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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무너지고 조명이 명멸하는 복도를 지나 함교에 들어섰다.  창 너머 어스름이 깔려가는 바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라도 하려는듯 한껏 움츠러들어 고요했고 마지막으로 청소한게 언제인지 함교 곳곳에 튀어 기하학적 무늬를 그리고 있는 핏자국들은 구리색으로 말라붙어 있다.


마침내 그 날은 왔다.


그와 손을 맞잡고 어둠에 삼켜져가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오디오에 손을 댔다. "뭐로 할래요?" 내 물음에 그는 "적당히 밝은 거라면 뭐든 좋아요." 라고 답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고양이 왈츠'를 선곡했다.


"너무 통통 튀는 거 아니에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택권을 내게 준 이상 바꿀 생각도 없었다.


"베로니카와 리리스가 떠났어요."


"알아요. 마지막으로 날 찾아왔었으니까."


"기분이… 묘해요. 걱정된다고 해야되나. 베로니카는 꼭 죽이고 싶은 년이 있다던데요."


"엄마 다 됐네요."


그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은 혼자서도 몇 번 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쑥스러워져 '에헤헤' 하고 웃음을 흘렸다. 체온이 올라 발그레졌을 표정에 어울리는 웃음 소리였다.


함교의 패널을 열고 통신 채널을 열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후우…' 하고 숨을 내뱉고는 전 함대의 상호파괴를 명령했다. 그 함대엔 오르카도 포함되어있다.


패널이 닫히고 정적이 흐르게 된 함교가 부르르 떨리게 된 것은 그가 명령하고 약 20초 뒤였다. 지평선 근처에서 떠오른 수백 수천의 불꽃들은 포물선을 그리다 전함들에 떨어졌고 머지않아 바다 곳곳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왠지 한 때 보았던 불꽃놀이 같다고 여겨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계절에, 이 시간대에 불꽃놀이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내게 실제하지 않는 추억이더라도 그 불꽃놀이의 추억을 내 추억이라 여기는 것은 허락 될 터였다. 멸망한 이 세계에서 나는, 그의 유일한 이해자일 것이기에.


그 추억을 떠올리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불꽃놀이의 현장으로 변했다. 그 현장에서, 나는 테마파크의 환상을 본다. 오늘 날 잔해 밖에 남지 않은 테마파크가 아닌, 생생히 살아있는 꿈의 영역이자 누구나가 웃음짓고 있는 행복의 나라 시절의 테마파크. 어쩌면 이것은 나노머신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단 한송이 뿐인 안개 꽃이 보여주는 환상. 그 환상 속에서, 나는 그에게 안개 꽃을 건넨다. 오늘을 위해 만발한 안개 꽃은 고유의 향을 피워내 그를 감싸고, 그 향에 이끌려 우리의 얼굴은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조금 차가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닿자 나는 환상 속에서 깨어난다. 백설공주라도 된 것 같은 몽롱한 감각에 잠긴 나를 그의 손이 밀어내고 거대해진 불꽃놀이의 물결이 오르카로 향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풍경을 언제까지고 그와 함께 지켜보고 싶지만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


함교의 출입구에 서서 돌아본다. 어떤 말을 건넬까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안녕. 이라 한 마디만 하고 함교를 나섰다.


그도 '안녕', 이라 말한 것 같은,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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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여기서 지낼거니?"


손도끼와 나뭇가지를 든 다크엘븐 언니가 말했다. 거들어주기 위해 가져온 돌맹이들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펴봤다. 해안에 접한 숲에 마련 중인 거처는 거의 다 완성 되가는 참이었다.


"굳이 숨어있을 필요는 없잖니."


"아냐. 필요 해. 나에 대한 건 끝의 끝까지 숨겨야 하니까. …뭐 그런 이유를 떠나서, 그냥 여기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어. 섬과 섬 사이를 걸어서 다닐 수 있다니, 이런 신기한 곳이 어디있겠어? 식량도 풍부하고, 귀찮으면 전함에 가서 찾을 수도 있고. 풍경도 좋아. 추억하기엔 딱 좋은 장소야."


"그래. 별로 상관 없어. 마음대로 해."


더 거들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숲을 나섰다. 왜인지 배려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맙다고 말하니 다크엘븐 언니는 슬며시 웃음짓고 손짓으로 나를 내쫓았다. 기꺼이 내쫓겨준 나는 품에 턴테이블 디자인의 오디오를 들고 해안가 한 켠에 놓인 바위에 앉았다. 마치 의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모양새의 앉기 편한 바위였다.


바람은 작월보다 차가워졌다. 파도 소리는 청량했고 햇볕은 강했다. 그런 적절한 온도 속에서 오디오를 틀었다. 오디오는 무리 없이 재생됐지만 내부 어딘가가 망가진 건지 '고양이 왈츠'의 피아노 소리엔 노이즈가 껴있다. 그래도 괜찮다. 오르카를 나서며 미처 챙기지 못했던 오디오는 불꽃놀이 속에서도 무사하여 이 섬까지 떠내려 왔었으니까. 마치 귀소본능이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내 품을 찾아 왔으니까.


지직거리는 노이즈도 추억하기 위한 재료로 삼고서 내리 여섯 곡을 듣고, 망가진 오디오를 이 이상 혹사시키기 미안해서 전원을 껐다. 눈을 감았다.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한 번 지나면 바다새들의 지저귐이 뒤따랐고 따사로운 햇볕과 찬 바람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얼굴을 훑었다.


"얘 닥터." 작업을 끝낸건지 다크엘븐 언니가 어느새 옆에 앉아있었다. "이전에 키르케가 한 말 기억 나? 사령관이 테마파크에 들렀었다는 거."


"응."


"정말로… 널 찾을까? 아니,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외딴 무인도에 있는데."


"찾을 거야. 오빠라면… 분명."


"그러면… 그 뒤에는? 잘 할 수 있겠어?"


"그럼. 그걸 위한 준비도 다 끝내놨는 걸."


"어떤 준비?"


"모듈을 삽입해 뒀거든."


"모듈?"


"응. 모듈. 그럴 싸한 스토리들이 담겨있어."


"난 잘 모르겠지만… 그걸로 되는 거야?"


"그럼. 나 연기 꽤 잘 해. 오르카에선 하루하루가 연기였으니까."


"…그래, 그렇지. 그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좀 더 상냥하게 다뤄 줄 순 없었니?"


"아하하… 미안. 그 때는 꽤 바빴으니까. 뭘 하든 빨리빨리 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


"……네 아이들은 괜찮을까?"


"걱정 마. 엄청 강하거든."


"그래그래. 막힘이 없구나. 난 저녁 준비 하러 갈게."


"그래. 오늘은 물고기로 부탁 해."


삐죽 혀를 내밀고 다크엘븐 언니가 돌아섰다. 나는 한 번 더 부탁한다 외치고 고개를 돌렸다.


파도에 부유물 하나가 떠밀려왔다. 손바닥만한 크기로, 금속질 물체인 것으로 보아 전함의 잔해인 걸까. 이 섬에 떠내려온 전함 근처에는 얼마든지 널려있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잔해를 정성스레 소매로 닦고 품에 안았다. 


비록 잔해더라도, 내게는 보석보다도 더 값지게 느껴졌다.


그 날의 기억을 온전히 머금고 있는 것은 이제, 이런 잔해들 뿐이었기에.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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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패배당한 그 겨울로부터 한 해가 지났다. 새로운 겨울을 맞이하고서야 '사냥개'들의 지휘에서 손을 놓을 수 있게 된 사령관은 닥터가 거처로 삼은 주택의 테라스에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 온실과 같은 테라스에 연기 한 모금을 뿜어내고 넋 없이 바닥을 바라보다가 손을 대였다. 고작 10초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담배 한 대가 의미 없이 전부 타들어갈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 사령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다시 손을 대였다. 사령관의 고개가 한 번 더 갸웃거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또 다시 손을 대였다.


담배 한 대에 한모금 씩만. 그렇게 다섯 모금을 피웠다. 처지에 맞지않은 사치스러운 흡연이었다.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걸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간감각 따위는 무리없이 뒤틀릴 정도의 행위를 반년 간이나 지속해 왔으니까. 구원이란 미명 하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찾아온 녀석들을 지휘하여 오르카의 잔당들을 쓸어버린다는 것은, 사령관을 몇 번이고 무너뜨리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사령관은 생각한다. 그야 잔당은 소수였고 각지에 퍼져있었으니 술수를 부리더라도 사냥개들을 이긴다는 그림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끝도 없이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다. 또 한 번의 실패를 겪는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고통없는 죽음을 약속받은 그였더라도 분노하여 돌변한 사냥개가 끔찍한 죽음을 선사할지도 모를 일이었고 함께 연행되어온 그녀들은 그보다 더한 꼴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그 자신이 모든 걸 내려놓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러니 잠자코 따르자. 애초에 저항 할 의욕도 없던 사령관은 그렇게 닥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냥개를 지휘하여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오르카의 잔당들을 쓸어버린다면, 적어도 그녀들 중 한 명만은 살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한 가을, 그리고 겨울이었다. 몇 번의 재회가 있었고 몇 번의 이별이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아쉬움의 연속이었고 어리석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로 인해 변한 것이 있었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주택의 2층에 마련 된 방에 들어선 사령관은 침대에 몸을 뉘였다. 마지막 지휘에 나섰던 탓에 샤워실로 향해야 했을 것이었지만 일 분이라도 빨리 세계와 차단되고 싶던 사령관은 두 눈을 감고 졸음기가 빨리 찾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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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기에서 내리자마자 사령관의 두 눈에 비친 것은 대문 안으로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는 상당한 크기의 새하얀 3층 주택이었다. 멸망해버린 세계이고 그 주택 또한 근처의 건축물들과 다를 바 없이 멸망의 흔적을 몸에 새겨두고 있었지만 아주 잘 관리되어 있다는 것만은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균열이 간 곳은 시푸른 벽넝쿨들로 적절히 가려졌고 그을음이나 지우기 어려운 탄환들은 새하얀 도료로 덧칠해 가렸다. 보수를 한 흔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탁한 회백빛만이 가득한 도시에서 홀로 순백색을 띄는 그 이미지가 사령관에게는 기묘하리만치 불쾌했다. 혐오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커다란 주택에는 정원이 있다. 정원은 두 개로 각각 대문과 주택 사이, 그리고 안 쪽에 난 테라스에 위치해있어 부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를 본 사령관은 주택이라기 보단 작은 규모의 자연공원 같다고 생각했다. 이름 정도는 알고있는 나무들부터 시작해서 전혀 모르는 외형의 꽃들이 있었고, 익숙한 향기를 내뿜는 꽃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런 익숙한 향의 형형색색의 꽃들 주위에는, 그에 어울리는 형형색색의 나비들 수십 수백마리가 우아한 춤사위를 뽐내고 있었다.    


닥터가 사령관을 찾은 것은 거처, 주택에 도착하고 이틀 뒤였다. 쓸데없이 큰 방에 갇혀 시간대마다 들어오는 식사만 받아먹는 이틀이었다. 커다란 거실 한가운데서 다크브라운 색상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닥터가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찻물을 조심스럽게 홀짝이는 소리가 들렸고, 닥터의 목울대가 한 번 넘실댔다.    


"내 아이들을 지휘 해."


"…지휘? 사냥개를?"


"그래. 뭘 위한 지휘인가는 아이들에게 들어 봐. 이제부터는 자주 보게 될 테니까. 서로 말문 틀 기회로 삼으라고. 정도 좀 붙이고."


"…"


"경고하는데,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마. 특히 캐럴. 그 아이는 좀 더 교육이 필요하거든. 혹시 강제로 당할 것 같거든 반드시 다른 아이들을 호출 해. ……만약, 허락도 안했는데 덜컥 임신이라도 시켰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 


"뭐, 오빠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라고 덧붙인 닥터는 폴딩도어 옆에 놓여진 수납장에 다가갔다. 원예용 가위와 분우기를 들고 꽃으로 가득한 테라스에 닥터가 들어서자 거실과 테라스에 플루트의 맑은 음색이 울려퍼졌다. 그 선율에 맞춰 걷던 닥터는 테라스의 안 쪽으로 사라졌다.     


손 한 번 대지않은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사령관은 반쯤 열린 폴딩도어를 통해 테라스로 들어섰다. 그 직후 어질어질할 정도의 농밀한 꽃향기들이 사령관을 엄습했다. 그 중에는 녹색빛에 어울리는 풋풋한 향도 첨가되어 있었지만 고밀도의 꽃향기를 희석시켜주기에는 터무니 없이 모자라 한동안 자연 속에서 생활했던 사령관이라도 절로 입과 코를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힘들면 거실에 있지 그래?" 꽃과 풀들로 이루어진 벽 너머로 닥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이들은 금방 올 거니까 차라도 마시고 있어."


사방이 꽃과 풀, 나무로 가득했지만 테라스의 가장 안 쪽에는 따로 분리되어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의 소정원이 있다. 미로와 같은 구조로, 그 가장 안 쪽에 닥터가 있는듯했다. 사령관은 미로의 입구로 들어섰다. 플루트의 음색은 피아노의 음색으로 바뀌었다. 음악은 잘 모르던 사령관이었어도 자신의 귀에서 뛰노는 이 곡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쇼팽의 왈츠 4번, 흔히 '고양이 왈츠'라 불리는 그 곡이었다. 한 때 열렸던 오르카의 댄스파티에서 발키리와 함께 어떤 춤, 어떤 곡으로 무대에 설지 고민하던 때에 후보로 올려뒀던 곡 중 하나였다. 


결국 그런 고상한 춤은 포기하고 따로 슬레이프니르에게 가르침을 받아 무대에 서게 됐지만… 발키리와 단둘이 어깨를 맞대고 고민하던 그 시간을 꾸며주었던 곡이었기에 사령관은 이제 먼 기억이 됐다고 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때도 있었다, 라는 생각을 한채 사령관은 걸음을 빨리했다. 미로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삐져나온 가지들과 꽃들로 무성해 좀 처럼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마침내 도달한 미로의 끝은 반원으로 펼쳐진 공간이었다. 양 쪽에는 접사다리가 하나씩 위치해있지만 용도에 맞지 않게 플라워스탠드 역할을 하고 있고, 공간의 중심에는 가든 체어를 사다리 대용으로 삼은 닥터가 꽃과 가지들에 열중하고 있다. 똑- 똑- 하는 말끔한 소리에 가지들이 떨어져가다가 이따금 분무기에서 물이 뿌려진다. 


꽃과 풀들로 이루어진 감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다. 사령관은 그런 아무래도 좋을 감상을 읊다가 고개를 돌렸다.


원예용 앞치마를 두른 모습의 흐뭇한 미소를 띤 닥터. 그런 닥터가 사령관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수송기에서 느낀 확연한 낯섦과는 또 다른 종류의, 어떤 의미에선 불길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낯섦이었다.


"어때?" 정원 가꾸기에 열중한채로 닥터가 말했다. "꽤 공을 들였어. 봐줄 만 해?"


"지휘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니?"


차이야 있겠냐만, '지휘하지 않겠다'라는 확정형 대신 '지휘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라는 가정형으로 말해보는 것이 닥터의 심기를 그나마 덜 거스를 거라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이 곳에 오고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들이 눈에 아른거린 탓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령관의 사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들을 사랑하지?"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사령관은 단 번에 이해했다.


"…죽일거니?"


"지휘 해주면 하나 정도는 살려줄 수 있어."


소리가 지르고 싶었지만 사령관은 탄식하는 것에서 그쳤다.        


"왜 굳이… 팬텀이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잖아. 꼭 내가 해야 하는거야?"


"응. 오빠가 해야만 해. 지휘만 한다면 뭘 해도 좋아. 물론 아이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가야겠지만… 오빠의 지휘가 꼭 유의미한 결과를 낳을 필요는 없어."


"알기 쉽게 말해 줘."


"오빠가 지휘한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소리야."


"나… 나를 고문하겠다는 뜻이니?"


닥터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귓가 언저리에 손을 댔다. 날렵한 소리와 함께 입과 코가 마스크에 가려졌고 뒤이어 닥터가 몇 마디 웅얼거렸다. 사냥개들과 통신 하는 것 같았다.


가든 체어에서 내려온 닥터가 앞치마를 벗고 가지런히 갠 뒤, 그 위에 도구들을 올려놓고 사령관을 지나쳤다.


도중에 멈춰선 닥터가 뒤돌아 말했다.


"산책하러 갈래?"




///




갈라지고 움푹파인 인도를 반시간 정도 걷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지하철역으로 보이는 듯한 건물을 중심으로 두고 H자로 난 거리에는 어디 하나 성한 건물이 없었지만 외벽에 감긴 넝쿨들 덕에 무채색 일색인 풍경에서 다소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번화가인걸까? 사령관은 광장 중앙의 벤치에 닥터와 함께 앉고 마저 거리를 살폈다. 넝쿨과 넝쿨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고 때때로 크고 작은 들짐승들이 둘의 근처를 서성이다가 건물들 뒤로 사라졌다. 


오르카에 있던 시절에는 지상에서 돌아다닌 적이 많지 않은 그였지만 이렇게 눈에 띌 것 같은 장소라면 몇군데 가본 적이 있었다. 직접 가보지 않는 경우라도 대원들이 알아서 보고서를 올렸다. 이런 곳은 꽤나 다양한 자원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식량으로 삼을 만한 것은 없었어도 그 외에 오르카의 대원들이 마땅히 좋아할 만한 여러가지의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장소인데도, 이 곳은 처음보는 장소였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사령관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번화가가 닥터는 아주 익숙한 곳인 양 행동했다. 닥터의 손에 들린 빵조각을 보자 경계심없이 다가온 새들과는 꽤 오랜 시간 교류한 듯 했고 뒤이어 다가온 한 쌍의 사슴들이 사령관을 경계해 쉭쉭 거친 숨소리를 냈지만 닥터의 손길에 금새 진정되었다. 마치 친구 같군.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새와 들짐승들을 보내고 난 뒤의 닥터는 사령관의 옆에 앉아 입으로 어떤 선율을 연주했다. 사령관의 귀에도 익숙한 선율이었지만 영어로 된 가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노래하는 닥터의 두 눈은 그윽했고 표정은 따스했다. 두 발은 살랑거리듯 천천히 교차해간다. 두 손에는 몸을 적당히 지탱할 만큼의 힘이 들어가 있다.


사령관의 두 눈에 그런 닥터는, 마치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 같다는 인상으로 비쳐졌다.


그건 그렇고, 위험한 거 아닌가? 이제 겨울도 끝나간다. 철충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낸 때인 것이다. 그러나 건물들 한 구석에 산을 이루고 있는 철충의 잔해들을 보니 이 번화가 한정으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날 속였구나." 


연주를 마친 닥터에게 사령관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수송기에서의 대화에서 다 알게 됐지만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사령관은 구태여 물었다. 


"너도… 다른 이들도 모두 조종 당한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령관의 안면에 충격이 일었다. 그 표정은 몇 초 전의 노래하던 닥터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해력이 나쁜 오빠네. 한 번 더 말해줄게. 지휘관들, 그리고 다른 몇몇 년들. 그년들이 한 짓은 전부 진심이었어. 조금 일그러진 것 뿐이지. 솔직해진 것 뿐이고. 너무 슬퍼하진 마. 그 만큼 오빠를 사랑했다는 뜻이니까. 자제할 생각도 못할 정도로."


"…너는?"


"나? 나 같은 경우는 조종 당했다고 볼 수 있겠네. 오빠 눈에는. 그래도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난 그것이 싫지 않았다는 거야. 기뻤고, 즐거웠어. 사랑스럽고, 헌신적이게 됐지. 내가 생각해도 말이야. 오빠가 알까? 운명이라는 단어."


"…"


"그래. 꼴랑 6년 밖에 살지 않은 오빠가 뭘 알겠어? 그 발키리하고도 그냥 그런, 흔해빠진 흐름을 타다가 그런 관계가 된 거겠지. 그 뿐이야? '서약'이란 행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 양 굳이 반지를 줘가면서 그 관계에 못까지 박았어. 그리고 지금은… 풉. 더 말 안해도 알지? 그렇게 가벼운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리 잘해봐야 '사랑한다' 정도의 표현 밖에 못하는, 고작 그런 관계만을 구축 할 수 있는 '네가' 운명이란 단어의 무게를 알아?"


당황한 사령관이 닥터의 진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 호소는 헛되이, 닥터는 한층 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기세를 키워 사령관을 쏘아붙였다.


"운명…… 너나 네 주위에 있던 년들은 결코 알 수 없었을 그 감정을 나는 알아. 그러니까 말해줄게. 난 말이야. 널 '사랑'하지 않아.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거야. 너 따위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꼴랑 육체 하나 얻었다고 계집질 해다다가 덜컥 한 년 골라먹듯 서약한 인간…… 그런 가소로운 인간, 역겹기만 하지. 과거의 내게 말해주고 싶어. 왜 이딴 걸 사랑하고 있느냐고."  


"무슨…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어."


"이해하라고 한 말이 아냐. 대충 흘려들어. 그리고…" 닥터가 한 발 다가와 사령관의 무릎에 앉고서 상체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멱살을 쥐고, 사령관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하게 만든 뒤 말을 이었다.


"계속 오빠라 불러주니까 착각하나본데, 어디까지나 자비의 일환이야. 오빠라 불린다고 내가 너의 닥터라고는 생각하지 마. 난 너에게 있어 '구원자'고 나를 '닥터'라 여길 수 있는 건 '그' 뿐이야. 알아듣겠어?"


고개를 뒤로 젖힌 사령관의 목에서 힘이 빠졌다. 닥터의 어깨로 향하던 두 손이 멈칫했고 이내 힘없이 허리 쪽으로 떨어졌다.


"친절한 닥터는 오늘로 끝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령관의 복부를 지지대로 삼아 닥터가 몸을 일으켰다. 짜증이 가득한 몸짓이었다.


"일어 서 인간. 돌아갈거니까."


    

     


////




인격체의 정체성이 기억에 기반한다면 닥터는 더 이상 닥터라 부를 수 없었다. 오르카를 무너뜨려가던 무렵에도 닥터의 안에 또렷했던 사령관과 함께 한 기억들은 '두번 째 인간'에 의해 덧칠되어갔고 오늘 날의 닥터는 그것에 저항하긴 커녕 하루 빨리 그에게 물들어가길 바랐다. 그로 인한 변화는 사령관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예로, 그리운 시선을 한채 닥터가 사진첩을 열어 볼 때면 사령관과 함께 찍힌 사진을 두고 '두번 째 인간'을 찾았다. 사령관과 관련 된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닥터의 눈에 사령관은 없었다.   


닥터의 안에서 사령관은 잊혀져 가는 듯 했지만, 간혹 마주치게 됐을 때 닥터가 사령관에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꼭 그런 것 만도 아니었다. 닥터는 분명히 '사령관'을 인지하고 있었다. 빙그레 웃으며 '오빠'라 부를 때도 있었고 차가운 말투로 '인간'이라 부르며 매몰차게 대하기도 했다. 가끔은 닥터 본인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결코 두번 째 인간과 '오빠'를 헷갈리는 일 만큼은 절대 없었다.


닥터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인에게 할당 된 방의 배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사령관은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닥터의 안에 사령관은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적이 되어버린 닥터지만, 그럼에도 사령관은 그것이 다행이었다.

    

'발키리'가 찾아온 것은 새벽 2시를 지났을 무렵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거칠게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사령관이 수동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언짢은 표정의 '발키리'가 발을 까딱대고 서있었다.


그 뒤 사령관이 취한 행동은 발키리에게 있어 '잠결에 취했다' 라는 변명으로도 넘어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멈칫한 사령관이 달려들듯 발키리를 껴안자 머지않아 사령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방 안으로 날아갔다. 떨어진 곳이 침대 위 였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이 든 사령관은 알아차렸다. 그 '발키리'가 아니구나.


"왜 그런건지는 알겠는데 불쾌한 건 불쾌한 거야. 당신도 이해하지?"


침대 앞에 선 발키리가 사령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흑복의 다용도 포켓에 손을 찔러넣은 발키리는 오리지널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서 말을 이었다.


"좀 어때? 오늘이 첫 지휘였잖아."


"최악이야."


몸을 추스른 사령관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가, 지급받은 흑복에서 담배를 찾았다.


"그렇겠지. 그것도 우리를 지휘하니까. 난 이래뵈도 배려심 깊은게 장점이거든. 그렇게 설계됐어. 그래서…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려고 노력했지. 어디까지나 노력만."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려고 이 새벽에 찾아온 거야?"


"왜, 안 돼?"


"비켜 줘. 잘거니까. 내일도 일찍부터 작전이 있잖아."


"AGS들한테 맡기면 되잖아."


발키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사령관의 옆에 앉았다.


"…"


"놀랐지? AGS가 수장됐다고 들었다며?" 


"놀랍진 않아. 닥터가 거짓말을 한 거니까."


"나도 한 대 줘."


"…흡연 해?"


또 한 번 어깨를 으쓱인 발키리가 말없이 손을 내밀어 담배를 재촉했다.


"좀 매운건데."


"이봐, 인간."


후- 하고 담배 한모금을 뿜어낸 발키리가 말했다. 담배연기는 추상파 그림 속의 구름처럼 떠돌다가 천장에 멤돌았다.


"나랑 잘래?"


"거절 하겠어."


사령관이 발키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방은 어둡고 야심한 시각이었으니 어느 정도 추측했던 건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거절이야."


내뱉듯 말하고 사령관은 이불 속으로 숨었다. 피다 만 담배가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네 서약자를 만나게 해줄게."


"…"


"그러니까 한 번만 해보자."


사령관은 '발키리'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보다, 발키리가 '하자' 가 아닌 '해보자'라고 표현한 것이 신경쓰였다.


"무슨 속셈이야?"


"음… 그냥 호기심? 너, '발키리' 와 서약했잖아. 나랑 그 발키리는 다르지만, 특정 신체기관은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


"하고난 다음에 감상을 말해 줘. 그 발키리랑 비슷한지."


그렇게 말하고 발키리는 흑복을 벗어가기 시작했다. 사령관의 재답이 필요했지만 발키리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너도 벗어. 알아서 준비하고 있을테니까."


발키리는 사령관이 누워있던 자리에 누웠다. 안그래도 새하얀 피부는 방에 내리쬐는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까지 느껴졌고 쭉 뻗은 두 다리는 기억 속의 발키리와 다를 게 없었다. 발키리의 가랑이가 살짝 벌어지고 그 사이로 손이 파고들었다. 알아서 준비하겠다는 건 이런 소리였나. 사령관이 어이 없다는 웃음을 흘리던 말던 발키리는 자위에 집중했다. 


집중은 하는데, 음핵을 자극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래도 경험이 없는 듯 했고 그랬기에 자극이 잘 되지 않는지 미약한 신음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너희와 선을 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어. 아니, 지시라기보단… 경고지.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데."


"안들키면 돼. 안들키면. 그런 다음엔 발키리도 볼 수 있고. ……마음먹은대로 잘 안되네. 캐럴이 이렇게 하면 된댔는데."


마음먹은대로 안된다고 말하는 발키리였지만 성기는 착실히 젖어가고 있는지 점막이 찌걱대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져갔다. 사령관은 창 밖을 바라보고 한 번, 그리고 두 번째 한 숨을 쉬고 옷을 벗었다.


"어…어? 그게 남성기야?"


자위를 멈춘 발키리가 눈 앞에 드러난 사령관의 축 늘어진 물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상하게 생겼네. 이런게 들어가? 힘이 없잖아."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와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 녀석은 뭐지? 사령관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위 방법은 물론 기본적인 성지식도 없어보이는게 마치, '이런' 부분 한정으로는 어린아이 처럼 느껴졌다.


"확인하겠는데." 사령관이 말했다. "네게 '발키리'를 만나게 해줄 권한이라도 있는거야?"


"뭐… 경우에 따라서? 상황도 따라줘야 하지만."


"예, 아니오로 대답해 줘."


"뭐야. 건방지게. …말하자면 예, 지."


"알았어."


그 대답을 끝으로 사령관은 발키리의 가랑이를 활짝 열어젖혔다. "자, 잠깐!" 이라는 당황한 발키리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윤기가 도는 비부에 얼굴을 파뭍었다. 이내 발키리가 미약하게 떨었고 신음소리 또한 그 떨림에 알맞을 정도의 볼륨이었다. 반사적으로 뻗은 발키리의 두 손이 사령관의 머리채를 붙잡았지만 사령관은 멈추지 않았다. 사령관에게 별다른 감상은 없었고, 감정도 없었다. 오르카 시절, 몇 번이고 반복되던 서류업무를 하듯 지극히 사무적인 느낌의 애무였다.


"하, 하아, 하…"


"넣는다."


발키리의 언행을 통해 첫경험일 거라는 것은 짐작했다. 그럼에도 사령관은 그 어떤 배려없이 삽입한 음경을 단번에 모두 찔러넣었다. 출혈도 있었고 얇은 것이 찢어지는 감각 자체도 있었지만 사령관은 느끼지 못했다. 느끼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발키리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은 그 이상의 것을 사령관에게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유일한 인간이기에, 유일한 남성이기에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령 그것은, 지금과 같은 사무적인 움직임이 아닌 다소의 애정이 담겨야만이 가능한 무언가였을 것인지도 몰랐다.


"앗! 아파! 아프다고!"


"목소리 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령관은 그런 것은 모른채, 그저 발키리의 목소리가 과하게 크다는 부분만이 신경쓰였다. 그리고 열받게도, 무엇 하나 닮지 않은 주제에 그 부분 만큼은 자신의 서약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좋지 않았다.


"으읏! 아파! 싫어!"


"소리 크다고! 조용히 좀 해! 들키면 어쩔꺼야!"


"아픈 걸 어떻게 해!"


"손으로라도 막아!"


"싫어!"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사춘기 청소년 마냥 칭얼거리는 발키리가 마음에 들지않아 사령관의 손이 움직였다. 발키리의 입이 덮혔고, 이내 뿌리쳐졌다. 손목에 얼얼할 정도의 아픔이 있었다. 그 덕에 허리가 멈췄지만 발키리는 여전히 헐떡이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문득, 사령관의 뇌리에 한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니, 실은 발키리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떠오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서약자와 외형은 같아도, 눈 앞의 '이것'은 자신에게 있어 몇 번이고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임을 사령관은 잘 알고 있었다.


"흐윽… 이게, 이게 뭐야! 너무 아파! 캐럴 이 나쁜 년이 거짓말을 했어!"


"씨…"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둘…! 웁?! 우웁?!"


사령관의 머릿 속에는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 두 문장만이 회전했다. 물론 눈 앞의 발키리를 향해 회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입을 입으로 막는 것도 불쾌하기 그지 없는데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살결까지 맞댔다는 또 다른 불쾌함이 사령관의 허리를 채찍질했다. 어짜피 자신이 선택해 시작한 것. 불쾌해 할 바엔 빨리 끝내는 편이 나았다.


발키리의 전신에 땀이 맺혀갔다. 이슬같은 땀을 머금은 배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려 보기만 해도 대단한 탄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으나 그런 것을 즐길 만큼의 무드는 어둠이 내리깔린 이 침실에 티끌 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허리놀림, 하복부와 비부가 맞부딪히는 마찰음. 발키리의 우물거리는 신음. 침실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것은 이 세 가지가 전부였다.


밑에 깔린 경직된 전신이 조금 느슨해졌다고 생각되어 사령관은 입술을 뗐다. 뭐, 그렇게 생각된 것도 있지만 슬슬 호흡에 한계가 오기도 했다. 발키리는 여전히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지만 방금과 같이 울부짖지는 않았다. 비록 3할 정도 였으나 발키리의 신음을 이루는 요소에 쾌감이 자리잡게 됐고 그것이 기묘하고 낯설던 발키리는 이끌리듯, 슬슬 결합을 끊으려던 사령관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이… 야! 다리 풀어!"


"앗! 앗! 아아앗! 이거, 이거 이상 해…! 흐읏…"


다리로 조여지다 못해 강하게 껴안긴 탓에 사령관의 음경이 리듬을 잃고 단숨에 발키리의 최심부까지 파고들었다. 귀두가 강하게 조여졌고, 굉장한 사정감이 치고 올라왔다. 타이밍을 계산해오던 것이 부질없어졌다. 한 번 더 말한다. 다리를 풀어. 그러나 발키리는 듣지 않는다. 허리가 더 움직이지 않게 됐지만 발키리 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사정감은 착실히 치밀어 오르고 있다. 듣지 않는 발키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사령관은 상체를 돌려 발키리의 다리를 풀려했지만 풀릴 리 없다. 그야, 단 한 방에 사령관을 문지방에서부터 침대까지 날려보낸 각력을 소유한 다리다. 사령관의 완력으로 풀기에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으, 으윽!"


허둥대던 사령관의 두 손이 반사적으로 발키리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허리는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졌고, 이내 발키리의 안에서 폭발이 일었다.


"꺄아악!"              

          

"으, 으윽!"


전신이 경련 중인 개 한 마리와 인간이 서로를 끌어안고 헐떡였다. 인간 쪽은 끌어안을 수 밖에 없게 된 모양새였지만, 그런 것을 일일히 신경 쓸 만큼 인간의 머릿 속은 맑지 못했다. 쾌감도 쾌감이었지만, 그 대단한 사정량 만큼의 죄책감이 뇌리를 새카맣게 물들여버렸기에.


몇 분 정도 지나 스르륵 발키리의 두 다리가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사령관은 허리를 뺏고, 발키리의 비부에서 빠져나온 음경이 용수철처럼 튕겼다.


"아… 으, 읏…"


"후우…"


 "…냄새. 이상 해."   

   

이런 게 뭐가 좋다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비부에 가져갔던 손을 코에 댄 발키리가 표정을 찡그렸다. 외형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렇게 자신이 절정했다는 사실과 아직도 몸에 남은 여운을 부정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까탈스러운 사춘기 소녀의 그것이었다.


"저기, 감상은…"  "감상. 달라. 너랑. 내 서약자랑. 완전."


딱딱하게 말한 사령관이 침대 밑에 나뒹구는 흑복을 발키리에게 내던지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기 전 '뭐야, 재수없어.' 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사령관은 무시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불쾌한 섹스는 처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령관은 샤워기에서 분사되는 물을 맞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사령관이 샤워실에서 나왔을 땐 이미 동이 터오르는 중이었다. 발키리는 없었다. 알아서 꺼져줘서 다행이었다. 단 수십 분이라도 잠에 들고자 침대에 누우려는데 침대맡에 있는 협탁에 쪽지 한 장이 사령관의 시선을 끌었다.


'다음에 할 때는 상냥하게 해 줘. 

P.S 캐럴을 조심 해.'


사령관은 샤워실과 접한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칠게 꾸긴 쪽지를 변기에 내리꽂듯 던져버리고 물을 내렸다.


갖고 놀고있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쪽지의 추신대로 캐럴이 찾아왔다. 네 번째 지휘를 마친 날이었고 발키리 때와 똑같은 새벽 2시를 넘긴 시간대였다.

사령관을 위해 고심에 고심을 반복하여 선택한 차림이었던 베이비돌을 입고 캐럴은 들여보내주지 않는 사령관 앞에서 온갗 아양과 애교를 떨었다. 잘 여문 혀끝이 사령관의 목덜미를 훑었고 무릎은 전혀 단단하지 않은 하물에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캐럴이 저 혼자 멋대로 비부를 적셔댈 때가 되서야 사령관의 손이 캐럴의 안면에 향했다. 서약자와 외모만은 같았던 발키리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는데 서로 피까지 봤었던 캐럴은 두 말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발키리의 약속대로 서약자와 만나게 된 테마파크의 C구역에서 사령관은 예상치 못한 이와도 재회했다. 오르카의 하우스키퍼, 그의 참모 중 한 명. 콘스탄챠.


그 콘스탄챠와의 재회는, 재회 전 발키리가 말한 것과 다르게 아주 짧은 시간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콘스탄챠와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했다.


베이비돌 차림으로 나타난 캐럴에게 산채로 목이 썰려버리는 광경은 악몽으로도 나타나 꽤 오랫동안 사령관을 괴롭히게 되었다.  




//////




[심문 기록 - 01 샬럿]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


"팔도 괜찮아진 것 같고, 몸은 좀 어때요?"


"…"


"아무 말도 안할거에요?"


"…"


"뭐, 괜찮아요. 당신 몫은 당신 주인이 감당하게 될 거니까. 자다가 비명소리가 들리거든 당신 주인이 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시라유리."


"아하. 드디어."


"당신도 사냥개인가요?"


"음 아뇨. 난 '시라유리'에요. 당신이 잘 아는."


"어째서…"


"후후 왜요? 이러면 안되나요?"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어떻게 감히 폐하께 등을 돌리고 그런 괴물 밑으로 들어갈 수가 있냔 말이에요!"


"그 괴물한테 아랫도리를 돌리지 않았나요?"


"그! 그건…!"


"후후 어땠어요? 기분 좋았나요? 테크닉은? 당신의 주인보다 뛰어났어요?"


"묵비권을 행사하겠어요."


"묵비권? 그런 권리는 없는데? 당신에게 가능한 건 본인의 입으로 자신에 대한 걸 낱낱이 밝히는 것 뿐이에요."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건 기분 좋았다는 뜻?"


"절대 아니에요."


"그런 것 치고는 녹아내리는 표정을 꽤나 자주 지었지 않나?"


"웃기지 마요."


"사정은? 질내사정은 몇 번 당했어요? 당신의 주인만을 받아들이던 곳에 우리 주인 걸 받아들인 기분은 어땠어요?"

 

"…"


"또 대답 안할 셈?"


"대답 할 만한 걸 물어봐야 대답을 하겠죠."


"아, 그렇구나. 그럼 방식을 바꿀게요."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


"저기 창 너머 보이죠? 알비스에요. 그 옆에는 콘스탄챠."


"코, 콘스탄챠 양?!"


"죽이지 않고 있었거든요."


"뭘 할 셈이죠!?"


"대답하지 않으면…"


[비명 소리.] [샬럿의 신음 소리.]


"저렇게 되요. 자, 다시 물을게요. 질내사정은 몇 번?"


"왜… 도대체 왜 그런 추잡한 것을 묻는거에요!?"


"다 들려줄거거든요. 당신의 주인한테."


[샬럿이 괴로워 하는 소리.]


"질내사정은 몇 번?"


"기… 기억나지 않아요."


"그 정도로 많이 당했다는 말?"


"…맞아요."


"질내사정 당했을 당시들의 기분은?"


"…좋았어요."


"얼마나?"


"정말… 정말 좋았어요."


"당신의 주인이 잊혀질 만큼?"


"…네."


"우리 주인과 몸을 섞을 때 가장 좋아했던 체위는?"


"제, 제발 이제 그만해요!"


[비명소리.]


"가장 좋아했던 체위는?"


"굴곡위 굴곡위가 가장 좋았어요!"


"어머어머… 완전 변태네요."


[샬럿이 괴로워 하는 소리.]


"우리 주인 님과 몸을 섞을 때, 사랑한다 말한 적 있다? 없다?"


"있어요."


"매번 말했나요?"


"…네."


"성행위를 먼저 요구한 것은 당신 쪽? 아니면 우리 주인 님?"


"제가 먼저 요구했어요."


"우리 주인님을 폐하라 부른 이유는?"


[샬럿이 괴로워 하는 소리.]

[비명소리.]


"폐하라 부른 이유는?"


"그때는 사랑했으니까요!"


"당신의 주인과 관련 된 장소에서 성행위를 한 적이 있다? 없다?"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디?"


"사령관실, 함교, 회의실, 비밀의 방…"


"우리 주인을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한 적이 있다? 없다?"


"있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석… 비키니를 입은 적이 있어요."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제가 찾는다고 들으면 이리로 오면 돼요."


"…"


"잘 자요. 꼭 우리 주인님 꿈 꾸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샬럿이 흐느끼는 소리.]




///




[심문 기록 - 02 아르망 추기경]


"오랫만이에요. 추기경 님. 기운 좀 찾았나요?"


"…"


"그건 그렇고,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거에요? 아주 잠자는 공주님이셔. 난 또 죽은 줄 알았다니까요?"


"폐하께서는… 어디에…"


"걱정 마요. 잘 있으니까."


"이 곳은 어디죠?"


"당신이 솔직해져야만 하는 곳."


"무슨…"


"어라? 샬럿한테 듣지 못했어요?"


"홀로 있었어요."


"어머나. 그 큰 방에? 닥터가 웬일이래?"


"폐하를 뵙게 해 줘요."


"당신 하는거 봐서요."


"뭘 해야 하는거죠?"


"말했잖아요. 솔직해져야 한다고. 자, 아르망. 당신에 대해 말해 줘요."


"…"


"닥터에게 듣기로는, 당신. 꽤 많이 망가졌다고 들었어요. 오르카 시절의 그 고고한 추기경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고 하던데요."


"…"


"당신의 폐하를 보고 싶지 않은거에요?"


"뵙게 해준다는 보장이 없는 걸요."


"흐음. 그렇구나. 뭐 나부터 솔직해져 볼까요? 사실은 모두 닥터에게 달렸어요. 닥터가 허락하면 그 폐하를 뵐 수 있는거고, 아니면 뵐 수 없는거고."


"그렇다면 대화할 이유는 없지요."


"대화? 이건 대화가 아닌데?"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


"저기 창 너머 보여요? 알비스랑 콘스탄챠에요. 당신이 대답하지 않으면…"


[비명소리.]

[아르망 추기경이 놀라는 소리.]


"저렇게 되요. 자, 어때요. 대답할 마음이 들어요?"


"지, 질문을 다시 한 번…"


"어떻게 망가졌었어요?"


"폐,폐, 폐하를… 범했답니다."


"와~우~ 당신의 주인을? 당신 정말 아르망 추기경 맞아요?"


"…그래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폐하께서 하신 약속을… 이용했답니다. 몰아세웠지요. 결코 제게서 떨어지실 수 없게 만들었어요."


"왜?"


"…모르겠네요."


"흠… 모른다라.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사모하였지요. 오르카에서 함께 했던 때부터."


"그래요. 그럼 다음 질문. 당신이 그렇게 행동할 수록 당신의 주인도 망가져갔을텐데, 그걸 알고 저지른거에요?"


"…"


"대답?"


"그… 그건…"


[비명 소리.]


"아, 알고 있었답니다!"


"당신의 주인은 그렇다치고, 그 외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나요?"


"…네."


"왜?"


"당신이 알고 있는대로에요. 저는… 정상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아하. 주위 모두가 모조리 죽어버려도 상관 없었다?"


[아르망 추기경이 괴로워하는 소리.]


"예스라고 알아둘게요. 그럼 다음, 그 약속이란 것 말인데요. 그 베로니카가 있던 도시에서 한거였죠?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실은 살고 싶었죠? 당신 주인이 수 백을 죽이더라도, 그렇더라도 살고 싶었죠?"


"…"


[비명 소리.]


"그, 그건… 그건…"


[비명 소리.]


[비명 소리.]


"……맞아요."


"풉… 그래요. 솔직해서 좋네."


[아르망 추기경이 흐느끼는 소리.]


"뭐 그렇더라도… 본능에 가까운 심정이었겠죠. 다 이해해요. 누군들 죽고 싶겠어요. 설마하니 그걸 노리고 당신의 주인을 당신 것으로 만든 것도 아닐테고요. 당신은 그렇게까지 교활한 존재는 아닐 거니까."


[아르망 추기경이 괴로워 하는 소리.]


자, 다음 질문. 듣자하니 당신. '예지'를 단 한 번도 못했다고 들었어요. 가능했다면 우리를 막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뭐 예지를 못하는게 맞는거긴 하지만… 그래서 말인데, 예지를 못하는 당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고 여겼나요? 예를 들면, 메이라던가. 샬럿이라던가. 당신, 그 둘에게 꽤 모질게 굴었다면서요? 나중가서는 그 서약자에게도 꽤나 큰 실수를 했다고도 들었고요."


"…아니에요."


"응? 뭐가? 실수 했다는 부분이?"


"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게, 제가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였으니까."


"아하."


[아르망 추기경이 흐느끼는 소리.]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요. 폐하 꿈 꾸고."




/////




[심문 기록 - 03 T-8W 발키리]


"반가워요. 발키리. 우리, 접점은 크지 않았지만 서로 알만한 건 알고있죠?"


"시라유리."


"네. 시라유리에요. 어쩜, 당신 주인이 반할 만 하네요. 예뻐요. 예뻐."


"이런 취조실 같은 곳에 데려와서 뭐하려는 겁니까."


"뭐하려하냐니? 당연히 이런데서 할 법한 걸 하려는 거죠."


"각하께선 어디계십니까."


"걱정 마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각하의 안전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요구도 협조도 거부 하겠습니다."


"와우. 역시 서약자 다워. 아, 아니. 발키리들은 원래 이런가? 뭐 됐어요. 자, 시작해 볼까요?"


"거부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어디 이걸 보고도 그럴 수 있나 볼까?"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

[비명 소리.]


"…"


"할 마음이 들어요?"


"…"


"당신 자신을 조금만 죽이면 돼. 그러면 저들은 살아."


"…질문 하시길."


"아르망과 당신 주인의 관계를 알고 있었죠?"


"…네."


"현장을 본 적도 있고?"


"네."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죠?"


"결코 없습니다."


"대답에 무게감이 없는데? 표정도 그렇고. 거짓말은 안좋아요. 난 다 알거든."


"결코 없습니다."


[비명 소리.]


"말했죠? 당신을 죽이라고. 진짜 없어?"


"…있습니다."


"큭큭… 그럼 그렇죠. 서약 이후엔 당신 주인을 거의 독차지 하다시피 했으니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겠죠."


"…"


"내가 아르망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없었다?"


"…"


[비명 소리.]


"…이, 있었습니다."


"더 추잡스럽고 경망스럽게?"


"…네."


"와… 한 번 보고싶네. 당신 같은 존재가 아르망 이상으로 망가진다니. 혹시 오르카에서도 그 정도로 당신 주인과 즐겼던 적 있어요?"


"없습니다."


"어? 그래요?"


"각하께선 점잖으신 분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사실 나는 좀 더 짐승 처럼 다뤄지길 원했다. 그랬던 적 없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그와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랬던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지지도 않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비명 소리.]


"내 마음이에요. 딱 봐도 당신. 그런 면에서 욕구불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아하하하! 좀 더 암캐처럼 기고, 암퇘지마냥 울부짖게 만들어주길 바랐군요!?"


"…맞습니다."


"완전히 깔아뭉개져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붙잡혀서?"


"네."


"좋아요. 이 건은 내가 한 번 위에 말해볼게요. 혹시 알아요? 이런 처지가 되었기에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발키리가 괴로워 하는 소리.]


"너무 그럴 것 없어요. 솔직한 건 좋은거니까. 자, 다음. 당신. 당신 주인이 망가져가는 걸 알았음에도 전혀 나서질 않았다고 들었어요. 뭐, 이유는 충분히 추측이 되요. 당신은 서약자니까. 그 점이 도움이 되긴 커녕 발목을 잡았겠죠. 하지만 말이에요. 남편보다 당신의 그 자격지심이 더 중요했나요? 과감해져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섰다면 상황이 나아졌을 거라곤 생각 안해요? 모든게 망가져감에도 결국엔 당신만의 감정이 중요했나요?"


"…"


"다 필요 없고 당신과 남편만 어떻게든 된다면 상관 없었어요?"


"…네."


…그렇군요. 이건 좀 실망이에요.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요. 당신도 그 아르망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요."


"……"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요. 꼭 남편과 찐한 시간 보내는 내용의 꿈을 꾸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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