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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처분, 시저스 리제

티타니아가 오베로니아의 심장을 찌를 때


건너편이 깨끗이 비치는 유리병에 진한 금빛이 채워진다. 싱긋 웃는 드리아드의 모습이 물병에 투명히 비친다. 병 끝에 일어난 하얀 거품을 손가락으로 슬쩍 훔친다. 가벼운 휘파람에도 거품이 손 끝에서 밀려난다.

드리아드가 스발바르 제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배 안에서 보낸 이유가 이것이었다. 노을진 바다를 담아낸 듯한 맥주는 드리아드가 보낸 몇 달의 결실이었다. 냉각용 가방에 두 병을 집어넣는다. 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맑다.

 

드리아드, 있니?”

아, 레아 언니”

 

오르카호 내의 배양실, 잠수가 길어질 때를 대비해 여러 작물을 키울 수 있게 설계된 공간이었다. 실내인데도 태양과 비슷한 조명이 설정해둔 시간대에 따라 낮과 밤을 만든다. 때로는 이 공간에서 하루를 꼬박 지낸 적도 있는 드리아드는 배양실의 시간이 곧 현실에서의 시간과도 같았다.

평상시에는 조명을 조절하고 작물이 빨리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과 기술을 써서 쌀을 단기간에 키워내지만, 스발바르 제도에서의 장기간 체류가 확실시 되자 드리아드가 이 곳에서 보리를 키우고 싶다고 말을 했다. 물론 쌀만 키우는 것이 아니니만큼 보리를 포함한 다른 작물도 키웠지만, 그녀의 주장은 단순히 그런 것 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몇 달 간 보리를 키워내겠단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다른 사람들은 카페에 간다던가 주둔지를 구경한다던가 하는 동안에도 드리아드는 보리를 키워내기 위해 겨우내를 오르카호에서만 지냈다. 간간히 주둔지로 나가도 간단히 식사를 하고는 다시 배양실로 돌아오고는 했다.

 

꽤 넓구나 이렇게보니까”

 

보리를 모두 수확한 배양실의 흙밭이 꽤 멀리까지 보인다. 워낙 큰 배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시설까지 있단 것이 새삼 놀랍다. 하기사 최후의 인류가 최후까지 생존을 해야하는데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맥주는 다 된거야?”

네, 언니”

 

드리아드가 가볍게 병을 들어보인다. 투명한 병에 가득 담긴 맥주의 빛은 며칠 전 까지 이 배양실에 가득했을 보리 물결과 같았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맥주를 만드는 것은 여러 도구와 기술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병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맥주가 아닌 드리아드의 정성이라 해도 무방했다.

 

주인님이 기뻐해주시겠죠?”

물론이지”

 

간간히 사령관이 배양실에 찾아왔을 때에도 기대가 된다는 듯 은근히 드리아드에게 눈치를 주곤 했다. 그때만 해도 보리가 푸르렀는데, 벌써 몇 병의 맥주가 되어 늘어진 모습을 본다면 사령관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답지않게 싱글싱글한 미소까지 띄운 드리아드의 눈은 살짝 피곤했지만 눈망울은 기대에 빛나고 있었다.

 

다른 언니들에게도 한 병씩 전해주세요”

그래”

주인님은 지금 어디 계시죠?”

어…”

 

넓은 앞치마폭에 맥주병을 담던 레아가 잠시 말 끝을 흐린다.

 

며칠만 기다리면 안될까? 지금은 주인님이 데이트하는 것 때문에 바쁘시거든”

데이트요?...아”

 

그런 행사가 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새로 영입된 바이오로이드들이 성격이 좀…별난 편이라서 말이지, 주인님이 요 며칠간은 특별히 신경써주겠다고 하셔서”

새로?”

사실 영입된지는 좀 됐어, 장화라고. 그런데 주인님한테 마음을 연지 얼마 안 된 모양이야…한동안은 적응할 수 있게 주인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더라”

그래도, 잠깐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이렇게 만들었는데”

 

자신을 말리려는 레아의 말에 드리아드는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레아도 그간 많은 노력을 했던 드리아드의 아쉬움 섞인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조금은 약해진다.

 

그러면 한 번 찾아가봐. 저녁 지나면 호라이즌 카페도 영업 마감할테고…대신 주인님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는 곤란하게 하거나 하면 안돼 알지?”

물론이죠. 언니”

 

맥주를 넣은 냉각용 가방을 어께에 둘러멘다. 가벼운 무게감이 오른쪽 어깨를 누른다.

정박한 오르카호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갈때는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물들어가는 밤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 근처는 아직 푸른 빛이 맴돌았지만, 드리아드의 머리 위에는 짙은 남색의 하늘과 선명한 별무리가 들어차있었다. 한 밤 중인데도 그다지 어둡지는 않다.

짧은 모래사장을 지나 마을처럼 조성된 주둔지를 거닌다. 심야가 아닌 만큼 아직 여러 가게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농사일을 빼면 정적인 취미를 좋아하는 드리아드에겐 그다지 관심이 가는 곳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관심을 끄는 장소가 있더래도 드리아드는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기진 않을 것이다.

 

어디가”

 

가로등 불빛마저 얼어붙을 것 처럼 차게 쏘아붙이는 목소리, 물론 드리아드는 티타니아가 어쩔 수 없이 저런 말투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투였다.

 

티타니아 언니”

가게들, 곧 문 닫아”

주인님을 잠깐 만나려구요. 맥주가 완성이 돼서”

 

레아와는 다르게 별 다른 표정변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단순히 고개를 아주 약간 끄덕거려줄 뿐이었다.

 

인간, 카페에 있었어”

네, 고마워요 언니”

 

티타니아는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방향까지 가리켜준다. 유달리 손가락 끝이 뾰족해보이지만 드리아드는 티타니아의 호의에 미소로 화답한다.

낮 시간대에 영업을 하는 매장과 밤 시간대에 영업을 하는 매장이 나뉘어져있다. 목재건물의 테라스 안쪽에서는 몇 몇 바이오로이드들이 매장 안을 정리하는 와중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사령관의 모습이 드리아드에게도 선명히 보인다. 사뿐히 걸어가 테라스 밖에서 손을 흔든다.

 

주인님”

 

붉은 단발의 여성과 마주한 사령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돌린다.

 

아하, 핫팩은 지금 좀 바쁜데”

네?”

 

드레스인지 속옷인지 모를 이상한 옷을 입은 은발의 아가씨가 드리아드를 불러세운다. 여성이 말을 할 때 마다 슬쩍 보이는 갈라진 혀가 드리아드를 괜히 움츠러들게한다.

 

지금은 내 친구랑 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서 말이야. 돌아갔으면 좋겠어”

잠깐이면 돼요”

하하, 말을 왜 이리 못 알아 들으실까. 귀 먹은것도 아닌거같은데”

아냐, 됐어 천아야”

주인님”

 

테이블에 붉은 머리의 아가씨를 남겨둔 사령관이 테라스쪽으로 걸어온다. 조명이 강한 방 안에서 어두운 테라스로 걸어나온 사령관의 모습이 유달리 어색해보인다.

 

드리아드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맥주가 완성 되어서, 같이 마시고싶어서 가져왔어요”

아…고맙지만 조금만 미룰 수는 없을까? 내가 나중에 설명해줄게”

누구야?”

 

천아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사령관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여성의 표정은 심각한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듯 했다. 드리아드도 억지로 눈을 맞출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찡그려졌던 표정이 다시 사령관에게 시선을 옮기자 수수하면서도 담백한 미소로 변한다.

 

내가 찾아갈게, 알았지?”

자, 이야기 끝났으면 아가씨는 돌아가주세요”

 

배웅인지 조롱인지 모를 웃음과 함께 천아가 짐짓 정중해보이게 손짓한다.

 

알았어요. 주인님”

 

드리아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카페를 떠난다. 드리아드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때도, 카페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대로 한가운데에서 드리아드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카페의 불은, 여전히 켜져있었다.


글 쓸때 페어리만큼 재밌는 부대가 없다.

이런 부대를 개그밈 원툴로 써먹다니 미친게지

내가 생각하는 페어리 전반적인 이미지를 다루게 될 거 같아서 분량이 조금 길거같긴 함


사실 지금 이 부분까지도 읽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https://arca.live/b/lastorigin/51140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