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가혹하고, 잔혹하다.

잔인하며 또한 아름답다.


'운명의 상대라.'


나는 한창 단장중인 니토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지나친 상대가 운명의 상대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그런건 없다.

지나친다면 그걸로 끝.

아무리 운명이 점지해준 사이라고 해도 둘은 그저 지나쳐 남남이 되어버릴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둘이 우연히 마주쳤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에서 둘은 서로가 운명의 상대임을 알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있다.


'아니.'


그저 마주친 것 만으로 운명의 상대임을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이어지지 않는 인연따위는 없겠지.


마주치고, 인연이 닿아 다음으로 이어질 기회를 얻었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 했을 때.


그 때 비로소 서로가 운명의 상대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면?'


그렇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어진 인연은 인연인 채로 남는 것이다.

인연과 운명은 다른 이야기니까.


인연의 푸른 실이 맞닿아 이어지는 이야기와.

운명의 붉은 실을 끌어당겨 이어지는 이야기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우연히 맞닿은 인연에 이어.

운명까지 완벽하게 들어맞는.

그런 그림같은 만남이 있다면.


그건 어떨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응?"


단장을 마친 니토리는 생글생글 웃고있다.

미소가 자연스러워 마치 평소에도 자주 웃는 사람처럼 보인다.


"내 앞에서는 연기할 필요 없지 않아?"


"아. 응."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온 니토리.


"그래서. 어때?"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가."


계획에 차질은 없다.

그대로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지.


"내가 나설 차례는?"


"곧이야."


"알았어. 그런데 그 녀석 숙맥 아니야? 먼저 고백할 만큼의 위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아니. 의외로.."


니토리는 말 끝을 흐리며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의외로 뭐."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분명 고백해 올테니까."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니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데 그 여우가면은 평상시에도 쓰고있을 셈이야?"


"왜?"


"불량해보여."


"난 원래 그래."


나는 딱히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불량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게 정답이겠지.


"..그래. 다녀올게."


그 말만 남기고 니토리는 보따리를 들고 또 다시 마을로 향했다.

나는 목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잠시 사색에 빠져들어간다.


.

.

.


오늘은 가게에서 일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점심시간에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나와달라는 니토리의 부탁이 있었다.


'무슨 일일까?'


니토리를 볼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얼마 안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천천히 광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니토리와 처음 대화를 나눈것도..'


광장에서 낙담한 나에게 말을 걸어온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땐 내가 이렇게 니토리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는데.

사람의 일이란, 때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법이었다.


광장에 도착하니 니토리가 분수대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니토리가 오늘따라 어쩐지 아름다워 보인다.


"맹우! 여기야!"


"오늘은 무슨일로 부른건가요?"


나는 니토리 옆에 살며시 앉으며 물었다.

니토리는 들고있던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 헤치며 말한다.


"밥 아직 안먹었지?"


"안먹었죠."


밥을 먹을 틈은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광장으로 나온것이니.


"도시락 싸왔어."


"도시락이요?"


그렇게 말한 니토리의 보따리에서 나온것은 진짜 도시락이었다.

뚜껑을 열자 정성스레 놓인 반찬과 밥이 눈에 띈다.


"같이 먹자!"


"저 때문에 일부러 싸오신건가요?"


"응. 왜? 혹시 너무 부담스러웠나?"


부담스럽기야 하다.

그렇지만 부담스러운 감정보다도 기쁘다는 감정이 앞서 나왔다.


"아뇨. 기뻐요."


"헤헷."


니토리는 웃으며 수저와 도시락 한 통을 내게 건네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어때? 내가 직접 만든거야."


"마, 맛있네요."


"다행이다!"


반찬이 조금 짜다.

그리고 밥 중앙에 오이가 통째로 들어있다.


'갓파라서...?'


"역시 밥에는 오이지!"


그렇게 말하며 니토리는 오이를 와작와작 씹어먹고 있다.


식사를 마친 후 뒷정리를 하고 있으려니 니토리가 말을 걸어왔다.


"내일은 쉬는 날이지?"


"네."


휴일에는 늦게까지 잠을 자거나 할 일 없이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니토리를 만난 이후로 휴일은 니토리와 시간을 보내는 날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변화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안해 맹우. 내일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만날 것 같아."


"그, 그런가요."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특별히 도시락을 싸온거라고 할 수 있지."


'아아.'


어쩐지.

니토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행위를 하진 않으니까.

나는 나름대로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점심시간 끝나겠다. 이만 가볼게 맹우."


"아... 네."


빈 도시락통을 챙겨 떠나가는 니토리.

점심시간은 아직 꽤 남아있다.

나는 니토리가 떠나버린 빈 자리를 보며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느낀다.


'붙잡았다면 싫어했을까.'


점심시간동안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던 내가 나쁜걸까.


'나와 니토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니토리는 맹우라고 불러주지만.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흔히 말하는 짝사랑의 관계다.


나는 조금 더 분수대에 앉아있다가 가게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고, 하루가 끝나간다.

나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쳤다.


그리고 찾아온 아침.

평소처럼 문을 열고 나온다.

아무도 없다.


'고요하네.'


아침의 찬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기에 문을 닫고 도로 들어온다.

오랜만에 잠을 충분히 자게 되었지만 그게 그리 기쁘진 않았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소리로 하품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뭘 하면 좋을까.'


근래의 휴일에는 늘 니토리가 어딘가로 데려가 주거나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했다.

그래서일까 도대체 니토리를 만나기 전의 나는 무엇을 하며 휴일을 보냈는지 떠올릴수가 없었다.


'산책이나 할까.'


그렇게 나는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를 대충 손질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차피 누굴 만날것도 아닌데 신경써서 무엇하랴.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고민한 뒤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물 소리를 듣다보면 휴일을 알차게 보낼 방도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


광장에 도착한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활기차게 사람들이 오가고 있을 광장이 텅 비어버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에 사람이 없다니 드문 일이네.'


분수대에 앉는 대신 분수대 근처를 빙글 빙글 돌아다니며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에 변함이 없다면 재미도 없는 법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녔을까.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광장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뗀 순간.


멀리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니토리..?'


나는 나도 모르게 분수대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가가서 말을 거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니토리의 곁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두 사람이 다가오자 나누는 말의 소리가 조금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데?"


여우 가면을 쓴 사내가 말했다.


"진짜. 진짜 조금이면 될 것 같아."


니토리가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응?"


그 순간, 여우 가면 너머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여우 가면을 쓴 사내가 니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우 가면을 쓴 사내는 니토리의 뺨을 움켜 잡는다.


"커헉!"


"너 내가 좆으로 보이냐?"


'!!!'


"이..이거나허.."


니토리는 뺨을 붙잡힌 채 비틀대며 사내의 팔을 툭 툭 치고 있다.


"놔달라고? 좋지."


여우 가면을 쓴 사내가 니토리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는다.


"커헉!!"


니토리의 고통섞인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가 아주 호구로 보이지?"


사내는 니토리의 머리를 발로 짓밟는다.

나는 지금이라도 뛰쳐 나가 말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며 움직이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여우 가면 너머로 엄청난 살기가 느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

여기서 개입하면 확실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나를 집어 삼켰다.


그 와중에도 니토리는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는다.


"그.. 그만..."


"그만? 그만 해야 되는건 네 알량한 사랑놀이고!"


콰직!


사내가 발을 굴렀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니토리의 머리가 짓밟힌다.


니토리의 푸른색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짓뭉개져 간다.


그걸 모조리 보고만 있어야 했던 나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받는데도 나약한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금니가 깨져버릴 것 같은 기세로 맞부딪힌다.


화가 머리 끝 까지 차올라서 터져버릴 것 같은데 저주받을 몸뚱아리는 움직이질 않는다.

움직이려는 순간 목을 옥죄는 것 같은 공포에 잠식당해 다시 주저앉아 버린다.

나는 그렇게 분수대 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똑바로 하자. 응?"


"아..알았..케헥.."


그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떠나가는 여우 가면 사내와.

그 뒤를 비틀거리며 일어나 허둥지둥 쫓아가는 니토리가 보였다.

나는 대체 무슨일이 벌어진건지 알 수가 없어 비통했다.


'니토리...'


여우 가면을 쓴 사내는 분명 니토리를 구해준 것이 아니었던가.

수상하긴 했어도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도대체 그간 저 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나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짚고있던 손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커헉.."


숨쉬는 것 마저 몸이 잊어버렸던 것인지 순식간에 숨이 차 올랐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간신히 숨을 내쉬며 분수대에 걸터 앉았다.


"젠자아앙.."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죽이고 싶다.

죽고 싶다.


니토리가 상처받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 벌어진 모든 현실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젠자아아아아앙..."


나는 혼란에 빠졌다.

세상이 미친듯이 회전 하는 것 같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해는 저물고.

나는 그저 비통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그 다음날도.


니토리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도 니토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어떠한 표정으로 마주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몇 달이 되었고.


나는 니토리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처럼의 휴일.


문을 열고 산책에 나선 순간.


"안녕 맹우."


니토리가 찾아왔다.