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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세계관에 떨어진 라붕이는 삼얀과 아르망, 그리고 아싸 사령관에게 고통받습니다.(28)



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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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한적한 섬의 어딘가, 취사장이라 불리는 건물의 옆에 자리를 잡은 그저 흙먼지만 넘실거리는 조용한 공터의 앞은 평소와 달리 수많은 인파가 북적여대었다.

 

웅성-웅성

 

“포츈 언니. 저게 뭐예요?”

 

“나도 잘 모르겠거든? 우리 급양 애들이 알려준 정보는 그저 아침에 뭔갈 이벤트를 연다는 것뿐이었거든.”

 

 본래라면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을 공터였으나,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남달랐다. 허허벌판뿐이었던 공터의 위에 놓인 물건의 탓이었다.

 

“크기가 장난 아닌데요? 대체 뭐에 쓰는 물건일까요?”

 

 족히 높이가 10m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물체는 회색의 덮개로 모습을 감춘 채 그저 땡볕 아래서 아무런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 거구를 뽐내고만 있었다. 외관은 그저 직사각형, 용도는 불명. 그 앞에 모인 여성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 거대한 물건의 정체를 유추하기 바빴다.

 

“혹시 거대한 초쿄바?”

 

“알비스. 그런 걸 여기에 둘리가 없어요.”

 

“뭐가 되었든 빨리 취사장 문이나 열렸으면 좋겠다. 배고파.”

 

“워울프씨 말대로 오늘따라 취사장 문이 늦게 열리네요.”

 

“다프네양. 혹시 생산 인원들은 뭔가 이야기를 더 들은 건 없어요?”

 

“아뇨. 저희도 뭐가 뭔지..”

 

 이 땅에 찾아온 파견 인원들도,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산 인원들도 저마다 몇 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열리지 않는 취사장의 문과 눈앞의 거대한 물체와의 연관성을 유추하고 있자니 그녀들의 뒤에서 그토록 그녀들이 바래 왔던 쇳소리가 그녀들의 귓속을 간질였다.

 

끼-익!

 

“오! 문 열렸다!”

 

“어머. 저 분은..”

 

“...”

 

또각-또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취사장의 정문을 열고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등장에 공터 앞에 모여있던 인파의 시선이 그녀들에게로 쏠렸다.

 

“...흐음. 관중은 이 정도면 충분해 보이옵니다. 수고했습니다. 아우로라. 포티아.”

 

“헤헷. 주방장님의 부탁이라면야!”

 

“저희가 딱히 말 안 해도 알아서 이야기가 퍼지는 동네여서..헤헤..”

 

또각-! 또각! 또각!

 

 따사로운 햇볕 아래로 색색의 머릿결을 빛내는 여성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니 그 집단의 선두에는 은발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여성이 서 있었다.

 

“모두 이른 아침부터 소첩의 쇼를 관람하러 오셨나이까?”

 

 새하얀 피부와 머릿결, 거기에 백색의 제복을 걸친 여성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반짝이며 자신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오자 그녀의 물음에 공터 앞에 모인 이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장님이 메인이셨구나?”

 

“저희도 평소 자주 뵙지는 못해서..아, 지나가세요.”

 

“..고맙사옵니다.”

 

또각-또각!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워울프의 물음에 볏짚 모자를 쓴 다프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찬 걸음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주방장에게 공터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냉랭한 주방장의 외모에 관중들은 저마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정말 절세미인이네요. 마치 설화에 나오는 설녀 같으세요."


"같은 바이오로이드인데 외모에도 차이가 있구나. 고급 모델이라 그런가."


또각-! 또각!


"모두 굿모닝!"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차가운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기는 주방장의 뒤로 그녀의 추종자들이 손을 흔들며 아침 인사를 건네자 남색의 카우보이 모자를 쓴 여성이 제 앞을 지나쳐가는 이들에게 재빨리 질문을 건네었다.


“아우로라. 포티아. 주방장님이 왜 여기 나오신 거야?”

 

“헤헤. 그건 앞으로 두 눈으로 확인해. 모두 오늘 주방장님의 실력에 감탄할걸?”

 

“화..확실히 주방에서 보여주시던 실력만 보시면..”

 

“...대체 무슨..”

 

 자신들을 지나쳐가며 해맑은 미소로 깝죽거리는 아우로라들과 평소처럼 쓴웃음을 짓는 포티아들의 모습에 관중들의 궁금증이 더욱더 깊어질 무렵, 드디어 회색 천으로 가려진 거대한 물건의 앞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냉기를 내뿜는 주방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탁-!

 

“..흐음. 적당히 녹았으면 하옵니다만. 무엇. 제게는 그 정도의 핸디캡은 핸디캡도 아니옵니다.”

 

“..포츈 언니. 저게 무슨 소리예요?”

 

“나도 모르겠거든?”

 

 공터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정체불명의 물체 앞에 선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여전히 그녀의 이해하지 못할 말소리에 고개만 갸웃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것처럼 아우로라들은 주방장의 앞으로 후다닥 뛰어나가 정체 모를 물건을 가리고 있던 회색의 천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펄-럭!

 

“...와! 저건..!”

 

“얼음! 얼음이네!”

 

웅성-웅성

 

 회색의 천이 거두어진 거대한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거대한 크기의 직사각형 얼음 덩어리였다. 섬 전체를 둘러싼 뜨거운 열기 탓인지 얼음 덩어리의 외관은 조금 녹아내렸을지언정 속까지 환하게 비쳐 보이는 내부에는 얼어붙은 냉기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냉기는 적당히 빠진 것 같사옵니다. 후훗.”

 

 그리고 그 거대한 크기에 모두가 압도되어 있을 때, 유일하게 단 한 사람만이 그 얼음 덩어리를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위로 끌어올린 채 담담하게 허리춤에 숨겨둔 무언가를 빠르게 뽑아내었다.

 

챙-!

 

“어..저건 회칼이잖아요?”

 

“저걸로 대체 뭘 하려고..”

 

 어디에 숨겨둔 것인지도 모를 두 자루의 기다란 회칼을 꺼내 들고선 그 칼들을 손가락 마디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려대는 주방장의 뒷모습에 관중들은 뜨거운 열기 대신 서늘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주방장님도 조교셨지..”

 

“으으..내 다리를 잘라버리겠다는 소리가..설마 저 칼로..”

 

“..저 여기서 도망쳐도 될까요? 진짜 저걸 두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항상 묵묵히 제 일에만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아오던 생산 인원들이야 그녀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해 궁금해했으나, 서늘한 얼굴과 목소리로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녀의 일면을 알고 있던 파견 인원들의 안색은 시퍼렇게 질려만 갔다.

 

샤-칵! 샤-칵!

 

“아우로라양들은 잘라낸 얼음들을 회수하십시오. 포티아양들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오늘 후식은 팥빙수 확정이네! 헤헷.”

 

“부군..아니 주인께서 날씨가 더워 이곳의 인원들이 지쳐하는 것을 염려하시니. 괜찮은 후식이 될 것이옵니다.”

 

“저흰 대장님이 더 걱정되는데요..후우..”

 

 어느새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자리를 잡은 급양 인원들은 앞으로 벌어질 광경에 두 눈을 반짝대며 회칼을 서로 교차해 긁어대는 그녀들의 리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부응하듯, 이곳의 주방장인 소완의 옥빛 눈동자에 차가운 예기가 흘러나왔다.

 

“-자, 이제부터 소첩의 걸작이 탄생할 시간이옵니다!”

 

샤-캉!


93)

 

짹-짹! 짹!

 

매앰! 맴! 매앰!

 

쏴-아아아!

 

 뜨거운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요안나 아일랜드, 우거진 수풀에서는 새들과 매미들의 합주가 흘러나오며 그 땅을 둘러싼 푸른빛 물결 위로는 쉼 없이 철썩대는 파도 소리가 넘실거렸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이 거대한 섬에서 365일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이 땅은 천국과도 다름이 없으니 그들에게 있어 이 섬을 떠난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야! 일어나! 지금 몇 신줄 알아?”

 

“으응..몇 신데..”

 

“8시야. 8시.”

 

 그리고 섬의 최심부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석조 건물, 층수는 4층에 불과 하나 지하 층계까지 포함해 6층에 달하는 거대한 이 건물은 다수의 생산 인원이 주거하는 공간이자 다용도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어느날, 한 명의 소녀가 아직 생활관에서 뒹구는 자신의 동료를 깨워 그녀와 함께 황급히 문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타-닥! 탁!

 

”늦었다아아! 아침! 아침 먹으러 가야 해!“

 

“야! 너 안전모 안 챙겨?!”

 

 뜨거워진 날씨 탓인지, 아니면 매일 반복되는 평화로운 일상 탓인지. 더치걸들은 저마다 늦잠을 잔 인원들을 깨워가며 하루의 시작을 준비했다. 미처 잠에서 일찍이 깨지 못한 몇몇 주홍빛 머릿결의 소녀들은 다급한 얼굴로 황급히 매일 입는 양말과 작업복을 걸친 채 기다란 중앙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기 바빴다.

 

“아차차! 헤헤. 또 까먹었다.”

 

“대장님한테 걸리면 혼나. 얼른 가져가.”

 

따박-따박

 

“응. 고마워. 근데 대장님 지금 어디 계신 데?”

 

“아마 지금은 회의실에 계실걸? 조금 천천히 가도 될 거야.”

 

“헤헤. 혼날까 봐 그러는 건 아닌데.”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은 한 소녀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기다란 계단의 끝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녀들은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똑같은 동일 개체라는 것은 아니었다.

 

뚜벅-뚜벅

 

“하긴. 히히. 우리 대장님, 요새 날씨 덥다고 난리를 치시는데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그러고 보니 파견 애들은 알까? 자기들이 그렇게 혼난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거?”

 

“알아도 어쩌겠어. 걔들은 혼쭐날 이유가 있어서 혼난 거잖아.”

 

“맞지. 헤헷.”

 

 서로 닮은꼴이나 가진 기억은 저마다 남달랐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개체 간 차이점이 명확히 존재했다. 두 소녀는 바빠 보였던 아까와 달리 느긋한 발걸음으로 기다란 복도 위를 찬찬히 걸으며 따스한 햇볕이 창틀 너머로 들어오는 환한 복도의 위의 분위기에 취해 뺨 위로 홍조를 띄워 보였다. 이미 대다수 인원은 아침 식사를 하러 이곳을 떠났는지 넓은 복도 위에는 두 소녀의 목소리와 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뚜벅-뚜벅

 

“오드리 언니는?”

 

“음. 뭔가 바빠 보이면서도..또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시던데?”

 

“그 말은 곧 뭔가 터진다는 거네. 히힛. 대장이 오고 나서부터 심심할 날이 없다. 그치?”

 

“그러게. 예전에는 그냥 탄광에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는데.”

 

“그건 너무 나갔다. 히히.”

 

뚜벅-뚜벅

 

 복도를 거니는 요안나 아일랜드의 더치걸들은 알고 있었다. 과거 자신들과 같은 개체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그렇기에 이곳으로 처음 배치받았을 때는 적어도 과거처럼 막 굴려 먹지는 않겠구나, 라는 막연한 안도감을 가졌었다. 자신들을 폭행하거나 마구잡이로 다룰 인간님이 없다는 사실과 탄광에 틀어박혀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불우한 인생이 자신들에게는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 생활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도 언제쯤 본대 더치걸처럼 환하게 웃을 날이 올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일렀네.”

 

“심지어 거기는 잠수함 생활인데, 우리는 이렇~게 좋은 날씨를 만끽하면서 웃어대니까. 배로 괜찮은 거지!”

 

“헤헷! 그 말도 맞아!”

 

 불과 한 달 전, 갑자기 왠 남성 하나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그녀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매일 같은 나날, 같은 작업. 죽을 때까지 반복될 줄 알았던 그녀들의 무료한 나날에 그가 성큼성큼 군홧발을 들여놓기는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도 대장이 우리 쪽에 오실까?”

 

“이번에도 막 기계 전원을 내려버리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좋지만!”

 

“대장한테 비행기 태워달라고 하자! 이제는 시간도 많으시대!”

 

 눈 밑에 다크서클 대신 홍조를 띄우며 앞으로 걸어가는 두 명의 더치걸들. 그녀들은 이제부터 매일 반복되는 평화로운 일상을 한껏 만끽했다. 본대의 더치걸들이 왜 저렇게 행복해하나 했더니, 역시 그 원인은 따뜻한 인간의 품이었다는 걸 그녀들은 깨달았다.

 

뚜벅-또각

 

“그러고 보니 너 어제 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왜 다시 생활관으로 안 돌아왔어?”

 

“...그..그게. 헤헤..”

 

 일전에 브라우니에게 밀쳐졌던 더치걸의 물음에 간밤에 큰 실례를 하고만 더치걸을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긁적이며 동료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시..실은 대장이 어제 공포 영화를 들고 왔잖아..”

 

“응. 난 재밌게 봤는데.”

 

“..그거 보고 화장실이 급해져서..그 통신실 앞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거든.”

 

“응응.”

 

“..근데 거기서 발소리가 들렸었는데 대장인 줄 알고 가봤더니 아무도 없더라고.”

 

“...설마..”

 

“...”

 

 말을 이어가던 더치걸은 동료가 무언갈 눈치채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녀의 예상에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동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인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탁-! 탁!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헤헤. 그..그렇지?”

 

“근데 발소리는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우리 중에 야밤에 거기 갈 애들은 없는데.”

 

“아..아냐! 똑똑히 들었어! 그건!”

 

“흐음..발소리를 듣고 가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거 완전 귀신 아니야? 대장이 보여줬던 공포영화에서 나온 그 귀신!”

 

뚜벅-뚜벅

 

“귀..귀신 같은 게 어딨어. 설마..”

 

또각-뚜벅

 

“왜. 그런 거 있잖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인데, 누군가 지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던가! 그런 소문은 여기 생겼을 때부터 있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응. 진짜 그랬대. 나도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뚜벅-또각

 

 간밤의 공포가 되살아난 듯, 어깨를 파르르 떨어대는 더치걸의 모습에 그녀의 곁을 따라 걷던 더치걸은 자신이 들었던 몇몇 기괴한 소문들을 머릿속에서 찾아내려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발걸음이 잠깐의 생각을 위해 복도 위에서 멈추어섰다.

 

-또각!

 

 분명 자신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무언가 뒤에서 한 박자 느린 발소리가 들려오자 더치걸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등 뒤로 홱 돌렸다.

 

“..응?”

 

 발걸음 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린 두 더치걸들의 주홍빛 눈동자에는 자신들이 걸어온 기다란 복도와 그 위를 감싼 환한 햇빛만이 비추어졌다. 다시 말해, 그녀들의 뒤를 따라온 이는 없는데 발소리가 그녀들을 따라 왔다는 소리..

 

“...흐아아아아! 귀..귀신이다! 낮에도 나오는 귀신!”

 

다다-다!

 

“야..야! 잠깐만! 왜 그래!”

 

“흐아아아앙! 대자아앙!”

 

타-닥! 타다다다!

 

“가..같이 가! 나만 두고 가기야!”

 

 간밤의 공포가 완전히 되살아 난 더치걸 한 명이 허공에 눈물을 흩뿌리며 앞으로 달려가자 그녀와 함께 걷던 더치걸 역시 질겁하는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라 뛰었다. 대낮임에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두 더치걸들은 그녀들이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복도 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밝은 복도의 위로, 그녀들이 멈추었던 자리에서 두 걸음 뒤의 허공에 작은 일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의 위로 낮게 깔린 어떤 이의 작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새어 나왔다.

 

“...놀..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사-락!

 

“놀래 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는데...아무래도 내게는 무리다. 후우..”

 

또각-또각

 

“..나도 배고프다. 식량..식량을..”

 

또각-또각

 

 한 여성의 작디작은 목소리와 함께 복도의 위로 다시 한번 더치걸들이 들었던 의문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94)

 

웅성-웅성

 

“...”

 

 요안나 아일랜드의 아침은 이르다. 라붕이 작전관은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 섬 위에서의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가며 신체 리듬을 이른 아침으로 짜 맞추어 갔다. 이전 세계에서 살아가던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으나 영양가 높은 식단과 업무에 치여 죽을 일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전에 살던 때보다 육체적인 피로를 적게 느끼고 살아갔다.

 

“필-승!”

 

“어..그래. 필승.”

 

“좋은 아침입니다! 대장님!”

 

“어어. 그래. 밥 먹고..”

 

“예!”

 

 어느새 자신이 서 있는 지프차의 곁으로 다가온 스틸라인 병사들의 경례에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 풀린 목소리로 그녀들의 경례에 대답했다. 항상 얼굴에 힘을 팍 주고 다니던 그가 오늘 아침 따라 어벙한 얼굴과 목소리로 경례에 답해주니 이곳으로 파견을 온 스틸라인 장병들은 행여 자신들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대장님? 혹시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검은 선글라스 아래로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눈앞의 인간이 입술을 벌린 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니 그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레프리콘 한 명이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녀의 물음이 귓바퀴에 닿긴 한 듯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지프차의 뒷자리 위에 선 채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아..아니다. 아침 먹어라. 오늘도 수고하고.”

 

“네..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

 

 라붕이 작전관의 대답을 들은 파견 인원들은 저마다 그의 눈치를 봐가며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다 그 어딘가로 황급히 달려가는 방금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레프리콘의 뒷모습을 쫓았다.

 

“...쟤네 어디 가는 거야?”

 

 땡볕이 내리쬐는 취사장의 입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공터, 그곳에는 본래 PX라도 하나 지어둘까 싶어 라붕이 작전관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리조트 완공도 되지 않은 마당에 뭘 더 짓기는 조금 그렇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뒀다만, 오늘은 그 공터에 그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무언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

 

탁-탁!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게 해주세요.”

 

 공터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크기의 얼음 조각상, 족히 8m는 넘어 보이는 그 조각상은 햇빛 아래서 그 투명한 몸체를 한껏 빛내고 있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섬세한 손길이 닿은 것만은 확실한 조각상의 아래서 아까까지 라붕이 작전관에게 경례를 올렸던 무리가 이번에는 양손으로 합장을 해가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탁-탁!

 

“제발 극기훈련 3회차 애들이 저희보다 더 고생했으면 좋겠슴다!”

 

탁-탁!

 

“수면 시간을 늘려주세요..졸려..”

 

탁-탁!

 

“알비스들이 떠날 때는 초쿄바 한 상자!”

 

“...쟤들 지금 저기서 뭐라는 거냐? 아르망.”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폐하.”

 

“..소원?”

 

 제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르망의 대답에 라붕이 작전관의 입술이 파르르 떨어대었다. 한없이 밝기만 한 태양 아래, 수많은 인파가 공터에 모여 합장을 드리며 제각기 다른 소원을 읊는 모습은 가히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니 유능한 그의 부관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성상이 그의 모습을 빼다 닮은 것만 빼면 말이다.

 

“저거 나잖아!”

 

“하하하! 작전관도 출세했구려! 병사들에게 참배를 받을 정도라니!”

 

“웃을 일이 아니야! 저..저런 게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뜨거운 햇볕에도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거대한 얼음 조각상의 외관은 어느 한 남성으로 보이는 자가 군모와 선글라스를 쓴 채 어깨 위에는 거대한 코트를 두르고 한 손에 들린 지휘봉을 높게 든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 얼음 조각상이 무엇을 본떠 만든 것인지 제일 잘 알고 있는 라붕이 작전관은 콧등에 걸어둔 선글라스를 벗어 재꼈다.

 

“부...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저런 게 없었는데..”

 

 씰룩대는 뺨을 멈추지 못한 채 이제는 덜덜 떨어대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아르망과 요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뒤까지 걸어온 이는 그런 그의 뒷모습에 싱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소첩의 작품이옵니다. 주인이시여.”

 

“-히익!”

 

 갑자기 제 곁으로 다가온 여성의 차가운 입김에 그는 자신의 형태를 본떠 만든 얼음 조각상에서 눈을 떼고는 등을 돌려 어느새 자신의 뒤까지 걸어온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당장 오늘 아침에도 보았던 매혹적인 여성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얼굴에 찬찬히 다가와 서 있었다.

 

“후훗. 언제까지 소첩의 목소리에 그리 놀라실 생각이옵나이까?”

 

“소완!”

 

“행여 소첩의 손길이 닿은 저 작품에 매료되신 것이옵니까?”

 

“뭐? 저..저게 네가 만든 거라고?”

 

 소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사실에 라붕이 작전관은 오른 검지를 높게 들어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러자 소완은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첩의 미진하기만 한 솜씨이오나, 주인의 모습을 본 떠 얼음을 깎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사옵니다.”

 

“왜 하필 나냐?! 다..다른 거! 용이나 호랑이같은 걸로도..”

 

“어찌 그런 하찮은 미물을 제 손으로 깎겠나이까. 저것이야말로 제 작품 중 걸작이옵니다.”

 

“...”

 

 만족스러운 얼굴로 얼음 조각상을 바라보는 소완의 작태에 라붕이 작전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의 옥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소완은 은발의 머릿결을 귓등으로 살짝이 넘기며 그를 향해 거리를 좁혀갔다.

 

“소첩의 선물이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이까?”

 

“..어? 아니..그..뭐냐..”

 

‘마음에 든다 안든다의 문제가 아닌데. 저건...’

 

 자신의 모습을 본 떠 만든 얼음 조각상, 설마 저런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라붕이 작전관이 뺨을 긁적여 대자 소완은 아까까지의 당당함은 온데 간데 없이 한껏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변했다.

 

“..그러시다면 주인의 늠름한 자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소첩의 실력에 화가 나오니 제 손으로 부수겠나이다.”

 

“어? 잠..”

 

챙-!

 

 어디에 숨겨놓은 것인지 모를 두 자루의 사시미 칼이 그녀의 양손에서 번쩍대는 외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라붕이 작전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소완은 그의 당황하는 눈길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의 곁을 떠나 아직도 군중이 모여있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소첩이 뿌린 씨앗이오니, 소첩이 거두겠나이다.”

 

‘씨...씨발! 이러면 안 되지!’

 

 아침을 건낼 때와 달리 어딘가 힘이 빠진 그녀의 뒷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황급히 머리를 가로젓고는 올라타 있던 지프차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걸어나가는 소완의 어깨를 확 붙들어 매곤 최대한 발랄한 목소리로 그녀의 옥빛 눈동자에 호응해주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어! 진짜 잘 만들어서 그래!”

 

“...정말이옵니까?”

 

“진짜! 소완 최고! 칼솜씨도! 요리 솜씨도! 최고다! 최고!”

 

“..작전관은 아첨하는 게 서툰 것 같네만. 하하하!”

 

‘..소완한테 어떻게 아첨할지를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냐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요안나의 핵심을 짚는 태클에 라붕이 작전관은 억지로 미소를 머금은 채 시무룩 해하는 소완에게 계속해서 엄지를 들이밀었다. 다른 애들이라면 적당히 놀아주면 그만, 소완에게는 어떤 것을 해줘야 할지 아직 감도 못 잡은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하..하하! 너무 그렇게 기죽지 마. 응? 내가 잘못했다니까?”

 

“..정말이옵니까? 정말 마음에 드시나이까?”

 

“물론이지! 내가 소완 덕분에 매일 아침이 즐겁다니까! 이런 이벤트도 만들어주고! 저기 봐봐! 다른 애들도..좋..좋아하잖냐! 응?”

 

“...후훗. 듣기 나쁜 말은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시여. 소첩이 주인으로부터 가지고 싶은 게 하나 있사온데..”

 

“뭔데? 뭔데?”

 

 조금씩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옥빛의 눈동자를 기다란 눈썹 사이로 빛내는 소완의 미모에 라붕이 작전관은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의식해가며 그녀의 뒷말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힘든 주방일에 제 식사까지 꼼꼼히 챙겨주는 소완이 무엇을 원하든 그는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들어줄 생각으로 만반이었다.

 

‘그래. 차라리 내게 요구를 해주세요! 그게 속 편하..’

 

“..주인의 방 카드키를 원하옵니다.”

 

“...어?”

 

“안 되겠..사옵니까?”

 

“그..그건 조금...그..”

 

 초롱초롱한 녹색의 눈동자와 함께 자신의 티셔츠 자락을 살포시 움켜쥐는 소완, 라붕이 작전관은 애절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부탁에 결국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포기했다.

 

“...아르망.”

 

“알겠습니다. 폐하. 소완양. 오늘 저녁까지 개인실에 두겠습니다.”

 

 라붕이 작전관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또박또박한 아르망의 대답에 소완은 라붕이 작전관의 옷깃을 놓아주며 언제 글썽였냐는 듯 곧장 생글생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곁에서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탁-!

 

“...감사하옵니다. 주인이시여. 앞으로는 주인께 폐를 끼칠 일이 없겠나이다. 후훗.”

 

 본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어느새 만면에 웃음을 떠올리는 주방장의 음험한 목소리에 라붕이 작전관의 눈썹이 미간으로 휘어 들어갔다.

 

“어? 야. 소완. 너 방금까지 울려던..”

 

“소첩은 실로 슬펐사옵니다. 절대 연기를 한 것이 아니니 소첩을 그리 의심하지 마옵소서.”

 

“...”

 

“하지만 그 리리스양이나 리제양도 얻지 못한 것을 이리도 쉽게 얻을 줄은 몰랐나이다.”

 

“취소! 취소다! 아르망!”

 

“폐하.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습니다. 후훗.”

 

“이거, 외통수였네만! 하하!”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사옵니다. 후후후. 앞으로 주인의 아침은 소첩의 것이나이다.”

 

‘악어의 눈물이었냐아아!’

 

 생각해보면 그녀는 겨우 이런 일로 울먹댈 여성이 아니었다. 라붕이 작전관은 제 앞에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새빨간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는 소완의 모습에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졌다. 그래. 네가 이런 일로 울...”

 

“소첩의 눈물은 비싸오나 주인께 한해 무료이옵니다.”

 

“...그럼 카드키는 없던..”

 

“소첩은 주방일이 바쁘오니 이만 가보겠나이다. 주인. 너무 그리 상심하지 마옵소서.”

 

또각-또각!

 

“...한 방 제대로 먹었네. 하..”

 

 당찬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소완의 뒷태에 라붕이 작전관은 이전과 다른 그녀의 매력에 입꼬리를 올렸다. 몇 걸음을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기까지 하니 그는 자신 역시 손을 흔들어주며 그녀를 배웅했다.

 

‘포츈은 좋아하겠네. 이제 카드 리더기가 부서질 일은 없으니. 근데 아침에 들어와서 뭔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당장 오늘 아침에 있었던 낯부끄러운 상황이 다시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라붕이 작전관은 심란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앞으로 그녀의 방문 이전에 반드시 일어나 있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맹세했다. 그렇게 그가 멍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서는 소완을 배웅하고 있자니, 어느새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온 그의 부관이 멍하니 서 있던 그를 깨우려 들었다.

 

“폐하? 이제 영양 생산 설비 쪽으로 가실 시간입니다.”

 

“어. 어어! 그래. 얼른 가자. 애들 기다리겠네.”

 

“뭘 그리 서두르는가? 천천히-즐기면서 갑세나!”

 

부-우우웅!

 

 당장 다음 스케쥴이 빡빡하다는 것을 떠올린 라붕이 작전관이 황급히 지프차에 몸을 싣자 아르망은 그에게 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제는 익숙한 그녀의 행동에 라붕이 작전관은 말없이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근데 저 얼음상은 그렇다 치고. 대체 왜 내 얼굴 아래서 애들이 합장하는 거냐?”

 

 뭔가 기분 묘하게. 라붕이 작전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아르망이 건넨 손수건을 들어 뺨과 이마의 땀을 훑고 있으니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가 생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폐하, 저희 저항군에서 페하를 어찌 부르는지 아십니까?”

 

“나? 나 대장이지. 라붕이 대장님. 그렇게 다들 부르잖아.”

 

“..그것도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만. 실은 오르카 라이브 채널에서는 폐하를 다르게 부른답니다.”

 

“..또 거기냐?”

 

 아르망의 입에서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동네가 거론되자 땀을 닦던 라붕이 작전관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솔직히 병사들이 뭐라 지껄여대던지, 상관은 없는데. 또 무슨 괴상한걸..’

 

 일전에 보았던 자신과 사령관의 찐한 사랑 그림을 목도했던 라붕이 작전관, 그 이후로 그는 오르카 라이브 채널을 아예 심층 심리의 저편으로 내던져 버렸다. 하지만 오늘 또다시 부관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라붕이 작전관의 눈썹이 반사적으로 파르르 떨어대었다.

 

“...왜. 총수님이라디? 응?”

 

“총수님? 그게 무슨 뜻인지요.”

 

“...아니다. 그래. 뭐라 부르는데?”

 

 혹시나 착한 사령관이 그 사태를 종식을 시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하던 라붕이 작전관은 아르망이 자신의 물음에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속으로나마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거기까지는 안 갔네.’

 

“폐하. 혹시 코헤이 교단이라고 아십니까?”

 

“코헤이?”

 

 이번에는 자신의 턴이라는 듯 스무고개를 하는 아르망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의 속눈썹이 좁혀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에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코헤이 교단은 멸망 전 인류가 창조해낸 사이비 종교라는 것뿐이었기에 그로서는 아르망의 물음이 뜻하는 바를 쉽사리 예측해내지 못해내었다.

 

“코헤이라면..그 아자젤이 있는 교단 아니냐.”

 

“맞습니다. 폐하. 아자젤이라는 바이오로이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저와 같은 덴센츠에서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음. 짐도 그곳에서 생산되었다네!”

 

“그랬냐? 그래. 거기가 왜?”

 

“...코헤이 교단은 일찍이 사령관님을 그녀들이 모시는 신인 빛이 내린 구원자라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유일신이라는 직함을 내세운 사령관과 그 휘하의 사이비 종교 집단, 라붕이 작전관은 그보다 완벽한 멸망 세계의 종교가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아르망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종교야 뭐. 어느 세계든 있기 마..련..’

 

“잠깐. 아르망. 나는 왜 애들이 내 조각상 앞에서..”

 

“폐하께서는 벌써 눈치를 채신 듯합니다.”

 

“...설마.”

 

 어딘가 흥겹다는 듯 발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망의 눈길에 떨림을 멈추었던 라붕이 작전관의 뺨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랐건만 그의 부관은 그의 예상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이제 코헤이 교단 내에서 심판자라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시..심판? 뭐?”

 

“심판자. 폐하의 1기 극기훈련 영상이 전 오르카 저항군 내로 퍼짐에 따라 폐하께서는 구원자인 사령관님과 다른 방향으로 저항군 내의 코헤이 신도들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허..허허!”

 

 설마 자신이 행했던 일들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라붕이 작전관은 덜덜 떨어대는 뺨을 주체하지 못했다. 타인이 듣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신의 대행자 자리까지 올라가 버린 이 평범한 남성에게는 이성을 승천시키기에 딱 좋은 이야기였다.

 

“...심..아..아..머..머리야. 아..”

 

“하하하! 어울리는 이름일세! 작전관!”

 

“...어울리긴 개뿔!”

 

 앞에서 들려오는 밝은 요안나의 목소리와 반대로 라붕이 작전관은 지휘봉을 손에 쥔 채 양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내가 무슨 씨발! 심판자야! 심판자! 이 썩을 사이비 새끼들이 진짜!’

 

 두피 아래로 바늘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그가 꾹 감내하고 있자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르망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그녀의 두꺼운 책자를 그의 무릎 위로 밀어 넣었다.

 

“폐하? 폐하를 위한 성전도 이미 작성 중에 있습니다만. 읽어보시겠습니까?”

 

“..아르망. 너 아직도 오전 일에 꿍해 있니?”

 

“..그럴리가요. 폐하. 저는 언제나 폐하의 편입니다. 후훗.”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그렇게 또 하나의 스트레스 요소를 지니게 된 이 땅의 유일한 남성, 그는 퀭해진 눈으로 아르망의 뒤편에 펼쳐진 푸르른 바다의 지평선을 멍하니 응시하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제발 이 일이 크게만 번지지 않게 해주세요.’

 

 졸지에 심판자로서 사이비 종교의 한 축을 맞게 된 그의 고뇌는 밝기만 한 여성들의 얼굴과 저 멀리 펼쳐진 환한 바깥 풍경과 달리 점차 썩어만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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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내용 팁. 극기훈련 오르카 라이브 생중계는 라붕이 머리가 아닌 아르망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도대체 이놈의 얀데레물들은 왜 멀쩡한 내용이 없냐? 죄다 주인공 칼빵이나 사지절단 엔딩에 정신붕괴 엔딩 밖에 없네. 씨바 참고할 작품이 없어. 오직 모니카는 또 뭐야. 이거 일상물인데 얀데레로 일상이 가능키나 하냐? 망했네. 망했어.


※92번 플룻이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혼동시켜서 미안혀. 그리고 쿄헤이인 줄 알았는데 오늘에서야 코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고유명사 미치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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