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회관

2002년 출간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놀라운 책이다. 저자 김완섭은 사실에 기반한 용기있는 저작을 출간했다. 그는 무수히 많은 고소고발에 직면하였고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일부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청소년유해도서'로 선정되었다. 저자 김완섭은 이렇게 주장한다.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Fichte)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저항을 호소했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 헤겔(Hegel)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왕정과 관료 체제를 청산하고 국민주권에 입각한 혁명이념을 전파하는 것에 주목했다. 헤겔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불타는 프랑스 국민군대를 보며 감동받았고 나폴레옹이야말로 유럽의 봉건 왕조를 타파하고 근대문명을 여는 시대의 위대한 개척자로 보았다. 당시 많은 유럽의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이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으려했다.

 

헤겔은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 국민은 오히려 프랑스 혁명군의 편에서 구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다. 반면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박중양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들은 헤겔의 입장에 서서 나폴레옹을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보고 그의 정복전쟁을 세계정신의 활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가 되었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하였다.... (중략)....

우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를 보는 데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은 악(惡)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그 의미가 도전받고 있다....(중략) .....일본의 대만, 조선, 중국 진출은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민중을 억누르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조선, 대만, 만주)은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아 보다 인간다운 삶의 제반 요건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산둥성이 대한민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인들은 땅 덩어리가 넓어졌다며 좋아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둥성 9천만 인구를 먹여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나지 않을까. 산둥성의 중국인들을 군대를 동원해 공포정치를 펴고 수탈만 하면서 단물만 빼먹어야 할까. 그런 경제시스템이 지속가능할까. 산둥성의 중국인들이 한반도와 서울로 몰려온다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큰 골치거리가 아닐까. 저자 김완섭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일본의 조선 통치가 수탈의 개념만을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좌옹 윤치호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명언을 빌려 '애국심은 건달의 마지막 핑계'라며 상해임시정부의 위선자들을 공격한 바 있다. 일본은 35년간 조선에서 놀라운 일을 수행했다. 민족주의의 틀을 부수어야만 대한민국의 역사를 세계사적 의미에서 성찰할 수 있지 않을까.

 

 

'친일파를 위한 변명', 휼륭한 저작

 

 

대만 사람들은 식민지 트라우마가 없다. 대만인들은 일본에 호의를 표시한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트라우마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이제 한국인들이 조선 500년 봉건야만정권을 붕괴시킨 일본의 조선 진출에 대해서 좀 더 넓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때이다. 35년간 근대 문명을 전파한 일본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지금의 발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안중근과 김구 동상 철거를 논의해야 될 때가 되었다. 속 좁은 민족주의는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독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경찰 병력 40여명을 철수하는 것도 고려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대한민국에는 일본 35년 통치를 찬양한 책들이 없다. 김완섭의 저작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휼륭한 책이다. 역사는 과거이자 현실이며, 미래를 개척하는 무기이다.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는 "역사가란 역사를 그릇되게 바라보는 민중의 눈에서 백내장을 제거해주는 안과의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육당 최남선의 염원처럼 대한민국은 휼륭한 역사학자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1905~1945년은 '위대한 40년'이었다. 한국인들이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한다. 아프고, 또 혼란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어쩌랴, 그러나 이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한국과 일본은 우정과 친선을 이어갈 수 있다.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해야하는 이유

 

 

1. 위안부 소녀상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결코 득(得)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잘못된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잘못된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일본을 악의적으로 우롱한 이미지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5. 반일선동 세력들의 선전세뇌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6. 나눔의 집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짓과 과장 증언에 기초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7. 일본인들에게 깊은 모욕과 분노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8. 미일한 3국 군사동맹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동상을 철거해야 하는 5가지 이유

 

"고종과 조선 왕실의 흡혈귀들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너희가 죽거나 우리가 죽거나 양자택일뿐이다"

 

 

20세기초 송병준, 이용구 등이 주축이 된 일진회 혁명가들의 신념이었다.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거대한 우상같은 존재이다. 나는 안중근 동상을 철거하자고 감히 호소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안중근은 해방후 70여년간 지속된 반일세뇌교육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 안중근 동상은 일본군이 침략군이 아닌 해방군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3. 안중근은 고종을 암살하지 않고, 반대로 조선을 구한 세계적 혁명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기 때문이다.

 

4. 안중근 동상은 일본 35년 통치시기가 조선 2천년 역사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5. 안중근 동상은 21세기 한국과 일본의 우호와 협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피해의식을 부축이는 과격무식집단, 대한민국 역사학계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한국인들의 피해의식을 부축여 한일 우호를 가로막는 과격무식집단이다.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사실을 왜곡하면서 국민으로 하여금 조선 2천년 역사에 허황된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허황된 자부심이 반일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국인이기 이전에 세계시민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깊이 직시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역사를 왜곡한다고 화를 낼 일도 없을 것이며 일본 35년 통치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도 않을 것이다. 21세기까지 지속되는 반일 민족주의라는 종교적 미신에서 한국인들이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Korea twist History) 한국인들이여, 커다란 마음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실을 직시해보자.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은 21세기 동북아시아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우호와 친선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언론, 정신차려라

 

나는 한국 언론의 잘못되고 왜곡된 보도가 반일 감정을 국민들에게 확산시킨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보도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지금, 일본 열도는 위안부 문제로 인해 아사히신문 불매운동조차 일어날 조짐이다. 

 

 

시오노 나나미도 '고름을 쥐어짜는 심정'으로 세계를 향해 일본의 명예와 위신을 추락시킨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가 강경대응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너무 과장되었다. 한국 언론은 집단자위권에 대해서 헌법9조를 지키려는 일본 시민들의 움직임을 주로 다룬다. 

 

일본인들은 집단자위권을 대체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노벨평화상 후보로 평화를 상징하는 '헌법9조'가 선정되었다며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우려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덫(trap)에 빠져있는 모습이 한국의 지식집단과 언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