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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통제구역





(매움주의)



* * *










룰을 설명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사라졌다. 집중하지 못했어도 그것이 인간의 성대가 발하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둠이다. 바로 앞은 둘째치고, 숨을 몰아쉬느라 떠오르고 내려가길 반복하는 흉부의 움직임조차 볼 수 없었다. 유용한 정보는 촉각 뿐이었다.


등이 차가웠다. 어딘가에 기대어 있는 듯 했고 뒷목과 팔목, 무릎이 뻐근했다. 움직여본다. 무릎 꿇은 자세에서 가부좌를 틀어야 할 다리도, 눈 앞에 왔어야 할 팔도 고정된 채 움직여지지 않았다. 쩔그럭대는 소리만이 양팔 쪽에서 들려왔다.


속박되어 있는 듯했다. 뻐근한 것은 쇠고랑이 차여져 있기에 그런 것이고, 그 쇠고랑은 벽에 고정된 쇠사슬에 달려있는 것 같다. 그런 이미지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붙잡혔다. 누군가에게. 신체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억누르는 형태인 걸로 보아, 건실한 놈들은 아니다. 

팔과 다리를 구속하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목에까지 쇠고랑을 걸어뒀다. 나를 짐승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질없이 몸을 흔들어본다. 쇠고랑이나 쇠사슬이 기묘하게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되려 이 쇠붙이들이 얼마나 견고한지만 알게 됐다. 쇠사슬의 묵직함이 각 부위를 구속한 쇠고랑에 전해져 온다. 적어도 쇠사슬의 굵기는 내 팔뚝만 할 것이다.


체력만 고갈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몸을 흔들었다. 쇠가 쩔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시공간 감각마저 집어삼키는 듯한 어둠 속에서 울려댔다. 


몸 곳곳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뻐근한 부위가 차츰 아파왔다. 그것이 체력의 고갈을 가속시키긴커녕 분노만 끓게 만들어서, 나는 어둠을 향해 되는 대로 욕을 퍼부어댈 준비를 했다.


씨발의 씨가 입에서 막 튀어나왔을 때 전신이 저릿했다. 통각에는 미치지 못해도 숨을 삼키는데엔 충분했다. 전류였다. 목 쪽의 쇠고랑이 웅웅거렸다.


쇠사슬과 쇠고랑을 타고 전신에 내달린 전류가 사라지자 구속이 풀렸다. 앞으로 기운 몸을 손으로 지탱하자 손목이 아팠다. 만져보니 점성이 있는 액체가 느껴졌다. 묶인 상태에서 몸을 뒤트느라 짓물러진 건지도 모른다.


시야의 명도가 조금 올라갔다. 빛이 나타났다. 여덟 개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빛은 황색으로 이글거려, 꼭 횃불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벽돌 벽에 걸린 건 단순히 횃불 모양의 오브제인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횃불은 아니었다.


진짜든 아니든 어쨌든 빛이다. 시각이 활성화 됐으니 어둠에 잠겼던 다른 감각도 서서히 살아날 것이다. 한시름 놓이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방금까지 몸을 마구 뒤튼 탓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 앉아 쉬려는데, 갑자기 두통이 엄습했다. 코끼리 수 백 마리가 머리 속에서 미쳐 날뛰는 듯했다. 내 머리를 갈라서 내용물을 모조리 빼내고 싶었다. 


쓰러져서 몸을 이리저리 마구 굴러대니 두통이 가셨다. 갑자기 찾아왔던 것과 같이, 갑자기 사라졌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몸을 살폈다. 


나는 전라 상태였다.


"나 왜 알몸이지"


나?


"어라…"


그러고 보니,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저기…"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히익! 소리 지르지 마!"


어둠 속에서 쭈뼛쭈뼛 나타난 것은 아이였다. 횃불에 이염됐어도 밝은 머리칼, 한쪽 눈엔 안대를 찼고 나와 같이 전라 상태였다. 걸어 나온 어둠 속과 나를 번갈아 곁눈질하는 얼굴은 불안에 젖어 있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 조류 같았다.


"이, 이제 괜찮은 거야? 아까부터 몸을 막 흔들어대는 것 같았는데…"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어디야."


"여, 여기는… 무서운 곳이야."


좋지 않은 곳이란 건 알겠지만 무서운지는 모르겠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나는 누구…"


나는 누구야, 라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 질문이 너무 얼빠지게 느껴졌다.


"너, 너는 아르망 추기경이잖아…"


말을 끝내지 않았어도 아이는 물음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도 내 질문 자체는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아이의 눈에 의아하단 빛이 깃들었다.


"나는 LRL이야." LRL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소개를 했다. "여기 온 이상 내 개체명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잠시 동안만은 기억해줘."


어조도 그렇고, 꼭 얼마 살지 못할 년처럼 말한다. 그런 LRL이 두통을 한층 더 크게 키웠다. 아르망 추기경, 그 이름을 듣자마자 다시 머리를 감싸안고 몸을 수그리게 됐다. LRL에게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했다.


LRL을 향한 원망은 곧바로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금방 두통이 가시자 기억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전부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누구고, 무얼 했으며, 이 장소에서 눈을 뜨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눈을 뜨기 전에 오르카에 있었다.


"…뭐야."


"으응…?"


"왜 공원이 아니지? 왜 이번에는…"


LRL이 눈에 깃든 불안을 키우며 물어왔다.


"고, 공원? 확실히 바깥에는 공원도 있긴 한데…"


"닥쳐."


"히익! 뭐, 뭐야 갑자기!"


LRL은 입 앞에 양손을 모으고 눈물을 글썽였다. 진조 치고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뭐, 진조가 아니어서겠지.


"야. 여기 어디야." 우선은 이 이상한 곳에서 나가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까 어떤 기계음 섞인 여자 목소리가 어쩌고 테마관이랬는데, 뭐하는 곳이냐고."


"무, 무서운 곳이라고 말했잖아… 그 이상 알아봐야 좋을 거 없어…"


"말해."


"어차피 우리 다 죽을 텐데…"


"씨발아! 죽긴 누가 죽어! 재수 없는 소리 하지말고 도움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윽박지르자 LRL은 못할 짓을 억지로 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할로윈이야…!"


할로윈. 


아, 그랬다. 그 목소리가 분명 테마관 앞에 할로윈이란 단어를 붙였었다.


테마관, 테마관. 할로윈, 할로윈. 두 세 번 중얼대보자 추정할 수 있었다.


"…아하. 거기군."


"이, 이상한 녀석이야…"


걸어나온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치던 LRL은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지나쳐갔다. 나는 그런 LRL을 흘겨보고, 주위를 살폈다.


전방, 내가 바라보는 그쪽 면에만 횃불이 있고, 다른 면에는 없다. 그 횃불을 각각 4개씩 양쪽에 둔 중앙에는 갈색 아치문이 있었다. 다가가서 만져보자, 색깔 때문에 목제라고 생각한 문은 철제였다. 어쩐지 시각적으로 목제의 질감을 내기 위해 일부러 갈색으로 칠한 듯한 느낌이었다. 


왼쪽 벽을 따라 걸었다. 횃불이 달린 벽을 지나고 LRL이 있었을 벽을 지나 내가 묶였던 벽을 지났다. 그리고 LRL이 나를 지나쳐 향했던 방향을 걷는데, 세명째 목소리가 들렸다.


"으… 머리가 아파요."


"샬럿…! 샬럿이야!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아치문 앞으로 나온 둘에게 다가갔다. LRL은 두통을 호소하는 샬럿 옆에서 방방뛰며 기뻐하고 있었다.


"야. 꼬맹이."


나를 보고 뛰는 걸 멈춘 LRL이 샬럿 뒤로 숨었다.


이마에 손을 짚은 샬럿을 본다. 

샬럿도 전라 상태였다.


두통을 호소하는 몸짓에 일일이 출렁거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마저 물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대강 알겠어. 야. 여기가 무서운 곳이라고 했지."


"으…응." LRL은 샬럿의 둔부를 잡고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무서운 곳이야…"


"어떻게 무서운 곳인데?"


"어떻게 무섭냐니…?"


"병신아.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 장소인지 정보를 꺼내 보라고. 여긴 바이오로이드로 인간들이 재미 좀 보는 곳이잖아. 할로윈 테마관이랬으니까 그에 어울리는 기믹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그, 그걸 왜 내가…"


"무서운 곳이라며.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잖아. 여기 온 게 처음이 아닌 거 아냐?"


계속 물어도 머뭇거리길래 욕을 퍼부어 위협했다. 그제서야 LRL은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오늘은 할로윈이고 여기는 그날에 걸맞는 테마로 펼쳐지는 이벤트 장소다, LRL은 작년 할로윈에도 이곳에 끌려왔으나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생존하면 풀어준댔는데 거짓말이었다, 이번에도 다시 끌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작년에 끌려왔던 그 방인 걸 바로 알았다, 작년과 다른 게 없는 장소이니 이번에도 방식은 같을 것이다.


"괴물들이 나타날 거야…"


LRL은 제 몸을 감싸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LRL은 지 얘기만 했지, 아직 정보다운 정보를 풀어놓지 않았다.


나는 LRL을 끌어 뺨을 한 대 치고 계속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펼쳐지는 이벤트의 룰이 뭔데? 괴물은 뭔데? 어디서 나타나는 건데? 지금부터 어떻게 전개 되느냔 말이야."


"이, 인간님들이 만든 괴물이… 저쪽에서 나타나…"


LRL이 울먹이며 내가 묶여있던 쪽의 벽을 가리켰다.


"벽이잖아."


"벽이 아니야… 셔터야…"


"셔터?"


"으, 응…이제 곧 저 벽이 내려갈 거야…"


"그러면, 저 문을 열어야한다는 거잖아."


내가 아치문을 가리키자 LRL이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는 안 열려… 시간이 되면 알아서 열리는 구조야…"


"벽이 내려가는 게 먼저야? 문이 열리는 게 먼저야?"


"문이 먼저 열려…"


"다음은?"


"그, 그 다음은… 여기서 나가면 복도가 있어… 원형으로 나있는 복도야… 그 복도에도 문이 있는데… 똑같이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열려…"


"그 다음은?"


"그,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면 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한 바퀴 둘러본 이 20평 남짓한 방은 사각형이다. 여기가 출발선. 시간이 지나면 문이 열린다. 여기서 나가면 원형 복도가 나타나고, 문이 있다. 그 문도 시간이 지나면 열린다. 또 나가면 다시 원형의 복도. 그것의 반복. 원 안에 원이 있는 구조인가. 문이 열리는 시간 사이사이를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고, 그렇다는 건…


"최심부에 탈출구가 있는 거야?"


"응…"


LRL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샬럿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여긴 어디죠?"


…방금까지 오간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면 나오지 않을 물음이었다. 두통 때문에 듣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샬럿의 사정이다. 


우측 벽 구석 쪽의 횃불 아래에 앉았다. 어둠에 가려져있는 내가 묶였던 쪽을 노려본다. LRL은 내게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다른 쪽의 벽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LRL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저건 안되겠어…" 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냥 앉아있기도 불안해서 LRL이 말한 저거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럴 리가 없어…"


'저거' 앞에 서자 그런 웅얼거림이 들린 것 같았다.


"이럴 리가… 주인님이… 분명 내게 청혼하셨는데… 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저거'의 턱을 잡고 끌어내 확인한 뒤, 다시 어둠 속으로 던졌다. 주인님이 어쩌고 웅얼웅얼 거리던 녀석은 알렉산드라였다. 


알렉산드라는 내던져진 자세 그대로 계속 웅얼거렸다. 어둠 때문에 얼굴의 윤곽마저 흐릿하게 보였지만,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버림받은 거야." 라고 뒤에서 다가온 LRL이 말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쪽에 끌려오는 건 대부분 팔려오거나 납치되거나 폐기가 예정된 녀석들이야. 나, 나도 팔려왔어…"


"뭐 어쩌란 거야."


"흑… 등대에만 있는 게 싫다고 투정부리는 게 아니었어…"


알렉산드라의 공허한 중얼거림에 전염된듯 LRL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염병할 년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유기 당한 반려동물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딱 바이오로이드 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분을 잡쳐서 앉아있던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얼마 안있어 샬럿이 다가왔다.


"여기는 어디냐고 물었잖아요."


"아 몰라 씨발년아."


"뭐, 뭣!? 어찌 그리 저속한…!"


어디서 본 듯한 반응이었다. 


"됐어요. 아까 그 아이가 말하던 걸 얼핏 들은 걸로 어느 정도 파악은 됐으니까요."


"그러셔. 그럼 내 눈 앞에서 꺼져."


"…무정하군요."


"그런 소리 꽤 자주 들었어."


"아니, 당신 말고. 인간님들을 말한 거에요."


"그러셔."


"챔피언이 되었는데… 챔피언만 되면 들어주시겠다는 약속들이 있었는데… 어찌 나는…"


침울해진 샬럿 옆에서 어느새 다가온 LRL이 눈을 빛냈다.


"채, 챔피언!? 혹시 너는 그 붉은 아레나의 챔피언 개체 샬럿이야!?"


"그래요. 이런데서 눈을 뜨지만 않았다면요."


"그, 그건 유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일단 살아남으면 또 기회가 있을지! 그러니까 지금은 살아남는 걸 목표로 하자. 응? 내가 도와줄게."


LRL이 미소를 지어 샬럿에게 고개를 가까이 했다. 미소를 바라는 듯한 미소였다.


눈이 그렁거리던 샬럿은 눈가를 팔뚝으로 비비고 LRL에게 미소를 보였다. 미소를 교환한 둘은 이내 내게 시선을 보냈다. 구석에 갇힌 모양새가 된 나는 둘이 멋대로 시작한 대화에 의사와 관계없이 참여하게 됐다.


LRL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여기가 어딘지는 다들 소문으로 들어봤을 거라 생각해…"


"어느 테마파크에나 있는 시설이라고는 들어봤어요. 그래서, 아가. 아까 아가가 말한 괴물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겠어요?"


"그, 그건 있잖아…"


"응. 침착하게 말해봐요."


"보, 보보, 보면 알아… 인간님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괴물들이니까…"


"무서운 건가 보네요."


"으… 으응… 정말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시작된 대화는 얼마 가지도 않아서 중단됐다. 또 훌쩍거리기 시작한 LRL에게 샬럿은 그 쓸데없이 커다란 가슴을 빌려줬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샬럿이란 개체의 특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보겠지만, 때가 때다. 


나는 샬럿에게 안겨있는 LRL을 발로 떼어내고 물었다. 샬럿이 나를 지탄하듯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이 통제구역에 대해 계속 말하셔야지."


"토, 통제구역?"


"통제구역이잖아. 여기."


"그, 그런 딱딱한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아… 어쨌든 놀이시설이라서…"


"…아. 그래.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LRL은 우느라 새어나온 침을 닦고 말했다. "우리한테 인간님들이 베팅할 거야."


"도박이란 거야?"


"비, 비슷해… 이 테마관엔 우리가 지금 있는 이런 방이 몇 개 더 있거든… 거기에도 여기처럼 몇몇 개체들이 구속되어 있고, 지금 쯤은 다 풀려있을 거야… 준비할 시간을 주는 거지… 아무 정보도 안 주고…"


"그래서."


"그러니까, 이 방의 너나 샬럿, 나랑 저 알렉산드라랑 해서 한 조야. 다른 방도 똑같이 한 조로 묶이고, 인간님들이 각 조에 베팅해. 크게는 어느 조가 살아 남을지부터 해서, 세세하게는 어떤 개체가 살아남을지에도 베팅하고… 또 어떤 조가 가장 먼저 죽을지랑 어느 개체가 먼저 죽을지도… 탈출에 걸리는 시간이랑 몰살 당하는데에 걸리는 시간도… 또…"


"그만해. 스포츠 토토같은 거잖아." "붉은 아레나에도 비슷한 게 있었어요."


"그,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맞아… 아 그리고… 인간님들이 베팅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따로 투자를 하기도 해…"


"그건 뭔데?"


"그, 그건…"


LRL이 다음 할 말을 찾는 사이에, 버저가 울렸다. 오리의 성대에 전극을 갖다 댄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틀어막은 귀를 떼고 살펴보니 방의 중앙 바닥이 뚫려있었다. 그곳에서부터 단상 같은 것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저게 투자야…"


LRL은 그렇게 말하고 단상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대, 대단해…! 이거 봐! 이번 인간님들은 엄청나게 투자해주셨어!"


LRL이 단상에서 천에 감싸인 뭔가를 쑥 들어올렸다. 옆에서 샬럿이 "검?"이라고 중얼거리는 새에 나는 그것을 빼앗아 살펴보고 있었다.


날은 무디고, 검신 군데군데는 녹이 슬었다.


"어, 엄청난 거라고… 작, 작년에는 무기 다운 건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단 말이야…"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듯 LRL이 말했다.


검을 휘둘러본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들어보고 샬럿에게 던져줬다. 나는 단상에서 토마호크를 집어들고 문앞에 섰다.


"아… 떴다. 이게 우리한테 걸린 돈이야."


LRL이 다가오자 문 앞에 홀로그램 전광판이 나타났다. 전광판 좌측 부분에는 녹색으로 0의 갯수가 아홉 개, 우측에도 0의 갯수가 아홉 개였다. 


"유, 육십억… 우리가 생존한다는데에 육십억이나 걸렸어…"


LRL이 입가를 양손으로 가리며 감탄스러워했다. 자기 목숨이 장난감으로 쓰인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 이쪽 붉은색은… 우리가 생존하지 못한다에 걸린 베팅이겠군요."


"으… 응. 여긴 오십억이네… 다른 조에도 강한 녀석들이 있나봐. 그래도 우리 쪽엔 붉은 아레나의 챔피언이 있으니까, 가능성은 제일 높을 거야!"


LRL을 봤다. 한손에는 손망치, 다른 한손에는 네일러 같이 생긴 것을 들고 샬럿 옆에서 몸을 들썩이며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광판의 빛 때문인지 묘하게 들뜬 얼굴 같았다.


문 앞에서 토마호크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데 오리의 성대에 전극을 댄 듯한 버저가 또 울렸다. 


"열린다!"


철제 아치문이 비명을 지르며 바깥 쪽으로 열렸다. 


방에서 나가자마자 코를 틀어막았다. 썩은 물에 침잠되어있던 것을 햇볕에 말린 듯한 고약한 냄새가 문 밖에 가득했다. 샬럿과 LRL도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후각이 마비되어서야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원형의 복도라는 LRL의 정보대로, 우리는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복도는 벽돌과 횃불 오브제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우리가 갇혀있던 방을 원형으로 늘여놓기만 한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돌다가 도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벽에서 문을 발견했다. 잠겨 있었고, 갇혀있던 방에 달린 문과 같은 문이었다. 여기가 다음으로 열릴 곳이겠지.


걸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냄새의 원인은 새로 발견한 문 쪽의 벽이었다. 벽은 축축했고, 썩은 이끼가 끼어있는 벽돌이 이끼가 없는 벽돌보다 많았다. 


샬럿은 두바퀴 즈음 돌았을 때, 꼭 중세의 지하감옥을 보는 듯하다는 감상을 꺼냈다.


복도를 돌아 우리가 나온 방의 문앞에 세번째 도착했을 때, 샬럿이 말했다. 나는 아무 의미없이 토마호크로 벽의 이끼를 긁어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명 더 있었죠? 데리고 나오도록 해요."


"아, 안, 안 돼."


방으로 들어가려는 샬럿을 LRL이 막아섰다.


"아가? 아가의 말 대로라면 안에 있는 분도 우리 동료잖아요? 왜 말리나요?"


"쟤, 쟤는…" LRL이 뒤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도움이 안될 것 같으니까… 발목만 잡을지도… 저러고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곧 이 방의 벽이 내려가고 괴물이 튀어 나오잖아요. 저러다 괴물에게 당하면 어떻게 하게요?"


"그, 그러니까, 쟤는 정신이 나가서 도움이 안 된다니까…"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통제구역으로 팔려와서 정신을 못차리는 년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다만, 미심쩍다.


"겁먹을 건 다 먹으면서도 의외로 맞는 말을 하네. 어린 년 맞아?"


맞아도 너무 맞는 말을 한다. 


내 말을 흘려들은 LRL을 보고 있자, 알렉산드라를 꺼내와야 한다며 샬럿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LRL이 다시 샬럿을 막았다.


그렇게 전라의 꼬맹이와 아가씨가 미지근하게 옥신각신하는 몇 분이 지나서, 버저가 울렸다.


"지, 지금 걸로 네번째야! 시작됐어…! 시작됐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LRL은 샬럿의 손을 잡아 끌고 다음 문으로 향하려 했다. 샬럿은 그런 LRL을 뿌리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랄들 한다, 라고 다 들리게 중얼거린 나는 방 안을 응시했다. 곧 방 안쪽의 벽이 내려갈 것이다.


샬럿이 알렉산드라를 부축해 방에서 나오자 소리가 들렸다. 돌과 돌이 마찰하는 거칠면서도 매끄러운 소리. 그 소리가 멎어감에 따라 LRL의 동동거림이 심해졌다.


털이 곤두선다.


방 안쪽에서 벽이 내려간 건 알겠다. 내려간 벽 너머에 뭔가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기척이 없다. 괴물이든 인간이든 살아 숨쉬는 것이라면 마땅히 느껴져야 할 기척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분명히 움직이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둠 그 자체가 일렁이며 다가오는 것으로도 보였다.


꺼름칙한 것을 느낀 건 샬럿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녹슨 검을 고쳐잡은 손에 힘을 넣고 침을 꿀꺽 삼키는 목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 목에 땀 한 방울이 타고 흐르는 것도.


괴물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터져나올 것 같은 비명을 틀어막기 위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내 호흡도 불규칙적이게 되어갔다.


끔찍한 것에는 면역이 있다. 그런 나도 서서히 공포와 불안으로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을 억누르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괴물의 정체를 파악해보기로 한다. 아니다. 따로 파악해야 할 만큼 정체가 가려진 것도 아니다. 누구든 보자마자 알 수 있다. 괴물의 정체는 바이오로이드다.


괴물은 한 마리가 아니다. 횃불의 빛이 미치는 곳에만 최소 스물, 그 뒤로는 몇 배의 숫자가 더 있으리란 걸 알 수 있다. 괴물들은 모두 괴물이란 단어에 걸맞게 지독하게도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다. 입꼬리부터 귀까지 흉하게 찢어진 녀석, 잘린 손가락을 턱에 달아둔 녀석, 코가 없고 입술도 없는 녀석, 복부가 열려 드러난 장기들과 이어진 듯한 그림이 몸에 새겨진 녀석, 등에 날붙이와 성인용품을 박아둔 녀석, 이목구비의 위치가 제멋대로인 녀석, 벗겨진 피부에 어린아이가 적을 법한 내용의 낙서가 새겨진 녀석…… 일일이 말하면 끝도 없다.


"배고파…"


가장 가까이 다가온 괴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이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꼴을 하고 있지만, 이 녀석은 본래의 형태가 제법 남아 있었다. 


"배고파…배…"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드라큐리나는 눈에 어둠을 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눈이 있어야 할 곳에 어둠만 있었다. 눈꺼풀도 안구도 없다. 드라큐리나 말고도 다른 괴물들도 그랬다. 괴물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뒷목에 노란빛이 감도는 무언가가 달려있다. 그 노란 것은 목에 감은 초커같은 것과 연결되어있다. 


LRL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들이 직접 만든 괴물.' 괴물이래서 바이오로이드 말고 다른 대단한 생명체인가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것이었다.


"이쪽으로 끌려온 게 다행이네." 손에 들린 토마호크를 고쳐 잡고 말했다. "저기 눈 없는 괴물들 중 하나가 되서 흐느적 거릴 바에야. 안 그래?"


"저, 저것들 전부, 바이오로이드인가요?"


목이 메인 소리로 말하면서 샬럿이 괴물들을 가리켰다.


"테마파크에 시설이 여기 하나만은 아니잖아. 여기저기 퍼져서 인간들의 하루 놀잇감으로 쓰인 거겠지. 그런 것들을 죽이지 않고 연명시켜서 재활용. 대충 그런 것 같은데? 보니까 괴물들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드는데엔 아홉살도 안된 꼬맹이들도 거든 모양이야. 얼마일까? 바이오로이드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비용은."


"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태연하게…"


"태연하게? 우리가 보기에 끔찍한 것일 뿐이야. 저 녀석들은 별 생각 없을 수도 있어. 기뻐할 지도 모르지? 아직은 인간들에게 저런 식으로라도 쓸모가 있다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게 바이오로이드 아닌가?"


"닥쳐요!"


그래.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도움이 된다. 인간들의 기괴한 미학이 적용된 괴물들에게 치를 떨 바에는, 저런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쳐 날뛰며 검을 휘두르는 게 낫다. 


자극 받은 샬럿은 지척까지 다가온 드라큐리나에게 검을 겨누며 경고했다. 다가오지 말아라, 걸어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드라큐리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갈증에 말라붙은 성대로 배고프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샬럿을 그렇게 자극했지만, 드라큐리나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니 인간에게 욕지기가 끌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그을린 피부, 벗겨진 두피, 깨끗하게 찰랑였을 순백색 머리칼은 죽음과 가까워진 노인의 머리칼처럼 희끗, 그 머리칼도 왼쪽 절반에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인간 입장에선 바이오로이드가 미워 죽을 구석이 얼마든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방식 밖에 없는 걸까. 왜…


"조, 조용히 해! 계속 말하니까 다가오는 거라고! 괴물들은 보지 못하지만 청력이 발달 돼있단 말이야! 조용히만 해도 시간을 벌 수 있어!"


LRL의 뒤를 따랐다. 복도의 문은 아직 닫혀 있었고, 방 쪽에서는 샬럿의 애원하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따라 와."


달려가서 샬럿의 팔을 잡고 끌었다. 샬럿은 나와 다가오는 괴물들을 황망한 눈으로 번갈아 보다가 내게 이끌렸다. 


"잠시만요! 저 분도 데려가야죠!"


샬럿이 가리키는 알렉산드라는 열린 아치문에 누워있었다. 


여전히 이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라, 나는 샬럿을 밀쳐내고 알렉산드라에게 다가갔다.


"뭐하는 거야! 안 돼!"


괴물들에게 던져진 알렉산드라에게 샬럿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알렉산드라는 손을 뻗어오는 괴물들에게 안겼다.


배고프다고 중얼거리는 걸로 예상은 했지만, 괴물들은 알렉산드라의 생살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아주 긴 시간 기아에 시달린 듯했다.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기아라도, 이성이 고갈될 만큼 긴 시간을 겪지 않고서야 함부로 식인 할 생각은 못한다. 나도 경험이 있어 안다. 그런데도 괴물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알렉산드라를 말 그대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살점으로 배를 채우고, 피로 목을 적셨다. 알렉산드라에게 들러붙지 못한 괴물들은 바닥에 고여가는 피에 혀를 가져다 댔다. 


먹이지 않고 살려둔 거겠지. 방법이 뭘까. 인간이라고 하면 언제나 생긋생긋 웃는 바이오로이드를 좀비로 격하시키는 방법은.


"할로윈에 좀비는 너무 무난한데."


"너!"


달려온 샬럿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샬럿의 젖가슴 하나를 잡고 자극했다.


"꼬맹이 말이 맞잖아. 도움이 안 돼. 이런 식으로 밖에. 아직 복도 쪽 문이 안 열렸거든."


"그렇다고 어떻게 비탄에 잠긴 자를 고통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나요!"


"그 편이 낫지 않아?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눈부신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 고통으로만 점철된 시간의 가락이야. 하물며 삶이란 단어가 허락이 안된 바이오로이드는 어떨까. 야. 병신아. 성격 좋은 척 지랄 그만 떨고, 응? 알렉산드라가 저 세상에선 제대로 주인님의 짝이 되길 빌어주기나 해."


"당신이 뭔데…"


"죽는 게 나은 년으로 시간 좀 번 게 뭐가 문젠데? 알렉산드라도 이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걸?"


"…당신도 어딘가 잘못 됐군요. 어떻게 이런 추기경이 있을 수 있죠."


"저런 바이오로이드도 있는데 나 같은 거라고 없을까. 이제 괴물에게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확인했으니까, 정신이 있으면 살 생각이나 해. 아니면 너도 산 채로 먹힐 거야?"


죽고 싶어하지 않는 건 누구나 같다. 샬럿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고쳐 먹은 듯 샬럿은 꽉 문 입술을 풀었다. 그래도 내가 아니꼬운 것은 여전했는지, 복도 쪽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공격적이었다.


살점과 피로 잔치 중인 방과 상반되게, 복도는 적막했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거리던 LRL이 원망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따금 횃불 오브제가 발하는 빛이 불안하게 어두워졌다. 


끔찍한 버저가 또 울린 건 괴물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처음과 달리 괴물들은 '배고파'가 아닌 '맛있어'라고 중얼거렸고, 먹어치운 알렉산드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찾은 듯, 걸음걸이도 아주 비척거리지는 않게 됐다. LRL은 이 시점부터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했다.


LRL의 정보대로 열린 복도의 문으로 들어서자 나타난 건 또 복도와 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온 방과 복도와는 달리, 이번 복도는 빛이 없었다. 바닥은 발목높이까지 물에 잠겼다. 마비된 후각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물 특유의 악취는 심했고, 괴물들은 우리가 불가피하게 일으키는 소음을 따라 느리지만 분명하게 다가왔다.


다음 문의 위치 파악을 끝내자 괴물들과 마주쳤다. 시작은 샬럿이었다. 다음 문을 파악하고 복도를 도는데 샬럿이 숨을 삼키는 듯한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직후 비명으로 바뀌어 공기를 가르는 쇳소리를 자아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토마호크를 고쳐 잡고 가늠했다. 눈이 적응했어도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괴물과 부딪힌 것이다, 결국 어둠이 문제다.


"LRL!" 괴물은 청각이 민감하다는 것도 뒤로 하고 외쳤다. "눈깔 꺼내!"


"히이…! 죽기 싫어!"


"씨발년아! 죽기 싫으면 안대 벗고 눈깔 빛내라고!"


몇 번 욕설을 날리자 주변이 거짓말처럼 밝아져 이곳의 처참함을 드러냈다. 단물을 발견한 개미떼처럼 샬럿에게 엉겨붙어있는 괴물들. 나와 샬럿 사이에서 울부짖는 LRL.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계속 다가오는 더 많은 괴물들. 그 모든 것이 빛으로 강조된 한 점의 판화를 보는 듯했다.


나도 그 판화 속에 묘사된 하나에 불과했다. 살점은 단 한 점도 내줄 수 없던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몸이 움직이는 대로 토마호크를 휘둘렀다. 살을 찍고 짖이기는 감촉이 토마호크를 통해 손끝에 전해진 게 수십 번, 몸을 도는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으로도 통증들이 지워지지 않기 시작해서야 버저 소리가 들렸다. 


다음 문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LRL의 눈깔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음 복도는 밝았다. 그 외엔 어떤 환경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다시 토마호크를 휘둘렀다. 


"씨…발…" 한 점 떨어져 나간 팔뚝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피가 팔을 타고 손가락 끝에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최소 수십을 담궜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


"하아… 하…여러분…! 더는 다가오지 마세요! 이젠 저도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이년은 이 마당에까지 와서 또 뭐라는 걸까. 기가 차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샬럿이 든 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검신에는 괴물들의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한다.


"야." 이빨자국이 남은 샬럿의 가슴을 움켜쥐고 말했다. "참지 마."


"이 상황에 뭐하는 건가요! 놓으세요!"


"너야말로 이 상황에서 또 그 지랄이야? 그럴 때가 아니잖아. 얘, 샬럿. 실은 너, 그리 좋은 녀석이 아니잖아."


"…뭐라구요?"


"아르망 추기경이 없으면 늘상 사고를 치는 년이라잖아. ……피맛 한 번 보면 눈이 돌아가서, 촬영 중인 것도 잊고 날뛰는 년이라잖아."


"시, 시끄러워요. 저는 검투사에요. 촬영 같은 건 한 적도 없어요."


"붉은 아레나에서만 살아왔다는 거구나? 그래도 샬럿이잖아?"


"놓으라고!"


"어때? 검 한 번 휘두르면 두부처럼 썰려나가는 괴물년들 보니까, 솔직히 기분 좋지? 게임하는 거 같지? 다가오지 말라고 하면서, 아까 복도에서는 한 번 물리자마자 바로 검을 휘둘렀잖아. 솔직해져. 넌 샬럿이야. 피 냄새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는, 진짜 괴물이야."


"놔… 놓으라고 했어요…"


"이래서 겉모습이 중요하다니까? 누구보다도 죽이는 걸 참지 못하는 괴물 같은 년인데, 치렁거리는 금발에 예쁘장 하고 가슴 좀 크다는 걸로 빨아주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니잖아. ㅋㅋㅋ 병신같은 인간들 하고는. 그런 병신같은 것들도 이젠 너한테 흥미가 떨어졌나 봐. 이런데에 떨군 거 보면 말이야. 뭐, 여기서 살아 나가도 아랫도리나 신나게 따먹히겠지. 그리고 다시 여기로 오지 않을까?"


"입 안 닥쳐!?"


"그럼 이 순간을 즐겨야 손해가 아니지."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나, 나는! 챔피언이야!"


"미쳐버려. 빨리. 널 통제한다는 아르망 추기경의 허락이란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듯한 괴성을 지르고, 샬럿은 나를 밀쳤다. 뒤로 넘어진 몸을 일으키자 괴물에게 돌격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샬럿을 볼 수 있었다. 


통했다. 역시 샬럿은 샬럿이다. 


검을 휘둘러 괴물들을 막는, 아니, 도살하는 샬럿의 움직임은 계속됐다. '맛있어.' '더 줘.' 라고 합창하던 괴물들은 '아파.' '추워.'라고 말하며 바닥에 쓰러져 바르르 떨었다. 아쿠아로 보이는 괴물은 흘러나온 내장을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옆의 바닐라는 몸의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터져, 지방과 핑크빛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유난히 샬럿에게 집요히 달려들어 이런 꼴이었다. 그만큼 허기에 시달렸던 것 같다.


지금 막 쓰러진 녀석은 머리 가운데의 절반이 가로로 갈라졌다. 핏발 선 눈알이 빠져나와 신경에 매달려 덜렁거리고, 늘어진 혀는 입 안으로 다시 들어갈 줄을 몰랐다.


실제로는 고작 몇 분이었겠지만,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버저가 다시 울렸다는 것도 모른 채, 나와 LRL은 도륙을 끝낸 샬럿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샬럿은 온몸이 태풍에 유린 당한 우산처럼 너덜거렸다.


이미 열려있던 다음 문을 통과하자 샬럿이 멈췄다.


"여기서… 나가면요." 에헤헤, 하고 넋나간 웃음 소리를 내며 샬럿이 말했다. "당신은 제가 죽여버릴 거에요."


"그거야 영광이지."


"응. 꼭이요. 당신의 구석구석을 물어뜯고 혀로 빨아서 괴롭힌 다음에, 아주 천천히 죽여버릴 거야."


"영광일 거라니까."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검을 직접 휘두른 건 너지."


"아하… 아하하… 히히…"


빨리 당신을 맛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샬럿을 뒤로 하고 주변을 살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복도가 아니라, 처음 눈을 떴던 방과 같은 사각형의 공간이었다. 물이 차있고 썩은 내가 진동하던 방금 전의 복도와는 벽 하나만 두고 있을 뿐인데, 환경은 천지차이였다. 


세균은 한 마리도 없을 것 같은 순백색 타일과 벽, 어린 여자아이의 방이 연상되는 화사한 소품들, 방 중앙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보기만 해도 달콤한 음식들이 올라가 있고, 그 음식 위에는 'Happy Halloween'이란 문구가 노란색으로 적힌 핑크색 걸개가 걸려 있었다. 방 구석에는 성인 남성 크기의 동물 탈 인형이 각각 하나씩 총 네 개가 앉아 있었는데, 꼭 이런 풍경에 놓인 우리를 주시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괴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이전과 달리 문은 닫혀버려서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도 문 밖에는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마치 문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감을 못 잡고 있는 통에 문이 열렸다. 우리가 들어온 그 문이 아니고, 나와 맞은 편에 있는 다른 문이었다. 동서남북, 이 방에 문은 네 개였다. 그 문들을 통해 많게는 다섯, 적게는 단 한 명만이 들어왔다. 따로 물을 것도 없이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은 다른 조의 녀석들이었다. 


그 녀석들 모두 먼저 들어왔던 우리는 못 봤다는 듯이 테이블에 달려들었다. 마카롱, 젤리, 푸딩, 크림이 올라간 스콘, 조각 케이크 등을 걸신들린 듯 먹어치워갔다. 뭘 먹느냐가 다르지, 그 모습은 알렉산드라를 먹어치우는 괴물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 아아… 말릴 틈도…"


어느샌가 내 팔을 꼭 잡고 달라붙어있던 LRL이 떨기 시작했다.


"말릴 틈?"


"저, 저저, 저건 먹으면 안 되는데…"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괴물이 튀어나오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갑자기 공주님이 살 것 같은 방? 상식적으로 너무 수상하다. 그런 수상한 곳에 놓인 음식은 먹으면 안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그렇다고 테이블을 휩쓰는 녀석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저거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괴, 괴물… 괴물이 또…"


"그 좀비들? 걔들 또 온다고?"


"아니야… 아냐… 진짜 괴물들… 싫어… 싫어…!"


LRL의 뺨을 갈궈서 다그쳤다.


"씨발! 똑바로 말해! 뭐가 어떻게 되는데!"


"그 괴물들이 다른 괴물들이랑 함께 나타나…!"


다른 괴물들? 좀비말고 다른 게 나타난다는 건가? 하기야 할로윈을 반짝반짝 빛내는 괴물들이 좀비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좀비들 앞에서 이성이 흔들려도 똑바로 몸을 가누던 LRL이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독뱀에게 물린 쥐 마냥 바짝 굳어버렸다.


"이번엔 뭐가 튀어나오는 건데!"


LRL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깨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손이 질척거리고 빨갛다.


LRL의 어깨라고 생각되던 것에, 여기에 오기까지 질리도록 봤던 무언가가 올라가 있다.


나는 그것이 묻은 손을 멍해져버린 눈 앞에 가져와 확인해본다.

살점. 피부 아래의 근육 조직과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혈관이 선명했다.


이 살점, 아주 깔끔하게 터졌다.


"으아아아아!"


고작 수십 초만에 돌아본 테이블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디저트의 달콤함에 미소지은 얼굴인 채로 죽어버린 또 다른 LRL, 그 LRL은 하반신이 날아가 상체만 테이블에 매달리듯 걸려 있었다. 


그런 LRL을 목도하고 입에 욱여넣은 디저트를 모조리 토해내던 티에치엔은 머리가 날아갔다. 날아간 머리는 빠르게 포물선을 그리며 내앞에 떨어졌고, 그 직후 입에서 터져나왔을 침 묻은 디저트 조각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티에치엔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나는 구석에 앉아 있었어야 할 이족보행 동물들의 데포르메된 탈을 보면서, 이제야 좀 할로윈 같다고 생각했다.


빨간 X자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양손으로 익스프레스76의 머리를 잡고 테이블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붉은 면적이 넓어지는 순백 테이블보. 부스러기처럼 튀는 살점. 튀어나온 눈알은 테이블에 계속 찍혀대는 이마에 으깨져 납작한 고기 경단같이 되어버렸다. 수십 번을 테이블에 찍혔음에도, 아직 몸은 살아 있는지 익스프레스는 경련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한창 펀치 연습이 진행 중이었다. 웃음 짓고 있는 빨간 악어에게 뒤를 잡힌 캐럴은 갈기가 없는 귀여운 눈을 가진 사자에게 복부를 연신 강타 당했다. 다섯 방 정도 맞자, 캐럴의 입에서 그륵그륵 소리가 피와 함께 흘러나왔다. 솜을 채워 넣은 듯한 질감의 주먹인데 굉장한 파괴력이다.


눈이 돌아가고 뺨이 새파래져 죽은 캐럴 뒤에서는, 평범하게 귀여운 곰 인형이 이프리트를 막 잡은 참이었다. 곰은 그대로 테이블로 향해 디저트를 쓸어버리고 이프리트를 눕혔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에서 볼 법한 벌칙을 주듯, 예를 들면 인디안 밥 말이다. 그런 느낌으로 이프리트를 난타해댔다. 


사자에게서도 확인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꽤 강한 팔인 듯 해서 이프리트의 발버둥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는지 익스프레스를 처리한 고양이가 다가와 칼을 들이밀자 몸은 반응했다. 이프리트는 그대로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같은 꼴이 되었다.


앞머리를 위로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이고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데엔 자극적인 것만한 게 없다지만, 이렇게나 대놓고 자극적이면 오히려 불쾌해진다. 그것도 쾌감이라한들 휘발성이 강해 오래 가지 않을 쾌감이다. 멍청한 인간들. 모름지기 자극이란 완급 조절이 필요한 법이다. 디저트는 디저트로, 우리를 위한 휴식으로 놔뒀어야 했다.


어쨌거나 동물 친구들은 디저트에 손 댄 년들을 모조리 처죽이고 이제는 우리를 보고 있다. 나와 LRL, 샬럿만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좀비 년들 마냥 쪽수로 몰아붙이는 녀석들이 아니다. 보면 안다. 하나하나가 아주 성가실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다. 겉은 천쪼가리지만 분명히 저 안에는 어디서 촬영용으로 쓰였을 로봇이라도 들어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좀비 잡는 것 마냥 검을 휘두르는 순간, 샬럿은 죽는다. 나는 더하다. 토마호크 따위로 동물들의 얼굴을 찢어봤자 기계로 된 속살에는 상처 하나 줄 수 없다. 기껏해야 기스 몇 줄만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좀 더…"


이런 무딘 토마호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무기가 있었다면, 해볼 만했을 텐데.


토마호크를 떨구고 양손바닥을 펼쳐본다.


왠지 모르지만, 그런 제대로 된 무기를 쥐었던 적이 있던 듯한 감각이, 저림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무기는 없다. 있는 건 발치에 나뒹구는 토마호크 뿐이다. 손의 저림은 죽음 앞에서 느끼게 되는 그런 류의 소망인 것이다. 더 제대로 된 무기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살고 싶다는 소망.


"살고 싶어…"


내 뒤에 붙은 LRL이 울먹이며 속삭였다. 샬럿이 우리를 보호하듯 뒷걸음질 치고, 귀여운 동물 친구들은 포위진을 만들어 다가오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사자 인형은 쏘우 시리즈의 빌리가 연상되는 기분 나쁜 웃음 소리를 흘렸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어요." 동물들에게 검을 겨눈 채 샬럿이 등으로 말했다. "당신, 빨리 무기 들어요. 추기경 치고 잘 싸우던데."


"열심히 해봐."

"벌써 포기할 셈?"

"없잖아. 승산."

"예지했나요?"

"…아니? 안 했어."

"그럼 모르잖아요? 할 때까지 해 봐."

"귀찮아. 이젠."


"안 돼… 안 돼요. 안 돼. 당신은 내가 죽여야 한다구요. 내가 범한 뒤에 죽일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요. 죽게 두지도 않을 거에요."


"이런 고백은 또 처음이네."


"고백이 아니에요. 당신을 강간하겠다는 선언이지."


"그런 취향이구나."


앞으로 길어야 5초.


"싫어하는 것들 한정이거든요? 난 그래요. 정말로 찍어눌러서 정복하고 싶은 게 있으면, 죽이지 않았어요. 내 몸을 그런 싫어하는 것들에게 새겨서, 잊지 못하게 만들었지. 인간님들의 허락도 있었구요. 그러니까요. 난 당신한테 그렇게 할 거에요. 얼굴도 가슴도 귀여운 아랫배랑 소중한 그곳도, 모조리 물고 핥고 비벼버릴 거야."


"오, 온다…! 온다구…! 죽기 싫어…!"


"넌 반드시 내가…"


"싫어엇…!"


"…어?"


동물들이 달려드는 것과 샬럿이 몸의 중심을 잃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과정은 슬로우 모션 기법으로 촬영된 것처럼, 혹은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잠시 뒤틀린 것처럼, 하나하나 아주 세밀히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당황한 샬럿의 표정이 분노와 경악으로 변하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 LRL을 향하는 시선의 움직임, 뻗은 LRL의 팔이 되돌아가는 움직임, 한 박자 늦게 LRL의 손바닥과 샬럿의 등에서 울려오는 마찰음, 내질러지는 동물들의 주먹, LRL에게서 동물들로 옮겨지는 샬럿의 시선.


거기까지 확인하자 다시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뻑-하고, 공기로 부푼 비닐 봉투가 터진 듯한 소리가 울렸다. 사자의 펀치가 샬럿의 뺨을 제대로 강타했다. 몸이 두 바퀴 정도 휙 돌아간 샬럿은 탁구공처럼 네 방향을 오가며 사정 없이 얻어맞기 시작했다. 서서히 터지고, 부서지고, 짓이겨지는 샬럿의 그 모습 또한 발에 밟혀 천천히 찌그러져가는 탁구공 같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집단 린치를 당하듯 발길질을 당했다. 그럼에도 샬럿은 손에서 검을 놓지 않고 피에 젖은 눈으로 LRL을 노려봤다. 죽을 때까지. 살아 나가면 진짜로 강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너같은 년이 이런 곳에서 평범하게 살아남았을 리가 없지."


나는 LRL의 뒷목을 잡아 내 앞에 세웠다.


"놔… 놔 줘!"

"전에도 이렇게 살아남은 거니?"

"어, 어쩔 수 없잖아…! 누군들 죽고 싶냐고…!"


"혹시 한 명만 남은 경우엔, 그 한 명은 산다는 룰 같은 건 없는 거지?"


LRL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약아빠진 년. 나도 틈 봐서 방금같이 던져 넣을 생각이었어?"


"죽고 싶지 않아……"


LRL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동물 친구들이 샬럿을 거의 다 다져가고 있었기에 나도 여기서는 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토마호크를 다시 쥐었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 의욕도 기력도 없다. 지금 바로 LRL을 인형들 사이에 던져 넣으면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건 싫었다. 인간들의 이벤트에서 인간들이 만든 룰에 의해 살아남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 아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그냥 죽고 싶었다.


테이블에서 떨어진 디저트 더미 사이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나는 그것에게 자력으로 당겨지는 것처럼, 몸을 날렸다. 이렇게 말하면 웃길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것이 뭔지 모르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과 가까워질수록 기억 하나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토마호크로는 허전했던 감각을 완벽히 메워 줄 수 있는 물건들. 그것이 담긴, 장갑.


동물들은 아직 샬럿을 담구는 중이라 장갑을 손에 끼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감도는 장갑이 끼워진 손을 뻗어, 검 한 자루와 권총 한 정을 꺼냈다.








* * *






"대단해…"


머리가 잘린 사자의 몸통을 툭툭 차보며 LRL이 솔직하게 감탄했다. 악어는 벽에 박혔고, 곰과 고양이는 나란히 복부가 철근에 꿰뚫려 서로 껴안고 있었다. 나는 쇳덩이를 베어내도 조금도 무뎌지지 않은 검을 수납하고, 단도를 꺼냈다.


"조용히 따라와."


격전으로 인해 무너진 문으로 나갔다. 한숨 돌리기 좋은 타이밍이었지만 쉴 틈은 없었다. 기회를 잡았다면 바로 활용해야 한다.


다시 나온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틀림없이 좀비가 잔뜩 깔려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들리는 소리라곤 나와 LRL의 발이 만들어내는 물소리 뿐이었다.


복도를 두 바퀴 즈음 돌다가 장갑 안에 든 또 다른 장갑을 꺼내서 벽을 무너뜨렸다. 겉은 벽돌이지만 안에는 철골이 있어 가능했다. 그렇게 복도 외의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다가 어둠 속에서 작은 녹색 빛을 발견했다. 익숙한 픽토그램이 떠오르는 녹색 빛이었다.


녹색 빛을 보고 방방 뛰어 참방대는 소리를 키워대던 LRL에게 말했다.


"이해해."

"응…?"


"샬럿 밀어버린 거. 여차하면 그러려고 알고있는 걸 다 말하지 않은 거였잖아. 안 그래?"


'으… 그건…"

"이해한다고."

"으응…"


"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너도, 샬럿도. 아까는 잠깐 다른 마음이 들었을 뿐이야." 


한팔로 다른 팔을 감싸안은 LRL은 떨리는 얼굴을 끄덕이고 나를 뒤따랐다.


물이 참방대는 소리가 멎고, 걸을수록 아프지만 어두워서 어쩔 수도 없는 바닥을 지나, 녹색 빛까지 얼마 안되는 거리까지 왔다.


거기서 다시 버저가 울렸다. 그런데, 이제껏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른, 비상 상황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런 소리로 울렸다.


'피식자의 탈주를 확인. 모든 포식자들의 제한 해제 절차에 들어갑니다. 구역 종사자 및 관계자, 근접 관람 중이신 모든 고객님들께서는 안내해드린 구역으로 신속히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피식자의 탈주를 확인. 모든 포식자들의 제한 해제…'


"……피식자라는 건, 너랑 나지?" 내가 말했다. "포식자는 좀비일 거고."


"그럴 거야…"


"제한을 해제한다니. 어째 불길하게 들리는데 말이지. 자, 말해 봐."


"뭐, 뭘…?"


LRL의 뒷목을 잡고 단도를 목에 댔다.


"이해해 준대서 입 다물고 있어도 된다는 게 아니야. 말해. 뭘 해제한다는 거야?"


"모, 몰라..."


"너 진짜 뒈지고 싶어?"


단도 끄트머리에서 방울진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진짜 몰라!" 


울음을 터트리며 LRL이 외쳤다.


"내가 아는 건 좀비랑 동물 인형 뿐이야! 작년에는 아까 그 방에서 끝났어! 너랑 걷는 이 길도, 해제라는 말도 뭔지 모른단 말이야! 그 외엔 여기로 다시 오기 전에 갇혀있던 창고에서 들었던 것 밖에 없어! 룰이나, 그, 그 좀비들… 그것들을 만드는 방법같은 거… 그런 건 말해봤자 기분만 나쁘잖아…"


"아, 그냥 죽일까."


"진짜야!"


단도를 거뒀다.


"좋아. 믿어줄게."


다시 길을 나아가서 녹색빛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비상구 픽토그램이 그렇게나 반가웠는지, LRL은 겁박 당하고 1분도 안 돼서 나를 껴안았다.


"배, 배… 배고파…"


들린다.


"쉿. 그만 처울어."


"흡…"


"죽을 것 같아… 먹을 거…"


비상구 램프의 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노란 점들이 흔들거렸다. 생각보다 가깝다. 이대로 숨을 죽이고 비상문을 향하기로 했다. 나는 LRL의 등을 토닥이듯 쳐서 일으키고, 비상문 램프 너머로 발을 들였다.


"맛있는 냄새…"


그 순간, 다시 버저가 울렸다.


'피식자 확인. 포식자 제한 해제.'


짐승같은 울부짖음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 노란빛의 정체를 끝끝내 알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쥐뿔도 모르고 맞서려다가 좀비들의 먹이가 됐을 테니까. 


그, 노란 빛. 


처음 좀비들을 봤을 때부터 신경 쓰이던 노란 빛.


"괴, 괴괴, 괴물들 목에! 뭐가 들어갔어!"


그것은 전투 자극제였다.


"뛰어!"


'코드 피버타임으로 이행합니다.'







* * *







"크… 으… 씨발…"


"고마워…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몸 위에서 울고있는 LRL을 밀쳤다. 


도대체, 몇 계단을 뛰어서 올라왔는지 모른다. 폐고 허벅지고 종아리고 전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중간에 LRL을 등에 업지 않았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결국엔 살리고 말았다. 그게 왠지 열 받아서, 잠긴 비상문을 향해 수달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이년을 지금이라도 죽일까 생각했다.


아마도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내 생살을 뜯겠다고 두발로든 네발로든 쫓아오던 년들. 빛 속에서도 안광을 후리던 년들. 토마호크로 잡을 때엔 느릿느릿 비척거리며 다가오던 것들이, 전투 자극제 한 대 맞았다고 움직임이 바뀌었다. 새벽의 저주라는 영화에 빗대자면, 감독이 조지 로메로에서 잭 스나이더로 바뀐 것이다.


그런 군용품까지 놀이에 쓰다니. 대자로 누워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심정에 백 번 공감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LRL은 아니었다.


"행사용 개체, 일어나서 무릎 꿇고 손 뒤로 깍지 끼도록."


정말이지 숨 돌릴 틈을 안 준다.


"반복한다.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아 씨발년아. 좀 쉬었다가 한다고."


"일어나야 될 것 같아…"


LRL의 얼굴에 붉은 점이 여러 개 찍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털고 앞을 본다. 커다란 탐조등 앞에 서있는 것들이 대략 스물, 모두 화기로 무장했다. 나는 그것에 겁을 먹기보다는 안심이 됐다. 방금 전의 경험 때문에 이빨보다는 총알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빛에 이끌려 비상 계단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너무 정직했던 듯했다. 하지만 그 지하에 우회로 따위는 없었고 그런 걸 찾을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쪽은 상대하기 편하다. 포위 됐어도 나를 노리는 것이 화기라면,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다.


총구를 겨누는 것들 대부분은 홍련을 중심으로 한 대테러 개체였다.


피가 흩뿌려지는 곳이라지만 여기는 놀이시설이 아닌가. 도대체 어느 놀이공원이 대테러를 상정하고 저런 것들을 구비해놓는단 말인가.


"니들. 존 윅이라고 알아?"


"지시에 따라! 무릎 꿇어!"


나는 네오딤을 낀 손을 까닥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바이오로이드한테는 너무 올드해서 모르나? 너희 같은 년들은 눈 감고도 갈아마시는 인간이야."


"정지! 그 이상 다가오면 쏜다!"


"그럼 존 윅이 초능력을 가지면 뭐가 되는지는 아니? 힌트는 존 윅 보다 올드한 녀석."


"제압 사격!"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이 들어간다. 총구로부터 뿜어져 나온 불 속에서 총알이 보인다. 


모두 머릿 속의 이미지다. 


"네오야."


계산을 마치고 손을 뻗었다.


"무, 뭐, 뭐뭐…"


엄밀히 따지면 네오가 아니라 매그니토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매그니토가 더 공격적이니, 나는 마이클 패스벤더 버전의 매그니토로 임하기로 했다.


날아오던 총알은 눈 앞의 허공에 알알이 수놓아졌다. 펼친 손을 오므려 허공의 총알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쥐어싸듯 모으고,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총알이 도탄되는 소리로 메아리치던 복도는 피로 물들어갔다. 지나왔던 테마관 만큼은 아니지만, 되돌아온 총알에 당한 대테러 개체들의 상태는 나름 처참했다. 


시체들 너머로 이어진 곳은 유광 스테인리스를 길게 늘여놓은 듯한, 지독하게도 무균적인 이미지의 복도였다. 시설 설계자의 센스를 의심하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붉은 램프에 일일이 총알을 박으며 복도를 나아갔다.


복도를 돌고 또 계단을 오르고 다시 복도를 지나기를 몇 번, 그나마 테마 파크 다운 장소가 나타났다. 그 공주님 방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화사하게 꾸며져 있어서, 뒤로 돌아가면 그런 이벤트가 벌어지는 곳이 나타난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유일하게 스태프 온리라 적힌 곳이 있었다. 잠깐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를 그런 곳에 처넣은 놈들을 그냥 둘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스태프 온리라 적힌 문을 열어 나아갔다. 특별할 것 없는 복도가 나타났고, 그 복도의 중간 즈음에 다다랐을 때 총성이 울렸다.


가장 안쪽에서 울렸다. 나는 걸음을 빨리해 그곳으로 들어섰다.


"오! 아르망!"


들어서자마자 보게 된 것은, 막 백덤블링을 넘고 씨익 미소 짓는 남자였다.


"드디어 왔… 우와아앗!"


"…뭐야?"


"야! 그냥 오면 어떡해! 뭐라도 걸쳤어야 할 거 아냐!"


손을 뻗어 몸을 더듬어봤다. 내가 알몸인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꼴을 본 마당에 알몸을 보인 정도로 수치심이 느껴질 리 없었다. 


"매즈 미켈슨?"


지금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어 가려졌지만, 웃는 얼굴은 그 배우를 쏙 빼닮았다. 기억에 따르면 내 주위에 그런 남자는 없었다.


"매즈 미켈슨은 기지배야. 네 아빠잖아."


남자는 백덤블링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자신의 정면을 가리켰다.


"일단 저거 좀 정리하고."


"야!"


소리가 터져 나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블랙 리리스가 있었다. 그 뒤에는 모니터가 가득 달린 벽이 있었고, 모니터 아래에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뒤엉켜있는 시체가 즐비했다.


"내가 저 씨발년 잡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리리스가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다 망쳤다고!"


"아까는 네 주인을 죽인 걸 용서 안 한다면서, 이제는 내 딸이 풀려난 걸로 그러니? 네 주인 보다 내 딸이 탈출한 게 더 열 받아?"


"죽인다 이 개새끼야!"


"ㅋㅋㅋ c'mon c'mon~"


열이 바짝 오른 리리스와는 반대로 남자는 여유로웠고, 격돌한 이후에도 더 열 받게 하려는 듯 중간중간 약 올리는 말을 칼과 권총에 섞어댔다. 정황 상 둘은 내가 오기 전부터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것 같았다.


폭력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 둘이 펼치는 전투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상식의 수준을 넘어선 속도로 남자에게 맹공을 퍼붓는 리리스, 그런 리리스를 우습다는 듯 경망스러운 움직임으로 흘려대는 남자. 전투 자체는 치열한데, 그런 남자 때문에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내가 난입할 수준이 아니고, 난입해도 어느 쪽에 설지를 몰랐어서, 나는 리리스를 주시해가며 모니터로 향했다. 대부분의 모니터가 박살났지만, 살아있는 모니터들은 내가 지나온 곳들을 비추고 있었다. 공주님 방, 작살 난 인형들, 계단 끝까지 쫓아왔다가 다시 내려간 듯한 좀비들. 


발치에 죽어있는 인간들을 걷어차댔다. 이 돼지 같은 새끼들이 내게 돈을 걸고 즐긴 것들이었다. 


돼지 같은 새끼들의 머리통을 충분히 부수고 주변을 살폈다. 한 곳에 몰려있는 시체와는 달리 홀로 떨어진 벽에 기대어있는 시체가 있었다. 지금 리리스와 치고받는 남자와 비슷한 연배에, 풍체가 좋은 남자였다.


다가가서 한참이나 그 얼굴을 들여다 보고있자, 이 자가 누군지 어렴풋이 기억났다.


"끝."


남자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돌아보자, 피가 묻은 단도를 닦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손수건을 정장 포켓에 접어서 넣고, 남자가 내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투자한 보람이 있었구나."


내 장갑, 남자.


그 두 가지를 연결하자 남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남자는 일단 이거라도 입으라며 코트를 벗어줬다. 


"나가자."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출구를 향해 걸었다. 왠지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지금은 잠자코 남자를 따르기로 했다.


남자는 나가는 길에 출구에 서있던 LRL까지 챙겼다. 그렇게 우리 셋은 영화처럼 특별히 따로 마련된 탈출구 같은게 아닌, 시설 출구로 당당히 향했다. 남자가 그리로 향했던 것이다. 이대로 나가면 위험한 거 아니냐고 남자에게 물어 볼 생각은 있었지만,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남자가 너무 당당했다.


출구와 가까워질수록 붉은 램프가 울리지 않는 구역이 많아졌다. 출구에 거의 다 다다랐을 즈음에는 평범하게 시설을 이용하는 입장객만 보였다.


시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평범하지 않았을 뿐.


"요요 음탕한 년. 어린 것이 벌써 좆맛을 알아? 좋아? 좋냐고."


"앙… 아앙… 좋아… 오빠… 거기… 더 세게 찔러 줘…"


지나가다가 보인 통유리 너머에는 정사라고 부르기엔 역겨운 광경이 적나라하게, 아주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통유리 너머의 뚱뚱한 남자는 벌거숭이였다. 벗겨진 머리, 기름이 잔뜩 낀 배, 털이 수북한 가슴, 통유리 너머로도 음부를 드나드는 소리가 들릴 듯 음낭까지 축축히 젖은 물건, 땀으로 흥건한 등. 


남자가 물건을 한 번 빼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녀의 음부에 발랐다. 출렁거리는 배에 깔려있던 터라 확인할 수 없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켈베로스. 켈베로스는 음부에 닿은 손에 확실히 반응해주어 남자를 웃음 짓게 했다. 


뚱뚱한 남자가 다시 보드라워 보이는 켈베로스를 온몸으로 짓뭉갠다. 켈베로스의 얼굴이 사라진다. 땀과 땀이 섞여 둘은 번들거린다. 켈베로스의 두 다리가 남자의 허리춤을 다정하게 끌어안는다.


남자가 허리의 움직임을 빨리하며 지껄인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듯한 외설적인 말들. 켈베로스도 받아치듯 외설적인 말들을 웅얼거린다.


"가자."


남자가 잡은 손이 살짝 당겨졌다. 

바라보자 남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런 거 아냐."

"그럼 빨리 와. 떡치는 거 난생 처음 본다는 얼굴하지말고."


출구로 향했다. 몇몇 인간들이 아이쇼핑하듯 통유리 너머를 흘깃 보고 코웃음치며 지나갔다.








* * *







통제구역을 나서자, 좋은 의미로의 판타지가 노을 아래에 펼쳐졌다. 매점에서 흘러나오는 구워진 반죽과 설탕의 향취, 진짜같은 회전목마 위에서 웃음 짓는 아이들, 바이킹 위에서 손을 들었다 내리는 탑승객들, 머리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롤러코스터의 구동음, 근세 유럽풍의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놀이공원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밝은 음악이 흐르고, 멀지 않은 곳에서는 이족보행 동물들이 오가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떠나 보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전체적으로 톤이 높은 세피아 빛깔의 테마파크는 빛바랜 사진 속 풍경 같았다. 그러나 그 바랜 빛에서는 조금이나마 따스함이 느껴졌다.


시설 하나를 나섰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모든 것이 달랐다. 인간들의 표정도, 제공되는 서비스도,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대우도. 다른 차원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남자를 본다. 어쩌면 차원 간 이동이란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잠이 든 LRL을 안은 남자와 나는 멀리 보이는 대관람차로 향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테마파크를 떠나는 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등잔불이 어두운 법이라고 남자가 말했다. 오히려 바로 자리를 뜨는 게 더 위험하단다.


여러 바이오로이드가 우리를 지나쳐 통제구역 쪽으로 뛰어갔다. 정말로 등잔불이 어두운지를 몸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츄러스 먹을래?" 남자가 LR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안 먹었지? 배 안 고파?"


"고파. 근데 츄러스로 채우고 싶지는 않아."


"그런 거 가릴 입장이 아닐 텐데."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거라고 말해."


다시 한 번 거절의사를 밝히고 남자에게 옷을 먼저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는 내 말에 짓궂게 웃으며 일곱 빛깔로 돌아가는 대관람차를 가리켰다.


"당장은 필요 없잖아."


"코트 아래는 알몸인 거 알면서 그렇게 말해?"


"그럼. 오늘은 할로윈이니까. 그렇게 있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을 걸."


코 앞으로 한 가족이 지나가다가 멈췄다. 10살도 안 돼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나를 한 번 가리키고 흡혈귀 같은 어금니를 드러내보였다. 등 뒤로 나부끼는 검은 망토가 제법 흡혈귀 같은 모양새를 내주고 있었다.


"언니. 같이 사진 찍을래?"


아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가 어깨를 툭 쳤다.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부탁한다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가 말썽이라서요.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저희 딸도 말썽쟁이입니다. 할로윈이랍시고 어찌나 테마파크로 놀러가고 싶다 난리였는지. 다 컸는데 말입니다."


남자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남자는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가족을 배웅했다.


"봐." 남자가 카메라 모드를 킨 스마트폰을 보이며 말했다. "왠 흡혈귀가 하나 있잖아."


스마트폰 속 내 얼굴에는 여기저기 구리빛을 띠기 시작한 피가 넓게 묻어 있었다. 남자가 준 수복캡슐 덕에 좀비들에게 당한 상처는 모두 나았지만, 피로에 절은 얼굴은 할로윈의 그 어떤 괴물들 보다도 칙칙해보였다.


피로 때문에 의식하지 않았을 뿐, 나같이 할로윈을 제대로 만끽하는 듯한 차림새의 인간은 많았다. 여러 짐승부터해서 잭 오 랜턴, 잭 프로스트, 마녀, 흡혈귀, 좀비, 늑대인간, 유명한 살인마들…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테마파크에 종사 중인 바이오로이드, AGS도 그랬다.


알고는 있는 걸까. 평소에는 괴물과 살인마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주제에 잘도 그런 분장을 한 것이다. 스스로를 그런 끔찍한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자학적인 놈들이 넘친다니.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테마파크의 인간들 모두 자기 파괴에 혈안이 된 녀석들로 보였다. 허나 그 기준의 척도가 분장의 유무와 퀄리티라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자학적인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는 변명거리가 있다. 분장이 아니라 진짜 피라는. 여기 얼빠진 놈들은 그마저도 진짜 피를 분장에 쓴 거냐며 감탄이나 하겠지.


할로윈 만큼 병적인 행사도 없다. 


남자가 제멋대로 사온 츄러스를 씹으면서 대관람차로 계속 향했다. 도중에 남자는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는 마녀와 손인사를 교환했다. 남자는 그 마녀가 훗날 멸망 전이라는 수식이 붙을 키르케라고 말했다. 관심 없었다.


대관람차에 도착했다. 나는 대관람차에 오르자마자 남자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맛도 드럽게 없는 걸 피네."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했다.


무릎에서 자고 있는 LRL을 내려다 보다가, 남자는 내 투덜거림은 못들은 척 다른 주제를 꺼냈다.


"설마 네가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당해? 내가?"


"그러니까 그런 좀비들한테 쫓긴 거잖아."


"…오르카에서 여기로 온 게 아닌가?"


"뭐?"


"150년 전 말고 여기로 떨어진 게 아니냐고."


남자는 창밖의 작아져가는 테마파크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냐?"


일부러 지은 듯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남자가 말했다.


"짜증나. 그딴 표정 짓지 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짜 오르카에서 여기로 직행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기억이 작살나는 오르카라고!"


"기억 안 나? 내가 진짜 네 세이브포인트라도 된 것 같다고 농담까지 던졌는데? 그래서 한 대 맞았는데?"


"안 난다고!"


남자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가늠하듯 눈쌀을 찌푸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에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여기가 아니라 공원으로 떨어젔다. 2019년의 그 공원에. 나는 거기서 신문을 펼쳐보고 있었다. 너는 폐하와 함께였다. 나는 그 방을 제공했고, 2021년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네 폐하가 자살했다. 너는 울어서 불어 터진 눈을 하고 말했다. 2년 동안 말 한마디 없으시던 폐하가, 식사 중에 갑자기 자결하셨다고. 내가 보는 눈 앞에서. 포크로, 목을 찔러서. 그 일이 있은 직후, 2022년. 너는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이다.


"…아."


담배를 손에서 떨어트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어때?"


맞는 것 같다.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언제야?"


"2098년. 움직이지 마 봐." 남자는 기계같은 것을 내 머리에 댔다가 뗐다. "400살 조금 안 되나.  정확히 측정은 안된 것 같은데 얼추 맞네."


"그건 뭐야?" 


남자의 손에서 푸른색으로 빛나는 숫자를 가리켰다.


"네가 170살 정도 됐을 때 보여줬던 건데. 네가 몇 살인지 알 수 있는 물건이야."


"아, 아… 그래. 그랬지."


"네가 이번에도 150년 전으로 떨어졌다는 건 떠올랐다 치고, 그러면? 2022년 이후도 기억 안 나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틀 전에 안 거지만 말이야. 아까 내 손에 죽은 리리스. 그 녀석이 속한 카르텔 놈들한테, 넌 졌었어."


"카르텔...?"


"너랑 내가 함께 조져버린 적 있던 그 클럽 놈들 말이야. 걔들한테 졌다고."


"...아. 거기, 모니터 옆에 죽어있던 남자. 그래. 그 남자가 이끌던."


"맞아."


"네가 죽였어?"


"그래."


"내가… 그런 놈들한테 졌다고?"


"그런 놈들이라니. 살상용 리리스인데. 거기에 범죄사양. 넌 못 이겨."


"아니… 분명 오르카의 리리스는 좆밥이었는데… 어라."


"뭐, 또 뭐가 떠올랐어."


"개새끼야."


발날로 남자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으아아악! 뭐야 갑자기!"


"지금 또 기억났어. 너 그랬지. 오르카의 리리스가 호위용이래도 내가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씨발아. 개좆밥이더만."


"이, 이 우라질 년이 이거! 머리 싸매고 끙끙대길래 괜찮나 싶더니!"


"…미안. 갑자기 열 받길래."


나는 남자와의 대화로 차근차근 기억을 떠올려갔다. 영화에서는 흔한 장면이지만, 다른 이를 통해 기억을 찾아간다는 건 참 기묘하면서도 불쾌했다. 일반적이라면 공백이 메꿔지는 감각에 안도했을 것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기억들 뿐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명료해져 이미지화 할 수 있는 정도로 선명해졌다. 고통스러운 것도 아랑곳 않고 목에 박은 포크를 더욱 깊이 처박으시던 폐하. 이미 죽은 폐하를 흔들던 나. 목적지 없이 마냥 걷던 나. 엉겨붙던 똥파리들. 원더랜드의 습격. 이전과는 달리 개처럼 다뤄지지 않았던 블랙 리리스. 그래서 패배해버린, 나.


대관람차는 꼭대기에 다다라 반환점을 넘었다. 테마파크의 상공에서 형형색색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들 사이에서는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지상의 인간들에게 눈부신 판타지를 내려주는 중이었다. 


기억이 모두 돌아와 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이 테마파크에, 세계가 멸망하기 전 시간대에서 방문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 남자와. 

그리고 다른 한 명과.


"나갈래." 나는 매달리듯 중얼거렸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


"이제 내려가는 중이야."


"그게 아니라, 떠나고 싶다고."


"아직 위험할 텐데?"


"제발… 싫어. 이제와서 떠올리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만 품고 있다면, 그것은 저주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이란 것 자체가 저주다. 의사와 관계없이 뭐든 트리거가 되어서 제멋대로 떠올라버린다. 의식과 감각을 침습해온다. 그런 기억들은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잊혀지지도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지금 나를 박살내기 시작한 그것은 200년도 더 된 기억이다. 


차라리 기억상실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떠올릴 시도도 떠올리지도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시꺼. 일단 내려."


생각이 말로 나갔는지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대관람차에서 먼저 내렸다.


"기억상실 같은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한 번 있었어. 이런 적. 당신이랑 그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던 날 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브가 오기 전, 2주 정도…일까."


"그러냐."


"뇌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걸지도… 그냥 잊고 채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가 목표도 잊으면 어쩌려고 그래. 폐하를 살리고 짝이 될 거라며."


"그런 건 기억해야지."


"애같이 굴기는. 기억이란 게 그렇게 선택적으로 다룰 수 있는 거였으면 기억이라 할 수 없어. 잊고 싶으면 모조리 잊는 것 밖에 방법이 없지. 그러기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죽는 거겠지."


"그래. 끝의 끝에 가서야 잊는 게 허락 될 거야. 그러지 못하는 지금은 계속 쌓여갈 수 밖에 없어. 인간들은 그걸 삶이라고 불러."


남자는 철학과 심리학에 심취한 듯한 말투로 나를 타이르듯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 너한테는 아무것도 끝난 게 없잖아. 수명은 한참이나 남았고 네 폐하는 또 나타날 거야. 다시 할 수 있어."


"끝난 게 없는 게 아니라, 끝나지 않는 거겠지."


"...…어휴. 그래.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죽고 싶었어."


"언제는 안 그랬냐."


"오르카에서, 차라리 그렇게 끝나버렸으면 했어."


"그래. 근데 네 말대로 끝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끝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미래를 열어보라고. 바보야. 제발."


"ㅋㅋㅋ… 이 새끼는 남 일이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네."


"언제는 안 그랬냐."


대관람차에서 꽤 멀어졌다. 분장을 가장했어도 언제까지 코트 한 벌만 걸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알몸도 아니고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슬슬 발에 무리가 와 우리는 광장의 벤치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일단 이걸로 참아 봐."


발이 아프다고 하니 남자가 신발을 사왔다. 


사오긴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신기엔 꽤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신발이 아니라 고양이를 사오면 어떡하란 거야. 왜 앞코에 눈깔이 달린 거냐고."


"아 말 많네. 푹신하길래 이걸로 샀다 왜. 그래서 신을 거야 말 거야?"


바꿔오라기도 뭐하고, 하는 수 없이 신기로 했다.








* * *







세번째 2098년. 할로윈.


빨대로 밀크 쉐이크를 쪽쪽 빨아마시는 남자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올랐다. 자동차 전용 출입구는 금방이었고, 산길에 난 차도를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 창 밖의 하늘에는 해가 없었다. 별도 없었다. 달도 없었다. 해와 바톤 터치를 해준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산길을 비추는 것은 가로등과 전조등 뿐이었다. 그 밖에는 모두 어둠. 그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이 왠지 기분 좋았다. 모두가 이 산길에 한해서는 의지할 것이라곤 두 가지 빛 뿐이라는 게, 공평하게 느껴졌다.


차창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차내의 난방과 무드 등이 안락함을 선사해 긴장된 몸을 풀어버린 것도 있었다. 이대로 잠에 몸을 맡기려다가, 통제구역을 벗어나기 전에 보았던 켈베로스가 떠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남자 옆에서, 자도 되는 걸까. 이 남자에겐 보여줄 건 다 보여준지 오래인데, 새삼 그런 걱정이 들었다.


괜찮겠지. 이 남자는 이상한 인간이어도 그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할 인간은 아니다. 신뢰한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부분은 믿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와 나는 어떤 사이인 걸까. 잠에 들기 직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유사 부녀가 같은 것 말고, 어떻게 규정해야 좋은 사이인 걸까.


"야. 일어나."


눈을 뜨고 보게 된 창 밖에는 고급진 상가 건물에나 달려있을 것 같은 주차장이 있었다. 살짝 열린 창으로 밤거리의 북적거림이 느껴졌다.


"옷 사왔으니까 입고 나와."


남자가 던진 쇼핑백을 잠결에 부스럭거리며 뒤졌다. 난방이 꺼져 추웠다. 옷의 디자인 같은 건 따질 정신도 없이 입고 봤다.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 쪽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내 쪽으로 돌았다.


"잘 어울리네." 라고 남자는 말했다. "여벌 옷도 몇 벌 사놨으니까 가져 가."


남자는 열린 트렁크를 뒤져 쇼핑백 몇 개를 더 건넸다. 대충 살펴봐도 계절 별로 전부 들어있는 듯해서 상당히 무거웠다.


주차장을 나가 길을 걸었다. 또렷히 기억하는 곳이었다. 백 년 전이든 이백 년 전이든 몇 번이고 걸었던 그 번화가였다. 


"여기까지." 내게 빌려줬던 코트를 다시 걸친 남자가 말했다. "지금 네가 입은 옷에 필요한 건 넣어뒀으니까, 잘 써."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다. 입은 게 청바지라는 걸 이때 알았다.


작고 딱딱한 게 손에 잡혔다.


"널 인간으로 만들어 줄 물건이야. 기억하지?"


"미끼잖아. 철충 낚는 용으로 썼다던."


"맞아. 기억해줘서 조금 기쁘네. 아 그리고, 단말기도 넣어뒀어."


2098년이기 때문일까. 밤거리 특유의 가라앉은 시끌벅적함은 바이오로이드가 끼어있다는 것만으로 아주 퇴폐적이었다. 네온을 가장한 홀로그램 간판 아래에서 대놓고 주사를 놓는 약쟁이들. 거의 벗다시피 하고 있는 사유재산들. 골목 어귀에서 유린 당하고 있는 공공재들. 통제구역 같은 것만 뺀다면 테마파크 쪽이 훨씬 건전했다.


역겨워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게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한 이후의 일반적인 밤거리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풍경이다.


그래도 씨발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도 한 번 씨발이라 내뱉었는데, 남자가 팔을 뻗어 나를 멈춰 세웠다.


"이 시간대가 되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꽤 끈덕지네."


남자가 바라보는 곳에는 시티 가드와 사유재산으로 보이는 몇몇 컴패니언 개체가 모여 있었다. 녀석들은 지나가는 인간들을 불러 세워 양해를 구하고 뭔가를 캐묻고 있었다. 그게 불쾌했는지 몇몇 인간은 녀석들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우리를 찾고 있는 거야."


보자마자 알 수 있던 것이었다. 탐문이나 단속 중인 녀석들은 가리고 싶어도 그런 아우라를 술술 풍긴다. 인간도 그렇고, 아무리 그런 것에 특화시킨 바이오로이드가 있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종류의 아우라다.


여차하면 튀어야 한다. 피로가 가시긴커녕 잠이 길지 않았어서 되려 몸이 더 무더워졌지만, 뛸 수는 있는 상태였다. 


"쩔 수 없지. 쓸까."


코트 안주머니에서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고 말했다.


"혹시, 이것도 기억 나?"


"뭐가?"


"이거."


남자가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새된 소리를 울려대며 근처를 지나가던 여자들이 움츠러든 걸 시작으로,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떤 건물에선 스파크가 튀어 작은 비명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빛이 모두 죽어버렸다. 어둠이 깔렸다. 인간들 하나하나가 검은 점토로 빚어낸 상처럼 보였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보이는 건 윤곽 뿐이지만, 나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브루노 마스라고 하면 기억 나?"


2098년에는 존재하지 않을 가수가 갑자기 남자 입에서 튀어나왔다.


"글쎄."


"이제 슬슬 가야겠어." 남자의 윤곽이 바쁘게 움직였다. "방금 쓴 건 알파거든. 이제는 내가 쫓길 거야."


"누가 당신 같은 인간을 쫓는다는 거야. 이쪽 차원의 인간도 아닌데."


"케스토스 히마스 고유의 코드가 있어. 그게 나돌아다닌 게 돼버렸고. 알파는 지금 펙스 사옥에 갇혀 있는데 말이지. 공개된 적도 없는 비서가 한순간만 둘인 게 된 거야. 그걸 포착하고 펙스 녀석들이 몰려 와. 분명히.


너도 어서 빠져나가라며 서두르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그래서, 결국 뭐야?"


"뭐가?"


"왜 나를 도운 건데?"


"갑자기?"


"당신 이젠 절대로 안 도울 거라며."


"그런 건 또 기억하냐…"


"그래서, 뭔데?"


"그게 지금 중요해?"


"그런 건 아닌데, 대답해 봐. 왜?"


"변덕이야."


"변덕?"


"그래. 변덕."


"편리하네…"


"너한테 나쁠 건 없잖아. 통제구역에서도 그렇고."


"…그래 뭐, 고마워."


"어우. 그 입에서 고맙다는 말 듣기 참 어려운데. 됐다. 어서 가."


"잠깐."


"거 참. 왜?"


"어떻게 나를 그렇게 쉽게 찾아?"


"뭐라?"


"아르망 추기경이 나 뿐인 게 아니야. 차원이란 것도 한 두개가 아닐 거야. 그런데, 어떻게 나를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냐고."


"시간 없어. 어서 가."


"빨리 말해주면 되잖아."


"너 뿐이야."


"뭐?"


"너 같은 아르망은 건 너 뿐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검색창에 적어서 검색해보면, 결과가 하나만 나와. 그런 거야. 그 뿐만이 아니야. 내가 관측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너 하나 뿐이야."


"이, 이해가 잘 안되는데."


"지금의 400살 먹은 아르망 외에는 찾을 수 없다고. 100년 빠른 500살의 아르망이나, 300살 시절의 아르망이나, 200살 시절의 아르망에게 갈 수는 없어. 여긴 참… 이상한 차원이야."


"내 미래나 과거에 개입할 수 없다는 거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왜 계속 150년 전으로 떨어지는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개입할 수 없다기 보다는, 너는 오직 이 시간대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그, 그건 이상하잖아. 나는 분명 지금 흐르는 시간 속에 있는데…"


"모른다니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모르겠지. 분명한 건 네가 보내온 시간은 모두 존재했었다는 거야. 그걸로 됐잖아."


"그런 말을 해놓고 믿으란 거야?"


"내가 널 기억하잖아."


"도대체가…"


"괜한 소리를 했나. 그럼 이거 받아."


"안 보여. 뭔데?"


"시간 날 때 봐. 이런, 슬슬 돌아오려나 본데. 아르망. 이번엔 성공해라. 폐하를 구해."


"……아, 그래. 어서 가."


남자의 윤곽이 멀어져간다. 정전에 항의해대는 볼륨들 속으로 향한다. 어둠에 집어삼켜지듯 남자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남자가 건넨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눈에 신경을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빛이 살아났다.


"아르망!"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번화가의 한복판이었다. 남자는 나를 부르고 그저 그곳에 서있는 채였다.


아니. 그저 서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살아난 빛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입이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가깝지도 않다. 살아난 빛에 환호하는 소리가 방해된다. 그래도 나는 모든 힘을 눈과 귀에 싣는다. 어떻게든 알아들어 보려고 한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도.


남자는 내게 한쪽 손을 들어 흔든다. 그런 모습이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행인들에 가려져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거대한 인파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났다. 단체 관광객인 듯하다. 남자는 인파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다.


그 인파가 지나가서 다시 시야가 트였을 때는, 남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 *







남자가 마지막으로 건넨 것은 편지봉투였다. 편지봉투에는 당연히 편지가 들어 있었고, 편지 외에 다른 것도 있었다.


나는 그 다른 것, 사진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았다. 꽃비와 햇살이 함께 내리는 배경으로, 네 명의 남녀가 서있는 사진. 사진 속의 그들은 모두 하얀 셔츠나 블라우스 위에 검은 앞치마를 걸친 차림이었다. 


그 중 둘은 나와 남자였다. 사진 속 나는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미소를 지으며 사진 너머의 나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긴 말 필요없이 존 윅을 닮은 외모로, 양 옆에 선 풋풋한 아이들의 어깨에 각각 한 손씩 걸친 모습이었다.


이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어디서 봤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 사진 대신 챙겼던 cd플레이어도 기억하고 있다. 잊혀졌으면 했던, 또 다른 기억들이었다.


……조금 여유로워지면, cd플레이어를 사자고 정했다.


사진을 봉투에 넣고 편지를 펼쳤다.


'아르망에게.


조급해서 그랬는지 당연히 했어야 할 걸 못했어. 일단 그것부터 할게.


안녕 아르망. 네 시간을 기준으로 거진 200년만에 다시 본 게 되네.


좋아. 인사는 했고.


아르망.


네가 건강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꽤나 안좋은 꼴을 당해버렸구나.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살고 있나 알아보러 온 게 다행이었어. 조금만 미뤘다면 어찌 됐을지.


어쨌거나 무사하게 됐으니 그 시설 얘기는 그만 하자. 할 얘기는 따로 있거든.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니 최대한 간략하게 적을 게.


아르망.


혹시 기억하고 있니. 바이오로이드의 기대수명은 천년이라고 했던 것. 몸은 늙지도, 수복을 통해서 죽지도 않지만, 뇌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


뭐, 대충 짐작이 가지?


너는 이제 400년을 바라보고 있어. 떨어진 횟수로 보자면 세번째, 네 폐하로 보자면 네번째 뵈러 가는 게 되지. 


테마파크에서 나는 너에게 희망적으로 굴라는 듯이 말했지만, 조금은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러는 이상으로 신중해야 할 것이고. 


이제 2700살이 넘은 내가 말해주자면 말이지. 시간 정말 금방가거든. 누군가는 천년이란 시간을 영생과 다를 게 없다 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천년 쯤은 금방이야.


재수없는 소리를 해버렸네. 도움이 될 만한 걸 적어야 할 텐데. 


아, 그래.


네가 지금부터 읽을 내용을 조언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좋게 받아들여 봐.


아르망.


폐하를 포기해.


목숨말고, 사랑을 포기해.


모두 가질 수는 없어.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은 쪽을 골라야지.


넌 분명 모르겠지만,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사랑을 얻는 게 더 어려울 거야.


네가, 그 공원에 떨어지고나서 말했거든. 


이번에도 폐하는, 콘스탄챠와 맺어졌다고.


아르망.


운명을 믿니?


믿는다면, 너의 폐하와 콘스탄챠는 정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세번의 헤어짐과 세번의 맺어짐. 


그야말로 운명이잖아.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참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네 폐하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정말로, 운명이야.


그러니까 아르망.


폐하의 사랑을 얻는다는 건 그 둘의 아름다운 운명을 부수겠다는 것과 진배없는 소리야. 


이번에는 그러지 마.


네가 그랬지? 


저주 받았다고.


혹시 모를 일이야.

그랬다가는 더 큰 저주에 걸려버릴지. 

더 혹독한 벌을 받을지.


이런 말을 하면 넌 또 비웃겠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건 사랑이니까.


아르망.


그만 폐하를 놔 줘.


폐하를 구하는 것에만 집중해.


그걸로 구원을 찾아.


잊지 마.


너는 착실히 늙어가고 있어.


죽어가고 있어.


영원히 떨어지고 영원히 기회를 얻는 게 아니야.


시간은 한정되어있어.


알겠지?


부디 이번에는 네가 무탈하길 바랄게.

두 번 다시 보는 일이 없길 바랄게.


여기까지야.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참 이상한 기분이야. 너는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 편지를 쓴다는 건.  그냥 네가 깨어나면 해도 될 아야기인데 말이지.


하지만 면전에서 이런 소릴 했다간 너는 날뛸 게 분명하니까, 어쩔 수 없네.


마지막에 쓸데없는 소릴 적었네.


그럼 안녕, 아르망.


무슨 일 있으면 단말기로 연락해. 뒷면에 번호 적어뒀어. 안 까먹었으면 상관 없고.


신경도 안쓰겠지만 LRL은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








* * *








편지를 꾸기고 찢고 태웠다.


운명? 그래. 그 둘은 운명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둘이 운명이래서 반드시 맺어져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웃기지 마라. 폐하는 내게도 운명이다. 운명같은 사람이다. 만약 '운명 그 자체'와 '운명같은' 것은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나는 폐하를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겠다. 


진짜로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한들, 그 운명의 상대와 마주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고 일생을 보내는 인간들이 대다수다. 전혀 운명적이지 않은 상대와 맺어지는 인간들은 그 이상으로 많다.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 폐하를 운명이라 하지 않아도, 맺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폐하를 포기하지 않겠다.


목숨도, 사랑도.









* * *








217x년.


멸망 속에서 웅크리고 공백과 다름없는 시간을 지나 드디어 오늘이 왔다. 

오늘, 폐하가 나타나신다.


어디서 나타나시는지는 지난 시간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21번 분대의 뒤를 밟을 필요 따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폐하가 나타나실 위치에 마련한 거점에 콘스탄챠와 그리폰이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콘스탄챠가 아니라면.


처음에 폐하를 맞이하는 것이, 나라면.


그러면 폐하는 나를 운명이라고 여겨주시지 않을까.


……반 백년을 보내온 거점에서, 먼저 그리폰을 죽였다. 그리폰과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년도 아니었기에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죽였다. 그럴 필요도 없고 정말로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모처럼 기분 좀 냈다. 폭력만큼 환기에 좋은 것도 없으니까.


"어째서… 이런 짓을…"


의자에 묶인 콘스탄챠는 울먹거리며 이미 죽어버린 그리폰과 나를 번갈아봤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뭔데."


"네…?"


"네가 뭔데 계속 폐하를 차지해?"


팬텀을 콘스탄챠의 하복부와 늑골 부근에서 굴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네가 가질 거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그리폰은… 살아 있는 건가요…?"


뺨을 후려쳐버렸다.


"닥쳐. 묻는 건 나야. 빨리 대답해. 이번에도 네가 가지려고 여기 온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렇겠지."


슬슬 시간이다.


"눈 감아. 방금은 좀 화가 나서 그런 거지, 넌 덜 고통스럽게 보내줄게."


돌연 콘스탄챠가 울음을 멈추고 낯빛을 바꿨다.


"덜 고통스럽게라니…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런 짓을… 왜, 그리폰이 그런 꼴을 당해야만 했나요."


"입 안 닥쳐?"


뺨을 쳤다. 그런데도 콘스탄챠는 꿋꿋히, 나아가 더 굳건한 얼굴을 만들었다.


"천벌을 받으실 거에요."


저주나 받아.


"윽!"


왜, 하필이면.


"당장 풀어주세요! 지금이라면 당신을 즉결처분이 아닌 저항군 징계위원회에 회부해달라 말해 볼 수 있어요. 그,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그리폰을…"


아니야. 정신차려.


"닥쳐."


그냥 그 아이를 닮은 년일 뿐이야.


"아… 윽…"


인간이 아니야.


"닥치라고."


바이오로이드야.


"켁… 큭…"


"닥치란 말야!"


죽여도 죄가 아니었던 년들이야.


"죽어. 죽어!"


쥐어짜버려.


"에으윽… 케흑…"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저질러버려. 


"빨리 죽어버려!"


넌 이미 나쁜 년이잖아.


"죽어버리라고!!"


나쁜 짓 좀 더 한다고 달라질 거 없어.


"죽어. 죽어. 죽어!"


그리고, 어차피 폐하는 모르잖아?


"죽어버리란 말이야!"







* * *






해냈다.


내가 폐하의 운명을 차지했다.


콘스탄챠와 폐하 사이에 이어져있던 붉은 실을 끊어내고, 내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세번째도 폐하는 콘스탄챠에게 첫눈에 반하셨었지.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섰다.


폐하가 보시게 되는 최초의 세계에, 내가 서있게 된다.


아아.


이렇게 황홀할 수가.


아아아아아아.


진즉에 저질러 버릴 걸.


"온다…"


드디어.


햇빛이 쨍쨍한 폐허로 유성이 떨어진다.


나의 유성.


폐하.


온다.


벌린 두 팔을 하늘에 뻗는다. 그 누구도 몰랐다. 언젠가 당신이 내려 올 거라는 것은 나만이 알고 있었다. 


백년이백년삼백년사백년사백오십년나만이알고있었다나뿐이었다나만이당신을안다앞으로도이제부터도당신은나만이안다그러니까당신은날받아줘야해아무에게도주지않아당신은내거야팔도다리도몸통도계집애같이예쁘장한그얼굴도모두내거야이번에야말로내거…


"내…거야?"


뭔가 이상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뭐였지?


"발포음…?"


이상하다.


유성치고 너무 오래 빛난다.


아니야.


빛나는 게 아니잖아.


폭발했잖아.


유성에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살핀다.


"왜…"


먼 상공.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한 번 더 울려오는 발포음.

공기를 울리는 굉음.


"왜 지금 나타나는 건데…?"


유성에서 또 폭발이 일었다.


이제는 알았다.


저격 당한 것이다.


유성이 지면에 떨어졌다. 유성이라고 할 수 없는 맥없는 추락이었다.

나는 떨어진 곳으로 다가가, 불 속에 있는 그것을 봤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될 그것을 봤다.


폐하는 불타 죽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현생이 너무 바빠서 많이 늦었습니다… 늦은 만큼 분량이 늘어나 버렸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arca.live/b/lastorigin/54845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