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올린 것은 고양이와 설탕이었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구름을 닮은 고양이. 희고 고운 설탕으로 빚은 섬세하고 달콤한 인형.

머리부터 발 끝까지 순백색 천옷으로 감싼 이 고양이 메이드는 몸 곳곳을 귀여운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발랄한 복장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도도했으며, 신중한 기색도 느껴졌다. 상대방을 탐색하듯이 차분하게 훑어내리는 그 눈길은 왠지 모르게 야생성도 품고 있어, 내게 의외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나는 그때 페로의 머리 위로 솟아난 고양이귀에 가장 호기심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떠올리는 기억이라곤 이름 밖에 없어 혼란스럽던 나에게 살아움직이는 고양이귀가 달린 사람은 확실히 이목을 끌었으니까. 예의가 없다고 보일 정도로 신기하게 쳐다보던 나에게 페로는 다소곳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며 반겨주었다.


"페로라고 합니다.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뭐든 맡겨주세요."


그녀는 부드럽게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각인시켰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전쟁터의 사령관으로 떠밀려서 막막하던 내 수발을 페로는 기꺼이 들어주었다.

고된 전투에서는 직접 나서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으며,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자신이 가능한 선에서 적절한 조언으로 나를 받쳐주었다.

페로는 점점 내 마음 속에서 믿음직한 부하이자, 친근한 동료이며, 동시에 소중한 가족 같은 존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 페로에게 언젠가 한번 혼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당혹감에 차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해달라고 말하였다. 귀여운 벨벳 고양이를 다루듯이.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놀란 반응을 본 적 없었던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고, 그때부터 페로에게 더 미움 받기 싫어 관계를 조절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얼굴이 계속 걸린다. 페로는 변함없이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도 쉽사리 벽을 못 내리겠다.


언제쯤 이 벽을 허물까?






오후 3시. 아니나 다를까, 트리아이나를 따라 들어온 페로는 평소같은 얼굴로 양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후 내 옆에 서있었다.


보고를 듣는 척 하며 몰래 곁눈질을 해보니, 페로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 없다. 조금 더 바라보자 푸른빛과 호박빛이 섞인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내 눈과 마주친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주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한 쪽 눈을 깜빡여 윙크를 해봤지만 페로는 그대로 조용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사령관. 내 얘기 듣고 있어?"


"아, 물론이지! 듣고 있어. 뉴트리아."


"나 설치류 아니야!"


"이쪽이 더 귀엽지 않아?"


"징그럽거든. 이름가지고 자꾸 장난칠래!"


심통이 난 트리아이나가 앞으로 몸을 쭉 뻗어오며 내게 팔을 뻗는다. 볼이라도 잡아당길 셈인가.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마리가 본다면 한 소리 나올 행동이지만, 내가 자주 놀리는 것도 있고 그녀는 원래 이런 성격이다. 규율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과 누구와도 허물 없이 지내는 친화력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지. 가볍게 받아줄 생각으로 가만히 있자니 읏흠, 하고 불편한 헛기침이 끼어들었다.


"무례한 행동은 삼가주세요."


어느새 눈을 뜬 페로가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 둘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기를 잠시, 짖궃은 웃음과 함께 트리아이나가 몸을 뒤로 뺐다.


"오우, 나 질투를 사버린 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인기 많은 남자는 어쩔 수 없지."


"무, 무무슨 소리를..."


의도적인 농담이었지만 페로는 붉게 물든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한다. 재밌다고 히죽거리던 트리아이나는 명랑한 발걸음으로 함장실을 나가버렸다.


"그럼 나는 갈게. 사령관. 나중에 같이 탐험하러 가자!"


철컥. 탁. 흘끗 옆을 돌아보니 페로의 얼굴은 딱 알맞게 제철사과로 무르익은 상태다. 아까처럼 새침한 태도가 사라진 것은 좋지만, 그녀는 창피해졌을 때 맞서기 보다는 도주를 택하는 편이다. 내버려두면 바로 함장실 밖으로 나가버리겠지. 막다른 곳에 몰린 고양이가 담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지듯이 페로가 떠나가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페로."


"...네?"


"페로페로."


"이상한 느낌으로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리 와."


의자를 데스크 뒤로 살짝 빼면서 그녀에게 양 손을 뻗는다. 갑작스러웠는지 페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부르면 페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그도 아니면 부끄럽다면서 늘 자리를 피하고는 했다. 아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와줄까?


다행스럽게도, 페로는 내 부름에 응해주었다. 누가 들어올까봐 걱정되는지 팔을 벌린 나와 출입문을 번갈아보던 페로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꾹 다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내 앞에 선 그녀가 쉴 곳을 찾은 고양이처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 분홍색 리본이 묶인 풍성한 양갈래 머리가 부드럽게 콧잔등을 스치면서 향긋한 크림 냄새를 남겼다.


자리에 앉은 페로는 조금 뻣뻣하게 굳어있다. 그녀의 몸에 팔을 살며시 둘러 껴안고,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정수리에서는 여전히 산뜻한 냄새가 풍긴다.


"이제 무슨 업무가 남았지?"


"오늘은 스케줄을 넉넉하게 비우셔서 정찰 보고만 들어오는대로 확인하시면 됩니다. 거점을 세우는 계획은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된 후에 진행되니까요."


"이제부터 페로는 뭘 할 거야?"


"저는... 달리 처리할 일이 없다면 계속 주인님을 경호해야죠."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페로가 올려다본다. 그런 페로에게 웃음으로 화답해주며,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띡. 띡. 벽에 설치된 내장형 시계가 작은 소리로 시간이 흘러감을 알려준다. 내 체온으로 등을 따뜻하게 덥혀줘서인지 페로의 굳은 몸이 서서히 풀어진다.


다행히도 그녀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속내는 꽁꽁 감추고 있고, 이걸 내가 해결해주지 못하면 분명 페로의 안에서 앙금으로 변할 것이다. 그건 언젠가는 우리의 관계를 썩히고 서먹하게 만들겠지. 너무 나간 건 아니냐고 누가 딴지를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쭉 있을까?"


"네? 하지만 누가 들어오면..."


"들어오라지. 눈치 볼 일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감각을 집중하게 되자, 페로가 내뱉는 숨소리와, 그녀의 등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과 몸 사이에 끼인 꼬리가 빗자루처럼 슥슥 움직이며 내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페로는 편안하게 머리를 눕히고 나에게 기대서 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페로가 내 부름을 피하지 않고 다가와서 앉아주었다. 그래서인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그녀가 더 포근하고, 더 향기롭게 느껴진다.

이대로 누군가가 훼방을 놓을 때까지 둘이서의 시간을 침묵으로 만끽해도 된다. 굳이 말을 섞지 않고 이대로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몇 시간 전 페로가 보여줬던 쌀쌀맞은 반응을 또 한 번 보게 될까봐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약 페로가 이건 아니라면서 갑자기 일어난다면?


"말해줄 수 있을까?"


다급하진 않았지만, 성급하게 꺼내버린 한 마디가 방 안에 울리며 침묵을 깼다. 고요함을 깨고 튀어나온 소리여서인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내 목소리가 크게 나온 것 같았다. 바로 밑에 있던 페로도 마찬가지였는지 귀가 한 차례 파닥거리며 그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이왕 깨버린 거 과감하게 나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올려다보지 않고 앞을 바라봤기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모니터로는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페로도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은 분명했다. 단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잠시 후, 페로의 입에서 우물거리듯 의외의 소리가 튀어나았다.


"...주인님은 저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지."


"어떤 의미로 좋아하시는 건가요?"


어떤 의미라... 쉽지만 어려운 질문이다. 페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얼마 전 유산을 찾아 다른 섬에서 돌아다닐 무렵, 오일을 바르는 것 하나로도 그녀는 조그만 거짓말을 선택했다. 오히려 지금 꺼내는 질문은 페로 자신도 굉장히 용기를 낸 것일테다. 만족스러워 할 만한 대답을 내가 낼 수 있을까? 머릿 속에 무수한 선택지를 떠올려본다.


"그저 너를 좋아할 뿐이야. 거기에 특정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아."


"그런... 가요."


"귀여운 벨벳 고양이. 기억 나? 나는 너를 소중히 하고 싶어."


목소리가 뒤섞여 허공으로 뿌옇게 흩어져나간다. 퍼져나간 감정이 어느 순간 연기로 변해 눈 앞을 뒤덮었다.

페로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장갑을 벗었는지 매끄러운 촉감이 살을 스치며 그녀가 손을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모르겠어요. 저는 주인님의 고양이인데... 고양이인게 싫어요."


"......"


"주인님이 싫은 건 아니에요. 단지, 가끔은 고양이인 제가 밉답니다."


"페로."


"저와 주인님이 만나고 시간이 제법 흘렀네요. 그 순간순간들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된다면 좋겠어요."


옷이 사라락 스치면서 한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어느새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페로는 함장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추억만 남는 것도 싫어서, 스스로가 답답해져요."


어느새인가 페로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흘리고 가버린 한 마디가 데스크 위로 떨어지고는, 형체도 없이 바스라져버렸다.


"페로..."


무의미하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며, 나는 허전해진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