시엄의 LRL이 까치발을 서고 기쁜듯 외쳤다. "이제 더 이상 무서워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럼. ……미안하구나. 연구실에만 계속 박혀있게해서. 하지만 너희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단다. 용서해주겠니?"


"괜찮아요! 그리고 연구실이 싫지는 않았는걸요. 다른 연구실에 비해 밝고 놀이거리도 많아서…"


아쿠아가 연구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알록달록한 벽지의 연구실은 겨울 말부터 흡사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있으나마나 했던 협탁이 있던 자리엔 다리가 낮은 물방울 모양의 베이지색 테이블이 들어섰고 책상과 반대편에 위치한 구석에는 플라스틱 시소와 그네가 들어섰다. 그 바로 옆에는 공풀장이 있다. 이 녀석들의 정신연령에 비하면 수준 낮은 놀잇감들이 아닌가 싶지만 애초에 이 녀석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분이 연구원님의 따님이죠?" 


베이지색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소액자를 들며 알비스가 말했다. 소액자 안에는 사악한 인상의 익살스러운 인형탈 앞에 서서 딸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치즈' 발음의 웃음이었다.  


"그래. 테마파크에 갔을 때구나."


"귀여워라… 이건 어디 갔을 때인가요?"


근처로 다가온 알비스가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들었다.


"캠핑 하러 갔을 때야.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었지. 밤하늘이 예뻤어."


"여기는요?" 


알비스가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액자를 가리켰다. 액자 안의 딸은 캐럴 두 개와 신나게 춤추고 있는 중이었다.


"야구장. 혹시 너희 야구라고 들어봤니? 엄청 옛날부터 있었던 스포츠란다. 지금은 인기가 없지만, 과거엔 굉장했대."


"재밌어보여…"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야구의 룰 보다는 사진 속의 치어걸들에 더 관심이 가는 듯 했다. 한동안 액자를 보게 해주다가 입을 열었다.


"알비스. 얼마전에 네 언니인 베라를 구조했어. 안전도 확보해뒀단다. 집에 가면, 언니와 재회할 수 있을거야."


"정말요!?"


토끼마냥 깡총대던 알비스가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것이… 그것이 너무나도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뻔 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오늘 밤에 펼쳐질 만찬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철저해야한다. 한 달넘게 공을 들인 만찬을 망칠 순 없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 쯤 해서 녀석들을 데리고 연구소를 나왔다. SUV 안에서 재잘대며 웃음꽃을 피워대는 녀석들에게 대충 맞춰 웃어주면서 만찬의 세팅은 어디까지 되어있는지 확인했다. 마리아의 바로 와도 된다는 말에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했다. 녀석들은 여전히 재잘대고 있었다.


씻기고, 고운 옷을 입히고, 낮잠을 재웠다. 밤9시 쯤 되어서 녀석들을 주방과 접한 식탁에 앉혔다. 쓸데없이 크고 높은 아일랜드 식탁 위로는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요리들이 수놓여있었다. 


마침내, 만찬이 시작되었다.


"자, 많이들 먹어. 그 동안 못먹었으니 영양소가 많이 모자랄 거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대부분은 고기요리로, 포만감이 큰 요리들이지만 녀석들은 몇 분이 지나도 말 한마디 내뱉는 일 없이 허겁지겁 입 속에 요리들을 욱여넣어갔다. 흘끗 내 옆에 선 마리아를 곁눈질했다. 마리아는 노심초사하며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무엇이 그리 신경쓰이는 걸까? 녀석들에게 벌어질 일? 아니면 나? 뭐가 됐든 마리아가 이런 표정을 지을만한 것은 아니다.


10분 쯤 지나니 요리로 향하던 녀석들의 손놀림이 느려졌다. 알비스가 무언가 말하려는듯 식기를 내려놓고 곁눈질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 나는 가만히 알비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연구원 님. 베라 언니는 어딨어요?"


"베라?"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뺨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베라 언니가 연구원 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아. 음, 그랬지."


"어딨어요?"


"…얘, 알비스. 실은, 넌 이미 베라를 만났단다."


"네?"


알비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이 귀여운 녀석이 얼마나 이해력이 빠를지, 어떤 식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릴지 감도 잡히지 않아 억누르던 뺨이 경련하듯 떨렸다. 알비스에게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마리아를 곁눈질 했다. 울상을 지은 마리아는 거의 눈물을 떨어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이건 참을 수가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잔뜩 했으니 밤일은 생략하려 했는데 만찬이 끝나면 바로 자빠트려야겠다.


"정확히는, 너와 하나가 됐어."


"…무슨 말이에요?"


"코와 귀, 손과 허벅지, 복부와 하나가 됐지. 네 옆에 있는 LRL은 목과, 흉부, 상완부와 하나가 됐단다."


"…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마리아가 냅킨을 건넸다. 받아든 넵킨을 들고 다가가 알비스의 입가를 닦아주고 적당히 눈치를 줬다. 알비스는 멀뚱한 시선으로 먹다 남은 요리들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마리아를 번갈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짐작은 가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투였다.


"베라. 언니. 요리?"


"풉…"


단어 암기하듯 뚝뚝 끊어 말하는 것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피식한 나를 보고서 알비스는 확신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고 괴로운듯 목 언저리에 손을 댔다. 


"우… 우우… 우웁…"


"아, 야. 토하지 마."


"우웨에엑!"


"아…"


이런. 소화가 되어야 진짜 하나가 되는건데 전부 게워내기는. 기껏 언니와 상봉시켜 주었더니 제 손으로 뿌리칠 줄은 몰랐다. 진심이다. 알비스를 기쁘게 해주고 싶단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거부 해? 목숨을 의지하던 존재가 내미는 선심을 예도 모르고 뿌리 쳐? 괘씸하다. 내가 아닌 누가 봐도 괘씸한 현장인 것이다.


따라서, 벌을 줄 필요가 있었다.


"자, 다들 들어오시죠."


 스마트 워치에 대고 말한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현관으로부터 10명 내외의 무리가 거실에 들어섰다. 다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착용 중이었는데, 그 가면은 17살의 지하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본 적 없는 가면이었다.


"뭐, 뭐야? 연구원 님… 저 인간 님들은 누구에요?"


불안한 눈빛으로 알비스를 바라보던 LRL이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나는 대답 대신 알비스의 머리채를 잡아 무리들 앞으로 던져넣었다.


"부디 마음껏 즐기시길."


"미안한데 일이 생겨서 말이야. 이건 내 몫으로 빨리 끝내고 가보겠네."


눈이 한 쪽 뿐인 여우가면을 쓴 남성이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대동한 리제가 알비스 앞에 섰다. 리제는 본인의 거대한 가위를 벌려 세우고서 한 쪽 날을 알비스의 복부에 박았다. 반응이 느려 '어?' 하는 메마른 소리가 전부였던 알비스는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 듯 했다. 저런게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라니, 블랙리버도 어지간히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우… 우아…"


드디어 복부에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것인지 알비스는 멍하니 자신의 복부와 이어진 가위를 내려다 보고있다. 무리 사이에서 음습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리제는 그 반응에 흡족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벌어진 가위가 바르르 떨었고, 이내 두 날이 다시 만나 맞물리자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는가 싶더니, 알비스의 몸이 반바퀴 돌아 나를 향했다. 절반이 찢어진 복부에서 무언가가 움찔거렸고 곧이어 물컹거리는 곤약덩어리가 우글거리는 것 처럼 역동적으로 창자가 쏟아져내렸다. 폭포같이 쏟아지는 피는 덤이다. 바이오로이드를 죽여 댈 때 마다 생각한 거지만, 의외로 창자는 색깔이 밝다. 핏물을 머금어 연분홍 빛깔도 띄지만 흰색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냅킨을 얼굴에 가져다댔다. 대동맥이 단숨에 절단된 것인지 알비스의 벌어진 복부로부터 피가 뿜어져 나온 탓이었다. 알비스가 무릎을 털썩 주저 앉을 쯤 해서 피 냄새와는 다른,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응축된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기도 하고 막대한 양의 토사물을 반나절 정도 햇볕에 노출시켜둔 것 같은 냄새… 내장 자체의 냄새, 혹은 찢어진 소화기관에서 새어나오는 냄새일까? 뭐가 됐든 피에 젖은 냅킨을 절로 코에 가져가게 만드는 냄새였다. 뭐 인정하긴 싫지만, 바이오로이드의 이런 부분 만큼은 인간을 닮았다.


축축한 금속성 냄새가 감도는 냅킨을 방향제 대용으로 삼고서 LRL과 아쿠아를 가리켰다. 무리는 기다렸다는듯 두 녀석에게 향했고, 그대로 LRL과 아쿠아는 거실 곳곳에서 겁탈 당하기 시작했다. 나와 마리아는 테라스에서 적당한 곳에 흔들의자를 두고 거실을 향해 앉았다. 오디오를 틀었다. 비발디의 '사계, 봄'이 흘러나왔는데, 창 하나를 두고 미약하게 들려오는 두 녀석의 절규와 맞물린 선율은 더 없이 봄의 이미지와 어울렸다. 새로 심은 꽃들도 즐거운지 불어온 봄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한 녀석 마다 최소 네 명의 남성이 달라붙어있는 광경은 그런대로 볼 만 했다. 두 녀석에게 입혀 놓은 새하얀 나시 원피스는 피와 정액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었고 배가 열린채 고꾸라진 알비스의 얼굴에 LRL이 강제로 키스했을 때는 환성을 질렀다. 이야. 이건 생각도 못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한평생 한순간이라도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었던 존재들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연륜에 경의를 보낸다. 속박이 풀린 아쿠아가 테라스의 창으로 다가와 도움을 구했다. 창 너머에서 텅텅대고 유리가 울리는 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아쿠아에게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한마디만 내뱉었다.


그게 '너희'의 역할이란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너희 바이오로이드의 본분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 그것 외에 너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LRL과 아쿠아도 끝내 알비스와 다름 없는 꼴이 되자 지하감옥의 무리들이 몸을 추스르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한 남성이 테라스로 다가와 말했다. 당연히 자신들을 미워할 줄 알았는데 이런 멋진 만찬에 초대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나는 그 감사에 진심을 담은 웃음으로 대답하고 대기 중이었던 기업의 보안 팀을 호출했다. 무리들은 준비됐다는 모양새로 보안 팀을 맞이했고 그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사살당했다. 


그런 조건으로 성사된 만찬이었던 것이다.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두 번 정도 더 눈을 비볐다. 그럼에도 그것은 거실 안에 확실히 존재했다.


그것은 내 두 눈 속에서 한가지의 형태로 상을 맺었다.


거실은 나비들로 가득했다. 시체에서 고치를 이뤄 피와 정액을 양분삼아 우화한 나비들.


아아, 이 곳에 그녀가 왔었다. 그녀 또한 나와 함께 만찬을 감상하고 있었다.


거실에 고인 바이오로이드의 핏물을 작은 양동이에 담아 다시 테라스에 들어서 가장 안 쪽으로 향했다.


가장 안 쪽엔 풍성하게 무리를 이룬 안개꽃이 위치해 있다. 안개꽃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는데 특히 붉은 안개꽃을 좋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새로 심은 안개꽃들은 모두 순백 일색이었다.


이 핏물을 받아마신다면 너희가 선홍빛을 띌 수 있을까. 


너희 중 누군가는 옅은 핑크빛을 띄게 될까.


그렇게 되어 옹기종기 모인 너희들이 다양한 그라데이션을 뽐내게 된다면, 그녀가 기뻐해줄까.


사라져버린 나비들은 다시 돌아올까.


"마리아."


"……"


"대답 해. 마리아."


"…네. 도련 님."


"오늘은 봉사하지 않아도 돼. 침실에서 혼자 자겠어."


"…"


대답하지 않는 마리아를 뒤로 하고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보안 팀의 몇몇이 뒷정리에 대해 물었지만 그것은 마리아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저 따위 시체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거실에 아른거리는 나비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려면 꿈 속으로 들어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 조금이라도 빨리 잠 자리에 들어야 했다.




/////




"이새끼가 반 년 넘게 연락도 없더니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뭐가 어쩌고 어째?"


가을이 되어서 찾아 뵌 '장인어른들'께 선물을 드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욕지거리였다. 


선물을 돌려보낸 장인어른 한 분이 말했다.


"이 바이오로이드를 마음대로 갖고 놀라고? 넌 우리가 우습냐?"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급식소의 풍경 한 켠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저 장인어른들께선 바이오로이드를 마땅히 증오하시리라 생각해서…"


"이런 미친놈이!"


오른 뺨에 충격이 있었고 곧바로 반대편 뺨에도 충격이 일었다.


"이건 꽤 비싼 물건입니다.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 그거 아냐?" 지켜보시던 다른 장인어른 한 분이 앞으로 나왔다. "너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나."


"냄새요?"


검은색 롱 가디건의 소매를 걷어 코를 댔다. 냄새라고 부를만한 불쾌한 것은 없었다.


"일반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것 말고 임마."


"그러면…"


"전쟁터에서나 맡을 법한 냄새가 난다고."


"무슨…"


"네 몸 곳곳에서 말이야." 


또 다른 장인어른이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당황한 마리아가 품에서 무기를 꺼내들려는 것을 제지하고 장인어른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해. 개판이 된 세상이니 전쟁터가 아니어도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놈들은 꽤 있지만, 넌 정도가 심해. 알아?"  


"…"


"뭘 하고 다니길래 이런 냄새를 풍기냐고 물을 것도 없어. 보나마나 이런 것들로 화풀이나 하고 있는거겠지."


장인어른들껜 예를 갖춰야 하지만 지금 이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화풀이가 아닙니다."


"아니긴 이새끼야. 이 꼬맹이… 그, 그… 이름이 뭐더라?"  "드라큐리나." 다른 장인어른이 말했다.


"그래. 드라큐리나. 이런 것들 잡아죽인다고 죽은 우리 아이, 네 와이프가 살아서 돌아오냐? 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뭐라는 거야 이거? 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는데? 야 임마. 네 꼴을 봐. 시체같은 눈을 하고서 피 냄새 풀풀 풍겨대는 네 꼴을 보라고. 도대체 바이오로이드를 얼마나 죽이고 다니는 거냐? 뭘 위해 죽이는데? 네 와이프? 이런 한심한 놈. 퍽이나 네 와이프가 좋다고 하겠다."


"그럴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시야가 옆으로 기울었다. 뺨이 바닥에 닿았고 뒤이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왜? 비아냥댄 것도 아니고 연구소에서 처럼 대충 주워섬기듯이 말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바이오로이드의 피를 볼 때마다 나는 나비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선물이자 인생 최대의 발견이었던 나비들을, 비록 수백만 마리는 아닐지라도 볼 수 있었단 말이다. 


나비를 볼 수 있다는 건 필시 기뻐한 그녀가 직접 나비를 보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꺼져. 다신 오지 마.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널 돌아 봐. 저 죄없는 것들에게 의미 없는 짓 하지말고."


"이것들 모두 죄가 있습니다."


일으킨 몸을 추스렸다. 가디건 곳곳에 시멘트색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단추는 모조리 떨어졌다.


"끽해야 노래나 부르던 이 흡혈귀 아가씨가 뭔 죄가 있는데?"


"존재 자체가 죄입니다."


"그딴건 저기 네 회사 대빵인 김지석이 한테나 찾아가서 말 해. 꺼져."


"그런 범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인격체의 탈을 쓴…! 웁…!"


"꺼지라고 이 개새끼야!"


"…실례했습니다."


"경고하는데, 그 드라큐리나는 곱게 다뤄라! 절대 헛짓거리 하지 마!" 


코에서 일어난 출혈을 마리아에게 지혈받고 자리를 떴다. 바닥에 가득한 낙엽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번화가에 들어서고 함께 왔던 드라큐리나를 돌아봤다. 이 드라큐리나는 그녀가 떠나기 직전 개인구매를 예약했던 녀석으로, TV너머로만 볼 수 있던 것을 집으로 들이자는 생각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아이였다. TV를 틀때마다 아이는 가장 먼저 음악채널을 틀고 드라큐리나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인기가 많았던 개체이기에 드라큐리나가 음악채널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없었고 드라큐리나가 나올 때 마다 아이는 그것이 제 노래인 양 똑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사 한 번 틀린 적이 없었을 정도다. '그렇게 드라큐리나가 좋니?' 라고 묻자 아이는 솔직하게 좋다고 답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중에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을 때가 가장 예쁘다면서.


"드라큐리나. 난 널 어떻게든 죽여버릴 생각이었어."


"아, 알아. 아까 대화로 짐작은 했어."


"…웬만하면 존댓말을 하지 그래? 방금 내가 말한 것에서 추측할 수 있겠다만,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그래도 선은 지켜야지. 꼭지 돌게 만들지 마. 알았어?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끔찍하게 박살을 내버리기 전에."


"…네."


"그래. 기회를 줄게. 원하는 걸 단 한가지만 들어주겠어. 뭐든 좋아. 세상이 이 지경이 됐더라도 난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고 얻을 수도 있거든."


"그러면…"


드라큐리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장인어른들의 경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내 의사 또한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그야, 장인어른들 앞에선 그렇게 말했어도 그녀가 사라지고 내가 저질러온 일련의 행위들이 잘못 됐다는 것은 조금이나마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시간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속속들이 부딪혀오는 시간들은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내 증오를 한없이 키워갔지만 반대로 그 증오를 다소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죽음과 아이가 겪는 고통이 전해오는 분노가 무뎌져갔다. 덕분에 이성적이게 되어 차분히 생각해 볼 만한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장인어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내 꼴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악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커져갈수록 식어가고, 식어갈수록 커져가는 증오의 양면성에 당황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드라큐리나가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은퇴'였다. 들어보니 드라큐리나 개체들은 각 방면에서 활동 후 은퇴하게 되면 가게 되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바로 테마파크라는 것이었다. 테마파크?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녀와 함께, 나중에는 가족들과 함께 테마파크를 갔을 때 드라큐리나는 커녕 그와 비슷한 개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간도 남으니까 지금 바로 가지."






//////





스마트 워치에 내장되어 있는 입장권을 터치하고 잭 오 랜턴이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날 때가 되서야 오늘이 할로윈임을 알았다. 테마파크 일대는 옛날의 그 때와 같은 형형색색의 눈부신 판타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매점이나 회전목마, 회전그네 같은 놀이기구를 지나 바이킹에 다다른 순간 드라큐리나는 환성을 질렀다. 놀러 온 게 아니라고 한소리 하고서 앞서 걸었다. 


마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이기구의 구동음과 함께 테마파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경쾌한 빅밴드 음악이 흘러나오고, 어트랙션 근처에서는 으스스한 음색이 들렸다. 즐거움은 없었고 관람객 모두가 꺅꺅 들 뜬 목소리로 해맑게 웃고 있지도 않았다. 드라큐리나가 테마파크 한 켠에 있는 어뮤즈먼트 시설을 가리켰다. 시설 입구에서 관람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검은 토끼탈 인형이 눈에 띄었다. 익살스런 표정 아래 위협적인 이빨을 드러내고 한 쪽 눈은 붉게 X, 한 쪽 눈은 파랗게 O로 된 할로윈에 어울리는… 그 때와 같은 디자인이었다.


"후려쳐버리기 전에 빨리 관리자가 있는 곳으로 가."


한 번만 더 딸과 같이 행동하면 은퇴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라…… 몰라요."


"도대체…"


어이없고 짜증이 나려던 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러 남성들을 인솔하는 키르케가 보였다. 안그래도 안내가 가능한 키르케를 찾던 중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더 있어봐야 짜증만 치밀어 오를 뿐인 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 성큼성큼 키르케에게 다가갔다. 


나와 드라큐리나가 용건을 말하자 키르케는 일순 표정을 일그러뜨린 것 같았다. 뭐야? 착각이었나 싶어 눈을 껌뻑이다 다시 쳐다봤는데 키르케는 다분히 인공적인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이쪽 손님들을 인솔해드리고 나서 안내해 드릴게요." 라고 키르케가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대답없이 남성들로 이루어진 줄의 가장 후미에 섰다. 키르케의 과장된 접객용 목소리와 들뜬 드라큐리나의 목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출발한지 2분 쯤 됐을 때부터 나는 뭔가 아른거리는 감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일듯 말 듯한 뭔가가 계속 멤도는 것이, 조금만 신경을 기울여보면 떠오를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무의식 중에 그녀를 그렸을 때 함께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가 봐.' 그녀는 분명 이와 같은 남성들의 무리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 순간 나는 제빨리 몸을 돌리고자 했다. 이대로 키르케의 인솔을 따라 계속해 이 줄에 속해 있는다면 그녀가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나 자신과 세계에 선고하는 것만 같아 저항감이 일었던 탓이다. 반면,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 이대로 나아가야 한다며 속삭였다. 그녀가 허락한 것과 다를게 없는데 거리낄게 무엇이냐며 시꺼먼 무언가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끝없이 나를 설득했다.


시꺼먼 무언가, 아마도 본능적인 감각과 비슷한 그것이 이성보다 살짝 컸기에 나는 계속해 키르케를 따랐다.


그리고 그 날, 테마파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는 그녀가 떠나버린 이래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백만 마리의 나비를 보게 된다.


그 나비떼를 보자마자 나는 마음을 바꿔 드라큐리나의 양도를 거부하고 관리자를 찾았다. '꿈의 나라' '환상의 정원' '쾌락 지대'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통칭 C구역이란 곳의 전세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관리자는 평일 한정으로, 일일 수입의 1.5배를 지불한다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나는 1.5배가 아닌 2배를 쥐여주겠다고 말했다. 하루 동안 전세 내는데에 수십억이 쓰이게 되었지만 상관 없었다. 쓸데없이 많았던 재산은 의미도 없이 썩어가기만 했을 뿐이었으니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밤이 되고 귀가한 후에 드라큐리나는 맹렬하게 저항했다. 선물을 받았다가 뺏긴 아이마냥 칭얼거리더니 다짜고짜 덤벼드는게 화가 났지만 나는 너그럽게 용서했다. 그 뿐만 아니라 공방으로 데려가 '바이오로이드'의 족쇄를 끊어주었다. 이유는 당연히 범하기 위해서다. 그 날 밤, 나는 마리아도 들이지 않았던 침실에 드라큐리나를 들여 범하고 또 범했다. 침대 위에서 울부짖으며 내 목에 어금니를 박아대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드라큐리나를 밑에 깔아뭉개고, 한계까지 삽입한 음경을 난폭하게 찔러대고, 온 몸과 가장 깊은 곳을 정액범벅으로 만드는데 열중했다. 거기에 불건전한 의도 따윈 없었다. 오직 순수한 감사와 사랑으로 드라큐리나를 대했다. 그야 드라큐리나가 계기가 되어 그런 멋진 곳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전신을 밀착해 몇 번이고 사정해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두근거리게 된 것은 모두 드라큐리나의 덕이었던 것이다.   


"드라큐리나. 기분 좋니?"


"앗, 아앙… 뎌아… 기븐 뎌아… 더 찔러줫… 가장 안 쪽에 싸면서 찔러줘엇…"


드라큐리나의 족쇄를 끊어주면서 내 머리 어딘가의 무언가도 끊어졌던 것인지, 나는 내친김에 마리아까지 들이자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주문한 모습으로 침실을 찾아왔고 곧바로 드라큐리나의 옆에 누워 가랑이를 벌렸다. 나는 그녀의 죽음 이래 처음으로, 마리아를 사랑으로 대했다. 전신을 애무하고, 정성스레 성기를 핥아준 다음 드라큐리나와 행했던 섹스 이상의 섹스를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계속했다. 마리아는 저항감이 있었는지 도중에 몇 번이고 신음을 참거나 삽입을 거부하는 듯한 몸짓을 보였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나는 마리아로 하여금 그런 거부감 마저 쾌감으로 승화시키도록 도와주었다.


"아… 아아… 진즉에 이럴 걸 그랬어. 마리아. 사랑 해."


"흣… 흐읏……"


사랑한다는 말은 반 쯤 진심이 아니었지만 반 정도라도 진심인게 어디인가. 애초에, 마리아는 내 곁에 남기를 선택했다. 내가 어떻게 되든 내가 소중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달리 말하면, 마리아에게 있어 의존할 만한 것은 나 외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도 같았다. 절반은 바이오로이드인 이상 필요로 할 때 이외엔 마리아를 밀어냈지만 나도 충분히 마리아에게 의존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망각을 위한 쾌락 본위의 섹스가 그랬고 다양한 방법으로 수 없이 많은 바이오로이드를 죽일 때가 그랬다.


우리는 그 겨울로부터 일종의 상호의존에 빠져서 자포자기한채, 불건전하고 타락한 관계를 새로이 구축하여 깊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갔던 것이다.


삽입한채로 마리아의 상기된 뺨과 목젖을 빨아대다가 꽉 끌어안았다. 이런 식으로 밀착하면 태내에서 엄지를 빨아대는 태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리아. 네가 선택한거야. 그러니 나와 언제고 함께 해 줘. 나와 함께 떨어져 줘.


차갑디 차가운 바닷 속으로.   


빛 한 줌 들지 않는 심해로.


이 세상 마지막까지.



//////





샤를 페로의 빨간 망토, 정확히는 빨간 두건. 그 동화 이야기를 그녀가 살아있을 적 아이에게 해준 적이 있다. 빨간 망토를 두른 소녀가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다가 늑대와 마주치고, 늑대에게 병문안을 가고 있다 말한다. 늑대는 이를 이용해 소녀가 도착하는 것 보다 먼저 할머니를 집어 삼키고 뒤에 도착한 소녀마저 삼킨다. (이 부분에서 아이는 울상을 짓기보다 말도 안된다며 성을 냈다.) 훌륭하게 사냥에 성공해 만족스러웠던 늑대는 그대로 할머니의 침대에 누워 할머니인척 잠에 들었는데 지나가던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소녀를 구출하고 돌들로 늑대의 배를 채운 뒤 꿰맨다. (이 부분에서 아이는 완전히 분노했다. 누굴 닮았는지 아이다운 동심이라곤 전혀 없었다.) 자다가 갈증이 난 늑대는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로 향했는데 돌 때문에 불어난 무게에 못이겨 앞으로 고꾸라져 우물에 빠져 죽는다.


라는 내용의 동화를.


아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준 동화였기에 기억하고 있다. 왜 마지막이였냐면, 아이는 할머니와 소녀보다 늑대 쪽이 더 불쌍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본인의 재치로 사냥에 성공한 것을 왜 그런 식으로 망치냐며 사냥꾼을 비난했다. 즉, 또래 보다 빨리 비현실로부터 독립한 아이에게 동화란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 아이가 비난하기 위해 쓴 표현들은 내가 가르친 적 없는 단어들이었다. 나는 그 날 아연실색하여 그녀와 향후 아이의 양육법에 대해 논의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그녀와 밤을 지새우기 전, 전혀 만족 못한 아이에게 나는 결국 빨간 망토의 원작 결말을 이야기해주고 말았다. 실은 소녀가 늑대에게 잡아 먹히는 부분이 결말이라고 말해주자 아이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잠에 들었다. 처음부터 원작 쪽을 이야기 해줄 걸. 그런 후회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계약 한 번으로 테마파크의 VIP가 된 나는 C구역의 '옵션' 선택 권한이 주어진다고 관리자가 말했다. 옵션이란 고객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테마'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원하든 모두 구축하고 제공받을 수 있는 일종의 혜택이었다.(바이오로이드의 개체수만은 예외로, 개체수가 많을수록 요구되는 비용도 높았다. 요컨데 음식점에서 면요리를 먹을 때 사리를 추가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그 테마로 '빨간 망토'를 주문했다. 동원되는 바이오로이드는 총 82기. 그 중 30기는 '할머니'고 40기는 '빨간 망토'이며 나머지 12기는 나와 함께 늑대 역을 맡게 된다. 


드넓은 C구역의 부지 일대는 빨간 망토의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숲이 되어 있었고 휘황찬란하다 못해 다소 야단스럽기까지 했던 건물들은 모두, 할머니들이 지내는 나무로 된 오두막 집이 되어 있었다. 대단 해. 감탄이 나왔다. 주문하고 단 일주일만에 이렇게나 넓은 구역 전부가 샤를 페로의 동화 속 세계가 되다니. 이런 곳을 오늘 하루 만큼은 나만이 이용 할 수 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준비되셨나요. 도련 님?"


늑대 무리의 장비를 일일히 점검해주고서 마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할게요."


마리아가 손에 쥔 스위치를 누르자 C구역 전체에 찢어지는 버저 소리가 울려퍼졌다. 숲에 버저라니. 디테일이 살짝 아쉬웠지만 이해해주기로 했다. 테마파크 측에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뿐이었으니까. 아쉽기보단 칭찬해주어야 마땅하다.


늑대들 중 절반은 나를 따랐고 나머지 늑대들은 반대편을 향했다.   


땅거미가 지는 숲 속을 달리다가 첫 번째 오두막을 발견하여 사냥복의 소매를 걷었다. 스마트 워치를 통해 '하울링'을 하고 들어선 오두막 안에는  목제 식탁 아래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3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어떻게 잡아먹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할머니 하나가 손을 싹싹빌며 살려달라 애원했다. 이런 씨발. 할머니 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 화가 나 고민을 멈추고 소총을 연발로 갈겼다.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초반부터 초를 치다니. 


나머지 둘은 눈치가 있었는지 어색하게나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식탁에 앉았다. '빨간 망토니?' 그렇게 묻는 두 할머니에게 나는 답했다. '네. 할머니. 병문안 왔어요.' 허리춤에서 이빨 모양의 나이프를 빼들고 할머니들에게 다가가 물어뜯었다. 이빨에 꿰뚫려가며 명이 다하는 동안 할머니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 판단한 것이겠지. 속이 뻔히 보이는게 우스워 그 처량하고 보잘 것 없는 자포자기식 희망을 충분히 뒤틀어주었다. 목을 뚫어버릴 땐 세심히 경동맥을 피했고 복부를 난자할 땐 내장이 쏟아지지 않도록 각도에 신경썼다.


결국 두 할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싱그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고글의 렌즈에 띄워진 홀로그램 현황판이 갱신되었다. 남은 할머니들의 숫자가 30에서 27로, 10퍼센트가 줄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빨간 망토의 숫자가 40에서 36으로 줄었다. 할머니가 죽으면 그와 동일한 퍼센테이지 만큼 빨간 망토가 죽는다. 늑대는 할머니들을 먼저 노려야 하며 할머니들을 죽이지 못하면 빨간 망토를 죽일 수 없다. 늑대들 보다 빨리 할머니와 접촉한 빨간 망토는 생존한다. 빨간 망토는 늑대로부터 도주 할 수 있다. …그런 룰이었다.


오두막을 나서자 숲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의 메아리에 초조해졌다. 이렇게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죽였다간 얼마 사냥하지 못한다. 사냥감은 한정되어 있고 현황판의 숫자는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다. 고작 거들 뿐인 다른 늑대들에게 이 이상 사냥감을 빼앗길 수는 없다. 어쩌면, 다른 늑대들은 제 동족인 할머니들을 내가 모르는 새에 빼돌려 살리려고 들지도 모른다.


C구역에 설치 된 모든 폐쇄회로로부터 정보를 받아 움직였다. 두번 째 오두막에 있는 할머니들은 틈을 주지 않고 즉각 사살했고 세번 째 오두막의 할머니들은 입에 수류탄을 물게 한채 빠져나왔다. 폭발음이 들린 것은 그로부터 20초 뒤였다. 단념한 것일까. 아니면 살 구석을 찾은 것일까. 갱신 된 숫자를 보니 아무래도 전자인 듯 했다.


네번 째 오두막의 할머니들을 난도질하여 처리 했을 때가 되서 한숨 돌렸다. 심박은 빨랐고 숨은 거칠었으며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숲임에도 전신이 땀으로 가득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활기일까? 얼마만에 맛보는 감각일까. 이 순간, 나는 완전히 살아있었다. 한 사이클에 고작 수 초 밖에 걸리지않는 속도로 도는 혈류가 생생했고 폐부를 가득 메우는 가을 공기가 선명했다.


그리고, 그에 준하는 커다란 지루함이 온몸을 감쌌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행해온 살육의 무대 중 가장 공들인 무대였음에도 나는 왜인지 다시 무기를 들기가 귀찮아졌다. 홀로그램에 적힌 숫자는 시시각각 줄어가고 있음에도, 숲에 메아리치는 비명들이 줄어들어감에도 나는 나무에 기댄채 일어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바이오로이드의 살점과 핏물을 뒤집어 쓰는 것 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지루한 걸까.


땅거미가 숲을 전부 먹어치우고, 산 너머로 해가 완전히 숨어들 때 까지 나는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결국 빨간 망토 이야기를 중단하기로 했다. 본래는 광장이였을 공터에 살아남은 빨간 망토들과 할머니들, 늑대들을 한데모았다. 아니, 이야기는 맥없이 끝났으니 이제는 모두 바이오로이드였다. 대충 20명 안팎인가? 각 바이오로이드들의 상태는 다양했다. 출혈이 심해 휘청거리고 있는 녀석, 팔이 날아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 다리가 날아가 부축 받고 있는 녀석,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녀석… 모두 하나 같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들이 그렇게 식상할 수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나이프를 빼들고 살아남은 녀석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살테면 도망쳐보라고 기회를 주고서 마구잡이로 나이프를 휘둘렀다. 전신을 땀 대신 피가 몸을 적셨고 창자 쪼가리와 살점들이 사냥복에 엉겨붙었다. 도망치는 한 녀석을 뒤에서 덮쳐 머리를 마구 쑤셔 열어재꼈다. 지급받은 나이프는 얼마나 성능이 뛰어난건지 금속질의 두개골도 손쉽게 찢어버릴 수 있었다. 드러난 연분홍빛 뇌에 해적룰렛을 하는 느낌으로 칼을 쑤셔댔는데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 전해졌다.


마지막 하나를 난도질하고 고개를 들었다. 스마트 워치의 홀로그램 패널에 비쳐진 내 모습은 흡사 머드축제에 참가한 여행객 같았다. 물론 그 진흙들은 어둠을 머금어 까맣게 보일 뿐인 핏물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기리고,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이 행위에서, 증오를 흐트리고 복수를 위한 이 행위에서 나는 언제부터 재미를 찾게 된 걸까.


언제부터 즐기기 위해 바이오로이드를 죽이게 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자각하자 그 어떤 때도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공허함이 엄습했다. 바이오로이드를 죽일 때 만큼은 다소 모자라더라도 메워졌던 가슴 속은 성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빛은 존재하지 않아 한없이 새카맸고 온도는 한없이 낮아 절대영도에 이르렀다.


"…아."


어쩌면 나는, 복수와 증오에 의해,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한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나는 그 남자, 내 아버지와 다름없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를 잃었다는 데에서 오는 무한대의 슬픔 속에서 감히 쾌락과 즐거움을 좇을 수 있었을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에 어울리는 결론을 내렸다간 나는 끝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생존 본능이 보내오는 경고에 따라 내 뇌는 지금 당장 사고를 정지하고 더욱 거세게 고개를 저으라 명령했다.            


"도련 님…"


마리아가 건네오는 타월을 거부하고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은 보내 줘."


내가 가리킨 곳. 그 곳엔 나와 함께 늑대 역을 맡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서 있다. 팬텀, 캐럴, 스카디, 레이스, 발키리, 키르케, 베로니카, 써니, 금란, 포츈, 블랙 리리스. …쓰임을 다하면 죽임 당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녀석들은 움츠린 자세로 바르르 떨고 있었다. 


"다들, 어서 가세요."


그래. 어서 가. 마음 바뀌기 전에.


바이오로이드들은 머뭇대다가 '감사 합니다.' 라고 말한 다음 서둘러 떠났다. 지들을 장난감으로 쓴 놈에게 감사하다니. 미친 년들. 바이오로이드답다면 바이오로이드다웠다.


"마리아. 드라큐리나는 어딨어?"


"…"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인 거겠지. 안타깝군. 드라큐리나는 죽일 생각이 없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리고 오는게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고, 드라큐리나는 어떤 역할이었을까? 빨간 망토였을까? 아니면 인자한 할머니였을까. 죽어버린 이상 무슨 의미겠냐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신경쓰였다.


"돌아가요. 도련 님."


"…그래."


마리아가 내밀어오는 손을 잡았다. 마리아가 앞서 걸었고 나는 거의 이끌리다시피 뒤따라 걸었다. 거친 가을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휘날리는 소리가 귀에 가득해 나는 거의 홀린듯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울창한 나무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은빛 부스러기들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조랑말 자리, 페가수스 자리… 주문을 읊듯 하늘에 수놓인 별자리들의 이름을 외우자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기억 하나가 뇌리를 파고 들었다. 알렉산드라에게 혼이 난 밤, 마리아와 둘이서 별채의 정원에 앉아 별자리들을 보았더랬지. 그런 기억이 떠올라서 였을까. 지금 걷는 이 숲의 분위기는 별채의 분위기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귀가하시면…"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침… 하시겠어요?"


"…뭐?"


"일주일이나 하지 않으셨잖아요."


"…싫어."


"거짓말. 절 속일 생각은 마세요."


"어떻게 알고?"


"도련 님과 하루이틀 함께 한 게 아니잖아요."


"…"


"…얼마든지… 하셔도 되요. 원하시는 만큼 안으세요."


귀가하고서 마리아와 함께 샤워실에 들어갔다. 전신에 굳어버린 피는 어지간히도 닦이지 않았다. 특히 머리가 고역이었다. 세 번이나 감았음에도 머리에 떡진 핏덩이들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결국 마리아의 손을 빌리게 됐다. 도중에 마리아의 입과 혀가 내 성기를 머금어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나 일일히 지시해야만 성행위에 응하던 마리아가 갑작스레 왜 이러는 걸까. 왜 먼저 나서서 나를 애태우는 걸까. 혹시 겨울 이래로 변해버린 내게 익숙해진 것일까. 그래서 먼저 다리를 벌리고 유혹해 오는 것일까.


시킨 적도 없는데 제 손으로 비부를 꿀로 물들인 마리아가 귀두에 음부를 밀착해왔다. 그에 응해 마리아의 골반을 부여잡고 음경을 삽입하려다가, 결국 그만 두었다. 마리아는 의아하다면서도 조금은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더욱 애태워 다시 삽입을 시도했다. 나는 다시 밀어냈다. 그렇게 세 번 쯤 반복하고, 반강제로 마리아에게 입술을 빼앗기고 나서야 우리는 샤워실을 나설 수 있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침대에서 마리아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들은게 언제인지 가물한 익숙한 선율이 귀를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how i wonder what you are…"


작은 별들이 떠있는 무중력 공간 속에서, 나는 마리아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절로 눈가가 뜨거워져 버린 것이다.


"up above the world so high…"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like a diamond in the sky…"


마리아는 어떻게 되는 걸까.


"twinkle twinkle little star…"


타락한 관계 속에서 끝도 없이 추락해 가는 걸까.


"how i wonder what you are…"

 

강하게 마리아를 끌어안았다. 마리아도 그에 응해 나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만이라도, 나는 그저 아무 걱정도 근심도 할 필요 없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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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떠났다. 아주 오랜만에 용모를 정리하고 '아빠'다운 모습을 하고서 마리아와 함께 병원에 들렀을 때, 그 때, 단 몇 초 차이로 아이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도련 님!"


그리고 그 부근부터 내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시야도 흐릿했다. 오직 내 안에 있던 것은 아이가 그녀에게로 떠나버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천벌인지도 몰랐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데에 대한 천벌. 아이를 지키지 못한데에 대한 천벌.


가족을 지키지 못한데에 대한 천벌.


전부 나 때문이다.


"도련 님! 진정 하세요!"


시각도 후각도 미각도 촉각도 흐릿한데 오로지 청각만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마리아의 비명으로 미루어본다면, 나는 아마 뜯어말려야 하는 짓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전부 바이오로이드 때문이다.


사퇴하여 나온 퇴직금과 집을 포함한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팔아버리고서 모인 돈으로 바이오로이드를 사들였다. 잘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귓가 가까이에서 들린 마리아의 목소리로 볼 때 대충 200개 언저리 정도 구매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나는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디든 좋으니 높은 장소가 필요했다. 거리로 나와 대충 높아보이는 아무 건물에 들어섰다. 수 백의 바이오로이드를 대동했는데도 건물에선 누구 하나 나를 제지 하지 않았다. 아니, 제지 당하는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어림잡아 20층은 넘어보이는 건물인데. 뭐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어떤 이유로든 가로막는다면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손에 피를 묻힐 일을 만들지 않게 해준다면 감사할 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건물의 절반 쯤 올랐을 때, 터키 행진곡과 사계 중 봄과 바디네리, 작은 별 변주곡이 머릿 속에서 동시에 재생됐다. 하나의 선상에서 겹쳐버린 선율은 끔찍하게 기괴하고도 한없이 아름다워 나로 하여금 반 쯤 미쳐버리게 만듦과 동시에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옥상에 다다랐다. 아이가 떠난 이래, 나는 이전에 없던 대규모 학살을 계획했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이면서 더 이상 내게 의미 없는 모든 걸 제물 삼아 준비한 계획.


바이오로이드는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 용서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나 또한 존재해선 안 된다. 바이오로이드 이상으로 나를 용서해선 안 된다.


다만, 이 자리까지 함께 한 마리아는 죄가 없다. 따라서, 나는 마리아에게 두 번째로 명령한다.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 앞으로는 혼자 살아 가.' 마리아는 울부짖는다. 그래도 안 된다. 마리아는 자격미달이다. 이 옥상에 있어야 할 것은 나와 이 오물들 뿐이다.


마리아를 배웅하고 옥상의 난간 앞에 수백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세웠다.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명령했다. '오른 쪽부터 떨어져라.' 도미노가 무너지는 이미지가 머릿 속에 그려졌고 머지않아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맨 오른 쪽의 바이오로이드는 괴로운듯 몸을 떨 뿐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리지 않는다. 아, 그래. 이해 해. 누군들 이런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겠어. 그러나 이 곳의 녀석들은 자신들이 바이오로이드임을 잊어선 안 된다. 다시 명령했다. 오른 쪽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살짝만 앞으로 나섰을 뿐 여전히 난간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는 수 없어 녀석들에게 다가가 앵무새 처럼 같은 명령을 반복해 외쳤다. 그제서야 바이오로이드들은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수 백의 바이오로이드가 모두 몸을 던진 다음 난간에 올라섰다. 내려다보니 몸을 던졌던 바이오로이드들은 한떨기 붉은 꽃들로 승화해 인도에 수놓여 있었다. 만족스럽다. 이제 내가 마지막 한송이가 된다면 그녀와 아이에게 더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여보. 우리 딸.


지금 만나러 갈게.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무게중심을 앞으로 놓으려는데 기묘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뭐야?"


붉은 테두리를 가진 블랙홀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세계에 구멍이 뚫렸다.


메타포 따위가 아니다. 물론 정신에 구멍이 뚫리긴 했지만 실제로 하늘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구멍들은 서서히 크기를 넓혀갔고, 이윽고 하늘 전체를 메워 푸른 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저게 뭐지? 구멍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검은 비. 검은 비가 내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고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가기 전에 본다는 것이 이 따위 재수없는 헛것이라니. 적어도 꽃밭이라면 얼마나 좋아.


불쾌해진 탓에 차분해져 망설임 없이 바로 몸을 날렸다.


몸이 둥실거리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지금 갈게."


눈을 감았다.


의식은 서서히 페이드 아웃 되어갔다.


















그리고 다시 페이드 인 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히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린 것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난간 위에 서있다. 눈 앞에는 익숙하지만 전혀 익숙하지 않은 회백일색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된거야? 기억을 더듬어본다. 고작 수 십초 사이에 일변한 풍경을 단서로 삼아 결락 된 기억들을 되찾으려 머릿 속의 서랍을 열고 닫았다.


"아… 아아…"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으아아… 아아…"


소중한 누군가를.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어렴풋한 정도다.


"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직감한다. 기억은 머지 않아 돌아올 것임을.


그래서 괴로웠다. 그래서 절규했다. 죽기를 각오했고 실제로도 죽기 직전이었던 인간을 제 자리로 되돌린 거도 모자라 실은 잃지도 않은 기억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장 한 장 되돌려 주겠다니. 이런 건 고문이다. 이보다 더한 고문을, 나는 모른다.


"나는… 왜…"


넋이 나간채로 서있다가 불어온 바람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혹시 이대로 머리가 깨져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찰나에 그런 기대가 들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작은 체구의 누군가, 아마도 소녀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보였다. 눈가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지 얼굴의 윗쪽이 뭉툭했고 머리칼은 땋은 것 같은데도 굉장히 길었다.


일순 뿐이었지만 흐렸던 시야가 맑아졌다. 그걸로도 나를 안아든 누군가를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그 일순을 통해 결락되어있던 기억 몇 조각이 맞춰졌다.


내게는 딸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무언가에 탑승해 나를 안아든 그 소녀를 딸과 착각했다.


착각할 정도로, 소녀는 내 딸과 똑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는 닥터에요."


이름인가? '저는' 이라고 했으니 이름이겠지.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 이름만을 되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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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시리즈 완결임. 금방 써오겠음


퇴고는 천천히 할게 오타나 어색한 문장있어도 감안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