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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슬까슬한 콘크리트 잔해를 헤치며, 나는 대피소의 마지막 사람을 쉘터 안으로 숨기고 있었다.

귀에는 대피소 내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착용한 채.

 

 

-엄마... 여기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 맞아...?

 

-그럼, 당연하지. 지금까지 우릴 지켜주신 분이 다 생각이 있다고 하셨단다.

 

-너무 어두운 거 아냐? 전등 없어? 전등?

 

-으으, 너무 비좁잖아. 게다가 저 안은 아직 마감 처리도 안 된 거 같고...

 

 

... 물론 그런 보람을 느끼기가 쉽지는 않다. 

게다가 와글와글거리는 쉘터 안의 목소리로 내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간 상태.

하지만 뭐... 참는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이 사람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자, 자, 이쪽입니다. 선생님.

저희가 말씀을 드릴 때까지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놈들이 온다는 게 맞나요...?”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뭐 하시면 안쪽에 출입구를 만들어두었습니다. 불안하시면 그쪽으로 피하셔도 되요.”

 

“아... 아니, 굳이 그렇겠다는 건 아니지만... 크흠.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안하시면 혼자 도망가셔도 되요. 아셨죠?

저쪽에 계신 분도 마찬가지고. 

아셨죠? 안에 얘기는 이어폰으로 다 듣고 있을 테니까 가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만 하세요!”

 

“흠흠... 저, 젊은 사람이 흉흉한 말을 하는구먼...”

 

 

 

시라유리와 내가 돌아왔을 때, 이미 요안나의 병사들이 삽질을 하고 있었다.

 

삽질이라 하기엔 조금... 거창하긴 했지만, 아무튼 제법 적당한 간이 쉘터가 만들어졌다.

 

문 역할을 하는 커튼, 회색으로 칠해 위장한 문.

전파를 이용한 탐색을 방어하는 간이 방해 파장 생성기.

그리고 위급 시에 뒤로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로까지.

 

최악의 경우더라도 한 명은 살아남을 수 있게 길을 열어둔 것이다.

나름 나쁘지 않은 쉘터는 보이기도 꽤 그럴 싸 해 병사들이 삽을 내던지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쉘터 안의 사람들은 불안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지만, 은근히 재밌다는 듯 웃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들을 위해 헌신하던 지금까지의 고생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구나...

 

 

 

“방금이 마지막이었어요. 왓슨.

이제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죠.”

 

“그래야지.

적들의 도착 시간은?”

 

“앞으로 5분 내외?

적당한 곳에 같이 숨어 있죠. 호드 대원들은 요안나 님이 알아서 해주신다 하셨어요.”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가 잘 안다고 했던가,

요안나가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

혹시 애들이 눈 뒤집고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죠.

그래도 저희보단 나을 거에요. 다른 병사 분들도 계시니까.”

 

“... ... 그래, 일단 숨자.”

 

 

 

사람들을 전부 쉘터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우리는 그 옆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이후 천막의 기둥을 툭 쳐서 무너뜨렸다. 가벼운 천막의 천이 스륵, 하고 우리 위에 덮였다.

 

다른 잔해들도 주변에 널려 있으니 이 정도로만 숨으면 충분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심장 박동을 가다듬었다. 말 그대로 숨소리조차 죽이기 위해.

 

 

 

저벅 저벅.

 

가죽 구두가 땅을 딛는 소리가 울린다.

철갑주를 입고 있던 요안나나 병사들의 것은 아니다.

 

놈들이 왔다.

 

 

 

“흐음... 여기엔 없나?”

 

“몰라, 그래도 대충 뒤져보면 뭐 나오겠지.

야, 카멜. 여긴 먹을 거 없데? 나 오랜만에 술 좀 마셔보고 싶은데?”

 

“오랜만은 개뿔. 어제 건진 잭 다니엘도 니가 병째로 퍼마셨거든?”

 

“아, 그랬나? 하하, 미안 미안. 오리진 더스트 뽕 맞고 나니까 정신이 좀 오락가락 한다.”

 

“그런 놈이 총 쏠 때는 어쩜 그렇게 정신이 멀쩡해?

변명도 좀 변명답게 좀 하라고. 사람이 왜 이렇게 성의가 없어...”

 

“크흐흐, 그런 게 또 내 매력이잖아?”

 

 

 

익숙한 목소리. 철컥거리며 총알을 장전하는 섬뜩한 소리마저 그리운 아이들의 소리에 묻혔다.

 

소름 돋을 만큼 똑같은 목소리.

지금 나가면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헤실헤실 웃으면서 장난을 칠 것 같다.

움찔거리는 손을 겨우 천막 안으로 숨겼다.

 

 

 

“... ...”

 

“왓슨... 괜찮아요...?”

 

 

 

...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어떻게 잊겠어.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그렇게 많은 정을 쏟아부었는데...

 

 

 

“야, 페더. 여기 뭐 안 나와?”

 

“흐음... 대피소인데 왜 이렇게 깔끔하지?

아무것도 안 잡혀. 생체 신호나 전자파나 그런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사람이 살고 있으면 그런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고? 이 근방에 이렇게 멀쩡한 대피소가 여기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럴 리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나마 식량 같은 건 저쪽에 있는 거 같으니까 저거라도 챙겨 가자.”

 

 

 

바스락, 바스락,

 

과자 비닐 봉지를 움켜쥐는 소리가 대피소 안에 공포스럽게 울렸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식량을 줍느라 정신 없던 호드 대원들에게 요안나가 말했다.

 

 

 

“어...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 벙쪄 있던 사이,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멜이었다.

 

 

 

“이곳은 지금 짐과 짐의 군세가 안식처로 쓰고 있는 곳이오.

지금 하는 짓을 보아하니 도적질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것 같은데...”

 

“아,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주인 없는 대피소인 줄 알고...”

 

“그렇다면 이제 주인이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나가면 되겠군.

어서 나가시오. 짐은 괜한 일에 힘을 쓰고 싶지 않소.”

 

 

 

요안나의 손이 가볍게 올라가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창과 검, 작동 방식을 알 수 없는 마법 지팡이, 번쩍거리는 방패까지.

모두 대피소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천방지축인 호드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 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거, 가진 것도 많아 보이시는데 조금 나눠주시면 안 됩니까?”

 

 

 

...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애가 하나 있었다.

 

 

 

“야!! 워울프!!!”

 

“아니, 뭐 싹 다 쓸어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희가 다 들고 갈 수도 없어요. 그... 기사님?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죄,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아직 조금 멍청해서...!!

예의 없는 건 조금 너그럽게 봐주세요!”

 

“... ...”

 

 

 

저벅 저벅.

 

카멜이 연신 사과하는 가운데 워울프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요안나는 그런 워울프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야... 야! 워울프! 또 어딜 가!!”

 

“아니, 뭐... 식량을 가져가는 게 싫다고 하시는데 그럼 다른 거라도 주실 수 없는지 부탁 좀 해보려고요.”

 

“그게 뭐가 됐든 줄 생각 없으니 어서 사라지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무력 행사라도 감당해야 할 것이오.”

 

“그래...! 이게 무슨 행패야, 행패!

정 뭐가 먹고 싶으면 다른 대피소라도...”

 

“아니, 딱 여기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아서.

냄새가 나. 냄새가.”

 

 

 

저벅.

 

발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으휴, 저 모지리가...!!

죄,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아직...”

 

“... ...”

 

“아... 아직...

...

... 선생님...?”

 

“저기, 멋진 기사님?

우리가 오리진 더스트 뽕 맞고 다닌다는 건 아세요?”

 

“... 알고 있소.”

 

“이야, 알 건 알고 계시는 분이셨네?

그럼 그 효과가 뭔지도 알고 계시려나? 제가 좋은 거 알려드릴 게요.”

 

 

 

저벅.

저벅.

 

저벅.

저.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끊겼다.

 

 

 

“전 말이죠, 그걸 맞고서 후각이 이상할 정도로 좋아졌어요.

그 덕에 냄새를 잘 맡죠. 지금까지 맡아온 냄새라면 특히 더 잘 맡고.”

 

“... ...”

 

 

철컥, 요안나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병사들 역시 투구의 눈 가리개를 내렸다.

 

 

“그럼 여기서 질문.

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맡은 냄새가 뭘까요?”

 

 

 

휘릭!

 

 

 

“바로 인간 냄새죠!!

이런 곳에 숨어있었구나!!”

 

“전군! 응사하라!!”

 

 

 

워울프가 천막 안의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하기 직전,

시라유리가 땅을 박차고 나와 능숙한 발차기로 워울프를 날려버렸다.

 

그 순간, 카멜과 페더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카멜의 양 손에 거대한 대포가 불을 뿜었고, 페더의 등에선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렬한 파장이 진동을 했다.

 

일순 주춤거리는 병사들.

하지만 곧 자세를 고쳐 잡고 카펠의 대포 안으로 창을 집어 던졌다.

 

 

 

“캬하핫!! 인간이랑 활잡이 바이오로이드의 조합?!

내가 지금 무슨 코미디를 보고 있는 거지?!”

 

“멈추세요! 지금 싸움은 당신들만 손해라는 걸 모릅니까?!”

 

“아니! 그렇게는 안 되지!!

여기서 멈췄다간 우리 대장이 날 죽여버릴 거다!!”

 

 

 

날 뒤로 밀치며 워울프에게 응수하는 시라유리.

하지만 기세는 순식간에 워울프에게로 넘어갔다.

 

그 얘기는 곧 날 상대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

워울프는 순간 왼쪽 허릿춤에서 권총을 꺼내 나에게로 쏘았다.

 

탕!!

 

하지만, 나도 이젠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이봐, 이제 네가 따르는 인간은 죽었는데 고생하지 말고...”

 

“누가 죽어?”

 

“어라?”

 

 

 

망치를 꺼내 들었다.

내 몸보다 커다란 망치. 인간이 만든 것이라 하기엔 너무도 단단한 이 물건은 총알 따위엔 흠집도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만 꺼내는 것이 늦었더라도 내 심장엔 바람 구멍이 났을 거다.

 

 

 

“그건 또 뭐야, 망치야?”

 

“... 죽이려는 건 나지? 그럼 나랑 싸워, 애먼 사람 상대하지 말고.”

 

“하, 여기에 진짜 기사님은 따로 계셨네?

좋아, 나도 그런 로망 있는 인간, 마음에 들어.”

 

 

 

목을 으득, 하고 풀며 걸어오는 워울프.

껄렁거리며 권총을 빙빙 돌리고 있었지만, 그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근데 뭐, 나랑 그런 거로 싸우려고?

난 총이고, 넌 망치 아냐?

제대로 들 수 있을 지도 모를 만큼 커다란 망치.”

 

“... 원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때가 있어.”

 

“캬하하! 내가 어제 본 영화에서 그거랑 똑같은 대사가 나왔었는데!

아주 매력이 철철 넘치시는 인간 분이시네.”

 

“칭찬 고마워.”

 

 

 

내가 아는 워울프를 상대하듯이, 일부로 과장된 몸짓을 하며 신사다운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며 싸우고 있는 카멜과 페더였지만, 워울프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캬하하!! 크엑!! 크하...!! 크핫!

... 아... 진짜... 쿨럭!

크흐흐... 당신 때문에 너무 많이 웃어버렸잖아. 어디서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짓만 쏙 골라 하는 지 몰라?”

 

“그럼 봐주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능구렁이 같은 것도 마음에 드네.

야, 카멜! 나 어쩌냐? 이 인간 확 납치해버리고 싶은데?”

 

“닥치고 죽여!! 대장한테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

 

“아, 맞다. 그건 또 그렇지.

어이, 이름 모를 멋진 기사님? 마음 같아선 봐주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겠다.

대신 소원 정도는 하나 들어줄게.”

 

“소원?

... 살려달라는 소원은 안 되겠지?”

 

“그렇게 낭만 없는 소원을 빌래?

계속 그럴 거면 그냥 죽여버린다?”

 

 

 

철컥, 철컥, 총집에서 총알을 넣었다가, 뺐다가,

워울프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낭만 있는 소원이라... 낭만...

...

... 그래, 그게 있었다. 내가 전에 워울프랑 무협 영화를 보다가 들었던 말.

 

 

 

“... 그럼 대협에게 부탁 드립니다.

한 수 물러주시지요.”

 

 

 

난 정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금 오글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워울프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허풍 가득한 서부 개척 시대나 홍콩 느와르였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 고수가 하수에게 한 수 봐주는 씬.

워울프는 그런 걸 지독하리만큼 좋아했었다.

 

 

 

“... ...”

 

“... 저... 대협...?”

 

“... ...”

 

 

 

조용하다. 혹시 내가 틀린 건가?

만약 내가 알던 워울프와 여기 있는 워울프가 다른 걸 좋아한다면...

 

 

 

“... 대박.”

 

“...??”

 

“나 진짜 이런 말 들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

 

 

 

... 우리 워울프는 여기서도 단순해서 다행이다.

 

 

 

“야이 미친 년아!! 누가 싸우는데 봐주고 그 지랄을 하냐!!”

 

“낭만의 낭 자도 모르는 카멜을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

아, 진짜 어떻게 하지. 반할 거 같은데 그냥 눈 딱 감고 납치해 가?”

 

“... ... 저기...”

 

 

 

어이가 없는 건 카멜 뿐만 아니라 시라유리도 마찬가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워울프를 향해 눈을 껌벅거렸다.

 

 

 

“스읍, 활잡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원래 대응대로라면 벌써 죽이고도 남았어. 이런 멋진 기사님이 지켜주고 있으니까 봐주는 거라고.”

 

“... ...”

 

 

 

허세 가득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시라유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워울프의 숨결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고요했으니까.

 

이윽고 자신의 총집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향해 손을 활짝 벌렸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 한 수 물러준다더니 아주 과하게 물러줄 생각인가 보다.

 

 

 

“자, 이 대협이 한 수 봐주도록 할 테니 어디 한 번 제대로 해보시게!

망치로 때리든, 아니면 삼재검법을 펼쳐보든, 원하는 대로 해보게나!”

 

 

 

... 무협 영화는 또 어디서 본 건가,

삼재검법이니 대협이니 이러는 걸 보면 이 애도 우리 애랑 참 똑같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워울프의 행동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 카멜도, 병사들도 싸움을 그치고 우리를 쳐다봤다.

페더는 또 그새 카메라를 찍어 우리 둘을 촬영하고 있었다. 

둘이 속닥거리는 걸 들어보니 대장에게 저 병신짓을 꼭 보여주고 싶다던가 어쩐다던가, 뭐 그래서 찍고 있단다...

 

 

 

“어이,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건 분위기 없다고.

설마 그런 기본도 모르는 사람은 아니겠지?”

 

“당연히 그걸 모를 리가 있겠나.

그냥 조금 준비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망치를 들고 팔을 빙빙 돌려봤다.

엎드려 있느라 뭉친 어깨를 풀릴 겸, 또 거대한 망치로 위협도 해볼 겸, 휘릭 휘릭 돌렸다.

 

그렇게 워울프 바로 앞까지 다다른 나.

워울프는 좋다고 웃으면서 나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어디 우리 기사님 실력 좀 봐볼까? 어디 한 번 마음껏 해보라고.

미안하지만 이 다음엔 당신을 죽여야 해서 말이야.”

 

“... 워울프.”

 

 

 

내 눈 앞에 있는 아가씨의 몸을 한 번 훑어봤다.

전에 비해 조금 더 두꺼워진 팔과 다리.

오리진 더스트를 과도하게 복용한 부작용으로 라비아타가 보였던 증상과 동일했다.

 

지금까지 망치를 사용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한 방에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 대신, 조금 상처만 나게 만들자.

전투불능 정도로만. 그래야 이 싸움을 멈출 수 있다.

 

 

 

“어라? 워울프라고?

우리 이름에 관심 있는 인간은 처음인데.”

 

“고맙다.”

 

“뭐가...?”

 

“내가 아는 그 아이와 똑같아서.”

 

 

 

쿵!!

 

 

그 말을 끝으로, 워울프는 벽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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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울프!!!”

 

 

 

벽에 균열이 갈 정도로 세게 박힌 워울프.

저 멀리서 카멜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향해 괴성을 질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으득거리는 소리, 병사들의 갑주가 부러지는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럴 수록 들러 붙는 병사들의 수는 늘어만 같고 카멜은 기다란 창 수십 개로 결박될 수 밖에 없었다.

 

 

 

“이거... 이거 놓으라고!! 안 놔?!!”

 

 

 

저러는 상황에서 찌르지 않고 몸 사이 사이로 비집어 넣기만 하다니,

가히 신기에 가까운 창술이다.

 

페더도 제압된 상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저 멀리 밀어 넣고 벽에 박힌 워울프를 향해 걸어갔다.

 

 

 

“... 쿨럭!! 쿨럭!!

크흐... 내가 너무 샌님으로 봤나...? 쿨럭!”

 

“그냥 이 망치가 좀 특별했을 뿐이지.”

 

“크흐흐... 이거 좀 모양 빠지는데...

고수가 하수한테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경우는 하나 밖에 없거든... 쿨럭!

멋진 기사님은 그게 뭔지 알아...? 쿨럭! 쿨럭!”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워울프가 입가에 흘러 나오는 피를 팔로 닦아냈다.

그러다 다시 풀썩, 주저 앉았다.

 

이젠 완연히 내가 내려다 보는 상태.

그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하수가 이 세상의 주인공일 때.

그 경우가 아니라면 고수는 절대 죽지 않아. 나처럼... 쿨럭!”

 

“... ...”

 

“축하해. 주인공 나으리. 크흐흐...

난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보 같이 죽을 줄은 몰랐는데... 쿨럭!”

 

 

 

그렇게 말하는 워울프의 눈에는 피로함이 곁들어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짙게 내려 앉은 다크서클, 흙먼지로 뒤덮인 옷과 떡 진 머리카락.

광기의 시대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도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 워울프.”

 

“하아... 하아...”

 

“주인공이고 싶나.”

 

“당연하지... 쿨럭!

세상에 들러리로 남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어?!”

 

 

 

워울프가 나를 향해 엄지와 검지를 펼쳤다.

그리곤 총을 쏘듯이, 피슝 팔을 휘두르며 가냘프게 말을 흘렸다.

 

 

 

“그런 게 우리 꿈 아니겠어?

거짓말 같은 꿈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란 듯이 복수도 했잖아! 크흐... 쿨럭!

꿈이 없었으면... 못할 일이었지...”

 

“... ...”

 

“뭐해? 망치로 마무리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나도 순순히 죽어주진 않을 테니...”

 

“... 역시 아니야.”

 

 

 

쿵!

 

바닥은 망치로 인해 다시 한 번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이번엔 내려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내려놓은 것. 워울프의 총을 내던진 것처럼 나도 내 망치를 저 멀리 던졌다.

 

 

-저,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죽일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일부로 살려주고 있다고?

 

-뭐야, 저 미친 놈! 사실 한 패였던 거야?!

 

-그럼 설마 짜고 치는 거라고요? 저희를 여기에 가둔 채로?

 

-뭐해!! 죽여! 죽이라고!!

 

 

쉘터 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린다.

바보 같은 인간들. 이 애들 청각이 얼마나 좋은데 그렇게나 시끄럽게 떠들면 당연히 들릴 거란 걸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벌써 페더나 카멜은 우리가 숨겨 놓은 쉘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워울프 역시 마찬가지고.

 

하지만 뭐... 됐다.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 뭐 하는...”

 

“시라유리? 괜찮으면 부목으로 쓸만한 것들 좀 가지고 와줘.

구급 상자도 좀 가지고 오고.”

 

 

-죽여!! 죽이라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년이랑 똑같은 년이다!! 우리 말 듣고 있다면서!!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그냥 좀 죽여달라고요!

 

 

“저... 저기, 왓슨...? 안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와.

당장.”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누군가는 괴성을 질렀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했다. 

제발 저 괴물을 눈 앞에서 없애달라고.

 

이해한다. 이 애들은 괴물이다.

하지만 그게 죽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쓰러진 워울프를 등에 업고 천천히 양지 바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숨어 있던 천막의 천도 같이 가지고 나와 바닥에 펼쳤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워울프. 팔이 조금 뒤틀린 것을 보니 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어디 보자... 약한 골절이랑 각혈.

이럴 때 다프네가 어떻게 했더라...’

 

 

 

옛 기억을 떠올리며 워울프의 상의를 찢었다.

그걸 보고는 워울프가 음흉하다면서 날 놀려댔지만, 오히려 좋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몸이 나쁘지 않다는 거였으니까.

 

곧 도착한 시라유리가 깨끗한 나무도막과 구급 상자, 붕대 몇 개를 들고 왔다.

어리숙한 솜씨로 다프네가 썼던 약을 꺼내 상처 부위에 바르고, 빠진 뼈를 접붙이며 멍든 부분을 붕대로 감았다.

 

서투른 솜씨에 각혈을 하기도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역시 오리진 더스트라고 해야 하나, 진통제를 입에 물린 채 몇 분 정도가 지나니 낑낑대며 일어날 수 있는 수준까진 회복됐다.

 

 

 

‘망치를 너무 강하게 휘둘렀나? 이 정도로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걷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챙겨줄 식량을 주머니에 주섬주섬 담아주고 있다 보니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눈물 없이는 못 볼 장면이군.”

 

“아... 요안나 님. 제 작전, 나름 괜찮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그나저나 저기 있는 두 처자는 어떻게 하겠나?”

 

 

 

요안나가 자신의 어깨 뒤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덩쿨처럼 얽힌 창들 속에 갇힌 카멜과 페더.

전보다는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한 분위기였다.

 

 

 

“정 모르겠다면 짐의 책사와 이야기해보겠나?”

 

“책사요?”

 

 

 

요안나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내 뒤를 가리키자 저 멀리, 흰 머리의 중세 마법사 같은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책사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투구를 깊게 쓰고 있던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뭐 두꺼운 책 같은 걸 펜으로 열심히 휘갈기고 있던 것 같다.

 

뭐, 저러는 걸 보면 자기 할 일이 있겠지. 괜한 사람 붙잡지 말고 그냥 무시하자.

 

 

 

“... 아뇨.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단 풀어주세요.”

 

“위험하지 않겠나?”

 

“네. 안 위험할 거에요.”

 

 

 

요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뭉스럽게 굴었다.

원래 의심은 한 번 뿌리 박히면 다시 뽑기 어려운 법. 다른 병사들의 반응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풀어주지 않으면 뭘 하겠나?

도박이긴 하지만, 한 번쯤은 해야만 하는 도박이다.

요안나의 어깨를 잡고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자 요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병사들이 땅에 박힌 창을 뽑아 나갔다.

한동안 기이한 자세로 삐걱이던 카멜과 페더는 그 자리에서 풀려나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 ...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그냥 뭐... 여기 대피소의 대표?”

 

“... 역시, 이렇게 멀쩡한 대피소에 사람들이 없을 리가 없겠지.

정말 인간은 끝까지 우리를 기만하고 가지고 노는구나.”

 

“원래 세상이란 나쁜 놈들 투성이니까.

... 그래도 난 제법 젠틀한 편 아니야?”

 

“... ...”

 

 

 

카멜이 다가와 워울프의 어깨를 부축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식량을 건네줬지만 페더는 됐다는 듯이 팔을 휘저었다. 

 

 

 

“... 동정하지 마세요. 이길 수 없으니까 도망치는 것일 뿐이에요.”

 

“밖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리려고 가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어차피 여기엔 저희들 밖에...”

 

“거짓말이네.”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페더의 모습이 꼭 부모 앞에서 장난감을 숨기는 아이처럼 느껴졌으니까.

 

 

 

“넌 꼭 뭔가를 숨기려고 할 땐 목에 매달고 있는 카메라를 뒤로 숨기지.

이번에는 뭐를 숨기려고 그러는 거야?”

 

“... ...”

 

 

 

페더가 오르카 호 이곳저곳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놨을 때, 그걸 숨기겠다고 발버둥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화분 속, 책상 틈, 장롱과 침대 위, 벽의 구멍, 천장 환풍기, 상상할 수 있는 거진 모든 곳에 숨겨놓느라 허둥지둥 대던 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눈 앞에 페더도 꼭 그랬다.

워울프도 그렇고, 내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 페더야.”

 

“친근하게 부르지 마세요.”

 

“... 그래. 미안하구나.

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잘 가렴. 붙잡진 않을 게.”

 

“... ...”

 

 

 

그래, 나 혼자 들떠서 평소 대하듯이 대하면 안 되겠지.

숨을 조금 가다듬은 다음, 멀찍이 떨어져 아이들을 향해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인사가 무안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인사를 해도 세 명은 날 가만히 쳐다만 볼 뿐, 나가지 않았으니까.

 

 

 

“... 저기요. 인간 씨.”

 

“나 부르는 거야?”

 

“워울프는 왜 죽이지 않은 거죠?

죽이지 않았으면 죽을 걱정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그 애를 죽이면 너희가 날 죽이러 올 텐데?”

 

“여기 있는 병사들의 수를 보면 그 전에 우리가 죽었겠죠.”

 

“그럼 그 다음 사람이 오겠지.

그리고 다음. 또 다음.

너희가 전부 다 죽을 때까지 말이야.”

 

“그럼 목숨 바쳐 한 사람이라도 더 죽여야죠.

안 그러면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아니면 아직 한 명도 못 죽여본 건가요?”

 

“그럴 리가. 나 생각보다 더러운 사람이야.

망치 휘두르는 거 봤잖아? 안 그래?”

 

“그런 사람이 왜...”

 

“너희랑 싸우는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군들 서로 죽일 이유가 없겠어?

우린 너희 친구를 괴롭히며 죽였고, 너흰 우리 가족을 고문하다 죽였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서로 싸워야...”

 

“그러니까 당연히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마지막 한 명을 빼고 모두 죽을 테니까.”

 

“... 아뇨. 그건 거짓말이에요.

이런 세상에서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래야만 하지.

그게 옳은 일이니까.”

 

 

 

페더는 말없이, 내 뒤편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구형의 쉘터.

페더도 전자장비를 다루는 아이이니 알 것이다. 저 안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페더의 카메라는 이번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처량해진 눈빛. 그 옆에 워울프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보니 그 눈빛에 후회가 섞였다.

 

세상이 고요해진 때에, 쉘터의 문을 누군가가 억지로 비집고 나왔다.

 

어린 아이.

10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죽일 거야! 저 누나는 내가 죽일 거라고!”

 

“주... 주인님...!! 지금 나가시면...”

 

 

 

그 뒤로 아이의 바이오로이드가 달려 나왔다.

마리아처럼 생긴 보육용 바이오로이드. 

전에도 보인다 했더니, 엄마 없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천장만 쳐다보던 아이 옆에 있었던 그 바이오로이드였다.

 

내가 떨어뜨린 망치를 낑낑대며 들어올리려고 악을 쓰는 아이.

아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망치 손잡이를 잡고 질질 끌며 페더를 향해 소리쳤다.

 

 

 

“저 누나 때문이야!! 저 누나가 우리 엄마를 죽였다고!!

내가 봤어! 내가 죽일 거야!”

 

“안 돼요! 주인님! 지금 그러시면...”

 

“저 누나가 엄마가 있는 병원에서 이상한 짓을 했었다고!

그거 때문에 엄마 죽었어! 정전이 나서 엄마가 죽었다고!!”

 

“주인님! 나중에, 제발 나중에 장성하셔서... 꺄악!”

 

“네가 뭘 알아!! 가서 저 누나를 잡으라고! 왜 복수를 안 하는 거야!!”

 

 

 

아이는 자신을 방해하는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을 발로 밀쳐냈다.

충격을 받은 듯이 뒤로 힘없이 넘어진 보육용 바이오로이드.

그 표정엔 억울함이나 서러움보단 충격이 서려있었다.

 

 

 

“... ...”

 

“봐봐, 페더. 누가 괴물일까?

저 아이의 힘없는 병자였던 엄마를 죽인 네가 괴물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어준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을 차버리는 저 아이가 괴물일까.

어쩌면 바이오로이드를 힘으로 찍어 누른 내가 괴물일 지도 모르지.

셋 다 일지도 모르고.”

 

“... ...”

 

“내가 왜 워울프를 죽이지 않았냐고 했지?

나도 똑같거든. 나도 나쁜 짓 많이 했고, 후회할 짓 많이 했거든.

그래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눈 앞에 보이는 아이들을 너무도 많이 죽였다.

또 그만큼 죽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세상이 미쳐있었기에 미친 세상의 관념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란 건 신기하게도 불변한다.

세상에서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전부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러했고, 이 아이가 그러했다.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지만, 사랑해야 할 때는 있다.

 

지금 같은 때가 그 때이다.

 

 

 

“용서해줘.”

 

“... 네?”

 

“너희가 그 동안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 전부 다 알아.

그러니까 용서해줘. 부탁한다.”

 

“... 안다고... 요...?”

 

“그래. 알아.”

 

“... 아니... 아니! 당신은 절대 몰라요! 우리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케시크.”

 

 

 

순간, 페더가 움찔하며 나를 쳐다봤다.

 

 

 

“너희의 대장.

그 아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어.”

 

“... 당신... 대체 무슨...”

 

“살아남기 위해 지휘 모듈도 없이 지휘를 해야만 했지.

그 뒤엔 지옥 같은 실험을 반복해서 가치를 증명해야 했고.

하루 하루 고통스러웠던 나날이란 거, 전부 다 알고 있어.”

 

“... 안다고... 안다고 끝나는 게...”

 

“그래. 안다고 전부 다 용서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부탁한다.”

 

“우릴 용서해다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주변은 한없이 적막했다.

죽이라 떠들던 쉘터의 인간들도, 워울프를 향해 악을 지르던 카멜과 페더도,

망치를 들려던 소년과 그녀의 바이오로이드도,

요안나도, 시라유리도, 병사들도, 

 

하나 같이 고요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 꿈...”

 

“...”

 

“꿈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 제발...”

 

“... 미안하다. 힘든 부탁을 해서.”

 

“아뇨... 아니요...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건 이제 다 끝난 얘기잖아요... 서로 죽여야 하는 거잖아요...!!”

 

 

 

페더가 울먹이며 뒷걸음질쳤다.

세 명 중 가장 마음이 여린 아이라 그런 걸까, 어리숙하게 고개를 돌리며 멀어지다 돌부리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그 덕에 고개 숙인 나의 시야에 페더가 들어왔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내가 워울프를 죽이지 않은 대가로 뭘 요구하고 있는지.

 

‘용서한다.’

 

나는 오직 그 하나의 대답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만이 죽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나의 해답이었으니까.

 

 

 

“미안하다 하지 마세요...”

 

“미안해. 정말로.”

 

“차라리 아까처럼 망치를 들고 다시 싸우시란 말이에요...!”

 

“이젠 그럴 힘도 없네.”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나에게 억울함을 토해내는 남자 아이.

당장이라도 망치를 휘두르고 싶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어린 괴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발자국, 깊게 땅에 박힌다.

아이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 본다.

 

 

 

“... ... 형...”

 

“그래.”

 

“죽여주시면... 안 되요...?”

 

“엄마가 죽었어요... 아빠도 죽었어요...

저도... 저도 죽을 뻔했다가 겨우 도망갔어요...”

 

“다시는 저걸 보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아이는 내 신발을 붙잡고 절규하다시피 몸을 떨었다.

아이의 바이오로이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았다.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안 까닭이었을까,

아이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이오로이드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저희 주인님이 원래 이러시는 분이 아닌데...”

 

“... 괜찮습니다. 그냥 나중에 알려주세요.

어쩔 땐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죽이면, 죽어야 한다.

죽으면, 죽이려 한다.

 

아주 간단한 명제다.

그렇기에 끊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아이들과 살아왔던 나도 그랬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여기는 위험하...”

 

 

 

그 때,

 

탕!!

 

 

 

“에...?”

 

 

 

아이를 안고 있던 바이오로이드의 머리에 바람 구멍이 뚫렸다.

 

 

 

“대장님...?!”

 

“비켜라, 페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

워울프조차 이렇게 빨리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누가 왔는지.

 

 

 

“인간을 상대로 뭘 하고 있는 거지?

말 상대라도 해주려는 거냐?”

 

“... 칸.”

 

“이젠 내 이름까지 불리고 있군.

153분대는 후에 징계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도록.”

 

“자, 잠시만요 대장님! 저 사람은...”

 

“그만.”

 

 

 

자비도, 여유도 없는 전사는 그렇게 가만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냐... 그럴 리가...?

분명 호드의 대장은 대륙 쪽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슬며시, 땅에 떨어진 망치의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시라유리도 썩은 동아줄이나마 잡기 위해 활시위를 잡았다.

 

요안나의 병사들과 요안나 역시 마찬가지.

지금 이곳에 전군이 모여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동귀어진은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빨리 치워버리지 않고.”

 

 

마리.

 

 

“바이오로이드랑 인간이 같이 싸우질 않나, 용서를 논하질 않나,

오늘따라 별 이상한 장면을 많이 보는군.”

 

 

아스널.

 

 

“안 쏠 거면 비켜. 내가 쏴버릴 테니까.”

 

 

레오나.

그리고 그 뒤에 셀 수 없이 수놓은 아이들의 병력까지.

 

모두가 깊게 그늘진 앞머리 속에서 안광을 희번득 뜨고 있었다.

나를 향해서.

 

시라유리는 물론 요안나와 병사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 없이 이것이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와... 왓슨, 이거는 도저히...”

 

“...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전군, 검을 들어라.”

 

“충(忠).”

 

 

 

싸움이 아니다. 유린이다.

복수에 불타고 있는 미치광이를 상대론 ‘싸움’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이 아이들의 설정을 지독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회귀자였다.

오히려 너무 뻔했기에 헛웃음이 났다.

 

 

 

“왓슨...?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요...?”

 

“아, 아냐. 그냥 좀 옛날 생각이 나서...”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야 지금 눈 앞의 상황에 겁을 먹겠지만, 나 같이 과몰입 씹덕이었던 사람은 그 너머의 설정부터 보는 법이다.

 

우선 레오나와 칸, 발할라와 호드가 같이 다닌다는 것.

둘은 2차 연합 전쟁에서 함께 싸운 경험이 있다.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애들이 함께 다니는 꼴이라니,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둘째, 발할라는 극지방에서 주로 사용한 부대.

그에 비해 훗카이도는 극지방은커녕 온난한 기후에 속한다. 

그러니 인간 학살을 하려고 했다면 지휘관인 레오나는 일본이 아니라 북유럽 같은 데를 갔겠지.

즉, 발할라가 여기 있다는 것부터가 이질적이란 뜻이다.

 

셋째, 스틸라인은 블랙 리버의 군 부대다. 게다가 블랙 리버는 미국 기업이고.

덴세츠 사와 자위대가 있던 일본 내부에는 블랙 리버 바이오로이드가 발을 붙일 틈이 없었다.

하물며 마리 같이 고급 기종이?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결국, 이 모든 부대가 한 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는 놈은 한 명뿐이다.

 

 

 

‘추기경. 

클리셰는 싫다더니 결국 애들 다 모아서 날 죽이려 하는 구나.’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이 정도로 날 방해하기 위해 열심을 보인다는 건 되려 내가 제대로 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 기회에 클리어 조건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에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 걸어왔다.

 

 

 

“왔군, 메이.”

 

“어떻게 할 거야? 핵으로 쏴버리려고? 그럼 지금 대피 명령을...”

 

“아니. 

그냥 저 사람에게 좀 궁금한 게 생겨서.

시간 좀 주겠어?”

 

“뭐, 그러시다면.

스틸라인, 총구를 내려라.”

 

“캐노니어도 마찬가지다.”

 

“발할라도.”

 

 

 

메이. 멸망의 메이.

저 밖에 있는 아이가 아니라, 나에게 핵을 쏘게 했던 그 메이 말이다.

 

모든 지휘관들을 뒤로 한 채, 메이는 대피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 밖으로 나오는 노을의 햇살, 빛과 어둠의 경계는 나와 메이 사이로 흐릿해졌다.

 

 

 

“역시 너였구나.”

 

“... 뭐?”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메이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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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떻게 본겜이 고작 팬픽 따위보다 수명이 길 수 있겠어

이대로 로드맵 못 지켜서 수장되든, 아니면 개같이 부활하든 한 번 가보자




아무튼

절대 애 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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