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스토리 이후를 보고싶으신 분은 닥터 시점을 넘기고 읽으시면 됨. (에필로그 검색)


퇴고는 천천히 하겠음..




-----------


익숙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바이오로이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막혀하던 그도 이제는 가벼운 스킨쉽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 있게 되었다. 성행위도 마찬가지. 대상은 주로 샬럿이었지만 (물론 성행위를 바란 것은 바이오로이드 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의 대화'를 나누게 된 이들이 더 생겼고 그 중 한명이 홍련이었다.


그에게 성행위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나 패드에 비춰지는 이 광경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체온으로, 내 몸은 점점 뜨거워져갔다. 달아오른게 아니다. 절로 입을 달싹이게 되는 그런 종류의 열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어째서 이 역겨운 것들은 끝에 가서 성행위를 요구하는 것일까? 몸으로 느끼는 저차원적인 쾌락이 알기 쉽다는 이유에서일까? 하지만 무엇을? 내 주인과 저들 사이엔 사랑도 무엇도 없는데. 


"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응… 후후… 기분 좋으신가 보네요."


쓸데없이 커다란 가슴 사이에 내 주인의 음경을 끼운 홍련이 말했다. 해본 적이 없다며 답지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어필하려는 것 같은데, 누가봐도 추잡스러울 뿐이었다. 


"…"


청백색 조명 하나만 켜진 그의 사령관실에서, 홍련은 책상에 걸터앉아 활짝 가랑이를 펼쳤다. 허벅지를 따라 늘어졌던 가터가 흐트러졌고 그는 소동물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양새로 홍련의 비부에 얼굴을 파뭍었다. 그 쯤 해서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검은 속옷 사이로 애액을 줄줄 흘려대는 주제에 간지럽다며 아양을 떨 필요가 있는 건가? 바라건대 어짜피 할거라면 적어도 솔직하게 굴어줬으면 했다.


내 바람은 통한 것인지, 곧바로 그의 음경을 전부 받아들인 홍련은 책상에 누워 벌렸던 가랑이를 허리에 감았다. 그를 흥분시키기 위한 홍련의 과장된 신음과 책상의 비명 소리만이 패드의 스피커에 가득했고 무드에 젖어 오직 쾌감을 위해 바깥이 아닌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정해달라 조르는 홍련의 달아오른 얼굴을 마지막으로 패드의 전원을 껐다.


"…"


머리로만 납득하는 것과 실제 광경을 직접 두 눈에 담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나 괴롭다. 그렇게 되뇌이며 나를 달랬다. 지금 당장 폭발했다간, 이제껏 쌓아왔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버린다.


뭐, 좋아. 더러운 년들. 실컷 즐겨두라지. 


진즉에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슬슬 어금니를 드러낼 때였다.


철충은 보통 겨울이 되면 동면을 취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겨울은 그렇지 않았다. 동면은 커녕 그 어느때보다도 맹렬히 인류 저항군을 공격해왔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것이 기꺼웠다. 계획에 보탬이 된다면 뭐든 좋으니까. 그렇기에 철충은 이제 적이라기보다는 원군이었다. 계속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붙잡고 있어 줘. 그 사이에 나는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려 갈테니.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갈 때 쯤 되어서는 전략이나 전술이란게 필요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그거다. 과거 6.25라 불리던 전쟁 속에서 펼쳐졌던 고지전. 하루 점령하면 반나절도 안돼 다시 밀려나고, 또 탈환하면 다시 빼앗기고. 그런 양상의 전투들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듬직해도 너무 듬직하다. 왜 과거의 나나 언니들은 철충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사실은 철충만을 효율좋게 죽이기 위해서라는, 그 이유 하나만을 위해 인간을 찾아다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오빠를 저런 식으로 대할 수가 없는 거잖아.


"사령관! 피하지 마! 오늘 만큼은 반드시 말해야겠어!"


"꺼져! 아무도 사령관실에 들어오지 마! 저리 비켜 아스널!"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서던 아스널을 어깨로 밀치고 오빠는 사령관실에 쳐박혔다. 아르망과 배틀메이드 몇몇을 대동하고서. 그래도 함교에서의 사건 이후 처럼 아무것도 하지않은채 누워만 있지는 않겠지. 저러면서도 오빠는 사령관실에 들여놓은 원격지휘 시스템의 바이저를 하루 내내 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에서는 수십 수백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오빠의 지휘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오빠가 지휘를 포기한다면, 10명이 죽을 것을 100명이 죽어버리는 결과를 낳을테니까.


한 때는 얼마나 전투를 치르던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었는데. 오빠의 지휘능력이 신화처럼 떠받들어질 때도 있었는데.


"레오나…"


낮게 깔린 목소리를 흘리며 아스널이 고개를 돌렸다. 늘 근엄했던 얼굴에는 분노와 혐오만이 담겨있었다.


마땅히 불러야 할 존칭을 생략한 아스널이 레오나 앞에 섰다.


"말해 봐. 어떻게 죽고 싶은지."


레오나는 지지 않겠다는 기세로 외쳤다. 표정에서는 다소의 억울함도 느껴진다. 그래, 알아. 실은 오빠가 걱정되서 그런거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너희는 안개 속에서 속절없이 허우적댈 수 밖에 없거든. 그게 변명거리가 되어주지도 않아.


아스널에게 다가서는 저 모습을 보건대, 레오나는 지휘관들 중 가장 훌륭하게 미쳐버린 년이었다. 그 특유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말할 거면 알아듣게 얘기 해. 뭘 죽으란 거야? 사령관이 계속 피하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오오. 흐름을 보니 이번에도 또 한바탕 붙을 것 같다. 이것은 좋다. 되도록이면 평소의 목소리보다 최소 2옥타브는 높여서 데시벨을 최대한 끌어올려줬으면 한다. 오빠가 전부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너희의 한마디 한마디가, 불쾌한 타격음과 고성들이 오빠를 깎아내 마멸시키는 쇠붙이들이 될테니. 아아, 오빠. 가여운 오빠. 하루 빨리 무릎꿇고 전부 포기해 주지 않을래? '바이오로이드'에게 매달릴 수록 괴롭기만 할뿐이야. 모두 떠나갈 거야. 결국 모든게 사라진 그 때가 되어서야 오열해봤자 나는 들어주지 않을거야.


죽어버린 눈으로 절규하는 오빠라니. 오싹할 정도로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아스널은 딱히 변한게 없다. 원래부터 다양한 면에서 솔직한 년이었어서일까?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080에게 지시해 둬야 할 것 같다.


패드에 이어폰을 꼽고 바흐의 '바디네리'를 재생했다. 톡톡튀는 플루트의 선율이 귀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곡의 제목대로, 복도의 풍경은 농담과 익살로 가득했다.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오빠의 '무장해제'는 거의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었다. 특수개체(다른 말로는 실험개체) 들이 그랬고 배틀메이드가 그랬으며 컴패니언이 그랬다. 시티가드는 말할 것도 없지. 지휘관들과 동일한 나노머신인 '안개'가 전원 주입됐음에도 이들에게서는 딱히 유의미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빠에 대한 충성심이 한층 더 강화 된 것 같기도 했다. 이 성가신 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하지? 그렇게 고민하면서 각 개체들의 제원표와 명단, 즉, 주인 님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년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전투에서 내 주인은 현장 지휘를 나선다.


'세라피아스 앨리스'를 편성하고 패널을 닫았다.


"고생 많았어요. 앨리스."


반 쯤 눈이 녹은 숲 속에서 일장 지휘를 마치고 그가 앨리스에게 다가섰다. 앨리스는 불쾌한 기색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는데,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천불이 나 타이탄으로 고기파편을 만들어버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이 씨발 년. 한 번만 더 그 따위로 굴었다간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짓이겨버리겠어. 그와 만나기 전에도 앨리스는 재수없는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 날에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개박살을 내줄 수 있었고 마침 상황도 환경도 딱 좋았다.


"접근 하지 마세요. 건들지도 마세요. 조금이라도 제게 닿으면 좋은 꼴 못보실 줄 알아요."


"…"


미사일 사출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가, 다시 내렸다.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거라면 앨리스는 참으로 성능 좋은 시뮬레이터였다.


뭐, 생리라도 하는 날인가? 오늘 따라 까칠하다. 내 주인도 이제는 오빠와 동일한 스타일로 지휘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그런 파격적인 전투는 처음 한정이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씨발 그 따위 표정 짓지 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앨리스가 그의 뺨을 치듯 밀어낸 걸 봤을 땐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앨리스에게 다가가는 내 주인은 지금 한정으로 어떠한 나쁜 의도도 품고 있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냥 많이 피곤할 것 같아서, 위로의 말이라도…"


"위로? 무슨 위로? 설마하니 그런 걸 생각 하는거에요? 같잖긴. 당신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게 없으니 적당히 쳐다만 봐요. 당신, 수상한 거 알죠? 당신이 오고나서부터 오르카가 이상해졌어요. 부탁 하나 해도되요? 어딘가로 사라지라곤 안할게요. 가능하면 오르카 한 구석에 박혀서 나타나지 말아주시겠어요?"


"그, 그게… 음…"


"…"


"닥터? 왜 그렇게 봐요?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잘못 된 거? 있지.


"이…"


"닥터?"


"이 씨발년아!"


"……어?"


원래부터 이럴 생각이었지만 분노하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그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명령으로 앨리스를 옥죄고 범하라고. 나는 그가 편하게 범할 수 있도록 앨리스의 다리와 팔을 한 쪽씩 뜯어내고 전신의 무장도 모두 뜯어낸 다음 나체로 만들었다. 앨리스는 반 쯤 넋이 나가 나를 멍하니 쳐다봤지만 내 눈에는 당황해하는 그 만이 보였다. 왜 당황해 하는건데? 사지 두 개 날아가는 것 정도, 당신에겐 아무런 문제도 아니잖아. 조금 더러워졌을지언정 과거의 당신이 겪은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잖아. 혹시, 그런거야? 품었던 본연의 목적이 흐릿해진거야? 아니면 이 더러운 오물들에게 정이라도 든거야?


그건 곤란 해.


기본적으로, 그는 번듯한 교양을 갖추고 있으나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가학이라는 부유물이 침잠해있다. 그런 인간이다. 나는 그 가학심을 충동질했다. 무어라 지껄여서 충동질 했는지는 생략한다. 결과만 말하자면 내 주인은 눈이 돌아가 앨리스의 위에 올라탔고 눈 섞인 숲에서 몇 번이고 앨리스를 범했다. 그가 검지를 세워 벌린 앨리스의 비부는 그 머리카락과 동일한 색이라는게 우스웠다. 대량의 정액을 머금게 된 비부는 몇 번 벌름대더니 의식이 끊어짐과 동시에 멈췄다. 나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강간의 현장을 눈에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앨리스가 울부짖을 때마다 들으란듯이 비웃어주면서. 제 자신이 절벽의 꽃인 줄 아는 건 상관없었지만 감히 바이오로이드임을 망각하고 인간에게 함부로 구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특히 그 대상이 내 주인이라면 더더욱.


숲에 울리던 앨리스의 절규가 멎었고, 나는 패드를 켜 음악을 재생할까 하다가 080을 호출했다.


앨리스의 시체를 치우고 숲을 뒷정리한 080을 대기시킨 뒤, 그를 전진기지의 천막으로 데려가 멱살을 잡았다.


"한 번만 더…" 내가 말했다. "한 번만 더 망설이면 가만 안둘 줄 알아. 알았어?"


"닥터…"


그의 손이 뺨에 닿기 직전에 쳐내고 다시 멱살을 잡아 벽까지 밀어붙였다. 총기 거치대에 부딪혀 그가 마른 신음을 냈으나 나는 봐주지 않았다.


"약속 해."  "닥터. 진정해요."


"약속 해!"


"…알았어요. 미안해요. 닥터."


"……아뇨. 저야말로 미안해요. 그게… 내가 왜이러는지…"


그가 나를 강하게 껴안아 대화를 끊었지만, 잠시 뒤 귓가에 속삭였다. 침묵한채 속삭임에 귀기울이고 있으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찾아왔다. 고작 5분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천막 외부의 세계에서는 최소 4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것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숨을 뿜었다. 시간의 밀도란 다분히 가변적이다. 그것을 얄궂다고 여겨도 소용없었다. 행복을 대가로 밀도를 바친 것이니.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지만 앨리스의 죽음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앨리스에게 시달렸어도 오빠는 앨리스를 꽤 각별히 대했었으니까. 앨리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런' 취향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왜? 이제와서 의문부호를 띄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어쨌든, 무너져가던 오빠는 앨리스의 '전사'를 보고받고 처음보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에게서 처음보는 표정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본 적이 없어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적당히 표현하자면 내장에 쇠말뚝이라도 박힌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것이 꽤나 사랑스러웠다는 것만은 생생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전혀 오빠를 사랑하지 않지만.


체크메이트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리스크가 큰 방법이었어서일까? 흔적은 철저히 지워왔더라도 차마 숨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결국에는 꼬리가 밟히고 말았다. 언젠가 부딪힐거라곤 생각했지만 역시 라비아타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경위로 사냥개가 태어났다.




///



그는 사령관이 됨과 동시에 상당한 권한도 함께 손에 넣었기 때문에 무력수단을 얻을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걸 위해서 그런 고역을 참아내고 친분과 신뢰를 쌓아올렸던 거라며 그는 득의양양하게 웃었지만, 몰래 AGS를 동원해 재건해온 C구역을 보여주자 깜짝선물이라도 받은 어린 애인 양 그는 천진하게 웃었다. 내가 그보다 한수 위였다.


그 C구역의 지하 깊은 곳에, 멸망 전 그가 살던 집의 차고와 비슷한 크기의 공간을 마련해두고 약간의 시설과 설비를 들여놨다. '휴가'를 낸 그와 나는 오랫만에 단둘뿐인 시간 속에서 특별한 '제작'을 하게 됐는데, 그러던 도중에 지휘같은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제한다면 오빠가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지 깨닫게 됐다. 내 주인과 달리 개성도, 특색도 없는 인간을 오빠라 부르며 사랑하고 아꼈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래. 사령관이라면 바이오로이드의 제작도 '직접'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 물론, 엄밀히 따져본다면 오빠는 고작 5살에 불과한데다 아무런 지식도 경황도 없이 이 따위 세계에서 눈을 떴다는 기구한 사정의 소유자였으니 이해 해 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제작에서 나는 육체를 담당했고 그는 정신을 담당했다. 유전자 씨앗을 넣고, 몰래 끌어왔던 자원들(안드바리의 보직변경을 지시하라고 그에게 일러두었다.)을 모조리 쏟아붓고, 세밀한 부분을 조정하는 과정은 피아노 듀엣을 펼치는 것과 같았다. 듀엣이 끝난 다음엔 함께 구석에 앉아 챙겨온 턴테이블 디자인의 오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지휘자 시늉을 내면 그가 웃었고 내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면 그는 말없이 한 팔로 끌어안아줬으며 '작은 별 변주곡'이 흘러나오던 때엔 그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는 잠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럴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단둘이기에 행복한 시간은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그와 나의 '아이'들이 태어나 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작은 별 변주곡을 재생했다. 아이들은 이미 태어나 '시설'에서 조용히 잠들어있었지만 나는 마치 '태교'라도 하는 것 같아 쑥스러워져 그의 팔을 감싸안고 숨어들듯이 몸을 기댔다.


아이들과 지금 당장부터 함께 해줄 수는 없기에 아이들을 위한 영상을 촬영해두고 그와 함께 오르카로 향했다. C구역을 지나쳐 B구역을 지나고 A구역에 다다랐을 때 그가 발을 멈췄다. 그의 영화를 보았었던 탓인지 A구역은 어제도 엊그제도 만원을 이루고 있던 것 같이 느껴졌지만 어디까지나 그렇게 느껴졌던 것 뿐으로, 오늘 날의 A구역은 황폐해져 파괴되고 남은 꿈의 잔해들만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도 이것이 신경쓰여 발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앨리스에요."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샬럿도 거들었지만… 어때요? 잘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네요."


그 미소, 그 말투는 낯설었다. 그가 보여줬던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었고 함께 해온 반 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왜 그런 마지못해 맞장구친다는 말투로 말하는 거야?


이것은 좋지 않았다.




////





내게 라비아타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면 단연 지식과 기술이다. 뭐, 그뿐이다. 맥빠지게도. 게다가 밸런스적인 면에서 바라본다면 '닥터'라는 개체는 라비아타에게 전혀 비할 바가 못 된다.  


이것 참. 쉽게 이겨낼 수 없는 상대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원활히 제압한다는 상황을 그려낼 수 없고 그럴 듯한 계획들을 열거해 검토해봐도 하나 같이 목이 날아가는 결말로 귀결된다. 우리 아이들(그는 사냥개라 명명했다.)은 아직 준비가 안됐고, 준비가 됐더라도 상황 상 투입하기도 어려웠다. 라비아타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고 있는 녀석들이 한둘이어야지. 오르카는 충분히 무너질 만큼 무너진 것 처럼 보였어도, 여전히 쓰러뜨릴 기둥은 다수 존재했다. 


그랬을텐데, 그 중 가장 거대한 기둥이었던 라비아타가 손쉽게 무너졌다. 그가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공방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내 손에 나노머신과 모듈을 쥐여주고서 모든 걸 내게 맡겼을텐데 어째서 직접 나서게 된 걸까? 혹시 내게 저지른 실수들이 미안해서 그런걸까? 그렇다면 기쁠 것이다. 울고 말 정도로.  


결과만 말하자면, 그것은 '오빠와 라비아타의 첫 만남' 의 재현이었다. 정공법을 사용한 라비아타는 내 주인에게 실수하게 되어 감옥에 갇혔다. 오르카의 많은 이들은 이 쯤 해서 어금니를 조금씩 드러내보이던 내 주인(정확히는 나)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인간에게 칼을 겨눴다.' 라는 사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따져보자면 오빠의 경우보다 더 했다. 그야 오빠의 경우엔 '철충'이었고 내 주인은 명백히 외형부터가 인간이었으니까.  


의외로 라비아타는 바보같은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자애롭고 기품있는 라비아타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직했기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던 걸까? 아니면 효과가 없던 나노머신이 뒤늦게 제 몫을 하게 된 걸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라비아타를 어떻게 다룬 것이길래 다시 한 번 감옥에 쳐박을 수 있었는지도 묻지 않기로 했다. 난 그저, 내 주인인 '진짜' 인간에게는 라비아타도 별 수 없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기뻐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라비아타가 무력화(매우 타당한 연유로) 되고 오르카는 또 한 번 크게 휘청였다. 그 사이에도 지휘관들은 착실히 지리멸렬한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빠가 떠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 그와 내가 만난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다. 오빠에게 있어 앨리스가 도화선이었다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메이였다. 둠브링어라는 부대명 답게 제 손으로 절망을 부르다니, 하필이면 그 곳이 오르카였다니. 비웃어줘야 할지 위로해줘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오빠가 그렇게 된 것은 오르카 모두의(물론 나는 빼고) 탓인데, 그것을 본인들도 알진데 모든 탓을 메이에게로만 돌리려 하는 것이다. 곤란 해. 나중에라도 이건 반드시 짚고넘어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명백히 너희 모두가 잘못한 것이라고 똑바로 주지시켜줘야 이 오물들은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할테니.     


오빠가 떠난 것이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오빠 곁에 멤돌던 년들을 어떻게 족쳐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는게 허무했을 뿐이었다. 이럴거면 사냥개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내 계획의 큰 줄기는 이렇게 끝났다. 나만 몰랐을 뿐, '우리'의 계획은 지극히 예정 조화적인 흐름으로 흘러갔었던 것이다.  


오빠가 떠나고 얼마 뒤에 구 사령관실에 들러 과거의 기록들을 열람했다. 과거라 함은 오빠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함께 해왔던 시간을 뜻한다. 딱히 추억을 하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과거의 내가 조금 궁금해져서. 아무 생각도 의미도 없이 그냥 사진첩을 열어보는 그런 감각이었다.


과거의 나는 오빠 앞이라면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다. 오빠와 함께하지 않는 기록보다 함께한 기록을 찾는게 더 빨랐고 영상에 비춰진 과거의 닥터가 가장 많이 내뱉는 단어도 '오빠'였다. 말투는 나긋했고, 때로는 짓궂었다. 나이대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르게. '씨발'이나 '좆' 같은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지금과 오빠 밖에 모르는 소녀였던 과거의 괴리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선 흥미롭기까지 했다.    


영상보다 무게감이 낮은 사진 파일들은 빠르게 넘겨갔다. 오빠와 막 만났을 무렵의 사진과 로크가 합류했을 무렵의 사진들이 눈에 스쳤고 하치코의 앞치마에 묻은 초콜릿에 손가락을 가져가는 사진을 봤을 때는 웃음이 나왔다. 다음 페이지에는 생활관에서 곤히 잠든 내 모습이 찍혀있었다. 언제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다음 페이지에서 오렌지브라운 머리칼을 가진 개체가 침대맡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개체는 포근한 미소를 머금고 잠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하. '리앤'을 복원했을 때였구나. 그래. 그 때는 참 힘들었어. 그래도 보람찼지. 오빠가 기뻐했으니까. 


"…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람? 내 주인은 오빠를 위해 행동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주인만을 위한다. 따라서 계획 또한 엄밀히 말해 오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주인을 위한 것이다.


"윽…"


다음 페이지에 나타난 사진은, 세인트 오르카 때의 사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꾸며진 사령관실에서 성인의 몸을 가진 나와 오빠 단 둘이서 찍은 사진. 오빠는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평소와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몸은 완전히 다른데 웃는 얼굴만은 내가 봐도 무서울 정도로 똑같았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슬픈 게 아니야. 슬픈 게 아니야. 그렇게 뭉개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사령관실에 들어왔다. "닥터!?" 목소리의 주인은 콘스탄챠였다. 나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오빠를 추억하려 들어온듯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콘스탄챠에게 '오빠가 떠난 것을 슬퍼한다.' 라는 태도를 보여 진실을 숨기는데에 도움이 되겠다는 발칙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콘스탄챠에겐 대충 얼버무리고 몸을 추스려주는 것도 거부한 뒤에 사령관실을 나왔다. 슬프지도 않는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분하게까지 느껴졌다.


전부 잊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직 내 주인 한 명이다.


그럴 것인데, 나는 왜 이 사진을 출력해 손에 들고 있는걸까.


"…"


……오빠가 떠나 텅 비어버린 캔버스가 된 오르카는 그에게 주기로 했다. 이렇게 표현하기엔 뭣하지만 일종의 상이다. 내가 계획을 진행 중이던 사이, 그도 착실히 오빠를 '위해' 여러가지들을 감당하고 실행했으니까. 괴로움을 무릅쓰면서도 오빠를 겁박하기까지 했으니까. 


캔버스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무슨 색일까? 그것만을 기대하기로 했다.  


그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


  



사냥개들을 오르카로 들이고 나서 그 아이들만의 장비와 전투교리를 정해주려고 고민하던 무렵에 새 사령관실에 티아멧이 찾아왔다. 실험개체. 예의 주시하던 년들 중 하나였던 티아멧은 과거의 소심함 따위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라는듯 인간 앞에서도 똑바로 어깨를 펴 앉아있었다. 아하. 과거의 아픔 같은 건 오빠를 통해 확실히 이겨냈구나. 티아멧과는 크게 접점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서 몰랐지만 뭐, 축하할 일이라면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부디, 내 주인에게 실수는 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그런 내 바람은 무색하게도 티아멧은 다짜고짜 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유? 당연히 오빠였다. 그와 내가 오빠로 하여금 떠나게 만든 건 사실이었지만 직접적인 언행을 통해 그렇게 만든 건 지휘관과 일부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티아멧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티아멧은,


"당신이 범인인 건 알고 있어요! 무슨 짓을 하신건가요!? 어떻게 사령관 님을 그렇게… 사령관 님이 그런 표정을…"


확증도 없이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내 정체는 끝까지 숨겨야 했기에 티아멧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피했다. 후에 통신기로 그에게 전달받았는데, 티아멧과의 문제는 심야의 갑판에서 정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떨렸던 것으로 보아 분노하고 있는듯했다.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아무래도 그는 조금 미온적이게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은… 믿을 수 없어요."


갑판 한가운데에서 그와 티아멧이 대치 중인 모습이 패널에 비치고 있었다.


"사령관 님 이외의 인간은 믿을 수 없어."


"저기요. 티아멧."


별자리라도 찾고 있는 걸까? 하늘을 올려다본채 그가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건, 당신의 과거 때문이죠? 실험을 당했다… 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래요. 끔찍하게도."


"실수하면 동료들이 죽어나갔다고요. 당신을 대신해 실험을 받아서요."


"…알고 계시네요."


"읽어 봤으니까요."


하늘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내렸다. 패널로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왠지, 그의 두 눈은 지금 굉장히 공허한 빛을 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해보았다.


"괴로웠겠군요."


"…"


"근데 그거 알아요?"


"…네?"


"과거든 현재든 괴로운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무슨…"


"나도 괴로웠고 괴로우면서, '당신의' 사령관도 괴로웠고 괴로울거에요. ……살아있다면 말이죠."


"죽었을 거란듯이 말하지 마요."


"말이 그렇단 얘기에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아… 그러니까 내 말은…"


5초 정도 뜸을 들인 뒤에 패널의 스피커가 울렸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년인 것 마냥 굴지 말라고."


"……뭐?"


"아니… 큭큭, 내 말이 틀려? 맞잖아. 야. 너만 불쌍해? 너만 괴로워? 너만 사연있어? 사령관실에서부터 인간이 어떻니 뭐니 지껄이는데… 주제를 알아. 너, 바이오로이드야. 인간이 아니라고. 바이오로이드인 년이 감히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여? 애초에 그런 생각을 가져서도 안되는게 너희고 갖더라도 말로 지껄이면 안되는게 너희야. 야. 그래도 난 네가 부러워.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존재의 이유 만큼은 지킬 수 있었잖아. 실험 받는 나날은 말 그대로 실험 받는 것이 네 '존재이유'였고 이후에 철충과 싸워온 때는 싸우는 것이 네 존재이유였을 것이고 지금은 사령관을 위한 좆집 내지는 경호원이거나 전투원이었겠지. 바이오로이드라 좋겠어? 어떤 언행을 취하든 전부 인류를 위한 것이 되버리고 그게 곧 존재이유가 되니까. 너 그거 알아? 너 한창 실험 당하고 있던 시대에는 하루에 인간이 최소 수천은 죽어나갔어. 그것도 한 나라에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굉장히 끔찍한 사유로 말이야. 존재이유? 없었어. 길바닥에서 굶주려 죽어나가고, 너희 같은 바이오로이드한테 맞아 죽거나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죽고. …나한테 아내가 있었거든? 내 아내의 아버지도,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장인어른도 너희 같은 년들한테 죽었어."


오락가락 하는구만. 목소리만은 차분한데, 이거야 원. 또 자장가를 불러줘야 할 것만 같다.


"…으, 으…"


"인간도 개미만 못한 취급을 받았는데 네가 뭐라고 그 따위 헛소리를 지껄여? ……생각해보니까 열받네? 너 그 기분 아냐? 장난감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다 크고 나서 깨달았을 때의 그 기분."


"그만… 그만해…"


"모르겠지.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의 탈을 쓴 년들이 알 턱이 있나. 어휴, 꼴에 인격체라고 인간 대우라도 받길 바랐어?"


"…"


"……라고 주구장창 말했는데, 후후… 장난이었어요. 티아멧."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의 말 전부."


"마음대로 해요. …티아멧. 하나만은 알아줄게요. 당신이 괴로웠을 거라는 것만은."


"…이 이상 할 말은 없어요. 끝내죠."


티아멧이 말을 마치자 쇳소리가 울렸고 예의 그 검들이 손에 들려있었다. 바로 갑판으로 달려가려 했는데 미동도 않는 그의 모습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듯 했다.


"그래요. 당신도 괴로웠겠죠. 고통이란게 상대적인 것이잖아요. 내가보기엔 좆도 아닌 것 같은 것도 당신에겐 충분히 고통스러울 수 있는 거겠죠. 그런데도 우리 둘 다, 이해하려고 하진 않잖아요? 그럼 답은 하나에요."


티아멧과 같이, 그의 손에도 검 한자루가 들려있었다.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환도인 것 같았다.


"더 쎈 놈 말이 맞는 거죠."


"저와 싸우겠다는 건가요? 당신이?"


"왜, 내가 못이길 것 같아요?"


"…농담하지 마세요. 저항하면 괴롭기만 할뿐…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줄테니 잠자코 있어요."


"됐어. 닥치고 빨리 덤벼 …왜, 망설여져? 역시 인간을 베는게 꺼려지는거야? 그러면 내가 좀 거들어줄까?"


"그대로 있어요!"


"명령이야. 전력을 다해 날 죽여."


"흣!"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공중으로 가볍게 튀어오른 티아멧이 회전해가며 그에게 달려들었고 검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윽…!"


검이 멈췄다.


티아멧의 오른 쪽 어깨에 그의 검이 박혀있었다.


예상은 했다. 다시 명령을 내려 티아멧을 멈춰 세울 거란 것은.


그걸 본 나는 '이거 반칙 아니야?' 정도의 감상 밖에 품고 있지 않았다.


"넌… 죽이지 않을거야. 절대로."


티아멧의 어깨에서 검을 뽑아들고 그가 말했다.


"기대 해. 내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선물해 줄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준 티아멧에게 감사했다. 티아멧에겐 안된 일이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갑판 곳곳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티아멧을 데리고 오르카를 나섰다. 후에 들어보니, 티아멧은 C구역 지하로 옮겨두고 모니터 몇 개를 설치해두었다고 한다. 그런 뒤에 나노머신을 추가적으로 주입했는데 그 나노머신의 코드를 들은 나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끔찍해라. 그가 말한대로 티아멧은 가장 끔찍한 고통에 언제까지고 시달리게 될 것이다.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지만,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애초에 인간을 죽이겠다 마음 먹은 것부터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사령관실로 돌아온 그는 숨죽여 훌쩍거렸다. 나는 못들은 척 가만히 있다가 그와 함께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없었다. 부지런하다. 한 번 더 티아멧에게 감사했다.


티아멧을 '전사'처리 하고 오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봤다. 지상으로 나갔다는 것은 오물들과의 관계는 파괴되었음을 의미하지만 달리말하면 죽으러 나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곤란했다. 굶어죽거나 철충에게 잡혀죽거나 한구석에 숨어있다가 객사해버리거나 해서는 절대 안됐다. 오빠는 '우리'의 뜻을 알고, 받아들인 다음에 죽어야했다. 그래야만 구원인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적당한 수준까지 깎아내야만 한다. 죽지 못해 산다 수준 정도로만. 거기에 정신적으로 좀 더 추락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미 괴로울 만큼 괴로울테지만… 어쩔 수 없다.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틈틈이 드론들로 알아 보기로, 오빠는 해안과 접한 숲에서 지내면서 주기적으로 도시를 오갔다. 내가 보고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건지 걱정말라는듯, 오빠는 굉장히 빠르게 적응해갔고 간간이 보이는 표정으로 보아 호젓한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 찾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걱정 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오빠의 손에 들린 책이 보였다. 표지의 그림이나 살짝 보이는 문구로 보아 서바이벌 관련 서적인 것 같았다. 고작 저런 것이 적응수단이었다니. 그건 그렇고 서바이벌이라, 평소에 그런 쪽에 관심이 있었나?


"아하."


그 년이로군. 


…계획의 큰 줄기도 마무리 됐겠다, 한숨 돌려도 좋을 것 같다. 


조금 짓궂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



내 아이들, 사냥개들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해야했기에 둘러대기 쉬운 리리스 둘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시적으로 오르카의 '대원'이 되었다. 바이오로이드의 범주를 벗어난 아이들이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조율에 짓궂은 면이 있어서였을까. 이런 표현은 뭣하지만 아이들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하루걸러 하루마다 사고를 쳐댔고 이따금 전장에 나설 일이 있으면 작전 직후엔 꼭 '바이오로이드' 서너 명은 잡아죽여야 직성이 풀렸다.


다만 아이들의 주체하지 못하는 혈기가 마냥 피곤한 결과만 불러온 것은 아니었는데, 그 예로 컴패니언의 경우가 그랬다. 내가 오빠를 감시 하고있듯 컴패니언도 착실히 오빠를 찾고 있었는지 티아멧의 사후 얼마 뒤에 무단으로 오르카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름 그녀들을 평가하자면, 오빠를 찾은 것 까지는 좋았다. 답지않게 초조해 한 것이 문제였지. 해안가에서 일망타진 당한 컴패니언은 하치코만이 살아남았고 하치코는 캐럴에게 던져줬다.


친딸을 돌보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방임주의였지만, 그럼에도 캐럴은 돌보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주인이 캐럴에게 심어둔 예의 그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컴패니언 년들의 시체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있을 때 생각했다. 왜 이것들은 오빠가 떠나기 전에 행동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나노머신이 주입되어 있었다고 한들 오빠를 지켜야 한다는 판단은 똑바로 섰을텐데. 부대 특성상 접근하기도 쉬웠을텐데.


공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만큼 충격도 컸던걸까? 무너져가던 오빠의 상태를 본다면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본분을 잊을 만큼의 충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권유에 따라 사냥개들에게는 약 21세기 초기의 특수전 교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멸망 전이나 지금이나 먼 과거의 교리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꽤 시간을 들여 설명했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바이오로이드 한정'으로는 아주 잘 먹힐거란다. 나는 반신반의 했지만 후일 라비아타와의 일전을 겪고서야 그가 옳았음을 알았다.




////




과거를 더듬어보면, 발키리와 서약한 이후에도 오빠는 다크엘븐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있는듯 했다. 다크엘븐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엉망이 된 오르카 내에서도 오빠를 그리며 가장 많은 눈물을 보였던 건 다크엘븐이었다. 그게 못마땅해서 조금 공을 들였다. 나노머신을 주입한 것에 더해 모듈을 삽입하고 세뇌까지 했다. 하다보니 세뇌라기 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양상이 되었지만 어찌됐든, 아이들의 무력이 도움이 되어 세뇌는 꽤 그럴듯한 결과물을 낳았다.


거기까지 하고나니 오르카 내부에선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오르카는 이제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바다 밑으로 부글대며 가라앉아갔기에 나는 지상에 마련 된 기반들에 집중 할 수 있었다. 한가지 후회되는 것이 있었다면 대책없이 통신망들을 어그러뜨려 놨었다는 것 정도? 에바가 훼방 놓을 것에 대비한 조치였지만, 적어도 '우리'들 만의 독자적인 통신망을 구축해놓고 나서도 늦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다 끝나고나서야 들었다. 뭐, 딱히 상관없다. 실체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년을 역추적하여 쫓기보다는, 에이다의 경우와 똑같이 고립시켜버리면 될 일이니까.


라비아타가 구금되고, 컴패니언이 스러지고, 더 이상 에이다와도 교신이 되지 않게 됐어도 오르카의 대다수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죄책감이 그들을 옥죄고, 회한이 그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환기를 통해 조금 나아지겠다 싶으면 철충들이 가만 두지를 않았으니까. 적어도 다행인게 있었다면 내 주인이 지휘 만큼은 성실히 해주고 있었다는 점일까? 티아멧 이후 많이 불안정해진 그였지만 아직 이성 한 줌은 남아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이젠 솔직해져도 되는데.


C구역에 그를 위한 놀잇감들을 채워넣고 있을 무렵에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080의 보고가 올라왔다. 자비로운 리앤과 레모네이드 알파. 일 날 뻔 했다. 너무 순탄하게 계획이 진행되어 왔어서 느슨해졌던걸까? 한 똑똑 하는 년들이 아직 남아있었음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좋은 기회였다. 아이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줄 좋은 기회. 


080에게 보고 받은 날, 나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제작한 장비들을 아이들에게 쥐여주고서 080을 붙여줬다. 그런 다음 한 마디만 던졌다. '알아서 해 봐.' 오르카에 오기 전, 시설에서 얼마나 본인들의 기량을 잘 갈고 닦았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만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었다. 사냥개들과 080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파트너인 것 마냥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자랑했다. 내 주인은 080을 염두에 두고 과거의 교리를 적용하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리앤의 머리를 물고기 밥으로 던져줬던 새벽, 동이 텄을 때 시티가드는 사라졌다. 이번에는 전사처리 하지 않았다. 시체를 숨기지도 않았다.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오르카의 모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몰래카메라 촬영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놀랍게도, 그 누구도 재밌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고 깨질 것 같은 흥을 붙들고 오르카를 나섰다.


"알파. 안녕?"


"닥터…"


팔 하나가 날아간채 숲에서 무릎 꿇고있는 알파의 얼굴에는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교활한 것 답게 눈치도 빨랐다.


"당신이었군요."


"…뭐, 보다시피."


보란듯 양팔을 펼쳐 그와 나의 아이들을 소개했다. 해맑은 표정으로 캐럴이 알파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스카디'가 능숙하게 제지했다. 알파는 그를 보고 이 자리에 '두 명의 스카디'가 있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혔는지 간헐적으로 입을 뻐끔댔다.


"이, 이럴수는… 이럴 수는 없는 거에요.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없기는. 이럴 수도 있는거지. 그것보다 알파. 혹시 도망치려고 한 거야?"


"그래요."


"그 아스널 처럼? 아니면 아메리카에 있었을 때 처럼? 어느 쪽이든 꼴사납네. 내 '주인' 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더는 할 말 없어요."


"아, 그래?"


다른 년들과 다르게, 알파는 죽어서도 쓰일 곳이 있었다.    


"어떤 방화벽이든 뚫어내고, 다양한 회로를 제 것인양 다루던 뛰어난 레모네이드께서 정작 자신이 뚫렸던 건 몰랐나 봐?"


"…뭐라구요?"


"그 잘난 슈퍼 컴퓨터 하고도 공명이 잘 안됐나 보네.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알파를 훑은 습한 바람이 라벤더 향을 실어왔고, 그 라벤더 향이 머지않아 부패한 냄새로 변질 될 것을 생각하니 조금 애처롭게 여겨졌다. 


"죽여."




//////





"어머니. 복귀를 신고합니다."


팬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내 시선은 패드 너머에서 악을 쓰는 그에게 꼿꼿히 박혀있는채였다.


"그래도 이왕 눈뜬거 아무것도 안하고 다시 뒈져버리긴 또 그렇잖아. 그래서 이러는거야. 한번 시원하게 즐기자고. 아무도 없기에 가능한 것들 한번 원 없이 해보고 뒈지던가 하자고. 이제 알아들어? 내가 왜 이러는지?"


아르망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연기다. 그래도 반 쯤은 진심인 것 같은게, 참다참다 울분을 터트렸다는 느낌이 든다. 근데, 이번에 샬럿이랑 아르망은 왜 데려간거지? 설마하니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컨셉으로 밀어보려는 건가?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외쳐댈 필요는 없는데. 그래. 연기겠지. 


그의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이야기의 소재는 좀 식상하지 않나 싶다.


"어머니."


"얘, 팬텀."


"네."


"오르카에선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 아니, 아니야. 앞으로 어머니라 부르지 마."


"허면, 무어라 불러드리면 될까요."


"오르카 년들하고 있을 때는 닥터, 그 외엔 마음대로 불러."


"지휘관 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작업대에 올려둔 장비 케이스를 가리키고 오디오에 다가갔다.


"보고 드립니다. 오메가의 처리가 완료 되었습니다."


"수고했어."


오메가가 죽었다는 건 진짜로 '우리'와 접촉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린데… 머리가 어떻게 된건가? 설마 그런 허접한 술수에 걸려들다니. 펙스 년들, 특히 오메가 쪽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영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초조했던 거라면, 그런 거라면 납득은 된다.


처음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오메가는 오빠에게 패배한 이후로 쭉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메리카에도 딱히 눈에 띄는 동향은 없었다. 그래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면 죽여두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알파를 죽이기 직전에 들어서, 나는 알파의 시체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인류 저항군은 두번 째 인간을 사령관으로 추대했고, 그는 당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


라는 메시지만 보낸다면 믿지 않을테니 시체가 된 알파를 건네준다면, 최소한 접촉만은 가능한 정도의 신뢰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기 좋게 걸려들어 접촉한 순간 죽었다, 라는 흐름이었다. 오메가가 만약을 대비했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당할 수는 없었을거고.


"지휘관 님께서 말씀하신 '철의 왕자' 말입니다만, 위치는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 님, 그 철의 왕자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팬텀이 한 발짝 다가와 표정을 굳혔다. 이 아이는 늘 진지한 편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눈 앞의 팬텀은 평소보다 의젓하고 듬직해보였다.


"전부 제게 맡겨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맡겨만 주신다면 확실하게 제거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냥 냅둬도 돼. 걘 인간도 뭣도 아니야. 지딴엔 인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반병신이 되어있겠지만 주변에 철충이 득시글 댈거야. 그래도 굳이 죽이러 가겠다고?"


"네. 머릿 속에 어느정도 그려놨습니다만… 아직 구상 할 것이 더 남아있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일히 상대할 생각은 없어요."


"음… 좋아. 기간은 얼마나 잡고 있니? 오메가가 일주일이었잖아."


"최소 한 달 이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 님께 일러둘께. 너에게 많은 권한을 쥐여주라고."


"예…?"


"앞으로 일일히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지금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작전을 수행하러 떠나도 된다는 소리. 알겠니?"


"…감사합니다."





///////




"운에 기대야 하는 만큼…변수는 적은게 좋아요. 만에 하나라도 알려졌다간 혼란이 겉잡을 수 없어질 겁니다."


지금 콘스탄챠는 뭐라고 지껄이는거지? 전함으로 대피하겠다고? 이건 마치 새가 제 날개로 새장 속에 날아 들어가겠다는 소리와 다를게 없다.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다. 별 수가 없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아니, 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건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는게 아니라 그냥 조금이라도 내 주인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뿐인 건가? 그렇다면 좀 슬픈 걸.


회의 답지 않은 회의 속에서 적당히 흉내나 내주고 복도로 나온 참에 콘스탄챠가 말을 걸었다.


"왜 언니?"


"고마워요."


"으, 응? 뭘?"


" '사령관'을 전담해주고 있잖아요."


"…전담?"


"네. …미안해요 닥터. 참모들이 해야 할 일을 닥터에게 떠넘겨버려서."


"아니, 괜찮아."


정말로, 나는 정말로 지금이 밤인 것에 감사했고 조명도 없는 것에 감사했다. 콘스탄챠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숨겨주는 어둠에 감사했고 떨릴 수 밖에 없는 어깨도 숨겨준 것에 감사했다. 


나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공방보다 그의 사령관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을. 그래서 생길 수 있는 의심의 여지를 그가 없애주고 있었음을. 


이 오물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해주고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아, 이건 참을 수 없다. 그와 함께 한 1년 중에서 오늘 이 순간이 최고로 재밌는 순간이었다. 


웃음을 숨기기가 어려웠지만 콘스탄챠의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추스를 수 있었다.






////////





칸을 사냥하던 아이가 죽었다. 리리스. 그 아이는 강했지만 불안한 구석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어서 언젠가 크게 한 번 데일거라고는 생각했다. 다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아이들은 강했고 오르카 년들과는 다른 종류의 충성심을 지녔기에 허튼 실수 따윈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시꺼멓게 타 죽은 리리스를 보고 있으니 내 속도 타들어 가는 듯 했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괴로움이었다. 시간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다. 날이 갈수록 괴로움이 가시기는 커녕 커다란 납덩이를 넣어둔 것 같이 가슴 속은 짓눌려만 갔고 때때로 그 납덩이가 잠깐 동안 사라져 휑뎅그렁한 공간이 생기면, 그 공간 만큼의 공허함이 엄습했다. 


그래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라비아타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은 집중에 집중을 요했으나 나는 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지휘관 님. 끝났습니다."


라비아타의 목을 쳐 붉게 물든 차크람을 닦아내며 써니가 말했다. 나는 영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눈 앞의 상황을 가만 둘 수도 없었기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니?"


"네. 유도한대로 라비아타는 탈옥했고 그 뒤엔 보셨던 바와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팬텀과 몇몇 대원들이 자리하지 않아 길어질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오래 버틸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됐어. 통제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어서 뒷수습이나 해."


아이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스카디는 상반신의 절반이 날아갔고 발키리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별반 다를게 없어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지만 양 팔이 날아간 캐럴만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숨이 끊어진 라비아타를 걷어차댔다.


보듬어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만 했을뿐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은 아이들인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 자신이 세상 제일가는 불쌍한 년인 것 처럼 느껴졌다. 혹은 이 고통이 낯설어 상황을 외면하기에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는 것만이 내 최선이었다.




/////////



"그리고 뭐, 니들이 싫으면 어쩔거야? 별 수 있어?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건 이제 너 하나잖아.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알파는 오늘 새벽에 찾아서 잡아죽였고 라비아타는 처형했어. 그리고 저기 벌벌떠는 좆만한 년은 너 처럼 대들 생각은 절대 못할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무르다. 더없이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저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다. 목소리도 미묘하게 떨리고 조금 감정적이게 된 것도 같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알파와 라비아타의 '사정'을 떠벌리는 것이 그 증거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만찬이 끝나고 갑판에서 밀회를 나누던 중에 그가 말했다. 그 말이 정말 이상하게 들려 몇 번이고 고개가 갸웃대고 눈이 껌뻑여졌다.


"뭐?"


"…지쳤어요. 이런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뭐,뭐,뭐… 뭐…"


입이 고장난 것 같았다. 아니, 뇌가 고장난 건가? 아니아니아니, 그것도 아니다. 고장난 건 눈 앞의 이 인간이다.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만, 이런 건 잘못됐다, 그녀들이 불쌍하다, 이런 게 아니에요. 그냥… 불필요하게 느껴져서."


"닥쳐!!!!"


전진기지에서의 일은 실수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


반 쯤 이성이 날아갔어도 사고회로 만큼은 멀쩡하다. 이 인간을 몰아세우자고 마음 먹은 것은 분명히 내 의지임을 자각한다.


"모두 널 위한거였어!"


그래. 전부. 오르카도, 오물들도, 오빠도, 인류도, 그를 위한 유산들도.


그 모든 걸 지워버리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이 인간 하나만을 위해서였다.


"닥터. 말했잖아요. 그냥 불필요하게 느껴진 것 뿐이라…"  "닥쳐! 닥치라고 했어! 닥쳐닥쳐닥쳐닥쳐!!"


"…"


"너… 네가 그런거잖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멋대로 내 안에 들어와서는 머릿 속을 휘저어놨잖아! 씨발새끼야! 그런데 이제와서 그 따위 소리나 내뱉어!? 너 지금 나 놀려? 아니면 여태껏 가지고 논거야? 난 오직 너만 바라봤는데… 오빠도 언니들도 모두 부정했는데! ……아이들이랑 잤지? 리리스나 캐럴 말이야. 너, 나하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면서 아이들이랑 잔 이유는 뭐야? 너 설마 아이들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나 혼자만 아이들을 딸이라 생각했던 거야?"


나쁜 새끼. 몇 번이고 부정 했는데… 멋대로 죽은 지 가족을 내게 투영한 주제에. 나만은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주제에. 


"…미안해요. 닥터. 진짜 불필요했던 건 방금 당신한테 한 말이었네요."


"지랄 마, 이 개새끼야. 이미 다 내뱉어놓고 뭔 헛소리를 해? 씹새끼. 곧 뒤질 네가 안타까워서 준비해둔 놀잇감들이었어. 거기에 온 정성을 쏟았다고. 네가 그렇게 질려하던 소완도 쳐죽이고 일부러 다시 제조까지 했어. 그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그런데 이제와서 고개를 돌리겠다고? 고작 그따위 이유로? 아니면 즐길 만큼 즐겼다 이거야!?"


"용서해 줘요."


"……사랑 해."


"에?"


"용서 받고 싶으면 안아 줘."


몇 번이고. 네 아내에게 했던 것 처럼, 마리아에게 했던 것 처럼.


그 뒤에, 그를 비밀의 방 한구석에 쳐박아두고 공방으로 향했다. 머리고 가슴이고 천불이 끓었지만 나는 배려심을 발휘해 그가 느낄지도 모를 거부감을 해소해주고자 성장약을 단숨에 마셨다. 터지고 찢어진 옷가지들은 그대로 두었다. 나체보다는 그러는 편이 그의 성적충동을 자극하기에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으니까.


드디어,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몇 번이고 사정당하면서 솔직하게 사랑한다고 외쳐댔는데 왜 이렇게 갑갑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그는 슬프다는 표정을 지었던 걸까.


내 방법이 잘못됐던 걸까?


그럴 리 없어.


어쩌면 나는, 마냥 그가 바이오로이드를 증오하고 미워할 거라 착각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모든 걸 알고 이해한다고 혼자 착각해버린 탓에,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걸 은연 중에 깨닫고 있던 탓에 더욱 오빠와 언니들에게 끔찍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생활관에 누워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특별히 선곡하지는 않았다. 그저 뭐든 좋으니, 세계와 차단되어 웅크리고 있을 수단이 필요했다.


"멈출 수 없어."


되돌릴 수도 없지.


그와 몸을 섞고 난 후부터 나는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도 혼자 즐기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즐기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재밌어야 할 놀이들은 벌로써 그를 묶어두는 수단으로 변할 테니.


그는 매 순간, 모든 순간을 두 눈에 담아야 한다. 내가 철저하게 인류 저항군을 무너뜨려가는 모습을. 


고개를 돌리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의 태도에 대한 반발심을 동력삼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오르카 년들을 괴롭혔다. 오늘은 어떤 전함으로 할까 고민하는 것부터가 하루의 시작이었고 적당한 표적을 찾았다면 하루는 인형 뽑기하는 듯한 느낌으로, 하루는 두더지 잡기를 하는 느낌으로 가지고 놀 년들을 선별해 다양한 방법으로 비명을 지르게 했다. 그가 참여하지 않는 날이면 함내 방송으로 비명소리를 오르카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이 때 쯤해서 오르카에 잡혀온 년들 한정으로 내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사령관실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한 그에게 분노하느라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나 자신에게도 예외없이 향했다. 단순히 그가 함께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느낀다는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간 오르카건 뭐건 전부 부숴버리고 반드시 오빠를 구해주겠다고 한 주제에, 외로운 늑대라도 된 양 고고한 척은 다했던 주제에… 타인의 존재를 느끼고 싶다며 홀로 울어댔을 때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자괴감은 다시 그를 갈구하는 암컷으로 변모했고 수컷이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 다시 분노했다. 그 분노는 다시 나에게 향하고…


그런 머저리 같은 심경의 무한 반복이었다.   


그러나 오빠를 찾지는 않았다. 타인의 존재와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긴 했어도 딸들로 외로움을 달랠지언정 오빠를 그리는 것만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



용을 암살하고 얼마 뒤에 그가 말을 걸었다.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꽤나 오랫만인듯 했다. 그리고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C구역의 지하에 갈 것을 부탁했고 그 자리엔 아이들도 함께 했다. 


웅크려 앉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어느새 그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멈춰 있던 오디오를 재생하고 그가 말했다.


"이걸로 마지막이에요."


"…꼭 가야만 해요?"


처음부터 각오는 했지만 막상 때가 오니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버거웠다. 가슴 한 구석이 근질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져 나도 모르게 훌쩍였다. 나는 무슨 짓을 했던거지? 그에겐 잠시라도 좋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었던 걸지도 모르는데 나는 멋대로 섭섭해하고 감정적이게 되어 그를 멀리하고 말았다. 안그래도 괴로울 것이 분명했던 그에게 내 태도가 어떻게 비춰졌을지를 상상해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가야죠.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을거에요. 아이들에게 내 기억을 줬으니까."


"열 한 조각으로?"


"그래요. 열 한 조각. 열 한 명이서 하나에요."


"…번거롭게."


"번거롭다뇨. 당신의 아이잖아요."


"우리가 아니라요?"


"…미안해요. 그렇게 생각하고는 싶은데, 역시 바이오로이드다 보니…"


"그럼 나는?"


그는 옅은 미소를 띄우고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알았어요."


"이것만은 알아줘요."


"네."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바이오로이드가 싫어요. 엄청나게."


"…"


"이걸로 됐죠?"


"충분해요."


"당신의 아이들 외에는, 전부 부숴줘요. 박살내버려요. 끔찍한 꼴로 만들어줘요."


"그럴게요."







///////////







https://arca.live/b/lastorigin/29382685?mode=best&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