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인님을 유혹하고 있어요."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얼굴에 힘을 줬다.


품에 안긴 그녀의 눈처럼 흰 머리결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그라스향 샴푸의 냄새가 풍겼다. 단정히 꽂힌 카츄사 뒤로 드러난 고양이귀가 까닥거린다.


잠깐동안 귀를 쳐다보던 나에게 관심을 달라는 듯이 희고 부드러운 꼬리가 턱을 간질였다. 시선을 정수리에서 아래로 내리자, 파랗고 노란 오드아이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는 페로의 불만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두근거리지 않으세요?"


"항상 너를 보면 두근거리는 걸."


능청스럽게 웃으며 받아치자 페로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노, 농담이 과하시네요."


사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다. 점심을 먹고 평화롭게 함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페로가 들어와서는 의자에 앉은 내 위로 풀썩 앉아버린 것이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위로 앉는 경우는 있었지만, 페로는 이런 스킨십에 소극적인 편이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체면을 지킨다고 해야 할지, 부끄러움이 많다고 해야 할지. 페로는 다른 동료들이 깐깐해보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느 상황에서건 적정 선의 품위를 지키길 선호했다. 그녀에게는 애정표현조차도 자신이 정한 원칙과 조건을 세워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로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본인도 꽤나 과감하게 행동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요즘 피곤해?" 상냥하게 꺼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요. 항상 스케줄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행동하는 걸요."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야?"


"주인님 곁에 있으면 힘든 일은 없어요."


이거다. 대답 자체는 애정이 깊은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애정이 깊으니까 흘려듣기 쉬운 화법이기도 하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과연 무엇일까? 페로가 들어오기 아침부터 요 몇 일 간 있었던 일을 떠올려본다.


오늘은 아침 일찍 LRL이 와서 놀아달라고 하길래 그리폰의 식사에 넣으라며 캡사이신 봉지를 하나 줬다. 어제는 하루동안 부대 정비를 하던 중 달이 밝아서 밤바다를 즐기고 싶다는 브라우니들의 요청에 오르카호를 섬 해변가에 정박시키고 저녁부터 휴식을 취했지. 이틀 전에는 섬을 점령하기 위해 숨어있는 철충들을 찾아서 토벌했다.


뭐지? 이중 무엇이 페로를 신경쓰이게 했을까. 점심을 먹고 나른해져서인지 생각만큼 머리회전이 되질 않는다.


너무 길게 침묵을 했는지, 페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내 집중을 끊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아, 페로가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저도 사람처럼 체온이 있으니까요."


"페로는 사람보다는 귀여운 고양이 같지만 말이야."


사실을 말하기는 했다. 페로는 고양이의 유전자를 넣어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래서인지 고양이와 같은 습성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없을 때 책상 위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려 있거나, 몰래 한쪽 벽 구석에다 단분자 클로로 스크래치를 내는 거 말이지.


한 번은 침대 벽에다가 손톱 자국을 내서 방 청소를 하러 들어왔던 콘스탄챠가 그걸 보고 격렬한 행위는 삼가달라고 말한 것에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주인님은 고양이가 더 좋으신가요?"


"으음, 모르겠어. 나는 오르카호 밖을 자주 벗어난 적이 없잖아. 고양이라는 것도 부대원들이 보낸 영상사진이나,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옛날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보기만 했으니까."


"사진으로 본 고양이는 어떠셨나요?"


"귀여웠어."


"그렇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페로가 원하는 말이 아니란 걸 깨닫고 속이 더부룩해짐을 느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은 느꼈지만,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답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으으, 돌아라 머리야. 자라나라 머리머리. 얄리얄리 얄라숑. 머릿속으로 아무렇게나 잡소리를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던 나는, 페로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심플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의자의 팔걸이에 걸쳤던 손을 페로의 옆구리로 옮기자 힛, 하고 놀란 숨소리를 내뱉는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섬세하고 신중하게, 그리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손가락을 놀려 그녀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메이드복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갈비뼈의 계단을 딛고 천천히 올라가는 손가락에 간지럽단 듯이 페로는 몸을 좌우로 배배 꼬았지만, 거절의 의사를 보이진 않았다. 곤란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에 웃음으로 화답해주며, 나는 목적지인 그녀의 양 어깨 사이로 부드럽게 손을 끼웠다.


"주, 주인님. 아직 낮이에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니야. 그런 거. 나도 때와 장소는 가려."


"그렇다면 이 행동은... 무슨 의미이신가요?"


"삼 일 전에 네트워크 검색하던 날 같이 봤었지?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이미지 중에 몸을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고양이가 있었잖아."


나는 고양이라는 생물이 그렇게 몸이 긴 지는 몰랐다. 페로도 어깨에 손을 끼워서 잡아당기면 옆구리가 쭈욱 늘어나지 않을까? 하늘로 쑥쑥 자라올라서 구름을 뚫고 떠오른 롱-페로를 떠올리자니 그만 실소가 나와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에 안 들었는지 샐쭉한 얼굴로 어깨에 끼워진 손을 밀어내었다.


"저는 치즈가 아니에요. 늘어나지 않는 걸요."


"그래도 치즈는 좋아하잖아."


"치즈가 아니라 우유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리는 행위는 철충과 싸우는 현 상황에서는 사치일 뿐이니까요."


"우유로 만드는 게 치즈인데?"


"우유는 치즈와 달리 하얗고 느끼하지 않죠. 그리고 비타민B와 칼슘이 풍부해요."


"페로도 우유가 완전식품이라고 생각해?"


"저는 우유 한 병만 마셔도 삼일 밤낮으로 전투를 치를 수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건 발키리라도 못 할 걸..."


페로와 잡담을 나누면서 즐거워진 나는 어느새 업무를 제쳐두고 그녀의 양 팔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말했다시피 이 시간부터 뭘 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항상 가까이에서 나를 보좌하던 페로라는 바이오로이드가, 나에게 늘 도움의 손길을 내주던 그녀가 품은 고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


천 너머로 가녀린 여성의 팔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가냘프게 느껴지는 팔이, 사실은 금속덩어리 철충을 찢어발기거나 쳐날릴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페로의 능력을 모든 면에서 당연하게 느끼며 받아들이고 있다. 팔을 잘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들어올리자, 페로는 거부하는 기색 없이 내 팔이 움직이는대로 몸을 맡겼다. 오른손에 끼워진 단분자 클로의 새카만 장갑 표면에 무수히 난 흠집들이 보인다. 나는 최대한 자상하게 목소리를 다듬었다.


"페로. 무슨 고민이 있으면 말해줘."


"고민 같은 건..."


"너와 내 사이잖아.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니면 다른 자매들과 무슨 일이 생겼던 거야?"


"......"


페로는 뒤통수를 보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모니터로 어렴풋하게 얼굴이 비쳐보였지만, 그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걸까? 그녀의 팔을 모아서 무릎 위로 겹쳐주자,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모습이 되었다. 그에 호응하듯 페로의 꼬리가 부드럽게 내 턱을 쓸어올렸다. 신기하게도 페로를 무릎 위에 앉혀서 안으면, 딱 맞는 구멍에 블럭을 끼워넣은 것처럼 내 품에 쏙 들어맞는다.


정작 페로 본인은 부끄러워서 몇 번씩 굳어버리고는 했었지만, 이내 익숙해지면서도 내 무릎에 앉으려 들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원래 섬세하고, 도도한 존재니까. 오늘 나에게 와서 무릎 위에 앉은 건 그만큼 애정을 원한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단순히 애정을 준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무엇이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걸까?


잠깐동안 침묵하던 페로가 내놓은 답은, 내 팔을 살짝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으로 올려다보게 된 구도에서, 내 머리를 덮은 그녀의 그림자 사이로 사파이어와 호박으로 이루어진 보석 같은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 눈길 속에서 나는 흔들림을 읽었다.


"주인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스케줄에 맞춰서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몸이 피곤해졌나봐요. 응석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응? 아니야. 왜 그게 죄송해."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오후 3시에 트리아이나가 해저 탐사를 마치고 귀환할 예정이니, 그때 다시 찾아뵙도록 할게요."


그 말과 함께 페로는 사뿐사뿐 걸어서 함장실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페로가 남긴 것이라고는 허공에 은은히 풍기는 레몬그라스의 향기 뿐이었다.


아, 망할. 이렇게 끝나버리면 찝찝해서 업무에 집중이 안돼는데. 하지만 페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였고. 다시 만나면 아까 전까지 보여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원래의 차분하고 깐깐한 인상으로 언제 그랬냐는듯 업무를 보려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까. 침대 위에서 물어볼까? 아니야. 그건 너무 저급해.


"주인님. 계세요?"


달칵 거리면서 천장에 왠 사각형의 금이 생긴다. 뚜껑을 열고는 바닥으로 뛰어내린 인물은 내가 잘 아는 바이오로이드였다.


"다음부터는 문으로 다녀주면 안될까. 리리스."


"어머. 마음에 안 드신 거에요? 이래뵈도 주인님 방과 직통으로 연결된 시크릿 루트인데."


"알려줘서 고마워. 포츈을 불러서 위쪽 통로를 메꿔야겠어."


"너무해!"


지극히 당연한 조치인데도 블랙 리리스는 양 손을 꼭 쥐고 힘차게 허벅지로 내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페로와 비슷한 은발 머리의 이 엉뚱한 여성은 나를 경호하는 팀의 대장직을 수행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행을 곧잘 선보이고는 하는 바이오로이드였다.


업무 데스크 위에 두 팔을 올리고 깍지를 끼며 근엄한 얼굴로 쳐다보는 나에게 리리스는 몸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사실은, 아까 주인님과 페로가 하는 얘기를 모두 듣고 있었어요."


"아니 그걸 당당하게... 명색이 경호대장이면 품위를 지켜줘."


"저와 주인님 사이인 걸요? 단 둘일 때가 아니면 이런 모습은 보여드리지 않아요."


"이 시간부로 내 앞에서는 본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명령한다."


"아아, 그렇게 단호하게...!"


살짝 상처 받은 표정을 하다가, 곧 흥분된 표정으로 승화시켜버린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페로가 왜 저러는 지 저는 알고 있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연히 궁금하지. 어째서야?"


리리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몸을 옆으로 살짝 틀었다. 다리를 앞뒤로 교차한 채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가린 뒤 요염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나는 살짝 피곤함을 느꼈다. 저게 무슨 의미인 지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요망한 경호원 같으니...


"섬겨야 하는 주인을 상대로 자꾸 거래를 하려 드는 모습은 좋지 않아. 리리스."


"주인님을 사모하니까 이러는 거랍니다? 저는 애정을 받고, 주인님은 정보를 얻고. 어려운 게 아닌 걸요."


"내가 길을 잘못 들였구만..."


나는 모니터 앞에 손을 숨기고 조그만 스위치를 만지작 거렸다. 리리스의 몸에는 유사 시 충격을 가하는 제압용 초커와 구속구가 채워져 있다. 듣기로는 리리스 모델을 출시하기 전 생긴 사고 때문에 유사 시를 대비하여 착용시킨 거라고 하던데... 하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이 스위치를 사용한 적이 없다.


나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장기말처럼 다루기 보다는, 함께 의지하고 헤쳐나갈 동료로서 대하고 싶으니까. 그건 툭 하면 내 속을 썩히게 만드는 눈 앞의 사고뭉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허용을 해준 것은, 리리스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만 골라서 이런 장난을 치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거래가 없단 걸 명심해."


"와아~"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건지, 리리스는 행복한 얼굴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약 삼십 분 뒤, 내 밑에서 가쁘게 숨을 내쉬던 리리스는 그제서야 정보를 토해냈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